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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는점 백도씨

  • 작성일 2023-03-17
  • 조회수 666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단편)]


끓는점 백도씨


김아정


사람들 정수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나는 그것을 끓는점이라고 부른다. 물이 끓을 때 증기로 변하면서 김이 나는 것과 같은 모양이기 때문이다. 정수리에서 김이 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아주 간혹 일어나곤 한다. 누군가의 머리 위로 김이 솟아오를 때면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지켜본다. 소풍을 가는 아이들, 산책 중인 강아지와 견주, 다정히 손을 잡고 걷는 연인, 커다란 헤드셋을 쓰고 어깨를 들썩이며 거리를 활보하는 아주머니, 핫도그 하나를 손에 쥐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앳된 군인 아저씨.

사람들의 끓는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로 추정된다. 유치원 때 내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사람들 머리 위로 저마다 분수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엄마의 기억 속 나는 아주 특이한 아이였다. 엄마가 드라마에서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단번에 알아맞혔고, 아빠가 휴일에 가장 좋아하는 일이 낮잠이라는 것을 엄마에게 일러바칠 줄 알았다. 무엇보다 이따금 엄마 아빠의 머리카락 속을 뒤적이며 하나도 안 젖었네? 하고 헛소리를 해 댔다. 아마도 그즈음 내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눈치챈 듯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 머리에 분수가 솟았어,라고 말하는 대신 너 이거 좋아해?라고 물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점점 친구 사귀기 도사가 되어 갔다. 아홉 살 때는 반 아이들 전부와 친해지는 것을 목표 삼았다. 반에서 가장 괴팍하기로 소문난 ‘감자 머리’가 마지막 복병이었다. 나는 그 애가 좋아할 만한 것을 유심히 살폈지만, 그 애의 정수리에서는 좀처럼 김이 솟지 않았다. 하루는 교실에서 여자애들이 요술 공주 만화에 대해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감자 머리가 그 근처에 앉아 머리 위로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감자 머리에게 너는 5인조 가운데 누굴 좋아하냐고 물었다. 녀석이 쭈뼛대다가 핑크를 가장 좋아한다고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래? 나는 오렌지가 좋던데. 감자 머리와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다. 알고 보니 감자 머리의 괴팍한 행동들은 모두 콘셉트였다. 사실 부끄럼 많고 그냥 만화와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최종 목표를 달성하고 나자 나는 허무해졌다. 나에게 호의적이었던 아이들이 하나둘 나를 떠났다. 너 왜 쟤랑 친해? 난 쟤 싫어. 마지막까지 나에게 하얀 김을 내보여 준 건 감자 머리뿐이었다. 1학기 때는 반에서 인기짱을 먹었는데 2학기 때는 모든 싸움의 근원이 되었다. 나는 인간관계에 대해 일찍이 회의감을 느꼈다. 모두와 친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새로 사귄 친구 스물두 명과 잃어버린 친구 스물한 명에 대해 고백했다. 엄마는 내 말을 잠자코 듣더니, 자신은 살아생전 사귄 친구가 열 명도 안 된다고 고백했다. 인기짱 시절을 뒤로하고 나는 나에게 알맞은 친구 사귀는 방법을 새롭게 터득해 나갔다. 여러 사람에게 설레발을 치는 아이는 걸렀다. 초면부터 너무 부담스럽게 김을 뿜어 대는 아이도 거절했다. 너무 들끓지도, 너무 미지근하지도 않은 아이와 그해 반 친구가 되었다. 물론 반 친구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1년이 지날 때마다 반이 새로 바뀌기 때문이다. 5학년 때 친구가 아무리 좋아도 결국은 새로 맞이한 6학년 반 친구와 같이 생활해야 한다.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나는 누구보다 빨리 반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새로 모이게 된 반에서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미 친한 애들끼리 모이는 것,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애들끼리 조심스레 눈치를 보는 것. 나는 언제나 후자인 애들과 친구를 사귀었다. 그편이 훨씬 간단하고 편했다. 나의 친구 사귀는 방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첫째, 얌전하고 착해 보이는 애를 물색한다. 둘째, 그 애를 관찰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알아낸다. 셋째, 그 애에게 다가가 나도 그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내가 정말 그것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애가 내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믿는 것, 그로 인해 나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것. 그것이 중요한 핵심이다.

