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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 작성일 2022-09-16
  • 조회수 1,141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중단편)]



zero




이조은






빛과 색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물감으로 얼룩진 벽에 ‘이상’의 시구를 써넣었다.
999999999ㆍ0
0000000000ㆍ
진단 0,1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그의 시에 꽂힌 것은 1년 전쯤이다. 표지 그림에 끌려 서점 가판대 시집을 우연히 들춰 봤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띄어쓰기를 전혀 하지 않은 시 「오감도」 첫 구절이었다.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손전등을 끄고 검정 후드 티와 마스크, 장갑을 벗어 재빨리 배낭 속에 구겨 넣었다. 골목을 벗어날 즈음 잘빠진 흰색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값이 꽤 나갈 만한 고급 차였다.
배낭을 내려놓고 붉은색 스프레이를 꺼냈다. 한 번 흔들어 준 다음 자동차를 겨냥해 분사했다. 앞 범퍼에서 시작된 곡선이 리듬을 타듯 자동차 옆 라인으로 뻗어 갔다. 거의 다 돌았을 때 뒤에서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스프레이가 땅에 떨어져 요란하게 굴렀다.
“너였니?”
상대방은 군용 점퍼에 야구 모자를 눌러쓴 차림새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배낭을 보더니 그쪽으로 끌고 갔다. 내용물을 살피느라 손아귀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뿌리치려 하자 손목이 다시 꽉 조였다. 상대가 돌아보며 내 몸을 눈으로 훑었다.
“뭐냐? 이 범생이 스타일은. 의외네.”
나 역시 의외였다. 여자였다. 힘 좀 더 써 볼걸……. 순순히 끌려온 게 후회되었다. 후다닥 튀어 보려 다시 시도했건만, 결과는 처참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자가 발을 걸었기 때문이다. 결국, 꼴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여자는 마치 형사가 범인을 체포하듯 내 팔을 뒤로 꺾어 일으켜 세우며 등짝을 툭툭 쳤다.
“그동안 여기 그림 다 손대고 다닌 게 너지?”
“손대긴 무슨…… 뭐 별거라고.”
전의를 상실한 나는 용쓰는 대신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발끈해서 미간을 찌푸리던 여자가 돌연 눈길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가 소리쳤다.
“야! 너희 거기 뭐야. 남의 차 앞에서 뭐 하는 거야?”
당황한 여자가 내 손을 잡은 채 반대쪽으로 뛰었다. 뒤에서 남자의 비명이 들렸다. 여자는 골목길에 뛰어들어 좁은 건물 사이로 내 몸을 바짝 밀어붙였다. 그러곤 검지를 입에 갖다 댔다. 여자의 숨결이 귓불에 닿았다. 뒤쫓아 온 남자가 골목 어귀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며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사라졌다. 고비를 넘기자 여자가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난처하게 됐어. 아마 당분간 경찰들이 쫙 깔릴 거야.”
“어차피 그쪽도 허가받고 그리는 건 아니잖아요.”
여자가 대꾸하는 대신 아랫입술을 내밀며 ‘후’ 하고 위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앞머리가 살짝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열 받은 표정이었다.
“우린 너처럼 막무가내로 휘갈기는 게 아니야. 같은 불법행위라도 노골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지. 이대로 널 경찰에 넘길 수도 있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여자가 피식 웃는 바람에 자존심 상했다. 불쑥 오기가 생겼다.
“뭐, 그러시든가.”
“언제까지고 네가 내 구역을 휘젓고 다니게 할 수는 없단 말이지.”
“알았어요. 다른 데로 가면 되는 거죠?”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렸다. 벌써 밤이 깊었다. 들키지 않고 들어가기엔 이미 너무 늦었는지 모른다.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여자의 말에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발소리와 함께 다가온 여자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그리고 다니는 거. 일종의 그라피티야. 네가 한 건 낙서지만 우리가 하는 건 그냥 낙서가 아니야.”
그러면서 내 호주머니에 뭔가를 찔러 넣었다.
“관심 있으면 한번 들러.”
나를 지나쳐 간 여자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한 번 흔들어 주고는 골목을 빠져나갔다.
“ZERO?”
