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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거리 빵 미터

  • 작성일 2022-09-16
  • 조회수 1,00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중단편)]



너와 나의 거리 빵 미터




지슬영






뭉글뭉글, 하늘에 회색빛 순두부 같은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다. 닷새 동안 내리 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바람만 간간이 불었다. 혹시나 해서 뉴스를 보면 ‘한때 흐리다 맑아지겠습니다!’ 하고 웃는 누나 얼굴만 보였다. 벌러덩 드러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철썩철썩 쏴르르르, 파도 소리가 들렸다. 텔레비전 광고 소리였다.


“당신과 나의 마음, 몇 미터일까요?”


무슨 광고인가 싶어 고개를 슬쩍 돌렸다. 어떤 남자가 바다를 바라보다 핸드폰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끝.
“마음, 미터…….”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엄마 생각도 나고 아빠 생각도 나고 누나 생각도 나고 현구 생각도 나고, 그러다 한숨도 났다. 심심했다.
“잔칫꾸욱! 노올자아!”
마당에서 현구 목소리가 났다.
‘빵! 어데 장치국 님의 이름을 함부로!’
나는 벌떡 일어나 문을 뻥 걷어찼다. 사실은 시늉만 했다. 현구가 배시시 웃으며 오른 다리로 왼 다리를 쓱쓱 비벼 댔다. 비쩍 마른 다리가 오늘따라 더 말라 보였다.
“뭐꼬?”
“놀러 가자고.”
“아니. 몸을 왜 배배 꼬고 난리냐고.”
“내가?”
현구가 제 몸을 보더니 얼른 다리를 딱 세웠다. 현구는 뭔가 달콤한 것이 먹고 싶을 때 꼭 그렇게 한다. 빵을 하도 좋아해서 별명이 ‘빵’인데 지금은 마음껏 못 먹는다.
마당으로 나선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초콜릿을 현구 코앞에 들어 보였다.
“니, 이거 냄새 맡고 왔제? 우리 누나 배 타고 나가는 것도 다 봤고, 맞제?”
“헤헤헤.”
도시에 사는 누나는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씩 섬으로 들어온다. 대학을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꼭 하루씩 짬을 내어 맛있는 것도 사 오고 내 공부도 봐준다. 우리가 사는 섬은 아주 작아서 초등학교까지밖에 없다. 그래서 중학생이 되면 육지로 유학이란 걸 간다. 우리 누나도 일찌감치 유학을 갔다.
“잔칫꾹, 니는 진짜 좋겠다. 우리 형아는 한 번 나가가꼬는 죽어도 안 오던데 너거 누나는 억수로 잘 온다 아이가. 그카고 도시에 있는 마트에서 사 온 초콜릿은 신기하게 더 맛있더라!”
현구가 후다닥 내 앞으로 서더니 양손을 가지런하게 모았다. 나는 초콜릿 봉지를 뜯어 은박지를 벗겨내고 초콜릿 한 칸을 딱 소리가 나게 떼었다.
“아끼 먹을라꼬.”
“하모하모, 그캐야지.”
현구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입을 우왕 벌렸다. 나는 현구 혓바닥 가까이 초콜릿을 놓으려다 말고 날름 내가 먹어 버렸다.
“흐흐, 공짜가 어딨노!”
내가 달리기 시작하자 현구는 울상이 되어 “야아아앙!” 하고 콧소리를 내며 내 뒤를 쫓았다. 바다를 바라보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사이를 지나 마을회관을 지나 학교 담을 따라 뒷산으로 향했다. 현구가 따라잡지 못할 거 같으면 속도를 늦췄다가 가까이 오면 다시 내달리기를 반복했다. 며칠째 비가 온 탓에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물방울이 튀어 올라 종아리를 간지럽혔다. 할머니가 보면 구정물 묻히고 다닌다고 한소리하겠지만 그럼 뭐 어떠냐 싶었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뒤쫓아 오는 현구를 놀려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길이 좁아졌다. 조금만 더 오르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너럭바위가 나온다. 나는 그 바위에 앉아 바다 보는 걸 좋아한다. 속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바다가 한없이 미웠다가도 그 깊이가 얼마쯤일까를 상상하면 아득해진다. 그 느낌이 참 좋다. 그 깊은 곳 한쪽에선 뭔가 신비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럼 바다를 싫어했던 엄마가 육지로 나가 돌아오지 않은 일도, 아빠가 엄마를 찾아 떠났다가 더 멀리 하늘나라로 떠나 버린 일도 그럭저럭 괜찮아진다.