먼저 나에게 다가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그 애들의 정수리를 확인하곤 했다.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지만 정수리에서 김이 나지 않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애들과 나는 적당히 거리를 뒀다. 간혹 나에게 진심을 보이는 아이하고만 친구가 됐다. 나는 반 친구 수를 세 명으로 제한을 두었다. 그러면 나를 포함해서 총 네 명이 되는데, 모둠 활동 때 자주 모이는 인원수였다. 네 명이 안정적인 게, 견학이나 수학여행을 갈 때 둘씩 나누기가 편했다. 버스에 앉을 때도, 놀이기구를 탈 때도, 강당에서 줄을 설 때도 편리했다. 한 명의 이탈자 없이 모두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터득해 나갔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나는 엄청난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압력밥솥의 증기 배출구에서 김이 솟구치듯 아이들의 증기 배출구가 하나씩 터지는 것이었다. 반장은 음악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밥솥이 터졌고, 오락부장은 말 한마디 나눈 적도 없으면서 반에서 가장 조용하던 민지와 마주칠 때마다 기관차처럼 뿌연 김을 쏟아 냈다.

누가 누굴 좋아하는지 내 눈에는 훤했다. 쟤가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친구들에게 살짝 귀띔을 해 주었을 뿐인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족집게 연애 박사가 되었다. 서로 마음 맞는 애들을 엮어 주거나 이룰 수 없는 짝사랑을 하는 친구에겐 포기를 권유하며 현실을 깨우쳐 주었다. 뭔가를 바라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샌가 나는 공짜 아이스크림에 공짜 떡볶이, 공짜 컵라면을 먹게 되었고, 공짜 피시방, 공짜 노래방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의 홈 파티 초대장은 물론 대리 주번, 대리 청소부 이용권까지 받을 정도였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용한 점쟁이로 명성을 떨쳤다. 우리 학교는 물론 근처 중학교까지 소문이 났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제대로 판을 깔았다. ‘끓는점’이라는 이름의 점집을 열고 ‘백도씨’라는 예명을 스스로 붙였다. 이른바 ‘끓는점 백도씨’. 나는 SNS를 통해 마케팅을 펼쳤다. 사방팔방에서 연락이 왔지만 지형중, 혜송중, 민월여중까지 선을 그었다. 또한 일주일에 한 명씩, 예약제를 통해 손님을 받았다. 중간, 기말고사는 휴무였다. 상담 문의가 들어오면 나는 손님을 내 단골 카페에 데려갔다. 내가 메뉴를 고르면 손님들이 눈치껏 계산을 해 줬다. 거금의 사례비를 주겠다는 애도 있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뭐든지 간에 돈이 엮이면 일이 꼬이기 마련이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최애 포토 카드나 새로 나온 편의점 간식을 선물로 받았다. 간혹 공부 잘하는 손님에게서는 수업 필기 노트를 빌려 받기도 했다.

손님들이 가져오는 고민은 보통 이렇게 시작한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할까?”

사랑 앞에 소심하고 걱정 많은 애들이 나를 찾아왔다. 이런 경우 나는 손님과 손님의 짝사랑 상대가 함께 모일 수 있는 자리를 주선했다. 가장 좋은 상황은 다 같이 모여 어울려 노는 것이었다. 나는 종종 손님들의 오랜 친구로 둔갑해, 모임 자리에 초대되곤 했다. 그곳에서 나는 손님의 짝사랑 상대가 손님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면밀하게 관찰했다. 모임을 이룰 여건이 안 되는 경우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는 일이라도 꾸몄다. 그때는 정말 가관이다. 짝사랑 상대가 다니는 학원 근처에서 손님과 둘이 잠복근무를 타다가 손님의 짝사랑 상대가 나타나면 그 앞을 유유히 지나가는 척 연기했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아이들이 만났을 때, 그 시너지는 엄청나다. 잘 지냈냐고 서로 인사만 나누었을 뿐인데도 옅게 피어나던 증기가 갑자기 펑 하고 터져 오른다. 이런 경우 결말이 매우 깔끔하다. 손님의 사랑도 채우고 나의 허기짐도 채운다.

하지만 서로 마음이 어긋나는 경우, 나는 손님의 슬픔을 달래 줘야 한다. 이건 몹시 질척이고 피곤한 작업이다. 나는 항시 깨끗한 손수건과 따뜻한 글귀가 적힌 여행용 티슈를 가방에 준비했다. 손님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손수건과 휴지를 건네주었다. 손님들은 여행용 티슈에 적힌 글귀를 보며 크게 공감하곤 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와 같은 뻔한 말일지라도 손님들은 저마다 시인이 되어 그럴듯한 해석을 하나씩 내놓곤 했다. 이렇듯 성심성의껏 서비스하다 보니, 끓는점 백도씨는 손님들의 재방문율도 무척 높았다.

