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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3-03-17
  • 조회수 595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단편)]


글라이더


김아정


그 애는 굽은 등에 큰 혹이 불룩 솟아 있었다. 옆 반에 처음 그 애가 전학을 왔을 때 아이들은 꼽추는 처음 본다며 다들 신기해했다. 담임이 꼽추라는 말은 비하 표현이라며 사용하지 말라고 일렀다. 꼽추는 처음 몇 주 동안만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등에 혹이 하나 있다는 것 빼곤,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애였다. 나는 그 애 이름이 하림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내 본 적은 없었다.

하굣길에 그 애는 허리가 굽은 모양으로 느릿느릿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그 애는 무엇인가를 빤히 내려다보며 걸었다. 이따금 걸음을 멈췄다가 자신의 발끝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다가 이내 다시 느리게 걸었다. 그 애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져 하루는 그 애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바닥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애는 다음 날도 똑같이 땅을 쳐다보며 걸었다. 다음 날도 바닥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됐다.

나는 그 애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아직 한 번도 그 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옆 반 애와 마주칠 만한 장소는 급식실뿐이었다. 그 애는 몇몇 여자애들과 함께 모여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중 아는 얼굴은 중학교 동창인 김채린뿐이었다. 나는 스쳐 지나가며 그 애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 애는 앞에 앉아 있는 김채린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벽을 살폈다. 벽이나 바닥이나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 애가 귀신이라도 보는 건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에 빠졌다. 스스로 너무 어이가 없어, 그날 이후 그 애에 대한 호기심을 더 이상 품지 않았다. 복도에서 우연히 그 애와 마주쳐도 늘 그랬듯 모른 척 지나갔다.

몇 달이 흘렀다. 평소와 같이 하교를 하던 중 집 근처 골목길에서 그 애의 뒷모습을 목격했다. 이 동네에서 그 애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 애는 항상 학교 앞 갓길에 세워져 있는 검은색 외제 차에 올라타곤 했다. 소문에 따르면 그 애는 학교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는 신도시의 고급 주택단지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근방에 있는 다른 동네들은 재개발로 인해 브랜드 아파트와 새로 닦은 큰 길이 들어섰지만, 이곳은 아직 빽빽하게 세워진 빌라들 사이로 낡고 오래된 포장도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빌라촌은 동네에서 제일 오래된 곳이었다. 드문드문 가로등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중 몇 개는 불이 들어오지 않아 골목 몇 군데는 깜깜했다. 그 애는 세 갈래 길 앞에서 잠시 멈춰 서더니 가장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순간 나도 멈칫했다. 나는 그 골목이 어떤 곳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제일 먼저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붉은 벽돌의 건물이 눈에 띌 것이다. 그다음엔 온갖 광고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전봇대가 보일 것이다. 그런 다음엔 세탁소와 작은 카페가 나란히 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건물 몇 개를 더 지나고 난 뒤엔 대문짝만한 간판을 내건 슈퍼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을 것이다. 요란한 네온사인 빛 때문에 누구라도 가게 앞에서 멈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애 역시 슈퍼 근처에 이르자 발걸음이 더뎌졌다. 그 애가 번쩍이는 가게 간판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차양은 까맣게 때 타고, 선반들은 낡고 조악했다. 가게 문 또한 볼품없는 구식 미닫이문이다. 오로지 새로 단 네온사인만 눈 아프게 번쩍거리는 곳이다. 푸르스름한 저녁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 사이로 가게 간판이 오늘따라 유독 하얗게 빛났다.

