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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외 6편

  • 작성일 2023-10-20
  • 조회수 1,002

진눈깨비

김지숙

  

 우리가 구름이지 않은 이유는 없다 

 차갑게 식어 있는 물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동안 어제처럼 뭉글뭉글 익숙해지는 얼굴 

 

 끝내 나누지 못했던 말들은 예언이 되어 문득 와서 무너지며 완성되고

 

 그 텅 빈 곳에서는 한쪽을 잃었거나 나일론 실 같은 걸 발목에 칭칭 감은 새들 걸어 다닌다

  

 가끔 어떤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도 한다, 더 이상 떠나지 않는 새들이 바다의 기억을 쪼아 대는, 부리가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크리스마스는 짧고 추웠다

 어깨를 움츠린 채 서로 떨어져서 서성이는 사람들 사이  

 잠들지 못하는 아픈 아이의 밤은 희고, 돌아갈 곳 없는 영혼처럼 마른 나무들이 길에서 비껴선 채 얼어 갔다

 미처 수거하지 않은 플라스틱 트리 꼭대기에서 은박 별 반짝였다

   

 작별의 문장은 이미 충분히 완성되었고 오래 오래 건네야 할 다정한 인사가 남았을 뿐  

 

 관측 기록도 없이 다만 이론적으로 오후에 지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시 동쪽 하늘에서, 사라지는 중인, 안개 끝자락 같은 

 

 그믐이었다

       

 우리의 모든 시도는 그의 유서와 다르지 않다 






반구대 암각화  


 

 구부정하니 기울어진 너의 어깨를 보며 너를 사랑하게 되겠구나 했다, 늘 너의 뒤에서 걷는 게 좋았다

 

 새, 거북이, 고래, 사람들, 마을의 염원을 늦게까지 바위에 새기는 동안에도 

 너의 그림자와 어느새 어깨 위에서 반짝이며 쏟아지는 별들 붉은 그릇에 모아 나는 아침을 빚었다 

 

 새들이 날아오르고 고래들이 너울거리고 선량한 거북이들이 등에 예언을 그려 가던 나날들

 

 나무 계단을 삐걱삐걱 내려와 나는 기억하는 것이다

  

 시간은 넝쿨처럼 엉켜 시들어 가고 비가 올 것 같은 냄새 눅진하고 나무들 휘적거리고 뭉개진 새들이 제 몸을 버린 채 휘적휘적 날아오르고


 그때는 나무와 새와도 말을 할 수 있었어, 불에 그을린 너의 심장, 달같이 뿌듯해서 겁도 없이 세상의 가장 외진 곳에까지도 갈 수 있었지 

 

 물줄기 마르고 모든 게 사라진 겨울 숲에서 

 언제나 살아 있는 건 등줄기 뻐근해지도록 너와 내가 나눈 첫 눈빛 

 

 일어난 일은 모두 가능한 일들이었고, 일어나지 않은 일은 여전히 가능한 일들 

 

 바람에 흩어지는 얇은 구름 조각 사이로 시끄러운 소리나 야단스러운 조짐 없이 

 어디서든 태어나 예언이 될    

 

 너와 나는 강을 사이에 두고 매일 안개 자욱한 숲을 바라보고 있다

 

 누구도 영원히 단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림자의 형태 



 그 나무는 죽은 늑대의 부러진 다리뼈 같기도 하다 

 잃어버렸거나 거리에 버려진 것들 축축한 코로 킁킁거리며, 살아서 쓰러진 것들의 등에 묻은 절망의 온기 핥으며, 신의 썩은 거짓말이나 주워 먹으러 다니던 

 

 먼 여행에서 돌아오고 있는 이의 눈빛처럼 낡고 텅 빈 달을 모자처럼 쓰기도 한다  


 우리 어디서 만나지 않았나요?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여행 중인 사람들 틈에서 순서대로 가이드가 든 카메라를 보던, 웃는데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점점 완성해 가는   

 

 뿌리째 뽑힌 나무가 쓰러져 있는 풍경은 이상한 꿈같기도 해서  

 나는 긴 겨울밤처럼 그 나무에 대해 생각한다   

 어쨌든 다행이지, 마지막 순간 나에게 요구할 것은 오직 하나일 테니 그리고 그걸 나는 분명히 가지고 있으니 

 

 비는 건조한 산문 문장처럼 오기도 한다   

 그래도 봄은 오고 비에 씻긴 아침 숲 공기는 차고 맑고 

 이따금 몸을 쭉 펴기도 하며 걸으면 시냇물을 타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구름들


 막 움트는 어린 싹을 오래 바라본다, 깊은 어둠의 상자 열쇠 구멍 들여다보듯 

 

 이토록 생생할 수 있다니! 