이름 대신 닉네임이 박힌 명함이었다. 그 밑에 그라피티 아티스트라는 낯선 단어가 인쇄되어 있었다.
며칠 후 현관을 나서다가 엄마와 마주쳤다. 고무장갑과 비눗물이 든 물통을 들고 있었다.
“나가게? 그냥 집에서 하지?”
“독서실이 편해.”
“어느 놈인지 잡히기만 해 봐, 요즘 세상에 남의 집 담벼락에 낙서하다니……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짜증 섞인 엄마의 혼잣말을 못 들은 척 지나쳤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불러 세웠다.
“정말 독서실 가는 거지? 혹시라도…….”
탐색하듯 쳐다보는 눈초리가 느껴졌다. 뒤통수가 따끔했다.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챌까 싶어 얼른 먼저 쏘아붙였다.
“못 믿겠으면 확인해 봐.”
혀를 끌끌 차던 독서실 총무가 떠올랐다.
“네 엄마 진짜 극성이더라.”
엄마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불안만 신뢰할 뿐이다.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새삼스러운 것도 없는데 언제부턴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온 신경을 다 쓰면서도 엄마는 정작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미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미술뿐이 아니었다. 음악과 체육마저 한 학기를 제외하고는 시간표로만 존재하는 유령 과목이 되었다. 학습 부담을 덜어 준다던 정부 정책이 가장 부담스러운 과목만 남겨 놓은 셈이다. 공부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신앙처럼 믿는 엄마에게 그림 그리겠다는 말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감수할 만큼 내 재능에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끼적이는 정도로 만족했는데 그마저도 막히고 보니 막막하고 화가 났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거다. 지독한 편두통이 시작된 것은…….
며칠 후 명함에 박힌 주소로 찾아가 봤다.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한참을 머뭇대다가 계단에 발을 디뎠다. 점점 짙어지는 물감 냄새가 꼭대기까지 내 발걸음을 잡아끌었다. 빈티지 스타일로 칠한 녹색 문을 밀자 비트가 강한 힙합이 제법 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 왔네!”
이젤 앞에 있던 여자가 덤덤한 미소로 환영했다. 밤에 언뜻 볼 때는 선머슴같이 느껴졌는데 쌍꺼풀진 눈매가 서글서글한 게 제법 곱상한 인상이었다. 물감으로 얼룩진 낡은 작업복이 썩 잘 어울렸다. 어색하게 꾸벅 인사하고 나서 천천히 둘러봤다. 제일 먼저 시선을 끈 것은 낙서로 가득 찬 한쪽 벽면이었다. 투박하고 거친 선들이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쳐 놓은 것 같았다. 해골바가지, 왕관 같은 형태가 단순한 색채로 채워져 있고 뜻을 알 수 없는 영문 글씨와 기호가 아무렇게나 휘갈겨져 있었다.
“그쪽이 한 거예요?”
“유진이야 내 이름. 그건 바스키아라는 천재 화가 그림이고.”
그림? 황당했다. 게다가 천재라니…….
“낙서 같지?”
속을 들킨 것 같아 뻘쭘했다. 찬찬히 다시 그림을 살펴봤다. 거칠고 난해한 형태 위에 영문 글씨와 숫자들이 병적일 만큼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휘갈겨 놓은 것 같으면서도 묘한 조형미가 느껴졌다. 과감하고 거침없는 붓 터치와 독특한 배색 때문이었다.
“이 사람, 왜 이런 그림을 그려요?”
“그러는 넌 왜 낙서하지?”
나는 잠들기 위해서라는 말을 꿀꺽 삼켰다.
밤 골목을 배회하다 스프레이 통을 발견하기 전까지 지독한 편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아파트단지에서 한강 둔치로 연결된 지하 통로를 걷는데 양쪽 벽에 방금 끝낸 듯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 버리고 간 빈 스프레이 통엔 제법 많은 양의 물감이 남아 있었다. 벽화를 향해 분사해 봤다. 치이익! 묘한 쾌감이 온몸에 번졌다.
“그리고 또 궁금한 게 있는데?”
여자의 질문에 과거의 기억에서 돌아왔다.
“뭔데요?”
“넌 그림에 하나같이 숫자와 문자를 썼던데…… 왜지?”
