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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 또는 피투성이 존재들을 위하여 – 정재율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를 읽고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4-05-28
  • 조회수 409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만약 한 아이가 넘어져 무르팍이 깨졌다고 하자새빨개진 무릎에서는 피와 흙이 뒤섞이고통증이 밀려온다아이는 당연히 울음을 터뜨릴 테다이때 보호자는 아이에게 왜 우느냐는 질책은 하지 않되 과장된 반응을 보여서도 안 된다다만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고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상책이다.* 넘어지고 말았을 때 밀려오는 부끄러움다쳤을 때의 아픔과 두려움그리고 누군가 이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이의 몸속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너무 크게 부풀어 올라 흘러넘치거나 딱딱하게 굳어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게적지도 많지도 않은 반응으로 아이를 바라보아야 한다이러한 태도는 비단 아이를 돌볼 때만이 아니라 타인을 대할 때에도 필요하다타인이 지닌 고유한 감각을 함께 알아가려고 하되 너무 깊이 빠져들거나 겉돌지 않을 것우리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하기 위한 철칙일지도 모른다.

정재율 시인의 첫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는 넘어진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말하고자 한다민음사 시집 특유의 간결한 만듦새와 옅은 초록빛 포인트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산뜻하게하겠다는 시집의 첫인상은 마냥 밝아 보일지도 모르겠다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웃기만 하는 아이처럼아직은 어떤 바람도 맞아본 적 없는 유목처럼그러나 얇지 않은 두께의 시집을 모두 읽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다이 책은 겹겹의 나이테를 둘러싼 나무와 같다고세월과 세월을 조심스레 겹치며 몸집을 불려 온 것만 같다고그러한 감상으로 아슬아슬하게 쌓은 상처 사이를 거닐어 본다보통 나이테라는 단어를 제시하였을 때 사람들은 나무가 훈장처럼 견뎌온 시절을 떠올리고이는 자연스레 좋은 이미지로 이어진다그러나 정재율의 시가 껴입은 나이테는 상처와도 같다계절마다 다른 속도로이따금 느리게 어쩌면 빠르게 자라나며 세포들이 분열한 흔적마음에 새겨진 상처처럼 느껴진다우리가 살아오며 어딘가 터지는 소리부터 사람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가며 (물탱크넘어졌을 때 얻은 상처그리고 그 곁으로 살이 산뜻하게돋아나기 위해정재율의 시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몸과 마음을 산뜻하게에서 죽음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이는 죽음이 시적 화자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아이를 위해 과장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보호자의 마음처럼지금 화자가 있는 곳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도록 일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앞서 언급된 시이자 시집의 첫 시 물탱크에서는 도입부부터 누군가의 자살을 암시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자는데 사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속에서 나는 장례식장에 들러

상주와 대화를 나누고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땅바닥을 하도 쳐서

쿵쿵 울리는 소리에

몸이 살짝 떠오르기도 했는데

 

나는 그들의 손이 빨갛게 달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 손으로 악수를 나눈 것까지

 

다음 날 알고 보니 그 소리는 물탱크가 터지는 소리였다

그 안에 사람이 있는 줄 아무도 몰랐지만

 

-물탱크」 전문

 

 

