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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노래

  • 작성일 2023-10-25
  • 조회수 458

아버지의 노래

김임순


   어부는 항구의 남자였다. 저인망을 선두로 줄줄이 배를 몰고 항구로 귀환한다. 등대에 앉았던 갈매기가 날개 북을 치며 반갑게 마중을 나간다. 어부와 바닷새, 그들만큼 절친한 친구는 없다. 멸치 한 토막이면 요깃거리로 충분하다. 그걸 얻어먹으려고 욱시글득시글 떼창으로 끼룩댄다. 

   뱃전엔 흘림걸그물이 켜켜이 쌓여있다. 어부는 적막했던 지난밤의 고요와 노동의 대가를 고스란히 건져왔다. 짬짬이 됫병 술 마셔가며 작업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들에게 바다는 생활터전이었고, 육지는 하룻밤 머무는 여인숙에 불과했다. 검게 탄 얼굴은 바다 위에다 생의 푯대를 꽂고 살아온 증표였다. 그런 남편을 위해 뭍의 아낙은 소 뼈다귀를 넣고 해장국을 끓였다. 살아온 삶이, 살아갈 삶마저도 바다와 더불어 존재하고 있었다. 정화뒤축이 닳아질 때마다 가난을 한 꺼풀씩 벗겨냈는지 그건 알 수 없다. 

   나의 아버지도 항구의 남자였다. 당신의 등뼈에 조롱박처럼 매달렸던 자식들을 먹여 살리느라 전 생애를 바다에 걸었었다. 두레 밥상에 둘러앉은 까막까막한 눈망울을 볼 때면 짠물을 마셔도 단맛이 난다고 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여섯 남매를 두고 말했다. 그 마음의 심해(心海)는 역설이었다. 그때의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고서야‘노인과 바다’의 관계를 깨닫는다. 청새치와 사투를 벌였던 노인은 아버지였고, 비상을 꿈꾸는 갈매기 조나단은 바로 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우리 부녀(父女)는 바다 곁에서 살았다. 

   선창이 도떼기시장으로 변한다. 경매사의 목소리에 놀란 갈매기가 도망을 간다. 그물에 갇혔던 해수가 슬렁슬렁 빠지고 멸치만 남았다. 바다를 떠나 뭍에 오른 등 푸른 생선은 오늘이 생애 가장 눈부시게 반짝이는 날이다. 마지막 삶이 절절 끓는 가마솥의 해수(海水)란 걸 알 리 없다. 젊어서 파르스름했던 육신은 햇살에 하얗게 바래어 밥상 순례에 오를 것이다. 멸치를 먹고 자란 아이들은 언젠가 꿈을 향해 떠나는 조나단처럼 비상할 것이다.


   바닷바람에 멸치가 꾸덕꾸덕 말라간다. 테트라포드에 앉아 해녀들의 물질을 바라본다. 바다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여기 또 있었다. 허리에다 납덩이를 채우고 바닷속으로 첨벙첨벙 뛰어내렸다. 존재를 알리는 부표만 둥실 띄워놓고 숨바꼭질하듯 물속으로 사라졌다. 거꾸로 내리 꽂히며 하늘을 향해 수차례 발바닥 문신을 새긴다. 바다는 해녀를 수초 속에 숨긴 채 새침데기처럼 조용하다. 수경에 비친 바다 풍경은 어떠할까. 떼로 몰려다니는 용치 노래미는 화려하고, 바위틈에 숨은 문어는 위장술이 뛰어나 무시로 색깔을 바꾼다고 했다. 궁금해서 물어보면 상근해녀가 단풍 든 뒷동산처럼 아름답다고 했다. 그림 그리는 재주라도 가졌으면 도화지에 그리고 싶었다. 

   해녀들이 자묵자묵 물질을 한다. ‘호잇 호잇’ 숨비소리를 뱉으며 물오리 떼처럼 검은 머리를 내밀며 올라온다. 묘기 부리는 아쿠아리움 속의 돌고래처럼 날렵하다. 가쁘게 내뱉는 숨비소리의 절규가 휘파람새를 닮았다. 심장에 밴 동백꽃물을 뱉어내듯 붉디붉게 토해낸다. 해녀들을 내려준 선박은 낮달만큼 바다 위에 한가롭게 떠 있다. 선장은 해녀들이 돌아올 때까지 주낙을 하거나 낮잠을 즐기는지 기척이 없다. 촐싹대는 파도만 모자반 가닥을 바위에 척척 감아올린다. 

