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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사랑

  • 작성일 2012-02-22
  • 조회수 907

 

[청소년 테마소설]

자아정체성_첫 번째

 

 

최고의 사랑

 

박정애

 

 



 

최민수는 싫고....... 최영수, 최정수, 최철수, 최진수, 최용수, 최경수, 최연수, 최기수, 최지수, 최윤수, 최남수, 최동수....... 어쨌든 누구도 이름값을 운운하지 않는, 무색무취한, 흔해빠진 이름이어야 해. 사실은....... 아메리카 원주민 식으로다, ‘고독한 늑대’나 ‘춤추는 백곰’이었으면 좋겠다.

 

 

  “최고? 최고오오오오? 성은 최, 이름은 고, 최고!”

  내 이름을 확인한 담임이 미간과 콧등에 주름을 잔뜩 잡았다가는 입술마저 씰룩거린다. 이건 뭐, 새 학년 될 때마다 치르는 홍역이랄까.

  “에라이, 이 녀석아, 이름이 아깝다, 이름이 아까워.”

  결국 이름 때문에 꿀밤 한 대를 얻어맞고야 만다. 아, 이름의 저주. 이 저주는 언제나 끝이 날까. 내가 죽어야 끝장이 날까.

  교탁 옆에서 자라목처럼 움츠려 있던 정우가 선생님 몰래 ‘썩소’를 날렸다. 같이 장난치다 걸렸는데 저는 안 맞고 나만 맞은 게 고소하다 이거다.

  이럴 땐 정우 녀석도 밉지만 아빠가 더 밉다. 아빠는 왜, 자기 이름도 최면이라 학창시절에 이름 때문에 놀림을 당할 만큼 당했다면서, 나한테 정우나 민준이처럼 흔한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걸까. 정 특이한 이름을 짓고 싶으면 ‘종병기’나 ‘신영화’ 쪽이 차라리 낫다. 그럼 선생님들도 ‘최종병기? 와하하하하하하! 부모님이 게임광이신가 보다.’, ‘최신영화래, 최신영화, 부모님이 대단한 영화광이시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히히히히히!’, 이렇게 웃느라고 한 대 때릴 일도 그냥 넘어가지 않겠느냔 말이지.

 

  이름의 저주는 계속됐다. 아침 조회 시간에 야단맞고 어쩌고 하느라 휴대전화 제출하는 걸 깜빡 잊은 것이다. 예비고등학생으로서 중3의 자세에 대한 담임의 열강을 듣던 중에, 별안간 바지 주머니에서, 드르륵,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문자메시지였다. 우리 같은 중딩이 손 안에 든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을 확률은, 배고픈 고양이가 코앞에 놓인 생선을 보고도 입을 대지 않을 확률과 거의 일치한다. 더구나 이 시각에 나한테 문자메시지를 보낼 사람이라면, 스팸문자가 아닌 이상에는, 개학날이 내일이라 집에서 뒹굴뒹굴 놀고 있을, 오늘 저녁 수학 과외수업 때 만날 예정인, 속눈썹이 길고 보조개가 예쁜 한결이밖에 없는 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살짝 꺼내 폴더를 열었다.

  오늘 숙제 뭐야~~~

  담임 눈치를 보면서 답신 보낼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담임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우리 반 아이들 전체와 일일이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또 드르륵.......

  뭐야... 씹는 거야...

  예쁜 아이들은 이렇게 인내심이 없다. 모든 걸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 제가 놀고 있으면 남도 노는 줄 안다. 저는 제 맘대로 내 문자를 씹으면서, 내가 씹으면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세모눈을 하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을 한결이 얼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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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른 고개를 들고 시침을 뚝 떼려는데, 또 드르륵.

  익힘책은?

  안 해도 돼

  전송키를 누르는 순간, 시커먼 곰 그림자 같은 것이 흔들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쿵, 쿵, 하는 발소리도 함께.

  뭐지, 하는 생각을 떠올릴 새도 없었다. 휴대전화는 이미 담임의 손에서 드르륵거리고 있었다. 한결이가 답신을 보낸 모양이었다.

  “울트라캡짱차세대아이돌한결이? 웃기고 있네. 여친이냐?”

  아우, 미쳐. 나는 그냥 정직하게 오한결이라고 입력했었다. 그런데 한결이가 내 전화기를 빼앗아선 제 멋대로 ‘울트라캡짱차세대아이돌한결이’라고 바꿔서 저장해버린 것이다.

  “혀, 형인데요.”