그 애는 주춤거리더니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저 슈퍼가 얼마나 심심한 곳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주말이면 나는 저 가게 계산대 앞에서 종일 죽치고 앉아 핸드폰으로 게임 영상을 보거나 노래를 들었다. 그 애는 별로 둘러볼 것도 없는 가게 안을 한참 돌아다녔다. 그 애가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할머니는 손님이 왔는데도 인사는커녕 파리채로 허공을 휘두르기 바빴다. 나는 가게 뒷문을 열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음료 냉장고 앞에 서 있던 그 애가 내 쪽을 쳐다봤다. 그 애는 화들짝 놀라더니 뒤로 주춤거렸다. 그 애가 놀라는 바람에 나도 같이 놀랐다. 머쓱해진 나는 그 애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애의 눈길이 내 명찰 쪽을 향했다. 나는 가방으로 명찰을 쓱 가리며 그 애의 눈길을 피해 서둘러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나를 발견한 할머니가 슬리퍼를 주섬주섬 신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이 급하다며 할머니가 부리나케 가게를 달려 나갔다. 나는 계산대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부랴부랴 교복 재킷을 벗고 옷걸이에 걸려 있던 가게 유니폼 조끼를 걸쳐 입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그 애를 기다렸다. 그 애가 내 앞에 인스턴트커피 하나를 내려놓았다. 나는 묵묵히 계산을 해 주었다.

그 애가 영수증과 카드를 받아 들고는 내게 꾸벅 목례했다. 그 애는 종종걸음으로 가게를 빠져나갔다. 나는 가게 문간에 서서 그 애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동네 근린공원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애가 내 쪽을 돌아봤다. 나는 놀라서 얼른 뒤로 물러섰다. 마침 할머니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할머니가 나더러 왜 얼굴이 빨개졌냐고 물었다. 내가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할머니가 이어서 물었다.

“좋아하는 가시나여?”

“그런 거 아니에요. 잘 알지도 못해요.”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르는 거지, 잘 알지 못하는 건 뭐여?”

“알긴 아는데 딱히 아는 애는 아니에요.”

할머니가 계속해서 나를 추궁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결국 할머니가 나에게 파리채를 넘기고 가게를 나갔다. 할머니를 대신해 저녁 시간 동안 가게를 지켰다. 낮 동안은 할머니가 종일 가게를 보시고 저녁이면 부모님과 내가 교대로 가게를 지켰다. 저녁에 가게를 봐야 하는 것은 귀찮지만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을 빼먹을 수 있는 점은 좋았다.

나는 계산대 앞에 문제집을 펼쳐 놓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SNS를 구경하다가 김채린이 올린 게시물을 한참 들여다봤다. 집 앞에 반려동물 동반 카페가 생겼다며 올린 사진이었다. 하림의 이름이 태그되어 있었다. 노랗고 북실북실한 털을 가진 강아지와 하얗고 곱슬곱슬한 털을 가진 강아지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림이 키우는 강아지가 종일지 살폈다. 나는 망설이다가 채린에게 키우는 강아지가 어떤 종인지 댓글로 물었다. 김채린이 둘 다 본인의 강아지라고 대답했다. 하림을 태그한 건 뭐지, 생각했다. 하림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채린도 하림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도 예전에 개 키웠단 말을 하려다 멈췄다. 어릴 때 동네에서 나를 따라다니던 똥개였는데 어쩌다 보니 집에까지 데려와 키우게 됐다. 까매서 깜돌이라고 불렀다. 막상 집에 데려오니 깜돌이는 자꾸만 집을 나갔다. 깜돌이는 배고플 때가 되면 집에 와서 사료를 먹었다. 심심하면 다시 밖에 나갔다. 나는 채린에게 ‘강아지들 귀엽다’라고 리플을 달았다. 채린이 ‘좋아요’ 이모티콘을 달았다.

그 애가 가게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내 명찰을 확인했으니 어쩌면 그 애가 나를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내 별명은 할인이었다. 가게 이름이 ‘도원할인마트’였기 때문이다. 나를 도원이라고 불러 주는 애는 드물었다. 나는 틈만 나면 가족들에게 간판이 너무 낡았다며 바꾸자고 항의했다. 가게 이름도 더 좋은 다른 이름으로 바꾸자고 졸랐다.

새로 바뀐 간판을 처음 본 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방과 후에 여느 때와 같이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저 멀리 내 이름이 번쩍이고 있는 거였다. 보나 마나 내가 반대할 것이 뻔했으니 할머니가 내가 없는 사이 쥐도 새도 모르게 간판을 바꿔 단 것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했다. 갑자기 가게 이름을 바꾸면 사장 바뀐 줄 알고 단골손님들이 놀라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밤 10시쯤, 나는 간판 불을 껐다. 가게 셔터를 내리며 부디 그 애가 나를 기억하지 못했으면 하고 바랐다.