“아, 그거…… 이상 시 베껴 쓴 건데요.”
“이상? 시인 이상 말이니?”
“내 눈엔 마치 그림처럼 보였거든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답했다. 유진이 허! 하며 감탄사를 내뱉듯 헛웃음과 함께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짐작이 맞았네.”
“뭐가요?”
유진이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포개어 놓은 캔버스 중 하나를 꺼내어 앞면이 보이도록 돌려세웠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패턴, 자세히 보면 거꾸로 배열된 숫자의 조합이었다. 배경이 되는 푸른빛과 묘하게 겹쳐진 붉은빛이 혼합되어 전체적으로 보랏빛을 띠고 있는 것은 이상의 시 「오감도」 제4호였다.
“역시 알아보는구나.”
내 표정을 본 유진은 캔버스 몇 개를 더 꺼내어 보여 주었다. 하나같이 색채와 무늬로 패턴화된 이상의 시였다. 이상의 시에 나만큼 특별한 관심이 있지 않다면 알아보기 힘들었을 거다. 캔버스에 배열된 형태는 혼합된 색채와 함께 독특한 이미지를 발산했다.
“그건…… 그림인가요?”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건 그림이야. 이상의 시를 소재로 했을 뿐 엄연히 재창조된 내 작품 맞아. 처음 네 낙서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어.”
“왜요?”
유진은 뒤쪽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가리켰다.
“저 거울에 비친 그림을 봐.”
조금 전까지 내 눈을 붙잡았던 문자들은 읽을 수가 없어 거슬렸다. 반면 비정상으로 보였던 거꾸로 된 숫자들은 도리어 역전되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난해한 기호처럼 보이다가 뭔가 분명하게 제자리를 찾은 것 같은 숫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네가 알고 써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오감도」 제4호는 숨겨진 자아를 시각적으로 보여 준 작품이거든.”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 유진을 쳐다보자 겸연쩍다는 듯 피식 웃었다.
“물론 평론가 해석이야. 꼭 그것이 아니어도 거울에 비춰 보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볍게 무너트리려는 숨은 의도를 엿볼 수 있지. 난 이상 시를 처음 봤을 때 숫자와 글자에 내포된 의미보다는 일정하게 반복되는 형태와 이미지가 추상회화 같다고 느꼈어. 네 그림을 본 순간 나 말고 또 누군가 이상의 시에서 그런 미학적 조형 요소를 발견했다는 것이 반가웠어.”
예상치 못한 거창한 말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우연히 보고 필 꽂혔을 뿐인데요.”
“그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테지?”
유진의 질문에 처음 시집을 펼쳤을 때의 느낌을 떠올려 봤다.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 「이상한 가역반응」 등 호기심을 자아내는 제목뿐 아니라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라는 독특한 시 구절 등에 강한 매력을 느낀 건 사실이었다. 그런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자니 귀찮았다. 그래서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냥 끌렸어요.”
내 대답에 유진은 진지한 표정을 풀지 않고 말했다.
“하긴…… 비록 난해하긴 해도 그의 작품을 접하면 일단 그 독특함에 매료될 수밖에 없지.”
유진은 곧장 구석에 있는 탁자로 가더니 드로잉 북을 펼쳤다. 옆에다 길게 깎은 4B연필 다섯 개, 톰보 지우개 하나도 꺼내 놨다.
“왔으니 아무거나 한번 그려 봐. 심이 닳으면 옆에 있는 다른 연필 쓰고.”
당황스러웠다. 유진은 내 시선 따윈 가볍게 무시한 채 있던 자리로 돌아가 그리던 그림을 마저 그리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과제가 난감했다. 나는 잠시 그대로 서서 우두커니 유진을 바라보았다. 이젤에 붙은 사진을 보며 부지런히 손 놀리는 솜씨가 부드럽고 날렵했다. 적당히 강약 실린 움직임은 마치 배경음악에 박자 맞추어 지휘하는 것처럼 리드미컬했다. 그림은 사진과 전혀 다른 형태와 색채로 표현되고 있었다. 정말 저렇게 보이는 걸까? 왠지 낚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키는 대로 해 보기로 했다. 뭘 그려야 할지 막막해 천천히 둘러봤다. 잡동사니 중에 꽃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손 가는 대로 연필을 움직였다. 선이 비뚤어져도 지우거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그려 나갔다. 드로잉 북을 다 채웠을 때는 창문으로 석양이 길게 드리워질 즈음이었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유진이 다가와 내 그림들을 살펴보자 민망해졌다. 드로잉 북을 넘기던 유진이 피식 웃었다.
