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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단편소설] 엉클 마왕_(上)

  • 작성일 2013-06-17
  • 조회수 349



엉클 마왕 (上)


정세랑



여러모로 웬디는 정체가 싫었던 걸 거야.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관계를 견딜 수가 없었겠지. 어릴 때, 네버랜드를 떠난 웬디가 모험을 포기하고 현실로 복귀했다고 미워했었어. 정말로, 많이 미워했었어. 어린애들은 그러잖아? 동화의 결말을 못 받아들이고 말야. 근데 생각해보면


1306_엉클마왕-삽화




1


▶ 닥쳐아처(궁수 Lv.78)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마치 걷는 행위가 이 세계에서도 정말 의미가 있는 것처럼 걷는다. 걷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길에 흔들리는 풀들은 한 치도 자라지 않았다. 저 길에는 항상 눈이 내리고 있지만 한 번도 쌓인 적이 없다. 맨 다리에 샌들을 신은 내 발도 전혀 시리지 않다. 곧 타일들이 듬성듬성 나타날 것이고, 풍화되지 않는 돌들이 광장을 가리킬 것이다. 그곳에는 내 오랜 친구들이 우리의 의식을 치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마왕 사냥을 한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을 되짚는다. 아, 킬러가 직장을 옮길 때였던가. 검사가 사립학교 면접을 볼 때였을지도. 아니면 마법사가 처음 메이저 뮤지컬에 캐스팅되었던 그날이었는지도 모른다. 작년에는 마왕의 동굴에 간 일이 거의 없었다. 더 이상 새로운 퀘스트가 추가되지 않는 이 인기 없는 게임에, 마왕은 줄곧 최고 몬스터였다. 고2 때 같은 반이었던 우리는 이 게임을 시작한 이래 인생의 중요한 관문을 맞이할 때마다, 모두 함께 모여 마왕을 죽였다. 그때도 힘들었고 지금처럼 레벨이 높아졌어도 꽤 힘든 일이다. 우리는 수능 백 일 전에도 함께 마왕을 사냥했다. 다섯 중 둘이 재수를 한 게 이상하지 않다. 어쨌든 전사자를 되살려가며 그날마다 사냥이 쉬웠는지 어려웠는지를 통해 앞날을 가늠하곤 했다. 일종의 점복일까. 새삼 생각하면 우습지만, 꽤 중요한 의식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이번 주 토요일, 힐러가 결혼을 한다.
우리는 다섯 중에 처음으로 결혼을 하는 힐러를 축하하기 위해, 마왕을 사냥하기로 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이제 정말 어른이 되는 거니까. 우리는 힐러의 남자친구를 이미 여러 번 만났고 그때마다 긴장했다. 그 사람은 우리보다 여섯 살이 많아 정말 어른처럼 보였고, 그래서 약간의 열등감과 함께 그를 ‘무슈’라고 불렀다. 무슈는 양복이 어울렸고 가르마가 깔끔했고 향수 냄새가 났다.
힐러와 나는 둘만 여자였고, 힐러의 결혼 소식은 예상보다 더 많이 착잡했다. 어쩐지 나의 걸음걸이가 더 불안정하게 보이고, 등 뒤에 매달린 화살통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심하게 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 게임은 옛날 게임이라 사운드가 그렇게 세세하게 지원되지 않는다. 그래픽 수준도 그다지 좋지 않다. 나는 조악한 픽셀에서 너무 많은 것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심해.
멀리 친구들이 보인다. 내가 화면 끝에 나타나자마자 한마디씩 던진다.


메테오라이트> 아, 멀쩡한 포탈 놔두고 왜 걸어오고 지랄이야?
닥쳐아처> 닥쳐.
오징어초밥> 오랜만.
닥쳐아처> 오늘 주인공은 왜 없어?
청홍검> 안 오네. 전화도 안 받아.
메테오라이트> 힐러 없이 어떻게 마왕을 깨? 물약 사다가 미친 듯이 마실 수도 없고?
청홍검> 너한테는 연락 없었어?
닥쳐아처> 엊그제 잠깐 통화한 게 다야. 단체 문자 돌릴 때는 뭐랬어?
오징어초밥> 그때만 해도 꼭 온다 했어. 다들 바쁜데 고맙다고 했는데 이상하네.


우리는 모두 기분이 조금 상했고,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물론 없는 돈 모아 산 광파 오븐으로 축하의 마음을 이미 잘 전달한 것 같긴 했지만, 힐러의 불참은 솔직히 속상했다. 대학 다닐 때는 남자애들이 군대 휴가까지 맞춰가며 지켜온 전통이었다. 나쁜 기집애, 무슈랑 깨가 쏟아져서 까먹었나보다, 욕을 하면서 우리끼리 사냥을 하기로 했다.
각자 물약을 3백 개 넘게 사서는 결전에 임하였지만, 흑염소 머리를 한 다소 고전적인 외모의 마왕은 저주를 퍼부으며 노익장의 근성을 과시했다. 결국 전사자를 부활시킬 수 없었던 우리는 기진맥진한 채 다시 북쪽 도시의 광장으로 기어나왔다. 함께 피시방이었으면 맥주라도 한잔하러 갈 분위기였으나 모두 각자의 집이었다.


닥쳐아처> 할머니 제사 올 거냐?
메테오라이트> 가야지. 당연 제일 예쁜 손자가 가야지.


마왕 하나 잡으면 되는 것을 온 맵에 운석 덩어리를 던져놓고 “화려하지 않으면 내가 아냐” 따위의 발언을 일삼는 정신 나간 마법사는 불행히도 내 사촌이다. 동갑인 녀석은 언제나 좀 곤란했다. 녀석과 얘기하면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서서 편두통이 왔다. 이도저도 아닌 저녁 인사를 남기고 로그아웃햇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결혼식이 취소되었다고 힐러의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힐러가 사라졌다고 했다. 이틀 전인 목요일이었다.


