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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_단편소설_비] 오렌지카라멜

  • 작성일 2013-07-15
  • 조회수 723



오렌지카라멜


전삼혜


 

저 선배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구나. 다현은 생각했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차모래도, 다현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모래의 뒷모습은 특별하지 않았다. 다현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를 걷다가 발견한다고 해도 쉽게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평범한 뒷모습이었다.


오렌지카라멜-삽화




교장이 서 있는 무대 위에서 아이들이 서 있는 바닥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다현은 눈으로 거리를 어림짐작해 보았다. 10미터? 15미터? 마이크까지 동원해서 이야기를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줄의 중간쯤에 서 있는 다현에게도 교장의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이 확실하게 보였다. 월요일 아침조회 시간, 교장은 국회에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 되는’ 어떤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구두 끝으로 바닥을 비비거나 하품을 했다.
“따라서 이번 법안은, 사탄의 행실인 동성애를 부추기는 것으로……”
동성애, 라는 말에 다현은 고개를 들어 교장의 얼굴을 보았다. 당장이라도 벌레 서너 마리는 짓눌러 죽일 수 있을 듯한 깊은 주름이었다. 주름에서 주름으로 이어지는 고랑을 세던 다현의 주머니가 진동했다. 다현은 주위를 살피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나희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완전 재수. 〉
다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답장을 보내려던 찰나, 다시 메시지가 왔다.
〈 간식 캔 사왔어. 저녁 시간에 보러 가자. 〉
다현의 휴대폰 바탕화면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웅크리고 서로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오렌지빛이 돌 정도로 노란 고양이가 하나, 좀 더 색이 짙어서 갈색에 가까운 고양이가 하나. 둘 다 아직 어린 고양이였다. 다현과 나희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르는 고양이. 교장의 연설, 그야말로 엄숙한 선서가 끝나가고 있었다. 다현은 교장의 입에서 ‘그’ 단어가 튀어나올 때마다 가슴 속이 선인장을 품은 듯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침조회가 끝나자 칠백오십 명의 여자아이들이 저마다 교실로 돌아갔다. 강당 문을 등 뒤로 돌리자마자 아이들의 입에선 웃음소리와 악의 없는 빈정거림이 튀어나왔다.
“뭐야. 동성애가 안 되면 이성애는 해도 돼? 그런 거야?”
“잘생긴 남자 선생님이나 좀 데려다주고 저런 말 하면 밉지나 않지. 교장 진상.”
“야, 나라도 세상에 교장 같은 남자만 있으면 레즈비언 되겠다. 그치, 다현아?”
나희가 다현의 어깨를 툭, 쳤다. 다현은 앞으로 세게 밀린 듯 순간 비틀거렸다. 손이 아니라 단어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다현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금세 표정을 바꾸어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처벌받아야 하고, 금지되어야 하고, 사라져야 마땅한 사탄의 행실. 다현은 듣고 싶지 않아도 귓속으로 밀려들던 문장들을 천천히 곱씹었다. 교문에서 운동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두 팔을 벌린 예수상이 서 있었다. 다현은 예수상을 보았다. 저기, 제가 하는 게 그렇게 저주받은 짓인가요? 동성애라는 거 말이에요. 다현은 재빨리 예수상을 지나쳐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그렇다고 하기엔 전 아직, 고백도 한 번 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죠.

 

교실로 들어오자 반별 아침조회가 이어졌다. 사십 대 중반의 담임은 피곤한 듯 자꾸만 안경을 감색 스커트 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몇 가지 전달사항이 끝나자 누군가가 불쑥 손을 들었다.
“쌤, 저희가 법을 만드는 것도 아닌데 교장 선생님은 왜 우리한테 열을 올려요?”
담임은 잠시 손을 든 아이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출석부를 챙겨 돌아서면서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다.”
수업이 시작하기 십 분 전, 아이들은 찰나의 여유를 붙잡으려는 듯 서로를 밀치고 당기며 깔깔거렸다. 다현은 책상에 앉아 볼펜을 돌리며 아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과장되게 비명을 질렀다.
“동성애 절대 엄금! 어우, 동성애라도 좋으니까 십대에 연애 좀 하자. 좀!”
목소리 큰 아이의 말에 다른 아이들이 자지러질 듯 까르륵댔다. 누군가가 그 말을 받아쳐 소리쳤다.
“야, 그래도 난 너랑은 안 사귄다!”
“어머, 진짜야? 자기 완전 실망이야.”
목소리 큰 아이가 소리친 아이에게 가 어깨를 흔들며 애교를 떨었다. 소리친 아이는 벌레라도 털어내듯 어깨를 흔들며 진저리쳤다. 물론 둘 다 웃고 있었다. 다현은 고개를 그대로 둔 채, 눈만 돌려 나희를 보았다. 나희도 웃고 있었다. 다현은 웃음이 지어지지 않았다.