감자 머리는 이번이 무려 세 번째 상담이다. 특이한 점은 세 의뢰에 대한 짝사랑 상대가 모두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상대가 솜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반가웠다. 솜이 나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보인 적이 있었기에 그녀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평판은 비호감이었으나, 솜이 나와 같은 반이며 심지어 나와 같은 방송반이라는 점이 이번 의뢰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나는 감자 머리의 고민을 쉽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솜과 나는 점심시간에 학생들의 사연을 읽어 주고 신청 곡을 틀어 주는 방송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받은 사연을 토대로 내가 그럴싸한 포장을 입혀 대본을 작성하면, 솜이 나의 대본을 가지고 더 그럴듯하게 연출된 목소리로 아이들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솜과 둘이 작업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꽤 친해질 법도 한데 둘 다 굳이 친구가 되려고 애쓰지 않았다. 각자 방송반 단짝 친구가 따로 있었고 전체적으로 서로 노는 무리가 달랐다.

첫 번째 상담 때, 감자 머리는 솜의 목소리에 꽂혀 있었다. 감자 머리에게 방송은 그저 솜의 연기일 뿐이라고 알려 줬지만, 그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감자 머리는 인사 한번 해 본 적 없는 솜에게 자꾸만 운명 타령을 해 댔다. 솜의 이야기를 하는 내내 감자 머리의 정수리에서 옅은 김이 올라왔다. 7년 지기 친구인 것을 생각해 사례비는 패스트푸드 햄버거로 때웠다. 나는 감자 머리를 위해 유려한 글솜씨를 발휘해 점심 방송 신청 사연을 적었다.

‘가만히 듣고 있어도 힘이 나는 목소리가 있어요. 우울할 때 듣고 있으면 어느샌가 목소리에 집중하느라 우울함을 잊게 됩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제가 듣고 싶은 말들을 주옥같이 골라 놓은 느낌이에요.’

선곡은 세련된 창법으로 요새 한창 인기인 싱어송라이터의 알려지지 않은 수록곡을 골라 주었다. 그러고는 솜과의 우연한 만남을 가장해 주었다. 방송반 앞에는 사연을 편지로 받는 우체통이 놓여 있었다. 솜이 편지를 수거하러 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나는 근처에서 잠복 중인 감자 머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감자 머리가 우체통에 편지를 넣다가 솜과 마주쳤다.

나는 방송반 문을 열고 복도를 슬쩍 내다봤다. 감자 머리는 삶은 감자가 되어 있었다. 솜이 편지 꾸러미와 더불어 감자 머리의 편지를 들고 방송반으로 돌아왔다. 솜은 감자 머리의 사연을 읽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 글솜씨가 부족했나, 하는 생각에 뭔가 마음이 상했다. 나는 도리질을 치며 감자 머리의 험악한 첫인상 때문이라고 생각을 고쳤다.

다음 날 나는 감자 머리를 위해 깨끗한 손수건과 여행용 티슈를 챙겼다. 나는 감자 머리가 풀이 죽어있으리라 예상했으나, 그는 오히려 솜에 대한 설렘 덕분에 활기가 넘쳤다. 그는 내게 두 번째 상담을 요청했다. 나는 솜에게 무거운 짐 나르는 일을 부탁했다. 지난번과 같은 수법으로,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감자 머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감자 머리에게는 솜의 짐을 들어 줄 때 지난번 사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라고 미리 지시했다. 감자 머리는 사연 이야기는커녕 자기소개도 제대로 못 했다. 물론 나의 예상 시나리오 대로였다. 나는 감자 머리에게 제대로 된 포기의 계기를 심어 주고 싶었다. 감자 머리는 끈질겼다. 내게 한 번 더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지금 밀려 있는 예약 손님이 많아서 안 된다고 했다. 감자 머리가 내게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 번호표를 달라고 했다.

나는 두 달 뒤에 감자 머리에게 연락했다. 보통 두 달 정도가 지나면 애정전선이 식기 마련이다. 감자 머리는 드디어 자기 차례냐며 뛸 듯이 기뻐했다. 감자 머리의 의뢰는 지난번과 달리 만남 주선이 아닌, 솜의 취미에 대한 물음이었다. 감자 머리가 이제야 사람 사귀는 방법을 터득했구나 싶어, 솔직히 조금 짠했다.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감자 머리가 사 준 소르베 아이스크림을 야금야금 퍼먹었다.

감자 머리의 의뢰를 받은 지 3일째. 마침 장마철과 겹쳐 내 몸과 마음은 꿉꿉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솜은 아직 한 번도 끓는점에 도달한 적이 없다. 반에서 애들이랑 어울려 놀 때도, 선생님에게 칭찬받을 때도, 방송반 일을 할 때도, 집에 갈 때도, 음악을 들을 때도, 점심을 먹을 때도, 무엇인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조차도 그랬다. 그녀는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나섰고 많은 사람과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내 눈에는 솜이 사실 그 무엇에도 감흥이 없다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솜을 관찰하는 동안 나는 미묘한 오싹함에 시달렸다. 쟨 대체 뭐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뭐 그런 건가?