“편지를 두고 갔대.”
검사가 전화를 해서 차분하게 말했다. 조자룡의 청홍검을 아이디로 삼은 녀석은 우리가 모두 한 반이었던 고2 때 부반장이었고, 현재는 모 사립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하고 있다. 반듯하고 단순한 성격이라 어쩔 수 없이 검사다. 아마 언니한테 돌파를 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얻어낸 것이리라.
“……혹시 너한테 그전에 무슨 말 안 했어?”
검사의 무심함에 살짝 짜증이 났다. 최근 힐러와 나 사이에는 묘한 거리감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 말 있었으면 너희한테도 했겠지. 가족들한테 남긴 편지에는 뭐라 그랬대?”
“그냥 걱정하지 말라고만 적혀 있었대.”
검사는 잠시 더 쭈뼛쭈뼛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언제나 검사가 날 조금 어려워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섯 명 중에 서로 가장 안 친한 둘을 꼽는다면 우리일 거다.
핸드폰을 침대 아래로 던지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안 그래도 없는 코가 더 눌릴 때까지. 그때, 힐러가 뭐라 했더라? 일이 바빴었다. 번역회사에서 일한다는 건 꽤 번잡스러운 일이다. 회사가 작다보니 교수들은 진지하게 쳐주지 않았고, 가끔 대학원생이나 심지어 학부생이 대신 해와서 오역이 난무하기도 했다. 그때도 새로운 OLED 공정에 대한 논문을 집까지 들고 와서 씨름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언어 실력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난 왜 영문학과 독문학을 전공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자주 회의적이 되었다. 하필 그런 타이밍에 힐러에게 전화가 왔었고, 원래 힐러의 전화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어렸을 때 이어폰을 너무 많이 껴서 난청이었다. 좀 더 크게 말해봐, 다시 말해봐, 일일이 말하기 귀찮았다. 그냥 대충 분위기에 따라 추임새를 넣으며 눈으로는 일감을 훑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너랑 살고 싶어.”
그래, 힐러가 그 말을 했을 때는 잠시 제대로 들었다.
“가까이 있으면 좋겠어, 예전처럼. 나 못 마시는 술을 같이 마셔주고, 힘든 날에는 서로 등을 쓸어주고, 그래도 못 버틸 때는 자기 전에 커다란 인형을 빌려주고, 중요한 날에는 같이 옷을 골라주고, 가위바위보해서 야식을 사오고, 세탁기와 음악을 동시에 틀어놓고 춤을 추고, 아무 날도 아니지만 노래방에 가고, 리얼리티 쇼를 욕하면서도 같이 보고, 닌텐독스를 함께 키우다가 아예 까먹어버리고, 에어컨이 없이도 버틸 만했던 예전처럼.”
“어유, 거의 그냥 랩을 하네. 다 무슈랑 하면 되잖아? 나 두고 먼저 가려니 괜히 미안해서 이러는 거지?”
전화기 너머로 힐러가 웃었던가 웃지 않았던가 웃는 흉내를 냈던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대로 듣지 않았다. 힐러처럼 퍼프소매 블라우스랑 플리츠 스커트가 어울리는, 그런 딸기초콜릿 맛이 나는 여자는 당연 행복하게 결혼할 줄 알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도주라니, 나는 몰라도 힐러가 이럴 줄은 말이다. 사실 힐러는 우리 중 유일하게 순탄하다 싶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학교도 제때 졸업했고, 행시에도 붙었고, 무슈도 꽤 좋은 집안 아들이라 했다. 그냥 그대로 쭉 진행해서 적절한 시기에 다양한 과일 초콜릿 맛이 나는 예쁜 아이들을 낳을 줄 알았다. 그쯤 되면 그만 심통 부리고 좋은 이모가 되어줘야지 했었다. 솔직히 난 태생부터 글렀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는 삶이었다. 나는 기껏해야 시나몬 맛이 나는 여자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내 맘대로 살면서 힐러를 부러워하려 했었다. 그래서 더 난청이었나보다.
힐러는 지원군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듣지 않았다.
이제 친구들이, 세상이, 그리고 어째선지 마왕이 내가 힐러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환청을 듣는다.



1.5


열여덟 살의 우리는 같이 게임을 하지 않을 때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다. 교정 한구석 마른 잔디 위에 누워 머리 위로 흐드러지게 핀 자목련을 올려다보며 오후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유행성출혈열이 두렵지 않았던 나이였고, 교복은 늘 얼룩져 있었다.
“예쁘긴 한데…… 지금 9월 아니냐?”
나는 햇살 때문인지 맛이 간 목련 때문인지 인상을 썼다. 마법사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미친 련(蓮)이라 그러지. 개교 이래 매년 제멋대로 피었다더라.”
“하긴 우리 선배들 때는 1월에도 피었대.”
힐러는 9월처럼 기분 좋게 웃었다.
“나름 교목인데 왜 저 모양이야. 그보다는 저딴 걸 누가 교목으로 정한 거지?”
“뭐 어때. 지가 꼴릴 때 피는 거지.”
검사가 기지개를 폈고, 마법사가 휘파람을 불었고, 킬러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어떤 나이는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 같다.



2


식충 식물처럼 느껴지는 아침이다. 입을 살짝 벌리고 공격적이지 않은 척한다. 조카 손녀가 보고 싶다는 둥 친척들의 이런저런 압박을 슬그머니 넘기기 위해 숨도 조용히 쉬며 존재감을 죽인다. 한때 모던 보이였던 외할아버지의 심플한 성향 때문에 제사는 너무 일찍 끝나버렸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마법사가 좌중을 휘어잡고 있다.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한 번 만난 적 없는 할머니도 자기를 가장 사랑했을 거라 당당히 말하는 아주 이상한 종자. 우리의 유전자가 4분의 1 정도는 겹칠 거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요즘 딱 보기 좋구나.”
작은 할머니가 말했고,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나이대 어른들이 보기 좋다고 말하면 다이어트가 필요한 시점인 거다. 사촌들도 엄마의 형제들도 모두 할아버지를 닮아, 마르고 아담하고 어깨가 조금 구부정하고 손가락이 키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길었다. 갓난아이조차도 손가락이 기름해서 뭔가 전혀 다른 종처럼 보이는 게 외가 식구들의 특징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아빠를 닮았다. 키가 크고, 마르기는커녕 제대로 근육질이었다. 조금만 쪄도 덩치가 산만 해 보였다.
똑같이 마르고 구부정하고 손가락이 길지만 무리 중에 두드러지는 마법사는, 할아버지의 비호 아래 언제나 제멋대로 살아왔다. 좌파 교육인이었던 할아버지는 40년대를 풍미했던 미남으로 정치적 성향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보다 식물을 더 좋아하는 성품 때문인지 교장이 되지 못하고 교감으로 퇴임했다. 막상 본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셨던 것 같고 집안 식구들이 좀 수군거렸다. 어쨌든 할아버지가 이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법사의 진로를 전폭 지원해주는 바람에 마법사는 뮤지컬 배우가 될 수 있었다.
“잘돼서 망정이지, 안 되었으면 그게 뭐야? 그냥 양아치지.”
엄마는 늘 아버지도 참, 하고 신물을 냈지만 나 역시 할아버지를 마법사만큼이나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마법사를 감정해냈듯이, 내 안에서도 뭔가를 자꾸 찾아내려 지그시 들여다보시지만 나는 그럴 때면 눈에 불투명한 막을 씌워 그 스캔을 막는다. 전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미안, 할아버지. 하지만 고마워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할아버지는 내가 어린 시절 집에서 쫓겨났을 때 거두어준 적도 있다. 고등학교 때 마법사랑 둘이 몰래 오토바이를 샀다가 들켜서 아빠한테 죽기 전까지 맞고 내쫓겼던 것이다. 가장 싼 중고 브이에프였고, 낯선 남자애 등에 매달린 게 아니라 사촌이었고, 한적한 길을 골라 그렇게 위험하게 운전하지도 않았지만 들킨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무조건 마법사가 그러자고 그랬다고 손가락질을 돌렸다. 다들 쉽게, 마법사가 문제지 나는 문제가 아니라고 수긍했다. 늘 운 좋게 피했었는데 고등학교를 하필 동갑인 녀석과 같은 곳에 배정받는 바람에 잠깐 이상해진 거라고 입을 모았다. 할아버지만 빙긋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 모든 걸 알고 있는 미소에 난 좀 움찔했었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릎 안쪽에 배기통에 덴 상처가 경미하게 남았지만 펜슬 스커트를 입고 정규직으로 살고 있는 나는 결론적으로 꽤 무사히 큰 게 아니냐는 말이다. 준수한 손녀 코스프레를 하며 슬그머니 마법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다른 사람이 듣는지 살피고 물었다.
“너 정말 걔한테 미리 연락받은 거 없어?”
마법사가 간만에 차려 입은 수트에—그나마도 무대의상처럼 보이는 광택 있는 것이었지만 그럭저럭 차분한 색깔이어서 다행이었는데—어울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걔가 무슈랑 무슨 문제가 있었더라도, 그걸 상의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사람이 나지, 아마?”