*


여자반 체육 대회 날이었다. 당번이었던 나는 수업 도중 부족한 프린트 자료를 복사하러 교무실에 들렀다. 프린트 기기 앞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창문 너머로 운동장에서 발야구를 하는 여자애들을 바라봤다. 하림이 보이지 않았다. 피구를 하는 아이들 속에도, 백 미터 달리기 경주 중인 아이들 속에도, 주변에서 응원 중인 아이들 속에도 등이 불룩 솟은 아이는 없었다. 나는 복사가 끝난 프린트 자료를 들고 여자반 복도로 향했다. 나는 텅 빈 교실들을 하나하나 지나쳤다. 그러고는 하림의 반 앞에 멈춰 섰다. 나는 조심스레 교실 안을 살폈다. 책상 위에 교복들이 허물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창가 쪽 맨 뒤에 앉은 하림이 체육복 차림으로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나는 발을 좀 더 세워 창문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하림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얼른 몸을 숙였다. 오리걸음으로 뒤뚱거리는데 교실 뒷문이 벌컥 열리며 하림이 나왔다.

“그때 너 맞지?”

하림의 날이 선 목소리에 나는 등골이 서늘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 때문에 그날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초행길인데 주변은 어둡고 뒤에서는 누가 자꾸 따라오고.”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몇 번이고 곱씹고 나서야 그 애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림에게 정중하게 사과해야 했다.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면 되나, 머뭇거리는데 하림이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근데 그날 네 덕에 무지 웃었다. 나는 네가 나 따라오는 줄 알고 식겁했었거든. 네가 가게까지 따라 들어온 거 봤을 때는 진짜 거의 패닉 상태였는데, 자세히 보니까 네 이름이 가게 이름인 거야.”

하림이 겨우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애가 웃는 모습이 신기해서 멍하니 바라봤다.

“너는 그냥 너희 가게로 간 것뿐인데 나 혼자 질겁해서 북 치고 장구 친 거잖아.”

하림이 내 명찰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나는 들고 있던 복사물로 명찰을 슬그머니 가렸다.

“놀라게 해서 미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 방금은 그냥 심부름하면서 지나가다가 체육 대회인데 누가 안에 있길래, 궁금해서 봤어. 놀랐으면 미안.”

“아니, 별로 안 놀랐어. 오히려 반가웠어.”

그때 여자반 복도 끝에 있는 교무실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림과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학교에는 촌스러운 규칙이 하나 있었는데 남학생은 여자반 복도로 다니면 안 된다는 거였다. 나도 모르게 하림을 따라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림이 나를 멀뚱히 보더니 교탁을 가리켰다. 나는 교탁 사이로 몸을 구겨 넣었다. 하림이 키득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복도를 지나가는 발소리에 집중했다. 발소리가 멈추더니 교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수학 선생이 하림에게 알은체했다. 수학 선생이 오늘 학교 안 와도 되지 않냐고 묻자, 하림이 한 번쯤 체육복을 입고 싶어서 학교에 왔다고 대답했다. 수학 선생이 체육복은 맘에 드냐고 물었고 하림이 교복보다 훨씬 편하고 좋다고 했다. 그렇게 수학 선생의 발소리가 멀어진 후 나는 교탁에서 기어 나왔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여자애들도 다 밖에 나가 있고 나는 심부름하러 교무실에 들른 거였다. 그냥 자연스럽게 가던 길을 가면 됐는데 쓸데없이 숨은 거였다. 하림에게 이런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인 게 너무 쪽팔렸다. 나는 서둘러 복사물을 챙겼다. 그때 하림이 뒤에서 나를 불렀다.

“저기 혹시 이따가 말이야. 집에 같이 갈래? 부탁할 것도 좀 있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림이 내 앞에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나는 하림의 핸드폰에 내 전화번호를 찍어 주었다.

“끝나면 연락할게.”

“응. 그래.”

