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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봇

  • 작성일 2023-09-06
  • 조회수 621

JJ봇

노운아


   “알렉스?” 

   PM이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두 명의 알렉스가 동시에 반응했다. 작년에 영국에서 이곳으로 입사한 알렉스와 이곳에서 근무한 지 이제 4년 된 알렉스였다. PM이 누구 하나 이름을 바꿔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얼굴로 ‘남현’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그렇게 ‘남현이’는 새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지난 4년 동안 써 온 ‘알렉스’를 버리게 됐다. 


   이번 프로젝트는 긴급하게 결정됐다. 경쟁사 챗GPT의 열풍이 예상보다 강했고 이런 격동의 흐름에서 뭔가 획기적인 제품을 내놓지 않으면 한국에서 선도적인 위치에 있는 이 기업이 미국 빅 데이터 기업에 모두 잠식당할 거라는 우려가 더 커졌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AI 스피커, 기계 번역 앱 등 인공지능이 결합한 서비스를 제공하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시장의 획기적인 반응을 끌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전사 차원에서 수행 중인 프로젝트를 모두 점검한 결과 아웃풋이 부실한 프로젝트는 과감히 중단됐다. 거기에서 살아남은 프로젝트가 PM이 상부에 계속 진행돼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것이었는데 바로 알렉스와 남현이가 모인 지금 이 프로젝트였다. 

   언제까지 사람들이 SNS에 올라온 풍자 드라마를 보면서 웃는 것에만 만족해할까 하는 PM의 의견에 남현이와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 그는 꽤 괜찮게 생긴 녀석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매혹적인 생강빛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한국에 온 지 이제 1년이 좀 지났는데도 한국어능력시험(TOPIK)을 처음 치자마자 바로 5급을 딴 인재였다. 그는 포토 그래픽 메모리 소유자여서 한 번 보면 모든 것을 사진처럼 생생하고도 정확하게 기억했다. 이 회사의 고급 인재 유치 정책에 걸맞은 직원이었다. 무엇보다도 진짜 알렉스인 그가 뛰어난 건 ‘에스앤에스’라고 PM이 언급한 콩글리시를 ‘소셜 미디어’라고 잘도 알아서 이해했다. 괴물 같은 녀석임은 틀림없었지만 남현이는 자신이 변화에 적응하는 데는 남다른 능력의 소유자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여유를 가졌다. 남현이의 회사 정체성인 ‘알렉스’를 진짜 알렉스한테 빼앗겼지만 그런데도 남현이는 그것을 결코 불쾌해한다거나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해서 경계심을 내비친다든가 하는 먼저 입사한 자로서의 텃새를 내보이지 않았다. 이 회사는 남현이의 홈그라운드에 세워졌다. 그것만으로도 남현이가 여유로울 이유가 충분했다. 


   ‘프로젝트명 J봇’ 

   말하는 AI 스피커, 단순 상담 지원 챗봇도 그럴싸해 보이지만 결국 메타버스와 같은 기술일 뿐이다.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생존에 문제없는 장황한 솔루션은 마케팅용일 뿐이다. 우리 회사는 뭔가 다른, 기본 이상의, 생존에 꼭 필요한 솔루션으로 ‘J봇’을 살려야만 했다. J봇은 단순히 음성 지원만 하는 스피커에 불과한 로봇 인형이었다. 사용자가 일상 대화를 시도하면 거기에 응답하는 고작 그런 솔루션이었다. 이를 뛰어난 대화 생성 AI 로봇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J봇이 일상 대화를 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특수 목적 언어에 능통해야 했다. PM은 대화 생성 AI 로봇이 잠재적으로 인기가 높아질 거라고 내다봤다. 전화 대화조차 힘든 젊은 세대에게 직장 생활이라는 건 고통의 연속이었다. 밥그릇 싸움만큼 치열한 것은 없다. 밥그릇을 쥐고 끝까지 버텨 내야 하는 경력직 직장인과 그런 기성세대와 협업해야 하는 사회성이 떨어지는 새내기 직장인은 서럽다. 오직 직장인만을 위한 강력한 생존 도구를 우리가 완성해야 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였고 J봇의 업그레이드 당위성이기도 했다.

   문제는 데이터 모으기였다. J봇의 콘셉트를 따르려면 직장에서 발화된 자연어 데이터를 구해야 했는데 민감한 사안도 많고 해서 관련 언어 데이터를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다. 우리 회사는 상대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덜 포함돼 있고 덜 중요한 부서의 부서원 참여를 권고했다. 반발이 생겼지만 인센티브 우선 지급, 실적 압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근무 조성과 같은 다소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웠다. 그리고 우리는 사내뿐만이 아니라 외부 용역 업무를 맡긴 파견 회사에도 자연어 데이터 제공을 은연중에 요구했다. 그곳에는 대부분 비이과생 출신이 근무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부족함을 느낀 나머지 우리 팀은 자사가 운영 중인 포털에 실린 직장인 관련 인터넷 기사와 동영상 서비스 밑에 달린 댓글 모두를 수집했다. 직장과 관련이 깊은 특수 목적 문어와 구어를 닥치는 대로 흡수했다. 


   구체적으로 J봇을 어떻게 업그레이드할 건지 알고리즘 구성을 위한 논의에 착수했다. PM은 말없이 알렉스와 남현이의 의견만 경청했다. 남현이가 먼저 J봇 업그레이드를 위한 콘셉트를 이야기했다. 요즘 인기가 많은 익명 직장인 앱처럼 J봇이 기기 이용자나 다른 사람들이 쓴 고민 글에 달린 수많은 댓글 중에서 핵심만 추출한 후에 이것을 ‘대사’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 솔루션은 ‘텍스트 요약’을 위한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설계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음성 로봇이 해법을 답안지 읽듯이 조언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마치 자의식이 있는 존재처럼 J봇이 사람처럼 문장을 생성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예를 들면 ‘혼자 사는데 상사가 집들이해야 한다.’라고 요구하는 문제를 이용자가 J봇에 대고 말만 하면 그걸 어떻게 거절해야 하는지를 J봇이 문장에 감정을 넣어 대답해 준다는 식이었다. 물론 로봇의 목소리 톤과 어조도 사용자가 직접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PM은 남현이의 발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현이가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남현이 눈에는 진한 주홍빛으로만 보이는 그 생강빛 머리카락의 알렉스도 PM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좀 따뜻하게 냉정해 보였고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고 종국에는 또렷하고 명랑한 발음으로 말했다. 

   “남현, 발표는 훌륭해. 대단하다고. 좋았어. 하지만 할 말은 해 줘야 할 것 같아. 남현이 지금까지 발표한 것은 그냥 여러 사람의 지식을 합쳐서 말로 출력한 것일 뿐이야. 기존의 J봇 AI 스피커랑 똑같은 거야. 지금 주목받고 있는 챗GPT도 사실 그런 콘셉트야. 아무튼 남현이가 설명한 건 업그레이드된 대화 생성 AI 로봇이 아니라고.” 


   PM은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현이는 이상하게도 PM이 고개를 끄덕일 때는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남현이는 알렉스의 차갑지만 부드러운 지적이 듣기 싫지 않았다. 물론 알렉스가 PM처럼 왜 고개를 끄덕이는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남현이는 자신이 완벽히 틀린 헛소리를 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걸 느낄 새 없이 알렉스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알렉스는 챗GPT에 대해 뭐라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그는 런던 지역을 중심으로 통용되는 용인 발음 구사자인 것 같았다. 남현이는 이런 게 말로만 들었던 포쉬 잉글리시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냐하면 알렉스가 내뱉는 영어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남현이가 강남역 근처에서 성업 중인 토익 학원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는데 영어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고 하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깔끔하게 말하던 알렉스는 남현이의 표정을 보고는 멈췄다. 

   “영국 사람 모두가 RP를 하는 건 아니야. 단순히 물을 ‘오터’라고 발음하는 걸로 RP라고 부르지 않아. RP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영국 사람 중에서도 몇 안 되고 RP는 따로 배워야 해.” 


   알렉스는 눈치가 빠른 녀석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영어로 말하는 대신 펜을 들어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렸다. 그리고 왼쪽 동그라미가 좌변, 오른쪽 동그라미가 우변이라고 말했다. 남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현, 우리는 개발자야. 언어 장벽은 중요하지 않아.”

   “알렉스, 우리가 프로그래머라는 말이지?” 

   “맞아.”

   “개발자라는 말은 어디에서 배웠어?” 

   “여자 친구가 영어 전공한 한국어 강사거든.”

   두말할 필요 없이 알렉스는 난 녀석이기도 했다.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던 PM이 한마디 함으로써 회의는 끝났다. 

   “프로젝트명은 JJ봇으로 수정한다.” 