마법사와 힐러가 나란히 앉아 있던 어느 오후를 기억한다. 두꺼운 크림색 커튼이 무용하게, 남향의 교실은 햇빛으로 찬란했다. 둘은 그 빛을 등지고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있었다. 나는 그 둘 사이의 공기를 일찍 감지했다.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 주변은 공기의 밀도가 달랐다.
“이상했어. 이어폰을 한쪽만 끼면 음악이 잘 안 들려야 했는데 그 순간 가장 풍부하게 들렸다니까.”
훗날 마법사가 회고했다.
대학 입학 후 둘이 사귀게 되었을 때 가장 놀라지 않은 사람이 나였다. 놀라지는 않았지만 좀 미묘하긴 했다. 힐러는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지만 룸메이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와 힐러는 다른 대학을 갔지만 두 학교의 중간쯤 되는 곳에서 함께 살았다. 여섯 정거장, 내가 더 가까웠다. 힐러는 그렇게 언제나 여섯 정거장 정도 더 다가와줬던 것 같다. 그걸 알고 있어서 나는 힐러와 마법사가 사귀는 게 우리 모두에게, 특히 나에게 영향을 많이 줄 것을 알았지만 대범한 척했다.
“그래서, 언제 반한 거야?”
“아아, 이건 좀 웃긴데. 봉지 설탕 있잖아. 독서실 옥상에서였나, 자판기 커피 안 그래도 단데 거기다가 그걸 넣는 거야. 근데 가운데를 뚝 부러뜨려서 넣더라고.”
“그게 뭐?”
“바보 같지만 난 늘 끄트머리를 조심조심 뜯어서 설탕이 다른 데 안 흐르게 하거든. 근데 그걸 그렇게 무심하고 과감하게 부러뜨리는데 뭔가 아주 달라 보였어.”
“정말 바보 같은데? 그렇게 하는 사람 많구만, 왜 하필 그놈을. 이래서 애들 독서실 간다 할 때 의심해야 해.”
투룸을 썼지만 언제나 내 침대에서 노닥거리다가 자러 갔던 힐러는 키들키들 웃으며 돌아누웠다. 힐러는 그렇게 내내 행복해하다가 3년 후, 마법사를 놓았다.
놓았다, 고밖에 말할 수 없다. 마법사는 성실한 복학생은 아니었지만 소극장 뮤지컬 오디션에 붙어서 꽤 희망 찬 상태였다. 우리 모두 초연에 갔던 기억이 난다. 내용 자체는 시시껄렁한 옴니버스 러브 코미디였지만 무대 위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마법사를 보며 어, 어쩌면 정말 잘될지도 모르겠는데? 하고 모두 신기해했다. 비중도 별로 없는 조연이었는데도 박력은 대단했다. 하긴 노래는 항상 잘했지. 녀석이 과 주점이나 행사에 느닷없이 쳐들어와 완전히 장악해버리는 바람에 어이없었던 적이 모두 한 번씩은 있었다. 보컬 트레이닝을 받고 나니 정말 탁월했다. 연기는 지나치게 화려한 구석이 있었지만, 동시에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화려한 게 본연의 성격이니 말이다. 아마 그때 힐러가 결심하지 않았나 한다.
힐러는 아마도 마법사를 공유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무대 위에 서기 전에도 마법사는 언제나 한가운데에 있었다. 속한 그룹의 모든 사람을 끌어당겼다. 왜소한 주제에 대단한 중력으로. 그게 그를 빛나게 하니까 거기까진 받아들였지만, 이런저런 사교 그룹이 아니라 온 세상과 나눠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아연해진 걸지도.
“어느 순간 걔의 계획, 사람들, 즐거움 속에 내가 없더라고.”
“없었을 리가!”
“응, 그래…… 그럼 너무 조금 있더라고.”
먼저 끊어냈지만, 힐러가 더 많이 울었을 거다. 나는 나의 오래 못 간 남자친구들 중 가장 머저리 같은 놈이 선물했던 거대 곰돌이를 힐러에게 빌려줬다. 그 곰은 팔베개용으로 어깨도 있고 팔이 길었다.
한참 괜찮아진 다음에 힐러가 얘기했다. 엉뚱하게 피터팬 얘기였다.
“여러모로 웬디는 정체가 싫었던 걸 거야.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관계를 견딜 수가 없었겠지. 어릴 때, 네버랜드를 떠난 웬디가 모험을 포기하고 현실로 복귀했다고 미워했었어. 정말로, 많이 미워했었어. 어린애들은 그러잖아? 동화의 결말을 못 받아들이고 말야. 근데 생각해보면 네버랜드야말로 모든 게 보장된 환경이었잖아. 먹고사는 문제도 그렇고, 네버랜드에 머무는 한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는데. 특히 그 매력적인 피터의 영원한 사랑을. 그 안정된 환경을 버리고 러시안 룰렛 같은 성장을 택했어. 그 후에 웬디가 만난 사람들은 피터보다 훨씬 재미없었을 거야. 어쩌면 은행원이랑 결혼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다소 소심하게 생긴 은행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층층이 깊어져가는 사람이었을 거야. 묘하게 이제야 웬디를 이해해.”
애가 실연을 하더니 헛소리를 하나, 잠깐 뜬금없었지만 곧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마법사는 그렇게 다양한 층위를 지닌 캐릭터는 아니었다. 사랑받는 만큼 순간순간 밖으로도 마구 발산해버리니까. 그렇게 아무것도 고이게 두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동시에 녀석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힐러를 사랑했다는 것도 안다. 힐러가 마법사의 말에, 혹은 노래에 소리 내어 웃으면 녀석은 긴 손가락을 뻗어 공기 중에서 그 웃음을 집어내는 판토마임을 했었다. 나머지 셋은 그걸 보면서 바스락, 소리가 난다고 느꼈다. 얇은 기름종이처럼 웃음을 집어 지갑에 넣는 마법사의 퍼포먼스는 힐러뿐 아니라 모두를 행복하게 했었다. 마법사가 브로드웨이에 진출한다 해도 가장 웃게 하고 싶은 것은 언제나 힐러일 것이다. 중간자의 입장에서 두 사람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 한구석으론 그때 힐러가 마법사만이 아니라, 우리에게서도 조금 벗어나려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걱정을 했었다. 다섯 명이 겨우 다시 균형을 잡게 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힐러는 모두를 위해 돌아왔지만, 더 이상 네버랜드는 아니었다.
여튼 나머지 셋은 늘 입 밖에 꺼내놓고 말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그 둘이 한 번 더 사랑에 빠지지 않을까 궁금했다. 나는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도 있다.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는 거니?
“굳이 뮤지컬식으로 대답하자면, 걘 잘 늙으면 팬텀은 될 수 있을지언정 라울은 결코 못 맡을 인물이잖아. 피터팬도 팬텀도 싫어.”
힐러는 역시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었다. 사실 모든 여자가 바라는 것은 피터팬이나 팬텀이 아니라 늙어가고 성장하는 라울 아닌가? 『오페라의 유령』 원작 소설에서는 뮤지컬보다 훨씬 더 멋진 인물이다. 힐러와 나는 언제나 각자의 라울을 찾을 수 있길 바랐었다.
그럼에도, 라울이 될 수 없는 놈이라도 한 번 더 힐러의 발밑에 몸을 던지면 힐러가 받아주지 않을까 궁금했다. 멀고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나는 연인 같은 거 말이다. 힐러가 무슈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어어, 설마 이거 결혼식장에서 일 나는 거 아냐? 하고 눈빛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파묻은 감정들은 홍수철 지뢰처럼 흘러 엉뚱한 곳, 엉뚱한 타이밍에 터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니까 아주 합리적인 이유로 마법사는 용의자 넘버원이었다. 우리에게도 몰래 말 안 하고 힐러와 불타오른 줄 알았는데, 하루 종일 몇 번을 물어봐도 아니라고 했다. 마법사는 연기는 잘해도 거짓말은 잘 못했다. 그 차이가 뭔지는 잘 모르겠어도.
마법사가 아니라면, 다음 용의자는 분명했다.



