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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다음 날, 1월 1일 전날

  • 작성일 2023-03-31
  • 조회수 1,17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단편)]




12월 31일 다음 날, 1월 1일 전날

지영

캐리어 바퀴가 빠졌다. 입국장으로 향하는 무빙워크 끝에서 서둘러 지나가던 버건디색 캐리어에 부딪히면서 그렇게 됐다. 예상치 못한 하자가 발생했으나 아직 세 개의 바퀴가 남았고 만희는 곧 택시를 탈 테니 큰일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여기저기 끌고 다녔던지라 아깝지도 않았다. 게다가 공항 아닌가. 면세점이 즐비하니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장만하기에도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도 만희는 꼼짝할 수 없었다.

저만치 떨어져 나간 바퀴는 레일이 감겨 들어가는 지점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별거 아니야, 됐어. 그는 마음을 달래며 힘겹게 발을 뗐다. 몇 시간 전에도 그는 자신을 다독였다. 공항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였다. 천변에 놓인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찬 바람에 풀죽은 들풀 사이로 개구리는 뒤집힌 채 하늘과 마주하고 있었다. 겨울잠을 자던 중 겪었을 변고 앞에서 그는 은은하게 무사(無事)의 표정을 풍겼다. 숙연해진 만희는 조심스레 개구리를 손수건으로 감쌌다. 손끝에서 서늘하고 물컹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발을 내딛자 축 늘어진 개구리의 사지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몸에 돋은 소름이 평온하게 잠든 개구리 탓인지 섣달그믐께 칼바람 탓인지 만희는 알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서둘러 빌라 화단으로 향했다.

볕과 그늘의 경계를 따라 살짝 언 땅을 파서 개구리를 눕혔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달래듯 개구리가 잠들어 있는 땅을 다독였다. 봉긋하게 솟은 땅에 물을 뿌리자 스며들지 못한 물이 사방으로 퍼져 갔다. 이만하면 수분을 흡수해서 살아날 수 있을 테지. 만희는 하얀색 스니커즈 끝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 내고는 옆에 세워 둔 캐리어를 끌어당겼다. 그 순간 오른쪽 앞바퀴가 빠져나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끼워 넣었지만 결국 이렇게 됐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자니 생명 하나가 소멸하기 직전이었고, 별거 아니라며 지나치기에는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문영아, 공연 예매했네. 또 내 아이디로 자동 로그인됐고, 또 내 카드가 등록된 바람에 그렇게 됐겠지. 문영이 만희 명의의 계정과 카드로 공연을 예매하면 만희는 문영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불편을 덜어 주고자 만희가 예매 내역을 캡처해서 문영에게 보낸 게 벌써 일 년째다.

공항에 도착한 후 만희는 가장 먼저 탑승 알림판을 찾았다. 말레(Male)행 비행기의 출발 시간을 확인하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아쉽게 놓치고 겨우 붙잡은 것들이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나타났다. 고작 삼 분 늦어 놓친 울산행 고속버스, 늦게 도착했으나 폭우로 지연되어 탈 수 있었던 제주행 비행기, 그리고 문영.

삼 년 전 이맘때 만희와 문영은 결혼했다. 식은 가족 없이 몇몇 지인들과 치렀는데 아침부터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식장을 찾은 지인 하나가 잔칫날 비가 오면 잘 산다는 말을 덕담인 양 몇 번이나 했고 문영은 조부모 역할을 하러 온 거냐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만희는 와 줘서 고맙다고 하면서도 뒷덜미 주위로 신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하객들의 젖은 바짓단과 얼룩진 구두코 탓이라 여기며 그는 애써 미소 지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만희와 문영의 청바지와 운동화도 비에 젖고 말았다. 그래도 출국 수속을 마칠 즈음 흔적 없이 말랐고 그들이 기내로 들어갔을 때 청바지는 살짝 빳빳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몰디브 말레였는데 직항편이 없어서 한 차례 경유해야 했다. 이름난 신혼여행지로 가는 환승 비행기는 신행길에 오른 부부들로 채워졌고, 그래서 문제였다. 비행기 좌석은 3-3-3 구조였고 어떤 커플은 반드시 따로 앉아야 했다. 여기저기서 짜증과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뒷자리 남자도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서 화가 섞인 말투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 말이 아직 출발 전인 기내에 퍼지자 왼쪽 창가 9I에 있던 만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창가 10A에 있던 문영에게로 갔다.

“잠깐이면 돼, 곧 지나갈 테니까.”

문영이 말했고, 그는 그 말을 곱씹으며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일주일 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그들은 반대편 풍경을 봤다. 이번엔 만희가 오른쪽, 문영은 왼쪽 창가 자리였다. 각자 다른 쪽에서 본 날개의 빛은, 그때는 몰랐으나 넌지시 주어진 복선이었다고 만희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그때의 경유 공항에 바퀴 빠진 캐리어와 함께 있다. 어제들을 상기시킨 도시에 머물고 싶지 않았으나 연말연시 항공권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고, 그마저도 대기가 열아홉 시간인 경유 항공편이 유일했다. 12월 31일이었다.

오늘 같은 날 호텔 예약에 성공한 게 어디야. 만희는 그렇게 위로하며 캐리어를 살짝 눕혀 끌었다. 바퀴 하나 빠진 것쯤은 문제도 아니라는 듯 거침없이 굴러가는 것과 함께 서둘러 택시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이내 멈춰야만 했다. 잡지 《Vogue》가 사랑한다는 명화 전시회와 할리우드 배우가 모델로 나선 샤넬 No.5 광고판 사이,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 그 아래 쓰여 있는 ‘Walking in the night’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한없는 적막을 깨는 여자 목소리가 계시처럼 들려왔다.


밤을 걷습니다. 정확하게는 한밤중의 산요. 새벽이라고 해야 할까요. 달과 별만 반짝이는 시간이고 밤과 새벽 중 뭐라 부르든 어둠과 적막은 가시지 않을 거예요. 가진 거라고는 검지보다 살짝 긴 랜턴뿐이에요. 칠흑과 고요에 맞서기엔 충분치 않죠. 숙소에 두고 나온 배낭 안 과도와 커터가 자꾸만 떠올라요. 네, 전 다만 빈손이에요.