   수집된 직장인 자연어 말뭉치를 풀어낸 후에 형태 분석을 해야 했다. 그간 물불 가리지 않고 데이터를 모은 덕분에 용량이 꽤 됐다. 미가공 데이터 일부를 읽어 봤는데 정제되지 않은 말들뿐이었다. 


   천천히 와도 돼. 우린 회의 시작한다.

   김 과장이나 나나···. 받는 연봉 별 차이 없는 거 몰랐어? 

   퇴근 때 돼서야 화장하는 걸 보니 요즘 누구 만나?

   인사 좀 하지?


   남현이는 글을 읽고 피식했다. 체계가 없는 회사일수록 화가 많이 표출되고 대화는 직접적이었다. 신경 써서 읽지 않아도 대충 어떤 상황에서 대화가 이루어졌을지 조금 알겠다. 알렉스 말대로 남현이는 자신이 개발자인 것에 잠시 감사했다. 저런 대화가 난무하는 집단의 소속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알렉스도 천천히 미가공 데이터를 읽었다. 

   “남현, 첫 번째 문장 데이터를 분석해 봤어?” 알렉스가 물었다. 남현이와 알렉스는 영어로 대화하는 듯이 한국어로 말했다. 

   “아니.” 

   “난 분석해 봤는데.” 

   “정말? 어떻게?” 

   “내가 답하기 전에 먼저 남현이 말해 봐.” 


   남현이는 알렉스의 괴상하고도 정곡을 찌르는 말투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영국 사람한테서 받은 ‘한국어 분석’에 대한 질문은 어떤 의도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한국어 해석 능력을 묻는 건지 알고리즘 구성을 위해 규칙을 찾으라는 건지 좀 헷갈렸다. 첫 번째 문장은 반어법이라고 알렉스에게 말하면 될 것 같았다. 그 문장의 진짜 뜻은 표면적인 뜻과 반대 의미라고 설명하면 될 것 같았다. 그 이외의 문장은 분석이라고 할 게 있나 싶었다. 심지어 JJ봇의 생성값으로 나왔다가는 사회적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문장도 보였다. 

   “알렉스, 첫 번째 문장은 말이야.”

   “남현, 혹시 빨리 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고 말하려고 해?” 알렉스는 남현이가 하려던 말을 가로챘다. 

   “응. 영어는 한국어와 달리 반어적인 의미가 많지 않아서···.” 

   “그건 오해야, 남현. 난 영국 사람이라고. 잊지 마.” 


   그는 자신이 영국 사람이라는 말로 남현이가 하려던 말을 모두 설명했다. 언어에 탁월한 능력이 있는 그는 비이과생, 그중에서도 문과 출신일까? 영국에서 어쩌다가 한국에까지 왔나 싶은 개인적인 호기심이 일었다. 추론은 차차 해 나가기로 하고 남현이는 본격적으로 알렉스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남현이와 알렉스는 좌변과 우변에 배치할 항목을 설정하기에 앞서 입수된 자연어 데이터를 분석했다. 아무래도 한국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남현이가 유리한 건 당연했다. 

   “남현, 반어법은 이해했다고 했지?” 

   “응, 천천히 오라는 의미가 아니지.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에게 장난치면서 말하고 있지만 말하면서도 살짝 기분은 나쁜 것 같아.”

   “남현,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추측하는 것, ‘-(으)ㄴ 것 같다’로 알고리즘을 구성할 수 없어.” 

   남현이는 알렉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좀 더 기다려 보았다. 

   “‘천천히 와도 돼’ 우선 이 말의 형태를 어떻게 분석하지?” 


   알렉스가 묻는 말에 남현이는 뭐라고 답할지 몰랐다. 사실 언어 분석이라는 걸 남현이는 해 본 적이 없었다. 분석할 게 뭐가 있는 문장인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냥 천천히 오라는 그저 그런 말인데 형태 분석을 하라니, 그것도 영국 사람한테서 말이다. 

   “2급 문법이라서 아주 쉬워. 동사 뒤에 붙고 ‘V-아도/ 어도 되다’의 의미로 ‘허용, 허락’을 나타내.” 


   | 천천-히_오-아도_되-어. 우리-는_회의_시작하-ㄴ다.

      [서술<명령, 허용<불허용]


   결국, 그 문장은 어떤 행위를 허용한다는 의미의 문법이 상황에 따라 허용되지 않는다는 의미 변화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상하고 신비로운 머리카락, 생강이라는 의미의 진저, 톡 쏘는 맵고 싱그러운 향을 내뿜는 듯 그는 분명 영국 사람이었지만 신비롭게도 남현이의 언어를 꿰뚫고 있었다. 알렉스는 남현이에게 긴 설명을 했다. 명령문을 나타내는 종결어미가 없으므로 서술문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형태론 관점에서 보면 그 문장은 부사구와 동사구만 있기에 ‘천천히 오세요.’라는 명령문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했다. 주어 생략이 빈번한 한국어 특성이라고 말하면서 알렉스 자신도 주어 없이 말해야 하는 한국어가 가끔 낯설다고 했다. 그다음부터가 문제라고 했다. 형태 분석을 마친 데이터를 의미와 화행에 따라 분석과 분류를 차례대로 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은 그런 의미인 것 같았다. 우리 회사가 개발한 음성기록기가 알렉스의 목소리를 텍스트로 변환한 후에 바로 통역해 줬다. 일상 대화를 넘어서는 어려운 설명은 AI가 접목된 기술의 도움을 받았다. 

   “그럼 남현, 정말 마지막 질문이야. 그렇다면 좌변에는 뭘 배치해야 할까? 힌트, 우리 회사에는 없는 거야.” 

   “직급?”

   “맞아. 언어의 직급은 뭐지?”

   “존댓말.”

   “응. 높임말. 한국어 책에는 높임말로 표현해. 그럼 그걸 아카데믹 오드(word)로 바꿔 주면 스피치 레벨이라고 해.” 


   | 천천-히_오-아도-되-어. 우리-는_회의_시작-하-ㄴ다.

      [형태: 서술<명령, 화계/ 의미:허용, 화행:불허용]

      따라서(∴) 허용<불허용


   남현은 재빨리 스피치 레벨이 무슨 뜻인지 번역해 봤다. ‘화계’라고 번역됐는데 그 의미는 대화 상황에서 발화자가 청자에 따라 말의 높고 낮음을 표현하는 언어적 체계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알렉스의 말은 틀린 데가 한구석도 없었다. 그런데 남현이는 자신이 그의 설명을 왜 들어야 하는지 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건 문과 출신이 하면 될 거란 말을 하려다 말았다. 개발자는 프로그래밍으로 말하면 되는데 알렉스는 서양 사람답지 않게 말이 길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거저거 남현이에게 질문하면서 대화를 이끌어 가는 알렉스가 참 고맙기도 했다. 


   우리는 PM과 다시 중간 점검 회의를 했다. 대화 생성 JJ봇의 설계를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했다. 남현이가 전보다 좀 자신 있는 어조로 회의의 포문을 열었다. JJ봇은 미가공 데이터의 품사 태깅 후에 발화자의 화계를 식별해야 한다고 했다. 품사 태깅을 하면 자연스럽게 말뭉치의 형태 분석이 이루어지는데 이를 통해서 문장 종류를 분류하는 작업이 수행된다고 했다. 그다음으로는 발화문의 의미를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발화자가 가지는 발화 의도 즉, 화행을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JJ봇은 대화 맥락을 반영한 화행 기반 알고리즘을 구성해야 한다고 했다. 항상 고개만 끄덕이던 PM이 한마디 했다. 

   “그건 그냥 입력값을 단순히 나열한 거야. 트랜스포머 인공 신경망처럼 다면 복합적이지 않다고.” 

   “남현, 나와 대화한 걸 그냥 그대로 말하면 어떡해. 응용했어야지.” 알렉스의 말은 항상 그렇듯 절제돼 있었고 냉정했지만 정리된 친절함이 묻어났다. 남현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런데 부끄럽지 않았다. 다음번에도 알렉스는 남현이에게 또 어떻게든 대화를 통해 이끌어 줄 것이라는 신의가 생겼다. 


   곧이어 알렉스가 발표를 시작했다. 그가 제안한 알고리즘 구성의 핵심은 처음부터 발화자가 누구인지, 정보를 분석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정답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문장 제일 끝에 위치하는 서술어를 가장 먼저 분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화자와 청자의 화계를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한다고 했다. 화계가 명확히 분류되면 대화 생성 AI가 의미 파악을 자연히 할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그런데 의미부와 화행부 사이의 일치가 항상 발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문장이 내포한 의미가 대화 상황에 따라 어떤 화행 기능을 가지는지 알려 주는 ‘결정적 화행 결정면’ 분석이 알고리즘 구성의 핵심이라고 했다. 