고양이를 주운 건 일주일 전이었다. 나희와 다현이 쓰레기 당번인 날이었다. 폐지와 플라스틱, 재활용 쓰레기를 대충 분류해 소각장에 던져 넣고 돌아서는데 어디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찾아가 보니 고양이 두 마리가 울고 있었다. 겨우 젖을 뗀 듯, 아직 얼굴과 눈매, 귀 위의 선이 모두 둥글었다. 귀엽다, 라고 말하는 다현이 옆에서 나희가 얼굴을 찡그렸다.
“얘네 여기 두면 안 될 텐데. 수위 할배가 얼마 전부터 쓰레기봉투 찢어놓는 도둑고양이 잡는다고 갈퀴 들고 돌아다녔거든.”
“갈퀴? 쓰레기 긁는 그거?”
다현의 질문에 나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완전, 보기만 하면 소각장에 던져 넣겠다고…… 얘네 어쩌지?”
어쩌긴 어째, 그냥 두고…… 라고 말하려던 다현이 입을 다물었다. 새끼고양이들은 그대로 놔두면 곧 죽을 것처럼 약해 보였고, 자기 한 몸 감출 줄도 모를 만큼 멍청해 보였다. 다현은 주위를 둘러보고 교복 재킷을 벗어 고양이 두 마리를 감쌌다. 고양이들은 약한 울음소리만 낼 뿐 발버둥도 치지 않았다.
“어쩌려고?”
나희가 묻자 다현은 고갯짓으로 운동장 너머를 가리켰다.
“체육창고 뒤에 가져다 놓자. 저기는 수위 할배도 순찰 안 돌 거야.”
체육창고는 말이 창고지, 거의 낡은 비품들의 무덤에 가까웠다. 다현과 나희의 턱 근처까지 오는 담을 경계로 바깥은 공원과 맞닿아 있었다. 담을 따라가다 보면 학생들이 넘을 수 있을 만큼 낮은 담도 있었다. 다현과 나희는 체육창고 뒤, 바람 빠진 배구공들이 굴러다니는 곳에 고양이 두 마리를 내려놓았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대는 고양이의 발톱에 걸려 재킷의 올이 풀렸다.
“사료랑 그런 거 가져다주면서 돌보면 될 거야.”
다현은 재킷에 붙은 고양이털을 털어내며 말했다. 집에서 키우는 개 사료가 생각났다. 당장 고양이 사료를 사 줄 만큼의 돈은 없지만, 이 애들에겐 개 사료도 감지덕지할 것 같았다. 가끔 보러 오자는 말에 나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희도 가끔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줬다. 다현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최대한 빠르게 체육창고 뒤를 빠져나오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들은 곧 그날의 조회를, 그날의 말들을 잊어버렸다. 잊어버리지 않은 아이는 다현뿐인 것 같았다. 나희의 머리카락, 목덜미, 손목 같은 것을 볼 때마다 그날 교장의 엄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재판관, 혹은 신에게서 명령을 받은 사자 같았다고 다현은 생각했다. 교장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교장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다현은 세상이 알려주기 전까지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희를 볼 때마다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들뜨는 듯 일렁여도, 턱을 괴고 수업을 듣는 나희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도 그게 어떤 감정인지 몰랐다. 예뻐서 그런가, 라고 자신에게 농담을 하듯 흘려보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자마자, 그 감정이 일반적인 것이든 아니든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자마자, 다현의 속에서 작은 모래알 같던 감정이 불어났다. 본디 짝사랑은 누군가 확인시켜주기 전엔 잠잠한 법이다.
다현은 가끔 아득한 옛날을 떠올리듯, 자신의 감정이 ‘동성애’라는 단어로 규정되어지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위로했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되었을 거야. 그럴 때마다 다현에게 위로받던 또 다른 다현은 낮고 조용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천대받는 감정이라는 걸 알 필요가 있었을까. 다현은 다현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다. 어른들도 그날의 조회를 잊지 않았다. 교장은 학생인권조례 때처럼 차별금지법이 물 위로 오를 때마다 시끄럽게 혀를 찼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동성애라는 걸 아예 무시하고 싶은 것 같았다. 용납도 거부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대한다면 곧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장은 땅 속에 묻힌 씨앗의 뿌리까지 캐내고 싶은 것 같았다.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손을 놓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별꼴이라며 교장의 뒤에서 다시 손을 잡았다. 언뜻 보기에 교장의 행동은 맨손으로 개울물을 휘젓는 것 같았다. 물만 흐려질 뿐 어떤 고기도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잘못 던진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가 있고, 눈먼 고기가 있다.