2.5


“기억력이 좋지 않으면 좋은 게 뭔 줄 알아? MP3에 노래를 마구 넣어놓고 나서는 완전히 까먹어버리는 바람에,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듣고는 너무 새롭고 위로가 되어서 누가 날 구원하기 위해 준비해둔 것 같다는 거야.”



3


킬러와 나의 관계는 쉽게 정의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잠들기 전에 전화를 하는 사이라는 것. 매일은 아니고, 그저 이삼 일에 한 번씩. 내가, 혹은 걔가 전화를 걸었다. 그것은 길지 않은 통화였고 대화보다 침묵이 더 길었다.
언젠가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내려다본 적이 있다. 밤이었고, 한강이 그렇게 모든 빛을 삼켜버린다는 것에 경악했었다. 그런 단절이란 걸 몰랐었다. 도시 한가운데 저렇게 큰 강이 있다니, 이상하지 않아? 어째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 그것은 검고 굵은, 악당의 팔 같았다. 비즈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굳 이 돌이켜 보자면 그전에도 나는 언제나 한강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벌써 저 아래 누워 있는 게 아닐까? 나를 사랑하기로 되어 있던 사람은?”
전철이 철교를 지날 때, 문에 바짝 붙어 서면 아래로 물이 보였다. 그런 얘기를 하면 힐러는 발끈했다. 말도 안 된다고. 하지만 우울해서가 아니라 어쩐지 꼭 그럴 것만 같았다. 나약하고 상처 받은 그 인간은 나를 만나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미 물밑에 누워 있는 게 아닌가 하고.
킬러와 통화하면 그런 기분이 좀 나아진다. 통화를 할 때 우리 사이에는 강이 있지만, 나는 그 강 너머에 내가 아주 잘 아는 작은 방이 있다는 데에서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낀다. 익숙한 구조의 작은 공간에 킬러가 나와 비슷한 자세로 누워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대적할 수 없는 균열을 훌쩍 뛰어넘어 이어져 있는 것만 같다. 어린 시절의 워키토키같이 특별하게.
강 너머의 방을 알고 있다.
그런 단순한 사실로도 괜찮아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 그 방을 알고 있다. 킬러는 스무 살 때부터 그 방에 살았다. 영등포에 있는 원룸형 오피스텔. 킬러가 기억하는 한 늘 서로를 견딜 수 없어 했던 그의 부모님은 킬러가 스무 살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이혼했다. 그리고 양쪽 집 중간쯤 되는 영등포에 원룸형 오피스텔을 한 채 사주고, 9인승 카니발도 한 대 사줬다. 혼자 남았는데 9인승이라니, 잔인하지 않은가 뜨악했는데, 알고 보니 킬러가 직접 고른 거였다. 우리 모두와 짐을 싣고 놀러 가려면 그 차가 딱 좋을 거 같았다고. 지금은 다른 차를 타지만 그 하얀 카니발에겐 정말 신세를 많이 졌었다.
집과 차가 생기자, 킬러는 한 학기 만에 컴퓨터 공학과를 중퇴했다. 그리고 일식 요리사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우리 중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으면서도 걱정할 필요는 또 전혀 없는 인간이었다. 게임의 킬러라는 캐릭터도 결국 닌자도, 어쌔신도, 도적도 아닌 종잡을 수 없는 혼합적 양상을 띠었는데 그와 비슷했다. 친구라도 녀석을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요리 쪽은 그때나 지금이나 꽤 도제식인 듯했고, 국내와 국외를 일이 년씩 옮겨 다니더니 결국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일식집의 참치 파트에 안착했다. 잘은 모르지만 그건 꽤 대단한 일인 것 같다. 킬러는 이제 그 큰 참치를 해체할 수 있는 남자다. 그런 점에서 킬러가 싸움을 잘 안 하는 타입이라 다행이다. 참치 반도 안 나가는 인간 정도라면 정말 쉽게 해체할 거다. 술자리에서 싸움이 나면 항상 마법사가 다른 테이블과 시비 거리를 만드는 경우였고, 검사가 말리고 중재하는 축이었다. 킬러는 뒤에서 차분히 관망했는데, 나는 그 서늘함이 더 무서워 그 옷깃을 살짝 잡고 있었다. 무려 그의 백팩에는 엄청나게 잘 벼려진 칼이 들어 있지 않은가. 킬러가 풍기는 위험함을 어째선지 다른 사람들도 금세 눈치 챘다. 킬러는 한 번도 싸우지 않았지만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우세한 전력이었다.