“왜요?”
유진은 손가락으로 내 그림들을 가리켰다.
“봐, 넌 꽃병을 그리면서도 겉에 있는 불규칙한 무늬만 집요하게 그렸잖아. 게다가 사물도 하나같이 걸레나 구겨진 종이, 시들어 말라비틀어진 꽃, 어째 이런 것들만 눈에 들어올까 싶어서.”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줬다.
“한 가지 놓친 게 있네.”
유진이 내 그림에 쓱쓱 명암을 넣기 시작했다. 그림은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생동감 있게 변해 갔다.
“그늘진 곳과 그림자도 비중 있게 다루어 주어야 해.”
빠른 손놀림과 함께 유진은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그림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렇지 않을까? 그늘진 곳이 없는 삶이란 편할지는 몰라도 뭔가 입체감이 없게 느껴져. 감동이 없잖아.”
곧이어 다 손봤는지 드로잉 북을 내게 내밀었다. 불과 10분 남짓한 시간이었을 뿐인데 그림에 생기가 돌았다. 깜짝 놀랄 만한 효과였다.
“오는 토요일에 우리 ‘ZERO’팀 한판 뜰 건데. 같이 갈래?”
팀? 유진의 닉네임이 아니었나 보다. 토요일이면 수학 과외가 있는 날이다. 끝나고 적당히 핑계 댈 수 있을 것 같았다.
며칠 후 자정 무렵이 다 되어 모인 곳은 변두리 재개발 구역이었다. 건설사 가림막에다가 작업할 거라고 했다. 유진 외에 남자 셋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은 나보다 어려 보였다.
“못 보던 앤데 누구야? 비주얼이 우리랑 안 맞잖아?”
하필 나보다 어려 보이는 놈이 이죽거렸다.
“아는 동생이야. 이름이…….”
유진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태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
“영이라고 해.”
나는 성을 생략한 채 마지못해 이름만 댔다.
“영? 우리 팀 이름이네. 좋아, 봐줬다.”
뭘 봐준다는 건지. 녀석은 헤벌쭉 웃어 보였다. 야구 모자를 눌러쓴 나머지 두 명은 간단하게 고개만 꾸벅였다.
“순찰하기 전에 끝내야 해. 한 시간이다! 레츠 고!”
모두 유진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유진이 컬러 스프레이 몇 개를 나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받으려다 보니 하나를 놓쳐 버렸다. 떼구루루 굴러가는 것을 재빨리 발을 뻗어 멈춰 세운 후 줍는 동안 나머지는 각자 귀에 이어폰을 꽂고 리듬에 맞추어 춤추듯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번갈아 스프레이를 뿌릴 때마다 가림막 속에 숨어 있던 것들이 꿈틀꿈틀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아이돌 댄스처럼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면서 형태 그리기와 채색 마무리가 착착 이루어졌다. 유진은 따로 떨어져 혼자 그렸는데 손놀림이 귀신같이 빨랐다. 빈 스프레이 통이 순식간에 바닥에 쌓였다. 모두 내가 뭘 하든 개의치 않았다. 그 무관심이 도리어 편했다.
“마무리, 10분 전!”
유진의 외침에 나를 포함한 모두의 손놀림이 부산해졌다. 달칵! 스프레이 통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작업이 끝났다. 아까 이죽거리던 남자애가 내 그림을 보더니 휙 휘파람을 불었다.
“형 얘 좀 봐!”
유진을 비롯해 나머지 두 명도 내 그림을 보고 동시에 쿡,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렇게나 휘갈기는 것이면 모를까 짧은 시간에 형태 잡고 색칠까지 하는 건 나에겐 무리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단순하지만 강한 이미지였는데 반응을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그린 것은 정면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든 주먹이었다.
“우리보다 낫다, 야! 특별한 기교 없이 세상을 향해 뻑큐를 날렸잖아?”