3학년이었다. 손을 놓으라는 교장의 말에 우리가 왜 그래야 하냐고 대들었다고 했다. 교장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라는 말을 하며 3학년 아이의 머리를 손끝으로 밀었다. 교장 스스로도 몰랐을 것이다. 그 한 번의 손짓에 3학년 아이가 분노할 줄은. 자신이 동성애자라며 스스로 커밍아웃을 할 줄은.
제가 여자를 사귀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3학년 아이의 목소리는 건물 전체를 울릴 듯 카랑카랑하게 퍼졌다. 교장은 잠시 3학년 아이를 보다가 머리를 쥐어박았다고 했다. 3학년 아이에게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고, 들었다. 그 3학년의 옆에 있던 아이에게서, 전해 들었다.
“기억이 나요, 그게?”
“응. 그냥 기억이 나.”
다현이 물었을 때 그 모든 말을 전해준 3학년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장이 너무했지, 라고 말하던 3학년의 가슴에는 장서윤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다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했어요, 라는 말은 혀끝으로 오지 못하고 사라졌다.
오렌지와 카라멜은 뒹굴고 놀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것 같았다. 품에 두 마리가 쏙 들어오던 새끼고양이 시절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동그랗던 눈동자가 가느스름해지고, 어둠 속에서 크기가 변하는 동공이 뚜렷해졌다. 다현은 오렌지와 카라멜에게 가져다주는 사료의 양을 늘렸다. 다행히도 아무도 고양이 두 마리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다현의 집에서 키우는 개는 사료 봉지를 덜어내는 다현을 보고 컹, 서운한 듯 짖었다. 오렌지와 카라멜은 자신들의 처지를 아는 듯 다현과 나희 앞에서만 작고 가늘게 울었다. 곧 깨져버릴 고드름처럼 가늘고 뾰족한 이빨이 두 마리의 입 안에서 드러났다.


서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교장이 너무했지, 다음에 올 말을 다현은 짐작할 수 있었다. 교장이 그렇게 심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모래가…… 않았을 거야. 교장에게 대들었다는 3학년, 차모래는 4층 3학년 교실에서 뛰어내렸다. 방과 후였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자습실을 빠져나와 교실로 들어갔을 것이다. 어두운 칠판에 흰 분필로 유서 아닌 유서를 또박또박 적는 차모래, 선배.
왜 똑같은 감정인데 나한테는 더럽다고 말해요?
그렇게 적고, 뛰어내렸다. 그렇지만 부러진 것은 목뼈가 아니라 팔뼈였다. 떨어졌는데 눈을 떠 보니까 내가 살아 있었어. 팔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어. 칠판에 써 놨던 건, 지울까 했는데…… 못 지웠어. 서윤의 휴대폰에 모래는 메시지를 보냈다. 서윤이 메시지를 확인하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모래는 이미 병원을 떠난 뒤였다.


