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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단편소설] 엉클 마왕 (下)

  • 작성일 2013-07-02
  • 조회수 318



엉클 마왕 (下)


정세랑


 

“그러니까, 나도 더 이상 칼립소 같은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 누군가의 페넬로페가 되고 싶어. 다음번에는. 내가 망설이는 게 당연한 거 아냐?”


1306_엉클마왕-삽화



 

 6

 


동쪽 사막에서, 스핑크스를 잡으며 회의를 했다. 힐러가 없는 이상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것은 스핑크스 정도다. 신화보다 훨씬 작고, 멍청하고, 디자인도 구린 스핑크스. 사냥을 하며 회의를 했다.
그리고 사실 그건 회의라기보다는, 결행 전에 미리 동의를 구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힐러의 사생활을 침해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영 찜찜해서 나머지들에게 미리 보고했다.
처음엔 이메일만 해킹하려고 했다. 해킹도 아닌 것이, 난 힐러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같이 살 적에 우연히 자판을 치는 걸 봐버렸다. 힐러는 마치 느린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처럼 우아하게 자판을 쳤기 때문에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미묘하게 비밀번호는 마법사의 생일이었고, 나중에 지나가듯 묻자 그저 귀찮아서 바꾸지 않을 뿐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럴 수 있다. 나도 비밀번호를 까먹었을 때는 당시 남자 친구들의 생일을 주루룩 대입해보니까. 감정이랑은 별로 상관없는 연대기적 문제다.
힐러가 주로 쓰는 계정의 개인적인 메일은 주목할 만한 것이 없었다. 유학 간 친구의 안부 메일 정도. 내가 노린 것은 힐러의 소재 파악에 도움이 될 만한 신용카드 사용 내역서였는데, 불행히 힐러는 아직도 우편으로 고지서를 받는 고전적 인간이었던 것이다. 스팸메일만 643통. 엔트로피의 법칙을 눈으로 목격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힐러의 원룸에 간 것은 그러니까, 정말 우편함만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가족들이 가지고 간 건지, 너무 많이 쌓여서 주인집에서 보관하고 있는 건지 텅 비어 있었다. 퇴근 후에 바로 달려간 거였는데, 어쩐지 망연자실해져버렸다.
그때 힐러의 현관 문고리에 붙어 있는 열쇠집 전화번호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아아, 힐러라면 이해해줄 거다. 내가 사라지면 힐러라도 같은 선택을 할 거라고, 난 스스로를 다독이며 전화를 걸었다.
열쇠 아저씨는,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싶게 쉬이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내 말을 믿고 문을 따줬다. 젊은 아가씨의 무해한 이미지 덕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나는 이런 무단침입을 반성하며, 힐러의 자물쇠를 업그레이드 시켜주고 보조 체인도 하나 더 달아주었다. 진정한 우정이란 가끔 이렇게 선을 넘는 거야, 따위의 자기위안을 하려 했지만 쉽진 않았다. 자책감을 애써 누르며, 열쇠 아저씨가 작업을 하는 동안 힐러의 책상에 앉아 한가롭게 다이어리 정리를 하는 척했다.
함께 살 때, 힐러는 종종 열쇠 없이 외출하곤 했었다.
“나 열쇠 없이 나간다?”
“응, 걱정 말고 다녀와.”
“자면 안 돼!”
“안 자, 안 자.”
“죽으면 안 돼!”
“응…… 아니 잠깐만, 내가 죽은 상황에서 고작 집에 못 들어올까봐 걱정하는 거야?”
나중에 힐러가 돌아와서 열쇠가 맞지 않아 당황한다면, 바로 나한테 전화하겠지. 분명 그럴 거다.


