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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기린 큐레이션〉 2021년 7월(문학 동인 - 시)

  • 작성일 2021-07-01
  • 조회수 1,294

[느린 기린 큐레이션]

 

 

〈느린 기린 큐레이션〉 2021년 7월(문학 동인 - 시)

 

 

조시현, 조온윤

 

 

 

 

 

    안녕하세요, 7월의 〈느린 기린 큐레이션〉입니다! 지난 6월의 소설가 동인 편에 이어서, 이번 7월에는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동인을 조명해 보았어요. 저희가 두 번째로 만나 본 동인은 이름처럼 문학으로 세상의 가려진 면면들을 밝게 켜 가는 시인과 평론가의 문학 동인 ‘켬’입니다. 켬 동인으로는 지난해에 연달아 첫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던 이서하, 이소연, 주민현 시인, 그리고 남다른 기억력과 섬세함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전영규 문학평론가가 함께 활동하고 있어요. 에코페미니즘과 같이 비슷한 관심사를 주제로 하는 ‘쓰레기 낭독회’, 문학주간 작가스테이지 ‘지구가 멸망해도 우린 명랑할 거야’ 등등 여러 문학행사를 기획하고 열기도 했죠. 마침 생일을 맞은 켬 동인이 있어 더욱더 기쁜 날이기도 했던 유월의 어느 날에 네 분 작가님을 만나 그동안 궁금했던 이야길 나눠 보았습니다.

 

문학이라는 스위치로 불을 켜요, 문학 동인 ‘켬’

 

켬 동인의 로고.


 

Q. 켬 동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바쁘신 와중에 네 분 모두 인터뷰에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 장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동인을 취재하겠다고 하니 주변에서도 켬을 가장 먼저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먼저 돌아가면서 한 분씩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소개와 함께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간단하게 근황을 얘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주민현(이하 민현) : 저는 켬의 ‘러블리’ 시 쓰는 주민현이에요. 작년에 첫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를 출간하였고, 요즘은 회사 다니고 시 쓰며 집 근처 ‘마을회관’이라는 독립 서점에서 한연희 시인과 이런저런 작은 행사나 모임을 기획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답니다.
 
이서하(이하 서하) : 안녕하세요, 저는 켬의 ‘깜찍이’ 시 쓰는 이서하입니다. 저도 작년에 첫 시집 『진짜 같은 마음』을 출간했고요. 소연 언니와 민현 언니의 첫 시집과 나란히 나오게 되어서 더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예술은 전문적이지만 경제 활동으로 봤을 때는 그 전문성이 가려지는 것 같아요. 그런 고민을 한참 하던 때에 예술교육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3년차가 되었습니다.
 
이소연(이하 소연) : 네, 켬의 ‘귀요미’ 시 쓰는 이소연이라고 합니다. 저는 요즘 활동 반경이 도봉구와 노원구에 한정되어 있어요. 그래서 켬이 정말 사랑하는 동인인데도 불구하고 요즘엔 김은지 시인과 어마어마하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같은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기도 했고요. 작년에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라는 시집을 냈어요. 그렇게 시집이 나오고 나니까 상주 작가로 활동할 수 있게 돼서 고정적으로 수입이 생겨서 여러 가지 기획을 하고 있어요. ‘발굴문학’이라는 기획도 하고, ‘타로문학’이라는 기획도 하고 있는데, 발굴문학은 진짜 블로그나 노트에 끄적인 글들을 그냥 가져오면 문학이 되는 지점들을 찾아 주는 프로그램이고, 타로문학은 타로를 보러 왔다가 시를 꼭 끌어안고 돌아가게 되는 프로그램이에요. (제가 상주 작가로 있는) 책방 〈책인감〉의 SNS나 전화로 예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하고 있고, 올해 여름에는 농부와 함께 쓴 에세이가 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전영규(이하 영규) : 안녕하세요. 저는 켬의 ‘똑또기’ 평론을 쓰는 전영규입니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이후 지금까지 동인들과 함께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의 근황을 말해 보자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요. 평론 원고를 쓰며, 읽어야 할 것들을 읽고,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기약 없는 논문 준비만 열심히 하고 있고 (웃음) 일주일에 한두 번 있는 중등 논술 수업을 나가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반백수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어요.
 