오늘은 통화하지 않는다. 게임에서 만난다. 힐러의 얘기를 물을 때 목소리가 불안정해질까봐서다. 마법사 전에, 검사도 잠깐이지만 힐러를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다. 검사의 여자 친구가 힐러에 대해 본능적으로 느끼는 경계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걸 아는 힐러는 검사의 여자 친구를 배려해주기 위해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검사보다 킬러에게 먼저 연락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다.
그럼 킬러는 한 번도 힐러를 좋아한 적이 없었을까? 누가 봐도, 내가 봐도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를? 나는 내 목소리에서 그런 의문들이 드러나는 게 싫었다.


▶ 오징어초밥(킬러, Lv92)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참치를 만지면서 오징어초밥이라니, 그런 소박한 의외성이 그답다. 게다가 혼자서 레벨이 높은 것도 그답다. 사냥을 꾸준히 해온 거다.
우리는 슬라임 숲에서 만났다. 그 숲에는 대개 레벨 10 이하짜리들이 잡을 만한 사냥거리들이 가득했지만, 최강의 슬라임이 한 마리 있었다. 다른 슬라임들과 똑같은 크기의 똑같은 초록색이었지만, 그 슬라임은 어떻게 얘기하자면 마왕보다도 더 강했다.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시점에 버그가 생겨서 죽지 않게 되었는데, 인기가 없어진 게임이라서 이 작은 오류를 아무도 수정하지 않고 방치해둔 것이었다. 무시무시한 공격도, 화려 찬란한 기술도 탱글탱글하게 받아내는 이 대단한 슬라임을 곧 찾아낼 수 있었다. 영원히 어쩔 수 없는 오류를 얘기할 때 우리는 이 슬라임을 은유로 썼다. 아주 특별한 슬라임이었다. 다른 슬라임들은 겨우내 갑자기 늘어난 뱃살의 은유일 뿐이었다. 어이쿠, 그새 내 배에 슬라임이 한 마리 늘었네, 하고. 킬러와 나는 무료하게 이 신성한 녀석을 공격했다.


닥쳐아처> 혹시, 따로 연락받은 거 없었어?


만약 내가 결혼 이틀 전에 사라질 작정이었으면, 분명 킬러한테 먼저 얘기했을 거다. 마법사도 검사도 힐러도 아니라.


오징어초밥> 연락이라고 해야 할지. 그 일주일 정도 전에 택배로 호두 파이가 왔었어. 나는 그냥 불안해서 그런 줄 알았지.


호두 파이라니. 힐러는 우울해지면 언제나 호두 파이를 구웠다. 사실 처음에는 다양한 걸 구웠었지만, 우리 반응이 제일 좋은 게 호두 파이라서 결국 그것만 굽게 되었다. 우리는 호두 파이를 얻어먹으며, 다른 사람의 우울 조각을 얻어먹으면서 이렇게 행복해해도 되는 걸까 가책을 느끼곤 했다. 그렇다 해도 또 항상 행복해지라고 빌어주자니 이 맛있는 파이를 다시는 못 먹는 건가, 나쁜 마음도 죽일 수 없었다.
힐러는 결혼 일주일 전에 그 유명한 호두 파이를 구웠던 것이다. 그리고 구원 요청을 하듯 그것을 킬러에게 보냈다. 하지만 킬러조차도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던 거다.


닥쳐아처> 분야는 달라도 요리사에게 요리를 보내다니, 그런 무심한 듯 대담한 구석이 있다니까.


물론 킬러는 내가 플라타너스 낙엽을 긁어다 국을 끓여줘도 맛있다 할 인품을 갖추고 있긴 했다. 킬러와 있으면 누구에게보다도 긴장을 풀게 된다. 가깝기로 따지면 힐러보다 우선할 수는 없지만, 여자들끼리는 서로에게 언니인 척하느라 약간의 긴장은 어쩔 수 없이 남았다. 그런 류의 다정한 긴장이 없으니, 킬러에게는 가드를 완전히 내리게 된다고 할까.
언젠가 킬러랑 장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킬러가 말했다.
“어, 너구리다.”
“뭐? 어디어디?”
“……라면 얘기한 건데.”
나는 그만큼 긴장이 풀려 넋을 놓고 있었다. 킬러랑 있으면 늘 그렇게 허술해진다. 대체 슈퍼마켓에 웬 너구리겠어.
그리고 간장 게장을 봉투에 담을 때였다.
“찔릴라, 조심해서 들어.”
“헉, 살아 있어?”
“……좀비냐. 살아 있게.”
킬러는 신사답게도 내가 저지른 바보짓들을 다른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좀비 게 먹으러 갈래? 하고 은근히 놀리긴 했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힐러에게도 피난처를 마련해주고 우리에게는 말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들었다.


힐러는 언제나 킬러와 나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확신했었다. 눈을 반짝이며 자주 나를 들쑤셨는데, 꼭 힐러와 마법사의 실패가 신경 쓰여서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한 번도 확신할 수 없었다.
좀비 나이트. 여름철이면 날짜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다섯이 함께 모여 동네 DVD 방의 가장 큰 방을 빌리고, 버거킹에서 어니언 링을 열 봉지쯤 사서 밤새도록 좀비 영화를 봤었다. 양파 입 냄새쯤은 신경 쓰지 않는 사이였다. 한번은 킬러가 나와 힐러 사이에 앉았는데, 나는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힐러와 킬러의 무릎 사이가 나와 킬러의 무릎 사이만큼 좁을까가 내내 궁금했었다. 질투나 열등감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호기심이었다. 마치 그 몇 센티 차이가 나와 킬러 사이를 정의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새벽에 첫차를 위해 나서면서, 둘이 살짝 따로 걷게 되었다. 그때 킬러가 얘기했다.
“좀비들의 시대가 오면, 최대한 지켜주다가 먼저 물릴게. 그리고 너도 좀비가 되면 항상 신선한 고기를 너 줄게.”
나는 둔해 터져서 제대로 된 대답을 못했다.
“아, 근데, 좀비들 먹는 건 다 어디로 가는 거지? 소화를 시키진 못할 거 아냐. 걔네는 만성변비인가?”
그때 나는 너무 어렸다. 고백인지 뭔지 확실치 않은 그의 말에 똥 개그로 대처했던 것이다. 언제나 나머지 넷보다 먼저 어른이었던 킬러는 그냥 웃었다. 새벽에 킬러가 그렇게 웃는 모습은,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잔영을 남겼다. 그는 너무 무리한 요구도 없이, 염려를 가장한 영역 침해도 없이 항상 적당한 거리에 있었고, 난 어설프게 그의 다정함을 이용해왔다. 킬러는 목질이 단단한, 나와는 다른 수종(樹種) 같았다.