유진의 말에 크게 웃던 남자 한 명이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뭐야, 너도 뱅크시 추종자냐?”
“뱅크시? 그게 뭔데요?”
내 말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뱅크시를 몰라?”
“알아야 해요?”
내가 반문하자 아까 이죽거리던 놈이 불쑥 끼어들었다.
“있어. 이 바닥 전설. 아니, 우상이라고 해야겠지. 그보다 너 맘에 든다. 이참에 우리 팀에 정식으로 들어와라.”
머릿속이 개운해지면서 오랫동안 나를 옥죄던 올가미가 툭 끊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해서 난 그라피티 동아리 ‘ZERO’의 일원이 됐다. 함께하면서 그들에게 제법 합법적인 작업 의뢰도 들어오고 때와 장소에 맞는 메시지를 그림에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게릴라식으로 사회 비판적 그림을 그리는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존재에 대해서도 접하게 되었다. 리더 유진은 미대 출신으로 그라피티와 접목한 작품 활동을 주로 했다. 특히 난해하게 취급되기만 하는 이상의 시를 시각적으로 추상화하는 작업에 관심 있었다. 우리는 주로 유진의 작업실에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전시회 갈까?”
아침부터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가 오후 들어 폭우로 변했다.
“하필 이런 날에요?”
이젠 제법 친해진 ZERO팀 멤버 한 명이 씩 웃으며 나섰다.
“이런 날 평일에 가야 사람이 없거든.”
꼭 가려고 점찍어 둔 전시라는 뜻이다.
장 미셸 바스키아. 유진이 열광하는 화가다. 원시적인 형태와 단순하면서 원색적인 색채가 공간을 압도했다. 불규칙하고 무질서한 선들이 금방이라도 캔버스를 뚫고 나와 세상을 휘저어 놓을 것만 같았다.
“네 그림 처음 봤을 때 바스키아가 떠올랐어.”
어느새 유진이 옆에 와 있었다. 난 앞에 있는 그림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 숫자와 문자 때문에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불안 속에 자신을 온전히 내던진 느낌이랄까? 네 낙서에서 이상의 시를 발견했을 때 놀랐던 것도 바로 그런 집 밖의 정서를 잘 포착했기 때문이야.”
“가출 소년 이미지라는 말을 뭐 그렇게 돌려서 해요?”
내 말에 유진이 쿡쿡 웃으며 받아쳤다.
“비약이 심했나? 하지만 이상 시인이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것은 분명해. 거기에 꽂힌 너도 독특하고 말이야. 이상과 바스키아는 둘 다 제도권에서 벗어난 거리의 정서를 포착했다는 공통점이 있지. 난 네 그림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 재미있는 일화 하나 말해 줄까? 한 기자가 바스키아에게 그림 속 글을 해석해 달라고 했어. 그러자 바스키아는 모르겠다면서 그건 마치 음악가한테 음표는 어디서 따오는지 물어보는 것처럼 어이없는 질문이라며 일축했지.”
발걸음을 옮기다가 화실에서 본 것과 똑같은 그림을 발견했다. 유진이 웃으며 화실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라고 했다. 진품 값은 어마어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 화가 지금쯤 그림 때려치우고 놀고먹고 있는 거 아니에요?”
내 질문에 유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눈빛에 안타까움과 묘한 슬픔이 교차했다.
“갑작스러운 부와 명성을 주체 못 했어. 결국, 약물중독으로 죽었지.”
나는 의아해서 유진을 쳐다봤다.
“모든 것을 다 가져서 파멸했다고요?”
유진이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바스키아에게 삶의 원동력은 결핍이었으니까. 절박함 때문에 그림을 그렸을 텐데…… 성공한 삶이 과연 최선일까? 기자들 질문에 그토록 당당했던 바스키아는 그 후 죽을 때까지 데생을 못 하는 화가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렸거든. ”
“아이러니네요. 유명해져서 자신감을 상실하다니. 반면에 뱅크시는 자신에게 열광하는 미술계를 냉소적으로 조롱하잖아요. 두 화가는 뭔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반응이 전혀 달랐네요. 뱅크시가 미술의 상업성을 경멸하는 것은 그런 맥락일까요?”