민현 : 그리고 (전영규 평론가가) 최근에 머리를 잘랐다는 걸 말씀해 주세요. 너무 예쁘다.
 
영규 : 저는 단발머리도 답답한 터라 항상 짧게 깎는 습성이 있어서요.

 

켬 동인으로 활동 중인 전영규 평론가, 주민현, 이서하, 이소연 시인(왼쪽부터).


 

Q. 매우 잘 어울리세요. 논문을 준비하고 계시면 무척 바쁘실 거 같은데 잘 마무리하시길 빌어요. 네 분 모두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제 동인에 관련된 질문들을 몇 가지 드리고 싶은데요, 굉장히 단순한 질문이긴 하지만, ‘켬’이라는 이름은 무얼 켠다는 의미일까요? 이름을 지은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소연 : 우리가 동인을 만들고 싶었는데, 서로가 마음에 들어서 만드는 데는 합의가 됐어요. 서로에게 첫눈에 반했거든요. 그래서 동인 이름을 뭐로 하지 고민했는데, 그냥 제가 갑자기 ‘켬’ 하자고 했더니 애들이 반대를 하나도 안 하고 좋다고 했어요. 일단은 끄는 것보다 켜는 게 나으니까 단순하게 ‘켬’이라고 했는데, 뭔가 꺼진다는 의미로 부정적인 것보다는 어둠이 있더라도 뭔가를 켜면 빛이 나니까요. 문학에서건 세상에서건 뭔가를 켜보자 하는 의미인데, 다른 사람들이 켬에 대해서 또 다른 의미들을 많이 발견해 주시더라고요. 뭔가를 긁어서 소리를 내는 것들, 이를테면 바이올린도 켠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톱밥 같은 것도 켠다고 하고요. 이런 새로운 의미들을 모아 보는 것도 되게 재미있는 것 같아요.

 

Q. 네 분 모두 인연이 깊었던 것 같아요. 이소연, 이서하, 주민현 시인님은 모두 한국경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는 공통점이 있고, 거기에 전영규 평론가님도 주민현 시인님과 같은 해에 신춘문예 수상을 하셨고요. 이 밖에도 네 분이 동인으로 모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A. 민현 : 결정적인 계기가 따로 있지는 않았어요. 처음에는 저와 이소연, 이서하 시인 이렇게 세 명이었다가, 합평을 하기에는 인원이 조금 부족한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차에 소연 언니가 같은 대학교에 다니던 영규 언니를 데리고 왔어요. 그렇게 딱 네 명이 되니까 뭔가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상하게 두 명도 아니고 세 명도 아니고 딱 네 명일 때 안정감, 네 명 모두 시인이 아니고 한 명은 다른 장르인 게 모두에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느낌이 좋았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그전에 합평만 할 때는 그냥 서로의 시가 너무 좋다는 정도였는데, 같이 낭독회를 준비하면서 동인으로 더 끈끈하게 묶이는 기분이 들었어요.
 
서하 : 다들 헐렁한 사람들이라서 첫 만남 이후 지금까지 잘 엮여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만나는 데 이유가 정해져 있지 않았고, 이유 없이 만나는 것이 오히려 편한 사람들이었어요.
 