  엉겁결에 거짓말을 했다.

  “형이 이 시간에 뭐 하러 문자를 보내?”

  “개, 개념이 없는 형이라서.......”

  “그 형에 그 동생이군.”

  담임이 피식 웃더니 휴대전화를 자기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일주일간 압수!”

 

  폰 찾으러 교무실 갔다가, 사극에서나 보던 멍석말이를 당했다. 물론 진짜 멍석말이는 아니고, 이 선생님 저 선생님 다 달려들어 꾸중을 하거나 꿀밤을 때리거나 비아냥거리거나 혀를 차거나 했다는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영어 선생님.

  “어머어머, 얘 형이 최영이라고? 세상에나, 세상에나, 3년 내내 전교 1등을 도맡다가 고입연합고사도 만점 받았다던, 그 최영?”

  꿀밤 때리는 걸 너무 좋아하는 우리 담임.

  “네 형이 언제부터 울트라캡장차세대아이돌한결이가 됐어, 응? 건방진 새끼, 수업시간에 여자친구랑 문자질이나 하고 말이지. 그것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뭐, 형이 개념이 없어? 네 똑똑한 형이 들었으면 그 자리에서 졸도하겠다, 이 덜 떨어진 놈아.”

  “그러니까 얘가 최영 동생인데, 이름이 최고라고라? 아이고 그려, 장하다. 이름이 최고인데 왜 최고가 아니겄어? 공부만 빼고 웬만한 건 다 최고겄지. 장난질도 최고, 수업시간에 문자질 하는 것도 최고, 연애질하는 것도 최고....... 또 최고, 뭐 있냐? 쌈도 잘하냐? 술도 잘 먹고?”

  “쯧쯧. 제 형 절반이라도 따라가지 못하고.”

  “누가 아니래. 형제가 달라도 어쩜 저렇게 다르냐고.”

  “그러게. 너무 다르네, 너무 달라.”

  내가 지은 죄라면, 수업시간에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선생님한테 거짓말을 한 거다. 잘난 형을 둔 건 내 죄가 아니고 이름이 최고인 것도 내 죄가 아니다. 벌을 받더라도 내가 지은 죄만 가지고 받으면 최소한 억울하지는 않을 거다. 그런데 나는 왜 항상 내 죄가 아닌 것들 때문에 가중처벌을 받아야 하는 걸까?

 

  학원 갔다가 과외수업 받고 집에 오니, 집 안이 왁자지껄했다. 엄마는 와인 잔이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아 바닥이 넓은 접시에다 과일을 깎아 담고, 아빠는 오븐에서 치킨구이를 꺼내오고 있었다.

  “어, 최고 왔니? 얼른 손만 씻고 앉아라. 오늘 아빠가 ‘학생이 뽑은 최고의 교수’ 상을 받았잖니? 그래서 우리 식구끼리 자그맣게 축하파티라도 하려고.”

  “그래요? 저는 저녁을 많이 먹어서 배부른데요. 그냥 제 방에서 숙제할게요.”

  슬그머니 빠져볼 궁리를 냈다.

  “배가 불러도, 숙제가 많아도, 아빠가 앉으라면 앉아. 가족이란 게 뭔데? 좋은 일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 있으면 함께 슬퍼하는 게 가족이야. 나는 말이지. 숙제 핑계, 학원 핑계로 가족 행사 빠지는 거, 절대 용납 못 한다. 가족이 최우선이야. 최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냐?”

  아빠의 꼰대 기질, 발동했다.

  “아, 네에에에에.”

  “네 형은 뭐, 숙제가 없어서 여기 나와 앉았을까. 원래 공부 잘하는 아이가 놀기도 잘하고 가족도 더 위하고 그런 거야. 꼭 공부 못하는 녀석이 놀 때는 공부 걱정, 공부할 때는 놀 생각, 그러지. 잔말 말고 얼른 씻고 와.”

  소파에서 영어잡지를 읽고 있던 형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혀를 날름 내밀었다. 형 때문에 교무실에서 멍석말이를 당한 기억이 와락 떠올랐다.

  “아유, 저걸 그냥 확?”

  이번에는 엄마가 태클을 걸었다.

  “뭐야? 방금 그거, 아빠한테 한 말이니? 최고 너, 혼 좀 나야겠구나. 중학교 가더니 말버릇이 아주 최악이 됐잖아.”

  “에이 씨, 그게 아니구요. 방금 형이 메롱, 했거든요. 그래서 형한테 말한 거잖아요.”