오늘의 일들은 하나의 지점으로 귀결됐다. 캐리어의 세계에서 벗어났으나 끼워 맞춰진 바퀴는 재탈출에 성공했고, 이 도시에서 만희는 혼자였으며 여자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와 마주하고 말았다. 꿋꿋하게 서 있던 캐리어는 가벼운 발길질에 그대로 쓰러졌다. 속절없이 뒤로 달려가는 기억들을 그는 붙잡을 수 없었다.


*

어둠을 달리던 지프는 낮게 솟은 건물 앞에서 멈췄다. 베이스캠프촌 후미진 골목에 자리한 허름한 숙소가 여자가 쉴 곳이었다. 안내받은 방에는 싱글 베드와 작은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화장실은 씻을 생각이 자연스레 사라질 만큼 음침하며 불결해 보였기에 그는 서둘러 양치를 끝냈다. 침대 위 이불은 덮지 않겠다는 다짐은 금세 시들해졌다. 높은 고도에서 맞이한 밤이었다. 그는 윈드점퍼까지 껴입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갔고 몸을 잔뜩 움츠렸다.

여자가 눈을 떴을 때 손목 위 검은 시계의 금빛 바늘은 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적막 속에서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뛰었다. 그는 어제저녁을 곱씹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기 전 가이드가 물었다.

“분화구 앞 계단까지 데려다주는 지프가 있습니다. 타겠습니까?”

투어 차량에 있던 그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분위기를 살피던 여자도 가만히 있었다. 얼마 후 열 시간가량을 함께 달려온 여행자들은 각자 지불한 금액에 따라 배정된 숙소로 흩어졌다. 여자는 뒤늦게 자신이 간과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짝을 이뤄 참가한 그들과 달리 자신은 혼자였다. 어디선가 터벅터벅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려오자 여자는 황급히 방문을 열었다. 복도를 어슬렁거리던 남자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처럼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흩날리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체크인할 때 스쳤던 히피였다. 여자가 물었다.

“너도 화산에 갈 거지? 언제 출발할 거야?”

“난 지프로 갈 거야. 만약 걸어갈 거라면 어서 출발해.”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히피를 뒤로하고 여자는 서둘러 길을 나섰다. 듬성듬성 보이던 인가의 불빛마저 사라지고 완연한 어둠과 적막이 이어졌다. 고지대를 뒤흔드는 찬 바람에 볼이 아려 왔다. 시야에 잡히는 것은 없었으나 여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랜턴을 멀리 비췄다. 빛이 닿는 끝자락에 나무들이 나타났다. 서늘한 바람이 길고 반듯하게 서 있는 미루나무의 가느다란 가지와 치렁한 잎 사이를 지나왔다는 생각에 그는 순간 마음이 놓였으나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짙고 무거운 세계에서 그는 자신을 보호할 어떤 것도 없었다. 머리 위로 별 하나가 선명하게 반짝였다.

북극성일까.

아주 먼 데서 찾아온 빛은 나침반이 된다지만 그에겐 무용한 지침이었다. 그랬다, 그는 북극성이 어디쯤 뜨는지 모르며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했을뿐더러 화산이 표시된 지도마저도 없었다. 어둠과 적막은 그가 있는 곳을 더욱더 모호하게 했다. 위도와 경도가 달랐으나 주위 풍경은 동네 뒷산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곳에 화산이 있다는 정보만이 여자의 동네가 아님을 뒷받침하는 증거였지만 그마저도 의심케 할 만큼 세계는 어둡고 고요했다.

어느 순간, 여자는 빛이 미묘하게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떨리는 마음으로 랜턴을 좌우로 흔들었으나 기대를 품은 빛이 닿은 곳엔 하얀 물통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빛을 가리고 귀를 기울이면 바람과 풀의 속삭임이었다. 밤과 새벽 사이, 그는 바람이 빚어낸 환영과 환청을 뒤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화산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고, 지프 투어가 히피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실 그는 히피를 몰랐다. 정리되지 않은 긴 머리와 수염, 겹겹이 차고 있던 목걸이와 팔찌만으로 남자를 탈사회적이며 무정부적인 히피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진짜 히피라 한들 편한 방법을 택하는 게 잘못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적절치 않은 것은 지금 이 길을 홀로 걷고 있는 자신이었다. 그는 출발 직전 숙소 주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화산이 1킬로 남짓 떨어져 있는지라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지요. 마침 방금 누군가가 출발했어요. 서두르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산길 1㎞는 평지 1㎞와 같지 않았다. 걸어도, 또 걸어도, 계속 걸어도 누군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둠과 적막은 길고 깊어 앞서간 이들에게서 흘러나왔을 빛마저 모조리 빨아들이는 듯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여자는 갈림길과 마주했다. 도착하거나 헤매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는 뒤돌아봤다. 지나온 길을 향해 랜턴을 비췄다. 이대로라면 남들보다 늦게 도착할 것이다. 화산을 보기는커녕 헤매기만 하다가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분화구, 그 아득한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한 여정은 실패했다.

왜 여기까지 왔을까.