“야, 잔칫꾹! 진짜 이럴끼가?”
현구가 소리를 빽 질렀다. 뒤돌아보니 현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너무 달렸나 싶었다.
“빵, 힘드나?”
현구에게 다가서려고 한 걸음 내딛는데, 아뿔싸! 몸이 기우뚱했다. 뒤꿈치가 죽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고는 현구 발 앞으로 미끄럼을 탔다. 흙탕물을 뒤집어쓴 나를 보고 현구가 배를 잡고 낄낄 웃었다.
‘니도 당해 봐라!’
나는 현구 바지를 잡아당겨 내렸다.
“으으아악!”
현구가 내 쪽으로 엎어지며 나도 다시 바닥으로 푹 처박혔다. 하필 내가 있는 쪽으로 현구를 끌어당기다니, 진흙밭에 미끄러졌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다.
“오호!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잔칫꾹, 니는 이제 끝났다. 헤헷!”
현구가 온몸에 힘을 주며 내 몸을 깔아뭉갰다. 그때, 등 뒤로 뭔가 딱딱한 것이 푹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야! 빵, 좀 비키 봐라. 바닥에 뭐 있다 아이가.”
“응? 뭔데?”
현구가 몸을 발딱 일으켜 세웠다. 나는 몸을 돌려 내 등이 닿았던 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뭔가 둥그런 것이 솟아올라 있었다.
“이기 뭐꼬?”
현구가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우리는 산길 가운데 쭈그리고 앉아 흙을 파기 시작했다. 조금 있자니 둥글둥글하고 오동통한 것이 제 모습을 다 드러냈다. 단단한 돌 인형이었다. 아니, 돌처럼 보이는 흙 인형이었다. 누나가 저번에 가져온 고양이 인형이랑 느낌이 비슷했다. 조소과에 다니는 누나는 재미 삼아 만들었다며 종종 자그마한 흙 인형들을 가져다준다. 물론 누나가 만든 흙 인형들은 알록달록 예쁘다. 그런데 이건 진한 흙빛에 딱 봐도 오래된 것처럼 군데군데 긁힌 자국이 있었다. 한 15센티쯤 될까? 있는 대로 손을 쫙 펴도 한 뼘이 조금 넘는 크기였다. 얼굴은 동그랗고 가슴이 둥실하게 큰데다 엉덩이도 불룩한 것이 어찌 봐도 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표정은 꼭 부처 같았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서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는 모양이 예전에 누나랑 가 봤던 절에 있는 부처님 얼굴이랑 닮았다.
“에이, 별거 아이네. 나올라면 억수로 비싼 장난감이나 나올 것이지.”
현구가 아쉽다는 듯 손바닥을 탈탈 털었다. 실망하는 현구를 보니 또 장난기가 발동했다.
“빠앙, 이거는 보물이다, 보물!”
“그런 돌 같은 기 뭐가 보물이고?”
“니는 영화도 안 봤나? 이래 산속에서 아주 옛날에 만든 보물이 나오고 막 그카는 기다. 그카고 이런 거는 ‘토우’라 카는 기다.”
“토우? 그게 뭔데?”
“옛날 사람들이 흙으로 쪼물딱쪼물딱 만들어가 억수로 뜨거운 불에 구버서 만든 인형. 우리 누야가 학교에서 이런 거 공부하고 만들어서 내가 쫌 안다. 이거는 분명히 억수로 오래된 보물이다!”
“치, 그걸 니가 우예 아노? 여기 놀러 온 사람이 실수로 떨어뜨렸을 수도 있다 아이가.”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가끔 섬으로 대학생 누나, 형들이 여행을 오기도 하니까. 그래도 왠지 보물이었으면 했다. 누가 잃어버린 물건보다는 보물이 훨씬 멋지니까. 뒷말을 어떻게 이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데 갑자기 현구가 달려들어 내 바지 주머니를 뒤적뒤적했다.
“그카지 말고 초콜릿이나 먹자, 응? 치국아, 응?”
콧소리까지 섞어 가며 말하니 더 못 봐줄 지경이었다. 난 토우를 들고 얼른 일어났다.
“이래 위대한 보물도 몰라보는 사람이 11년째 내 베프라니,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난 이만. 빵, 잘 가라.”