나는 기억을 되짚었다. 솜에게 관심이 없던 터라 그녀가 무엇에 흥미를 보였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문득 잊고 있던 그녀에 대한 섬뜩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수학여행 둘째 날에 잠들기 전, 반 여자애들끼리 했던 진실게임이다. 학교에서 누가 제일 괜찮냐는 물음이었다. 모두가 한 번씩 돌아가며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저마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짓인 아이도 진실인 아이도 있었다. 나는 그때 무척 졸린지라 두 눈이 거의 감겨 있었다. 방 안이 연기가 자욱해서 눈앞이 더욱 몽롱했다.

러브스토리에 빠진 아이들의 요란한 추임새 사이로 솜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실눈을 뜨고 반 아이들의 모습을 살폈다. 솜을 둘러싼 아이들 모두가 설렘 가득한 김을 뭉글뭉글 피워 냈다. 솜의 머리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솜이 방송반 미공개 사연을 풀고 있는 건가 싶었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 보니 솜이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는 중이었다. 교회에서 만난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였다. “그런데 오빠가 미국으로 유학 가서 이제 못 만나.” 솜이 말을 마쳤다. 다들 안타까워하며 솜을 위로했다. 아이들의 훈훈한 기운이 솜을 감쌌다. 나는 미소를 짓고 있던 솜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솜의 미소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어는점을 본 것만 같았다. 그녀의 희고 창백한 피부는 매끄러워 보였지만 조금이라도 세게 내리치면 금방 깨져 버릴 얼음 표피 같았다.


*


솜이 다닌다는 교회 이름을 SNS에서 검색했다. 게시물 가운데 중고등부 캠프 사진을 유심히 살폈다. 마침 내가 전에 의뢰받았던 손님의 이름이 태그되어 있었다. 그 애도 솜처럼 교회 오빠를 좋아했는데, 내 덕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최근 부모님 몰래 서로 사귀는 중이었다. 나는 그 애에게 메시지로 최근 교회에서 미국으로 유학 간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그 애가 그런 사람 없다고 답했다. 그 애에게 솜에 관해 물으려다 말았다. 첫사랑 정도야 거짓말로 얼마든지 꾸며 낼 수 있다. 아니, 근데 얜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솜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려 할수록 그녀에 대한 의문이 증폭됐다.

감자 머리의 의뢰는 어느새 잊히고 그녀에 대한 의구심만이 가득 남았다. 진실과 거짓말의 차이점은 목적이 다르다는 데 있다. 진실은 진실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은폐, 모함, 허영 등 각각의 숨은 목적이 있다. 나는 솜이 하는 거짓말들의 목적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특유의 귀여운 말투, 즐거운 듯 대화에 참여하고 있으나 이따금 입을 다물면 무표정이 드러나는 순간의 모습, 점심시간마다 학교 전체에 울려 퍼지는 그녀의 가짜 목소리.

비구름으로 어두웠던 아침과 달리 오후의 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장마가 끝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비에 젖은 운동화처럼 꿉꿉했다. 종례 시간 내내 나는 솜의 뒤통수만 노려봤다. 담임이 곧 있을 학교 축제를 설명하는 것도, 반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의견을 내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솜이 짝꿍 진아와 소곤거리는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혜송중에서도 원정 공연 오겠다.” “대박, 은우가 노래하다가 막 고백하는 거 아냐?” 은우는 혜송중 밴드부 보컬로, 솜과 요 몇 주간 꾸준히 연락하는 남자애였다.

사건을 요약하면, 은우가 SNS에서 우연히 본 솜에게 반해, 친구인 진아에게 다리를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진아는 반에서 노는 무리에 속했기 때문에 범생이인 솜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솜과 친해지면서 근래 둘은 항상 붙어 다녔다. 둘은 점심시간 때 칠판에 ‘보컬 하트 소미, 드러머 하트 지나’라는 낙서를 적었다. 진아가 이번에는 드러머에게 꽂힌 모양이다. 진아는 남자친구가 자주 바뀌었다. 이 때문에 진아의 뒷담화하는 무리도 있었지만 나는 진아가 매번 증기 배출구를 터뜨리는 걸 보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애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억지로 만나?” 진아는 자신의 연애 지론을 당당하게 내세우곤 했다.