열쇠 아저씨가 돌아가고, 힐러의 침대에 누웠다. 창 너머로 가로수 그림자가 발목까지 드리웠다. 몸에 잎맥이 새겨질 것 같은 가구 배치네. 아아, 이게 새로 샀다고 자랑했던 라텍스 베개구나. 진짜 푹 잘 수 있다고 전화에 대고 쫑알쫑알 자랑을 했었다. 얼마나 푹 자냐면 자기 전에 들은 노래를 일어날 때 이어서 흥얼흥얼할 수 있을 만큼이라고. 아주 균일한 잠을 잔다고. 게다가 옆으로 자도 얼굴이 안 눌린다고 신나라 했다. 힐러는 언제나 제대로 자지 못하는 편이었다. 가끔 내가 술이 많이 취해서 새벽에 전화를 할 때에도, 아주 반갑게 받았다. 전혀 못 자고 있었다거나, 혹은 아주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었다고 어쩜 그렇게 타이밍 좋게 전화를 하냐고 말이다.
“떨어져 있어도 룸메 타이밍인 거지?”
“응응, 룸메 파워 업!”
나는 생각나는 게 있어 약통을 뒤졌다. 역시나. 3주치쯤 되어 보이는 발륨이 나왔다. 수면제는 아니지만 약한 신경안정제. 녀석은 스물네 살부터 발륨을 처방받아 왔다. 스트레스성 위염 때문이었지만, 잠도 잘 자게 해준다고 그랬다.
“슬플 때 먹어도 좋은 거 같애. 진짜 있는 효과인지 내 멋대로 느끼는 건지는 모르지만, 원전 폐기물 보관함 있잖아. 무지무지 단단하게 밀폐되는 그런 노란 깡통. 감정을 그런데다가 봉인할 수 있게 해줘. 슬픔이 아직 거기 있는데도 내 슬픔이 아닌 것 같아.”
힐러는 어디에 갔든 필요한 만큼 챙겨 갔을 거다. 요즘엔 덕분에 내가 너무 신경도 쓰이고 힘들어서 한 봉지를 챙겼다. 아아, 대한민국 약물 오남용의 실태로군.
힐러가 좋아하는 빈티지 가죽 트렁크가 사라진 걸 발견하고 옷장을 열어보니, 제일 좋아하는 원피스 두 개와 핏이 좋은 청바지 하나, 티셔츠가 다섯 개쯤 없었다. 신발은 플랫 하나, 힐 하나, 운동화가 없고 말이다. 내가 모르는 아이템을 더 샀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만큼 오래되고 같이 살아본 친구라면 옷장이나 신발장은 꿰고 있기 마련이다. 속옷까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정도밖에 안 가져갔으면 2주면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약간 안심이 되었다.
정말 짐을 하나도 싸지 않았었구나. 무슈의 아파트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모든 게 그대로였다. 나와 살 때의 그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침대 밑을 보자 유목민 키트가 그대로 있었다. 우리가 유목민 키트라고 부르는 그것들은, 펼치면 짐을 넣을 수 있는 와이어 박스와 조립식 서랍, 거대한 이불보자기, 플라스틱 바구니들이었다. 그것만 있으면 아주 쉽게 짐을 쌀 수 있었다. 반나절도 안 걸리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시작도 안 했던 것이다. 힐러는 언제까지 고민하고 언제부터 결심했던 걸까.
화분에 물을 주고, 여기 저기 쌓인 먼지도 털었다. 그래도 내 방보다는 훨씬 깨끗하구만.
그때 문득 생각이 나 힐러의 책상 서랍을 열어보았다. 여권도 여권 지갑도 없었다. 힐러의 언니에게 전화했다. 젖먹이가 딸려 있는데 힐러의 결혼과 파혼을 모두 신경 쓰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언니, 이런 때 갑자기 미안해요, 다른 게 아니라 언니가 이런저런 취소 다 맡아 하셨죠? 그 신혼여행 예약했던 건 어떻게 되었나요?”
“아, 그거 알아봤더니 환불되는 기간이 완전히 지났더라고. 아주 속상해 죽겠어. 식장도 식장이지만 결혼 사진은 액자까지 뽑아놨던데 아깝다고 들고 올 수도 없는 물건이고 이게 웬 꼴이니.”
“원래 가려던 데는 하와이랑…….”
“하와이랑 미 서부였지.”
힐러가 그대로 거기 갔을지, 전혀 다른 티켓을 끊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언니, 고생하셨어요.”
“나야 뭐, 엄마랑 아빠가 문제지. 요즘 얼굴이 까맣게 되셨어. 나는 몰라도 평생 그렇게 착한 딸이 이렇게 애먹일 줄 누가 알았니.”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힐러의 언니는 장녀답게 상당히 호쾌한 성격이었다. 저 호쾌함을 반만 닮았어도 힐러가 사라지지 않았지 싶었다.
통화를 끝내고 다시 힐러의 라텍스 베개를 베고 누웠다. 나무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저 이 근처 어디 조용한 곳에서 잠적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지구 전체로 수색 영역이 확대되고 말았다. 나는 이 별 위에 너의 좌표를 짚어낼 수 없구나.



 6.5

 

사실은 초콜릿이 먹고 싶지만 뒷맛까지 고려해서 민트 초콜릿을 먹는 것이나 건강을 위해 무가당 플레인 요거트를 먹는 것.
꽤 터프했던 밴드의 보컬이, 얌전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공중파 방송에서 달콤한 노래를 해대도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
신당역 긴 환승역 통로에서 전화할 사람이 없을 때 가장 외롭다는 너의 말에 언제든 전화하라고 말해주는 것.
어딜 가서나 서비스직 종사자에게 매너 있게 대하면서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는 처신을 배우는 것.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
실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사후처리 능력은 키워가는 것.
우리의 모났던 면들이 함께 자갈자갈 갈려나가고 점점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
걱정과는 달리, 함께.
그러니 너도 어서 돌아와.



 7

 

“걔가 여행을 좋아했던가?”
그건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는, 이미 모두가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 우리 다섯 모두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킬러의 9인승 카니발은 물론 언제나 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을 통틀어 바다에 한 번 정도 갔던가. 우리의 여행이란 결국 경기도, 혹은 아주 가까운 강원도의 숙소에 가는 것이었고 숙소에 가면 3킬로미터 이내 반경의 산책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함께 있는 게 포인트였지 그게 어딘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요소였다. 심지어는 서울 시내 레지던스에서 모인 적도 몇 번 있었으니까.
여행을 싫어하는 구석까지 통해서 친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휴가를 쪼개 낸 다음, 누군가의 집이나 자주 가는 카페에서 녹은 카라멜처럼 오후를 보냈다. 주기적이고 여유롭게.
그런 오후에는 대개 마법사의 원맨쇼가 이어지곤 했다. 솔직히 배우긴 해도 아주 잘생긴 배우는 아니고, 스스로도 그런 류의 자의식 과잉은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 얼굴에 스스로 반하는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이 녀석에게도 다른 종류의 과잉이 있는데, 그건 “순간순간 너희를 웃기다가 죽여야겠어!” 따위의 희한한 욕구다. 우리를 웃기면서 본인도, 아직 당국에 알려지지 않은 신종마약을 한 것처럼 하이 상태가 되는 거고 말이다. 그걸 보면서 다른 애들도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우려되는 구석이 있기도 했다. 저렇게 퍼내고 나서 돌아서는 순간 3일 내내 회만 먹은 사람처럼 몸속부터 서늘해하는 게 아닐까. 개그 캐릭터의 가장 큰 능력이자 맹점은, 치명적인 관통상도 페이퍼 컷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는 거니까. 웬만한 상태까지는 빙글빙글 모드니, 상처를 뒤집어보는 건 언제나 혼자 남겨질 때일 수밖에. 우리한테 저러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정도니까 녀석만의 광대 페르소나 너머를 볼 수 있다고. 가벼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의 무거움. 자기 희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의 자신감. 웃음을 뽁뽁이 포장지로 쓰는 우울과 불안을. 그런 걸 다 봐줄 수 있어야 우정이라니 참 피곤하다.
그런 마법사의 농담이 5분 전쯤 뚝 그쳤다. 힐러의 빈자리를 웃음으로 채우려 딴에는 최선을 다했지만 고장 난 것처럼 멎어버렸다. 몸 안에 농담이 담긴 곳이 텅 비어버린 건지, 아니면 농담이 흘러나오는 관이 막혀버린 건지는 몰라도, 멈췄다. 멈춰버렸다.


