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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특파원 월이

  • 작성일 2023-03-24
  • 조회수 1,059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단편)]




달빛 특파원 월이

박나현

정월대보름 보름달이 떴을 때였다.

“모로야, 시원해?”

할머니 집 감나무에 오줌을 누고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어떤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흠칫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풀어진 목도리를 꽉 묶으며 툇마루로 걸어갔다.

“할머니 따라 안 갔어? 달집태우기 보러 말이야.”

“사람들 많은 곳은 싫어서.”

나는 무심코 대답해 버렸다. 앗, 집에는 아무도 없는데. 머리가 쭈뼛 서고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누, 누, 누구야?”

“여기야. 여기 아래.”

나는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월이가 있었다. 월이가 뒷발로 귀를 긁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뭐? 월, 월이 네가?”

“뭘 그리 놀라냐?”

내 입이 저절로 쩍 벌어졌다. 흰 바탕에 검은 무늬의 암컷 발바리인 월이. 열 살인 나와 나이가 같았다. 달만 뜨면 어우우, 노래하는 월이가 말까지 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그만 입 좀 다물고 내 목줄 좀 풀어 줄래. 아 답답해.”

“어, 뭐? 목줄? 어, 어.”

나는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멍한 채 월이의 목줄을 풀고 있었다. 월이는 뒷발로 목을 긁은 뒤, 배에 있는 검은 점박이 무늬에 앞발을 집어넣었다. 꼭 주머니 같았다. 그 속에서 월이 앞발에 딱 맞는 작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월이가 휴대전화 액정을 앞발로 꾹꾹 누르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난 달 소원 센터 특파원이야.”

“뭐? 뭐라고? 특파원?”

“달 소원 센터. 사람들 소원을 담당하는 곳이지. 달 보며 빈 소원들 말이야. 너도 빌었잖아. 저 달 보며.”

“달? 소원?”

나는 달을 올려다봤다. 달을 보며 빌었던 소원들이 생각났다. 내 소원은 새 게임기나 새 휴대전화를 갖게 해 달라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하나도 이뤄진 게 없었다.

“진짜야? 그런 곳이 있긴 있어? 근데 내 소원은 왜 빼먹냐?”

“그건 내 일이 아니야.”

나는 월이의 말이 의심스러웠다. 월이를 이쪽저쪽 자세히 살폈다. 혹시 외계인이 아닐까?

“소원 센터엔 소원 접수하는 곳, 간절함 크기 측정하고 실행하는 곳, 얼마나 많은 부서가 있는데. 내가 일하는 곳은 소원 분실 센터야.”

“소원 분실 센터라고?”

월이는 나와 휴대전화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정월대보름에 사람들이 소원을 너무 많이 빌어. 소원을 담는 달 주머니가 풍선처럼 부풀다 터질 지경이야. 그러다 한두 군데 구멍이 생겨. 그곳으로 소원들이 하나둘 떨어지는 거야.”

“뭐?”

달 주머니는 뭐고, 구멍은 또 뭐야? 머릿속에 물음표들이 돌아다녔다.

“소원들은 처음 소원을 빌었던 자리로 떨어져. 난 그걸 찾는 거고. 방금 소원 하나가 여기로 떨어졌어. 바로 너의 형 소원이지.”

“형, 형…… 소원?”

형이란 말에 머릿속에 떠다니던 물음표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마음속에 화살표들이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뾰족한 것이 내 마음을 콕콕 찌르고 있었으니까. 형, 형아.

식당 일로 바쁜 엄마 아빠를 대신해 형은 나를 돌봤다. 나보다 여덟 살이 많은 형. 형은 밥도 차려 주고, 옷도 입혀 주고, 나를 괴롭히는 친구들도 다 혼내 줬다. 잘 때도 형 옆에 꼭 붙어 잤다. 형은 내게 엄마이고 아빠였다. 그런 형이 사라졌다. 갑자기. 형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군가 가위로 형이 사라진 날만 싹둑 잘라 낸 것 같았다. 엄마 아빠도 형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내가 물어봐도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형이 사라지고 우리는 새집으로 이사 왔다. 전에 살던 집과 같이 지하에 있는 집이었다. 나는 종일 방에만 있었다. 동굴 같은 방 안에서 웅크린 채로 그렇게. 밤늦게 일을 마치고 집에 온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깜깜한 방 안에서 울기만 했다. 우리 집은 늘 어둠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 동굴. 나는 점점 더 동굴 깊숙이 들어갔다. 매일 한숨만 쉬던 엄마는 나를 할머니 집에 데려다줬다. 방학 동안 쉬면 괜찮아질 거라는 게 엄마의 생각이었다.