토우를 들고 너럭바위를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씩씩대는 현구의 숨소리가 들렸다. 저러다 정말 울지도 모른다. 현구는 초콜릿 앞에만 서면 여섯 살 꼬마가 된다.
“알았다 알았다. 고마해라. 줄 테니까 얼른 오기나 해라.”
그제야 현구는 환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너럭바위 위에 앉았다. 저 아래로 오랜만에 고기잡이를 나온 통통배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현구 아빠도 있을 거다. 예전 우리 아빠처럼. 나는 초콜릿 하나를 똑 떼었다.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노?”
“어? 음…… 세 시간?”
“그래? 그카믄 하나는 먹어도 되겠다. 니, 이따 저녁 먹기 전에 엄마한테 꼭 말해라, 초콜릿 하나 먹었다꼬. 치국이가 줘서 어쩔 수 없이 먹었다꼬, 알겠나?”
“응응.”
현구는 고개를 끄덕대더니 세상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초콜릿 한 조각을 혓바닥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오물거렸다.
“그래 좋나?”
“으으.”
현구는 대충 대답하고는 입안 가득 뱅뱅 돌리고 있던 침을 꿀떡 삼켰다.
“이야, 이제 쫌 살꺼 같네! 아무 때나 못 먹으니까 더 아무 때나 막 먹고 싶고 그칸다. 웃기제?”
배를 쓱쓱 문지르며 웃는 현구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니, 여서 계속 살면 안 되는 거지?”
내 물음에 현구는 콧김을 한 번 훅 내뱉기만 했다. 내일이 현구가 이사 가는 날이다.
현구는 때때로 배에 주사를 맞아야 한다. 소아 당뇨는 관리만 잘해 주면 아무렇지도 않은 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 ‘관리’가 보통 일이 아니다. 규칙적으로 혈당 체크를 해야 하고 필요할 때마다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한다. 우리가 다니는 학교는 너무 자그마해서 보건실도 없고 보건 선생님도 없다. 그래서 때가 되면 현구가 직접 주사를 놓아야 한다. 현구는 교실에서 주사기를 꺼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현구와 나 말고 1학년 동생 한 명, 3학년 동생 한 명이 같이 수업을 듣는데 그 아이들이 보는 게 싫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화장실로 가 현구가 직접 주사를 놓고 내가 도와줬다. 내가 도와준다는 건,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거다. 화장실 밖에 서서 누가 오는 건 아닌지 망도 봐주고, 가끔은 노래도 불러 줬다.
두 달 전쯤 어느 날이었다. 좁은 화장실로 들어가는 현구를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이라 그런지 화장실 냄새가 유독 심했다. 나는 다짜고짜 현구를 화장실에서 불러내 뒷산 너럭바위로 올랐다. 그날 처음 봤다. 현구가 주사 놓는 모습을.
“아프나?”
“처음에만 따꼼한다. 그냥 기분이 좀 안 좋아져서 그러지.”
“왜?”
“왜? 당연히…… 왜지?”
현구는 자기 머리를 긁적이다 말고 피식 웃었다. 그다음엔 나도 입을 다물었다. 뭘 더 묻는 게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다. 현구가 떠나면 이렇게 너럭바위에 올라 바다를 보며 주사를 맞는 일도 없겠지.
현구가 익숙하게 주사기를 꺼내 배에 주사를 놓았다. 난 일부러 바다 먼 곳을 바라보았다.
“끝!”
현구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뒷정리를 하는 현구를 보니 속이 상했다.
“자, 보물. 이별 선물.”
토우를 현구 쪽으로 내밀었다.
“에이, 뭐꼬…….”
현구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토우를 꼭 움켜쥐었다. 그런데 현구가 토우처럼 둥그레진 눈으로 내게 물었다.
“이거 와 뜨듯하노?”
“뭐?”
“이거 봐라, 뜨듯하다!”
“내가 잡아서…… 그카겠지.”
나는 현구가 내민 토우로 손을 뻗었다. 현구 손과 내 손이 모두 토우에 닿는 순간 찌르르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흘렀다. 그리고 머릿속에 어떤 얼굴이 휙 스쳤다. 얼핏 토우와 비슷한 얼굴 같았다. 목소리도 들렸다.