딱 한 번 힐러와 둘이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도쿄 10박 11일 여행이었다. 도쿄라니, 서울을 당차게 떠나 도쿄라니. 사이가 나쁜 이복형제를 동시에 사랑하는 삼류영화 여주인공 같은 선택이었다. 홍콩과 상하이와 싱가포르도 물망에 오르기는 했었는데, 모두 가깝고 도시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여행을 싫어하는 만큼 야생 상태도 싫어했다. 샤워 시설이 잘되어 있고 오르막길 없는 평탄한 도시가 좋았다. 서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게으르고, 건강하지 않고, 자연에 감사할 줄 모르는구나!”라고 할 것 같지만 우린 당당하니까.
그때 나는 굉장히 더러운 사건으로 망나니 남자 친구와 헤어진 상태였고, 정말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제대로 된 음식을 거부하고 시리얼과 우유만 2주째 먹고 있었는데, 보다 못한 힐러가 내 코를 잡고 밥을 억지로 먹였다. 샤워를 하다가 정신을 놓아버리는 나를 다시 현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욕실 문을 쾅쾅 두드리기도 했었다. 하잘 것없는 단기 연애라고 충격이 덜한 건 아니었고, 그때 힐러가 나를 살렸다.
막 바닥을 쳤을 때, 미묘하게도 이 도시 전체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이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20대의 난 매일매일 서울에 반했었다. 늘 새롭고 경이롭고 어째선지 와락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서울을 사랑했고, 서울도 그 반의 반쯤은 날 좋아해준다고 여겼다. 여행을 가고 싶으면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까지 다녀오면 그걸로 괜찮아지는 도시였다.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 얘기를 하자 힐러가 며칠 인터넷을 뒤지더니 몇 개의 여행 코스를 제안했다. 그래서 도쿄. 나는 석사 입학 전이었고, 힐러도 행시를 막 보고 난 휴지기였다.
천수관음의 손을 세고, 공주들이 머리를 감는 그림을 실컷 보고는 약간 질려서 쇼핑과 식도락에 집중하기로 했다. 킬러가 일했던 일식집들은 대단했고, 케이크하우스들은 더 굉장했다. 한번은 아주 유명한 케이크를 먹으러 가는 길에, 마음이 급했던지 힐러가 크게 넘어지고 말았다. 시모기타자와 대로 한가운데 선 힐러의 무릎에선 피가 철철 흘렀다. 여행 와서도 뿌옇게 흠집 난 필터로 주변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던 나는 그때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아이같이 피를 흘리는 힐러의 손목을 잡고 약국에 들어섰다. 규모가 큰 약국이라 도무지 밴드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밴디지를 달라, 밴드를 달라, 피범벅인 힐러의 무릎을 가르켰으나 약사 둘은 나를 황망하게 쳐다봤다. 소독약과 연고를 내밀었으나, 그건 이미 가지고 있었다. 왜 일본어 한마디 못하고 여기까지 왔는가, 제2 외국어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 때 약사 한쪽이 정말 머리에 전구라도 들어온 표정으로 기뻐하며 외쳤다.
“아하! 반도오!”
……반도. 반도였다. 반도라니.
무릎에 밴드를 서너 개 덕지덕지 붙이고, 아직 속눈썹에 눈물이 약간 남아 있는 상태로 힐러는 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밤 무스가 올라간 케이크였다. 사진을 보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애매하다. 그 여행에서 찍은 사진은 하나같이 폼 나는 게 없다. 돈을 적게 가져간 것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견딜 수 없이 빈티가 났다.
“평생이 빈티와의 싸움이라니까. 뭘 입어도 태가 안 나요.”
아픔이 가셨는지 힐러가 웃었다.
“그러게. 엄마 비싼 가방을 들고 나와도 아무도 진짜인지 모르지.”
인터넷으로 봤을 때 아주 깔끔했던 민박은, 치안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동네의 러브 호텔 세 개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고 우리는 다다미에 대한 환상이 평생 사라질 만큼 굉장한 벌레 떼를 보았다. 불을 키면 촤라락 하고 사라지는 것이, 다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먼지 귀신이 귀여워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 훔친 담요를 겨우 깔고 자면서, 나는 난생처음 힐러에게 인정했다.
난 킬러를 원해.
바보 같은 별자리 운세를 볼 때도 걔 때문에 가슴이 내려앉아.
언젠가는 걔가 날 죽일 걸 알아.
힐러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1층의 코인 세탁기에 빨래를 찾으러 갔다. 그 엄청나게 털털거리는 탈수기와 함께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왔으리라. 그리고 단조롭게 선언했다.
“언젠가 일어날 일은 일어날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여행에서 배운 것은 확실했다. 가질 수 없는 것보다, 가질 수는 있지만 가지는 순간 파란이 초래되는 것에 대한 갈망이 더 클 수밖에 없다는 것. 반다이 프라모델을 왕창 사버릴 수 있지만 그럼 남은 나흘을 굶어야 하듯이 말이다. 서울에 돌아가도 이 갈망이 사라지지 않겠지만 가까스로 표면 아래 누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우리는 쿠션에 녹아들 것 같은 몸을 일으켜 돌아가기로 했다. 힐러가 없으니, 헤어지는 인사조차 희미해졌다. 카페에서 나서자마자 검사는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했고, 통화하면서 가볍게 손을 흔들며 가버렸다. 마법사는 연습실에 가겠다며 평소보다 더 구부정한 모습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무대에서는 활시위처럼 팽팽해지는 등이 신기할 뿐이었다.
킬러가 차로 데려다주기로 했고, 나는 안전벨트에 머리를 기댔다. 강가를 달렸다. 말이 없었다. 그때 힐러가 바닥에 흩어진 나를 주워 도쿄에 데려갔던 것처럼, 나도 녀석을 어디로든 데려갈 용의가 있었는데 말이다. 여행도 등산도 싫어하지만, 히말라야나 알프스 등정을 가자고 했더라도 따랐을 거다. 힐러가 저 강 밑에 있는 것만 아니면 다 좋다고 생각했다. 호흡이 잠깐 흐트러졌다.
그러자 킬러가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면서 내 손을 잡아주었다.
잠깐 그러고 말 줄 알았는데, 집에 갈 때까지 내내 한 손으로 운전을 했다. 그래도 위험하지 않은 건지 불안하면서도, 그 따뜻하고 건조한 손에 어딘가의 퓨즈가 녹아내렸다. 머릿속의 퓨즈가 눈물로 흘러 내렸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 킬러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두웠는데도 정확히 내 두 눈에 입을 맞췄다. 입술로 눈물방울을 가볍게 훔쳐 냈다.
“울지 말라고…….”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7.5