손바닥에 땀이 맺히면서 쥐고 있던 랜턴을 떨어트렸다. 손잡이가 위로 세워지자 랜턴의 빛은 한순간 꽁꽁 갇혀 버렸다. 돌아갈 수도 없었다. 포기에도 용기가 소요되는데 그는 그마저도 소진한 상태였다. 여자는 겨우 손을 뻗어 랜턴을 줍고 길과 두 발을 향해 들었다. 가까이 비추면 좁은 범위가 밝게, 멀리 비추면 넓은 범위가 희미하게 밝혀졌다. ‘조금 더 밝게’와 ‘조금 더 넓게’는 동시에 충족할 수 없었다. 좁고 진한 빛과 넓고 옅은 빛 사이에서 그는 랜턴을 끄고 겹겹이 껴입은 옷을 하나둘 벗었다. 조심스레 오른쪽 길로 발을 내딛고는 앞으로, 또 앞으로, 계속 앞으로 걸었다. 시간은 묵묵히 흘렀다. 눈은 서서히 어둠과 화해했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서늘하게 떨어졌다. 또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 무언가 반짝였다. 곤히 잠든 이가 더 많을 시간, 그에게 닿은 것은 먼 산 위에서 흘러나온 빛이었다. 홀로 서 있는 집에서부터 시작한 빛은,

누굴 위해 가만히 타오르는가.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헤아릴 수 없었으나 상관없었다. 여자에게는 공기가 나무 사이를 지나며 빚어낸 소리, 자신과 길이 만나는 소리만으로 충분했다. 순간을 만끽하려면 다른 감각들은 숨죽여 놓는 편이 좋았기에 랜턴은 켜지 않았다. 암흑에 잠기는 기쁨과 함께 그는 문득 알게 됐다. 아니, 그는 일부러 오해하기로 했다.

아까 먼 데서 온 빛은 홀로 걷는 이를 위해 빛났다. 그 찰나만큼은 오롯이 자신을 위해 반짝였다. 그러니 괜찮다. 길을 잃었다면 돌아가면 그만이고, 돌아가는 길도 잃었다면 해가 뜨고 새가 지저귀면 또 다른 길이 보일 테니 그저 앞으로 가면 된다.

어느 틈에 저만치서 불빛과 함께 웅성거림이 찾아왔다. 위험은 몰래 숨어드는 게 아니라 이미 자신을 둘러싼 공기에 있다. 그는 경계심을 풀지 않고 빛을 향해 다가갔다.


오늘도 편의점에는 홀로 손님이 더 많았다. 집에서 기다리는 이가 없는지 혼자 먹기 적당한 것들은 진열하기 바쁘게 빠져나갔다. 오늘의 인기 상품은 네 캔 혹은 여섯 캔에 만 원인 수입 맥주다. 춥다고 맥주가 팔리지 않는 건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4에서 5도짜리 가벼운 도수의 술이 미약하게나마 스트레스를 덜어 주는, 일종의 상비약인 세상이다. 퇴근 직전 민영은 방금 나간 손님이 산 것을 똑같이 집어 들었다. 12월 31일이었다. 송구영신을 함께 하기엔 나쁘지 않은 구성이라고 민영은 생각했다. 편의점 출입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그를 급작스레 덮쳤다. 비닐봉지를 든 손이 깨질 듯 아렸으나 봉지 안에 든 티라미수 조각 케이크와 블랑, 호가든, 산미구엘, 밀러에게는 좋을 추위라 여기며 그는 어둡고 적막한 방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종일 혼자 있느라 차가워진 원룸 안에서 그는 급작스레 1월 1일의 목표를 세웠다. 스물다섯까지 세고 맥주 마시기. 어려서부터 그는 탄산음료를 마시는 게 서툴렀다. 입안을 톡톡 쏘는 걸 견디지 못해 탄산도, 시원함도 사라지고 그냥 미지근한 검은 단물이 되어 버린 콜라만 마셨다. 그때도 그랬다. 유리잔에 음료를 가득 따라 놓고 뻐끔뻐끔 올라오는 탄산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데, 달걀로 푸르른 이마를 문지르던 엄마가 말했다.

“내 딸은 핵심을 놓치고 있구나.”

일주일 후였다. 수업이 끝난 후 민영은 엄마에게 과학 시간에 기절한 얘길 하려고 평소보다 더 종종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가쁜 숨을 내쉬며 도착한 집에 엄마는 없었고 대신 짤막한 메모만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하이라이트를 즐기는 민영이 되길 바란다. 덩그러니 놓인 메시지를 읽은 후 민영은 탄산 빠진 탄산음료처럼 살기로 다짐했다. 합법적으로 음주가 가능한 나이가 되자 결심은 맥주에까지 적용됐다. 물론 약간은 흐릿하게. 그는 캔 뚜껑을 따고 오십까지 센 후에 맥주를 들이켰다. 탄산이 타닥타닥 목구멍을 간질였지만 견딜 수 있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세는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민영에게 그것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싹을 피우는, 어쩐지 어른에 가까워지는 일처럼 느껴졌다. 몇 시간 후면 더 많은 탄산을 즐길 것이고, 그러다 보면 무더운 여름날 탄산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 주는 기쁨을 알 수 있을지 그는 궁금했다.

호가든을 따고 서른까지 셌을 때였다,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개구리가 죽을 뻔했어. 그래도 완벽한 겨울잠에 들 수 있게 했으니까 이제 괜찮아.

민영은 벽에 등을 기댔다. 쨍한 냉기가 척추를 따라 온몸으로 퍼졌다. 개구리와 여행하던 여자와, 그를 사랑했던 이가 있다. 사랑은 다했고, 그리하여 바람과 세월처럼 이별이 찾아왔다. 아니다, 누군가는 아직 사랑의 영역을 헤매고, 민영은 너머에서 사랑의 역사를 훔쳐본다. 그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칼바람이 얼굴을 때렸지만 개의치 않고 거리를 흘깃거렸다. 바람과 세월 속 어딘가에 겨울잠을 자지 않고 뛰어다니는 개구리가 있을 것만 같았다.


만희와 문영은 여행의 마지막 이틀을 경유지에서 보냈다. 문영은 백여 년 전 대문호들이 묵었다는 이유로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을 택했다. 콜로니얼 시대에 세워진 건물의 방은 천장이 높고 전등은 길게 매달려 있었다. 문영은 방에 배정된 버틀러에게 뭘 요청할지 고민했고 옆에서 만희는 미묘하게 흔들리는 전등의 노란 빛을 지켜보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문영은 불그스름한 얼굴로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칵테일 잔에 남은 불그스름한 건 싱가포르 슬링이라고 했다.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취기가 오르네. 만희야, 잠깐 걷자.”