   PM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남현이가 항상 해 왔던 생각처럼 알렉스는 정말 잘난 녀석이라는 것이 다시금 증명되었다. 기분 나쁘지 않게 사람을 배려해 주고 기회 주고 최종적으로 적당한 선에서 선을 긋고 배제하는 것까지 이 모든 걸 능수능란하게 할 줄 아는 진정한 능력자였다. 결국, 남현이는 언어학자가 형태소 분석해서 토큰화한 자료를 데이터 과학자이자 프로그래머인 알렉스의 지시로 프로그래밍을 위한 코드만 입력했다. 그런데도 알렉스는 우리 모두를 개발자라고 불렀다. 한국어를 잘 쓰는 감사한 녀석이었다. 


   |  시작한다.  회의 시작한다. 우리는 회의 시작한다. 

       [서술=서술]  [서술=서술, 화계:하향] 

       따라서(∴)  우리-는_회의_시작-하_ㄴ다.

       [서술=서술, 화계:하향/ 의미:행동 실행, 화행:행동 실행, 의미=화행]  


   | 〔           〕 시키나?        〔          〕 시키-나?

   | 〔           〕 치우겠습니다.  〔           〕 치우-겠-습니다.

   | 〔           〕 받았는데···.    〔           〕 받아-았-는데···.


   ‘시작하ㄴ다’는  ‘V-ㄴ/ 는다’의 형태로 반말이니까 화계는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것으로 예측할 수 있었다. 앞에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시키나?’는 ‘A/ V-(으)나요?’를 사용한 것으로 원래는 부드럽게 묻는 기능이 있는 종결어미지만 반말로 쓴 걸 봐서 이것도 화계가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고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발화자가 그냥 혼잣말한 것으로도 사용될 수 있으니 이런 경우는 하향 화계 또는 화계 없음으로 분류해서 프로그래밍 코드를 입력했다. ‘치우겠습니다’의 ‘V-겠-’은 발화자의 굳건한 의지가 반영된 문장이므로 보통 발화자가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말할 때 사용한다. 이건 상향 화계로 분류했다. 남현이는 미역 줄기 반찬을 오도독 씹듯 입을 중얼거리면서 작업했다. 그때 알렉스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소리쳤다. 

   “근데 남현, 지독한 냄새 나지 않아?” 

   “냄새? 전혀. 잘 모르겠는데?”


   평소 크게 감정 표현하지 않는 신사 같은 알렉스가 냄새에 이상하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남현이는 판교 근처에 쓰레기 처리 시설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불쾌한 냄새가 날 수 있다고 약간 성난 알렉스를 다독였다. 그리고 계속 냄새가 나는 건 아니니 그에게 유연한 자세를 요구했다. 남현이가 그에게 처음으로 어떤 것을 요구했다. 으쓱해진 기분으로 남현이는 알렉스의 지시에 따라 프로그래밍 코드를 입력했다. ‘받았는데···’의 ‘A-(으)ㄴ데요/ V-는데요’는 단순히 말 줄임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발화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를 때 일단 말을 던져 놓고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거나 유도하는 대화 상황이 포함돼 있었다. 반말인 걸로 봐서 좀 친한 동료 간 대화라고 볼 수 있기에 화계는 수평적이므로 수평 화계로 분류했다.

   남현이는 알렉스의 지시가 오면 성심성의껏 임했다. 일전에는 상거래 결제 페이지 분야에서 근무했는데 선임은 알렉스와 달랐다. 남현이처럼 한국어를 모어로 쓰는 한국인이었지만 말의 절반 이상이 영어였다. 혹자는 그걸 판교 사투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선임은 온갖 현란한 말만 외칠 뿐 남현이를 개발자라고 불러 주지 않았다. 함께 입사했던 동기이자 친구들은 금방 떠나갔다. 일이 힘들기도 했고 그들은 빠르게 변하는 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남현이는 문과를 비롯한 비이공계에 딱히 적성이 없었다. 그러나 비이공계생보다는 좀 나은 이공계 적성이 있었을 뿐 더 깊은 이공계 적성이 있지는 않았다. 이걸 서서히 깨달을 무렵 남현이는 치열한 이 업계에서 온화한 성품을 기르는 것으로 자신의 USP를 쌓았다. 이 말도 이전 팀 PM이 자주 쓰던 단어였다. 알렉스와의 관계에서도 남현이가 부처처럼 분자, 원자 단위를 넘어서는 그보다 더 미세한 소우주 단위 온화함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이 프로젝트 시작부터 가졌던 생각, 이곳은 남현이의 홈그라운드에 세워졌다는 것이었다. 


   알렉스와 남현이는 거의 매일 함께 일했다. 화행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결정적 화행 결정면’을 산출하는 수식을 알렉스가 세워야 했다. 언어 분석에 능통해서 문과일 거라 짐작했던 알렉스는 수리 공식을 세울 때는 이전의 능력을 뛰어넘는 집중력과 체력을 보였다. 남현이는 그에게 철저히 매혹당했다.


   결정적 화행 결정면의 수리 공식:의미<-1, 화행> 1 


   1. 천천-히_오-아도_되-어. 

      [형태:서술<명령, 화계:하향 / 의미:허용, 화행:불허용 ]  

      결정적 화행 결정면=화행> 1, 따라서(∴) 허용< 불허용 


   2. 우리-는_회의_시작-하-ㄴ다. 

     [형태:서술=서술, 화계:하향 / 의미:동작 실행, 화행:동작 실행] 

     결정적 화행 결정면=의미<-1, 따라서(∴) 동작 실행=동작 실행


   3. 이제-는_이렇-(으)ㄴ_일-도_시키-나? 

      [형태:의문=의문, 화계:하향 / 의미:부드러운 질문, 화행:불허용] 

      결정적 화행 결정면=화행> 1, 따라서(∴) 부드러운 질문< 불허용 


   남현이는 도대체 알렉스는 영국에서 뭐 하다 온 녀석일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때 또 알렉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또 나.” 

   “뭐가 난다는 거야?”

   “냄새.” 


   남현이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쓰레기 처리할 시간이 아니었다. 판교 일대 주민들이 악취 민원을 성남시에 제기해서 시 차원에서 악취 근원을 찾아 개선할 것이라는 기사를 읽은 것이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남현이만 전혀 냄새를 느낄 수 없었다. 남현이가 알렉스를 재차 달랬다.

   “알렉스, 우린 개발자야. 남은 토큰 데이터를 마저 분석하자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후각이 예민해져서 코가 잠시 이상 반응을 일으킨 걸 거야.” 


   4. 나_먼저_들어가-ㄹ게. 

      [형태:서술=서술, 화계:수평/ 의미:동작 실행, 화행:동작 실행] 

      결정적 화행 결정면=의미<-1, 따라서(∴) 동작 실행=동작 실행

     

      나_먼저_들어가-ㄴ다. 

      [형태:서술=서술, 화계: 하향/ 의미:동작 실행, 화행:동작 실행] 

      결정적 화행 결정면=의미<-1, 따라서(∴) 동작 실행=동작 실행 


      나_먼저_들어가-ㅂ니다.

      [형태:서술=서술, 화계:강한 하향/ 의미:동작 실행, 화행:동작 실행] 

      결정적 화행 결정면=의미<-1, 따라서(∴) 동작 실행=동작 실행 


   ‘-(으)ㄹ게’는 선택, 의지를 나타낸다고 알렉스가 말해 줬다. 그럼 알렉스 여자 친구가 문과여서 알렉스도 문과 출신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알렉스가 문과가 아니라면 남현이처럼 공과 출신인가? 남현이는 알렉스의 메타 한국어 설명을 계속 들었다. 발화자는 친한 동료 사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 화계는 수평 화계로 분류했고 남현이는 알렉스의 말에 따라 얼른 코드를 짰다. ‘나 먼저 들어간다’는 완전 반말로 하향 화계, ‘나 먼저 들어갑니다’는 상층에 있는 발화자가 공식적으로 퇴근할 때 부하 직원에게 ‘들으라’라는 발화 의도를 추정하여 완전 수직적이라고 해서 강한 하향 화계로 분류한다고 했다. 남현이가 그것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습니다/ㅂ니다’는 항상 ‘저는’과 함께 쓰여야 하기에 그걸 깬 건 그만큼 대충 말해도 괜찮다는 대화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남현이는 얼른 코드를 짰다. 