“지난 정월대보름에 너희 형이 이곳에서 빌었던 소원이야.”

월이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으며 말했다.

“나도 함께 찾을래.”

월이가 대답 대신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자, 그럼 처음 떨어진 자리를 찾아볼까?”

나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월이가 휴대전화를 하늘로 번쩍 올렸다가 다시 땅으로 내렸다.

“각도를 재 보니까 여기 감나무야. 네가 방금 오줌 싼 곳.”

할머니 집은 할머니가 태어나 자란 집이라 옛날 집이었다. 그래서 화장실은 마당에 있었다. 그것도 으스스한 외양간 옆에. 나는 밤에 가끔 감나무에서 급한 일을 봤다. 아주 가끔. 그런데 이렇게 딱 걸릴 줄이야. 나는 월이의 눈을 피한 채 감나무를 올려봤다. 바람이 불자, 감나무가 바짝 마른 줄기를 흔들었다.

“흠, 처음에는 감나무 가지에 걸렸다가 바람이 불어 여기로 떨어졌을 거야.”

그곳은 감나무 옆 장독대였다. 할머니가 늘 깨끗하게 닦던 장독대. 장독들이 달빛을 받아 더욱 반질거렸다.

“장독 사이사이를 한번 찾아봐. 그곳에 끼어 있을 수 있으니까.”

월이가 장독대 사이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근데, 어떻게 생긴 거야? 소원이라는 거?”

“반짝이는 빛 조각 같은 거야. 유리 조각같이 생겼는데. 자세히 보면 유리 안 빛들이 움직여.”

“아, 반짝이는 빛 조각.”

나는 장독 사이에 머리를 박고 빛 조각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만 비어 있는 장독을 엉덩이로 밀고 말았다. 장독이 뒤뚱거렸다. 째쨍, 장독 뚜껑이 바닥에 떨어져 두 동강이 나 버렸다.

“헤이요! 누누누눗 누구?”

그때, 랩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장독 깨져. 할미 마음도 깨져. 장독 깬 놈 누구?”

제일 큰 장독 안에서 귀신 할머니가 뚜껑을 열고 나왔다.

“으악!”

나는 기절할 뻔했다.

“칠성 할머니.”

월이가 앞발을 들고 콩콩 뛰며 말했다.

“월이, 월이 히릿.”

월이가 연신 꼬리를 흔들었다. 칠성 할머니는 뽀글뽀글 노란 머리에 래퍼 모자를 쓰고 있었다. 거기에 후드 티셔츠와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다. 그런데 저건 뭐지? 짚에 숯을 끼워 만든 목걸이가 웃겼다.

“에이요! 내 보물 장독, 깬 놈 바로 너?”

칠성 할머니가 나를 보며 랩을 했다. 나는 월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너에게서 풍기는 지린내. 뭔가 수상한 낌새. 넌 내 화단에 오줌 싼 모양새.”

월이가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저는 감나무에 쌌는데요.”

나는 개미 소리로 말했다. 래퍼 칠성 할머니가 나를 째려봤다. 그러고는 줄지어 선 장독을 두드리며 랩을 시작했다. 랩으로 야단맞기는 처음이었다.

“저건 맨드라미, 봉숭아, 저 풀은 방아, 마른 나무는 제피나무, 이 풀들이 바로 장독대 문지기. 쥐, 뱀, 벌레 막아 주는 좋은 풀들. 감나무에 싼 오줌이 이곳에도 튀어 오네. 예.”

그때 월이가 꼬리를 흔들며 끼어들었다.

“할머니, 모로 형 소원 찾고 있어요.”

휴, 다행이었다. 형이란 말에 칠성 할머니의 눈가가 붉어졌다.