  “그럼 에이 씨는? 그건 누구한테 말한 건데?”

  “아, 몰라요, 몰라.”

  나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고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세면대를 한 대 쳐서 깨부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고 거실로 갔다.

  아빠가 상패를 흔들며 나를 불러 앉혔다.

  “아빠 별명이 한때는 최면술사였던 거 알지? 수면장애가 있는 학생들이 일부러 아빠 수업을 신청했대. 적어도 아빠 수업시간에는 단잠에 빠질 수 있다고. 그랬던 아빠가 학생이 뽑은 최고의 교수가 됐으니, 얼마나 피 나는 노력을 했을지 짐작이 되지?”

  엄마가 흐뭇한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건 내가 알아주지요. 유머감각이라곤 없던 당신이 요즘은 거의 개그맨 수준으로 웃기잖아요. 그게 다 학생들 졸지 않게 하려고 절치부심, 갈고닦은 실력인걸요. 자기 일에 대한 열정과 노력, 정말 존경스러워요, 당신.”

  아빠가 입을 귀에 걸고는 엄마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기 일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라면 당신이 한 수 위라는 사실을 내가 왜 모르겠어요? 당신, ‘환자가 뽑은 최고의 의사’ 상을 거의 해마다 수상하고 있지 않아요?”

  엄마가 호호, 웃었다.

  “하긴. 이제 상 받기도 민망할 지경이에요. 내년부터는 아예 후보자 명단에서 빼라고 할까 봐요.”

  형이 사과 한 조각을 포크에 찍어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진짜로 상 받기 민망한 사람은 저라고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상이란 상은 휩쓸었잖아요. 오늘도 모의고사 1등상 받았죠, 겨울방학 때 참가했던 영어에세이 콘테스트에서 대상작으로 선정됐다고 시상식 참가하라는 연락 받았죠, 이젠 아주 지겨울 정도라구요.”

  정말이지 지겨운 사람은 바로 나란 사실! 나를 뺀 세 사람의 자랑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되는 자랑질, 자랑질.......

  와인 몇 잔에 불콰해진 엄마가 내 머리를 툭, 쳤다.

  “에이 씨, 왜 때려요?”

  “이 녀석이 또 에이 씨! 씨가 뭐냐, 씨가? 엄마는 대학 다닐 때 씨 학점이라는 건, 구경도 못 해봤다. 앞으로는 에이, 까지만 하든지 굳이 한 음절을 더 발음하고 싶으면 에이 뿔, 이라고 해라. 한 번만 더 씨, 씨, 하면, 용돈을 끊어버릴 거야.”

  “엄마가 방금 이유 없이 제 머리를 때렸잖아요!”

  “그게 때린 거니? 귀여워서 쓰다듬은 거지.”

  엄마가 이번에는 진짜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최고야, 우리 고, 삐쳤어? 삐칠 일이 뭐가 있어? 넌 누가 뭐래도 최고야. 최고가 될 사람이라고. 다만 그게 좀 천천히 이루어질 뿐이지. 대기만성, 알지? 힘내, 응? 엄마아빠가 다 최고인데 당연히 아들도 최고겠지, 최하겠어?”

  에이, 씨, 씨, 씨, 씨, 씨!

  용돈이 끊길까 봐,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욕을 삼켰다. ‘엄마아빠가 다 최고인데 당연히 아들도 최고겠지.’ 엄마아빠를 아는 어른들, 친척들이 나를 볼 때마다 으레 하는 말.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아빠, 엄마, 한 시간 지났으니까, 이제 제 방 가도 되죠?”

  “그래, 우리 장남. 아까운 시간 내줘서 고맙구나.”

  형을 따라 나도 일어났다. 아빠가 물었다.

  “고도 가니?”

  대꾸하지 않았다. 뻔히 보면서 묻긴 왜 묻느냐고요.

  “호호, 여보, 여보. 고도 가니, 이 말이 왜 이렇게 웃기지요? 고 이즈 고잉? 이즈 고 고잉? 고, 아 유 고잉, 투? 호호호, 호호호.”

  엄마가 아빠 등을 주먹으로 콩콩 때리며 웃어댔다. 아빠도 덩달아 웃었다.

  비웃는 거지? 흥, 이젠 대놓고 비웃는다 이거지?

  돌아서서 한바탕 쏘아붙이려는 참에, 엄마가 깊은 한숨을 쉬며 아빠한테 한탄하는 소리가 뒤통수를 찔렀다.