   그 이름만으로도 뭔가 있을 것 같은 판교를 뒤로 하고 남현이는 퇴근했다. 최첨단 설비로 지은 건물에 로봇이 소립자 단위 안정감을 지닌 채 돌아다녔다. 낯선 침입자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처럼 남현이는 사옥을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간단히 샤워한 후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었는데도 컴퓨터가 싫지 않았다. 재택근무를 지원해 준다면서 회사가 보낸 명품 의자가 떠받드는 남현이는 육체와 뇌, 뇌의 정신 이 모두를 합해도 결코 묵직한 인간은 아니었다. 의자는 당장 중고 거래 시장에 내다 팔아도 제값 받을 수 있는 상태였다. 남현이를 둘러싼 현재 조건은 최상이었다. 컴퓨터 옆에 걸린 합판인데 원목이라고 마케팅한 힙한 인테리어 거울을 쳐다보았다. ‘워러’라고 한번 발음해 본 후에 ‘오터’라고도 발음해 봤다. 서울로 올라온 첫 번째 이유는 토익 공부를 하러 온 것이었다는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곧바로 남현이는 프로그래머용 키보드를 쳤는데 그 촉감이 묵직했다. 조심스럽게 알렉스의 이름과 회사명을 구글 검색창에 입력했다. 개발자 알렉스로 추정되는 사람의 이력서 링크를 클릭했다. 


   옥스퍼드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라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 같았다. 남현이가 옥스퍼드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푸른색 겉표지에 벽돌처럼 두꺼운 사전을 만드는 곳이라는 정보가 전부였다. 남현이의 추측 즉, ‘알렉스는 문과일 것이다’라는 명제가 참일 순간이 다가왔다. 자세히 알렉스의 프로필을 살펴봤다. ‘오 마이 갓’이라고 남현이는 중얼거렸다. 그는 뼛속까지 ‘널드’인 녀석이었다. ‘범생이’라고 놀려 먹어도 불충분한 모범생 중의 모범생인 그는 놀랄 만한 스펙의 소유자였는데 다름 아닌 그는 옥스퍼드대 수학과 전공자였다. 

   그는 왜 여기로 온 것일까? 남현이는 또 궁금해졌다. 머리만 좋았지 집안 형편은 어려운, 다소 부유하지 못했던 앵글로색슨족이라서 돈 때문에 판교에 취업한 것일까? 돈이라면 영국에도 고액 연봉을 받을 곳이 많았을 텐데. 아니면 한국인 여자 친구를 영국에서 만난 것이었을까? 그래서 그 때문이었을까? 혹시 그도 블링크인가? 도대체 왜?


   주변이 파동처럼 울렁거리면서 어그러졌다. 맥스웰의 주장에 따르면 이 세계는 모두 파동, 전자기파의 산물이라고 했다. 남현이 회사가 운영하는 유명 블로거가 올린 글을 출근길에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울러 그에 따르면 인생의 풍파를 막기 위해서는 파동이 평소에 작게라도 움직여 줘야 나중에 발생할 파동도 작아진다고 했다. 따라서 잔잔한 울렁거림은 미래의 파괴적인 파동을 방지하기 때문에 현재의 흔들거림은 중요한 것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남현이는 비이과생이 결단코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누군가의 파편과 같은 정보라도 과학적이라면 일단 과학적인 사고를 따르는 편이 옳은 것이었다. 어쨌든 누군가는 철저한 검증을 했을 터. 검증한 후에 도출된 결과를 남현이는 지지해야 했다. 

   파동에 넘실거리는 책장 사이로 책 한 권이 보였다. 전자기학에 관해 설명한 글에 감동해서 그날 곧장 구입한 책이었다. 그러나 읽지 않은 채 책은 책장에 꽂혀 있기만 했다. 전자파에 펄럭이는 팔을 뻗어 그걸 집었다. 지금 남현이가 알렉스와 개발하는 대화 생성 JJ봇은 인간 신경망을 모사한 여러 인공 신경망 중에서도 트랜스포머 AI를 적용할 것이라는 PM이 한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남현이도 지금은 코드만 짜는 역할만 하지만 파동만 잘 타면 언젠가 남현이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입성을 인도하는 파동을 만날 거란 과학적 결론에 이르렀다. 남현이는 그 책을 잡았고 소립자 세계로 흡수되는 것처럼 거기에 빨려 들어갔다. 


   교감하는 출근길은 마치 700W 출력 전자레인지가 가루 혼합 브라우니를 쫄깃한 브라우니로 즉석 베이킹해 주는 것과 같았다. 전자기파는 미세 입자를 고체로 만들어 주기도 했고 고체 버터를 액체로 변환해 주기도 했다. 남현이의 오늘 아침은 이전과 달랐다. 전자레인지에 들어가서 몸 이곳저곳을 위생 소독하고 나온 것처럼 한결 가벼워지고 청아해진 느낌이었다. 남현이를 향해 오던 택배 처리 로봇이 훅 관통하는 것처럼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컴퓨터 앞에 앉은 남현이는 알렉스에게 그의 스펙에 대해 솔직히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초경량 소재로 만든 보잉 드림라이너 787기가 경쾌하게 하늘을 향해 이륙하는 것처럼 알렉스는 벌써 경쾌하게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남현이는 알렉스를 보자 우리가 왜 트랜스포머 AI를 JJ봇에 적용하는가가 궁금해졌다. 남현이가 멀뚱거리는 눈빛으로 계속 알렉스를 바라보니 그는 언제나 준비됐다는 눈빛을 보내면서 남현이에게 이야기의 포문을 열었다. 우리는 모스 부호를 해독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말 대신 말의 의미를 전달하는 수신호로 의사소통하는 것 같았다. 알렉스와 남현이는 그렇게 꽤 괜찮은 팀 개발자가 돼 가고 있었다. 

   “남현, 영어로 쓰인 책을 읽을 때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어떻게 해? 사전을 못 찾는다면?” 

   “문장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뒤에 있는 문장을 열심히 읽어.” 

   “바로 그거야.” 

  

   알렉스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화이트보드에 여러 가지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설명을 위한 개념어를 휘갈기며 써 내려갔다. JJ봇은 마치 자각이 있는 것처럼 직접 대화문을 생성하는 것인데 사용자가 듣는 생성 문장을 생성값이라고 했다. 이 생성값은 뒤에 배치된 문장의 의미를 역산하면 얻어 낼 수 있다고 했다. 남현이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글을 읽을 때는 보통 앞에서 뒤로 가면서 읽는데 모르는 어휘를 마주하게 되면 뒤 문장 읽기를 통해 앞 문장의 의미를 추론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것을 문장으로 생성해 내는 것은 나열 순서에서 얻는 것보다 역산을 통해 생성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했다. 이에 트랜스포머 AI가 이런 언어의 의미 유추에 잘 맞는 인공지능 신경망이라고 했다. 

   “남현, 이제 우리가 설정한 알고리즘에 서술어만 넣어서 문장을 생성해 보자고.”


   알렉스가 잠시 물 좀 마시겠다고 말한 뒤 자리를 떴다. 그가 판서한 수식과 좌변, 우변을 그려 놓은 알고리즘을 바라봤다. 마치 대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그림과 같았다. 남현이는 언제 이런 그림을 그려 볼 수 있을까 상상해 봤다. 그때 저 멀리서 알렉스가 남현이를 찾는 떨림을 들었다. 시뮬레이션은 데모 JJ봇이 있는 실험실에서 하자는 것이었다. 남현이는 미끄러지듯이 그곳으로 이동했다. 


   그 시간이 됐다. 온화한 알렉스가 히스테릭하게 반응할 때가 다가왔다. 남현이는 좀 긴장되기는 했지만 조심스럽게 알렉스의 신경질을 감내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           〕치우겠습니다. 〔           〕치우-겠-습니다. 


   “이게 시뮬레이션 문장이야. 그럼 남현, 앞에 뭐가 와야 해?” 

   “목적어?” 남현이는 알렉스와의 프로젝트를 통해 질문에 좀 감 잡았다. 

   “반만 맞았어. 정확히는 ‘N을/ 를’이 와야 해. 참고로 대학 부설 한국어학당 1급 초반부에 나오는 문법이야.” 

   남현이는 목적어가 필요한 타동사에는 ‘N을/ 를’이 나오게 설정하는 코드를 프로그램에 짜 넣었다. 

   “그런데 남현, ‘N을/ 를’이 나오지 않고 ‘알아서’ 이런 게 나왔다고 생각해 봐. 이 문장의 느낌이 어때?” 

   “‘알아서 치우겠습니다’라고 하니까 조금 건방지네.” 남현이 말했다. 

   “맞아. ‘알아서 치우겠습니다’의 의미가 화행보다 작으니까 화행이 결국 1보다 큰 거야. 화행이 1보다 크다는 의미는 화행을 생성값으로 가진다는 거야. 그러므로 이 문장은 하극상으로 유추해 볼 수 있어.” 


   |〔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           〕알-아서_치우-겠-습니다. 

      [형태:서술=서술, 화계:상향/ 의미:의지 표현, 화행:하극상> 1, 화행> 1] 

      (∴) 의지 표현<하극상


   남현이는 알렉스의 설명에 따라 좌변에는 품사, 형태, 화계가 출력되도록 코드를 짰다. 이제는 알렉스가 설계한 알고리즘이 진짜 혁신적인 생성 대화문을 만들어 낼 순간이 됐다. 