“아이고, 어쩔꼬. 너희 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빌었지. 그래서 내 절친 삼신 할매한테 부탁해서 귀한 아기 점지했는데…….”

칠성 할머니는 붉어진 눈을 비벼 대며 말했다. 나도 눈물이 나려고 했다. 월이가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칠성 할머니, 급해요. 뭐 보신 거 없으세요?”

“그러고 보니, 쥐 한 마리가 요새 찍찍대면서 다니더라. 아까 보니까 뭘 물고 잽싸게 도망가더라고.”

“어디요?”

“수돗가 지나서 대문 옆 외양간 말이야.”

칠성 할머니 말에 우리는 외양간으로 뛰어갔다. 외양간은 어두웠다. 월이는 외양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옛날에는 소가족이 살았다는데, 지금은 창고로 쓰고 있는 외양간. 차가운 기운이 확 밀려와 몸이 떨렸다.

“안 들어와? 에이, 너 무서워서 그러는구나?”

월이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아, 아니거든!”

아닌 척하고 싶었는데, 말을 더듬고 말았다. 나는 숨을 크게 내쉬고 발을 뻗었다. 하지만 딱풀로 딱 붙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꺼이꺼이 흑흑.”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악! 내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흐으엉 꺼억.”

또 울음소리가 났다. 다 큰 아저씨가 아이처럼 우는 소리였다. 그날 아빠와 같은 소리였다. 아빠 생각을 하자 무서운 마음이 조금 사라졌다.

아빠는 혼자서 울었다. 모두 잠든 밤 식탁에서. 나는 아빠의 울음소리에 잠을 깬 적이 있었다. 방문을 열고 우는 아빠를 지켜봤다. 엄마를 달래던 아빠가 울 줄은 몰랐다. 어른이 울 때는 어떻게 달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살짝 열린 방문 앞에서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하지만 월이는 나와 달랐다.

“우마대신 아저씨, 또 우세요?”

월이가 어두운 외양간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깜깜한 외양간에서 긴 그림자가 움직였다. 점점 더 나에게 가까워지더니 내 발밑에서 멈춰 섰다. 그 순간 달빛 아래 거대한 모습이 드러났다.

“월이구나.”

아빠보다 훨씬 몸이 큰 아저씨가 눈물을 닦으며 서 있었다. 나팔꽃처럼 벌어진 청바지와 몸에 꽉 끼는 흰 셔츠를 입은 단발머리 아저씨였다. 아저씨가 움직일 때마다 셔츠 단추와 단추 사이로 뱃살이 보였다.

“아저씨, 수상한 쥐 보셨어요?”

“쥐? 글쎄다.”

우마대신 아저씨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근데, 저 아저씨 왜 우는 거야?”

나는 월이에게만 들리게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우마대신 아저씨가 뻘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놀라 뒷걸음질 쳤다.

“빨간 스카프를 잃어버렸어. 내게 좀 특별한 거야.”

우마대신 아저씨가 울먹였다.

“소를 키울 때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했어.”

“우마대신 아저씨는 소를 보호하는 신이야.”

월이가 나에게 귀띔했다.

“내가 잘나갈 때는 말이야. 새해 첫 소의 날에는 시루떡도 주고, 붉은 천을 소뿔에 감아 주기도 했지. 나는 그 붉은 천을 스카프처럼 목에 감고 다녔어. 다른 신들이 다 부러워했지.”

우마대신 아저씨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날 찾지 않아. 이제 난 쓸모없게 된 거야. 흐어엉.”

친구가 없어 울다니. 어른도 친구 때문에 슬픈 건 똑같나 보다. 가끔 나도 친구가 없어 슬플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형이 내 목을 휘감으며 장난쳐 줬었다.

“저기, 이거요.”

나는 목도리를 풀어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형이 내게 걸어 준 빨간 목도리였다. 지금은 나보다 우마대신 아저씨에게 더 필요한 것 같았다.

“이거 나 주는 거야?”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서 어째, 흐어엉. 아, 따뜻해. 꺼이꺼이.”

아저씨가 또 울었다. 외양간을 지날 때마다 으스스했는데, 덩치 큰 울보 아저씨가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나, 요즘 모내기 기계 운전 배우고 있거든.”