   해녀의 물질이 끝이 난 모양이다. 마지막 주자가 이물로 오른다. 망사리가 묵직하도록 해산물을 캐왔다. 무간지옥을 체험하고 온 결과물이 등대 아래 펼쳐진다. 상인들은 흥정하고 관광객은 신기한 듯 사진을 찍는다. 멍게, 해삼, 전복이 팔려나간다. 덤으로 얹어주는 바다 향이 저녁 밥상을 푸짐하게 차려줄 것이다. 저승에서 벌어 이승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게 해녀라는 직업이라고 한다. 심해가 저승이었다면 뭍은 이승이었다. 삶과 주검 사이를 헤매다 무사히 돌아왔다. 목숨을 담보로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키워낸 어머니의 생애는 위대했다.


   등대를 지나 선창을 한 바퀴 돌아 나온다. 햇살 받은 멸치 떼에 눈이 부신다. 선두(船頭)의 구령에 맞춰 어부가 그물을 털어낸다. 그 옛날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구성진 가락에 발길을 묶은 채 구경삼아 멀찌감치 나앉았다. 허공으로 흩날리는 멸치가 무릎 위에 툭툭 얹힌다.

   등이 휘어진 아버지가 그물을 턴다. 은빛 멸치도 털고 봄빛도 털어낸다. 멸치 떼가 주렴처럼 매달려 꼬리만 달랑댄다. 털어야만 올가미를 벗을 수 있는 멸치군단이 상수리 잎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마음속의 욕심도 저렇게 털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가난의 멍에를 짊어진 아버지 얼굴에 비늘 스티커가 사막의 모래처럼 달라붙는다. 수없이 붙어서 별이 되어 반짝거린다. 온통 생선 비늘로 짙게 화장을 하고서도 웃었다. 만선의 깃발을 꽂고 올 때는 더 그랬다. 그 시절이 아버지에겐 가장 빛났던 호시절이었을까. 배고픈 길고양이가 앙칼지게 울어댄다. 아버지를 기다렸던 어린 소녀처럼···.

   아버지가 남도 소리꾼 흉내를 내고 있다. 구성진 그 목소리를 누가 따라하랴. 사서오경은 읽지 못해도 바닷속은 훤히 알았다. 숨은 여를 에돌아 어디쯤 자리그물을 놓고, 수심에 따라 어류군단이 있다는 걸 눈감고도 알았다. 그렇게 인생을 거지반 바다에다 걸고 살았다. 바닷물에 찌들어 목에서 쇳소리 났다. 아버지가 선창(船廠)이 울리도록 노동요를 선창(先唱)하면 선원들이 구령에 맞춰 추임새를 넣었다.

   “내 딸 데려간 내 사위야/ 밥만은 굶기지 마소”

   큰댁의 장손은 나와 동갑내기였다. 그는 공부를 계속했고 나는 초등교육만 간신히 마칠 수 있었다. 큰댁의 머슴은 아버지였다. 나는 단지 그런 아버지를 두었을 뿐이었다. 양조장 가는 길은 섶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술 배달꾼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양은 도시락은 열기 싫었다. 고추장에 멸치 반찬은 보기 싫은 단골손님처럼 빠지지 않았다. 암탉이 헛간에서 낳은 달걀은 오일장으로 나가 쌀값이 되었다.

   체격이 왜소했던 아버지는 멸치의 대변자였다. 몸피는 작아도 우리 몸에 지지대 역할을 해주니 얕잡아 보지 말라고 했다. 젓갈로 담근 김치는 끼니때마다 밥상에 올라왔다. 대멸로 우려낸 육수는 자식들 혼사 때 마을 사람들에게 잔칫집 국수를 대접했다. 뿌리부터 뱃사람이었던 아버지는 정자관보다 얼굴을 감싸주는 개털 모자를 주로 썼다. 뼈대 있다는 어종은 잡았지만, 결코 뼈대 있는 가문은 만들지 못했다. 

   작은 오빠는 그까짓 학교쯤은 다니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니, 면목이 없어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자퇴한 오빠는 선수금으로 받은 돈을 가용비로 내놓고 배를 타러 갔다. 완행버스가 먼지를 날리며 사라질 때까지 아버지는 오래도록 신작로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양망하다 술기가 오르면 바다를 마주하고 꺼이꺼이 울었다.

   나의 아버지는 파도를 타던 곡예사였다. 바다라는 거대한 바둑판 위에서 어름사니처럼 넘실넘실 즐기며 한 많은 삶을 살다 갔다. 아버지에게 바다는 하룻밤 호접지몽(胡蝶之夢)이었을까. 선창(船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여전히 갈매기는 날고 어부들은 바다로 나갔다 돌아왔다. 어부와 소녀의 추억만 남긴 채 그 자리에 맴돌고 있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돌아서는 등 뒤에 아버지의 노동요가 거머리처럼 살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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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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