그들을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그러다가 돔을 발견했고 안에 있던 도서관에서 붉게 물드는 하늘을 보기도 했다. 아까 마신 칵테일 색감과 비슷하다고, 노을을 보며 마시면 더 좋았겠다고 문영이 중얼거렸다. 도서관을 나온 그들은 다시 걸었다. 도시가 푸르른 어둠에 잠기고 하나둘 빛을 밝히자 주위는 정장과 드레스 차림의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돔 안에는 공연장도 있었다.

“언젠가 우리도 근사하게 차려입고 연주회를 보러 올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문영의 날숨에서 옅은 술 냄새가 났다. 기억은 왜 사소하며 쓸데없을수록 선명하게 남는가. 몇 년 후 역시나 의미 없고 별거 아닌 순간을 기억해 내리라는 것을 만희는 알고 있었다. 내일들에 기억하게 될 오늘, 약속과 달리 그는 그다지 근사하지 않은 차림으로 혼자 공연장을 찾았고 운이 좋다는 말과 함께 세 시간 전에 취소됐다는 티켓 두 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아시아 문화 교류 프로젝트의 하나로 상연 중인 〈Walking in the night〉는 영어 자막이 제공되는지 웨스턴 관객도 눈에 띄었다.

공연 리플릿을 뒤적이다가 만희는 ‘디아스포라(diaspora)’를 발견했다. 문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밤을 걷다〉는 허울 하나를 추가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관록의 배우 K가 관심을 보인 후 무명작가의 단편 소설은 동명의 모노드라마로 각색되어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 올라갔다. K가 수술은 물론 방사선 치료도 불가능한 직장암 말기라는 사실이 밝혀진 건 마흔 번의 공연이 모두 끝난 후였다.

연극은 막을 내렸으나 연일 화제였다. 이십 대 케이팝 가수 겸 배우 J가 출현을 강력하게 원한다는 소문이 돌더니 얼마 되지 않아 예술의 전당 소극장으로 무대를 옮겨 상연됐다. 재공연 중 K는 주위의 만류에도 기어이 무대에 올라 J와 함께 이인 일역의 연기를 선보였다. 계단까지 빼곡하게 채운 관객들은 K의 앙상한 몸에서 나온 에너지에 압도당했고, 단단한 얼굴과 형형하게 빛나던 눈빛에 사로잡혔다. J 버전의 마지막 공연이 있던 날 배우 K는 영면에 들었다. 그가 마지막 무대에 오른 지 보름 후의 일이었다.

겹겹의 허울이 만든 거대한 허울, 그게 문영이 이 작품에 내린 평가였다. 운 좋게도 유명 배우가 출현했고, 원작자와 출연자의 유작이라는 게 화제가 됐고, 스타가 출연하여 연일 매진을 이루고, 세대를 막론하고 배우들이 멀티캐스팅과 그에 따른 적은 출현 횟수에도 앞을 다퉈 뛰어드는 바람에 하나의 현상이 됐다는 거였다.

만희는 냉정하고 신랄한 독설이 담긴 서른네 번째 문영의 메시지를 몇 번이나 곱씹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간과한 게 있다 싶었다. 모노드라마를 둘러싼 외부 요인이 관심과 흥행을 끌어내긴 했지만 잘 모르는 자신이 봐도 〈밤을 걷다〉는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무대 장치는 검은 벽과 하얀 스크린뿐이고, 음향은 인물의 대사와 바람 소리밖에 없었으나 조명 아래 홀로 있는 배우가 무대를 가득 채웠다. 연기의 힘이었다. 젊거나 나이 들거나 그들은 화산을 보기 위해 홀로 밤을 걸었지만, 목적지에 도착하진 못했다. 그렇다고 온전히 망한 것은 아니다. 실패하는 여자들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고, 급기야 국가와 언어를 뛰어넘어 세계 곳곳의 무대에 올랐다. 서사의 힘이었다.

만희에게도 흥행의 도화선이 된 배우 K의 연기를 볼 기회가 있었다. 토요일 늦은 오후였다. 남부 터미널에서 예술의 전당으로 가는 01번 마을버스는 출퇴근 버스처럼 빡빡했다. 그가 걸어갈 걸 그랬다는 후회를 백 번쯤 하고서야 문이 열렸고 한껏 차려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들 틈에 끼어 걸음을 재촉했지만 그는 이미 늦었다.

“중간 입장을 할 수 없는 공연입니다.”

가쁜 숨을 내쉬는 그에게 남색 유니폼 차림의 직원은 난처한 얼굴로 ‘죄송하지만’과 ‘안 됩니다’를 내뱉었다. 허리를 깊게 숙이면서 완곡하게 입장 불가를 통보하는데 자꾸만 구겨지는 스커트 허리께가 그의 눈에 거슬렸다. 예정 시간보다 늦게 공연장에 도착한 건 만희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지각자인 검은색 후드 티셔츠는 당당하게, 또 강경하게 말했다.

“들여보내 주세요. 이 배우…, 안타깝게도 마지막 공연일 수도 있잖아요.”

소리 높이는 검은색 후드와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만희는 발을 돌렸다. 라운지 한편에 설치된 모니터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소리가 소거된 화면 앞에서 누군가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나가서 밥이나 먹자며 다음 일정을 계획하는 무리도 있었다. 묵직한 나무 문의 작은 틈으로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리다 말기를 반복했다. 검은색 후드가 신발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 소리에 만희가 고개를 돌렸을 때 엄지발가락부터 길게 찢어진 파란색 운동화가 시야에 들어왔다. 검은색 후드는 신발을 신고 있는 게 아니라 겨우 걸치고 있었다. 공연을 중계하던 작은 화면이 암흑으로 변했고 문틈으로 박수 소리가 새어 나왔다. 늦은 자들은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닳고 낡아 가는 게 안타까운 것들이 있다. 민영에게는 파란색 운동화가 그랬다. 그는 평발에 발볼도 넓은 편이었는데 엄마는 그의 새끼발가락을 검지로 그으며 말하곤 했다.