“우아. 정말 멋지겠는데요.”

월이가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응. 이제 농기계를 지키는 신이 될 거야. 허허.”

울보 우마대신 아저씨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참, 아까 수상한 쥐라고 했지? 그러고 보니, 뭔가 물고 가는 걸 본 것 같아.”

“그래요? 어디로 갔어요.”

우마대신 아저씨가 가리킨 곳은 화장실이었다.

마당 한쪽에 판자로 지은 화장실. 아빠 어릴 때는 똥통이 그대로 보이는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지금은 쪼그리고 앉는 변기로 바뀌었지만,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화장실 문이 바람 불면 덜컹거려서 더욱 그랬다. 화장실에만 가면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귀신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똑똑.’

월이는 앞발을 들어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불 꺼진 거 보면 아무도 없는데?”

“이렇게 해야 측신 언니가 장난치지 않아.”

월이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측신……이라고?”

할머니 집에 이렇게 많은 귀신이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긴 머리에 찢어진 눈, 입에는 피를 흘리고 있는 귀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를 두고 월이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까아악 까꺅!”

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내 심장이 튀어나올 듯 빠르게 뛰었다. 나는 쏜살같이 방으로 뛰어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몸이 달달 떨려 왔다. 쪼그리고 앉아 다리를 감싸 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뒤집어쓴 이불을 살며시 걷었다. 밖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제야 월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 앞에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큰 숨을 내쉰 뒤, 화장실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화장실 안은 조용했다.

‘월이, 월이를 구해야 해.’

다시 한번 용기를 내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아아악! 아아, 야! 좀 살살해.”

귀, 귀신이었다. 나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언니, 머리 언제 감았어?”

“그게, 혼자 감기가 힘들어. 이제.”

월이가 귀신 머리카락에 엉킨 채 화장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천장에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딱 붙어 있었다. 그 순간 월이가 뒤돌아 나를 쳐다봤다.

“모로야. 측신 언니야. 괜찮아.”

“뭐? 측, 측신 귀신, 아니 언니? 아니 누나?”

나는 몸이 굳어 버려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나 좀 도와줘. 측신 언니 머리카락에 엉켰어.”

월이는 머리카락에 엉켜 꼼짝하지 못했다.

“얘, 꼬마야 이것 좀 풀어 줄래?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천장에 매달린 측신 누나가 머리를 들며 말했다. 얼굴이 핏기가 없이 하얬지만, 피를 흘리거나 찢어진 눈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방으로 뛰어갔다. 할머니 방에서 연두색 큰 빗을 꺼냈다. 도끼 모양의 빗이었다. 나는 빗을 가지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아야, 살살 좀 해.”

천장에 매달린 측신 누나가 뾰족하게 말했다.

“……네.”

나는 도끼빗으로 머리카락을 살살 빗었다. 도끼빗은 빗살이 두껍고 사이가 많이 벌어져 빗기가 어렵지 않았다. 엉켰던 머리카락에서 월이가 빠져나왔다.

“언니 머리카락 좀 잘라.”

“뭔 소리래? 난 머리카락을 세면서 놀아. 여기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놀게 뭐 있니?”

천장에서 측신 언니가 내려왔다. 바닥까지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양쪽 귀로 넘기며 나를 쳐다봤다.

“너, 지난번에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할 때는 겁쟁이 같더니만.”

‘뭐야? 진짜 화장실 귀……신.’

하마터면 잡고 있던 도끼빗을 떨어뜨릴 뻔했다.

“하여튼 고맙다 얘. 근데 뭘 찾는다고?”

측신 누나는 월이를 보며 물었다.

“소원 조각을 물고 있는 쥐 봤어?”

“아. 그 쥐 알지.”

“진짜? 어디 있어?”

“지금 지나가는 쟤 아냐?”

측신 누나는 장독대로 뛰어가는 큰 회색 쥐를 가리켰다. 월이와 나는 쥐를 뒤쫓았다.

“예끼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그때 칠성 할머니가 장독을 움직였다. 장독이 움직이자 쥐가 멈춰 섰다.

“찍찍.”