   생성값: *제가 맡은 일은(을)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오류:화행 미반영 

            *제가 어질러 놓은 곳은(을)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오류:화행 미반영 


   화행 미반영된 문장만 산출됐다. 이건 오류 생성값이다. 문법적 오류는 없었지만 저런 말을 들으려는 직장인 사용자는 없을 것이다. JJ봇은 직장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갈등과 문제점에 대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용자가 경험 부족이나 판단력 부족으로 혼자 처신하기 힘든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회사에서 들은 파편적인 언어를 입력값으로 입력하면 JJ봇이 상황을 계산하여 추론과 역산하고 이를 대화로 생성해서 완벽한 생성값을 출력하는 것이었다. 이용자는 출력된 생성 대화를 실제 목소리를 통해서 들으므로 미리 문제 상황 대비를 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건 직장인의 생존을 위한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올바른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의미가 없었고 대화 맥락을 고려한 화행이 반영된 문장을 생성해 내어야만 했다. 눈치 빠른 생성 대화 JJ봇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인데 실로 어려운 과제를 남현이와 알렉스가 떠안은 것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오류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알렉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창백했다. 저러다가 냄새 때문에 그가 폭발하면 어떡할까 하는 공포가 남현이에게 밀려왔다. 남현이의 공포와 걱정이 조금씩 전자기파로 스멀스멀 출력되자 남현이 주위를 둘러싼 세계가 그 주파수 신호에 따라 연주되는 교향악단 협연 같았다. 알렉스의 등만이 어떤 파동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알렉스, 오늘은 이상한 냄새가 안 나?” 

   “응, 전혀 안 나.”


   알렉스는 집요했다. 화행 미반영 오류를 접한 뒤 그는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았다. 남현이가 그를 불러도 그는 예전처럼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 옥스퍼드대 수학과 출신의 집중력과 체력은 저런 것일까? 남현이가 옆에 다가가도 알렉스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득 옥스퍼드대보다는 케임브리지대 수학과가 전 세계 대학 순위 1위라는 신문 기사를 읽은 것이 떠올랐다. 그런 순위가 알렉스의 취업에 고배를 안겨 줘서 한국까지 왔을까, 그래서 미세한 실수로 케임브리지대에 밀려서 지금도 오류를 산출해 낸 것일까 하는 남현이는 이런 비생산적인 생각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왜냐하면 알렉스가 남현이에게 어떤 코드를 짜 넣으라는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정적 화행 결정면’ 수식을 수정하는 데 매진했다.

  

   결정적 화행 결정면의 수리 공식:의미<-1, 화행> 1 

 

   알렉스는 처음에 세운 이 수식에 문제가 없었는지 냉엄하게 살펴봤다. 남현이는 알렉스가 빨리 오류 지점을 찾았으면 했다. 그는 꿈쩍하지 않았고 저러다가 미쳐 죽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그러나 알렉스는 남현이의 이전 PM들처럼 불같이 화내거나 남현이를 갈구지 않았다. 컴퓨터와 혼연일체를 이루던 알렉스는 돌연 여자 친구랑 한강에서 치맥 좀 하면서 머리 좀 시키겠다면서 조퇴했다. 할 일이 없어진 남현이는 대충 시간 좀 보내다가 퇴근했다. 


   집으로 돌아온 남현이는 평소대로라면 컴퓨터 앞에 앉았을 테지만 이날은 샤워 후 곧장 침대에 누웠다. 오류를 잡아내려고 온 힘을 쏟은 알렉스를 바라만 보는 것도 힘든 일이었나 보다. 그는 유튜브에 올라온 분자 구조로 만든 수면 유도 음악을 들었다. 음악의 끝자락의 멜로디가 울렁거렸다. 어딘가에서 싱그럽고 시큼한 향이 풍겼다. 입가를 적시는 딸기 즙이 감미로웠다. 어딘지 젊어 보이는 여인이 소반에 갓 딴 딸기를 한가득 담아 왔다. 라면을 ‘후루룩’ 불면서 삼키는 소리는 입술을 작은 동그라미 모양으로 오므려서 바람을 불어야 하는 ‘ㅜ’ 모음 때문인지 어딘가 둔탁하다. ‘흐르륵’이라고 형태도 모양도 없는 ‘ㅡ’모음을 넣으니 방정맞고 촐랑대는 것이 맛을 표현하는 소리가 아닌 것 같다. ‘쯔으윽 후룩’도 과즙이 풍부한 딸기를 베어 먹는 소리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묘령의 그녀와 남현이는 그렇게 신나게 딸기를 먹었다. 딸기를 집은 손목 아래로 과즙이 줄줄 흘러내렸다. 흐르는 과즙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건 깔끔하고 가볍지 않은 끈적거리고 텁텁한 정신 상태에서나 쏟아져 나올 법한 기괴한 풍경이었다. 곧 남현이는 몸을 꿈틀거렸다. 강한 파동이 남현이를 헤집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큰 파동으로 남현이는 침대에서 떨어졌고 정신을 차려 보니 휴대 전화 진동음이 컴퓨터 책상과 부딪치면서 집 안을 뒤흔들고 있었다. 알렉스의 긴급한 호출이었다. AI가 추천 아이템으로 소개해 준 ‘천연 향 딸기 디퓨저’ 마개를 닫고 잠을 자야 하는 걸 잊어버렸다. 당황한 나머지 남현이는 열려 있던 마개를 얼른 닫고 회사로 출동했다. 


   남현이와 알렉스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는 표정이 무척 고무돼 있었다. 영어 전공자 출신이면서 현재 한국어 강사로 재직 중인 완벽한 문과 출신 여자 친구가 일하는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함께 한강에서 풀었다고 했다. 그는 K-예능 못지않은 버라이어티 쇼보다 더 화려하고 다채로운 여자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자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피하지.”

 

   이 말을 들은 알렉스는 동료를 피하는 것이냐며 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그냥 동료와 좀 거리를 두는 게 어떻겠냐며 다독였다. 그러나 여자 친구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그렇게 온화한 생각보다는 더 강력한 정신 상태가 필요하다고 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말을 끝으로 남은 맥주를 시원하게 비우고 열심히 일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고 했다. 


   결정적 화행 결정면의 수정 수리 공식:의미<-1 화행≧1, 단 0≦배출 어휘≦1


   |〔           〕 피하지.   〔           〕 피하-지

     [형태:서술=서술, 화계:화계 없음/ 의미:동작 실행, 화행:동작 실행, 단, 배출 어휘] 

     결정적 화행 결정면=화행 단, 배출 어휘≦1, 따라서(∴) 배출 어휘(화행)>의미


   알렉스는 남현이에게 ‘단’이라는 새로운 수식 조건을 보여 줬다. 그는 ‘결정적 화행 결정면’의 정확도를 위해 품사, 화계, 형태가 위치한 좌변과 의미와 화행이 위치한 우변이 겹치지 않도록 설정해 놨는데 이때 ‘입력값’으로 완전한 비속어도 아니고 속담처럼 문화를 반영한 것도 아닌, 한국식 ‘배출 어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 큰 실수라고 했다. 그는 신속하게 수식을 설정했다. 화행이 단순 동작 실행을 의미한다고 해도 배출 어휘로 분류되는 변이는 1보다 작거나 같다고 분류해서 화행이 1보다 더 크거나 같다는 생성값을 갖게 된다고 했다. 


   드디어 때가 됐다. 처음 시뮬레이션을 했을 때 오류를 산출한 서술어를 다시 분석해 보기로 했다. 알렉스는 긴장된 표정으로 새로 수정한 수식을 보았다. 그는 그답지 않게 떨고 있었다. 이번에도 ‘화행 미반영’이라는 오류를 보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남현이도 벌써 걱정이 됐다. 알렉스는 수식을 입력한 후 실행키를 치기 전에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현, 혹시 이번에도?” 


   남현이는 알렉스의 말을 듣기만 했다. 간밤에 소립자 상태로 대우주를 분자 구조를 본뜬 음악에 홀려 정령처럼 쏘다닌 덕분에 차분해졌다. 

   “설사, 이번에도 또 그렇다 하더라도···. 난 절대 놀라지 않을 거야. 남현, 정말 맞아?” 


