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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방

  • 작성일 2022-09-16
  • 조회수 647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중단편)]



마녀의 방




이조은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머뭇거렸다. 백설 공주와 여왕은 다투기 시작했다.
↳나랑 얘 중에 누가 더 예뻐?
지금 우리가 하는 역극(역할극)은 ‘백설 공주와 일곱 마리 괴물’이다. 중학생이 되면서 어울리게 된 커뮤니티다. 학원 시간에 쫓겨 문자나 댓글로 치고받는 게 고작이지만, 스트레스 해소에는 그만이었다.
↳빨리 대답 안 하면 박살 낼 거야.
여왕이 재촉했다. 어쩌지? 거울인 내가 나설 차례였다. 머뭇대는 사이 밖에서 엄마가 불렀다. 이대로 나가 버리면 회원들 원성이 클 텐데……. 그래도 지금 엄마한테 들키면 곤란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쨍그랑.
↳헐.
↳깨진 거울 속으로 뭔가가 보였습니다.
하필이면 해설자가 끼어들어 내 역할을 살려 놨다. 해설자 댓글이 달리자 당황했던 여왕과 백설 공주도 다시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뭐, 좋아. 거울의 유언은 내가 제일 예쁘다는 거였어.
유언? 자기한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여왕의 속셈이 얄미웠다. 엄마가 재촉하지도 않는데 벌써 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타다닥 자판 소리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저 안 죽었는데요?
거울이 다시 살아나자 백설 공주가 재빨리 나섰다.
↳얘 안 죽었다는데? 그리고 잘 봐. 깨진 거울 속에 내 얼굴이 있어.
↳무슨 소리. 거울에 비치는 것은 바로 나야, 나라고!
여왕과 백설 공주는 옥신각신 싸우다가 결국 거울에 분풀이했다.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 해설자가 바람을 끌어들여 거울 조각들을 밖으로 날려 버렸다. 공기 중에 떠돌던 거울 조각은 사람들 눈에 박혀 진실만을 보게 되는 저주가 됐다나 뭐라나. 내가 그렇게 어이없이 퇴장당했을 때 방문이 열렸다. 엄마였다.
다음 날 교실에 들어서자 짝꿍 세희가 아이들한테 둘러싸여 카톡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내 자리는 벌써 세희의 단짝이 꿰차고 있었다. 비키라고 실랑이하는 것도 귀찮았고 무엇보다 인터넷이 차단된 내 휴대폰으로는 저 틈바구니에 껴 봤자 투명 인간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옆 분단에서 유미가 손짓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세희를 힐끗 쳐다봤다. 팔뚝에 감겨 있는 팔찌가 보란 듯이 반짝였다. 세희는 예쁜 데다가 엄마의 치맛바람도 유별났다. 선생님들은 유독 세희한테 관대했다. 덕분에 교복 차림에도 별 규제 없이 남다른 패션 감각을 자랑했다. 이런저런 후광효과로 인기를 독차지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썩 좋지 않은 성적임에도 항상 반장으로 뽑혔다. 유미가 대뜸 내 팔을 잡아끌었다. 곧 호기심 어린 수다가 이어졌다.
“지원아 너도 ‘마녀의 방’ 가입했니?”
사팔뜨기 눈이 나를 뻔히 봤지만 귀찮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카페지기라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유미는 ‘오지랖 촉새’라는 별명에 걸맞게 여기저기 안 끼는 데가 없고 게다가 입도 가벼웠다. 나는 능청스럽게 대꾸해 줬다.
“응. 나한테도 초대 메일이 왔더라고.”
학기 초에 받은 비상 연락망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공개 카페지만, 처음 회원 수 채우기에는 딱 좋았다.
“다른 역극 카페는 규칙이 많던데 거긴 없더라.”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가 끼어들었다.
“카페지기가 초짜라서 그럴걸.”