“무엇을 원하니?”


흠칫 놀라 손을 떼었다. 탁! 토우가 너럭바위로 떨어졌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두 눈을 껌벅이며 너럭바위로 떨어진 토우를 내려다봤다.
“치국아, 니 있잖아. 혹시 방금, 무슨 소리 몬 들었나? 무엇을 원하니이이이.”
현구 말에 온몸으로 소름이 쫘르륵 돋았다.
번쩍! 쿠궁 쿵!
갑자기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더니 쏴아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토우를 집어 들었다. 언제 그랬냐 싶게 차디찼다. 깨지거나 금이 갔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토우는 멀쩡했다.
“빵, 내려가자.”
나는 얼른 앞장서 뒷산을 내려왔다. 현구가 뭐라 뭐라 꿍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빗소리에 섞여 잘 들리지 않았다. 갈림길이 나왔다.
“잘 가래이!”
현구한테 손을 흔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서 누나한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건 분명 보통 토우가 아니다!


헐레벌떡 마루로 올라 입고 있던 옷을 싹 벗어 버렸다. 방 안쪽, 주방으로 통하는 문손잡이에 자그마한 수건이 걸린 게 보였다. 겅중겅중 걸어 수건을 낚아챘다. 쓱쓱 머리와 얼굴 쪽을 대충 닦아 내고는 얼른 토우를 닦았다. 빗물에 씻겨 그런지 긁힌 자국까지도 멋스럽게 보였다.
“전화! 어?”
전화기가 보이지 않았다. 텔레비전 앞, 무선전화기 충전기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 할머니이이이.”
할머니가 또 어디다 놓고 깜박한 게 틀림없다. 지난번엔 미숫가루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그 안에서 발견한 적도 있으니까. 서둘러 속옷만 갈아입고 여기저기 집 안을 돌아다니며 전화기를 찾았다. 각종 물건을 쟁여 두는 창고 방,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안방, 그 옆 작은 주방 겸 거실까지. 물론 냉장고도. 없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얼른 새 옷을 꺼내 입고, 되는 대로 아무거나 우산을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한참을 달려 현구네 집 앞에 도착했다. 새 옷이 그새 비에 젖었다. 우산살 한쪽이 구부러져 덜렁덜렁하더니 비가 다 들친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빗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현구야아아아! 방, 현, 구우우우!”
한참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상했다. 현구도 분명 집으로 갔을 테고, 그럼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리가 없었다. 현구 엄마가 온종일 짐을 싸도 쌀 게 더 남았다고 투덜댔다는 얘길 현구한테 들었던 터였다. 현구가 잠깐 어딜 나갔더라도 현구 엄마는 집에 있는 게 맞았다. 문득,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뭔가 저 문 안쪽에서 위험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휙 스쳤다. 때마침 바람이 휭 불었다.
삐그덕.
대문이 살짝 열렸다. 현구 엄마는 대문을 잘 열어 두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얼른 마당으로 들어섰다. 다 붙이지 않은 커다란 상자 하나가 마당 가운데 떡하니 나와 있었다. 비를 쫄딱 맞으며.
“현구야아아아!”
마루 유리문을 밀며 안에 대고 소리쳤다. 두근두근, 심장이 울려 대는데 갑자기 안쪽에서 “누고? 치국이가?” 하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현구 목소리였다. 하마터면 무릎이 꺾일 뻔했다. 한껏 긴장했다가 갑자기 풀려 버리니 꼭 큰 파도 하나가 빠져나간 모래사장에 서 있을 때처럼 몸이 스르륵 밀려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니 어딨노? 와 대답도 안 해가꼬 사람을 놀래키고 그카노!”
“내에? 똥 누는데에. 와 그카는데? 먼 일 있나?”
“똥이나 다 싸고 나온나.”
나는 무릎걸음을 걸어 거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젖은 바지 때문에 거실이 온통 흙탕물이 될 것만 같았다.
뚜두두두, 신호음이 울렸다.
“우리 치국이, 무슨 일?”
상쾌 발랄한 누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턱 놓였다. 나는 얼른 허리춤에 끼워 넣었던 토우를 꺼내 들었다.
“누야, 있잖아. 내가 억수로 오래된 거 같은 토우를 하나 찾았거덩. 보물 같다, 보물!”
나는 현구와 뒷산에 올라갔던 것부터 시시콜콜 다 얘기했다. 토우의 생김새, 느낌, 머릿속을 웅웅 울리던 목소리까지. 한참을 묵묵히 듣던 누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찾아볼게. 뭐, 자료 같은 게 있는지. 누나 이제 수업 들어간다.”
뭔가 대단한 반응을 기대했는데, 맥이 쭉 풀렸다. 찾아보겠다니, 뭔가 엄청난 보물이 분명한데 그저 찾아보겠다니! 대학에서 제일 유명한 보물 전문가를 당장 불러다 이 엄청난 물건을 보여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찾아보겠다니! 아, 대학엔 보물 전문가가 없는 걸까? 어쨌든, 누나도 결국 어른이 되고 만 거다. 어른들은 뭐든, 일단 나중에 하겠다거나 나중에 해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하니까.