영규 : 저는 평론가치고는 평론 쓰는 친구들이 많이 없어요. 그게 이상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평론가는 평론가들끼리 있는 것보다는 작가들과 함께 있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해요. 작가들이랑 친해지면 안 보이던 게 보이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가 미술관에 같이 가면 가끔 어떤 그림을 보고 떠올리게 되는 동인들의 시가 있단 말이에요. 시인들은 시를 보고 시를 쓰지만, 저는 그림을 통해 시인들의 시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이 친구들은 안 보이지만 제게는 ‘아, 이 지점이 시인들의 시 쓰기 지점이구나’ 라는 것들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 걸 발견할 때가 되게 재미있고요. 저는 또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이 친구들은 한국경제신문으로 당선됐고 저는 조선일보에서 당선됐는데, 조선일보는 그런 당선자 간에 모임이 없거든요. 한국경제 신춘문예 당선자 모임도 그렇고 켬이 이렇게 모이게 된 데는 소연 언니의 공이 큰 거 같아요.
 
서하 : 소연 언니가 사람을 잘 끌어가는 그런 강한 힘이 있는 게, 소소하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런 거 같아요. 시상식 때도 우리가 상 받으러 가는 곳인데 기자들한테 고생했다고 상장 만들어 주고, 그렇게 재미있게 관계를 만들어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관계에 대해서 끝까지 또 책임지고요.
 
소연 : 한국경제신문의 문우회장입니다.
 
민현 : 오늘 이소연 시인 특집인가요?
 
서하 : 아, 소연 언니 생일이에요, 오늘!
 
소연 : 역시, 생일날에 인터뷰하니까 내 칭찬이…….

 

Q. 오늘(인터뷰 진행일)이 생일이었군요. 이소연 시인님, 생일 정말 축하드려요! 오늘 하루 내내 칭찬도, 축하도 많이 받으면서 즐거운 생일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켬 동인 이야기로 돌아가서, 시인 세 분과 평론가 한 분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아무래도 시인 동인으로 보는 시선도 많을 것 같은데, 어쨌든 네 분의 조합이 되게 적절한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까 처음에 합평 모임으로 시작하게 됐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계신 건가요?

A. 민현 : 서로의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합평을 정말 진지하게 정기적으로 했던 거 같아요. 아무래도 책이 나오고 나서는 서로의 색깔이 딱 분명해지고 나니까, 다들 시에 대해서 뭔가를 지적하기보다는 좋았던 부분 위주로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아요.
 
소연 : 옛날에 합평할 때는 어떤 작품 안에 표현적인 문제라든가 겉으로 드러난 기교나 효과, 완성도에 집중했다면, 시집을 내고 나서는 서로가 생각하는 방향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 합평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제는 (합평 위주보다는) 우리가 의견이 일치하고 같은 문제의식이 발동될 때 낭독회나 행사로 뭉치게 되는 것 같아요.
 
서하 : 아, 역시 정리를 잘해.
 
소연 : 나 뭐만 하면 칭찬 들으니까 너무 좋네.
 
민현 : 자세가 거만해졌어.
 
서하 : 우리 오늘 부담스러울 정도로 칭찬해 주자.
 
소연 : 그러지 마.

 

2017년 켬 동인이 참여한 ‘물감과 타이프’ 낭독회.


 

Q. 문제의식이나 관심사가 일치할 때 뭉치게 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그렇다면, 요즈음 ‘켬’ 동인분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소소한 취미도 좋으니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민현 : 저는 사실 최근 관심사가 무거운 주제인데, 자본주의에 꽂혀 있어요. 요즘 집값도 너무 많이 올랐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노동의 가치가 너무 하락해 버린 것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인간의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우리가 지금 다 일을 하고 있지만, 나이가 더 들어서도 계속 이런 노동이나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사회는 과연 그런 사회일까? 요즘 그런 생각을 되게 많이 하고, 그게 저의 가장 큰 관심사예요. 소소한 취미는, 저는 요즘 색칠놀이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잘 못 그리기는 하지만 위안이 많이 되더라고요. 최근에는 또 지점토로 오브제를 만드는 영상을 봐서 조만간 저도 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자전거도 드문드문 타고 있고, 코로나가 어서 풀려서 수영장도 가고 싶어요.
 