유미가 정곡을 찔렀다. 하지만 나는 되도록 규칙 같은 거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이들이 역극 카페를 찾는 이유는 스트레스 때문이니까.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놀고 싶어서 하는 아이들을 끌어들일 속셈이었다. 엄마가 인터넷을 차단한 바람에 내 휴대폰으로는 기존 카페에 드나들기가 번거로웠다. 그래서 호기심에 직접 카페를 만들어 봤다. 주로 밤에 컴퓨터를 사용할 때만 들어갔는데도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고, 관리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고지식한 유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규칙이 없으면 애들이 댓글을 막 달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뭔 상관인지. 이것저것 못마땅해하는 유미의 수다는 수업 종이 울리고 나서야 멈췄다.
선생님이 칠판에 문제를 써 내려가자 뒤에서 낮게 키득대는 소리가 났다. 메아리처럼 떠돌던 수군거림은 선생님이 돌아볼 때마다 수그러들었다. 가만 보니 세희도 책상 밑을 계속 힐끔거렸다. 슬쩍 옆구리를 찔러 눈치를 주었다.
“쉿! 이것 좀 봐.”
세희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엽기 사이트에 접속해 있었다.
⤷머리에 비닐봉지를 씌워 봐. 숨 막혀 난리 칠걸.
설정을 보니 ‘고양이 괴롭히기’였다.
“너무하지 않니?”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세희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밑에 주르륵 달린 댓글엔 학대 방법들이 나열되고 있었었다. 평소 같으면 무시하고 외면했을 거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 기르던 고양이 위니를 잃어버린 터라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길고양이를 주워다 길렀었는데 어느 날 훌쩍 집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발톱을 하나씩 뽑고 귀를 잘라 버려.
⤷그보다 수염을 태워 버리는 것은 어때?
누가 더 잔인한가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심하다며 비난하는 댓글도 달렸지만, 곧 짓궂은 호기심에 묻혔다.
⤷고양이 꼬리에 불붙여 보면 어떨까? 엄청나게 빨리 달릴 것 같지 않냐?
몸서리가 쳐졌다. 어디에선가 우리 위니가 그런 꼴을 당하고 있을 것 같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퍽!
그만 세희 휴대폰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선생님과 아이들 눈이 한꺼번에 쏠렸다.
“넌 반장이면서 수업 시간에 이런 짓을 해?”
“호기심에 딱 한 번 접속해 본 거예요.”
세희가 억울한 듯 울먹였다. 선생님은 세희를 심하게 나무라고 아이들 휴대폰을 모두 압수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수업 끝날 때까지 돌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원망하는 눈길이 한꺼번에 나한테 쏠렸다.
“윤지원 너 일부러 그랬지?”
세희가 매섭게 쏘아봤다. 실수였다고 했지만, 누구도 믿어 주지 않았다.
며칠 후 교실에는 나를 포함해 뒷정리를 끝낸 청소 당번 몇 명만 남아 있었다.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유미 휴대폰에서 계속해서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유미는 가방과 휴대폰을 잠시 책상 위에 놓아둔 채 화장실에 가고 없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도 문자 확인을 하는가 싶더니 나를 한번 힐끗 보고는 서둘러 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찜찜한 기분을 떨쳐 버리려고 할수록 계속되는 알림음이 귀를 자극했다. 저도 모르게 유미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누구게?
⤷맞혀 봐.
나만 빼고 우리 반 아이들 대부분이 초대된 단톡방에 글을 올린 것은 세희였다. 뒤이어 뜻밖에도 내 사진이 올라왔다. 언제 찍었는지 우스꽝스럽게 캡처한 얼굴에다가 눈을 위로 죽 찢고 수염도 그려 넣어 고양이처럼 낙서해 놓았다.
⤷왕 재수!!! 윤지원 진짜 모습.
⤷ㅋㅋㅋ 고양이 귀신 같다.