코를 벌름거리던 회색 쥐가 장독 사이로 방향을 틀었다. 외양간 앞을 지나자, 우마대신 아저씨가 달려 나왔다. 포대 자루를 벌리며 몸을 던졌다.

“잡았다. 요놈.”

우마대신 아저씨가 포대 자루를 움켜쥐며 일어섰다. 그 순간 쥐가 포대 자루 밖으로 튕겨 나왔다.

월이가 뛰어갔지만 쥐는 대문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이제, 어쩌지?”

“찾을 방법이 있지.”

화장실 문에 기대 머리카락을 세고 있던 측신 누나가 끼어들었다.

“쥐가 물건을 숨기는 곳을 나는 알고 있는데.”

월이의 두 눈이 반짝였다.

“거기가 어디야?”

“공짜로?”

측신 누나는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며 월이를 쳐다봤다.

“알았어. 머리 감는 거 도와줄게.”

월이의 말에 측신 누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방앗간, 마을 공동 방앗간 알지?”

측신 누나가 알려 준 곳은 마을회관 옆 방앗간이었다. 가을철 한창 바쁠 때만 열어 두고 계속 닫아 두는 곳이었다. 월이와 나는 방앗간을 향해 달렸다.

깨갱깽깽 깽깨깨깨깽.

멀리서 사물놀이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서 쥐불놀이 불빛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마을회관 앞에는 나무와 짚으로 높게 쌓아 올린 달집이 있었다. 이제 곧 달집태우기가 시작될 것 같았다.

둥둥두둥 둥둥둥.

북 치는 소리가 빨라졌다.

깨갱깽깽 깽깨깨깨깽.

꽹과리가 더 요란하게 울렸다. 그 순간 달집에 불이 붙었다. 불기둥이 밤하늘로 치솟았다. 달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에 큰 징이 댕댕 울려 댔다. 점점 크게, 점점점 빠르게. 날카롭고 둔탁한 소리가 뒤엉켜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아갔다. 내 몸도 회오리처럼 함께 돌아갔다. 한참을 돌고 돌아 어딘가로 떨어졌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어딘가. 아득했다. 그 뒤는 꺼진 텔레비전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깨어난 곳은 병원이었다. 눈을 떴지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계속 졸음이 밀려왔다.


“모로야, 모로야.”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들게 들어 올렸다. 흐릿한 얼굴이 나에게 다가왔다. 점점 더 가까이. 흐릿한 얼굴이 선명해졌다. 형이다. 형이었다.

“편의점 빨리 갔다 올게. 잠깐 혼자 있을 수 있지?”

나는 잠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형과 함께 살던 집이었다. 아파트 지하 우리 집. 형이 편의점에 간 뒤 나는 다시 잠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숨이 막혔다. 이상한 냄새 때문이었다. 매캐한 냄새.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식탁이 타고 있었다. 식탁에는 다 먹은 라면 그릇들이 그대로 있었다. 지하 우리 집은 음식 냄새가 잘 빠지지 않았다. 형이 편의점 가기 전 라면 냄새를 없앤다며 흰 초에 불을 붙였다. 불붙은 초가 넘어져 식탁을 태워 없애고 있었다. 불길이 부엌 천장에 치솟았다. 나는 신발을 신을 새도 없이 밖으로 뛰어나왔다. 아파트 문 앞에는 입을 막고 선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다. 나는 계속 기침이 나왔다. 콜록콜록. 길바닥에 쓰러져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모로야! 모로야!”

형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아파트 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켁켁. 콜록. 형, 콜록.”

나는 기침이 나와 형을 부를 수 없었다. 형을 붙잡으러 일어섰지만, 머리가 어지러워 그대로 푹 쓰러졌다. 그렇게 형은 까만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형, 형아!”

나는 형을 부르며 잠에서 깼다.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나를 진찰한 뒤 돌아갔다. 할머니는 바로 엄마와 통화했다.

“달집태우기 불을 보고 기억이 다시 돌아왔다는구나. 몸은 괜찮아. 바로 퇴원해도 된대.”

나는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를 더 하고서야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월이 집부터 살폈다. 월이는 없고 풀어진 목줄만 덩그러니 있었다.

“좀 있으면 엄마가 올 거야. 방에 들어가서 좀 쉬렴.”

