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노트
- 작성일 2023-11-03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627
젊음의 노트
박은실
계곡 건너에서 희뿌연 무언가가 계속 펄럭이고 있었다. 우이동 계곡 아니면 백운계곡이었을 게다. 친구 두서넛과 더위를 식히려 찾아간 곳이었다. 한여름 피서객을 맞이한 계곡은 여느 계곡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와 친구들은 아이스박스 통에서 꺼내 파는 막대 아이스크림을 사서 입에 물고는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 떼 같은 인파에 섞여 상류로 올라가던 중이었다. 계곡 폭이 그리 넓지 않은 탓에 맞은편에서 피서하는 사람들의 광경을 건네다 볼 수 있었다.
언뜻 보아도 쉰이 좀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아래는 무릎까지 오는 하얀 속바지 차림이었고 윗옷 또한 거의 속옷에 가까운 민소매 차림이었다. 머리는 짧은 파마였는데 땀이 흘러서였는지 손수건을 돌돌 말아 이마 위로 묶었다. 시원한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평상 위에서 아주머니는 그야말로 음악과 혼연일체가 된 상태였다. 둥근 해가 하늘 한가운데 떠 있는 벌건 대낮이었다. 상 위에는 먹다 남은 음식들이 식어 쌓여 있었고, 막걸리 병 몇 개가 바닥에 쓰러져 널브러져 있었다. 확성기를 틀어 놓은 듯한 카세트 라디오 스피커에서는 계곡을 들썩거리며 노래가 쩌렁쩌렁 퍼져 올랐다.
노랫소리에 맞춰 발을 구르고 엉덩이를 양쪽으로 격하게 흔들고 양팔을 하늘 높이 찔러대며 아주머니는 온몸을 연신 흔들어댔다. 흔들 때마다 타이어처럼 띠룽띠룽한 옆구리 살이 파도치듯 출렁거렸다. 아주머니는 마치 정지가 안 되게 고장 난 태엽 인형 같았다. 일행인 듯한 또 다른 여자들도 거의 같은 옷차림으로 춤사위에 맞춰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때 카세트에서 나오던 노래는 강변가요제 대상 곡인 「젊음의 노트」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외국물이 잔뜩 묻은 듯한 이국적 외모로 노래를 부르던 여대생 가수는 아주 다부져 보였다. 가수는 ‘내 젊음의 빈 노트에’ 부분에 유독 강한 악센트를 주었다.
아주머니 모습을 보면서 내 엄마가 아니라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여가수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찬 여가수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안개 속을 걸어봐도 채워지지 않는 나의 빈 가슴.’이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이 곡은 젊은 날의 고민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고 조금은 철학적으로도 들렸다. 계곡을 한참 올라가서까지도 다부진 여대생의 목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우리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아, 술이 그 아주머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아니면 젊은 시절 이루지 못한 꿈이 그녀를 막무가내로 흔들게 했을까. 그도 아니면 여자가 나이 쉰 살을 넘기면 세상 무서운 것이 없어져 누구라도 그렇게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던 그때 나는 여가수 나이와 엇비슷한 스물세 살이었다.
쏜 화살같이 날아간 시간은 나를 무서운 것 없는 나이 쉰을 훌쩍 넘긴 아줌마로 만들어 놓았다. 귀밑머리 새치가 성가셔진다는 친구와 도봉산을 찾았다. 막바지 장맛비로 불어난 계곡물이 등산 내내 청량한 소리로 귀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초록이 지천이라 네모난 회색 건물에 지쳤던 내 눈도 오랜만에 호사를 누렸다. 올라갈 때는 몰랐던 계곡 음식점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웅얼웅얼 들렸다. 엉성한 가름막 가까이 빠끔히 눈을 가져가 보니 머리가 허연 백발노인들이 평상 서너 개에 나뉘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몇몇 할머니들은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기도 하고 꽃 모자를 살포시 머리 위에 얹어 쓰기도 하며 각자에 걸맞게 멋을 부렸다. 거기에 질세라 할아버지들은 남색 바탕에 노란 줄무늬로 포인트를 준 티셔츠를 입거나 화끈한 오렌지색 남방을 입어 분위기를 맞췄다. 그런데도 감추려야 감춰지지 않는 얼굴의 주름을 보아하니 어림잡아 일흔은 넘어 보였다. 서로 나누는 말투나 거리낌 없는 행동을 보아하니 아마도 초등학교 동창 모임인 것 같았다. 이런저런 유행가 두어 곡이 계곡물을 따라 흘러오고 흘러갔다. 잠시 후 흥에 젖은 젓가락 장단에 맞춰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젊음의 노트」그 노래였다. 