비웃고 조롱하는 댓글들이 계속해서 주렁주렁 달렸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인 줄 몰랐다. 떨리는 손으로 이전의 대화 내용도 찾아봤다. 그거라고 별다르지 않았다. 나는 뿌옇게 흐려지는 눈에 힘주었다.
“너 이거 뭐야?”
화장실 갔다 온 유미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나…… 나는 댓글 단 적 없어. 대화방에서 갑자기 나가면 애들한테 찍힐까 봐 그냥 두었을 뿐이야.”
“핑계 대지 마. 너도 똑같아.”
나는 눈을 흘겨 주고는 교실을 나와 버렸다.
누군가한테 쫓겼다. 어떻게 된 것인지 내 옷은 찢겨 움직일 때마다 맨살을 드러냈다. 넘어지자 여기저기서 나타난 시커먼 손들이 옷을 마구 찢었다. 몸을 가려 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손발이 투명한 줄에 묶여 제멋대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올려다보니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며 웃고 있었다. 눈, 코, 입이 너무 커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낯이 익었다. 누구지? 자세히 보니 내 얼굴이었다.
“헉……!”
악몽이었다. 어젯밤 역극이 떠올랐다. 우리는 밤늦도록 신데렐라를 괴롭히며 놀았다. 신데렐라역을 맡은 것은 세희였다. 내 역할은 신데렐라 언니1이었다. 특히 언니2가 얼굴에 상처를 냈는데도 신데렐라가 감쪽같이 성형수술을 하고 등장하자 회원들은 당황했다. 세희는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다. 웬만한 상황으로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뉴스에서 본 화상 환자가 떠올랐다. 너무 심한 것 같아 망설이던 중에 유미 휴대폰에 올라왔던 내 사진이 떠올랐다. 속에서 꿈틀대던 감정이 부글부글 끓었다.
‘장난인데 뭐 어때? 진짜도 아니잖아.’
나는 신데렐라 얼굴에 뜨거운 물을 확 부어 버렸다.
“너 요즘 늦게 자는 것 같더라.”
아침 식탁에서 엄마가 내 얼굴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숙제하느라 그래요. 과외에다 수행평가 과제까지 얼마나 치이는데.”
저도 모르게 엄마한테 뾰족하게 대꾸해 버렸다. 엄마는 갑작스러운 내 말투에 놀라 멈칫했다.
“걱정돼서 한마디 한 건데. 그렇게 짜증 낼 일이야? 그러고 보니 너 좀 이상해. 얼굴색도 안 좋고…….”
“걱정은 무슨…… 성적에만 목매면서…….”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리고 숟가락을 탁 놓았다. 의자를 뒤로 빼자 바닥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엄마가 정색하면서 내 팔을 잡았다.
“행동이 왜 이렇게 거칠어. 너 요새 뭐 하고 다니는 거니?”
나는 팔을 뿌리치며 엄마를 쏘아봤다.
“뭐 하고 다닐 시간이나 있어요?”
현관문을 쾅! 닫고 나와 버렸다.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폭발할 것 같은 불만이 더부룩한 가스처럼 속에 꽉 들어찬 느낌이었다. 역극하고 놀 때만 조금 진정되었다.
“중간고사 결과 나왔다. 학원도 안 다니는 지원이가 이번에도 1등이네.”
선생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시샘 어린 눈빛들이 온몸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선생님이 모르는 것이 있다. 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는 대신 과외를 받는다. 생활기록부에 올릴 자기 주도형 학습을 인정받기 위해서 몰래 하고 있었다. 엄마는 진학에 좀 더 유리해지려면, 선생님과 아이들한테 들켜서도, 말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무안해진 나는 선생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다가 유미와 눈이 마주쳤다. 유미가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다른 아이들은 재수 없어라, 하는데…… 정말 속없는 애다.
“내일 수학 쪽지 시험하고 독후감 숙제 있는 거 잊지 마라.”
공지를 끝내고 선생님이 나가자 아이들이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시험도 볼 거면서 독후감 숙제는 왜 내주는지 모르겠어.”
“맞아,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다고.”