  “내가 뭘 먹고 쟬 낳았는지 모르겠어요.”

  아빠가 엄마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당신, 그때 한참 의사고시 준비하느라 골머리를 앓았잖아요. 그때부터 쟤가 공부에 질려버린 거 아닐까요?”

 

  수학 과외선생님이 임용고시 준비에 매진하겠다는 문자메시지만 달랑 남기고 잠적하는 바람에, 저녁나절 내내 도넛 가게에서 한결이와 노닥거렸다.

  한결이가 홍차 컵에 꽂은 빨대를 잘근잘근 씹다가 문득 말했다.

  “나도 내 이름이 싫어.”

  먹던 도넛을 꿀꺽 삼키고, 내가 물었다.

  “왜? 오, 한, 결, 예쁘기만 한데? 사운드도 좋고 이미지도 좋고.”

  “사운드? 이미지? 그런 건 좋지. 나도 인정해. 근데 말이야. 왜 이름 갖고 사람을 갈궈? 내 이름을 내가 지었냐고? 웃겨, 정말.”

  “내 말이....... 근데 한결이란 이름을 갖고 어떻게 갈궈?”

  한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한참 뜸을 들였다.

  “야, 최고.”

  “응?”

  “너도 내가 못 말리는 변덕쟁이라고 생각하니?”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예쁜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한결이 역시나 변덕이 죽 끓듯 하니까. 연예인에 대한 감정도 어제의 ‘완전 짱’에서 오늘의 ‘개뼉다구’로, 친구들도 아침의 ‘베스트프렌드’에서 저녁의 ‘사악한 계집애’로 요랬다조랬다 하니까.

  한결이 눈빛을 보니, 변덕쟁이라고 했다가는 뺨따귀를 얻어맞았을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니.”

  “정말이지?”

  한결이가 세모눈을 하고 나를 쏘아보았다. 오금이 저렸다.

  “그럼, 정말이지. 가끔씩 마음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하지만, 뭐, 그 정도는 누구나 다 그런 거잖아. 너는 그냥 네 감정에 충실한 거야.”

  “그치, 그치? 그런데 어른들은 내가 이름값 못 하고 변덕을 부린다면서 막 꾸중한다? 어른들, 정말 이상해. 좋아, 내가 좀 변덕을 부린다고 쳐. 그럼 그 부분만 가지고 꾸중을 해야지, 왜 한결같지 못하고 변덕 부린다고 두 배로 욕을 먹어야 하느냐고. 한결이란 이름을 내가 지었냐고오오오.”

  “내 말이 그 말이야.”

  이번에는 진심으로 한결이에게 공감했다. 한결이가 포크로 슈크림을 싹싹 긁어 휴지에 닦아내고는 도넛을 사등분했다.

  “먹어.”

  난, 슈크림이 젤 맛있는데. 슈크림 없으면 무슨 맛으로 저걸 먹어? 예쁜 아이들은 타인의 취향을 배려하지 않는다.

  “야, 최고. 우리, 이름 바꿀까?”

  “이름을 바꾸자고?”

  “그래. 울 엄마도 바꿨어, 이름.”

  와, 놀라운 사실이다. 한결이 엄마는 우리 엄마와 같은 병원, 같은 과에 근무하는 의사선생님이다. 엄마 진료실 옆방 명패에 붙어 있는, 한결이 엄마의 이름은 전혜리.

  “원래는 뭐였는데?”

  “득남. 얻을 득, 사내 남.”

  “대박이다!”

  “울 엄마가 넷째 딸이었대. 외할아버지가 아들, 아들, 노래를 부르다가 넷째 딸을 얻고서는 술을 엄청 드셨대. 그러고는 혼자 동사무소 가셔서 엄마 이름을 그따구로 신고하신 거지. 딥다 구리지? 내가 울 엄마래도 바꿨을 거야.”

  우리 부모님은 딸을 몹시 원했다고 했다. 만약 두 분이 내 이름을 ‘득녀’라고 지었다면? 최득녀! 이건 뭐, 최고보다 끔찍하잖아!

  “한결이 넌, 이름 바꾸면 뭘로 바꿀 생각인데?”

  한결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니카. 세례명이야. 어때? 모니카도 사운드 좋고 이미지 좋지 않니?”

  “괜찮네. 모니카 가지고 이름값 하라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나는 세례명도 없는데, 뭘로 바꾸지?”

  “민수 어때? 최민수!”

  “야, 오한결!”