   남현이는 알렉스가 언급한 ‘설사’에도 놀라운 의미가 있다고 알려 줄까 하다 말았다.   ‘설령 –다 하더라도’와 같은 고급 문법이 한국어 문법 4급에 있는 걸 서점에서 파는 한국어 교재에서 쓱 본 것이 떠올랐다. 남현이는 조용했고 차분했다.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을 요새 부쩍 많이 느꼈다. 판교에는 과학적 신념과 창의성만 필요했다. 창의성이 없다면 과학적인 그 무엇으로 중무장해야 했다. 과학적인 탐구를 통해 무언가 대단한 발견을 할 수 없다면 과학적 탐구를 하려는 정신이라도 있어야 했다. 남현이는 인제 뭘 좀 알 것 같았다. 알렉스와의 만남을 통해 남현이는 계속 무언가를 알아 갔다. 알렉스는 실행키를 입력했다. 결과가 산출됐다. 


   입력값

   |〔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           〕알-아서_치우-겠-습니다. 

    [형태:서술=서술, 화계:상향/ 의미:의지 표현, 화행:하극상 단, 배출 어휘≦1, 화행≧1] 

   결정적 화행 결정면=화행 단, 배출 어휘≦1, 따라서(∴) 하극상(배출 어휘)>의지 표현


   생성값: 제가 싼 똥은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데모 상황 

   화계(상급자):자네, 싼 똥은 알아서 치워야지. 역산 추론 

   화계(하급자):제가 싼 똥은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생성값 


   알렉스는 모니터 화면을 꼼꼼히 살폈다. 그 어디에도 ‘오류’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는 해냈다. 한편으로는 정말 이런 말들을 한다는 것이 아주 경이롭기까지 하다고 했다. 알렉스는 성취감에 휩싸여 남현이를 쳐다보았다. 그때 남현이가 소리를 질렀다. 

   “알렉스, 어디에선가 지독한 냄새가 나지 않아?” 


   남현이는 코가 비틀어질 정도로 세게 붙잡았다.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 악취의 역습을 막고 싶었다. 알렉스의 얼굴이 물속에서 출렁거리는 것처럼 일렁거렸다. 알렉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악취로 신경이 예민해질 때마다 남현이를 다독여 준 것처럼 침착하게 남현이를 진정시켰다. 

   “남현, 난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아. 하긴 나도 정체 모를 냄새로 고생했어. 이 힘든 시기가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니까 마음 편히 가져.” 


   수식에 오류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로부터 JJ봇 프로젝트는 신속히 진행됐다. 기존 작업에 새로 추가된 작업은 토큰화된 자연어 데이터에서 ‘배출 어휘’를 0과 1로 세밀하게 분류해서 어떻게 프로그램 언어로 변환할지 논리를 세워야 했다. 


   | 똥-묻-으ㄴ_ 개-가_겨_묻-으ㄴ_개_나무라-네,_진짜. 

   | 오늘_아침-에_ 늦-어서_머리-도_못_감-고_해서_똥-머리_하-고_와-았-어. 

   | 와_진짜_똥X-를_빠-네.


   알렉스는 수식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기쁨과 악취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끝없이 밀려드는 ‘결정적 화행 결정면’ 정확도를 향상시키기 위한 배출 어휘의 분류 논리를 세우는 일에 슬슬 신경이 예민해졌다. 알렉스가 남현이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내용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했다. 온갖 불쾌한 어휘의 의미를 알아 가는 상황이 달갑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2주 동안 영국에서 쉴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프로젝트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남현이에게 내려진 업무는 화행 결정면에 혼선을 주는 변수, ‘배출 어휘’를 0과 1인 ‘비트’로 구현해 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메일 끝에는 남현이의 노고가 결국 생성 대화 JJ봇의 문장 생성 능력의 정확도를 높이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남현이는 ‘밑거름되다’를 읊조리면서 좀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알렉스가 남현이의 노고가 ‘자양분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처음으로 알렉스에게 서운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끝까지 동료를 위한 배려심을 잊지 않았다. 자기가 없는 2주 동안 재택근무를 해도 좋다고 했다. PM도 고개를 끄덕였다고 전했다. 


   재택근무를 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은 후에 남현이는 컴퓨터 앞에 있는 의자를 유심히 살폈다. 종일 앉아 있어도 허리가 아프지 않다는 그것에 처음 앉아 보는 것처럼 앉아 봤다. 이 의자를 회사로부터 배송받은 첫날 에스앤에스가 아니라 소셜미디어에 셀카를 찍어 올렸었다. 멋진 부러움과 격려의 의미로 아주 가벼운 소리 없는 하트만 쏘아 대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떠올랐다. 이 의자에 앉아서 일하기에는 너무나도 가벼운 남현이가 알렉스의 지시를 따르려고 일을 시작하려던 찰나,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맥스웰의 전자기학 책 옆에 놓인 AI가 추천해 준 인기 최고 ‘천연 딸기 향’ 디퓨저 마개를 열었다. 왜 이게 닫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전에 알렉스가 급히 호출해서 뛰어나가는 바람에 전자기파 이상으로 루틴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다는 걸 기억해 냈다. 남현이는 얼른 디퓨저에 스틱을 몇 개 더 꽂아 놓고 강한 향이 퍼지도록 했다. 

   천연 딸기 향 덕분이었는지 남현이는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무탈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간혹 중간 점검으로 PM이 주관하는 온라인 회의에 참석해서 알렉스를 만나곤 했다. 알렉스는 런던에 잠시 있다가 잉글랜드 남부에 있는 항구 도시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다행히 ‘배출 어휘’ 트라우마에서 많이 회복된 듯 보였다. 남현이는 문득 자신의 방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천연 딸기 향 디퓨저를 보았다. 영국 남부 해안선은 참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특히 침식된 절벽에 내려앉는 노을이 장관이라고 하던데 남현이는 화상 카메라를 통해 새삼 알렉스가 생강빛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알렉스가 이제 곧 서울로 돌아올 거니 이에 맞춰 재택근무도 종료될 것이라고 했다. 재빨리 JJ봇 프로젝트를 끝내야 하는 것에 모두 동의하면서 온라인 회의 화면이 툭 하고 꺼졌다. 


   알렉스가 영국으로 도피하다시피 휴가를 선택한 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차라리 회사에서 근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현이는 어떤 진창에 자꾸 빠져드는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전송되는 알렉스의 업무 지시는 아주 정확했다. 유럽 사람들은 휴가와 일을 아주 철저히 분리해서 생활한다고 얼핏 들은 것 같았는데 알렉스는 휴가 동안 업무 공백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남현이도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했다.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시간이 참 흐르지 않는 것 같았는데 하다 보니까 창문 너머로 노을 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방 안으로 스미는 퇴근 시간이 되면 그는 천연 딸기 향 디퓨저에 꽂혀 있던 스틱을 빼놓고 마개를 덮었다. 그나마 남현이가 자신을 볼 아주 적은 시간이 주어졌다. 

   어둠이 성큼 다가온 밤이었다. 그날 밤도 남현이는 어김없이 분자 구조 음악을 들으면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몽환적인 분위기가 지금까지도 우주 어딘가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는 은하철도 999의 존재를 알리는 것 같았다. 남현이에게 꼭 무슨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기도 했다. 죽지 않고 평생 우주를 떠도는 일은 한편으로는 낭만적일 거라는 생각에 몰입하는 사이 분자 구조 음악이 끝나 버렸다. 자동 재생으로 뒤이어 나온 영상은 코스모스 다큐멘터리에 관한 것이었다. 남현이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과학적인 물결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만으로도 그는 뭔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간 남현이를 짓눌렀던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떨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분명 업무 종료와 함께 마개를 덮어 놓았던 디퓨저에서 강한 천연 딸기 향이 새어 나오는 것같이 집 안에는 상큼한 어느 겨울이 도래했다. 


*

  

   ‘남현이는 지금쯤 회사에서 알렉스와 일 잘 하고 있겠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남현이가 가벼워진 만큼 난 무거워져서 어디로 나갈 수가 없다. 남현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회사로 가 버렸다. 나는 남현이를 위해서 디퓨저 마개를 열어 놓는 것으로 하루 업무를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아무도 냄새가 난다고 화를 내거나 흥분하지 않을 것이다. 

  

   | 와_진짜_똥X-를_빠_네.

  

   완전 비속어 ‘똥X’를 ‘똥구멍’으로 바꿔 놓고 다시 ‘항문’으로 바꾸었다. 이런 배출 어휘를 분석하는 일이 나로서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정신은 가볍지 못했다. 무겁고 끈적거리고 불쾌했다. 나에게는 냄새 나는 정신만 남아 있다. 정신만 남은 것도 사람 구실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는데 냄새까지 나는 정신의 소유자니 내가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이 세계에는 없었다. 밖에 나가서 거리를 활보할 때 받는 냄새나 풍기는 정신이라는 눈총은 이젠 익숙해져서 괜찮다. 나는 저 배출 표현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를 회사에서 직장 상사에게 출세하기 위한 부하 직원이 아부한다는 뜻을 속되게 표현한 것이라 기술했고 그걸 메모로 남겨 두었다. 알렉스가 세운 수식에 오류를 가져다주는 배출 어휘가 직장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객관적으로 정리해서 보내야 했다. 정제된 데이터를 가지고 알렉스는 그걸 남현이에게 어떤 프로그래밍 코드로 짜 넣어야 할지를 지시했다. 지독한 악취가 날 것 같은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게 익숙해질 법도 했는데 이번에는 나를 위해서 스틱을 집어 들어 디퓨저에 더 꽂았다. 