“책보다 역극 놀이가 훨씬 재미있는데.”
아이들이 내 쪽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난번 대화방 일 이후로 아이들과 서먹해졌다.
세희가 새삼스레 어젯밤 역극 이야기를 꺼냈다.
“마녀 걔 너무하지 않니?”
세희가 내 닉네임을 말하자 아이들 입에서 슈미, 도도, 피오나등 역극에 참여했던 닉네임이 튀어나왔다.
“세희 네 닉네임, 혹시 피오나니?”
누군가 슬쩍 떠보자 세희가 펄쩍 뛰며 아니라고 잡아뗐다.
“아무리 역극이라도 마녀 걔가 좀 심하다는 거지.”
신데렐라역을 했던 세희 닉네임은 피오나가 맞다. 나랑 같이 언니역을 한 도도는 세희랑 제법 친한 애였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닉네임을 숨기며 시치미 떼고 있었다.
“신데렐라도 어제 얄미웠잖아.”
세희가 아니라니까 안심됐는지 아이들이 신데렐라에 대한 불만들을 쏟아냈다.
“마녀가 안 그랬으면 얼굴만 믿고 끝까지 밉살맞게 굴었을걸.”
일부 아이들이 마녀 편을 드는 것도 나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 거다.
“어쩌면 걔 진짜 마녀일지도 몰라.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게 하나둘이 아니야.”
“이상한 거 뭐?”
세희말에 아이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자기 카페인데도 불구하고 낮에는 도통 댓글을 달지 않잖아.”
세희는 분했는지 엉뚱한 쪽으로 이야기를 몰아갔다.
“그럼 우리가 마녀랑 채팅한단 말이야?”
장난스럽게 받아치던 아이들은 점점 세희의 말에 빠져들면서 표정이 굳었다.
“밤에만 채팅하는 것도 수상쩍잖아.”
“어휴, 야. 무서워. 팔에 소름이 쫙 끼친다.”
아이들 목소리가 떨렸다. 마녀의 핸드폰에 인터넷이 차단되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겁내는 것을 보자 왠지 통쾌하고 짜릿했다. 그 후 나는 각종 엽기 사이트와 공포물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더 기발하고 자극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예상대로 카페 회원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얼마쯤 지나자 반 아이들도 모였다 하면 역극 이야기를 했다.
“마녀랑 역극 해 봤어? 전에 하던 것과는 수준이 달라.”
“수준 다르게 끔찍해졌지. 그게 역극이냐? 주인공 고문하기지.”
누군가의 말에 유미가 대놓고 면박을 줬다.
“원래 조마조마하고 무서운 얘기에 더 끌리는 법이야. 회원도 점점 늘잖아.”
유미 말을 무시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동조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녀가 좀 심한 것은 사실이지.”
웃기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아이들조차 마녀의 방을 계속해서 기웃거린다는 거였다. 더구나 세희의 말 덕분에 마녀 괴담은 빠르게 퍼지면서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회원이 늘면서 욕설로 댓글을 다는 아이들도 생겼다. 아무리 카페 특징이 공포 콘셉트지만 욕설은 곤란했다. 내버려 두면 서로 치고받다가 삐져서 회원이 떨어져 나갈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공동묘지다. 심한 욕설을 하거나 문제 일으키는 회원들은 마녀가 잡아먹는다는 설정으로 퇴출하고 공동묘지에 아이디를 공개했다. 그런데도 유미는 마녀를 드러내 놓고 비난했다.
“마녀 걔 진짜 이상한 애야.”
“뜻밖에 평범한 아이일 수도 있어.”
나는 그럴 때마다 시침 뚝 떼고 능청스럽게 대꾸해 줬다.
“동화 속 주인공을 전부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애가?”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나 보지.”
“어딘가 뒤틀려 있어. 사이코가 분명해.”
졸지에 나를 사이코로 만들고도 유미는 마녀의 방을 떠나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역극 카페로 가면 되잖아?”