내 말에 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난 뱅크시가 예술가라고 생각지 않아. 그는 아트를 한다기보다 사회 비판 도구로 그림을 활용할 뿐이지. 일종의 포스터 같은 거야.”
“자신도 그라피티를 하면서 그런 말을 해요?”
“물론 로트렉이나 무하처럼 상업적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화가도 있어. 그럴 수 있었던 건 아티스트의 예술혼이 담겼기 때문이야. 그런 면에서 본다면 뱅크시는 메시지를 담고자 하는 목적이 더 우선이라는 거지. 내가 거리의 그라피티와는 별개로 따로 캔버스에 작업하는 이유는 바로 그 예술혼을 담기 위해서야.”
“아트가 뭐 별건가요? 사람들이 보고 뭔가 느끼고 감동하면 되는 거잖아요. 예술의 상업성을 철저히 비판하고 일반 대중 속으로 파고든 뱅크시의 방식이 전 왠지 통쾌한데요. 혼신의 힘을 다해 세상을 조롱하고 풍자하잖아요.”
내 말에 유진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 뭐 정답은 없는 거니까. 흥미롭기는 하네. 상업미술의 정점에서 스러진 바스키아나 그 대척점에 있는 뱅크시. 둘 다 그라피티 아티스트라는 공통점도 그렇고. 그 둘이 마치 이상 시에서 언급된 거울의 양면성 같다는 점도.”
유진의 말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바스키아의 도록을 뒤적여 보곤 깜짝 놀랐다.
“흑인이네요?”
내가 알던 화가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낙서 같은 그림에다 흑인이라니…….
“검은 피카소라고도 해. 제대로 된 정규교육도 받지 않았고 너처럼 거리의 화가로 떠돌다가 발탁됐어.”
“저처럼……이요?”
기분이 묘했다.
“혹시 알아? 언젠가 네 그림도 이런 화랑에 걸리게 될지.”
그 말을 듣는 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 당황스러운 나머지 얼른 농담조로 받아쳤다.
“요절하라고요?”
유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저 낙서 같기만 했던 그의 그림이 다시 보였다. 사진 속 얼굴은 눈빛이 강렬했지만 공허했고 몹시 불안해 보였다.
독서실에서 써야 할 시간을 ZERO팀에 쏟아 넣은 부작용은 피할 수 없었다. 유진이 내 그림에 어떤 기대를 하든 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한마디로 난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상에서 한 발 걸치듯 있다가 언제든 본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정서는 유진의 표현대로라면 아티스트라기 보다 뱅크시 쪽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니까. 적당히 균형을 이루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편두통에서 해방되던 시점이었다. 의심에서 걱정으로 바뀌어 가는 엄마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독서실은 열심히 다니는데 성적이 왜 이 모양이니?”
“몰라, 요즘 몸이 좋지 않은지 집중이 안 돼.”
“독서실보다는 과외 하는 게 낫겠다. 힘들게 왔다 갔다 하느니.”
엄마가 초조한 투로 중얼거렸다.
“유난 좀 떨지 말아요. 성적이 내려갈 때도 있는 거지.”
그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머쓱해져 얼른 변명을 덧붙였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고3 되려면 멀었잖아. 좀 더 혼자 해 보고.”
“고3 금방이야. 웬만한 대학 가려면 고2 때 다 끝내야 해. 요새 고3 수시 원서 쓴다, 뭐 한다 해서 공부할 시간 있는 줄 아니?”
엄마의 말은 잊고 있던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럭저럭 유지하던 성적은 이미 통제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알고 있으면서 회피했던 것이 피부에 와 닿자 두려워졌다. 지금껏 숨통을 조이는 것은 엄마라고 여겼는데 혼란스러웠다.
“너 요새 좀 뜸하다.”
유진의 말투에 섭섭함이 배어있었다.
“시험 기간이었어요.”
말하면서도 구차스러웠다. 엄마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난 자신이 없었다. 미술을 선택할 용기도 확신도 없었던 거다.
“미술을 전공해 볼 생각은 없는 거니?”
내가 잠자코 있자 유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험생이 취미로 활동하기엔 무리라는 거 너도 알지?”
왠지 날 밀어내는 것 같아 서운한 감정이 솟았다. 갑자기 유진의 잔소리가 엄마의 잔소리처럼 여겨졌다.