사람들은 자꾸만 죽고통곡을 하듯 사람들이 땅바닥을 하도 쳐서’ ‘쿵쿵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그럼에도 시신이 발견되는무덤 같은 물탱크에 사람이 있는 줄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이야기한다현장 보존선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죽는’ 것에 대해 말한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나무를 본 적 있다뿌리를 훤히 드러낸 채라는 연으로 끝맺는 시는자신은 현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았으나 살아남지 못하여 들것에 실려 나가는’ 사람들, ‘무성 영화의 엑스트라처럼’ 한없이 가벼이 여겨지며 쉽게 교체되는 나무들의 서사를 다룬다이러한 시들 속에서도 화자는 심히 절망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죽은 사람더러 저 앞 사거리까지만 통화하며 같이 걷기로 하종합병원에서는 죽음이 가득찬 장소를 뒤로하고 오늘과 내일 먹을 죽을 사러나선다거나 아침 식사를 거르지 말자고 약속하며 전쟁은 묻어두고 앞뒤로 잼을 바른다. (최초의 잼화자와 그 세계의 사람들은 비단 죽음만이 아니라 서로를 비틀어 지은 죄’ 때문에 슬픔과 분노를 안고서 살아가기도 한다. (로즈메리죽지는 않아도 죽은 사람처럼 축축하게 호흡하며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욕실에서 자꾸만 운다. ‘손목을 찌르자’ 물이 흘러나온다는 대목이나 손목을 뚫고 자라난 잎과 여름에 숨겨 두었던 그늘등의 시어로 자해와 자학의 이미지까지 읽어낼 수 있다이토록 화자의아니 우리의 삶 곳곳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고통으로 숨죽여야 하는 순간들이 산재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 하이데거의 저서 존재와 시간을 파고들어 본다피투성(被投性), 피가 범벅이 된 피-투성이가 아닌 한자 그대로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하이데거가 제시한 표현이자 개념이 눈에 띈다피투성은 그곳에-있는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고 가는 성질이다생물학적인 이유는 물론 존재하겠으나우리 인류는 정말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기에 의지를 가진 채 세계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자의와 관계 없이 던져진’ 것이다그리고 우리는 때론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어렵다는 결론’(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부표)에 도달해 그냥 살아가기로 한다시집 속 초판본 시집에서 화자에게 친한 선생님이 선택당한 거 아니에요별 수 없죠 계속 쓸 수 밖에 없겠다고’ 말한 것처럼그러한 와중에도 피투성은 기분 중에서도 불안을 통해 자각된다특정 대상에 대해 느끼는 공포가 아닌 막연한 불안이다이를테면 친한 선생님에게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묻는 것과 같다생의 순간 하나하나에 의미를 찾아가고이 과정에서 불안을 얻으며 자신이 세상에 내던져졌으며 던져진 세계로부터 도망갈 수 없음. ‘피투성을 자각하게 된다우리는 죽음에 대한 불안 앞에서 피투성에 대하여 더욱 강하게 자각할 수 있다그렇다면 이렇게 내던져진깨어진 무르팍의 피투성이 피투성 존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시는 우리에게 명확한 답을 속삭이지 않는다그러나 자신화자이자 어쩌면 시인이 쥐고 있던 길을 보여준다손바닥을 펼쳐 내가 이러한 길을 지녀 왔음을 시적 언어로서 나타낸다표제작이자 시집의 두드러지는 산뜻하게라는 표현은 사실 바디워시에 적힌 표현에 불과하며화자는 멍도 씻겨 내려간다면 하루에 열두 번도 씻을 텐데’ 생각하는 사람이다그럼에도 시집의 곳곳에서 화자는 죽지 않고 살 순 없을까’(미약한 세계고민한다애정이 담긴 대상인 언니의 발톱을 잘라 주고 피가 나는데도’‘성실하게 서로의 앞머리를 잘라 주며 단정하게 내일로 나아가길 바란다화자는 비록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지만 성실하게’ 그리고 산뜻하게’ 살아가려고 한다그 이유는 시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마음과 사랑이라는 시어로 짐작할 수 있다어떤 향은 너무 강렬해서 오래 기억에 남게 되는데의 경우를 살피면 어떤 것은 줘도 줘도 모자라다며 냄비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들을 함께하고자 다짐하고롤러코스터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에서는 장미를 보려고 여기까지 온 그를 위해’ 발을 맞추고 카메라를 켜는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다특히 정재율 시인이 현대문학에서 등단하며 1번으로 발표한 시축일을 보면 아직 나누지 못한 사랑이 많이 남아 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옷장 안에서

그러니까 그때

 

한참 동안 나가질 못해서

나 자산이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옷장 안의 일은 아무도 모르니까

나는 숨 쉬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벽에

혀가 닿았다

 

우리 집 개는 내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데

겨울 내내 쓴 일기장도 다 숨기지 못했는데

 

친구들아 내가 만약 죽으면 너희에게 내 만화책을 몽땅 나눠 줄게 그러니 싸우지 마

 