소연 : 저는 요즘 책방에서 일하다 보니까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늘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몰두해 있어요. 책방에서 기획한 타로문학으로 타로점을 통해 시를 접하게 하니까 정말 놀라운 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만 오는 게 아니라 그냥 타로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제가 타로를 하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저는 시집을 한 권도 안 사봤어요’, ‘저는 시를 읽는 사람이 아니에요’, ‘시를 한 번도 읽어 본 적 없고 제 돈 주고 시집을 사본 적이 없어요’, 이런 말들이었어요. 그런 분들에게 시 한 편을 읽어 줬을 때 그것을 마음속에 새기고 ‘시 제목이 뭐였죠?’ 하고 다시 물어보고 그 시집을 사서 나갈 때가 있어요. 그러면 그게 처음으로 산 시집이 되는 거잖아요. 그런 모습을 볼 때 어떤 계기, 그러니까 문학을 전혀 읽지 않고 거리감을 느끼며 살아오던 사람에게 그 거리를 좁히고 문학을 접하는 계기만 있다면 그걸 (계속) 붙잡을 수 있는 길들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제게 관심 없는 세계가 있어요. 그게 바둑의 세계예요. 이세돌 씨가 아무리 뭘 해도 관심이 없어요. 근데 누군가가 ‘이렇게 재밌는 바둑을 왜 안 해?’ 하면서 바둑 좀 해보라고 가르치는 꼴이에요. 문학을 읽지 않는 사람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문학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을 늘리게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문학을 아예 몰라서 안 읽는 거 말고, 문학이 재밌다는 걸 조금이라도 알면 사람들이 한두 번은 더 읽지 않을까? 요즘 그런 생각에 혈안이 되어 있어요.
 
서하 : 저는 무관한 것과 시대착오적인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무관하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 ‘개똥 정말 싫다’는 낙서, 취미, 독서,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가상 세계란 뭘까……. 제가 1월에 시 원고를 마감하고 나서, 그 이후에 계속 쓰려고 했던 시를 완성을 못 하고 있었어요. 어딘가에서 시가 딱 막혔는데, 강아지랑 산책하다가 ‘개똥 정말 싫다’라고 어떤 담벼락에 써 있는 거예요. 근데 글씨가 정말 정갈했어요. 그래서 아 진짜 대단하다, 하고 지나갔는데 그다음 골목에 ‘개똥 정말 싫다’ 그게 또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한 세 군데 골목길에서 그 낙서를 봤어요. 저도 개를 데리고 가고 있으니까, 순간 그걸 보면서 그 낙서로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저한테 어떻게 왔냐면, (낙서를 쓴 사람이) 무관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일에서 무관하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개똥 정말 싫다’라고 남의 집 담벼락에 적을 수 있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때부터 ‘무관하다는 게 뭐지?’, ‘무관할 수 있다는 게 뭐지?’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을 또 유해한 존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우리는 다 어느 정도의 무관함으로 살아갈 수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 사람의 어떤 일상을 헤아리고 싶었고, 나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게 한동안의 저의 관심사였고 키워드가 됐어요. 그렇게 두 달 만에 쓴 시가 웹진 《믿미》에 「가장 위험한 한때」라는 제목으로 올라갈 텐데 그걸 한번 읽어 주시면 좋겠고요. 또 예술교육을 하다 보니까 작년이랑 키워드가 달라진 게, 작년 같은 경우에는 예술교육이 수업 위주였어요. 예술과 교육을 융합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게 키워드였는데, 코로나를 지나오면서 키워드가 다 달라진 거예요. 이제는 미디어 시대인 것을 인정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하고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 생태에 대한 이야기가 반드시 나와요. 시대가 변하고 재난이 오니까 사람들의 키워드와 예술을 생각할 때의 관심사가 모두 같아지는 거에 대해 생각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미디어 리터러시에 관해서도 공부를 많이 하고 있어요.
 