“결국, 물 흐리지 말라는 거네요.”
꼭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삐딱하게 내뱉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계속 앉아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두말없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유진이 쫓아와 팔을 잡았지만 뿌리쳤다. 난 어쩌면 구실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어정쩡하게 걸치고 있던 발을 빼낼 적당한 핑계 말이다.
ZERO팀에서 발을 뺀 지 꽤 되었는데도 성적이 오르지 않고 편두통만 다시 도졌다. 돌아갈 길이 막막해질수록 공부하는 내내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그림 그릴 때 손맛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수학 공식을 풀다가도 어느새 몸에 밴 터치와 배색 감각 탓에 불쑥불쑥 색채가 떠오르면서 색 배합 비율이 계산됐다. 결국, 집 근처를 배회하는 나의 밤 산책이 다시 시작되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시작이네.”
엄마는 그 미친놈을 잡겠다고 혈안이 되었다. 비눗물과 수세미로는 도저히 감당 안 되자 아예 페인트를 칠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정 지나길 기다렸다가 장비를 챙겨 몰래 집을 나섰다. 흰색만 아니었어도 경솔하게 반응하진 않았을 텐데 터져 버릴 것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검정 스프레이를 분사했다. 흰색을 유린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색은 없으니까. 막상 벽을 마주하자 선명하게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다. 들킬 위험도 잊은 채 정신없이 손놀림에 빠져들었다.
“결국, 이럴 거면서 팀은 왜 떠났니?”
느닷없는 목소리에 소스라쳤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유진이었다.
“스토커예요?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어떻게 알긴, 네가 여기저기 휘갈겨 대는 통에 우리가 또 난처해졌으니까. 네 그림체, 생활 패턴은 내가 이미 꿰고 있던 거고.”
유진이 손전등으로 방금 내가 그린 그림을 비췄다.
“이런 식으로 낙서만 하게? 정말 뱅크시 흉내라도 내겠다는 거야?”
낙서, 흉내라는 말에 감정이 치받쳤다. 유진이 잡은 팔을 거칠게 확 뿌리쳤다.
“이게 뭐 어때서요?”
“의미 없이 방치되다가 무자비하게 지워지겠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것이 기어코 폭발하고 말았다.
“상관하지 말라고요.”
나는 손전등을 빼앗아 던져 버렸다. 어둠 속에 솟구친 빛이 포물선을 그리다가 단말마와도 같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꺼졌다. 쨍그랑.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날카로운 비명이 동시에 들렸다. 곧이어 연쇄 반응처럼 이 집 저 집 불이 켜지고 개까지 짖어 댔다. 바닥에 널브러진 스프레이 통을 미처 수습할 틈이 없었다. 대충 배낭만 챙겨 든 채 유진의 손을 잡고 미리 봐 두었던 골목으로 허겁지겁 내달렸다. 골목에 들어서서 숨을 헐떡이자 유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나와요, 지금?”
“우리 처음 봤을 때 생각나니? 그땐 너 어리바리해서 나 아니었으면 잡혔을 텐데 지금은 아예 밤손님으로 나서도 되겠어.”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를 쫓던 발소리가 포위망을 좁혀 왔기 때문이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유진이 재빨리 내 몸을 훑었다.
“겉옷만 벗으면 대충 혐의를 벗을 수 있지? 시간을 벌 테니까 옷부터 정리해.”
“왜 도망쳐요? 같이 시침 떼면 되잖아요.”
그러자 유진이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나, 이 바닥에선 나름 유명 인사거든. 이 동네에서 네가 한 짓 다 뒤집어쓰라고?”
말은 그렇게 해도 유진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살짝 윙크까지 하고 골목 밖으로 내달렸다. 삑! 호각 소리와 함께 뒤를 쫓는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재빨리 모자와 겉옷부터 벗어 배낭 속에 구겨 넣었다.
“어이 거기, 잠깐 이리 와 봐.”
경찰이 나를 발견했을 때는 전봇대 뒤로 배낭을 밀어 넣고 있을 때였다. 나는 주위를 한번 두리번거린 후 주춤주춤 발걸음을 옮겼다.
“학생 같은데 이 시간까지 집에 안 들어가고 뭐 하는 거야?”