나는 쭈뼛거리며 교실을 나왔다. 반으로 돌아가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까 교탁 밑에 숨어 있을 때보다 더 심했다. 나 지금 여자애한테 번호를 따인 건가, 생각하다가도 이내 도리질을 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


자전거보관소 앞에서 망설이다가 자전거를 도로 자물쇠로 잠갔다. 그러고는 교문 앞에서 하림을 기다렸다. 하림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체육 대회 탓에 여자애들이 보충수업도 없이 일찍 하교 중이었다. 그 순간 하림이 학교에서 막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림이 화단 앞에 멈춰 서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나에게도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골목길 앞에서 보자는 메시지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교문을 지나 횡단보도 앞에 섰다. 교문 쪽에서 하림이 채린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림이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나는 가만히 둘의 얘기를 엿들었다.

“몸도 불편한 애가 참, 버스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태워 줄게.”

“아니, 오늘은 나 따로 약속이 있거든.”

교문 앞에 세워진 검은색 외제 차가 깜빡이를 켠 채 서 있었다.

“아, 그래? 약속? 무슨 약속?”

“있어, 이 근처에서 보기로 해서 그냥 걸어가면 돼.”

채린이 고개를 까딱였다. 하림이 채린을 뒤로하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채린이 하림에게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하림이 채린을 돌아보며 살짝 손을 들어 주었다. 하림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하림은 나를 알아봤지만 알은체하지 않았다. 나는 하림에게 말을 걸려다가 그냥 잠자코 있었다. 곧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었고 우리는 몇 발짝 떨어진 채 횡단보도를 건넜다. 골목길 초입에서 나는 하림을 불러 세웠다. 하림이 나를 보자마자 손가락으로 대뜸 저 위를 가리켰다.

“나 말이야, 저 산에 가고 싶거든?”

“저길 왜?”

“그게 사정이 있어. 지난번에 핸드폰으로 지도 검색해서 찾아가 보려 했는데 길이 좀 이상하더라고.”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야산이었다. 따로 등산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인적이 드물었고 무엇보다 시체가 유기된 적이 있는 곳이라 다들 피했다. 나는 뒤쪽에 있는 더 큰 산을 가리켰다.

“등산할 거면 저기로 가. 저 산이 약수터도 잘 되어 있고 등산 코스도 다양하다고 들었어.”

“저 산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안 돼. 이 근방에서 가장 사람 없는 곳을 찾고 있어서 그래.”

나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깜돌이가 죽었을 때 포대 자루에 깜돌이 사체를 담아 야산에 묻은 적이 있었다. 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따로 없었다. 빌라촌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야트막한 공터가 나왔다. 그 공터 뒤로 야산이 이어졌다. 나는 하림을 데리고 공터로 향했다.

“너 채린이랑 친해?”

나는 조심스레 하림에게 물었다.

“나 걔 싫어.”

“뭐?”

“후, 너 걔 꿈이 뭔지 아니?”

“뭐, 뭔데?”

“사회복지사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자기 행복이래. 나는 어려운 사람이고, 채린이는 그런 나를 도와주면서 행복을 찾는 거지. 꼽추 하림과 그런 그녀를 도와주는 천사 채린.”

생각해 보니 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몇몇 애들이 하림 앞에서 옷에 목베개를 넣고 꼽추 시늉을 한 적이 있었는데, 채린이 그걸 발견하곤 그 애들을 아주 혼쭐을 내주었더라는 일화다. 그 이후로 애들이 반성해서 하림에게 무척 잘해 줬다는 결말이었다.

“나는 오히려 나한테 꼽추라고 하는 거 신경 안 써. 그런데 채린이 때문에 반에서 애들이 꼽추의 ‘꼽’ 자도 못 꺼내. 나한테 조금이라도 함부로 하는 애는 교양 없는 무식한 애로 낙인찍히거든. 너도 그날 가게에서 처음 나 보고 놀란 거 꼽추라서 그런 거잖아. 다 알아. 근데 나, 그런 거 아무렇지 않아.”

“그런 것 때문에 놀란 거 아니야.”

“그럼, 왜 그렇게 놀랐는데?”

“아니, 그냥 네가 우리 가게 온 게 신기해서 그랬어. 너 이 동네 안 살잖아.”

하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채린이랑 같은 동네 산다고 소문 다 났나 보네.”

하림이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한참 걸어가다가 세 갈래 길 앞에서 하림이 멈춰 서더니 내 쪽으로 뒤돌았다.

“나는 너를 처음 보는데 너는 이미 소문 속의 나를 알고 있는 거네.”