그런 건 경험해보지 못하고 죽겠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나는 옷걸이 대신 빗장뼈를 가지고 놀았다

 

걸 수 있는 건 다 걸자

 

다행히 바지는 입은 채로

체면 같은 게 있으니까

 

어두운 천장을 보는 일도 하나의 슬픔이라서

혀에서 니스 맛이 났다

오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 상처가 나면 덜 아프대

그러려면 옷장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셔츠에서 셔츠로 코트에서 코트로

 

나는 보조개가 두 개라서

사랑을 두 배로 받은 아이인데

 

일곱 살 때 생긴 흉터를 아홉 살 때 생긴 거라고

부모님이 우겼다

 

우리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니?

그래도 밥은 잘 먹잖아요

 

추문도 없이

 

언제 들어간 것인지 모를

그러니까 그때

 

부활절인지도 모르고

옷장 깊은 곳에서 새 양말을 발견했다

 

-축일」 전문

 

 

옷장에서 나가지 못했다는 도입부부터 그 옷장에서 죽음을 생각하거나 그런 건 경험해보지 못하고 죽겠지만 그때를 떠올리는 화자를 보면아무래도 이 옷장 속에 숨어야 하는 존재로 세상에 던져진 것만 같다클로짓(Closeted)은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성소수자들을 일컫는 은유적 표현이다이미 정재율의 등단 이전부터 몇몇 시인들이 옷장을 시 속에 등장시켜 성소수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으므로, ‘옷걸이 대신 빗장뼈를 가지고’ 노는 화자는 섣불리 자신에 대해 털어놓을 수 없어 마음이 들어 있는 옷장 속에서 심장을 감싼 채 있는 것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그래도 밥은 잘 먹잖아요’ 대답할 만큼 씩씩하고 당돌한 화자지만성소수자로서 부모님과 때로는 마찰을 빚고 추문을 받기도 할 테다이 시를 읽고 언니가 등장하는 미약한 세계와 꿈에서도라도 행복한 가정이고 싶었다고 진술하는 최후의 빛을 다시 읽으면역시 화자는 소수자로 내던져져 숨겨야 했던 사랑도 많고 앞으로 나누고 싶은 사랑도 많은 듯 보인다.

앞서 말했듯 시는덩달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기에 더욱 큰 울림을 주는 정재율의 시는 아주 확고한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는다그러나 세상에 내던져져 피투성이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실패해도 다시 새 삶을 살 수 있다고 (사랑만 남은 사랑 시) ‘모두가 한꺼번에 슬픔을 나누면 그건 그거대로 슬프지 않다고 (축복받은 집토닥인다넘어져 우는 아이에게 혼을 내거나 과한 걱정을 하지 않고 아이의 아픔에 공감하며 울음을 그치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세상은 왜 아직도 망하지 않았을까와 같이 공감이 가는 언어와 함께 서서히 밝아지는 사람과 내부에 대해 이야기한다. (감자보다 고구마를 좋아해피투성 존재들을 지나치거나 으스러질 정도로 안아주진 않지만자신의 상처이자 나이테를 조금씩 드러내며 타인을 산뜻하게’ 쓸어내리려는 정재율의 어조는 매미 소리와 빗소리와 망치 소리가 들리는 여름에서 탁월하게 드러난다.

 

 

한여름이 오기 전 시코쿠에 가고 싶어

 

앰뷸런스를 타고 가는 네가 나에게 말한다 그곳의 숲들은 모두 이어져 있대 마을 입구에 세워진 석상을 보고 알 수 있는 거지 사원으로 가는 길이 하나인 거야 나는 너에게 꼭 그러자고 대답한다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아서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다 그럴 거야 그런 말을 하며 긴 밤을 함께 걸었으니까 여름엔 어떤 곳을 가도 길이 다 이어져 있는 것 같다 너의 말대로 장마가 길어지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옥상에서 떨어져 길 한가운데에 빗물을 맞으며 한참 동안 누워있는 사람도 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다

 

눈을 감았다 떠도 매미가 창가에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구나 생각하게 된다 정말 끈질기게 붙어 있다 정말 끈질기게

 