할머니는 엄마가 오면 이것저것 챙겨 준다며 자리를 비웠다. 나는 마루에 앉아 보름달을 바라봤다.

“월월월.”

그때 월이가 대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내 다리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모로야, 좀 괜찮아?

나는 아무 말 없이 월이를 바라봤다.

“형 소원 찾았어.”

월이가 얼룩무늬 주머니에서 빛 조각 하나를 꺼냈다. 빛 조각은 월이 앞발에서 빛나고 있었다.

“여기에 형의 소원이 들어 있어.”

월이가 보여 준 빛 조각은 무지개 조각 같았다. 유리 조각 속에 무지개색 빛들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근데, 이거 이제 필요 없을 것 같아.”

월이가 형의 빛 조각을 내 손 위에 올리며 말했다. 나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형 소원은 네가 씩씩한 동생이 되는 거였어.”

월이가 입을 살짝 벌려 혀를 내밀고 헉헉댔다. 마치 웃는 것 같았다.

“형 소원은 이미 이뤄진 것 같은데. 너 측신 언니 머리 빗겨 줄 때 알아봤잖아. 너 진짜 씩씩하더라.”

월이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내 코끝이 찡해졌다.

“다 이뤄진 소원을 센터로 가지고 가면 빛 조각이 부서져 없어져. 여기, 네게 있으면 괜찮지. 네가 가져. 형 소원 빛 조각.”

나는 내 손 위 빛 조각을 바라봤다. 무지개색 빛들이 한데 뭉쳐 이리저리 바삐 움직였다. 마치 춤을 추는 듯 보였다. 나는 빛 조각을 꼭 움켜쥐었다. 형이 내 손을 잡은 것처럼 따뜻했다.

그때 칠성 할머니의 랩 소리가 들렸다.

“너도 형처럼 귀해. 내 절친 삼신 할매 특별 부탁해. 특별 점지. 장독 위 정화수. 널 위한 기도 할머니 정성. 예.”

월이가 마당으로 내려가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워우워. 월월. 워우.”

월이가 노래를 부르자, 동네 개들이 따라 불렀다. 개들의 합창 같았다.

“보름달만 뜨면 시끄럽다니까. 그래도 뭐, 나쁘지는 않네.”

측신 누나가 화장실 문에 기대어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말했다. 칠성 할머니의 랩이 끝나자 우마대신 아저씨가 손뼉을 쳤다. 빨간 목도리가 잘 어울렸다. 할머니 집 마당 위로 환한 달빛이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작가소개 / 박나현