 

“할아버지.”
그렇게 불렀을 때 할아버지가 나를 돌아보는 표정에서, 이미 할아버지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할머니인 걸 알았어요?”
할아버지가 보고 있던 디스커버리 채널을 껐다. 생략된 게 많은 내 질문이었지만, 할아버지는 개의치 않고 잠깐 생각과 호흡을 골랐다.
“벗어날 수 없는 상대여서.”
그리고 잠깐 더 시간이 흐르고 난 후, 부연했다.
“다른 아가씨들이 없었던 건 아니었어.”
나는 할아버지의 청년 시절 사진을 몇 장 본 적 있었고, 객관적으로도 할아버지는 흑백영화에 나올 법한 미남이었다. 그레고리 펙처럼. 다른 아가씨들이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네 할머니는, 솔직히 이제사 말하지만 성격이 그렇게 편한 편은 아니었다. 어찌나 마음을 안 열던지.”
그러면서 내 쪽에 더 눈길을 강하게 던졌다. 할아버지가 시사하고 싶은 바는 잘 깨달았지만 모른 척했다.
“그런데도 벗어날 수가 없더라. 참 이상하지. 강렬하고 뜨겁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데 항복하고 말았달까. 게다가 날 두고 그렇게 일찍 죽어버리다니. 끝까지 애먹이는 여자였어.”
할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그래, 네 벗어날 수 없는 상대는 누구니? 꼴통만 아니라면 반대하지 않을 테니.”
웃으면서 넘어가려고 다시 TV를 틀기 위해 리모컨으로 손을 뻗는데, 할아버지가 먼저 날쌔게 리모컨을 치웠다. 바보 같지만 늘 할아버지가 엄마의 아버지란 사실을 깜빡 잊고는 한다. 집요한 추궁이 시작되는 오후였다.



 8

 

그리고 검사의 여자 친구가 바람이 났다. 그렇게 검사를 의심하고 옥죄더니, 결국 자기 욕망과 두려움을 검사한테 던진 것에 불과했었나보다. 인간이란 그렇게 단순한 동물이다. 우리는 모두 검사를 위로하기 위해 모였지만, 사실은 안도했다. 검사의 여자 친구를 좋아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우리 모두 늘 끔찍한 뉴스를 틀어놓고 혹시 저기 이름의 일부만 언급되는 저이가 힐러가 아닐까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끔찍한 사고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검사의 실연 같은, 다소 가벼워 보이는 사건이 우리에겐 절실하게 필요했고, 덕분에 검사는 진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한의사라니,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아!”
검사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절규했다.
“계속 자. 일어나봤자 별거 없어. 그냥 자.”
어쩐지 마음이 짠해서 검사의 머리에 손을 얹자 검사가 머리 언제 감았는지 모르겠어, 중얼거렸고 나는 얼른 손을 떼었다.
“한편으로는 알고 있었어. 아아, 망상이 현실이 되고 나니 난 바보는 아니었는데 병신이었구나.”
“걔 별로 안 예뻤어.”
마법사가 마법사 수준에서 위로를 시도했다. 하지만 검사는 몸을 뒤집어서는 그르렁거렸다. 하긴 얼굴은 그렇다 쳐도 몸매는 확실히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이렇게 오래 안 나가도 돼?”
킬러가 조심스레 물었다.
“일단은 다른 선생님들이 수업을 교환해주고 있는데…… 나 그만 두고 다시 시험 보려고. 기간제 교사가 정교사가 된다고 뭐 크게 달 라질 건 없는 인생이지만.”
검사가 여전히 팔을 눈 위에 얹은 채 대답했다. 이로써 정규직 셋, 비정규직 둘이었던 구성이 정규직 셋, 비정규직 하나, 취업 준비생 하나로 바뀌겠군. 검사한테는 그래도 다시 한 번 시도해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만년 부반장이었지만 담임은 한번 해봐야지.
“그보다는, 벌써 2주가 남았어. 걔, 잘릴지도 몰라. 신혼여행 휴가를 그대로 쓴다 해도.”
검사에게 집중하며 잊으려 해도, 역시 쉽지 않았다.
힐러는 J구청 문화체육과에 발령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쪽에서 아무리 이해해준다 해도 곧 돌아오지 않으면 일이 좋지 않게 흘러가지 싶었다. 잘리는 것까지는 아니라 해도.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거다. 우리 중에 제일 성실한 녀석이 이럴 리가 없는데. 처음 문화체육과란 낯선 부서명에 조금 겁먹는가 싶더니, 다행히 힐러가 맡은 업무는 오래된 지도와 현재 지도를 비교해가며 각종 기념비 사업 등을 허가 승인해주는 일이었다. 여기가 누구의 생가 터니, 저기가 누가 말년을 보낸 집이니 하는 일들은 힐러한테 어쩐지 꽤 어울려 보였는데 이렇게 쉽게 던져버릴 리는 없다. 공기 중에 불안의 농도가 점점 짙어져갔다.
그때 마법사가 초코 다이제 포장지를 깠다. 에이전시에서 이번 역할을 하기에 너무 마른 게 아니냐는 지적을 들었단다. 과자를 줄창 먹어댄다 해도 과연 살이 붙으려나 의심스러웠지만, 마법사는 아주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노력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그윽하게 바라보고 조심조심 삼키는데 속으로 “살쪄라, 살이 되는 거다”라고 주문을 외우는 듯했다. 우리는 잠시 불안을 잊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검사조차도 실연의 아픔을 잠깐 잊은 것 같았다. 마법사는, 우리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초코 다이제를 다 먹고 나서 가방에서 홈런 볼 한 봉지를 더 꺼냈다. 아무도 하나 달라는 얘기조차 하지 못했다.
오로지 과자가 부스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함께 애도했다. 검사의 죽어버린 관계에 대한, 뭉개진 가능성에 대한, 균일하지 않은 상처에 대한 애도였다. 괜찮아질 걸 알고 있었다.