네가 웃는다 내 손을 꼭 잡는다 너는 이미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알고 있다 그 옥상엔 대규모 정원이 들어설 예정이었는데 네가 사라진 자리엔 안전모를 쓴 인부가 어느새 바닥을 두드리고 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

 

매미 소리와 빗소리와 망치 소리가 들리는 여름

 

잠에서 깨어나 물 한잔을 마신다 창문을 열자 길게 숲길이 이어진다 비구름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소매를 반쯤 접은 인부들이 망치를 들고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사원에서 피우는 향냄새를 맡으면서

 

-매미 소리와 빗소리와 망치 소리가 들리는 여름」 전문

 

 

이 시는 가히 정재율 시의 진수가 드러난다고도 할 수 있다유려하게 여름이라는 시절을 그려내고 와 를 배치하여 적당한 깊이와 리듬으로 시적 서사를 전개시킨다아마도 피투성이가 된 는 앰뷸런스를 타고가고 시코쿠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가 말했듯 우리 모두 엉뚱하고도 진실된 바람이 하나씩 있을 테다화자는 급박한 상황에서 고백하듯 뱉어낸 의 마음에 무시하거나 울음 짓지 않고다만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한다진수가 압축된 것은 정확히 이 문장이다정재율의 시는 괜찮지 않은 과거에게미래에게그리고 현재에게 괜찮다고 말한다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주술 같은 언어나 상투적인 대답이 아니다진심으로 긴 밤을 함께 걸었으니까’ ‘다 그럴 거라며 괜찮아질 거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세상에 내던져진 우린 어떤 곳을 가도 길이 다 이어져 있는 것만 같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그럼에도 이 피투성을 붙잡고 살아가려 한다. ‘정말 끈질기게’ 말이다. ‘향냄새를 맡으며 죽음에 가까운 피투성이의 몸으로또는 피투성의 몸으로 전체가 흔들려도 살아간다그리고 매미 소리와 빗소리와 망치 소리가 들리는 여름에 뿌리를 내리고 잠에서 깨어나 물 한잔을 마시는 것으로 계절을 견뎌내며 자신에게 새로운 나이테를 새긴다.

 

 

어떤 리듬이 계속 떠오르는 것처럼

물속에서 분명 들었던 음악 같은데

물 밖으로 나왔을 땐

아무도 없다

내가 잘못 들었어

맞아 내가 잘못 들었지

쉽게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바디워시에는 "당신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라고 적혀 있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진다

언제 묻었는지 모를 자국과 함께

멍도 씻겨 내려간다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씻을 텐데

수증기로 가득하다

넘쳐흘러서 거울에 내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욕조에 갇혀

손끝이 쭈글쭈글해진 내가

물속에서도 문을 열 수 있다면

입안 구석구석을 깨끗이 헹굴 텐데

들어오는 거품을 맞으며

노래를 흥얼거릴 텐데

두 다리가 붙어 버렸다

 

생각하고

생각한 다음

 

물속에 얼굴을 넣어 본다

물방울들이 다 달라붙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 일부

 

 

화자가 마주한 바디워시의 문구처럼 우리는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하고 싶지만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세계에 내던져진 채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 묻었는지 모를 자국과 함께’ ‘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때로는 욕조에 갇혀’‘쭈글쭈글해지기도 한다그럼에도 정재율의 시적 화자들은 내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 조차 문을 열 수 있다면과 같이 미래를 생각한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상상을 한다. ‘생각하고 생각한 다음’ 오는 결론은 비관적이거나 낙관적이지 않다얼굴로 무수한 물방울을 만져보는 행위로만 이어진다계속해서 세계를 감각해나가겠다는 것이다비록 쉽게 인정하게’ 될 때가 있을지 언정, ‘아무도 없다는 현실에 쓰리고 붉은 마음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걸어가게 되어도 말이다넘어지고또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이들을 올곧게 바라보려고 한다조심스레 다가가 물속에 얼굴을 넣어 보듯 살피는 화자를 떠올려 보자그리고 그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모습도설령 그 넘어진 이가 자신이어도 자학하거나 자기연민에 휩싸이지 않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헹군 뒤 들어오는 거품을 맞으며 노래를 흥얼거릴’ 모습제법 굳고 아름답다.