“에이, 누나랑 내 마음은 한 백만 미터 되지 싶다.”
“니 뭐 하노? 백만 미터가 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현구가 물었다. 화장실에서 힘깨나 쓴 모양이다.
“백만 미터가 뭔데?”
“어? 아니 아니 그건 됐고. 빵, 일로 쫌 앉아 봐라.”
무릎걸음이고 뭐고 나는 거실 바닥에 철퍼덕 앉아 현구를 끌어내렸다.
“이기, 아무래도 이상하다. 니도 분명 들었다 캤제? 니 소원이 뭐고오오, 이카는 거?”
“아니.”
“뭐? 아니?”
“무엇을 원하니이이이, 이캤다꼬.”
“야! 그기 그거지!”
현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됐고! 빵, 우리 아까맨치로 이거 한 번만 더 만져 보자.”
“또오? 에이, 내는 싫다.”
“와?”
“좀 무섭드라. 귀신 나올라 카는 거 같았다꼬.”
현구 말을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았다.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게 예사소리는 아니었고 갑자기 천둥에 번개까지, 비가 오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도, 한 번만 더 만져 보자. 응? 내랑 니랑 둘 다 손을 대야지 그기 나타나는 것 같단 말이다.”
“잔칫꾹. 니 도대체 무슨 소원 빌고 싶어 그카는데?”
현구 물음에 흠칫 놀랐다. 예리한 녀석.
“뭐, 그냥, 억수로 대단한 거는 아니고, 그러니까…… 이제 생각해 봐야지!”
사실은 내일 새벽부터 엄청난 태풍이 오게 해 달라고 할까, 잠깐 상상은 해 봤다. 가능하면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오고 바다를 뒤집어 버릴 만큼 바람이 불어서 당분간은 섬에서 육지로 나가지 못하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요즘 들어 제일 많이 하는 상상이다. 쉴 새 없이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부는 거, 아무도 이 섬에서 육지로 나갈 수 없게 되는 거.
“무슨 소원 빌 거냐니까?”
“벼, 병원! 병원 억수로 큰 거 하나 지어 달라꼬!”
키햐, 말해 놓고 나니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 머리에서 이런 생각이 툭 튀어나올 줄이야! 그래, 병원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건데 여태 그 생각을 못 하고 살았다. 큰 병원이 생기면 인슐린을 못 구할까 봐 발을 동동 구르는 일도 없을 거고, 현구한테 위급한 상황이 생겨도 바로 해결될 거고, 그럼 현구가 굳이 큰 도시로 가서 살지 않아도 되는 거다. 나랑 여기서 초등학교를 함께 졸업하고 중학생이 될 때 함께 육지로 나가면 되는 거였다.
“다 니를 아끼는 마음 아니겠나.”
내 마지막 말이 감동적이었던 건지, 병원 지어 달라는 소원이 감동적이었던 건지 현구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입술을 쭉 내밀더니 방바닥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순둥이 같은 녀석.
“할 끼가 말 끼가?”
일부러 더 크게, 도전적으로 물었다. 현구는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와?”
그때 쩌어억, 쿵! 어딘가로 큰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현구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드르르르, 드르르르.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유리문이 흔들렸다. 나는 토우를 다시 허리춤에 끼우고 나와 마루 끝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빗줄기가 더 거세졌다.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처마 안으로 비가 들이쳐 신발들이 홀딱 젖었다. 그때 마당에 놓여 있던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종이상자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비에 젖고 말았다.
“근데 빵, 저거는 뭐고?”
“나도 몰라. 너무 무거버서 못 옮겼다. 쨍그랑쨍그랑 소리 나는 거 보니까네 냄비랑 뭐 그런 거 넣었던 거지 싶다. 엄마가 누구 준다카는 거 같던데.”
“아줌마는 어디 가셨는데?”
“몰라. 나는 마당으로 뛰어 들어오고 엄마는 뛰어나가고. 그게 끝이다.”
“아저씨는? 너거 아빠 오늘 배…… 야, 클났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현구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산도 쓰지 않고 맨발로. 나도 얼른 달리기 시작했다. 현구는 내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속도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숨이 달려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 마을회관을 돌아 선착장으로 달리는 현구를 보며 생각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를!