마법사와 킬러가 돌아가고 나는 잠시 더 남았다. 지난번 일 이후로, 킬러와 함께 돌아가기가 어색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검사와는 별로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또한 어색해서, 라디오를 틀었다. 하필 나오는 노래는 셰어의 「believe」였다. 그 모든 일이 있고도 여전히 사랑을 믿니?(Do you believe in love, after all?) 셰어 할매가 물었다.
“너는 어때?”
검사가 잠깐 이게 무슨 얘긴지, 하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렇게 친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문제다. 검사는 또 사랑에 빠질 거다. 단순한 인간이니까. 어이없는 상대에게 꽉 잡혀서 금세 헤실헤실거릴 거다. 확신이 있기보다는, 애초에 그런 소프트웨어의 인간인 거다. 아무리 누군가 쓰디쓴 입술로 비관한다 해도, 검사는 그 속에서 끝내 달콤함의 편린을 찾아낼 거다. 마약을 찾는 개처럼, 늪을 스치는 금속 탐지기처럼. 존경스러운 항상성 같은 게 검사에게 늘 있었다.
“너처럼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 나도.”
위태위태한 감정들이 점점 차오르는 걸 느끼면서 검사에게 토로했다. 검사는 떡진 머리가 베개에 닿지 않게 수건을 하나 깔고 다시 누워 폐인 놀이를 했다.


그날 밤에는 번개가 쳤다. 다가오는 파국의 전조가 아닌가, 예민해질 정도로. 번개와 천둥 사이의 24킬로미터를 속으로 세면서 킬러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제나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강 너머, 우리가 서로를 동시에 생각하는 순간.
“만약 내가 혜성이라면…… 타원형의 궤도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그 애가 아무리 이상한 비유를 해도 나는 알아들을 수 있다. 그는 지금 비스듬히 치우쳐 있는 축과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거리를, 견딜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검사네 집에서 내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혜성의 소명은 결국 충돌이 아닐까 하는데.”
별들의 입장과는 반대겠지만……. 어쨌든 충돌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 궤도라면 견딜 수가 없다고, 내려서고 싶어하는 것이다. 분명 계속 돌게 하는 건 조금 가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킬러는 다행히 혜성이 아니니까 언제나 콩, 하고 혹은 더 캐쥬얼하게 챠오, 하고 궤도에서 내려설 수 있다. 확실히 그에게는 빛을 내며 달려가서 와락, 하고 우주적 사건을 만드는 쪽이 더 어울린다.
킬러는 그렇게 나를 협박했고, 그럼에도 나는 충돌을 견뎌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머릿속에 그의 작은 방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통화는 아주 짧게 끝났다.
힐러에게라면 이 모든 얘기를 다 할 수 있을 텐데. 아무리 떨어져 있었어도 USB선 하나로 뾱, 하고 다시 연결되는 그런 심플함과 다정함으로 금세 동기화. 우리 이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슬롯이 있지 않은가 엉뚱한 생각을 하며 뒤척였다. 우리는, 이라는 주어를 이렇게 항상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힐러가 어디에 있든 이 마음은 어떻게든 돌고 돌아 이 박동 그대로 닿을 거라고.



 8.5

 

검사가 실연 때문에 자살 따위는 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돌아가며 가끔 그와 저녁을 보냈다. 앓아누운 척 우리의 보살핌을 꽤 즐기고 있는 검사였다.
레토르트 컵 수프 봉지를 뜯으며,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더 이상 칼립소 같은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 누군가의 페넬로페가 되고 싶어. 다음번에는. 내가 망설이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아니, 대체 어디가 ‘그러니까’야. 불쑥 그런 식으로 말 꺼내면서 뻔뻔스럽게 ‘그러니까’라니.”
검사의 지적은 합당해 보였다. 킬러한테는 이렇게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데, 이 갑갑한 사회 선생한테 그런 걸 기대하기는 무리지.
“음, 더 이상 누군가의 겪고 지나가는 과정, 정체, 장애물, 재난 따위가 되고 싶지 않다는 거야. 그 대신 어떤 한 사람의 최종 목적지나 절대적 대상, 그런 게 되고 싶다는 거지.”
“그 사람이 오디세우스라는 전제 하에 말이지?”
“응. 그 사람은 나의 오디세우스여야만 하지.”
검사가 머그를 받아들었다. 입술로 가만히 온도를 재어보더니 안심했다는 듯 마시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인간. 수프를 반쯤 마셨을 때 검사가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페넬로페, 과연 행복했을까?”
“무슨 뜻이야?”
“생각해 봐, 오디세우스가 돌아온 건 꼭 페넬로페 때문은 아니었어. 페넬로페뿐 아니라 온 가족과, 무엇보다 자기 땅과 전 재산이 거기 있었으니까 온 거 아냐. 하지만 페넬로페는 10년을 꼬박 기다렸지. 그 중 7년은 오디세우스와 칼립소가 함께 뒹굴고 있었고. 칼립소뿐이 아니지. 이 여자 저 여자랑 붙어먹고 돌아와서는, 이제 좀 잘살아보려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대량 학살했잖아?”
“아아. 좀 짜증났을 수도.”
“그러니까 칼립소도, 페넬로페도 관두고 아리아드네는 어때?”
“아리아드네?”
문득 이 이상한 대화가 영문학 전공생과 역사 전공생이라 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중이었다.
“찌질한 테세우스한테 버림받았지만, 칼립소처럼 섬에 혼자 있다가 디오니소스를 만났지. 완전 업그레이드잖아.”
“그럴듯한데? 괜히 선생님은 아니다, 야.”
“가르치는 교과목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그보다는 너 어쩌다가 신화적 원형까지 생각이 거슬러 올라간 거야?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이것저것 생각이 좀 많아서.”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았다. 더 이어갔다가는 빅뱅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 같았기 때문에, 수프를 마시는 데 집중했다. 역시 그런 걸로 배가 찰 리 없었다.
“야, 너 힘든 척 그만하고, 우리 순대나 좀 사다 먹지 않을래?”
검사는 사레들린 것 같았지만, 순순히 따랐다. 어쩐지 검사와도 이제는 꽤 친해진 것 같다.