 나는 문득 소스라친다 






슈퍼 블러드 문 



너의 심장에서는 파도 소리가 나

맨발로 걷는 내 발목을 지우는 소리 말이야


우리 사랑하고 있는 거지?

나는 나를 버리고 너에게 가서 놀고만 싶어 


운동화 한 켤레 사 줘, 너에게서 달아나게 

그러면 나는 더 아름다워 보일 거야


아무리 깊이 껴안아도 등이 시린 우리

밤이 눈처럼 쌓이는 북해도(北海島)에 놀러 갈까?

퍼붓는 그 흰 고요 속에서의 붉은 잠 


내 몸을 밀어 줘 

추락하는 나는 끝까지 너와 눈을 맞추며

아득한 낭떠러지로 그만 쏟아지고 말아

하얀 모시나비 떼처럼 부서질 거야  


그런데 왜 내 심장에서는 자꾸만 

죽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나는 거지?






골동품 



 우리는 이미 저 길을 지나왔다 

 오래 바라본 사람에게나 겨우 발견될 법한, 담장과 나무들의 변화를 혼자 중얼거리는 동안 여름 지나 가을 나무 사이로 새들이 사라졌다

  

 창문들은 아주 늦게까지 불이 켜지지 않거나 어떤 창문은 아주 늦게까지 켜져 있다 

 어느 날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멸망하는 왕국의 마지막 증인을 거부하며 누군가는 떠났다 

 까마득히 잊힌 자들이 살고 있는 곳을 수소문하고 다닐지 모른다

 늙은 말의 쩔렁이는 무릎을 탄식하며 덧붙일지도 

 누군가여, 나를 좀 죽여주지 않겠습니까? 


 기원도 결말도 없이 깊어 가는 이 ‘결국’의 밤 

 나는 아직 살아 있고 어떤 문도 닫지 못했다  


 그저 평범해서 눈길을 끄는 곳이라고는 없는

 오랫동안 열심히 바라보는 사람만이 알게 될  

 한없이 적요한 것들의 격렬함을 상상하면 

 

 사라진 새들이 남긴 저 붉은 잎들이 한꺼번에 나무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다만 가을의 치세가 끝나는 것이다 

 네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기(雨氣)  



 구름과 안개 무성한 풍경을 거느린 채 조금씩 낡고 다친 곳을 들킨다, 자본주의 하늘 아래 산 것도 죽은 것도 별다를 것 없이


 점점 창백해지는 나무 아래로 사람들은 어깨를 적시며 오가고 흐릿한 수배 사진 속 한 노인도 비를 맞는다

 잡다한 전과가 수두룩한 칠십이 넘은

 어느 야유회에서 찍은 것 같은 단체 사진 끝자락에 서 있는, 어디서 본 것도 같은


 답장이 오지 않을 것을 이미 아는 편지를 보내고 우체국 게시판 앞에서 서성일 때  

 빛바랜 포스터 글자마다 찍히는, 길에 떨어져 그저 제 이마를 찧고 있는 

 저 웅얼거림들


 너를 잃고서야 어린아이처럼 겨우 더듬더듬, 네가 행복할 거라 믿으면 너를 침묵시킬 수 있을까, 네가 침묵하면 나는 행복해질까


 부서진 새들의 흰 뼈들을 싣고 파도는 끊임없이 도착하고 있는데

 사라져 간 것들의 자취 돌 속에 간직되듯 

 너는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지금처럼 단단히 견뎌 낼 각오를 하는데   

 

 희망과 결실로 가득 찬 실패야말로 완수될 우리들의 세계

 제 이름인 채로 낡고 다치지 않은 건 어둠뿐


 우리에게 어울리는 날씨는 언제나 흐림

 비를 피할 길이 없다






희망



뒤돌아서서 너는 나를 보았다

언제부터 되돌아갈 것을 염두에 두었나

마른 빵 부스러기를 조금씩 풍경마다 흘리며 

일요일의 사람들처럼 거리를 헤매며 


우리는 뿌리째 병들어 쓰러지는 나무의 영혼을 가지게 될 거야


숲으로 더듬더듬 걸어 들어갔던 네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얼굴에 붉은 칠을 한 채 

억새 한 움큼으로 만든 꽃다발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다 베일 정도로 충분했다


그래, 걱정할 것 없다

다음 계절이면 검은 버찌를 툭, 떨어뜨리며 

혀끝을 검붉게 물들일 우리들의 이야기가 

가지마다 하얗게 피어날 테니 

언제나 처음인 듯 


약속하지 않은 약속의 장소를 향해 

간혹 그림자를 조금씩 겹쳐 가며 걸었다  

그게 무언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슬픔의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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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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