나는 두 커플이 함께 만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끓는점에 도달한 세 사람과 달리 솜은 어는점에 도착한다. 솜이 아나운서가 되어 은우에게 자신의 가짜 모습을 진짜처럼 소개한다. 은우는 솜에게 속는다. 둘은 다정한 말을 나누고 스킨십을 한다. 은우가 솜의 얼음 표피를 매만진다. 솜은 은우의 손길을 피하지 않는다. 솜은 은우의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은우에게 참 따뜻하다고 말한다. 솜의 얼굴에 짧게 경련이 일어난다. 솜의 얼음 표피 위로 금이 간다. 솜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제부턴가 솜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라고 말하는 대신 나 이거 좋아해, 하고 말할 줄 알게 되었다.

“너 근데 은우랑 언제 사귈 거? 나 빨리 더블 데이트 하고 싶은데.”

진아가 묻자 솜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작게 답했다.

“은우랑 아직 두 번밖에 못 만났어.”

“다음에 만나면 그냥 네가 확 고백해 버려. 나는 질질 끄는 거 완전 별로야.”

진아의 말에 아주 잠깐, 솜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포착했다. 솜은 이내 활짝 웃으며 “응, 생각해 볼게.”라고 또박또박 발음했다. 담임이 반장에게 종례 인사를 시켰다. 반장이 인사 구호를 외치자 애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담임이 교실을 나가자 아이들이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솜과 진아도 교실 뒤쪽에 달린 전신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한번 살피고는 교실을 나섰다.

보송하게 마른 운동화를 신지 못할 바에는 맨발로 축축하게 걸어가는 게 낫다. 꿉꿉한 운동화만큼 최악인 것은 없다. 나는 아껴 두었던 대리 청소부 이용권을 오락부장에게 내밀었다. 오락부장은 최근 민지와 친구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물론 다 내가 이어 준 덕이다. “민지랑 같이 집 가기로 했는데.” 오락부장이 툴툴거렸다. 내가 인상을 팍 쓰자 오락부장이 움찔했다.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오는데 오락부장이 나를 붙잡았다. 이용권을 내게 또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거 다시 받아. 대신 나 조만간 상담 한 번만 더 잡아 주라.” 솜 때문에 지금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어 새로 상담 예약을 받기가 부담스러웠다. 나는 오락부장의 이용권을 밀어냈다. “요새 나 슬럼프야. 당분간 휴업임.” 오락부장을 뒤로하고 나는 서둘러 솜의 뒤를 쫓았다.

솜과 진아가 팔짱을 낀 채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운동장에서 진아가 자신과 친한 무리를 발견하더니 솜에게 손을 흔들고는 무리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솜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화단 쪽 길로 걸어가고 있던 방송반 친구들에게로 다가갔다. 방송반 친구들 사이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졌다. 교문 앞에서 솜은 방송반 친구들과 헤어져 홀로 어디론가 향했다. 솜은 후문을 지나 아파트 골목으로 향했다. 그녀를 따라가며 내가 그녀를 뒤쫓을 만한 명분을 궁리했다. 은우라는 애를 본 적도 없었지만 일단 그 애를 좋아하는 걸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단지 가장 안쪽에 있는, 오래된 상가 건물로 들어갔다. 1층은 슈퍼마켓, 2층은 태권도장, 3층은 피아노 학원, 4층은 스크린 골프장이었다. 나는 솜이 어디로 갔을지 짐작했다. 승강기는 학원 아이들로 붐볐다. 나는 계단으로 향했다. 학원 안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솜은 보이지 않았다. 4층 스크린 골프장은 망했는지 닫힌 문 앞에 우편물이 잔뜩 쌓여 있었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먼지가 그득했다. 먼지 위로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솜이 옥상으로 올라갔다는 확신이 섰다. 나는 그녀에게 내뱉을 대사를 속으로 연습했다. 심호흡을 한 뒤 무대 위로 올라섰다.

솜은 옥상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잿빛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당황했지만 나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솜은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녀가 입을 다문 채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솜의 낯선 모습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나는 대사를 까먹고 말았다. 솜이 담배를 비벼 껐다. 솜의 발치에는 많은 꽁초가 버려져 있었다.

“너 내 스토커니?”

그녀의 날이 선 목소리에 뒤통수가 띵했다. 이게 솜의 본모습이구나. 나는 지지 않으려고 솜보다 고개를 더 빳빳이 쳐들었다. 그러고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 준비해 둔 대사를 던졌다. “너 김은우 좋아해?” 솜이 바닥에 가래를 뱉었다. 솜이 교복을 털면서 나를 흘끔 봤다.

“넌 걔 스타일 아니야.”

내가 걔 스타일이고 아니고는 중요한 게 아닌데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됐고, 은우한테 그만 찝쩍대.”

나는 턱을 치켜들었다. 나이스 타이밍, 적절한 대사, 깔끔한 연기 톤, 모두 흡족했다. 솜이 내 말을 들은 체도 않고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솜의 가방을 붙들었다. 솜이 인상을 구기며 뒤돌았다.