“가장 큰 증거로, 걘 한 번도 우리한테 여자 친구를 소개해준 적이 없잖아?”
힐러가 늘 하는 얘기였다.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막연히 추측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마법사와 검사가 애인이 있다면 데리고 오라고 그를 보채다 지쳐 떨어진 지도 오래긴 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그렇다 해도, 내가 그동안 데려왔던 멍청이들은 어쩌라고?”
나의 연애사는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었고, 누가 봐도 대재앙이었다. 제대로 지속된 적도 없고, 상대의 상태를 보면 이건 그저 내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안간힘을 써서 증명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까. 그걸 다 알면서도 킬러가 그런 감정을 가질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인간의 감정이란 어차피 화학반응이다. 초기에 일찍 반응하고 그다음에는 그저 침전할 뿐이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지난 수년간의 무수한 소개팅처럼 키스하고 싶은, 키스할 수 있는, 키스하게 되는 놈은 전연 없는 건조해서 가루가 날릴 것 같은 무의미한 시도들일 테다. 킬러는 그냥 마음 놓고 허술해질 수 있는 친구, 좀비의 시대가 와도 든든한 아군일 뿐이다.


오징어초밥> 만약 내가 걜 생선 냉장고에라도 숨겼다면, 그래도 너한테는 말했을 거란 생각 안 드니?


이모티콘 하나 없었지만, 어쩐지 웃음기가 묻어났다. 킬러는 슬라임을 찌르고 있던 표창인지 단검인지를 거두고 그렇게 잠시 서 있었다.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메신저로 대화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랬더라면 저렇게 그대로 멈춰 있는 킬러의, 이상한 진정성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멍하게 그의 이름 위에 커서를 두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잠들기 전에 다시 킬러와 통화를 하진 않았다. 대신 몇 번이나, 힐러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나 확인했고 음성 메시지도 수통이나 남겼다. 그러다가 까무룩 잠들었는데, 고등학교 때 꿈을 꿨다.
겨울방학에 굉장한 폭설이 있고 다음날, 운동장에다 이글루를 만들었었다. 그 좁은 데 다섯이 다 들어앉아 과자를 아그작아그작 먹어댔다. 앞에 앉은 킬러의 패딩 후드에 달린 너구리 털이 너무 폭신해 보여서, 좁은 걸 핑계 삼아 잠깐 얼굴을 묻었다. 이마가 간질간질했고, 모든 게 괜찮아질 거 같았다.



3.5


"모 아니면 도. Now or never. 등을 맡길 수 있는 상대인가 아닌가. 우정의 대상인가 로맨스의 대상인가. 그런 점을 명확히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면서 지내왔는데, 세상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아도 내 노력들이 의미가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걸. 원칙주의자이고 싶어. 지나간 자리에 풀도 나지 않을, 그런 인간으로 최대한 오래 남고 싶어. 철이 덜 든거지. 아무리 좋게 얘기하려 해도 유아적 결벽이지만. 아직은 조금만 더, 괜찮지 않겠니."
검사가 스스로의 소신을 밝힐 때, 나는 이 인간은 왜 술을 먹고도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4


“마가리타가 마시고 싶다고 문자가 왔었어. 그걸 여친이 하필 봐가지고는 난리가 났었지.”
불판 한 귀퉁이도 낭비가 없이 질서정연하게 고기를 구우며 검사가 말했다. 검사의 그런 성격이 평소에는 괜히 싫었지만, 고기를 먹을 때만은 예외였다. 검사는 남는 공간 없이, 최단 시간으로, 타는 고기 없이 균일하게 구워내는, 고기 굽기의 달인이었다. 유일하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마법사였는데, 고기 기름이 튀어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2주일간 안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어서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내가 본 바로는, 그건 검사의 잘못이 아니라 불판에 너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 마법사의 탓이었다.
“그 술도 못 마시는 애가 마가리타를 사달라고 했다고?”
과거의 경험에서 배운 것 없이 불판에 밀착한 상태로, 마법사가 물었다. 그렇게 둔하니 그 좋은 애를 놓쳤지. 힐러가 마가리타를 좋아한 것은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술잔에 두른 소금을 더 좋아했다. 술을 다 마시고도, 조금씩 돌려가며 소금을 빨 수 있어서, 그 시간에 수다를 더 떨 수 있어서였다.
“응, 사실은 답문도 한참 뒤에야 보낼 수 있었어. 옆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검사의 여자 친구는 힐러 얘기만 나오면 거품을 물었다. 좀 이상한 여자애였다. 우리 중 누구도 그 여자애를 좋아하지 않았다. 의부증이 있는 건지 검사의 온갖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그 여자애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한동안은 정말 불편했다. 다행히 게임에까지 접속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힐러에 관해서는 꼭 그 여자애 때문만은 아닌 게 검사가 실수로, 대학 때 취한 힐러를 한 번 집에 업어다준 적이 있다고 말해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많은 무용담과 함께 나온 얘기였으나, 여자 친구는 당연하게 그 부분만 콕 집어 듣고는 안테나를 세워버렸다. 개연성이 있긴 한데, 그래도 힐러에게만 까칠하고 나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게 미묘하게 기분 상하기는 한다. 심지어 친절하게 대해주는 수준이다. 난 그렇게나 위협적이지 않아? 아주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하는데? 물론 위협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검사가 그토록 쥐여 사는 것도 이해는 간다. 성실하긴 한데 카리스마가 부족해서 만년 부반장, 반듯반듯하기만 할 뿐 페로몬도 부족하고, 남자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좋은 생물처럼 느껴지는 놈한테 볼륨도 꽤 빵빵한 여자 친구가 생겼으니. 아, 그래서 힐러 역시 그 여자애를 싫어했다. 힐러의 성격상 잘해주긴 했지만 분명 좋아하진 않았다. 어쩜 늘 그렇게 골이 다 들여다보이는 옷만 입고 오는 건지! 힐러는 사이즈가 아담했기 때문에 더더욱 발끈했던 것 같다.
어찌되었건 우리 넷 다 힐러의 SOS 사인을 완전히 무시한 셈이었다. 무력감에 빠져 고기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때 검사가 한쪽 눈꺼풀에 경미한 경련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런데 걔가 그렇게 갑자기 없어졌으니, 어쩔 수 없이 아버지한테 부탁해서 무슈에 대해 조사했어. 혹시나 해서.”
마법사와 나는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원칙주의자인 검사가 경찰 공무원인 아버지에게 그런 부탁을 하기는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입 밖에 꺼낸 적은 없어도, 혹 무슈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들은 힐러의 부재 이후 내내 거기 있었다. 폭력적이라든가, 또는 사기꾼같이 뭔가 구린 구석이 있든가.
“그랬더니?”
검사가 고기 집게를 놓고 눈꺼풀을 문질렀다.
“깨끗해. 딱히 이상스러운 기록은 하나도 없어. 다만 한 달 전쯤에 신호 위반으로 충돌 사고를 냈는데 그때 둘이 함께 타고 있었더라고. 걔 다쳤었니?”
“아, 물리치료 받는다는 말을 얼핏 했던 것 같아. 근데 그게 교통사고 때문인 줄은 몰랐어. 그냥 허리가 좀 안 좋다고밖에 말 안 하더라고.”
“그게 이거랑 상관이 있을까?”
셋은 잠시 묵묵히 고기만 먹었다. 교통사고와 결혼식.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실마리였지만, 물리치료까지 받으면서 우리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사고라면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갑자기 검사에 대한 우정이 새삼 솟아올라 따뜻한 눈길을 던졌다. 저 각 잡힌 체크셔츠와 면바지! 평소엔, 저놈 취미가 다림질일 거야, 라고 속으로 비아냥대기 바빴지만 오늘은 그조차도 듬직해 보였다. 이제 와 이런 말을 하긴 좀 웃기지만, 검사랑 조금 더 친해져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원칙주의자인 주제에 위법을 하면서까지 힐러를 찾는 일에 신경 쓰고 있다. 꽤 괜찮은 녀석인 거다.
부끄럽지만 심지어 검사가 군대에 있을 때는, 모르는 지역 번호로 온 전화가 녀석인 줄 알고 변태랑 3분 48초나 통화를 한 적도 있었다. 목소리도 못 알아듣는 사이였던 거다. 이제부터는 좀 잘해줘야지, 게다가 고기도 잘 굽잖아.
“왜 그렇게 째려봐?”
검사가 움찔하면서 몸을 뺐다. 음. 갑자기 다정하게 쳐다보기도 쉽지는 않겠군.