“다 물들어서 비슷해졌어. 심지어 ‘마왕의 방’도 생겼는걸. 예전에 하던 역극이 재미있었는데.”
유미가 은근히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나랑 마녀의 방에 가서 테러하지 않을래?”
“싫어. 난 관심 없어.”
슬쩍 발뺌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예상과 달리 유미의 방해는 끈질겼다. 갑자기 끼어들어 상황을 엉뚱하게 바꾸거나 김빠지게 했다. 얼마 전 귀신 역극 할 때는 쫓기던 주인공이 결정적인 순간에 방귀를 뀌어 귀신이 도망갔다는 황당한 결말을 만들었다. 방귀가 귀신 잡는 독가스였다나? 번번이 그런 식으로 분위기를 망쳐 강제로 퇴출할까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유미의 독특한 활약이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뜻밖의 황당 버전에 재미를 느낀 아이들이 꽤 많았다. 공교롭게도 유미의 방해 작전은 마녀의 방을 더 유명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루는 유미가 여느 때와 같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만을 하소연했다.
“이제는 아무도 동화 속 주인공을 맡으려 하지 않아. 이게 다 마녀 때문이야.”
“하긴, 주인공 괴롭히는 악역이 더 흥미진진하지.”
누군가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를 서로 자기 방에 초대하지 못해 안달이라며?”
나도 모르게 슬쩍 끼어들었다.
“마녀 걔가 별 엽기적인 발상을 다 하거든.”
유미의 대꾸에 괜히 억울한 마음이 생겼다.
“뭐 마녀 때문이냐? 애들도 똑같지.”
“마녀가 아이들을 다 물들여 놓은 거라고.”
정말 그럴까? 마녀의 활약이 아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폭발적인 관심을 끌 수 있었을까? 유미가 조금만 눈치 빠른 애였다면 내가 마녀라는 것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나는 시침을 뚝 떼면서도 아이들 수다를 귀담아들었다. 아이들 모르게 함께 어울리다 보니 세희 말처럼 마치 내가 정체를 숨긴 진짜 마녀라도 된 기분이었다. 나는 마녀 캐릭터를 이용해 평소 못마땅해하던 아이들을 손봐 줬다. 그러던 어느 날 ‘킬러’라는 아이디로부터 쪽지를 받았다.


유명 카페라고 해서 들어와 봤는데 캐릭터 방이 없네.
내가 그림 좀 그리는데…… 만들면 대박 날걸.


그러면서 음산한 마녀 캐릭터 그림을 보내왔다. 제법 그럴듯했다. 별생각 없이 방을 만들어 주고 카페를 나왔다.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난리가 났다.
“야, 너 마녀의 방에 새로 생긴 캐릭터 방 들어가 봤어?”
“완전. 쩔어.”
몇몇 아이의 호들갑이 거슬렸다. 어제 쪽지로 제안한 아이가 장담했던 것이 떠올라 그러려니 했다. 들리는 소리가 점점 심상치 않아서 만만한 유미를 찔러 봤다.
“왜들 저래?”
유미가 내 손을 잡아끌더니 휴대폰을 꺼내어 화면을 보여 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잔인하고 끔찍한 그림들이었다. 생생한 묘사가 댓글로 주고받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실감 났다.
“마녀로는 성에 안 찼나 봐. 기어이 악마까지 끌어들인 거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반응에 유미가 당황스러워했다.
“너처럼 심약한 애는 아예 마녀의 방 같은데는 얼씬도 하지 마.”
인터넷이 차단된 내 핸드폰에 짜증 났다. 빌려서 처리하면 내가 카페지기라는 것을 들킬 거고. 속수무책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집에 가자마자 후다닥 캐릭터 방부터 폐쇄했다. ‘킬러’한테 다시 쪽지가 왔다.


너 뭐냐? 혹시 초딩? 네 카페, 마녀의 방 앞에 ‘꼬마’자 붙여라.