거센 세계 속의 우리가 피투성 존재라는 인식은 이따금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휘몰아치는 죽음’, 전달할 수 없는 사랑’, 그 속에서 깊은 뿌리를 박고 피어나는 아픔과 그러한 감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 모두 우리를 힘들게 한다그때 정재율의 시를 찾는다말없이 곁으로 다가와 손 내밀어 주는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의 손금촘촘한 언어로 직조된 그 손금에 우리의 삶을 맞대어 볼 때마다 조금의 위안을 얻는다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일로 걸어가 보기로 한다전혀 산뜻하지 못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노래를 흥얼거리듯 시집 속의 시를 생각하면서.

 

 


-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울음도 약이 될 수 있다본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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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 2024-05-30
수중에서 기록하는, 사랑 그리고 슬픔의 일지 – 진은영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고 (퇴고)

어떤 기억 속의 마음들은 흘러가지 않고 고인다.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흘러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나는 이것이 무척 알맞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사실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정신없이, 빠르게, 휘몰아치며. 이런 기분들은 마치 우리가 급류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거나 고마워하는 그런 마음들. 그런 마음들은 우리의 골조이자 연료가 되어준다. 한 사람이 믿고 행동하며 내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단단한 뼈대이자 동시에 원동력이 되어주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급류, 휘청이다가 물처럼 지나가는 시간에 마음을 놓쳐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마음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내가 지닌 마음이 시간처럼 빠르게 흘러가지 않도록, 어린 나는 내가 무엇이든 적어두고 싶었다. 정신없이 지나가며 휙, 휙 바뀌는 기분과 감각들을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겨두고 싶었다. 그렇게 새겨둔 순간의 감각, 그리고 기분 위로 마음이 ‘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고인다’고 하면 흔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나는 오래도록 ‘남아 있는’, 떠나지 않는 그런 마음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떻게? 기왕이면 문학의 방법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는 바로 진은영 시인이 있었다. 초등학생일 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읽고 나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마음의 물성이니 고이고 흐르니 그런 사유는 할 수 없었지만,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슬픔과 사랑이라는, 흔하기도 하며 나와 친숙한 이 감정들을 어떻게 이리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지? 나 또한 그런 시인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겨울이었다. 그리고 많은 계절을, 진은영 시인의 시집을 꼭 쥔 채 건너왔다. 그 사이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힘든 일도 있었고,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내가 가장 굳게 먹은 그, 열셋 겨울의 결심, 시인이 되겠다는 굳은 마음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시인이라는 꿈을 안고서 뛰어든 험한 급류에 서 있을 때.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바로 진은영 시인의 신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시집으로!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집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몇 번이고 읽었고, 이는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시인의 시집 중에선 표지를 닮아 유연하게, 그리고 분홍빛으로 흘러가는 시집 『훔쳐 가는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그러나 그 『훔쳐 가는 노래』 못지않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시집이 바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다. 지금부터는 내가 왜 이토록 진은영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지, 또 이 시집을 읽고 그렇게 감명받았는지, 나의 마음들을 기록하려 한다. 다름 아닌 감상문, ‘문학의 방법으로.’ 나는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물 위를 떠도’는 (

  • 모모코
  • 2023-12-31
네 사랑의 연대기가 궁금해 - 장수양의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와 미츠키의 노래를 교차로 읽어내며