  최민수는 싫고....... 최영수, 최정수, 최철수, 최진수, 최용수, 최경수, 최연수, 최기수, 최지수, 최윤수, 최남수, 최동수....... 어쨌든 누구도 이름값을 운운하지 않는, 무색무취한, 흔해빠진 이름이어야 해. 사실은....... 아메리카 원주민 식으로다, ‘고독한 늑대’나 ‘춤추는 백곰’이었으면 좋겠다.

 

  “뭐? 이름을 바꾸겠다고?”

  놀란 엄마가 화장실에 있던 아빠를 불렀다.

  “여보, 이리 좀 와 봐요. 우리 아들 최고가 이름을 바꾸겠대요.”

  아빠가 달려왔다. 아빠의 아랫입술에 하얀 치약 거품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동안 이름 때문에 겪었던 억울한 일들을 몇 가지 사례로 요약하여 차근차근 설명했다. 엄마가 양손 집게손가락으로 관자노리를 누르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이름으로 바꾸겠다는 거니?”

  나는 최대한 또박또박, 차분하게 내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엄마아빠한테도 선택의 기회를 드릴게요. 최철수, 최영수, 최정수, 최경수, 최지수 중에서 하나 골라 주세요. 철수든 영수든 경수든 이름값 하라고 난리치지는 않으니까, 저는 그중 어떤 거라도 상관없어요. 그리고요.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까요. 개명 절차가 어렵지는 않은데, 저 같은 미성년자는 부모 동의서를 지참해야 한대요. 동의해 주세요.”

  엄마가 아빠 입술의 치약 거품을 닦아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고야....... 생각할 시간을 다오. 하룻저녁에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구나.”

  “좋아요. 일주일 뒤에 말씀해 주세요. 하지만요.”

  나도 엄마처럼 깊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동의 안 해주시면 학교 관둘 거예요. 그리고 역, 설, 적, 으로다가 제 이름값을 해볼게요.”

  “이 녀석! 지금 부모한테 협박하는 거니?”

  아빠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나도 지지 않고 눈초리를 치켰다.

 

  일주일 뒤, 방 안에서 이제나저제나 눈치만 보고 있는데, 엄마가 불렀다.

  “최고! 이리 나와 보렴.”

  나는, 완전 하위권으로 떨어진 중간고사 성적표를 들고 나갔다. 시위용이었다. 일부러 아는 답도 틀리게 쓴 건 아니지만, 공부를 아예 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에이, 역설적으로 이름값을 하려면, 전교 꼴찌를 했어야 하는 건데.

  왜 진작 전교 꼴찌를 할 생각을 못 했는지, 살짝 후회가 되었다.

  거실 테이블에는 녹차 세 잔, 방울토마토 한 접시, 쿠키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찻잔 옆으로 성적표를 들이밀었다.

  “보세요. 저, 절대로 최고 아니죠? 원하신다면 다음번엔 최악의 성적표를 보여드릴게요.”

  아빠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머리통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눈빛이었다. 엄마가 아빠 허벅지를 꼬집고는 말머리를 꺼냈다.

  “네 이름을 왜 최고라고 지었냐면.......”

  “엄마랑 아빠가 최고니까 아들도 최고가 되라고 지었겠죠, 뭐. 그 얘기라면 그만하세요. 솔직히 지겹네요. 아주 많이 지겨워요.”

  아빠가 이번에는 이를 앙다물었다. 어깨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엄마가 아빠 팔뚝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말했다.

  “동의서, 써줄게. 써줄 테니까, 엄마 얘길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봐.”

  좀 더 뻗대고 싶었지만 참았다.

  “녹차, 마셔라. 마음이 좀 가라앉을 거다. 쿠키도 먹고. 여보, 당신도요.”

  엄마도 잔을 들어 녹차 한 모금을 마셨다.

  “지금은 최고인지 몰라도 그 시절에는, 엄마랑 아빠, 정말 힘들었단다. 어쩌면, 그래,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거야. 아빠는 교수 공채에 연속 열한 번째 낙방했고, 엄마는 도와주는 사람 없이 네 형을 낳고 키우느라 공부가 끝없이 늦어졌지. 엄마가 생물학과를 졸업한 뒤에 뒤늦게 다시 의대 들어간 거 알지? 나이가 많은 데다 아이 때문에 휴학을 밥 먹듯이 했으니 공부인들 쉬웠겠니? 공부도 너무 힘들고 경제적으로도 너무 힘들었지. 제일 힘든 건 엄마노릇이었어. 네 형, 아토피가 심했거든. 잠을 못 자고 밤새 울며 제 몸을 긁어대는 아이를 본다는 건......”