“지워버릴걸 그랬어. 나라도 그 칠판에 모래가 적은 걸 지워버릴걸. 그러면 다 없던 일로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서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칠판의 글씨를 발견한 건 담임이었다. 차모래의 가방, 열린 창문, 칠판의 글씨를 모두 확인한 담임은 1층으로 굴러 떨어지듯 내려갔다. 쓰러져 있을 차모래를 상상했을까. 그러나 그 곳에 모래는 없었다. 2층 높이로 자란 감나무의 큰 가지가 부러진 것을 본 담임은 교장실로 갔다. 교장은 차모래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며칠 후, 팔에 붕대를 감은 차모래와 부모님이 학교로 찾아와 교장 앞에 앉았다. 교장은 언성을 높였고, 차모래는 입을 다물었다.
서윤이 말하지 않았는데, 대체 어디서 소문이 퍼진 걸까. 소문은 이미 온 반 안에 퍼져 있었다. 차모래는 한쪽 팔로 교과서와 필기구를 가방 안에 쓸어 담았다. 가방은 모래가 뛰어내린 날부터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차모래는 혼자 가방을 메고, 혼자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봤어요. 그 선배 걸어가는 거.”
다현이 말했다. 수업 시간이었지만 다현은 몰래 창밖을 내다보았다. 다현 말고도 몇 아이들이 창밖을 내다보며 수군거렸다. 해가 높이 떠서 그림자가 짧았다. 저 선배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구나. 다현은 생각했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차모래도, 다현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모래의 뒷모습은 특별하지 않았다. 다현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를 걷다가 발견한다고 해도 쉽게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평범한 뒷모습이었다. 전화를 걸었을 때는 이미 없는 번호였다고 서윤은 말을 맺었다. 서윤이 자리를 떠나고 다현은 치마 주머니 안에 든 사료 봉지를 만지작거렸다. 학교는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손을 잡고 다니던 아이들은 손을 놓았다. 아이들은 조금씩 떨어져 걸었다. 교사들도 둘씩 짝지어 다니는 아이들을 흘끔거렸다. 나희와 다현은 체육창고 뒤편에 따로 갔다. 다현은 사료 봉지를 뜯어 사료를 흩어놓으며 속삭였다. 소리 내지 마, 들키면 안 돼. 두 마리 고양이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왔다. 저녁 어스름에 숨은 다현의 등 뒤,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야, 치사하게 혼자 오냐?”
나희의 목소리에 다현은 사료 봉지를 떨어뜨렸다. 오렌지가 야옹, 핀잔하듯 울었다. 카라멜은 흩어진 사료를 주워 먹기에 바빴다.
“캔 사 왔는데.”
나희가 캔을 따서 고양이들 앞에 내려놓았다. 눅눅한 먼지 냄새 가득한 공기 중으로 비린 생선 냄새가 퍼졌다. 오렌지와 카라멜은 고개를 주먹만 한 캔 안에 처박을 듯 게걸스럽게 캔을 먹었다. 가는 바람이 불 때마다 텁텁한 냄새에 콧속이 간질거렸다. 얼마 전까지 없던 곰팡이가 땅과 벽이 맞붙어 있는 부분에 시퍼렇게 피어 있었다. 고양이들을 옮겨야겠어. 나희가 말했다.
“어디로?”
다현이 묻자 나희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글쎄. 그런데 어디든 여기보단 나을 것 같지 않아? 얘네가 무슨 죄야. 이렇게 곰팡이 냄새 풀풀 나는 데 살고.”
5월이 가고 장마가 오면 곰팡이는 빠른 속도로 번져갈 터였다. 그때쯤이면 오렌지와 카라멜도 더 이상 어린 고양이가 아니겠지. 다현은 뜻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굳이 다현과 나희가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 주지 않아도, 그때면 오렌지와 카라멜 스스로 다른 곳을 찾아 떠날지도 모른다. 허리를 숙이고 고양이 두 마리를 내려다보는 나희의 머리카락 끝이 밖으로 뻗쳐 있었다. 다현은 나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너 머리 뻗쳤어."
“아, 진짜…… 매직 한 번 해야겠다. 반곱슬 진짜 싫다.”
나희가 뻗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말았다. 다현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등 뒤에서 불빛이 비쳤다. 오렌지와 카라멜은 약속이라도 한 듯 불빛이 비치지 않는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다현이 발을 앞으로 내디디려는 찰나, 나희가 다현을 잡아끌었다.
“숨어!”
나희는 한 손으로 다현의 팔을 잡고, 체육창고 벽 아래에 웅크려 앉았다. 주변에 그늘이 많으니 운이 좋다면 플래시 불빛을 받아도 둘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다현과 나희의 몸이 좁은 그늘 아래에서 달라붙었다. 춘추복 와이셔츠 안으로 내리뻗은 팔에 돋은 소름마저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얇은 와이셔츠를 뚫고 솜털과 솜털이, 소름과 소름이 겹쳐지는 것 같았다. 공포도 두려움도 짜릿함도 아닌 감각 때문에 다현은 심장이 뛰었다. 나희의 뻗친 머리카락이 다현의 귓가를 간질였다. 다현은 입을 막았다. 플래시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다현은 숨도 쉬지 못했다. 운동장이 완전히 어둠에 잠기자 다현이 먼저 일어났다.
“재채기 나오는 줄 알았어.”
다현은 잠긴 목소리로 말하고 몇 번 기침을 했다. 나희가 치맛자락을 털었다.
“여기 먼지 장난 아니네.”
나희가 콜록거렸다.