“이만큼 없어야 하는데.”

발가락이 네 개가 된다면 발볼도 좁아지고 맞는 신발도 많아지겠지만 멀쩡한 발가락을 자를 수는 없었다. 발에 딱 맞고 오래 걸어도 불편함이 덜한 운동화는 그에게 영원히 같이 걷고 싶은 동행이었으나 영원 같은 건 없고 신발 역시 그러했다. 그가 계단에 오를 때였다, 우두둑 소리를 내며 오른쪽 운동화가 찢어졌다.

동행의 종말 앞에서 민영의 마음도 함께 찢어졌는데 그러면서 새로운 조각이 달라붙는 것 같기도 했다. 운동화가 멀쩡하게 버텼다면 늦지 않았을 테고, 그랬더라면 공연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그를 만나지 못했을 터였다. 보통의 ‘그랬더라면’이 후회나 아쉬움으로 채워지던 것과 달리 오늘의 ‘그랬더라면’은 민영을 생기 있게 했다. 공연이 시작했으니 입장을 할 수 없다는 직원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수긍하는 눈치였다. 평소의 민영 역시 수긍하고 돌아섰을 것이다. 그보다 출발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들여보내 주세요. 이 배우, 안타깝지만 마지막 공연일 수도 있잖아요.”

이미 평소에서 벗어난 날이었다. 그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매달렸다. 그가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옆에 있던 사람은 조용히 사라졌다. 그를 따라 민영도 공연장 내부를 비추는 모니터 앞으로 갔다. 김치찌개와 소주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 왔다. 냄새의 주인은 공연을 보지 못해 아쉬운 것 같진 않았다. 그는 분명 안도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민영은 알아볼 수 있었다.

문영아, 공연 예매했네. 또 내 아이디로 자동 로그인됐고, 또 내 카드가 등록된 바람에 그렇게 됐겠지. 일 년 전 민영은 ‘문영아’로 시작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처음엔 오자가 아닐까 싶었는데 그러기엔 자판 위 ‘ㅜ’와 ‘ㅣ’는 거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공연을 예매한 적이 없었기에 명백히 잘못 도착한 메시지였다. 오래 쓴 번호이기도 했고, 또 다른 낯선 이들에게서 메시지가 오는 것도 아니라서 그는 발신자가 번호를 입력할 때 실수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길을 잃은 메시지는 계속해서 목적지가 아닌 곳에 도착했다. ‘문영’은 늘 타인의 계정으로 공연을 예매했고, ‘그’는 늘 귀찮아하지 않고 친절히 안내했다.

민영은 메시지 수신을 차단하는 대신 어느 날부턴가 검색을 했다. 예매된 연극이나 뮤지컬, 전시회의 정보는 블로그와 유튜브에 넘치고 넘쳐 시간을 보내기 좋았다. ‘문영아’가 쌓일수록 민영은 겁이 나기도 했는데 불안이 호기심으로 바뀐 건 사이사이 날아든 다른 말들 때문이었다.

개구리는 어떻게 됐을까?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민영은 숨이 막혔으나 그것의 정체는 문영과 함께 여행한 인형이었다. 그저 인형. 문영이 풍경과 순간을 기록할 때마다 함께였던 동행은 화산 분화구 앞에서 역시 혼자였던 만희를 만난 후 그곳에 남겨졌다고 했다. 민영은 만희와 문영의 비하인드를 유추할 수 있는 부스러기들을 손에 쥐었다. 뭉툭한 뭉치를 만지작거리며 찾은 공연장은 씁쓸하고 아릿한 냄새로 채워졌고, 그 속에서 민영은 만희의 말을 떠올렸다.

“개구리가 어떻게 됐을지 생각해. 분화구로 뛰어들기도 하고, 먼 데서 빛나던 집에 살던 소녀의 손에 쥐어지기도 하고, 또 다른 이와 길을 걷기도 해. 어떤 얘기든 지금의 너는 개구리를 쫓고 나는 멀리서 기다리지.”

관계 역시 운동화와 다르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농익는 게 아니라 닳고 닳아 마침내 이별을 고해야 한다. 그러나 민영 앞에 불시착한 자는 이별을 유예하는 중이었다. 우리였던 이와 갈림길에서 헤어진 후 기억 회로의 기묘한 작동으로 인해 헤어진 즈음에 서 있는 것 같기도, 30대 초반에 알츠하이머를 앓아 기억 일부를 소실한 주인공을 코스프레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곁에 아무도 없거나.

다만 서두르리라.

민영이 다짐하자 혼자서 투박하던 덩어리가 찬찬히 형태를 갖춰 갔다.


만희도 연극 〈밤을 걷다〉를 보긴 했다. 공연 시작 전 그는 휴대전화 전원을 꺼 달라는 요청에도 얼마나 방해가 될까 싶어 잠자코 있었는데 중간에 들려온 진동은 무대 위 ‘여자’의 말문을 막을 정도로 크게 울렸다. 여기저기서 헛기침이 들리고 옆에서 누군가가 팔을 콕콕 찌르는데도 그는 당황한 나머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무대에 암전이 돌고 나서야 굼뜨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끝까지 보진 못했지만, 연극이 원작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범위에서 각색된 덕에 그는 뒷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밤과 새벽 사이에 던져진 여자는 먼저 출발한 커플을 만나는데 그가 그들에게 처음 듣는 말은 ‘길이 없다’이다. 커플 A는 트래킹 경험이 풍부한 듯 앞장서서 풀을 헤치고, 가파른 길에서 손을 내밀기도 한다. 커플 B는 여자가 뒤처질 것 같으면 잠시 멈춰 랜턴을 비춰 주고 미끄러운 길에서는 조심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이 경사진 흙길을 기어오르는 사이 어둠은 옅어지고 푸름과 붉음이 번져 간다. 문영은 말했다.