온 세상에 빗살무늬가 그어진 것 같았다. 세찬 비바람 사이로 선착장 앞에 주저앉은 현구의 뒷모습이 보였다. 파도와 함께 통통배들이 뒤집힐 듯 출렁거렸다. 아저씨들은 배와 배를 연결해 단단히 묶고 있었다. 그런데 한 자리가 비었다. 선착장에 늘 매여 있는 배는 총 열세 척. 하나가 모자랐다. 주저앉은 현구 옆으로 현구 엄마 뒷모습이 보였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뭐라고 소리를 질러 댔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번뜩 허리춤에 꽂아 둔 토우가 생각났다. 앞뒤 가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얼른 현구에게 달려가 토우를 꺼내 들었다.
“현구야!”
현구는 그저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얼른 현구 손을 잡아끌어 조금 뒤쪽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토우를 함께 잡았다.
찌리릭!
온몸으로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쿵, 구웅 궁, 쿵!
하늘이 울렸다. 갑자기 귀가 먹먹해지고 몸이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현구와 나는 마치 인형이라도 된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말로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현구 뒤로 사방이 휙휙 돌아가고 있는 게 보였다. 아주 빠른 회오리가 우리 주위를 돌고 있는 것 같았다. 현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온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조금 뒤 우리가 맞잡은 토우 머리 쪽에서 하얀 연기가 덩어리처럼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그 덩어리는 점점 많아지고 커지더니 곧 하나로 합쳐지며 토우처럼 가슴이 둥실해지고 엉덩이가 불룩해졌다. 눈은 지그시 감고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던 그 입이 갑자기 벌어졌다.