 9

 

“왜 하필 궁수야?”
그렇게 물은 것은 확실히 킬러였다.
“너랑 법사가 시작한 게임이었잖아. 아무 직업이나 골라도 되었을 텐데, 왜 하필 궁수였어?”
그런 걸 물을 때도 킬러는 아주 진지했다. 내가 고른 게임 캐릭터가 뭐라도 의미하는 것처럼.
“나 성격이 직선적이잖아. 전혀 여성스럽지도 않고.”
“그래서?”
“뭐 하나라도 포물선을 그리는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화살은 그렇잖아. 직선으로 날지 않고.”
그때 킬러는 아주 기분 좋게 웃었다. 킬러는 잘 웃지 않는데, 그래서 킬러가 웃을 때면 나머지 넷 다 숨을 죽이곤 했다. 킬러가 그걸 알아차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힐러가 없어서, 완충 장치가 다 사라져서, 상처가 전부 공기 중에 드러나고 감염되기 시작해서, 봄의 신부가 실종되고 여름이 되어서, 모든 것이 무섭게 산화하기 시작하는 초여름이라서, 슬픔이 버섯처럼 자라 포자를 퍼뜨려서.
그 모든 것이 이유여서. 혹은 그 무엇과도 상관없이.
인정한다. 킬러는, 태어난 순간부터 내가 잃어버리고 또 그리워했던 모든 것들을 조금씩 닮았다. 엄청나게 좋아했던 아기 이불, 이사 올 때 사라진 토끼 인형, 아빠가 만들어줬지만 그날 바로 나뭇가지에 걸린 연, 방학의 마지막 날, 실수로 카메라를 여는 바람에 망친 수학여행 사진, 늘어진 90년대 가요 테이프들, 작아져서 입을 수 없는 체크 원피스, 한 짝만 남은 귀걸이, 유방암으로 돌아가신 고모 할머니가 선물했던 진주 목걸이, 더 이상 연주할 수 없는 악기, 글자가 희미해진 콘서트 티켓, 제목을 잊어버린 책, 첫눈 오는 날 먹었던 붕어빵 꼬리, 바나나 쉐이크를 먹고 싶으면 바나나와 우유를 먹고 신나게 춤을 추던 저녁, 첫사랑의 삐삐 번호, 세기말 십대의 반항심, 그 모든, 다른 차원으로 가는 입구.
킬러는 마치 그 조각들로 이뤄진 것처럼, 원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마치 나의 해탈을 방해하려는 카르마의 마지막 작품처럼, 보리수 아래에 서 있다. 가져도, 가지지 않아도 다시 윤회의 틀에 갇힐 게 분명하다. 아, 처음 그 등에, 운동장에 만든 이글루 안에서 너구리 털이 달린 모자에 얼굴을 묻었을 때, 아직 불지 않은 바람 냄새가 났었다. 아주 다른 냄새. 경계선에 서 있을 때 부는 전환기의 바람이다. 그때도 알고 있었다. 분명하게는 아니었지만.
그 선을 오래 걸었다. 가장자리를 걸었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이제는 두렵지 않다. 잘라도 다시 꼬리가 돋는 도마뱀처럼 용감해진다. 힐러가 없으니 시간이 더 많이 걸리겠지만 결국 반짝반짝하고 촉촉한 새 비늘이 돋아날 거야. 충돌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벗어버린 허물은 압정으로 스크랩할까.
킬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다리를 가장 예쁘게 보이게 하는, 6센티 힐의 샌들이었는데 약속 장소를 코앞에 두고 끊어져버렸다. 나는 무심결에 한 발로 벌써부터 뜨거워진 아스팔트를 딛고 있었다. 좋아하는 샌들이 끊어지면, 나쁜 신호로 생각될 법도 한데 머릿속은 초여름의 이상스러운 열기로 하얗게 지워져서 절룩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아스팔트 위에 내 발자국은 한쪽만 형광 오렌지로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한 손에 신발을 들고 한 발은 맨발로 선 나를, 머리를 막 감고 나온 듯한 킬러가 놀라 바라보았다. 그때, 제대로 된 말을 했어야 했는데, 막상 나온 말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대체 그 닭띠 년은 누구야?”
불행할 정도로 직선적인 성격이니까, 휴. 어쨌든 킬러는 더 놀라고 말았다. 킬러가 저렇게까지 놀란 적이 있던가 하는 사실에 나 역시 놀라고 말았고, 킬러의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눈에 비친 나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영원한 루프에 갇히기 전에 킬러가 고개를 흔들었다.
“닭이 어쨌다고?”
“아냐, 신경 쓰지 마. 헛소리였어.”
“신발은 대체…….”
나를 협박하고 며칠간 힘들었는지, 킬러의 얼굴은 약간 수척해 보였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젖은 머리에 급하게 바른 왁스인지, 머리가 평소처럼 세워지지 않았다. 왁스로도 세울 수 없는 그의 스피릿을, 내 키스로 세울 수 있을까 잠깐 망상에 빠졌다.
망상에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먼저 실천하고 있었다. 회복되지 못한 모든 병든 세포가 여름이란 미친 계절에 녹아내리는 바람에. 한쪽 발을 타고 열기가 올라왔다. 내 손가락들은 킬러의 젖은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 녀석, 나 오기 전에 카푸치노를 사먹었구나. 멋진 맛이네. 킬러가 서 있던 편의점 입구에서 나오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우리를 바라보았고, 등 뒤에도 눈이 달렸는지 머뭇거리던 킬러의 입술이 이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 멋진 키스였다.
손에 들고 있던 끊어진 샌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우정, 혹은 그 이상의 감정이라도 결국 호기심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한다. 궁금하다는 거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갈지, 반짝반짝하는 마모면들이 자꾸 눈에 들어오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지 않고서는 간질간질해서 참을 수가 없어진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만큼, 나를 그렇게 봐주길 원해서, 나 역시 흥미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서 경계선 바깥으로 자꾸 깨고 나갈 수 있게 되는 거고, 우리는 점점 그렇게 어떤 근사치를 향해 다가간다.
태어난 이유. 예정되어 있지만 이룰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약속을 향해서.
호기심은 생각보다 아픈 마음이고, 가볍지 않은 결심을 요구한다. 어쨌든 영원히 궁금했으면 좋겠다. 놓을 수 없는 나의 사람들.
킬러와 키스한 주말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마법사와 검사를 불러 우리가 함께하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마법사는 정말 쇼크를 받았고, 검사는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속으로는 지난 대화를 되짚어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어도, 그건 그들 사정이다. 완벽하지 않은 우리지만, 엎어치고 메치고 뒤집어봐도 서로가 있어 언제나 플러스였다.
문득 머릿속에서 다시 십수 년이 지난 후를 그려보았다.
내 아이들과 노는 네 아이들. 다시 그 아이들이 친구가 되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도. 친구인지 형제인지 헷갈리는 그 혼란마저 행복한 상태를 말이다.
하지만 힐러의 아이들을 그릴 수 없었다. 힐러의 아이들만 얼굴이 비어 있었다.