“언덕이 나오는데 목적지가 아니야. 왼쪽이 맞았던 거지. 화산을 봤다고 하면 보통 분화구 앞에 서서 봤다는 거잖아. 근데 멀리서 조망했다고 해서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어. 어디에서든 어떤 풍경이든 화산을 본 거야. 여자는 다시 열두 시간을 달려 유황 화산에 가. 화산 두 곳을 둘러보는 투어였거든. 이번엔 달걀 냄새가 진동하는 분화구 앞까지 도착했는데 고민되네. 내려갈까, 말까. 더 가 볼까, 이제 멈출까.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문영은 한밤중 산길을 혼자 걷는 여자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고민했고 그 옆엔 만희가 있었다. 원작은 유황 화산의 분화구 앞에서 갈등하는 이를 보여 주며 끝나지만, 문영의 상상 속에서 그는 계속 걸었다. 어떤 날은 첫 번째 화산의 베이스캠프에 남아 마침내 분화구와 마주했고, 또 어떤 날은 두 번째 화산의 들끓는 분화구로 뛰어들기도 했다. 만희는 개작을 거듭하는 문영이, 한 걸음씩 다른 방향으로 떠나는 이야기가 좋았다.

언제부턴가 어둠과 적막을 걷는 사람은 만희였다. 변형된 서사에서 어느 날의 그는 먼 데서 빛을 보내 준 집을 찾아갔다. 그가 문영에게 물었다.

“그 집에 가서 난 뭘 하는데?”

“일단 냉장고를 뒤져 볼까? 너무 걸어서 배가 고프네. 그러고 나서 좀 자. 떠나기 전부터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거든.”

만희는 문영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문영은 빛 때문에 잔뜩 찡그린 만희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꼭꼭 누르더니 손차양을 만들었다. 만희가 눈을 뜨면 시간은 언제나 저만치 흘러가 있었다. 그를 괴롭히던 불면증은 문영 옆에서 힘을 잃었다. 서로의 방에서, 버스와 지하철 의자에서, 한강 공원 벤치에서도 만희는 잠들곤 했다.

모든 서사에 끝이 있듯 개작도 종결을 맞이했다. 만희가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 갔고 문영은 화산을 향해 걷던 여자를 말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로 침묵이 평범하게 스며들었고, 침묵은 서로를 오독하게 했다. 결국 문영은 처음 만희의 집에 왔던 날처럼 캐리어 하나만 끌고 떠났다. 혼인신고를 한 것도, 가족들에게 소개한 것도 아니었기에 어떤 면에선 쉬운 헤어짐이었다. 만희는 번거로운 이별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었으나 종종 캐리어를, 기내용 사이즈의 캐리어가 넘치지 않을 만큼 함께한 시간을 떠올리곤 했다.

“다시 갈림길 앞에 서려고. 도착하거나 헤매거나 둘 중 하나겠지.”

만희가 민영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는 사이 공연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라운지에 울려 퍼졌다. 그가 티켓 두 장을 내밀자 직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당황해하는 직원을 두고 만희는 안으로 들어갔고 H17과 H18 사이에서 머뭇거리다 오른쪽에 앉았다. 암흑 속에서 세월의 깊은 더께를 가진 여자가 말했다.

“도착하거나 헤매거나, 둘 중 하나야.”


* *


도착한 곳은, 그런데 분화구가 아니에요. (내내 암흑이었던 배경이 변한다. 하얀 스크린이 내려오고 자욱하게 깔린 구름 사이로 봉우리들이 보이는데, 평원에 우뚝우뚝 서 있는 것은 윗부분이 잘린 원뿔 모양의 화산들이다.) 일출에 맞춰 분화구에 있는 게 일정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여긴 홀로 우뚝 솟은 화산들과 거대한 산줄기의 봉우리들을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네요. 틀린 길을 택한 바람에 엉뚱한 곳에 서 있는 거죠. 하지만,

보세요. (붉은 해가 천천히 떠오르면서 스크린 풍경이 바뀐다.)

추위와 피곤을 달래 주던 커피는 차갑게 식어 가고 해는 떠오르네요. 이제 완연한 아침입니다. 헤어질 시간이에요. 새벽의 동행자는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고, 다른 이들도 왔다가 떠나요. (낮은 음성이 들려온다. 가파른 길로 가면 2킬로미터만 걸으면 되고, 돌아가면 평지지만 5킬로미터는 걸어야 해.) 나는 새로운 길을 택합니다. (여자는 들고 있던 윈드점퍼를 다시 입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바이크 소리와 함께 다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데려다줄게, 어서 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이제 저는 분화구를 들여다보기 위해 오른 자들, 분화구를 조망하기 위해 오른 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습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화산을 봤나요? 이상하죠, 용암이 들끓는 분화구를 상상하니 어쩐지 그곳을 들여다본 것 같아요. 사백여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불구덩이가 있다는 정보와 상상이 뒤섞이면서 기억이 조작되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나는 화산에 갔고, 화산을 봤으니까요. 아, 이 길을 걷는 건 쉽지 않네요.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온 잿길을 헤쳐 나가는 게 솔직히 힘에 부쳐요. 다리는 한없이 무겁고, 두껍게 깔린 화산재는 나를 삼킬 듯이 일렁이고 있어요. 그래도 다시 힘을 내서 걷습니다. 저쯤에 도착하면 아는 길이 나올 거예요. 바이크를 탔더라면 지금쯤 화산의 심연을 봤을까요? (스크린은 갈림길을 비추고, 여자는 뒤돌아본다.)

나는 무얼 하고 있나요? 왼쪽으로 난 길을 택했더라면 어떤 기억을 갖게 됐을까요? 이른 아침부터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밤과 새벽 사이 제게 일어난 일을 알았습니다. 분화구와 조망을 결정지은 갈림길은, 그러나 실수가 아닙니다. 오른쪽 길은 잘못된 길이 아니라 그저 다른 길이에요. 그리고 길은 나를 하룻밤의 집으로 안내하죠. 먼 데서, 그 자신도 모르게 나를 위해 빛나던 그곳이요.