전화를 했다고 그랬죠. 왜 직접 찾아가진 않았어요? 왜 모래 선배가 가방을 챙길 때, 도와주지 않았어요? 다현은 서윤에게 묻지 않았다. 차모래가 서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는 부분을 말할 때, 서윤의 눈 속에는 엷은 혐오와 두려움이 스쳤다. 다현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 사람들은 동성 친구가 커밍아웃을 하면 이상한 착각을 한다. 혹시 쟤가 나를? 남녀 사이라면 도끼병이라고 웃어넘겨도 좋을 착각이 좀처럼 웃음이 되지 않는 지점.
왜 너는 나희에게 솔직해지지 못해? 커밍아웃, 이라는 행동을 생각할 때마다 다현은 먹먹해졌다. 나희는 가장 친한 친구였고, 감추고 싶은 게 없는 사이였다. 아마 다현이 다른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으면 가장 섭섭해 할 사람은 나희일 것이다. 나희가 다른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으면 다현이 섭섭해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내가 나희를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야. 다현은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세상 모든 동성애자가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를 짝사랑하는 것은 아니니까. 달리 표현하자면, 당신의 베스트 프렌드가 당신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당신을 가장 친한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서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고 다현은 굳이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담임은 조금 굳은 얼굴로 교실에 들어왔다. 김다현, 유나희 교무실로 내려가라. 학생주임 선생님이 찾으셔. 담임은 다현의 눈길을 피했다. 무슨 일일까. 나희가 먼저 일어서 나갔고 다현이 뒤따랐다. 복도 끝으로 걸어갈 때까지 뒤통수에 담임의 시선이 느껴졌다.
교무실에 들어가자 교사들의 눈이 다현과 나희에게 쏠렸다. 학생주임은 앞에 선 두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툭 던졌다.
“너네 사귀냐?”
풉, 나희의 입에서 침방울이 튀었다. 다현도 짐짓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 눈을 뭘로 보고?” 나희가 너스레를 떠는데도 학생주임의 눈초리는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찔끔한 나희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학생주임은 굵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 유리를 툭툭 두드렸다.
“교장 선생님이, 어제 체육창고 뒤에서 너네를 봤다고 하더라. 가만히 없는 척 지켜보고 있으니까 너네 둘이 걸어 나왔다며. 교복에 달린 명찰까지 확인하셨다더라.”
확신이 담긴 추궁에 다현과 나희는 서로를 마주볼 수 없었다. 학생주임은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시시콜콜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너네 말이야, 학생 때 그런 감정 가질 수도 있지. 그런데 그게 평생 갈 줄 아냐? 대학 가고 해 봐. 미팅하고 남자친구 생기면 이때 불장난 같은 게 생각이나 날 거 같아? 다현과 나희 누구도 고양이 때문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혼이 날 테지만, 말을 하면 고양이들이 죽을 수도 있었다. 나희가 버럭 짜증을 냈다.
“아, 진짜 아니라고요. 학생이 학교 안도 못 돌아다녀요?”
이것 봐라, 라는 식으로 눈을 치켜뜬 학생주임에게 나희가 쏘아붙였다.
“저 남자친구 있어요.”
학생주임은 조금 얼떨떨한 듯 다현과 나희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그리고 가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나희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걸어나갔다. 다현은 조금 느리게 그 뒤를 따랐다, 아무래도 좀 떨어져 걷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희가 교실로 돌아오자 아이들이 꿀에 몰리는 개미처럼 모여들었다. 뭐래? 사귀냐잖아. 어 대박. 그럼 너 레즈냐고 물은 거야? 쩐다 완전. 대놓고 그러냐. 호기심과 웃음으로 소란스러운 와중에 누군가가 툭, 던졌다. 너 근데 김다현이랑 베프 아니냐? 맨날 붙어다니잖아. 진짜 사귀는 거 아냐? 달아오른 얼굴을 찬물로 식힌 다현이 교실 앞 복도를 걸어오고 있을 때였다.
“미쳤냐? 김태희 정도면 몰라.”
“그럼 김다현이랑 죽어도 사귀기 싫다 세 번 해봐.”
“내가 왜?”
“김다현도 없잖아. 해봐. 쫄리면 관두고.”
비웃듯 빙글거리는 웃음이 나희의 주변을 가득 채웠다. 나희는 낄낄거리며 한 손을 들었다.
“김다현이랑 죽어도 사귀기 싫다. 김다현이랑 죽어도 사귀기 싫다. 김다현이랑 죽어도 사귀기 싫다! 절대 안 사귄다!”
문을 열고 다현이 들어왔다. 둘을 마주보던 아이들이 입꼬리를 내렸다. 먼저 웃음을 터뜨린 쪽은 다현이었다. 다현은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그리고 나희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툭, 쳤다.
“야, 나도 유나희 너랑은 죽어도 안 사귄다!”
잠시 얼어붙었던 교실이 빠르게 풀렸다. 다현도, 나희도, 아이들도 웃었다. 다현은 주머니 속에서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도록 주먹을 쥐었다.