식사가 끝나고는 근처에 유명하다는 사주 카페에 갔다. 검사의 여자 친구가 자주 가는 데가 있다고 해서, 얼떨결에 장정 둘과 사주 카페다. 힐러가 없으니 이런 것도 좀 그림이 안 산다. 어디 있는 거야, 마치 거기 힐러가 우연히 지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용하다는 사주 카페 사장님이 번쩍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가씨, 동갑이랑 연이 있는데, 제대로 정신 안 차리면 웬 닭띠 여자가 채가겠는데?"
갑자기 고기 먹은 힘을 다 끌어모아, 대체 누구야, 그 닭띠 년은? 난 한밤중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킬러의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교통사고 얘기를 전해주고, 친구 중 여자 이름은 다 클릭해서 닭띠가 있는지 확인했다. 연상 닭띠인지 연하 닭띠인지 따지다가, 스스로가 한심해져서 나도 힐러처럼 사라지고 싶어졌다.



4.5


마법사의 가장 최근 공연이 끝나고 나서였다. 우리 넷은 되도록 함께 초연을 보러 갔지만, 그때는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힐러와 나뿐이었다. 무슈의 차를 기다리면서 힐러는 내게 잠깐 기대어 있었다.
“저렇게 멋진 존재니까. 행성이 아니라 항성이니까.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는, 남자 친구를 그리고 오랜 친구를 잃은 게 아니라 하나의 세계가 닫혔다고 생각했어. 근데 지금은 괜찮은 거 같아. 공연을 봐도 그냥 나는 행복한 관객이고, 곧 결혼을 하면 돌아갈 집도 생길 거야. 그렇게 단단하고 영원할 것 같던 마음도 마모된다는 게 다행이지 않아? 오이 가는 강판에 화강암을 가는 격이었지만, 모두 가루가 된다는 게 안심이지 않아?”
나는 레즈비언 연인처럼 보일 각오로 힐러를 꼭 안아주고, 선팅이 좀 심하게 되었다 싶은 무슈의 차가 도착해 힐러가 그 안으로 사라지자 손을 흔들어주었다.



5


우리는 빙하 위의 어린 물개들처럼 다닥다닥 앉아서 물에 뛰어들지 못한다. 가끔 짧은 지느러미로 찰박찰박 물 온도를 재보고는, 어우야 춥다, 이거 뭐하러 들어가겠니, 느슨하게 불평한다. 어떤 의미로는 다정하고, 어떤 의미로는 발전적이지 못하다.
거기에 비해 무슈는 마치 북극곰 같았다. 그는 거대하고, 두려울 게 없으며, 물개 따위는 우적우적 씹어 먹을 강한 종자였다. 태어날 때도 수트를 입고 태어난 것처럼 수트가 잘 받았고, 어른이었다. 팔을 들어올리면 매우 고급스러운 커프스링크가 보였고, 타이 역시 어떻게 맨 것인지 멋진 딤플이 잡혀 있었다. 유명 외국계 회사의 여의도 본사에 다니는 회사원. 키가 크고 연봉이 높은 포식자.
그날도 우리는 그 앞에 쪼로로 앉아 물개처럼 떨었다. 게다가 우리 뒤에는 더 이상 힐러가 없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회복이 불가능하다.
“경황이 없으실 텐데, 이렇게 저희랑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검사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킬러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마법사는 몸을 뒤로 좀 빼고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무슈가 마법사의 존재를 어떻게 여기는지 궁금했지만, 무슈의 매너는 흠잡을 데 없었고 표정은 읽기 힘들었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봐야 해서, 그렇게 긴 시간은 못 냅니다. 그보다는 이 상황에 제가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적어도 예닐곱 번은 만났는데 아직까지도 우리한테 존댓말을 썼다. 거리감 유지 하나는 선수가 아닌가 싶었다.