민영은 한층 과감해졌다. I열 4와 5을 예매했다는 메시지에 가능하다면 I열의 3이나 6을 예매하는 식이었다. 만희가 4에, 민영은 6에 앉았던 날이었다. 한밤중 산길을 걷는 여자의 이야기가 지루했던 민영이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붙들고 있는데 옆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왼쪽으로 몸을 숙이고 팔을 뻗어 잠자코 있던 만희를 콕콕 찔렀다. 그제야 만희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민영도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병원이었다. 장례식장 3호실 앞에서 ‘ㅣ’는 ‘ㅜ’를 발견했고, 사진으로 남은 ㅜ에게 인사했다. 조문을 마친 그들은 길을 사이에 두고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어떤 겨울과 봄 사이, 민영이 만희였던 적이 있었다. 민영에게 사진으로 마주한 엄마는 낯선 사람 같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서야 엄마는 그를 찾았다. 그는 갑작스레 자신의 세계에 들어오려는 자의 방문을 막았고, 그리하여 제단 위 흑백의 영정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본 엄마가 됐다.

고인은 엄마였으나 민영은 상주가 아니었다. 조문을 마치고 상주에게 별다른 인사 없이 밖으로 나왔다. 엄마의 새로운 가족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서운하다거나 화가 나진 않았다. 엄마가 자신 말고 다른 가족을 가질 수도 있었고, 그들이 자신의 가족일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장례식장 앞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영정 사진 속 얼굴을 오랫동안 떠올렸다.

얼마간 민영은 장례식장이 있던 병원을 찾아가곤 했다. 주차장 옆 화단에서,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서, 병실 복도에 길게 놓인 의자에서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생각했다. 볕이 좋은 날 엄마와 민영은 놀이 공원에 갔고 커다란 기린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눈이 잔뜩 내렸던 날 빙판길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엄마는 중학교 졸업식에 오지 못했다. 기억인지 상상인지 분별해 낼 수 없는 장면들을 그는 몇 번이나 곱씹었다. 민영은 건너편 만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이가 보지 못해도 손을 흔들었다. 만희가 곱씹고 있을 문영과의 장면을 상상하며 손을 흔들었다.

개구리의 배를 가른 적이 있어요. 과학 해부 시간이었는데 마취에서 깬 개구리가 배를 반쯤 열고 발버둥을 치는 걸 보다가 기절했어요. 그때부터 과학책을 새로 받으면 개구리가 있는지 확인하고 포스트잇을 붙여야 했어요. 근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더라고요. 문학 문제집에 경칩에 대한 글이 있지 뭐예요. 봄이 왔음을 개구리가 울어서 알 수 있다는데 내겐 그게 없어 봄이 없는지도 몰라요. 이미 온 봄을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겠다. 엄마도 그랬나. 근데 내겐 …들려줄 하이라이트가 없었어요.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들려줄 얘긴 비하인드만으로 충분했을지도 몰라요.

…내 아픔이고 내 슬픔이에요. 혼자서 기억하고 상상해야 해요. 그래도 오늘은 나와 함께 해요. 봄이 왔는데도 울지 않는 개구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함께 있어요.


기대 때문이다. 만희는 연극과 뮤지컬이 상연되는 극장을 찾을 때마다 문영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설렜다. 희망 때문이다. 만희는 의미를 모르는 현대 미술과 지루한 흑백 사진 전시장을 헤맬 때마다 문영이 손 흔들며 다가올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모든 곳에서 단 한 장의 티켓만이 찢어졌다. 찢기지 않은 온전한 티켓은, 그러나 완전하지 않았다. 극장이 회수하는 부분, 관객이 갖는 부분으로 나뉘고 자리에 앉아 공연을 보고, 매끈한 종이 위에 프린트된 글자들이 언젠가 지워지고, 공연의 내용과 그것을 봤다는 사실마저도 기억에서 희미해지는 순간에 도달할 때야 티켓의 생은 완전해진다. 사라짐으로 체화되는 것처럼.

그러나 애초에 흐릿해질 기억이 없는 이도 있다. 넓은 공연장에 홀로 남은 만희는 생각했다. 어디로 돌아가야 문영에게 닿을 수 있을지를. 문영의 것에서 우리의 것이 됐다가, 다시 문영의 것으로, 결국 제 것이 된 바퀴 빠진 캐리어와 함께 그는 길을 나섰으나 돌아갈 곳은 없었다.


왼쪽 엄지에 붉은 피가 번졌다. 캔을 따다 베였는데 민영은 별다른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피에선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취한 탓이다. 그는 스물을 다 세기도 전에 밀러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만희는 한 시간만큼 시차가 있는 도시에 있다고 했다. 모두 12월 31일에 있었다, 아직은.

“있잖아, 나 오늘 개구리를 봤어. 평온해 보이는 게 자기도 모르게 죽은 것 같았어. 수조에 들어 있는 물의 온도를 천천히 올리면 개구리는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는다잖아. 그 개구리는, 아마 그랬던 거 같아. 이번엔 너무 차가워진 거지.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착각한 게 아닌가 싶어. 그저 긴 잠에 빠진 건지도 몰라. 쉽사리 깨지 못하는 깊은 잠 말이야. 봄이 오면 일어나겠지. 그렇게 믿을래.”

“그래. …봄이 올 때까지 잘 버텨야 할 텐데.”

“맞다, 나 오늘 연극 봤어. 여긴 결말이 다르더라.”

만희의 이야길 듣는데 민영은 잠이 온몸으로 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만희와 메시지를 나누고 그의 얘길 듣다 보면 잠들 수 있었다. 만져지진 않아도 누군가 있다, 나를 향하진 않은 소리이지만 내게 닿는다, 그게 민영을 잠들게 했다. 그런데 오늘의 이야기는 그도 알고 있었다. 닿지 않을 것 같았는데 닿았다, 결국. 그는 새어 나오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물었다.