“야, 근데 너.”

“뭐?”

“너 김은우 안 좋아하잖아.”

내 말에 솜이 잠시 멈춰 섰다. 이윽고 솜이 내 손을 떨쳐 내고 앞으로 걸어갔다.

“진아랑 어울리고 싶어서 그러니?”

솜은 내 말은 들은 체도 않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좋아하는 척, 하냐니까?”

솜이 나를 쳐다봤다.

“왜 자꾸 좋아하는 척, 하냐고?”

여기까지가 내가 준비한 대사였다. 마무리로 솜에게 가식을 그만두라고 조언한 뒤 쿨하게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만 나도 모르게 입이 터졌다. 교회 오빠부터 시작해, 반에서 밝은 척, 명랑한 척, 가식 떠는 일들, 그러다가 이따금 드러나는 무표정에 대한 부분까지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댔다. 솜은 덤덤한 얼굴로 그저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나는 속에 꿉꿉하게 남아 있던 빗물을 모조리 쥐어짰다.

“불길해, 너.”

생각지 않은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 순간 솜이 얼어붙었다. 솜의 얼음 표피 위로 금이 갔다. 솜의 동그란 이마에 상처가 깊게 그어졌다. 나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솜과 나 사이에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솜이 내게 “어쩌라고?”라는 말을 툭, 내뱉더니 휙 돌아 옥상을 나갔다. 하지만 내 눈에는 시간에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솜의 행동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솜이 나에게 툭 뱉은 말은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는 무거운 고백으로 들렸고, 그녀가 급하게 뒤돌아 달아난 것은 자신의 망가진 얼굴을 감추려 한 것으로 보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솜을 상상했다. 솜이 내 말을 여러 번 되새긴다. 결국 자신의 불길함을 스스로 인정한다. 들이켠 숨이 얼음 조각이 되어 폐를 찌른다. 도로는 빙판처럼 미끄러워 자꾸만 발을 헛디딘다. 상처 난 자리조차 금세 얼어붙어 무감각해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솜이 되었다. 버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에 솜의 상처가 새겨졌다. 나는 가방에서 반창고를 꺼내 이마에 붙였다. 상처 난 자리가 쓰라렸다. 옥상에서의 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상처를 준 쪽은 나였는데, 그녀는 무덤덤했고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솜이 집에 도착했을지, 지금 무얼 하고 있을지, 저녁은 잘 챙겨 먹었을지, 하는 사소한 궁금증들이 머릿속을 빼곡히 채웠다. 내일 그녀에게 해 줄 말들을 줄줄이 지어내 보았다. 그 어떤 말들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정말로 내가 불길하니?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감던 중,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내게 물었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이 솜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명확하게는 점심시간마다 내가 지은 말들로 학교를 가득 채우던 솜의 아나운서 톤 목소리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얼굴에 거품이 흘러 눈가가 따끔거렸다.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나를 추궁했다. 나는 그녀에게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말실수일 뿐이라고 변명을 댔다. 퇴근한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을 때도, 목소리 탓에 부모님과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학교 수행평가 과제를 할 때도, 그녀가 나를 방해했다. 보고서를 쓰는데 도무지 진척이 없어, 결국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을 대충 베껴 채웠다. 이어폰을 꽂은 채 시끄러운 음악을 듣고 있어도 솜의 말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볼륨을 얼마나 크게 틀었는지 바로 뒤에서 엄마가 말을 거는데도 알아듣지 못했다.

“백도영!”

엄마가 내 어깨를 붙들었다. 나는 노래를 멈추고 엄마를 돌아봤다. 엄마가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가 내 이마를 가리켰다. 그냥 긁혔다고 둘러대는데 엄마가 나를 끌고 거실로 갔다. 엄마가 이마에 붙어 있던 반창고를 떼어 냈다. 나는 이마를 손으로 가렸다. 사실 내 이마는 매끈했다. 엄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일 있니?” 엄마가 다시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지 못했다. 내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언제부턴가 엄마도 알았는지, 간혹 이상한 일들이 벌어져도 엄마는 더 이상 나를 다그치지 않았다. 내가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소독해야지, 안 그럼 덧나.”

엄마가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그녀가 핀셋으로 일회용 알코올 솜을 집어 아무것도 없는 내 이마 위를 소독해 주었다. 엄마의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손끝과 발끝이 떨렸다. 나는 엄마의 옷깃을 꼭 붙들었다. 알코올 솜이 닿을 때마다 상처가 따끔거렸다. 엄마가 상자를 열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양이 무늬 반창고를 골랐다. 엄마가 내 이마 위에 새 반창고를 붙였다. 왜 다쳤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 옅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나는 붉어진 얼굴로 엄마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오늘은 좀 일찍 자.”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가려다가 나는 구급상자에서 반창고를 하나 더 챙겼다. 고민하다가 무늬가 없는 가장 무난한 반창고를 골랐다. 침대에 누워 이불 속을 뒤척이다가 정말로 자신이 불길하냐고 묻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녀의 불길함을 받아들이고 나자 나는 겨우 잠들 수 있었다.