“사 산책 나왔는데요.”
말을 더듬고 말았다. 게다가 목소리까지 떨렸다.
“새벽 2시에?”
대답할 말을 찾고 있는데 유진을 쫓던 경찰이 숨을 헐떡이며 되돌아왔다.
“제가 쫓던 그 여자, 도망간 것 보면 범인이 틀림없어요.”
“그렇겠지. 어쩌면 공범이 있을지도 모르고.”
경찰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 몸을 한 번 더 훑었다. 나머지 한 명은 방금 내가 나온 골목 안쪽을 기웃거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걔는 아니에요.”
엄마였다. 잠옷 위에 겉옷만 대충 걸치고 나온 차림새였다. 그때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던 경찰이 외쳤다.
“여기 뭐가 있는데요.”
골목에서 나온 경찰이 들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툭 던졌다. 엄마가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경계심을 풀던 경찰은 배낭 속을 헤집더니 다시 추궁하는 눈빛을 보냈다.
“누구 본 사람 없어?”
엄마가 나 대신 변명처럼 끼어들었다.
“잘 생각해 봐. 어서!”
머뭇거리자 엄마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골목에서 마주친 사람 있었어요.”
마지못해 한마디 하자 경찰은 의혹이 가득 찬 투로 되물었다.
“인상착의가 어땠는데?”
“여기서 마주쳤다면 아까 그 여자가 틀림없어.”
다른 경찰이 다그치듯 재촉했다.
“여자치고는 좀 큰 편이었어요, 모자를 쓰고 있었고…….”
대충 둘러대자 경찰은 증거가 필요하니 그림을 지우지 말라고 당부하고 돌아갔다.
불안감은 기어이 현실로 다가왔다. 며칠 후 경찰서로 나와 달라는 연락이 왔다.
“네가 가서 확인 좀 해 줘야겠다는구나.”
엄마는 기어코 싫다는 나를 앞장세웠다. 경찰서에 들어서자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아니거든요. 그림체가 다르잖아요.”
“다르긴 뭐가 달라. 담벼락에 낙서하고 다니는 거 맞잖아.”
경찰 앞에서 뻗대고 있는 사람은 유진이었다. 그대로 몸이 굳는 것 같았다.
“낙서라니요, 우리가 그리는 건 엄연히 그라피티라고요.”
“그래피…… 그게 뭔지 모르지만, 목격자도 있다고. 어! 저기 왔네.”
나를 발견한 경찰이 반색했다.
유진이 놀란 눈으로 돌아보고 경찰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학생 이리 와 봐! 지난번 봤다던 사람. 이 여자 맞지?”
엄마가 차갑게 비웃으며 유진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잡아뗄 생각 마. 우리 아들이 봤다고 했으니까.”
고개를 돌려 동의를 구하는 엄마 눈빛은 강요에 가까웠다. 반면에 유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현기증이 일었다. 주춤주춤 뒷걸음치다가 도망치듯 경찰서를 뛰쳐나왔다. 거리의 건물이며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 같았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속이 메스꺼워 주체할 수가 없었다. 무작정 뛰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비틀거리며 어디로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질주했던 것 같다. 그런 나를 멈춰 세운 것은 며칠 전 그린 그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 앞이었다. 저만치 보이는 그림 속 소년은 담벼락을 향해 있는 힘껏 펀치를 날린다. 벽을 뚫고 나간 주먹이 허공을 향해 힘차게 뻗어 있었다. 그 완강한 뒷모습을 보자 왈칵 눈물이 솟았다. 원점에 다시 선 느낌.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 한 걸까? 이 시작의 끝이 어떻게 될지 여전히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은 우선 나에게 솔직해져야 한다는 거다. 눈물을 훔친 후 그림을 등진 채 돌아섰다. 그리고 경찰서를 향해 곧장 다시 뛰었다.











이조은
작가소개 / 이조은

2015년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 원작소설 창작과정’ 지원 작가로 선정.
2020년 계간지 《어린이와 문학》 겨울호 「하루의 실종」으로 청소년소설 등단.
2021년 제14회 〈웅진주니어 문학상〉 장편부문 수상.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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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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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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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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