자존심이 확 상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킬러는 퇴장해 버렸다. 캐릭터 방을 정리한 후 나는 변함없이 마녀로 활동하면서 위상을 떨쳤다. 적어도 우리 학교에서 나는 얼굴 없는 스타였다.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전혀 외롭지 않았다. 다 내 손바닥 안에 있었으니까. 거리를 두고 마음껏 조종하고 복수하는 짜릿함이 더 컸다. 카페에서 내가 죽여 버린 아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유미는 마녀한테 그렇게 험한 꼴을 당하고도 고시랑대기만 할 뿐 자주 들락날락했다. 게다가 카페 반응을 빠르게 전달해 주는 정보통 역할도 톡톡히 했다.
학교 끝나고 나서는데 교문 앞이 어수선했다. 낯선 어른 몇이 아이들을 붙잡고 뭔가를 묻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언뜻 귀동냥해서 들은 바로는 근처에서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 고양이 엽기 살해사건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들을 붙잡고 묻던 아줌마 한 명이 내 이름을 불렀다. 일부러 나를 기다린 것 같았다. 아줌마는 신분증을 보여 주며 말했다.
“경찰이야. 잠깐 물어볼 게 있어.”
나는 바짝 긴장했다.
“너 역극 카페 운영자지?”
경찰 아줌마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필 그때 지나가던 유미와 눈이 마주쳤다. 유미가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내가 난처해하자 경찰 아줌마는 외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그림 본 적 있어?”
캐릭터 방을 없애게 했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킬러라는 아이디로 우리 카페에 들어온 적 있어요. 저는 바로 차단했고요.”
경찰 아줌마는 이것저것 물어본 뒤 끝으로 덧붙였다.
“그런 놀이 그만둬. 캐릭터 카페보다는 덜해도 거기도 좀 심하더라.”
나하고 직접 상관없으니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로 내가 고양이 연쇄 살해사건 카페와 연관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기 시작했다.
“지원이 너 정말 캐릭터 카페 회원이었어? 야, 의외다.”
유미는 한술 더 떠 염장 지르기까지 했다.
“헛소문이야.”
짜증 내며 쏘아붙여 주고는 말았다. 마녀의 방 카페지기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유미를 강제 퇴장 시키면 아이들이 눈치챌 것 같아 참았다. 나를 향한 아이들의 수군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관심 없는 척 시침 뚝 떼더니…….”
완전 내숭 백 단이라니까.”
처음으로 카페를 폐쇄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니 잃을 게 너무 많았다. ‘외로움, 스트레스, 복수 그런 것들은 다 어쩌고?’ 싶었다. 나는 카페를 그냥 두기로 했다.
활동을 자제하던 어느 날 우연히 상황극 방을 기웃거리게 됐다. 상황극이면 역할이 따로 없고 누구나 댓글을 달 수 있었다. 이번에 제물이 될 아이는 누굴까?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제안하고 주도하는 몇 명만 알고 있을 테니. 정작 당하는 사람은 모르는 데다 직접 피해 주는 것도 아니어서 참여하는 아이들은 마음껏 짓궂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야말로 마녀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잘난 체하고 얄미운 애가 있어. 주인공을 ‘얄미’로 정하고 골탕 먹이자.
아이디 삐리리몽의 제안에 순식간에 댓글 지원자들이 나섰다. 아이들은 동화 속 인물보다 어딘가에 있는 실재 인물에 더 흥미를 느끼는 법이다. 아는 닉네임들이 많아서 구경하다가 슬쩍 끼어들게 되었다. 유미도 끼어 있어 어떻게 방해할지 궁금했다. 삐리리몽이 먼저 가볍게 상황을 던졌다.
↳얄미가 밤길을 가고 있다.