*


솜은 내게 알은체하지 않았다. 교실에서 우리는 평소처럼 지냈다. 굳이 정면에서 맞닥뜨리지 않는 한, 서로 인사하지 않았으며 각자의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어쩌다 가끔 방송반 일이 있을 때만 용건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솜은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밝고 명랑했다. 아이들과의 수다 속에서 이따금 호들갑을 떨어 주기도 하며 즐겁게 잘 지냈다. 선생님이 낭독을 시키면 늘 그랬듯 아나운서 톤으로 또박또박 교과서를 읽었다.

나는 전에 본 적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태껏 솜이 이상한 아이로 보였다면 이제는 정반대였다. 누구도 솜의 상처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보였다. 더 정확하게, 아무도 솜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는 게 느껴졌다. 솜의 상처를 알아봐 주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이 이상했다. 솜에게도 상처가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상처에 대해 무딘 건지, 자신의 상처에 무신경했다. 소독해야 하는데, 안 그러면 덧날 텐데. 솜을 볼 때마다 이마 위에 난 상처에 눈길이 멈추었다.

주머니에 항상 반창고를 넣고 다녔지만 건네줄 타이밍이 생기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상처 위에 반창고를 붙여 주고 싶었지만, 조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먼저 내가 엄마처럼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똑같이 일회용 알코올 솜으로 상처를 소독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오히려 상처를 잘못 건드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엄마가 내 이마 위에 붙어 있던 반창고를 떼어 내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녀도 나처럼 화들짝 놀라 상처를 손으로 가리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상처를 보여 준다는 건 사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녀 역시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상처에 대해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닐까? 결정적으로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다. 가해자가 어떻게 피해자에게 치료를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방송반 스케줄을 여러 번 살폈다. 나흘 후에야 그녀와 업무가 겹쳤다. 나흘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나는 고장 난 시계처럼 삐걱거렸다. 2배속으로 설정해 둔 시간이 이따금 버퍼링에 걸려 더디게 흘러가는 아주 괴상한 나날이었다. 솜에 대한 사과문을 여러 버전으로 정리해 보았지만 모두 어딘가 오류가 있어 보였다. 누군가에게 고민 상담을 하고 싶어 핸드폰을 뒤적거렸지만, 누구에게도 연락할 수 없었다. 나는 핸드폰 연락처를 정리했다. 수많은 연락처가 있었지만, 줄곧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이 감자 머리뿐이라는 걸 깨닫고 나자 허무해졌다.

어렸을 때 느꼈던 허무함과는 달랐다. 어렸을 때는 내게 남은 사람이 감자 머리라는 게 허무했지만, 지금은 감자 머리뿐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자책에 가까운 허무함이었다. 나는 감자 머리에게 끓는점 백도씨 활동이 무기한 휴업하게 되었다고 문자를 보냈다.

SNS 계정에도 최종 공지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SNS 메신저 창을 확인했다. 백도씨에게 온 메시지는 백 통도 넘었지만, 백도영에게 온 메시지는 한 통도 없었다. 나는 SNS 계정을 삭제했다. 사람들의 끓는점을 엿보는 게 마냥 즐겁고 재밌었는데, 그 모든 일들이 먼 옛날처럼 흐릿하게 여겨졌다.

내가 보아 온 모든 것들이 전부 허상일지도 몰랐다. 내가 적은 방송 대본에 속은 학교 아이들처럼, 내가 꾸며 낸 거짓말에 여태껏 속아 왔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혼자 골똘히 판가름했다.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실과 거짓의 차이는 목적이 다르다는 데 있다’라는 내가 지은 지론이 폭삭 무너져 있었다. 대신 거기엔 누군가 지어 놓고 간 새로운 지론이 서 있었다.

‘나의 거짓은 진실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의 진실은 거짓이 되었다.’

결전의 날이 되었다. 나는 방송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회의 테이블 앞에 솜이 앉아 있었다. 솜이 내게 형식적인 손 인사를 했다. 나는 솜의 맞은편에 앉았다. 솜은 내가 쓴 대본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솜이 대본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내가 어색하게 적은 문장마다 솜의 발음이 꼬였다. 그녀가 어색한 부분을 펜으로 체크했다. 솜이 검토가 완료된 페이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수정해야 할 부분마다 빨간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켠 뒤, 대본 파일을 열었다. 솜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낭독에 적절한 문장으로 고쳤다. 대본을 고치다가 나는 새 창을 열었다. 나흘 동안 계획하고 정리해 온 대사들을 빠르게 타이핑했다. 나는 문장들을 눈으로 여러 번 읽으며 알맞게 가다듬었다. 나는 새 대본을 솜에게 보여 주었다.