젓가락 장단은 그럴싸했으나 어르신들의 느릿한 목소리는 흥을 따라잡지 못했다. 30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여가수의 당찬 목소리는 저만큼 힘차게 달려가고 있는데 어르신들의 목소리는 직직 늘어난 카세트테이프처럼 뒤처지고 있었다. 일흔을 넘긴 노인들이 박자를 무시하고 부르는 이 노래가 그때와는 좀 다르게 다가왔다. 진정성과 애달픔에 슬픔까지 있어 보인다고나 할까. 어르신들의 노트에는 못다 한 청춘의 사랑을 비롯해 말로 다 하지 못한 삶의 질곡들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7080 주점 앞에서 흔들어대는 바람 넣은 광고물처럼 막춤을 추던 그 아주머니 나이 언저리에 내가 서 있다. 산에서 내려오던 친구가 물었다.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라면 가겠느냐고.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젊음이 제아무리 좋기로서니 안개 속같이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무턱대고 달려가는 것을 또다시 하고 싶진 않았다. 새삼 내 젊음의 노트를 열어보니 이렇다 하게 써 놓은 것도 그려놓은 것도 없다. 굳이 써넣으라고 한다면 딸 하나 아들 하나 남편 하나. 딸아이가 절대로 알 리 없는 어느 계곡을 찾아가 입은 듯 벗은 듯한 옷차림으로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그 노래에 맞춰 나도 몸을 마구 흔들어볼까. 아니면 칠순 노인들 평상에 앉아서 젓가락 장단이라도 같이 하며 어르신의 노트를 슬쩍 훔쳐나 볼까. 그렇게라도 해야 별것도 없는 내 빈 노트에 대한 억울함이 반분이라도 풀리려나.
계곡을 내려오는 동안 내 노트의 하얀 지면이 떠오르고 유독 악센트를 넣어 부르던 ‘내 젊음의 빈 노트엔 무엇을 채워야 하나’라는 마지막 노랫말이, 되돌이표 모드로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처럼 계속해서 나를 질질 따라붙고 있었다.
추천 콘텐츠
스케치하는 시간 류미월 권태는 새로움을 갈구한다. 그렇고 그런 날이 계속될 때 훌쩍 집을 떠나 낯선 여행지를 걷다 보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여유가 생긴다. 지루한 ‘코로나 19’ 마스크 시대와 어제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갈 무렵 문뜩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림 그리기가 생각났다. 유화나 수채화보다는 기초를 다지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연필 스케치를 시작했다. 사각사각 슥슥 연필심이 도화지를 채워나가는 소리가 좋다. 사진보다 섬세할 정도로 잘 그리는 중급반 동호인들을 볼 때면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가로, 세로줄 긋기를 통해 감각을 익히고 H, 2H, 3H ... 6H, B, 2B, 3B ... 6B 연필을 사용해서 명암을 조절한다. 원기둥 그리기와 머그컵 그리기까지 끝내고 나니 슬슬 재미가 붙으며 오그라들었던 어깨가 펴진다. 시간이 날 때면 주방과 거실에 있는 사물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기본 스케치를 한다. 길을 가다가 야생화를 보면 정성 들여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하나씩 불러내서 스케치북에 그려본다. 나 스스로 ‘자뻑’하며 만족하는 그림이 나왔을 때의 기쁨은 글 쓰는 맛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오늘은 머그컵과 친해지는 날이다. 머그컵을 좌우대칭 정확히 파악한 후 비율에 맞게 스케치하고 짙은 색에서 중간색, 흐린 색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스케치를 채워나간다. 가로세로 명암을 넣으며 마지막 완성에 다다를 때는 숨소리도 죽여가며 몰입하게 된다. 머릿속을 하얗게 도화지처럼 비우고 오로지 스케치하는 사물만 생각하며 그린다. 하늘에 뜬 흰 구름처럼 평화로운 마음 상태에서 집중 몰입할 때의 순간이 좋다. 신문이나 책을 보다가 살림을 하다가 여유가 날 때 차 한잔하며 사각의 백지를 마주하는 순간은 한여름에 순백의 눈 위를 걷는 것처럼 청량하고 순수해지고 차분해지는 나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첫사랑을 떠올릴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그림을 잘 그려보겠다는 욕심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운 부분은 더욱 진하게 하나의 빈틈이라도 있을까 봐 여백을 꽉꽉 채우게 된다. 기초 작업인 구성이 잘못됐을 때는 미련 없이 싹 지우고 다시 그려야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내가 그린 게 최고인 것 같고 틀림없어 보여서 한번 그린 건 쉽게 지우지 않게 된다. 안쪽부터 채워나가다 보면 기본 구성이 잘못되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연필로 밀도 있게 채워나가는 것보다 잘못 그린 부분을 지우개로 제대로 지우는 것이 최고의 소묘라는 걸 스케치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어디 스케치 뿐이랴. 