영규 : 저는 SF페미니즘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트랜스젠더를 여성으로 봐야 할까, 남성으로 봐야 할까’라는 것처럼, 이분법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혹은 생물학적 성별 같은 것들 말이에요. 제가 김혜순 시인의 산문집 『여자짐승아시아하기』에서 이름을 가지고 온 「퀴어사이보그아시아하기」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있어요. 저는 최근에 본 이불 작가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어요. 그분이 만든 조각상 중에 얼굴이 없는 여성 조각상이 있어요. 저 조각상에 어떤 머리가 붙어야 할지 상상해 보게 되더라구요. 사이보그와 관련해서 저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여성과 남성을 넘어서서 과연 인간이라는 종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어요. 그리고 되게 생뚱맞은 얘기지만, 저의 소소한 취미는 제철음식을 해먹는 거예요.

 

Q. 저도 사이보그와 트랜스휴먼, 포스트휴먼에 관심이 많아요. 전영규 평론가님께서는 혹시 평론집 출간 계획이 있으신가요? 나온다면 꼭 찾아서 읽어 보고 싶어요.

A. 영규 : 저는 평론집을 지금 낸다고 해도 이른 편이라고 봐요. 평론집이 없다고 해서 크게 조급한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누가 제 글을 찾아본다는 얘기를 듣고 그때부터 평론집을 묶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들고 있어요.
 
서하 : 진짜 영규 언니 평론집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

 

Q. 출간일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작년에는 이소연, 주민현, 이서하 시인님의 첫 시집이 연달아 발간되면서 켬에게 무척 뜻 깊은 한 해가 되었을 것 같아요. 출간된 지 일 년이 지난 지금 첫 책을 돌이켜보았을 때 떠오르는 소회가 있을까요?

A. 소연 : 저는 사실은 출판사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다가 더는 기다리거나 늦출 수가 없어서 먼저 제안을 해주신 곳에서 시집을 내게 됐는데, 생각보다 시집을 정말 잘 만들어 주셔서 되게 감사하는 마음이 지금에 와서 들더라고요. 그때는 (출판 과정을) 잘 모르니까 출판사에 크게 감사를 드리는 이런 마음이 아니었는데, 1년이 지나고 보니까 시집 출판을 제안해 주신 분께 정말 고맙더라고요. 작년에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가 알라딘 한국 문학 독자투표 1위도 했잖아요. 그게 너무 신기하고 고마웠어요. 제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읽혔다는 게 행복해요. 그리고 제가 자기 PR을 되게 잘해요. 책방에서도 제 책이 제일 잘 팔려요. 제가 제 책만 팔거든요. 되게 뻔뻔한데 저는 제가 뻔뻔한 게 마음에 들어요. 왜냐하면 캐릭터를 한번 그렇게 잡으니까 내 책을 내가 팔아도 안 부끄러워요. 쑥스러워하는 캐릭터가 잡히면 내 책을 내가 팔기 힘들잖아요. 근데 이미 ‘이소연은 원래 저래’ 이렇게 되니까 너무 편안해요.
 
민현 : 저도 소연 언니랑 조금 비슷한데,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주변에 책도 드려야 하고 행사가 잡히면 행사도 해야 하고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제 책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들여다보거나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저도 한 1년이 지나고 보니까 오히려 지금 더 애정이 가고 그때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를 이제야 조금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책이 나왔을 당시보다 지금 좀 시간이 흐르니까 지금 오히려 찾아 주시는 분들이 있고 읽어 주시는 분들이 있고 그게 저는 너무 감사하고 좋아요. 저도 당시에는 언니처럼 출판사나 관계자분들에 대해서 그렇게 깊이 생각을 못 했어요. 이렇게 많이 출간되는 책들 속에서 누가 읽어 줄까 하는 초조한 감정이 더 컸는데, 지금은 한 권이라도 누군가 읽어 주시고 알아봐 주시는 게 정말 고마워요. 출판사에도 감사하고요.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더 큰 감동으로 오는 거 같아요.
 