수업이 끝나자 자습실로 가려는 다현을 나희가 툭 걷어찼다.
“야, 삐짐?”
“안 삐짐.”
퉁명스러운 다현의 말에 나희는 숫제 업히듯 엉겨 붙었다.
“네가 남자면 당장 너랑 사귀지. 내가 없는 남친까지 만들어서 학생주임 빠져 나왔잖어. 한 번만 봐주라. 응?”
“알았어. 다음 생엔 내가 남자로 태어나주마. 이왕이면 몸 좋은 남자.”
다현은 대꾸하고 피식 웃었다.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습실은 3층이었다. 3층에서 다현은 흘끔, 밖을 내다보았다. 땅이 가까웠다.


그날 이후로 다현은 서윤을 만나지 못했다. 만나긴 했겠지만 스쳐지나갔다는 게 더 바른 말일지도 몰랐다. 언뜻언뜻, 서윤과 비슷한 사람을 보긴 했지만 다현도 굳이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서윤은 다현에게서 자신을 감추고 싶은 것 같았다. 다현이 모래의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서윤을 찾아갔을 때도 그랬다. 장서윤 선배 계신가요. 다현이 3학년 교실 앞에서 물었을 때 서윤은 다현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차모래 선배, 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서윤은 과장되게 반가운 척을 했다. 어머, 웬일이야? 반갑다고 하기엔 다현은 서윤을 처음 보았고, 서윤이 다현의 어깨를 쥔 손에는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다현의 어깨를 끌다시피 잡고 사람이 드문 복도 끝에 도착하자 서윤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넌 누구야? 차모래 선배와 나와, 동성애와 어떤 경로로든 연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차모래가 동성애자였다고 해도, 서윤과 어떤 관계인지는 본인이 말하기 전에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서윤은 그 프레임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화면에 찍히는 것만으로도 피해자가 된다.


별관 3층은 야간자습실이었고 4층은 3학년 교실이었다. 다현의 교실에서 별관으로 가려면 건물 사이에 있는 구름다리를 지나야 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아이들은 구름다리를 지났다. 본관에서 자습실로 갈 때, 저녁을 먹으러 본관에 있는 식당으로 돌아올 때. 다현은 구름다리에 서서 4층을 올려다보았다. 먹장구름이 가득한 하늘이었다. 구름다리를 건너는 아이들이 다현의 곁을 지나갔다. 본관에서 별관으로, 혹은 별관에서 본관으로. 아이들은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었다.
“다현! 거기서 뭐 해?”
다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스크림을 든 나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희는 다현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
“내가 갈게!”
다현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나희가 올라오자마자 장난스럽게 다현의 어깨를 껴안았다. 봄은 여름이 다가올수록 물러나고 있었다. 나희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었다. 다현은 목을 뒤로 젖히며 나희의 팔을 떼어냈다.
“사람 죽겠다.”
나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다현이 너 요즘 너무 쌀쌀맞아. 야, 그때 그건 사과했잖아. 그럼 좀 잊어주면 덧나?”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진짜 더워서 그래.”
다현이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뒷목으로 땀이 흘렀다. 나희는 다현을 보다가 다시 바짝 다가왔다. 익숙한 웃음이었다.
“알았어. 그럼 이 언니가 뽀뽀해줄까? 그럼 화 풀 거야?”
다현은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다현이 피하자 나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안해진 나희가 다현의 소매를 잡았다.
“너 진짜 왜 그래?”
다현은 나희의 손을 뿌리쳤다. 여름이 오는지, 손이 끈끈했다. 다현은 간신히 대답했다. 더워. 자습실에는 아직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돌아가지 않는데, 다현은 걸음을 재촉해 자습실로 돌아갔다. 끄트머리만 남은 햇살이 눈부셨다. 햇살을 먹구름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오늘 중부지방에 많은 비가 내리겠습니다. 아침에 나오기 전 그런 뉴스를 들었던 게 생각났다. 유나희 우산 안 가져온 거 같던데. 다현은 자습실 문을 열며 혼자 중얼거렸다.