  엄마가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쉬었다.

  “미칠 것 같더라. 몸이 힘들고 마음이 괴로우니까 아빠한테 온갖 신경질을 다 부렸지. 결국 이혼하기로 합의하고 강릉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더랬어.”

  아빠가 씩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그 여행에서 네가 생긴 거야, 이놈아.”

  엄마도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복덩이였어. 아빠가 열두 번째 지원한 대학에 척, 붙은 거야. 엄마도 의사고시에 합격하고. 아빠 직장 따라서 이곳으로 이사 온 다음에는 모든 게 술술 풀리더라. 이곳, 공기 좋고 물 좋잖아? 형 아토피가 나날이 좋아졌지. 나도 여기 병원에 취직하고....... 그럴 때 네가 태어났으니 당연히 최고지, 어떻게 최고가 아니겠어?”

  아빠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의 사랑으로 네가 생겼으니까, 복덩이 우리 아들한테 최고의 사랑을 주고 싶었으니까, 결정적으로 아빠가 최가니까....... 이게 우리 최고가 최고인 이유다.”

 

  한결이한테 문자가 왔다.

  나, 막상 모니카로 이름 바꾸려니까 한결이란 이름이 아까운 거 있지. 그냥 블로그 이름을 모니카의 방으로 바꿨어. 이메일 아이디도 모니카로 하고.

  뭐야. 같이 이름 바꾸러 가자고 철석같이 약속해놓고선. 변덕쟁이 같으니라고.

  한결이가 물러서는 바람에 나도 김이 빠졌다. 뭐, 어차피 동의서는 받아놓았으니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 사실이지 나도, 최고를 버리고 최철수로 산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영수, 정수, 경수, 지수를 놔두고 우리 부모님이 철수를 찜한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안철수 같은 사람이 되라는 기대를 담은 거다. 이제 철수는 옛날처럼 흔하고 색깔 없는 이름이 아니다. 영수, 정수, 경수, 지수인들 별다를까. 그냥 최고로 살아버려? 남이 원하는 최고 따위 무시하고 내가 나를 최고로 사랑해주면 그게 바로 ‘이름값’ 하는 거 아닐까?

  야... 너 지금 내 문자 씹는 거야...

  예쁜 아이들은 이렇게 인내심이 없다. 하지만 어쩌랴. 한결이의 세모눈은, 으악, 떠올리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걸.

  ^^ 씹는 거 아냐. 나도 이메일 아이디부터 바꿀래. 론리울프, 어때? 멋지지?

 

 

 

 

작가소개


박정애(소설가)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에서 신문학을,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했다. 1998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해, 2001년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지금은 강원대학교 스토리텔링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동화 『친구가 필요해』, 『사과는 맛있어』, 『똥 땅 나라에서 온 친구들』, 청소년 소설 『환절기』, 『다섯 장의 짧은 다이어리』, 소설 『에덴의 서쪽』, 『물의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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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번의 수험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 태섭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힐끗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삑삑삑 불어대고 있는 대기자들의 연주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태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바람이 달려들었다. 태섭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대금 연주자들에게 목 디스크는 숙명이라지 않는가. 태섭이 고개를 좌우로 젖히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태섭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다. 태섭은 습관처럼 입술의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취구가 닿는 아랫입술 언저리는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누구든 그 부위에 거무죽죽한 흔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대금 연주자일 것이다. 태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어! 해가 기울면서 날은 더욱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내릴 기색은 없었다. 이제 겨울은 곧 시작될 것이다. 수시 모집은 대학 입시의 첫머리일 뿐 영광과 회한의 경계를 가를 때까지 입시생들의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태섭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자와 콜이 쏟아졌다. ‘물론 시험은 잘 봤겠지? 네가 떨어지면 붙을 놈 누가 있냐?’ ‘빨랑 내려오기나 해. 얼굴 잊어버리겠다.’ ‘오늘 수시 봤던 놈들까지 다 올 거야.’ ‘끝나면 곧장 전화해. 안 하면 죽어!’ 태섭은 휴대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태섭의 곁을 스쳐갔다. 이곳은 2년 전 캠퍼스 투어로 와 본 이후 두 번째다. 캠퍼스 투어는 태섭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지펴 놓았다. 와 봐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목표물을 손안에 얻은 사람만의 여유랄까. 나도 저들처럼 심상한 표정으로 이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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