서하 : 근데 진짜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어요. 제가 작년 5월에 책이 나왔는데, 작년보다 올해 5월 날씨가 너무 시원해서 되게 놀랐어요. 그런 날씨에 대한 생각이 요즘 많이 드는 거 같아요. 저는 책을 묶으면서 재미있었는데, 책을 만들 때 편집자님이 계시고 디자인을 해주시는 분도 계시고, 제본해 주는 분들도 계시고, 또 내가 모르는 너무 많은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분들이 이 책을 다 만들어 줬다고 생각해서 저는 제 책에 그렇게 큰 뭔가가 없는 거 같아요. 솔직히 제 시의 제목도 까먹어요. 문장도 좀 헷갈리고요. 왜냐하면 책을 엮을 때 너무 많이 보고, 낭독회를 너무 많이 해서 그 이후로 아예 제 책을 안 들여다봤거든요. 그래서 많이 까먹었죠. 이제 열심히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고요. 첫 책을 낼 때 과분할 만큼 축하를 많이 받았던 거 같고, 축하받느라 피곤했던 것 이상으로 행복했어요.

 

지난해 잇따라 발간된 켬 동인 시인들의 시집. 왼쪽부터 이소연 시인의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이서하 시인의 『진짜 같은 마음』, 주민현 시인의 『킬트, 그리고 퀼트』.


 

Q. 감사합니다. 세 분의 두 번째 시집도 기다릴게요. 얼마 전에는 웹진 《아는사람》에서 전영규 평론가님의 에세이를 감명 깊게 읽었는데요. 과거의 아픈 상처와, 그것을 감싸 주었던 위로가 읽는 내내 떠올라서 무척 뭉클한 기분이었어요. 에세이의 작가 소개에서 “내가 애정하는 것만큼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게 문득 기억납니다. 혹시 그렇다면 세 분 시인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기억하실까요?

A. 영규 : 당연히 기억나죠. 제가 특정 상황에 대한 연상 기억을 잘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우연히 어떤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그 음악이 예전에 봤던 어떤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나온 것을 기억한다든지 하는, 쓸데없이 디테일한 기억을 잘해요. 동인을 다 함께 본 날은 2017년 11월 초였어요. 추운 날로 기억해요. 그때 서하네 집 근처에서 저녁으로 닭갈비를 먹었어요. 즐거웠던 시간이었어요. 그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서하가 없었어요. 당시 서하는 충주에 있는 창작촌에 있었거든요. 2017년 8월 말이었고, 경의선 숲길에서 304 낭독회를 하는 자리였어요. 그날 저와 민현이는 낭독자였고, 소연 언니는 낭독회 일꾼이었는데, 낭독회가 끝나고 저녁을 먹는데 옆에 앉았던 민현이가 왼손잡이로 밥을 먹던 것도 기억해요! (이 쓸데없이 디테일한 기억!) 왜냐하면 왼손을 쓰는 친구들은 오른손잡이 오른편에 앉으면 불편하거든요. 앞으로도 우리 동인들의 이런 소소한 장면들을 계속 기억하고자 해요.
 
소연 : 너 왼손잡이였니? 나 아직도 몰랐네. 오늘 처음 알았어.
 
영규 : 언니는 민현이한테 만날 얘기하더라. 너 왼손잡이였냐고.
 
서하 : 얘기하는 거까지 기억하고, 정말 대단하다.
 
소연 : 내가 사랑만 많아. 사랑이 많은 이유가 사랑을 준 걸 까먹기 때문에.
 
민현 : 다음에 물어볼 거야.