“소문 같은 거 신경 안 써. 그냥 전에 몇 번 너를 봤어. 너 맨날 검은색 외제 차 타고 다니잖아?”

“맞아, 너는 나를 봤는데 나는 왜 너를 못 봤지?”

“그야 너는 땅만 보며 걸으니까…….”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비밀을 들킨 기분이었다.

“나를 지켜봤구나? 내 등에 난 혹이 궁금했니? 선천적으로 그런 건지, 정확히 어떤 병인지, 치료는 가능한지, 아프지는 않은지, 그런 게 궁금한 거지?”

나는 기분이 상했다.

“네가 하도 땅만 보고 걷길래, 땅에 뭐가 있나 해서 나도 따라서 봤다. 근데 아무것도 없으니까 뭘 그렇게 보는 건가 궁금해서 그냥 좀 신경이 쓰인 것뿐이야. 난 좀 멍청해서 네 등에 난 혹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안 들거든? 됐냐?”

하림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자 하림이 난데없이 피식 웃었다.

“내 말이 기분 나빴으면 미안. 사람들이 하도 내 혹에 관심이 많으니까 너도 그런가 해서 물어본 거야. 땅을 보면서 걷는 건 뭐, 몸이 이렇다 보니 안 좋은 습관이 되어 버린 거지. 고쳐야 할 텐데 말이야.”

그런 단순한 이유라니, 싱거웠다. 전에 급식실에서 마주쳤던 그 애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앞을 보고 있지만 앞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은 그 두 눈, 하지만 뚜렷한 초점이 있는 그 묘한 눈빛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것까지 말로 물어보기는 부끄러웠다. 하림과 나는 말없이 한참 걸었다. 손이 시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마침 가게에서 가져온 풍선껌이 손에 잡혔다. 하림에게 껌을 내밀었다. 하림이 껌을 받았다.

“너희 가게에서 가져온 거야? 너도 돈 주고 사 먹어?”

“돈 주고 사 먹는 게 맞는데 실은 그냥 가져온 거야.”

“훔친 거네?”

“훔쳤다기보다 그냥 가져온 거지.”

“그거나 그거나.”

하림이 깔깔거리며 웃더니 풍선껌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하림과 나는 다시 말없이 껌을 씹으며 길을 갔다.

“너는 나한테 억지로 웃어 주지 않아서 편해.”

하림이 입을 열자 사과 향이 풍겼다. 대답을 고르고 있는데 하림이 풍선을 후 불다가 꺼트렸다.

“이거 풍선껌 맞아?”

“응.”

하림이 몇 번 풍선을 불었으나 제대로 불지 못해 푹 꺼져 버렸다. 나도 하림을 따라 풍선을 불었다. 시야에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풍선이 보였다. 풍선 너머로 하림의 동그란 웃음이 보였다.

공터에 다다랐다. 어느새 주변이 온통 푸르게 물들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푸른빛이었다. 하림이 내게 고맙다고 했다. 하림은 아무렇지 않게 야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커먼 산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곧 깜깜해질 텐데 꼭 가야 해?”

“어두워지기 전에 잠깐만 있다가 갈 거야.”

하림이 내게 가 보라고 손짓했다. 나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너 진짜 안 무섭겠어? 나 진짜 간다.”

나는 집 쪽으로 내려가다가 몇 번이고 뒤를 돌았다.

“야, 진짜 조심해.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하림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불길함이 엄습했다. 나는 하림을 향해 달려갔다. 하림이 야산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하림을 쫓아 산을 올랐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꼭 해야겠어? 꼭 혼자 해야 하는 거야? 내가 옆에서 봐주면 안 돼?”

하림이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하림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 이게 뭔지 알아?”

하림이 자신의 등을 가리켰다. 나는 하림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하림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하림의 굽은 등을 슬쩍 쳐다보고는 조용히 답했다.

“무, 무겁겠네.”

하림이 갑자기 입을 막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내 말이 맞는다며 사실 엄청나게 무겁다고 했다.

“요즘 들어 이게 얼마나 무거워진 줄 아니?”