  

   진한 딸기 향이 내 몸을 휘감았다. 우리 가족은 그날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한 후 함께 거실에 모여 입가심으로 딸기를 먹고 있었다. 수업 시간 때 국어 선생이 우리 반에 던진 국문과 해묵은 농담을 어머니한테 들려줬다. 학문에 정진하라는 말이 듣기 싫었던 우리는 그저 그런 중소 도시의 인문계고에 다니고 있는 그저 그런 학생들이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한다는 생각이 직장은 잃고 싶지 않았던 국어 선생에게도 스쳐 지나갔으리라. 그는 냉큼 엄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자음 동화를 배우는 시간에 걸맞게 ‘학문[항문]을 닦자.’를 ‘항문을 닦자.’라면서 무리수를 두었다. 학생들은 모두 하품했고 그는 ‘국문과는 굶는 과.’라는 자조 섞인 말로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썰렁한 국어 선생의 농담을 전달했는데 어머니의 타박이 이어졌다. 상큼한 딸기 먹는데 ‘항문 닦자.’라는 소리는 그만 집어치우라는 것이었고 당신 아들이지만 참 선생님 무안했겠다 하는 선생을 향한 안타까움을 내비치셨다. 추울수록 당도가 높아지는 겨울철 딸기가 먼 훗날 오성급 호텔에서 운영하는 식당이나 카페의 디저트로 수십만 원 할 줄 알았다면 그날 나는 악취가 나든 불쾌하든 딸기를 모조리 다 먹어 치웠으리라. 

   “근데 이게 무슨 냄새지?” 어머니께서 질색하며 말씀하셨다. 

   “돈 준대.” 불쑥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여름이 되면 풍성한 푸른 잔디를 볼 수 있을 거라며 좋아하셨던 어머니는 집으로 이사 온 걸 흡족해하셨다. 주차장도 잘돼 있었고 마당 한쪽에는 바비큐 파티 할 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그해 겨울은 아버지 딸기 농사가 아주 잘돼서 어머니는 더 기뻐하셨다. 몇 년 사이 딸기 농사에 뛰어든 농가가 많아져서 경쟁도 치열해졌고 농산물 경매장에 직접 갖다 팔아 봐야 푼돈만 만지기 일쑤였기에 어머니의 기쁨은 당연하기도 했다. 


   | 〔              〕치우겠습니다. 


   생성값: 돼지가 싼 똥은 우리가 밤에 잠시 치우겠습니다. 


   저녁이 되면 근처 돼지 축사에서 분뇨 처리를 했다. 한낮에 하면 민원이 들끓어서 야간에 했는데 정해진 시간에 한다는 걸 이사를 자축하는 날에 딸기를 먹으면서 알게 됐다. 왜 이런 그림 같은 집이 어머니와 내게로 왔을까 하는 의구심이 금방 해소되는 시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딸기 먹기가 힘드셨던 어머니는 돼지 분뇨 냄새를 맡으시자 붉은 윤기가 흐르는 딸기가 곧게 꽂혀 있는 포크를 접시에 내려놓으셨다. 아버지의 말은 동네 발전 기금 명목으로 축사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준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 집에 대해서 불평할 수 없는 건 아버지 큰형이자 어머니께는 아주버님이신 나의 큰아버지께서 이 돼지 축사를 운영해 오고 계셨던 것이었다. 바비큐 파티는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그게_똥-이ㄴ지_된장-이ㄴ지_꼭_찍-어서_먹-어_보-아야_알-겠-냐?


   내가 생각해 봐도 이런 표현은 정말 너무 한 것 같았다. 이 문장에 어떤 의미가 포함돼 있는지 어떻게 설명해 놓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어떤 일을 직접 몸으로 경험하지 않아도 눈으로 본 것 또는 생각만으로 미리 헤아려 볼 수 있는 상황에서 불필요하고 고된 경험을 불가피하게 한 사람에게 책망하듯이 말할 때 사용하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이렇게 풀어놓고 든 생각은 이런 상황에서 쓰는 말에 왜 우리는 꼭 ‘똥’을 넣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곧잘 의문을 잘 품었다. 하라는 일을 하면서도 꼭 의문을 품었기에 내 정신은 악취와 가까워서 쓸모없었다. 남현이처럼 가벼워질 만반의 준비를 해도 모자랄 판국이었는데 가볍지 못한 대가로 나는 매일 수많은 배출 어휘를 치우는 일을 하고 있다. 이렇게 내가 배출 어휘의 의미 풀이를 해 놓으면 남현이는 이것을 ‘0’과 ‘1’인 비트로 분류했다. 배출 어휘로 추정되는 미가공 데이터를 분석해 보면 대체로 ‘결정적 화행 결정면’에 영향을 주는 ‘1’로 분류됐다. ‘0’으로 분류되는 일은 드물었다. 


 *


   남현이가 퇴근했다. 남현이는 디퓨저 마개 닫는 일도 그만했다. 나는 아무리 ‘천연 딸기 향’이라고는 하지만 인공적인 실내 방향제 냄새 맡는 것을 좀 쉬고 싶었는데 현재의 남현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점점 더 가벼워졌다. 오늘도 항상 해 오던 것처럼 우주 탄생과 관련된 짧은 과학 다큐멘터리 동영상을 틀어 놨다. 남현이는 금방 잠들었다. 나는 재빨리 마개를 닫았다. 어머니가 그리웠다. 한겨울에 비닐하우스 문을 열면 훅 풍겨 오는 그 흙 내음과 향기가 그리워졌다. 나는 그런 걸 기대하고 문을 확 열었다. 그만 발을 헛디뎌 나는 깊은 웅덩이 아래로 쑥 빠졌다. 


   ‘꿀꿀, 킁킁, 오잉크 오잉크, 첢첢, 뇌프뇌프’


   나는 가까스로 벽에 박힌 툭 튀어나온 녹슨 쇠고리를 붙잡았다. 추락하면서 거친 벽에 온몸이 쓸리고 까였다. 그러나 이 고통보다도 더 무서운 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소리였다. 헉헉거리는 거친 호흡 소리와 삽으로 바닥 긁는 소리가 뒤엉켜서 불협화음을 냈다.


   큰아버지가 사촌 형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계실 때였다. 성악을 한다기에 뒷바라지를 했는데 사촌 형이 대학 졸업 후에 서울로 대학원에 간다는 거 때문인 것 같았다. 큰아버지는 돈으로 사촌 형을 지원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돼지 축사로 막대한 수입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로 풍족하게 뒷바라지해 줬으면 사촌 형이 인제 그만 축사를 물려받아 같이 관리를 해 줬으면 했는데 사촌 형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큰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읽으셨는지 아버지는 사촌 형을 호통치듯이 다그치셨다. 서울서 대학원 졸업 후 어설픈 직장 가져 봐야 먹고 살기 팍팍할 거라는 아주 듣기 싫은 말을 퍼부어 댔다. 그 말은 꼭 나를 향한 것 같기도 했다. 대한민국에 예술로 자기 밥숟가락 책임지는 예술가가 몇이나 되느냐고 묻는 말에 형은 고개를 돌렸다. 예술적 재능도 이지적 지능도 없는 내가 당신 아들이니까 말 좀 가려서 하시라고 나는 아버지께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무지하고 사리 분별 능력도 원래부터 좀 모자랐던 탓인지 온화하게 가만히 서 있었다. 

   “어머니도 제가 돼지나 키우면서 똥이나 치우고 살면 좋겠어요?” 

  

    나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 어머니께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며 물어봤다.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셨다. 어머니는 그때 부쩍 피곤함을 많이 그리고 아주 자주 느끼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밭에서 일하시고는 귀가해 일찍 주무시는 생활을 해 오시던 어머니가 언젠가부터는 집에만 계셨다. 야간에 돼지 축사 분뇨 처리 작업이 시작되면 널었던 빨래도 얼른 걷으셨는데 요즘은 돼지 분뇨 악취에도 행동이 굼뜨셨다. 집은 돼지 분뇨 찌꺼기에 찌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야간 축사 처리 작업이 끝난 다음 날 학교에 가면 가끔 친구들이 나를 피하거나 코끝을 찡그렸다.


   어머니는 한여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집 마당의 잔디만 푸르고 푸랬다. 정말 축사에서 분뇨 가루가 날아오는 것이었을까. 잔디는 그걸 밑거름 삼았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도 아주 잘 자랐다. 어머니는 너무도 빨리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내 물음에 대답해 준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난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의 나날을 보냈다. 