“무엇을 원하니이이이?”


커다란 토우가 눈을 떴다. 그 눈에서 어찌나 밝은 빛이 쏟아지던지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아득해지고 식은땀이 났다.


“무엇을 원하니이이이?”


부드럽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꼭 엄마 같기도 했고 누나 같기도 했다.


“원하는 것을 말하렴. 너희 둘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 그 소원 이루어 주지. 무엇을 원하니?”


아주 짧은 순간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엄마를 찾아 주세요, 아빠를 살려 주세요, 병원을 지어 주세요! 아, 아니다! 그럼 안 되는 거다. 지금 그런 소원을 빌 때가 아니다.
“현구 아부지! 현구 아부지를 찾아 주세요!”


“흐으으음, 조오오아아아!”


갑자기 사방에서 불어오던 바람 소리가 멈추고 온몸이 뜨끈해졌다. 꼬리뼈에서 정수리까지 번개처럼 강력한 기운이 휘이익 뻗어 올라가는 느낌이 들더니 두 눈이 확! 떠졌다. 내 앞에 눈을 동그랗게 뜬 현구 얼굴이 보였다. 갑자기 바람 소리, 빗소리가 온몸을 휘어 감았다. 그때였다.
“저, 저게 뭐꼬?”
먼바다를 바라보던 이장 아저씨가 소리쳤다. 현구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동산처럼 불룩해진 파도가 선착장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마치 바다가 큰 파도 하나를 밀어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파도가 선착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람들은 그 기세에 눌려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슈우웅 철썩, 퍽!
큰 파도는 선착장을 홀딱 적시고 한순간 사라졌다.
“아이고, 현구 아부지이이이!”
찢어질 듯한 아줌마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만치 앞쪽, 뱃머리가 부서진 통통배 한 척이 보였다. 선착장 끝에 겨우 걸쳐져 반은 바다에 빠져 있었다. 빗속을 뚫고 사람들이 우르르 배로 몰려들었다. 조금 뒤 이장 아저씨가 현구 아빠를 둘러업고 배에서 나왔다. 다행히 정신을 차린 현구 아빠는 아줌마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정말로 끝인 줄 알았다고 했다.
“치국아…….”
현구가 얼빠진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았다. 우리가 함께 쥐고 있던 토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현구 눈가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현구가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빵, 병원은 몬 만들었다. 미안.”
으어엉, 현구가 울음보를 터트렸다. 어찌나 서럽게 꺽꺽대며 우는지 나도 조금 울컥했더랬다. 2년 전 우리 아빠 장례식장에서도 현구는 저렇게 꺽꺽 울었다. 정작 나는 너무 놀라서 울지도 못했는데 현구가 나 대신 울어 준 거다.
“잔칫꾸우욱…….”
현구가 별안간 나를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니는 엄마 찾고 싶었을 긴데, 아부지 보고 싶었을 긴데. 어흐흑, 니가 내 보물이다아아, 어어흑…….”
울먹이는 현구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한참을 돌아다니다 가슴에 꾹꾹 눌려 담겼다. 나는 다 괜찮다는 듯이 현구 등을 다독였다. 참 희한한 일이지만 그 손길에 내 마음도 같이 다독여졌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들렸다.
지금 현구와 내 마음은 몇 미터일까?











지슬영
작가소개 / 지슬영

제22회 〈MBC 창작동화대상〉을 받으며 글쓰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 서울문화재단 ‘첫 책 지원 사업’에 선정되었고, 그동안 쓴 책으로 『내가 있잖아!』, 『함께 연극을 즐겨요』, 『경성 무대 스타 올빼미』, 『셧다운』(공저) 등이 있습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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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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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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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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