솜이 노트북을 받아 들더니 찬찬히 살폈다. 새 대본의 핵심 문장은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솜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다음 대본 작성을 위해, 추려 놓은 사연들을 꺼내 읽었다. 눈으로 문장을 읽기만 할 뿐, 내용은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솜이 옥상에서 만났던 날의 목소리 톤으로 말했다.

“원래 있던 상처야. 네가 준 상처 아니야.”

솜이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다 말았다. 내가 입힌 상처가 아니라니까,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솜이 감춘 상처를 내가 들춰낸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상처라고 부르는 순간 더 아프기 마련이다. 그녀가 애써 덮어 뒀던 걸 내가 멋대로 건드린 것이다.

“그래도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 있는데?”

“감추려고 했던 거잖아. 몰래 엿봐서 미안해.”

솜이 나에게 팔을 뻗었다. 소매를 걷고, 시계를 풀었다. 손목에 길게 남은 흉터를 내게 보여 주었다. 흉터가 시계에 눌려 붉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흉터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내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솜이 보았을까, 두려웠다.

솜이 자기에게는 사실 더 많은 자해 흉터들이 남아 있다고 했다. 칼로 찔렀는데 아무 느낌도 없기에, 계속해서 상처를 만들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러다 부모님에게 들켜, 스스로 자해를 억제하고 있었는데, 나와 부딪힌 그날 이후 힘들어진 솜은 다시 칼을 꺼냈다고 한다. 칼이 살에 닿던 순간, 그녀는 자신이 여태껏 왜 자해를 해 왔는지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냥 네 탓을 했어. 네가 내 가면을 알아차린 게 섬뜩하고 무서웠어. 근데 더 이상 네가 나를 건드리지 않는데도, 나는 여전히 견디기 힘들 만큼 불안했어. 나는 내가 그동안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 한 번도 아프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칼로 찔러도 아프지 않은 거였어. 나는 내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 속였어. 내가 모난 사람이란 걸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 나는 그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날 밤, 솜은 꺼냈던 칼을 도로 집어넣고 본인의 가면에 대해 밤새 생각했다. 자기가 언제부터 가면을 썼는지, 알 수 없었다. 유년 속 기억에서도 솜은 어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솜은 반대로 본인의 민낯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피로 얼룩진 화장실 욕조에서 부모님과 마주쳤던 밤이 떠올랐다. 솜의 부모님은 그날의 기억을 없던 일처럼 덮어 두었다. 솜은 부모님을 따라 그날의 기억을 없는 일처럼 덮어 두었다.

“네 덕에 알게 되었어. 내가 왜 그동안 자해를 해 왔는지. 너 눈치 빠르잖아. 맞춰 봐. 이유가 뭔지.”

나는 솜의 손목을 살짝 만져 보았다. 그녀의 맥박이 느껴졌다. 나는 비로소 사람들이 그녀의 상처를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 사람들 속엔 나도 속했다. 사람들이 무능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누구에게도 자신의 상처를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별종이 되고 싶었어. 사실 나는 지극히 평범한데, 별종처럼 연기하며 살아왔어. 너와 같은 이유에서겠지. 내가 그냥 평범한 애라는 게 싫었듯, 너도 네가 아픈 애라는 게 싫었겠지.”

솜이 내 손목을 꼭 잡았다.

“누군가에게 보여 줄 것이 아니었더라면 긋지도 않았을 거야.”

솜이 본인의 손목을 내려다보며 작게 말했다. 그 말은 내가 아닌 자신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준비해 둔 반창고를 꺼냈다. 반창고의 종이 포장지를 벗겨 내 그녀의 손목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의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나는 그녀가 표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부끄러워해야 할지, 놀래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우울해야 할지, 행복해야 할지, 아파해야 할지. 그 모든 감정들의 교집합 속에서 솜은 어떤 표정이 적절한 기호인지 배운 적도, 겪어 본 적도 없다. 그렇기에 아직 풀이 과정 속의 엉성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녀의 흉터 위에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하얀 숨결이 비어져 나왔다.

작가소개 / 김아정

1993년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석사 수료. 201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로 등단. 앤솔로지 소설집 『다행히 졸업』, 『미니어처 하우스』에 참여. 학습 동화 『첫 읽기 연습책』, 『수 읽기 연습책』 시리즈 저자.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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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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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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