“게임이 끝난대.”
마법사가 침울하게 소식을 전했다. 그건 사실 몇 년 전부터 예상되었던 일이긴 했다. 서버 단일화가 있었고, 그건 게임이 아주 인기가 없어졌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중지될 거라고는 또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하나의 세계가 닫힌다. 우리가 아직 거기 있는데 닫혀버린다. 그렇게 닫힌 세계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금요일에 마지막으로 마왕을 잡자.”
검사가 제안했다. 그것은 담담한 제안이었지만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나는 금요일이 되기 전에 레벨을 하나라도 더 올려놓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하나 올리는 게 일이라서, 관둔 지 오래였다. 다른 연인들이라면 사귀는 첫 주에, 크림빵과 이온음료를 들고 사진 찍으러 공원에라도 가겠지만 나와 킬러는 미친 듯이 사냥을 했다. 노회한 마왕에게 그 정도 경의는 표해야 할 것 같았다. 좀 이상한 얘기지만, 마왕은 우리를 위해 항상 거기 있어준 말 잘 통하는 막내 삼촌 같은 존재였다. 고비마다, 모퉁이마다, 스스로를 희생해 따끔한 충고를 남겼고 돌아보면 다시 부활해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켜줬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세상이 픽셀로 보이기 시작할 정도였다.


마지막 마왕 사냥은 정말 쉽지 않았다. 물약을 저장해둔 F1 키를 미친 듯이 누르느라 왼손 약지에 무리가 올 정도였다. 우리가 마왕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한 것처럼, 마왕도 우리에게 마지막 지옥을 제대로 보여주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진지했다. 심지어 마법사조차도 메테오라이트를 한두 번밖에 쓰지 않고 빙계 타격 마법에 집중했다. 체력이 제일 좋은 검사가 선두에서 무식한 칼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봐야 마왕의 허리까지밖에 가지 않아서 다리를 콕콕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킬러는 기동력이 좋은 편이라서 마왕의 공격을 피해 전진 후진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왕의 체력은 5분의 1정도 닳았는데, 우리는 벌써 여러 번 고비를 넘겼고 물약도 반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 마왕이 입을 열어 불덩이를 연사했는데, 그게 하필 체력이 제일 약한 마법사를 정통으로 가격하고 말았다.


닥쳐아처> 야, 얼마나 재수가 없으면 맵에 랜덤으로 떨어지는 것까지 혼자 다 쳐맞고 그러냐?
메테오라이트> 이제 나 물약 얼마 안 남았어, 정 안 되면 나 잠깐 마을 가서 사와야 될 거 같애.
청홍검> 지금 나가면 우리 다 죽어. 내 거 좀 줄게, 먹어.


킬러가 가장 파괴력이 높은 폭탄을 마왕을 향해 던졌고, 그러자 마치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마왕이 용암 공격을 했다.


오징어초밥> 힘들겠는데.


웬만해서는 코멘트를 하지 않는 킬러가 말했을 때, 나머지는 모두 오늘 사냥이 실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과연 내일, 혹은 게임이 완전히 끝나는 그날까지 계속 시도한다고 해도 성공할 수 있을까? 마왕은 우리의 회의감을 비웃으며 용암을 끓어오르게 했고, 난 내 캐릭터의 헐벗은 샌들을 보며 어째선지 실제 발바닥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만두자 하려던 참이었다. 유월에는 원래 모든 것이 흐르는 게 아닐까, 다 가버리게 두자, 그런 말을 하려 했다.


>슈가슈가(힐러, Lv 86)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그 순간, 나는 조악한 그래픽에 표정도 몇 개 없는 우리의 캐릭터들이 모두 쇼크에 빠지는 것을 목격했다. 심지어 마왕의 표정마저 조금 움찔했다고 증언할 수 있다. 용암 속에서, 기적처럼 갑자기 등장한 힐러를 보고 어쩌면 유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예 희망을 버렸던 건 아니다. 심지어 이 마지막 마왕 사냥에 오라고 메일을 보내기도 했으니까. 다들 문자며, 쪽지며, 음성 메시지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힐러에게 닿으려고 하는 노력들이 일종의 제의(祭儀)가 아닐까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오징어초밥> 대체 어디야?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킬러가 물었다.


슈가슈가> Na hangul an bo im.
닥쳐아처> Where the hell are you?
슈가슈가> Vegas, baby!


그러나 이후에 쏟아진 우리의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슈가슈가> Najung e yakihae~ got doragake!


정말 힐러인 게 분명했다. 우리 다섯 명 중에 가장 심한 영어 울렁증을 가지고 있는 건 힐러였고, 불행히 컴퓨터 실력도 그다지 좋지 않아서 한글 인코딩도 못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라스 베가스. 엄청나게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지명이었다. 대체 힐러는 왜 그런 엉뚱한 도시에 있는가. 용암 속에서 우리는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제일 먼저 목적을 상기한 검사가 다시 마왕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힐러가 마왕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서서, 우리 모두에게 회복과 보호 마법을 끊임없이 걸어주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번잡스러운 F1 키에서 떨어졌고, 자유롭게 활시위를 당겼다. 시위가 떨릴 때 붕,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마왕은 장렬하게 죽었다.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기에 마음껏 죽일 수 있었던 정든 마왕은 이제 정말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마왕의 동굴 밖, 설원에서 한동안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여전히 한글 자판을 칠 수 없었던 힐러는 불안해하는 우리를 두고 로그아웃했다.
대체 어째서 라스 베가스?