킥킥킥. 에헤헤. 까르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먹고 사는 동화 작가입니다. 오늘은 어떤 배부른 이야기를 써볼까 고민하며 학교 앞 문방구를 기웃거립니다. 재잘재잘 아이들 소리에 벌써 침이 고이네요. 쩝쩝. 호로록. 202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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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케이크 히섶 웅크려 식빵 굽는 고양이처럼 발 모으고 빵 굽는 흰토끼 기다란 초 두 개 꽂힌 생크림 케이크 다가가 후우- 불면 안 돼 깡충깡충 달아날 테니. 청개구리와 손잡기 지독스레 말 안 듣는 청개구리 같은 동생에게 누나가 말한다. 우리 놀이터 가서 소꿉놀이할까? - 아니, 운동장 가서 공놀이할 거야. 그럼 공놀이하고 그네 타자! - 아니, 공놀이하고 시소 탈 건데? 그래, 그네 타지 말고 시소 타자. - 아니, 나 시소 안 타고 그네 탈래. 좋아! 그럼 운동장까지 각자 뛰어갈까? - 아니, 나는 누나 손잡고 걸어갈 거야! 청개구리와 손잡은 누나가 웃는다. 제2의 로봇태권V 개발 본부 볼트 발견! 너트 발견!(땅콩 말고) 볼펜 스프링 발견! 짝지가 버린 머리핀 발견! 찌그러진 냄비 발견! 태워 먹은 국자 발견! 낡은 기타 줄 발견! 부러진 안경테 발견! 열쇠 발견! 알전구 발견! 버려진 수도꼭지 발견! 텔레비전 안테나 발견! 수많은 부품들을 발견! 발견! 발견! 이제 조립만 하면, 세상을 구할 수 있겠지? 낯선 동네 코스모스 가는 이파리가 팔을 간질이는 좁은 길 낯선 이가 낯선 동네로 들어선다 쌀농사 짓는 메뚜기들이 폴폴 뛰며 마중한다 맞은편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던 백발이 다 된 진돗개 한 마리 낯선 이를 보고 우뚝 멈춰 서는데 메뚜기들 황급히 논으로 달아나고 두꺼비 한 마리 길가로 나와 몸을 납작 엎드리는 걸 보고 낯선 이도 허리 숙여 인사한다. 혀가 쭉 나온 백구 어르신 왈, “왈 왈왈 왈왈!" 잠시 눈을 흘기더니 코를 켕 풀고 가던 길 가신다. 헝클어진 머리칼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헝클어진 머리를 보면 괜히 웃음이 나와 쓰다듬어 주고 싶지 아니, 정말은 더 마구 헝클고만 싶어 아마도 헝클어진 머리칼은 조금 더 헝클어져도 괜찮을 거야 머리칼 깊숙이 손을 넣어 마구 헝클여도 좋아할 거야 헝클어진 그대로 푸식 푸식 푸시시 웃고 말겠지 바보 같은 너의 헝클어진 머리칼은. 수다쟁이들 청각 장애를 가진 어른 넷이 모여 떠든다 수다 떠는 아이들보다 더 시끄럽게 떠든다 푸르락누르락하는 얼굴 들썩거리는 몸짓으로 이리저리 휘저어대는 손짓으로 떠든다 보기만 해도 왁자지껄 못 말리는 수다쟁이들이 소리 없이 떠든다 너무 시끄럽다. 얼음 차며 간다 집으로 가는 길 주먹만 한 얼음덩이 하나 골라 발로 차며 간다 집 앞까지 얼음을 몰고 가면 소원 하나 이루어지는 거다 단, 손을 쓰면 반칙! 발로 살살 차며 가는데 얼음은 잘도 미끄러진다 모서리가 깎이고 녹아 데구루루 잘도 굴러간다 얼음은 어느 집 마당으로 굴러가고 자동차 밑으로도 굴러간다 사나운 개집 앞으로도 굴러가고 얕은 웅덩이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어느 집 마당을 들락거리고 자동차 밑으로 기어들고 개가 한눈팔 사이를 기다리고 흙탕물 웅덩이로 뛰어들고 만다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저기 우리 집이 보이는데 톡, 톡, 톡, 툭-

  • 관리자
  • 2023-11-10
태몽 찾으러 왔어요

태몽 찾으러 왔어요 변선아 1. 태몽 때문이야 “4교시는 체육이니까, 수업 종 울리면 축구 골대 앞에 모여 있어요.” “네.” 3학년 1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운동장으로 나갔어요. 성운이는 힐끔 선생님을 봤지요. 성운이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이 활짝 웃었어요. 교실에 남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야호!’ 그제야 성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어요. 마음은 쌩하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갔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죠. 성운이는 소아 천식을 앓고 있어요. 절대로 뛰면 안 돼요. 엄마는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담임선생님께 전화해서 성운이가 뛰지 않도록 부탁해요. 운동장에서 하는 수업이 있을 때는 성운이 혼자 교실에 남아 책을 읽게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몸을 크게 움직이는 활동이 있는 수업에는 미리 선생님이 말했어요. “성운이는 교실에 남아 있을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도 좋아.” 이뿐인가요? 급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도 먹지 못해요. 천식에 좋지 않으니까요. 의사 선생님은 가끔씩 한두 번 먹는 건 괜찮다고 하지만, 엄마는 ‘절대 금지’라고 했어요. 어쨌든 지금, 선생님이 그냥 웃기만 했잖아요? 체육 수업에 참여해도 좋다는 말일 거예요. 그동안 교실에 혼자 남아서 책을 읽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오늘은 친구들하고 같이 운동할 거예요. 조심히 달리면 괜찮겠죠? 성운이에게 소원이 있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맘껏 뛰어보는 거예요. 쉬는 시간에 잡기 놀이도 하고 축구도 하고 싶어요. 수업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축구 골대 앞에 모였어요. 물론 성운이도 당당하게 서 있었죠. 곧 선생님이 와서 말했어요. “오늘은 축구를 할 거예요. 성운이는 벤치에 앉아 있을까?” “네? 저도 축구 할 건데요?” 성운이가 실망하며 말했어요. “안 돼. 성운이는 뛰면 안 되니까 친구들 수업하는 걸 지켜보자.” “휴.” 그럼 그렇지요. 성운이는 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벤치로 갔어요. “살살이 공성운, 넌 앉아서 공 차는 거나 구경해.” 민찬이가 성운이 뒤에 대고 소리치고는 혀를 쑥 내밀었어요. 성운이는 민찬이가 얄미웠지요. 민찬이는 2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어요. ‘살살이’란 별명도 민찬이가 지어준 거예요. 천식 때문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는 걸 놀리는 거죠. 민찬이와 아이들이 공을 굴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녀요. 그 모습을 보는 성운이 마음은 소금에 절인 배추 같아요. ‘나도 뛰고 싶다.’ 생각할수록 속상했어요. 왜 자기만 천식이 있어서 뛰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죠. 지루했던 체육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에요.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면서 밥을 많이 먹었어요. 벤치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성운이는