   ‘꿱꿱. 끼이이이이이히’


   나는 죽을힘을 다해서 쇠고리를 붙잡았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지치지도 않으셨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분뇨를 막기 위해 팔을 쉬지 않으셨다. 그래도 돈을 쓸어 모은다고 뻣뻣한 아버지의 말투가 틀린 건 아니면서도 역했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버텼지만 아버지와 큰아버지처럼은 아니어도 배출 어휘와 함께 온종일 뒹구는 건 별반 차이 없었다.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점점 버틸 힘이 사라져 갔다. 나는 돼지 똥간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팔이 후들거리고 고개가 떨렸다. 목 뒷부분이 당겨지면서 고개가 훅 들렸다. 위에서 남현이도 힘들게 비트 세계 입성을 위해 힘들게 매달려 있었다.


   알렉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현이는 다시 예전처럼 환상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조화롭게 일할 생각에 기대가 컸다. 그사이 남현이는 자신이 아주 큰 성장을 한 것 같았다. 온화함은 점점 진화됐고 대화 생성에 방해가 되는 배출 어휘의 비트 체계를 분류했고 프로그래밍 코드 모두 완벽히 입력해 놨다. PM은 곧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JJ봇의 최종 평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알렉스는 완벽한 녀석이었기에 회의 시작에 앞서 남현이에게 몇 가지 특별한 역할을 주문했다. 

   “남현, 지금까지 남현이 한 발표는 훌륭했어. 난 남현이 정말 대단한 개발자가 될 거라고 생각해. 근데 오늘은 더 특별한 역할을 남현이 해야겠어.” 

   “뭔데?” 

   “남현, 남현이 직접 JJ봇의 사용자가 돼서 대화 생성과 가상 상황을 구성하는 거야.” 

   “응, 알겠어. 그럼 난 생각나는 서술어만 입력하면 되는 거지?” 

   “물론! 아주 좋아!” 


   회의가 시작됐다. 모두 긴장이 역력했다. 이 프로젝트가 제대로 종결돼야 알렉스도 마음 편히 판교에서 일할 수 있다. PM도 프로젝트를 밀어붙인 책임에서도 좀 자유로워질 수 있다. 물론 남현이도 JJ봇이 잘되면 알렉스와 새 프로젝트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정말 꿈꿔 왔던 것들을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빠졌다. 남현이는 알렉스처럼 냉엄하고 고요한 포즈를 취했다. 남현이는 주변이 다시 잔잔한 파동에 요동치는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울림은 남현이를 신세계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천천히 서술어를 JJ봇에 입력했다. 그리고는 생성값 출력을 요구하는 실행키를 안 누른 듯 경쾌하게 살포시 눌렀다. 


   입력값 

   |  천천히 와도 돼. 우린 회의 시작한다.

   | 〔              〕어떡하나? 

   | 〔              〕나무라더니···.

   | 〔              〕치워야지.

   |  제가 싼 똥은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 〔              〕시키나?


   생성값

   |천천히 와도 돼. 우린 회의 시작한다. 

   |일을 이렇게 벌이면 어떡하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더니.

   |자네, 싼 똥은 알아서 치워야지. 

   |제가 싼 똥은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그런데 자네, 이런 일도 시키나? 


   가상 상황 

   화계(상급자-하급자): 천천히 와도 돼. 우린 회의 시작한다. 

   화계(상급자-상급자): 김 차장, 일을 이렇게나 많이 벌이면 어떡하나? 경비 좀 생각해

                      야지. 

   화계(하급자-하급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더니. 우리가 경비 청구서 올리

                      면 결제도 더럽게 안 해 주면서

   화계(상급자-상급자): 자네, 자네가 싼 똥은 알아서 치워야지. 

   화계(상급자-상급자):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싼 똥은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화계(상급자-상급자): (신입 여직원이 김 차장 심부름으로 물건을 들고 오자) 

                        자네, 아래 직원에게 이런 일도 시키나? 많이 컸네. 

 

   남현이는 이건 어느 중소기업에서 흔히 목격되는 갈굼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서술어를 통해서 보면 상급자, 중간 관리자, 부하 직원이 모두 등장하는 경우라고 덧붙였다. 일전에 미반영 화행으로 인한 생성값 오류가 대폭 수정되었다고 했다. 직장에서 빈번히 쓰이는 배출 어휘를 모두 분석했고 현재까지도 분석 중이라고 했다. 배출 어휘의 비트 체계 분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JJ봇의 성능은 한층 올라갔다고 했다. 알고리즘 설계와 ‘결정적 화행 결정면’의 수식을 세운 알렉스에게 남현이는 진심으로 존경을 표시했다. 포쉬 잉글리시로는 어떻게 경의를 표현할까? 그러면서 중소기업의 일상적 제 살 뜯어 먹기 식 비아냥을 완벽히 구현해 낸 것이 이 제품의 USP라고 볼 수 있다며 발표를 마쳤다. PM과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남현이는 점차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는 한층 더 가까이 비트 세계를 향해 올라갔다. 그런데 남현이 바로 아래에도 힘들게 버티는 누군가가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사촌 형이었다. 

 

   형은 서울에서 예술 경영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구에서 운영하는 예술 문화 센터에서 일한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어느 기업의 아트 센터에서 일했다고는 했는데 단순 매표 업무여서 그만두고 나왔다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도망치다시피 해서 수도권에 있는 전문대에 입학했다. 거기 기계공학부에서 공부했는데 아주 가끔 강남역에서 사촌 형을 만나서 서울 생활의 이런저런 조언을 듣곤 했다. 사촌 형은 자존심이 무척 센 사람이었고 떼돈 번다는 큰아버지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서울살이에 차츰 자리 잡아 가고 있다고 했다. 다만 중간 관리자급으로 올라가면서 부하 직원과 소통하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를 위해 가끔은 잔심부름시키면서 해서는 안 되지만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풀 때도 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리고 구에서 지원해 주는 예산을 많이 따려면 괜찮은 음악회를 기획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꽤 인지도 있는 음악가를 초청해야 해서 경비가 많이 든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로 윗선과 의견 차이로 자주 부딪쳤고 어떤 때는 센 자존심을 지키려 선배, 동문 음악가 등 닥치는 대로 연락해서 음악회를 어떻게든 끝낸다고 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어떻게든 살아가고는 있다고 했다. 그랬던 사촌 형이 지금은 내 머리통을 발판 삼아 바로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도 아주 힘들게 쇠고리를 붙들고 있었다. 형도 남현이만큼이나 비트 세계로 올라가고 싶었나 보다. 강남역에서 토익이든 컴퓨터 관련 자격증이든 따라고 조언해 주던 자상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도 나처럼 온몸 구석구석 성한 곳이 없었다. 쓸리고 찢어지고 검게 변한 거친 몸뚱어리밖에 없었다. 그는 내 머리통을 짓이기면서 나를 발판 삼아 몸을 위로 쫙 폈다. 젖 먹던 힘을 쏟아붓더니 팔을 쫙 뻗어서 한 칸 더 높은 곳에 있는 쇠고리를 붙잡았다. 


   ‘철퍼덕’ 


   나는 그만 아래로 추락했다. 나의 정신은 아주 무거웠기에 추락의 속도도 엄청 빨랐다. 실낙원의 타락한 악마처럼 나는 똥 무더기에 휩싸여 몸은 더러워졌고 씻어도 씻기지 않는 죄가 덕지덕지 붙었다. 가뜩이나 사람들이 멀리하는 고리타분하고 비실용적인 그런 것을 고답적이라고 한때는 찬양받았던 지나간 정신은 이젠 순수하게 용서받긴 그른 불필요한 요소일 뿐이었다. 

   알렉스가 알렉스한테서 알렉스를 빼앗기고 나서 남현이가 되었어도 남현이는 슬퍼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판교에 입성한 후 들어선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정신 체계였기에 빼앗겨도 치명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빼앗겨 본 남현이는 그런 것에 익숙해졌는지 나를 빼앗겼을 때조차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나를 빼앗긴 대신 나에게 냄새나는 정신을 떠넘기기까지 했다는 상쾌함으로 남현이는 오히려 훨훨 날았다. 


   여기 아톰 세계에서 나는 큰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끝없는 배출 어휘를 키보드 위에 얹힌 무거운 손가락으로 치워 낼 것이다. 너무도 일찍 홀연히 사라지신 어머니를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악취 나는 곳에서도 상큼한 딸기를 먹을 수 있는 비위를 무장한다. 아톰계에서 천근만근 묵직해서 방방 뜨지 못할 정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이젠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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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 관리자
  • 2023-11-15
멜들다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 관리자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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