 9.5

 

“인생이 바닥을 치면, 어째선지 가야 할 것 같지 않아? 라스 베가스?”
힐러가 천연덕스럽게 말했을 때, 내 마음속은 이랬다.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나쁜년…….’
“그렇게까지 걱정할 줄 몰랐어. 편지도 써뒀고.”
‘쳐 죽일 년, 쳐 죽일 년, 쳐 죽일 년, 쳐 죽일 년, 쳐 죽일 년, 쳐 죽일 년, 쳐 죽일 년, 쳐 죽일 년, 쳐 죽일 년, 쳐 죽일 년……’
“역시 그 교통사고, 때문이었던 거야?”
검사가 고개를 절레절레하면서도, 모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힐러는 잠깐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초밥을 하나 집어 먹었다. 킬러가 식탁에 통째로 랩을 깔고, 새벽시장에서 사온 생선으로 한가득 초밥을 만들고 있었다. 밥알을 가득 물고 오물거리는 힐러를 보니 더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아, 그것도 신호 중의 하나긴 했지.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아니었어.”
“그럼 뭐였는데? 결정적인 순간은?”
마법사는 살 찌우기를 포기한 후로, 다시 식욕을 잃었고 초밥보다 힐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결혼식 일주일 전에 알았어. 무슈가 우리 엄마 아빠한테 상가를 요구했더라고. 우리 집 상가를 자기 명의로 바꿔달라고. 엄마 아빠는 장사 접은 지도 오래고 월세 수입 얼마 안 되니까 바꿔주겠다는 거야. 근데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너무 속이 상해서…….”
“속이 상하지.”
검사가 추임새를 넣었다.
“마치 그건, 무슈와 내 사이가 기운다는 뜻 같잖아? 기울어서, 내 머리 위에 조그만 상가를 하나 얹어야 저울이 잡힌다는 그런 뜻 말야. 왜? 나도 귀한 딸인데. 멋진 여잔데. 게다가 나한테는 얘기 안 하고 우리 엄마 아빠한테 먼저 요구한 건 뭐야? 그러고 나니 이상하게 짐을 쌀 수가 없는 거야.”
나올 줄 알았다. 유목민 키트 이야기.
“무슈가 아무리 재촉을 해도, 결혼식 후엔 바쁘니까 미리 짐을 옮겨둬야 한다는 말이 맞는 걸 알면서도. 전혀 쌀 수 없었어.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 만에 다 쌀 수 있는 짐이었는데도. 그래서 참다못한 무슈가 왔지.”
힐러가 다시 초밥을 향해 젓가락을 뻗었지만, 내가 그 손을 찰싹 쳤다. 그만 먹고 이야기나 제대로 하라는 경고였다. 칫, 하고 힐러가 젓가락을 물렸다.
“그래서 무슈가 왔는데, 내 유목민 키트는 물론 가구들 전부를 버리려고 하는데 도저히 버릴 수가 없더라고. 원룸용, 독신자용, 이동용 가구인 거 나도 알고 솔직히 좀 진저리가 나기도 한 상태였지만 하나도 버릴 수가 없었어. 싸구려 바퀴 달린 플라스틱 가구들인데도.”
사지 제대로 달려서 돌아온 건 감사한 일이었지만, 너무 멀쩡해 보이니까 빈정이 상하고 말았다. 그래서, 하고 띠껍게 쳐다봐줬다.
“뭐랄까, 핸들을 자기 쪽으로 꺾는데다 사기꾼 같은 커프스링크를 하는 남자랑은 불가능했어.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힐러의 옆모습에서 어떤 그림자를 짚어냈기 때문에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다들 조용히 초밥을 먹었다. 테이블에 빈곳이 생기면 킬러의 빠른 손이 나타나 얼른 채워넣었다.
“하지만, 어디든 갈 거였으면 나랑 같이 갔어도 되었잖아. 내내는 아니라도, 모아둔 휴가 일수 내에서는 같이 갈 수 있었는데. 영어도 좀 대신해주고 말야. 적어도 나한테는 얘기해주면 좋았잖아.”
“말하려고 시도 안 한 건 아니었어.”
말을 꺼낸 나뿐만 아니라 나머지 셋도 다 같이 뜨끔해했다.
“역시, 혼자 해야 하는 사냥도 있더라.”
그래서 힐러는 혼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칵테일을 먹어 보고, 해약한 주택청약부금으로 온갖 종류의 도박을 시도해보고, 아주 시시한 마술 쇼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예술 서커스까지 매일 비현실적인 저녁을 보내면서, 말이 거의 통하지 않는 도시를 누볐다고 했다. 몇 번이나 헌팅을 당했지만 힐러가 영어를 못하자 금세 나가떨어졌다며 아쉬워했다. 정말 위험하지 않았던 걸까, 우리로서는 철렁철렁한 얘기도 몇 개나 있었다. 그게 힐러가 마왕과 싸우는 방식이었다. 어이없으면서도 힐러다웠다.
킬러가 바쁜 손길을 거두고 식사에 합류했다. 내 옆의 의자를 소리 없이 빼서 앉으면서, 동시에 부드러운 동작으로 내 입가에 묻은 뭔가를 살짝 훔쳐냈다.
“악, 너희 설마, 나 없던 사이에?”
이번에는 힐러가 당황할 차례였다. 나는 여전히 삐뚤어져 있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몇 년이나 기회가 있었으면서 어쩜 그럴 수 있느냐며, 하필 자기가 없을 때 저질렀냐며 힐러가 성토를 시작했다. 자기 입장에서 나를 성토하다니 저것이 개념을 베가스에 두고 왔나.
“그냥 같은 반일 뿐이었는데 말이지.”
“같은 게임을 했을 뿐이었고.”
우리 둘이 씩씩거리든 말든 검사와 마법사가 속편한 소리를 했다. 킬러는 빙글빙글 웃으며 매운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아마 우리는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것 같다. 마왕이 있는 게임이면 좋겠다.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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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 관리자
  • 2022-10-01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 관리자
  • 2022-10-01
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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