“근데 왜 공항이야? 호텔 안 가? 가서 좀 자.”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

그때였다, 아무렇게나 틀어둔 유튜브 화면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1월 1일이며 12월 31일이다.

몰려오는 잠의 물결 속에서 민영은 새해 계획을 변경했다. 개구리를 깨워야지. 잠에서 깬 그가 홀로 있는 이에게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 줄 거야. 그러려면 내가 먼저 일어나야 해. 개구리의 눈은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는 것만이 시각세포를 자극해 인식할 수 있거든. 지나갈 거야. 겨울이 가고 마침내 봄이 올 거야. 일어나렴, …일어나자.

속절없이 붉은 속을 드러낸 초록의 것을 향해 민영은 발을 뗐다.


* * *


여자는 새로운 도시에 도착했어. 그곳에서 처음 들은 말은 ‘미안’이야.

“미안하지만 당신은 이미 두 달 전에 머물렀습니다.”

여자의 시선은 숙소 앞 전봇대에 멈췄어. 정리되지 않은 채 뒤죽박죽 꼬인 전선들에 시선을 빼앗겼지. 숙소 예약 사이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두 달 전 여기에 머물렀어. 고작 싸구려 방 한 칸, 그저 임시 거처에 불과했는데 여자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어. 그래 맞아, 엉망진창인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였거든.

우는 여자를 두고 뒤로 사라진 남자는 이내 하얀 찻잔을 내오고, 장부를 뒤져 두 달 전 오늘 그 방이 비어 있었다는 것과 오늘은 옆방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줬고, 앞에 놓인 코코넛 차를 다 마시면 방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약속했어.

따뜻하고 고소한 차를 마시면서 여자는 그날 비어 있던 침대를 생각해. 거기 누워 있는 자신을 상상하는 동안 찻잔은 바닥을 드러냈어. 그날 그는 길고 깊게 잘 수 있었어.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자 혼란스럽게 뒤엉킨 전깃줄이 눈에 들어왔어. 여자는 구리 선을 타고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전기를 떠올려. 멀리서 달려온 에너지가 전등을 밝히자 안방과 주방과 거실의 풍경이 보여. 침대와 식탁과 소파가 있는 집이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를, 아무렇게나 틀어 둔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불빛과 만나. 한밤중 먼 데서 찾아온 그 빛을.

여행은 끝났고 지금은 편의점에서 일해. 상품을 진열하면서 원산지를 확인하는 게 버릇이야. 가끔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세계 곳곳에서 온 맥주를 들고 집으로 가. 여자도 알아, 많은 세계의 맥주들이 실은 한국 공장에서 만들어진다는 걸. 그래도 뭐, 어쨌든. 오늘도 이곳에서 만들어졌을 것들을 손에 들고 공항에서 길을 잃고 취한 이에게 화산을 걸었던 얘기를 들려줘.


낮의 부산함이 사라진 밤의 공항은 한적해서 쓸쓸하기까지 했다. 시계는 10시 반을 가리켰다. 한국은 11시 반, 그들 모두 12월 31일에 있었다. 만희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전화를 걸었다. 서른네 번째 문영은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았으나 이번에도 끊진 않았다. 만희는 몸을 조금 더 깊숙이 기대며 이야기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마다 먼 데서 온 맥주를 마시는 여자 이야기였다. 잠깐, 하고 서른네 번째 문영이 만희를 멈춰 세웠다.

“근데 왜 취한 사람한테 말을 걸어?”

그게 외로운 자는 비슷한 결을 가진 이를 알아보거든. 만희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가만히 있는 캐리어를 슬쩍 건드렸다. 우당탕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캐리어가 쓰러지면서 길게 뻗어 있던 손잡이가 그의 이마를 세게 때렸다. 그는 아픈 데를 만지며 문영아, 그리운 것을 불러 봤다. 답은 없었다. 코코넛 차를 내주는 사람 역시 없었다. 이곳은, 환대하는 이 없는 낯선 도시. 만희는 1월 31일자로 호텔을 예약했고 오늘 같은 밤 아름다운 도시에 남아 있는 방은 없었다. 오직 세계의 정류장 같은 환승 공항만이 갈 곳 없는 자를 내치지 않았다. 그리고,

다만 서른네 번째 문영만이 있을 뿐.

문영의 휴대전화 번호 하나를 바꿔 보낸 메시지에 답장이 왔다. 서른네 번째 시도 끝에 받을 수 있던 답이었다. 잘못 보냈다고 번호를 확인해 보라던 말은 병원에 가 보라는 말로, 늦었으니 그만 자라는 말로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보내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서른네 번째 문영은 만희를 지켜보았다. 자신을 문영이라 부르는 만희를 말리지 않고 말을 들어주었고, 또 어느 틈에 자신의 이야길 들려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만희는 전화 너머의 숨소리에 잠들 수 있었다. 오늘도 저 너머에서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한 숨결이 발갛게 부은 이마를 어루만져 주고 어깨를 토닥거리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답해 줘서, 들어줘서 고마웠어.

조금만 더 다독여 줘, 지나갈 수 있게.

한 시간 빨리 흘러가는 곳에서 묵직한 종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희는 기억을 더듬었다. 우리가 보신각 타종을 함께 봤었던가. 그러고 보니 언젠간 지나갈 테니 괜찮다고 했던 게 누구였는지 확실치 않았다. 몰려오는 잠기운 속에서 그는 종료 버튼을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누군가 걷고 있다면, 가녀린 빛과 소리마저 사라진 어둠과 적막 속이라면, 지금 당신 곁에 아무도 없다면, 우리를 연결하고 있는 세계에서 나온 희미한 빛과 소리가 닿길. 한 걸음 내딛게, 마침내 지나가게. 바람을 머금고 시간은 내달리기 시작했다. 12월 31일 다음 날과 1월 1일 전날 어디쯤 난 어둡고 적막하며 길고 깊은 길 위였다.

작가소개 / 지영

2017년 『문학들』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이 있다. wintercherry0330@gmail.com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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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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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멜들다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 관리자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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