열 시가 되면 자습실은 문을 닫았다. 다현은 이십 분 먼저 가방을 챙겨 나왔다.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살피며 체육창고 뒤로 갔다. 주머니에서 꺼낸 사료 봉지가 눅눅했다. 다현이 오렌지와 눈을 맞추며 무릎을 꿇었다. 카라멜은 보이지 않았다. 앉은 채 주위를 살피자. 고양이들이 마시는 물그릇에 물이 채워져 있었다. 다현이 사료 봉지를 뜯었을 때 나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현은 황급히 사료 봉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화가 났으면 화가 났다고 말을 해.”
다현이 일어섰다. 어둠 속인데도 나희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 같았다. 너 진짜 짜증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얼마나 더 사과를 해야 돼? 수문을 열어버린 댐처럼 나희의 입에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물보라가 다현에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말리고 말린 마음이 다시 젖어가고 있었다. 마중물이었나, 감정이 스멀스멀 차오르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나희가 소리쳤다. 소리가 파동이 되어 마음을 밀쳤다. 감정으로 가득 찬 물그릇이 엎어졌다. 다현도 참지 못하고 나희를 세게 밀었다. 흙바닥에 주저앉은 나희가 울음을 터뜨리려는 찰나, 다현이 먼저 외쳤다.
“네가 내 입장이 되어 보라고! 나는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아냐고!”
눅눅한 바람이 멈췄다. 흘러가던 물이 모서리를 만나 천천히 아래로 한 방울씩 떨어졌다. 이마에 차가운 물을 맞은 듯, 다현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나도 몰라. 모른다고! 나도 모르겠다고!”
주저앉은 나희가 얼어붙은 듯 눈물을 멈췄다. 야, 너 왜 그래. 너, 너, 있잖아. 다현아. 나희의 얼굴에 낭패와 당황, 그리고 가느다란 깨달음이 어렸다. 다현은 눈물과 콧물을 와이셔츠 소매로 닦으면서 계속 울었다. 지나가는 차 소리가 울음소리에 겹쳤다. 열 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곧 아이들이 몰려나올 터였다. 나희는 다현에게 손을 뻗으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너 미쳤어?”


나희는 다현을 수돗가로 데려가 얼굴을 씻겼다. 끈끈한 콧물이 손에 묻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현도 마찬가지였다. 다현은 물이 떨어지는 얼굴을 휴지로 닦았다.
“집에 갈래.”
“아직도 화 났어?”
나희의 물음에 다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화 안 났어. 화난 적 없어.”


다현은 육교 위에 오래 서 있었다. 육교 아래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사이렌 소리는 가까워지면서 높아졌고 멀어지면서 다시 낮아졌다.
난 아닌데.
손등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다현은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점점 더 많은 물방울이 주위를 적시기 시작했다. 비가 오고 있었다. 비, 라고 말하다가 다현은 멈췄다. 순식간에 쏟아진 비가 다현의 옷을 적셨다. 치마가 몸에 달라붙자 주머니에 들어 있는 사료 봉지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렇게 큰 비를 맞아본 적이 없을 텐데. 다현은 발걸음을 돌려 다시 학교 쪽으로 뛰었다.
철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 주먹보다 큰 자물쇠는 아무리 잡아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현은 뒷담 쪽으로 뛰어 풀숲을 헤쳤다. 젖은 치마가 다리에 감기고 억세진 나뭇가지가 종아리를 긁었다. 하늘이 갈라지며 천둥소리가 났다. 천둥소리 끝에 겁에 질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다현은 어둠 속에서 체육 창고 쪽으로 달려갔다. 울고 있는 고양이는 한 마리였다. 다현은 오렌지를 품에 안았다. 카라멜이 없었다.
“카라멜!”
이름을 알아들을 거라는 보장이 없는데도 다현은 이름을 불렀다.
“여기 있어!”
대답이 돌아왔다. 나희의 목소리였다. 다현은 휴대전화 불빛으로 앞을 비췄다. 우산을 목과 어깨 사이에 낀 나희가 카라멜을 안고 있었다. 카라멜이 축 늘어져 있었다. 나희의 다리도, 치마도 흙투성이였다.
“수로에 빠져 있었어. 벌써 물이 차올라서……”
우산을 썼는데도 나희의 머리카락도, 옷도 흠뻑 젖어 있었다. 오렌지가 카라멜에게 가려는 듯 다현의 품 안에서 버둥댔다.