힐러가 무슈를 처음 만났을 때의, 뺨 색깔이 생각난다. 온도와 색감이 전혀 조절되지 않던 뺨이. 작은 색깔 전구가 든 것처럼 빛났다. 산호색으로. 그 옆모습을 보면서 난 결코 흉내 내지 못할 발색이라고 생각했다. 친척이 주선해준 선에 가까운 만남이었는데도, 연애의 기운이 났다.
“어쩐지 열대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야.”
그때는 더 이상 함께 살지 않았지만, 서로의 집에 종종 자러 갔었다. 부모님이 선물받은 와인 같은 걸 한 병씩 훔쳐서. 아마 그 얘기를 했을 때는 내가 힐러네 집에 갔던 날인 것 같다.
“어린 열대어가 태어나서 처음 본 스쿠버다이버에게 반해버리는 거지. 일부러 그의 노란 고글 앞을 부유하면서.”
“흠, 무슈랑 너랑 키 차이는 확실히 그 정도 되는 거 같애. 너 같은 애들도 키 큰 남자를 사귀면, 난 어쩌라는 거냐? 솔직히 넌 158도 안 되지?”
“잴 때마다 156이었다가 158이었다 그래. 중력 때문인가?”
“그 봐, 그럴 줄 알았어. 어쨌든 그래서 열대어가 어쨌다는 건데.”
“음…… 아주 조심히, 아가미를 열어 보이는 거지. 작고 빛나는 기포들이 분홍색 기관들을 드나드는 안쪽을. 아주 작은 틈이지만, 아주 큰 용기를 내서. 스쿠버 다이버가 작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헉, 너희 벌써 같이 잤냐?”
“엥, 갑자기 무슨 소리야!”
“작살이랑 분홍색 틈이래매, 그 얘기 아냐?”
“아니야. 이 야한 언니 같으니. 그냥,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알면서도 다가가는 걸 얘기하는 거야. 열대어라면, 내 비늘 따위는 너무 쉽게 흩어질 테고, 바다는 쉽게 붉어지기엔 너무 거대하고. 아무것도 가려주지 않는 투명한 눈꺼풀을 잠시 감고 기다려보는 거지.”
“흠, 그런 거라면 다이버가 작살이 아니라 빵이나 소시지를 들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물고기들 그런 거 진짜 좋아하던데.”
“그럼 다행이지. 기뻐서 단단한 손톱에 지느러미를 잠시 얹어줄지도 몰라.”
“그래. 다행이네. 넌 열대어가 꽤 어울리는데, 난 어째선지 스쿠버다이버도 못 만나는 먼 바다에 사는 참치 같아.”
“그래서 너한테는 킬러가 딱이라니까. 널 열어줄 거야.”
“뭐, 걔한테 칼로 배를 따달라고 하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힐러가 부드럽고 폭신한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잡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예쁜아. 원래 사랑은 살해당할 각오로 하는 거야.”


이 남자가 힐러를 살해했을까. 비유적 의미로든, 실질적 의미로든. 힐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파스텔 점묘화 속에 살고, 나는 거친 목탄 크로키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힐러는 잔인한 세계 속에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작살의 세계에.
바람을 피웠을까. 숨겨놓은 애가 있는 건가. 직접 때리거나 혹은 물건을 던졌을까. 연쇄살인범은 아닐까. 힐러의 가족들에게 해선 안 될 행동들을 했을까. 신용불량자에 도박 중독자는 아닐까. 변태 성욕자인가. 성불능인가. 동물을 학대할지도 모른다. 애완동물 털 날리는 걸 죽어도 못 참을 인상이긴 해. 엄청난 마더 콤플렉스가 있는지도.
무슈가 내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을 때, 킬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교통사고 때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얘기를 꺼내다 말더군요.”
물론 힐러는 그 얘기를 꺼낸 적도 없었지만, 킬러의 한 방은 효과적이었다. 무슈의 얼굴이 무너져내렸던 것이다.
“그 얘기를, 하던가요?”
“아뇨, 다 듣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무슈의 표정을 읽어내려 애썼다. 치욕, 수치, 회한, 안타까움, 분노, 좌절. 저런 표정을 알고 있는데, 어떤 때의 표정이었더라?
“정말 사고였고, 순간적인 일이었어요. 앞에 큰 화물차가 있어서 신호를 잘못 봤는데…… 충돌의 순간 저도 모르게,”
마법사가 목젖을 움직이며 침을 삼켰다.
“핸들을, 저 자신을 보호하는 쪽으로 꺾어버린 겁니다. 덕분에 저는 멀쩡하고 그쪽이 더 많이 다쳤죠. 그쪽을 아끼지 않은 게 아니에요. 그건 정말 순간이었고, 본능적인 거였단 말입니다. 사고 자체도 큰 게 아니었고, 이삼 주 물리치료를 받았던 것뿐이에요. 괜찮다고 말했단 말입니다. 내내 괜찮다고 했어요.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사라지다니…… 저만 욕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쪽이라니. 힐러가 그런 대명사로 불리는 건 지금 와서도 어쩐지 싫었다. 그쪽이라니. 힐러는 물론 괜찮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해도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순간에, 정말 괜찮은 경우가 얼마나 되던가. 힐러가 이성적으로 이해했을지는 몰라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열대어처럼 용감하게 사랑한 상대가, 충돌하는 순간 스스로만을 보호하는 선택을 했다.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상처를 받는 건 마찬가지다. 그 얘기를 우리에게 하지 못했다는 게, 힐러가 정말 상처받았다는 증거라고 생각되었다.
한때 정말 어른처럼 보였던 상대가, 이제는 치졸하고 그릇이 작은 인간으로 느껴졌다. 나는 무슈가 짓고 있는 표정의 정체를 그때 깨달았다. 그것은 게이머가 한창 중요한 퀘스트를 깨놓고, 세이브 포인트를 찾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게임을 접어야 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렇지. 힐러와 결혼한다는 것, 그것은 여자인 내가 생각해도 궁극의 세이브 포인트였을 것이다. 동정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무슈는 급하게 자리를 떴다. 파혼을 두고 그의 집안 사람들은 할 말이 많겠지만, 무슈 본인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별로 소득이 없는걸. 교통사고 얘기를 더 알게 된 건 그렇다 치고,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정보는 그게 아니잖아.”
“벌써 일주일이 넘었는데,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다 괜찮으니까 다치거나 아프지만 않으면 되는데 말이다.”
“울고 있는 거 같아.”
“뭐?”
“걔 지금 울고 있다고.”
다같이 발걸음을 멈췄다. 여의도에서 나와 한강을 따라 반포 쪽으로 쭉 걸어오던 참이었다. 나는 강 쪽으로 내려섰다.
힐러가 지금 울고 있는 걸 알았다. 괜찮니. 괜찮니. 괜찮니. 울고 있다면 밖으로 울어. 몸의 내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들이 암이 되고 종양이 된다고 생각해. 멀리서 울어도, 어쩐지 알게 되어버리는걸.



5.5


끼릭,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힐러의 언니를 포함하여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는 사람들의 증언이다.
기다렸던 사람을 만나면 우주적 톱니바퀴가 맞물리기 시작할 때의 별들이 내는 금속성이, 들린다고 했다. 점점 커진다고. 끼릭, 끼릭, 끼릭.
힐러의 파혼은 이상하게 나한테 있어서도 어떤 붕괴였는데,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이런 길 잃은 어린 양도 다시 믿음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들을 것 같지가 않다.
이런 나의 회의주의가 너를 밖에 세워두니?



* 필자와 상의하여 2회로 나눠 게재합니다 (다음 회는 7월 1일).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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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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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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