연말보다도 아름답게 다가오는 끝이 세상에 있을까. 연말이 이토록 사랑스럽고 반짝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늘 내가 사랑했던 이들을 떠올려 본다. 그 사랑이 과거형이 되었건 현재 진행형이 되었건, 어쩌면 사랑하고 싶다는 미래형이 되었건. 나는 사람들을 하나, 둘 생각해 보며 내가 걸어왔던 길을 더듬어본다. 나는 줄곧 아주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왔다고 믿어왔으나 나와 함께했던 이들을 떠올려 보면, 그 길은 결코 험하거나 나만이 걷는 길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절망이나 후회보다는 감사와 사랑을 채집하는 시기가 바로 연말일 테다. 나는 올해 열 통이 조금 넘는 편지를 썼고 스무 명이 있는 동아리에서 롤링 페이퍼를 하였고, 내게 문학만이 아니라 올곧은 생의 태도를 알려주신 선생님들께 엽서를 썼고. 사랑하는 Y에게 나의 사랑이 당신에게 어쩌면 짐이 될 걸 알아서 미안하다는 말 또한 했고. 그렇게 온갖 곳에 내가 받았던 마음을 다시 돌려주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저기 길을 걷고 있는, 내 앞의 아저씨도 올해 누군가를 열심히 사랑했을지 모른다. 방금 지나온 유치원 버스의 아이들은 또 누구에게서 사랑을 받았을까. 새삼스럽지만 우리는 각자가 꾸려내는 생의 주인공이자, 화자이며, 히어로와 히로인이다. 나는 그런 개인을 움직이는 힘이 분노나 질투보다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믿어왔던 사실이지만, 올해 내가 미워하는 아이가 1지망 대학을 떨어졌을 때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으나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기적과 같이 정시 최초 합격에 성공하자 눈물이 났던 것을 보면. 확실히 사랑이 결국 이기는 것 아닌가 싶었고. 우리는 모두 각자 그런 사랑을 마음에 지닌 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사랑, 사랑, 사랑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일 년의 마지막 페이지. 나는 이 시기에 유난히 장수양 시인의 시집과 싱어송라이터 미츠키의 노래를 반복해서 찾게 된다. 그들의 작품은 장수양 시인과 미츠키가 어떤 사랑을 해왔을지 궁금해질 정도로, 사랑스럽고 또 사랑에 대하여 자신의 목소리로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나는 영화와 시를 사랑하지만, 이 두 가지의 예술은 동시에 읽어낼 수 없다. 서안나 시인의 시를 읽으며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프레임을 겹쳐 보거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을 보며 백은선 시인의 시편을 떠올렸던 것처럼 이미 내가 한 번 씹어 넘겨서 소화한 적 있는 작품을 겹쳐 보는 일만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과 노래는 다르다. 두 가지의 예술은 동시에 재생할 수 있는데, 나는 그 두 가지의 예술 작품이 한데 어우러져 녹아내리는 순간을 정말이지 사랑한다. 그 녹아내린 작품들은 나의 마음속, 한층 더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어떠한 예술 작품을 더 오래도록 기억하고 마음에 품을 수 있다는 일이라니. 이토록 기쁠 수 없다. 사실 사랑 시를 쓰는 내가 늘 고민하는 지점이 ‘세상에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너무나도 많다’는 점일 정도로, 이미 멋진 사랑시와 사랑 노래는 넘쳐난다. 그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 모모코
  • 202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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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안녕하세요, 글틴은 참 오랜만이에요. 성인이 된 이후로 깔끔하게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 한 채로 이곳을 떠나려고 했는데요, 줄곧 제 글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며 망설이던 시간들이 있었고요. 그 외에도 글을 쓴다는 일에 여러 부담이나 고민을 많이 가졌던 것 같아요. 그러던 나날 속에서 생일이 지나기 전까지는 글을 남길 수 있다는 담당자님의 연락을 받았고요. 근래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시집에 대해 떠드는 글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작년 문장청소년문학상 작품집 작가 노트에 그렇게 적어 두었는데요. 저는 여름의 초입마다 고열을 앓고 몹시 아프며 그때마다 사랑했던 이들의 꿈을 꾼다고요. 이 댓글을 봐주실 분 중에 읽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ㅎㅎ 역시 오늘도 아팠어요. 무척 아팠는데, 그게 이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계기가 되었어요. 사실 어제까지는 이 글을 써두고 글티너 지인들에게만 보여줘야지 하는 마음이 강했는데, 어쩐지 홀린 듯 올려야겠다 생각하게 되었어요. 아 음 어쩐지 두서가 없는 댓글이네요. 그냥... 저의 십 대 끝자락을 쏟아부은 곳에 다시금 찾아오면서 몇 자라도 적어 두고 싶었어요. 정말 산뜻하게... 산뜻하게 떠날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해요 이제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4-05-28 22:17:01
    모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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