하림이 옆에 있던 나무를 붙잡으며 한 발 올라섰다. 그러고는 풍선껌을 불었다. 나는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풍선껌이 탁, 하고 터졌다. 하림이 다시 껌을 씹었다. 이건, 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하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건 날개야.”

하림의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에 나는 기가 찼다.

“뭔 헛소리야.”

“헛소리라니, 이거 날개라니까.”

“아, 그래. 알았어, 인정할게. 세상에 너 날개가 있구나.”

내가 장난스럽게 대답하자 하림이 눈살을 찌푸렸다.

“보여 줘?”

내가 뭘? 하고 되묻자 하림이 날개, 라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가서 보여 줄게.”

“뭘 보여 준다는 건데?”

“날개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이 멍청아.”

나는 잠깐 생각한 뒤 하림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야, 잠깐만. 이게 말이 돼? 그런 엄청난 걸 가지고 있으면서 왜 여태껏 숨겨 온 건데?”

“벌써 너한테 얘기해 버렸지만, 원래는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이거든. 내가 왜 이 야산에 오려 했는지 이유를 알면 모든 게 설명될 거야.”

“그래, 어디 들어나 보자. 이 야산에는 왜 왔는데?”

“우리 동네에는 높은 건물이 많아. 그래서 사각지대가 없어. 계산을 해 봤는데 이 야산이 뒤에 있는 저 커다란 산에 가려져서 완벽한 사각지대더라고. 그래서 왔어.”

“사각지대가 뭐 어쨌는데?”

“바보야, 날개가 있으면 어째야겠어? 날아야지? 그런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날개를 꺼냈다가는 순식간에 사람들한테 들통나고, 그러면 곧 매스컴에 알려질 거고, 그러면 난 유명 인사가 되겠지. 근데 난 그런 거 딱 질색이거든. 어쩌면 다시 병원으로 끌려가게 될지도 모르고.”

“병원? 병원에서 뭘 어쨌는데?”

하림이 대답을 망설였다. 그리고 느닷없이 실험용 쥐에 대해 말했다.

“병원에서 본 어떤 실험용 쥐가 있었어. 의사들은 그 쥐한테 일주일에 몇 번씩 골수 주사를 놓았어. 근데 이 골수 주사가 엄청난 통증을 가져온대. 그래서 의사들은 쥐에게 항상 강력한 마취제를 함께 놓았어. 근데 이 마취제는 통증뿐만 아니라 몸의 다른 모든 감각들까지도 마비시켰어. 마취제를 맞으면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는데 그건 꼭 아무것도 만질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 쥐가 찍찍거리며 악을 쓰면 의사는 조용히 노란 알약을 꺼냈어. 쥐는 그 노란 알약이 어떤 건지 알고 있었지. 마취제가 몸을 마비시키는 거라면 노란 알약은 머릿속을 마비시키는 거였어. 약을 먹고 나면 한 이틀 동안은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는 병신이 되거든. 쥐는 알약을 어금니 사이에 물고 있다가 병실로 돌아와 몰래 알약을 뱉어 침대 매트리스 밑에 숨겨 두곤 했어. 매트리스 위에 우두커니 앉아 쥐는 눈물을 흘렸지만, 자신이 왜 우는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흐르는 눈물을 느끼지도 못했어. 그저 수술복 위에 군데군데 남은 동그란 눈물 자국들만 지그시 내려다볼 뿐이었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림의 말은 다 가짜 같았다. 조금도 안 믿겼다. 좀 이상한 애니까 이상한 소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림의 말은 몹시도 뾰족하고 단단했다. 하림의 말에 온몸이 마구 찔렸다. 찔린 곳마다 피가 흘렀다. 하림의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분하는 건, 내게서 흐르는 피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분하는 것과 같았다. 그 피가 가짜라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림과 나는 말없이 끙끙거리며 야산을 올랐다. 30분쯤 올랐을까.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평지가 나타났다. 바닥을 잘 살펴보니 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가 여기 사는 것 같은데?”