  • 관리자
  • 2023-11-10
「어떤 겨울밤」외 6편

어떤 겨울밤 김미혜 눈보라가 휘이잉 몰아치는 밤, 하얀 옷을 입은 눈 아이가 어깨에 소복 쌓인 눈을 털며 들어왔어. 가늘고 새하얀 손을 비비며 추워라, 추워라, 달달 떨었어. 이리 와 불을 쬐렴. 할아버지가 난로에 불을 켰어. 눈 아이 손이 흐물흐물 녹고 발목도 녹고 종아리도 녹았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아, 따스해라, 따스해라 입은 녹지 않았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오던 할아버지는 그만 얼어 버렸어. 쨍그랑 찻잔이 깨져 버렸어. 할아버지는 얼른 난롯불을 껐어. 웃을락 말락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족제비 일기 기름진 고기 냄새가 닭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요. 삼겹살 한 점이 끌어당겨요. 철커덕 철창문이 닫혀요. 오르락내리락 두리번두리번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힘이 풀려요. 잠잠해지기로 해요. 가만히 기다리면 비상구가 나타날 거예요. 어쩌나, 날이 밝아 오는데 아무 데도 뚫리지 않아요. 닭장 문이 열려요. 할아버지가 덫 안에 든 나를 안아요.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자동차에 태워요. 망할 놈의 족제비, 다시 잡히면 안 놔 준다, 욕하며 겁주며 구박하며 풀어 주러 간대요. 잡히기만 해 봐라, 닭이 죽어 나갈 때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잔뜩 벼르더니, 구불구불 강 건너 멀리 놓아 주러 간대요. 큼큼, 냄새를 맡아요. 메모를 해 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되거든요. 여우양말꽃이 피었습니다 여우 양말을 알록달록 걸어 놓았으니 여우가 오겠지요? 오늘 밤에는 분홍 양말 흰 양말 맘에 드는 양말 골라 신고 발소리 숨기고 신나게 놀다 가겠지요? 양말이 시들기 전에 오겠지요? 우리 집 꽃밭에는 여우양말꽃이 여러 켤레 활짝 피었답니다 민들레 걱정 민들레를 피하려다 개똥을 밟았다 “야, 개똥을 왜 밟아?” “그럼 민들레를 밟아요?” 시 선생님이랑 꽃 보러 가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개꿈 어둠 속에 툭 던져 놓고 쌔앵 달아나는 자동차를 쫓아가요 “멈춰요! 잊은 게 있어요!” 달려가던 자동차가 지쳐 헉헉거려요 이때다, 가속페달을 밟아요 두 발로 서서 앞을 가로막아요 창문 너머로 뺨을 핥으며 인사해요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꼬리를 흔들며 보내 줘요 “안녕!” 앗, 이건 꿈이야 깨면 안 돼 나는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자, 계속 자 번개처럼 꿈속으로 돌아가야 해요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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