↳뒤에서 누군가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얄미가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겁에 질려 달아나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땅에서 솟은 시커먼 손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닉네임 피오나가 댓글을 달았다. 세희다. 유치하게 손이 뭐람, 상상력하고는. 나는 혀를 끌끌 차 주고 상황을 바꿔 보기로 했다. 이쯤 해서 적당히 피도 흘려 줘야 아이들이 짜릿한 공포를 느끼는 법이다.
↳얄미가 가지고 있던 칼로 손목을 댕강 잘라 버렸다. 피가 솟구쳤다.
마녀 닉네임이 나타나자 아이들이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내가 주춤하는 사이 피오나는 제법 그럴듯한 상상력으로 치고 나갔다. 좀 더 쫓기면서 숨기도 하고 들켜야 재밌는데 이 팀은 얄미를 상대로 짓궂은 장난만 쳤다. 내가 누구인가? 마녀가 끼었으니 시시한 이야기는 사절이다. 내가 막 댓글을 달려는 순간, 누군가 선수를 쳤다.
↳얄미 등에 날개가 돋더니 하늘로 솟구쳤다.
어이가 없었다. 내 공격에 황당한 댓글을 단 것은 원더걸이었다. 유미가 유치한 구출 작전을 편 것이다. 날개라니……. 그런데 더 기막힌 것은 조금 전까지 얄미를 골탕 먹이던 아이들이 태도를 바꾼 거다. 원더걸에 동조해서 마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도와줬더니 오히려 날 노려? 다 덤벼! 기꺼이 상대해 주겠어!’
타다닥, 타다닥. 자판 소리가 따발총처럼 이어졌다. 나한테 도전했으니 무시무시한 결말로 응징해 줄 생각이었다. 나는 언젠가 읽은 중세의 마녀사냥 이야기를 떠올렸다.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역극에 참여했던 아이들 몇이 벌써 마녀의 활약상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역시 마녀야.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아주 끔찍하게 마무리했어.”
“도대체 어떻게 했는데?”
참여하지 않았던 아이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글쎄 막판에 얄미를 꿀통에 빠트리더라고.”
“그게 그렇게 끔찍한 거야?”
누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세희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들어봐. 온몸을 꿀범벅으로 만들어 들판에 묶어 놨어. 처음엔 우리도 뭐 하는 건가 싶었지.”
아이들은 세희의 말에 빨려들어 집중하고 있었다.
“알고 봤더니 온갖 벌레들을 끌어들여 먹잇감으로 삼은 거였어.”
이어진 세희의 말에 아이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몸서리쳤다. 나는 화장실 가는 척 아이들 표정을 하나하나 살피며 옆을 지나쳤다. 기분 탓인지 아이들이 나하고 시선도 못 맞추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마녀라도 된 듯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교실 문을 막 나섰을 때 유미 목소리가 들렸다.
“어젯밤 그 얄미캐릭터. 윤지원을 두고 만든 거지?”
“쉿! 듣겠어.”
세희가 앙칼지게 말을 막았다. 나는 얼른 복도 쪽 벽면에 몸을 붙였다. 교실 안쪽에서 변명처럼 덧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어.”
“맞아 그냥 장난 좀 치려는 거였다고. 그런데 마녀 걔가 끼어들어서 휘저어 놓은 거지.”
갑자기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벌레가 기어오르는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쫓기듯 화장실로 달려갔다. 허겁지겁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근 후 변기 뚜껑을 덮고 털썩 주저앉았다. 후들거리는 몸을 양팔로 꽉 감싼 채 웅크렸다. 그런데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괜찮아, 난 마녀야. 그런 것쯤은…….”
하지만 내 목소리는 이미 잠기고 있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머리 위로 수업 시작 알림음인 〈소녀의 기도〉가 울려 퍼졌다.











이조은
작가소개 / 이조은

2015년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 원작소설 창작과정’ 지원 작가로 선정.
2020년 계간지 《어린이와 문학》 겨울호 「하루의 실종」으로 청소년소설 등단.
2021년 제14회 〈웅진주니어 문학상〉 장편부문 수상.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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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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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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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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