우리의 삶도 자꾸 비워야 새것을 받아들이고 머릿속도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면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버려야 새것을 받아들일 공간이 커지는 법 아니던가. 스케치하는 시간은 힐링과 치유의 시간이 된다. 기분이 불쾌하고 속상하고 슬펐던 감정이 스케치하는 동안 상처가 아물 듯 기분이 좋아진다. 급하고 덜렁거리는 조급함이 산사(山寺)에서 참선을 하듯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스케치하면서 그림을 완성
- 관리자
- 2023-11-15
눈 오는 날의 기호 류미월 간밤에 바른 자세로 잠을 못 자고 뒤척인 탓인지 아침에 눈을 뜨자 등 쪽이 불편하다. 이럴 때면 인근에 있는 의료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건강 카페에 가곤 한다. 따뜻한 자리에 누워서 척추 라인을 온열로 집중 관리받고 나면 통증이 줄어들고 온몸이 개운해진다. 체험 비용은 차 한 잔을 주문하면 된다. 체험을 마치고 넓은 창가 탁자에서 차 한잔하는데 정월의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달리는 자동차 위에도 애완견을 데리고 가는 여인의 어깨 위에도 꿈꾸는 푸드트럭 위에도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가 갓 구운 고소한 빵 내음을 흩뿌리고, 한쪽 하늘에선 깃털 같은 함박눈이 춤추듯 내려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비릿한 슬픔을 뿌리고 간다. 어느 정도 함박눈이 퍼붓고 난 하늘이 맑아졌다. 하늘도 먹먹한 제 무게를 감당 못 할 때는 펑펑 소리 내 울듯 함박눈이 되어 내리는가 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는데 묵은지 같은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친구도 눈 오는 날 친구가 그리웠나 보다. 느닷없이 먼 옛날 함박눈이 내리던 날 퇴근 후 명동거리를 빙빙 배회하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20대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친구와 명동 골목 식당에서 낙지 덮밥을 먹으며 사는 게 매운 건지 음식에 고춧가루 때문인지 눈물 반 콧물 반을 흘리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고달픈 삶을 서로 토닥이며. LP 판을 틀어주는 음악다방 구석진 자리에서 신청 곡을 메모지에 적어 DJ 박스에 건네곤 그 곡이 나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감격하며 듣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추억에 빠졌다가 의료기 체험 카페 문을 밀고 나서려는 순간 손을 힐끗 봤다. 거칠고 주름진 손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거리를 걸었다. 눈은 먼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오다 사선으로 흩날리다 소리 없이 내린다. 가로수와 고층 빌딩과 벤치와 로드킬 당한 생쥐 몸 위에 소복소복 말없이 이불을 덮어주듯 내린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웠던 사람의 얼굴도 불현듯 스쳐 간다. 눈은 묘한 마력이 있다. 눈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멍하게 ‘눈 멍’을 때리고 정지된 화면처럼 있으면 머리를 옥죄던 근심 걱정이 지우개로 쓱쓱 지운 듯 잠시 사라진다. 요즘 들어 집안 살림살이에서도 잘 안 쓰는 그릇이나 옷과 책 그리고 자잘한 살림살이를 큰맘 먹고 버리고 있다. 버리고 나니 공간이 넓어지고 마음마저 뻥 뚫린 듯 시원해진다. 주방을 드나들 때면 그릇장에 남겨진 그릇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집은 좁다고 투덜대며 넓혀갈 생각만 할 일이 아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처분하고 나서 집이 몇 평은 넓어진 느낌이다. 중년에 접어든 삶은 무조건 더하기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때로는 빼기를 잘해야 편안한 삶이 된다는 걸 공감하고 있다. 되지 않을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에너지가 방전되고 화가 깊어져서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된다. 요즘 들어 아니다 싶은 것들은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건이
- 관리자
- 2023-11-15
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 관리자
- 2023-11-10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