동물병원은 열려 있었다. 늘 개를 데리고 오던 다현이 흠뻑 젖은 채 고양이를 안고 들어오자 수의사는 놀란 것 같았다. 커다란 수건 두 개를 다현과 나희에게 건네준 수의사가 카라멜을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나온 수의사가 오렌지를 안고 들어갔다. 다현과 나희는 사이에 가방을 둔 채 떨어져 앉았다. 수의사가 돌아올 때까지.
“둘 다 수컷이네요.”
수의사가 말했다. 이리저리 뻗친 나희의 머리카락 끝에 나뭇잎이 붙어 있었다. 다현은 가만히 손을 뻗어 나뭇잎을 떼었다. 살 수 있을까요? 두려움이 섞인 나희의 말에 수의사는 웃었다. 아마 그럴 거예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일단 체온이 많이 떨어진데다가 영양실조가 있어서, 오늘은 여기 두는 게 나을 거예요.”
나희가 체크카드를 내밀자 수의사가 카드를 긁었다. 한 달 치 교통비를 넘는 돈이었다. 빗줄기가 조금씩 가늘어지고 있었다. 다현은 수의사에게 우산을 빌려 동물병원 밖으로 나왔다. 비에 젖은 불빛들이 도처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네가 왜 병원비를 내?”
다현이 묻자 나희는 다현을 보았다. 나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야, 넌 진짜 좋은 친구야. 착하고, 똑똑하고, 정도 많고.”
“그건 갑자기 왜……”
다현의 말을 자르며 나희가 다시 말했다.
“넌 진짜 좋은 친구야.”
완곡한 거절임을 알아챈 다현이 눈길을 떨어뜨렸다. 구두 안의 흰 양말은 흙투성이였다. 젖은 양말 안에서 발가락이 찌걱거렸다. 나희의 양말도 흙과 빗물로 얼룩져 있었다.
“알아. 너도 진짜 좋은 친구야.”
다현이 대답했다.
“내일 보자.”
나희가 말했다.
“응. 내일 보자.”
다현이 대답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다현은 열쇠로 집 문을 열며 수의사의 말을 되뇌었다. 마루에 엎드려 있던 개가 컹, 걱정하듯 짖었다. 다현은 젖은 교복을 세탁기에 넣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고양이 두 마리가 모두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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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궁금한 건 @너말고 '너’ 배연주 대화하다가 들으면 좋은 말 중 하나는 이거다. “요즘 읽은 책 중에 좋았던 거 뭐야?” 그 말을 들으면 30분은 떠들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질문 받기를 기약 없이 기다리기보다 먼저 보여주고 싶다. 내가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청소년 장편소설 과 단편소설집 다. ‘가장 좋다’라고 무언가를 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좋은 것에 순위를 매기고 기준을 정하는 건 힘들다. 그럼에도 두 책이 바로 떠오른 건 다시 읽고 싶어져서였다. 직장 동료들과 2~3주에 한 번 모여서 점심 독서모임을 하는데 같이 읽을 책을 내가 정할 차례였다. 나는 을 골랐다. 나도 다시 읽고 싶었고,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했다. 도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그러면서 올해 읽은 책들 중 그 책들이 가장 좋았다는 걸 깨달았다. 좋은 걸 주변에 나누고 싶은 마음과 다시 읽으며 되새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까. 두 소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소재로 sns가 등장한다. 의 등장인물들은 sns에 게시물을 올리고 댓글과 DM으로 소통한다. 의 ‘나주’는 블로그,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를 운영한다. 나도 주인공들처럼 두 소설의 리뷰를 sns 이미지 속에 담아 보았다. 먼저 인스타그램. 의 친구들이 쓰는 sns는 인스타그램으로 추정된다. 독서모임을 한 후에 생각했던 것을 썼다. 가상의 DM이지만 몇몇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만들었다. 내가 만약 실제로 저 게시물을 올린다면 oo이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하면서. 평소에도 내가 인스타그램에 게시물이나 스토리를 올리면 그 주제로 대화를 거는 친구들이 있고, 고등학교 시절과 친구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있다.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에는 늘 다정함이 배어 있다고 느낀다. 인스타그램은 친구들과 소통하는 곳이니까 발랄한 느낌이 담겨 있다면 페이스북에서는 좀 더 사적이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잘 쓰이지 않는 sns. 내가 가끔 비공개로 일기를 쓰러 가는 곳. ‘나는 사실, 내가 참 싫다.’라는 소설 속 문장을 좋아하면서도 어쩐지 친구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데, 페이스북 비공개 게시물로는 무람없이 올릴 수 있다. 아이디와 프로필 사진 이미지는 가상으로 만들었지만 내

  • 관리자
  • 2024-10-01
중국에서 퍼지는 한국 문학의 ‘전파(電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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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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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SNS에서는 시가 유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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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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