하늘은 아직 노을빛이 남아 있는데 숲은 온통 캄캄했다. 하림과 나는 서로의 핸드폰 조명을 켰다. 조명을 비추며 길을 따라가니 낡고 오래된 판잣집이 보였다. 집을 보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시체가 유기된 사건이 생각났다. 범인을 잡았는지에 대한 여부가 기억나지 않았다. 하림과 나는 조심스레 판잣집 근처로 다가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집 군데군데가 그을려 있었다. 바닥은 까맣게 타 버린 나무의 잔해들로 가득했다. 안심이 된 나는 집 주변을 빙 돌았다.

“불이 났었나 봐. 지금은 아무도 안 사는 폐가 같아.”

하림이 이제는 문이 없지만, 한때 문이었을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흰 운동화에 까만 재가 가득 달라붙었다.

“여기 은근히 마음에 드는데? 이거 이제 주인 없으면 내 집 할래.”

하림이 잿더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는 침대, 이거는 소파, 이거는 식탁.”

“천장도 다 무너진 게 무슨 집이냐?”

그때 무언가 내 뺨 위로 툭 떨어졌다. 나는 손바닥을 펼쳤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오늘 비 온다는 소식 없었는데. 할머니가 지금쯤 신나서 우산을 밖에다 꺼내 놓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어? 비 온다.”

하림이 집 안에서 소리쳤다.

“소나기인가? 망했네, 오늘은 연습 못 하겠다.”

“무슨 연습?”

“나는 연습. 실은 나 아직 날지 못하거든.”

하림의 말에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날지도 못하는 걸 날개라고 갖고 있단 말이야? 진짜 바보 같은 날개다.”

하림이 심통 난 얼굴로 째려봤다. 잠깐 사이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나는 비를 피해 커다란 나무 밑으로 갔다. 나는 하림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하림이 허겁지겁 나무 그늘 아래로 달려왔다.

“옷 다 젖겠네. 이따 버스 타고 집 가야 하는데.”

하림이 혼자 중얼거렸다. 하림과 나는 가방으로 비를 막아 보았다. 비가 거세서 소용없었다.

“잠깐만.”

하림이 가방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가방을 받아 들고 멀거니 하림을 바라봤다. 하림이 갑자기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나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있어 봐.”

하림이 셔츠를 벗었다. 그러고는 속에 입고 있던 흰 티셔츠도 벗었다. 나는 두 눈을 찔끔 감았다.

“야, 너 미쳤어?”

그때 하림의 온기와 살냄새가 훅 풍겨 왔다.

“눈 떠도 돼.”

하림의 말에 나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하림이 민소매 티셔츠 차림으로 두 날개를 활짝 편 채 서 있었다. 나는 멍하니 하림을 바라봤다. 날개에 깃털 같은 것은 없었다. 희끗한 피부 위로 솜털이 보송보송 자라 있었다. 날개 군데군데 살 튼 자국도 보였다. 하림이 날갯죽지를 더욱 넓게 펼쳤다.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알지 못한 채 빤히 하림을 바라봤다. 턱이 아플 정도로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봤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미안.”

“뭐가 미안한데?”

“헛소리라고 한 거.”

“됐어. 오늘 일, 비밀이니까 어디 가서 헛소리나 하고 다니지 마.”

나는 하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들어와.”

빗방울이 하림의 날개를 맞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비 맞을 거야?”

하림의 말에 나는 그녀 옆에 엉거주춤 섰다. 하림이 두 날개로 나를 감쌌다. 하림의 날개가 팔에 닿았다. 나는 놀라서 더욱 몸을 움츠렸다. 하림이 천천히 비 내음을 들이켰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빗줄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내가 어떻게 보여?”

나는 우물쭈물 답했다.

“날지도 못하면서, 날개라고.”

“연습할 거라니까. 지금이야 이렇지만, 머지않아 날 수 있을 거야. 매일 조금씩 연습해 나가다 보면.”

하림이 날개를 흔들자 빗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조용한 공기가 흘렀다. 날개로 드리운 그늘 밑에 하림과 나의 숨소리가, 빗소리와 고르게 섞였다. 하림의 날개가 온 숲과 함께 비에 축축하게 젖어 가고 있었다.

작가소개 / 김아정

1993년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석사 수료. 201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로 등단. 앤솔로지 소설집 『다행히 졸업』, 『미니어처 하우스』에 참여. 학습 동화 『첫 읽기 연습책』, 『수 읽기 연습책』 시리즈 저자.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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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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