 

Q. 그렇다면 서로의 첫인상은 어땠는지, 처음과 변한 게 있는지 궁금해요.

A. 민현 : 서로의 첫인상은, 처음에 영규 언니가 뭔가 좀 무서웠어요. 약간 말이 없어서 되게 무서웠는데, 알면 알수록 너무 따뜻하고 ‘뒷정’이 많아요. 소연 언니 같은 경우는 앞에서 이렇게 사랑을 퍼붓는데. 영규 언니 같은 경우는 청을 만들어 와서 나눠주고, 루테인 같은 영양제도 자기 것만 사도 되는데 꼭 세 개를 더 사서 나눠줘요. 오늘도 (우리 나눠주려고) 사왔어요. 이렇게 소소하게 잘 챙겨 줘요. 아무튼, 그래서 영규 언니는 처음에는 약간 무뚝뚝해 보였지만 알면 알수록 되게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소연 언니 첫인상은 신춘문예 시상식 뒤풀이에서 처음 만났는데, 언니가 그때 분홍색 털 달린 옷을 입고 왔는데 성격이 너무 활발한 거예요. 처음 봤는데 막 반말로 시작하고요.
 
소연 : 아, 나 반말밖에 못 해. 진짜 미치겠어. 반말밖에 안 나와서.
 
민현 : 그래서 첫인상은 되게 나랑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저는 약간 숫기가 없거든요. ‘아, 이 언니 너무 활발하고 부담스럽다.’ 첫인상은 이랬는데 알면 알수록 너무 따뜻하고 유쾌했어요. 서하는 제가 원래 팬이었어요. 그래서 소연 언니가 동인 하자고 했을 때 서하가 있어서 무조건 한다고 했어요.
 
서하 : 언니들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영규 언니는 혼자 있을 때 우리 생각을 되게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소연 언니는 같이 있을 때 집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민현 언니는 어떤 사람이냐면, 항상 안부를 물어봐요. 만나면 항상 ‘서하야, 잘 지냈어? 뭐 하고 지냈어?’ 이렇게 안부로 시작을 해요.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많이 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데 민현 언니는 항상 그렇게 상대방 얘기로 시작을 해요. 그리고 제가 좀 힘들 때가 있었는데, 그때 얘기를 하다가 눈물이 왈칵 났어요. 그때 민현 언니가 앞에서 같이 울어 주고, 영규 언니는 표정은 변하지 않지만 정말 조용히 눈물이 고여 있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소연 : 민현이는 혀가 원래 이렇게 짧지 않았는데 혀가 점점 짧아지고 있어요. 민현이한테 너무 놀란 거는, 서하가 뭘 하든 항상 ‘우리 떠하, 그래떠?’ 이렇게 받아 줘요.
 
서하 : ‘웅, 마자아아.’
 
소연 : 그 정도로 서하를 이뻐해요. 민현이는 우리 중 누구라도 무슨 말을 하면 다 받아 주는 스타일이에요. 그리고 영규는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간혹 뭔가 ‘이건 이렇다’ 말해 주면 바로 수긍하게 돼요. 왜냐하면 말을 잘 안 하니까요.
 
영규 : 말을 잘 안 하는데, 아니라는 말은 많이 해.
 
소연 : 그래서 한번 말하면 수긍을 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저는 말을 많이 하니까, 제가 말하면 거의 한 절반은 그냥 흘려들어요. 그리고 서하는 문제의 핵심을 잘 간파해서 소름 돋게 하는 게 있어요. 제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잘 짚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면이 있는 거 같아요.
 
서하 : 나 되게 진지하고 되게 우울한 사람이었어. 우울한 면이 되게 강하고 그 우울을 그대로 내버려뒀는데 이제는 다 그냥 즐겨버리는 사람이 되었어요. 근데 그게 소연 언니의 영향이 큰 게, 언니랑 있으니까 되게 유쾌하고 좋은 거예요. 진짜 소연 언니로 인해서 제 성향이 되게 많이 변했어요.
 
민현 : 맞아. 처음에 소연 언니가 서하에 대해 말하기로, 서하가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당선 소감을 말하러 올라가서는 아무 말도 안 했대요.
 
서하 : 진짜 당선 소감 얘기를 못 했거든요. 제가 원래 말 한마디 하는 거에 걱정을 되게 많이 하는 사람인데, 이제는 그런 걱정은 시 쓸 때만 하려고 해요.

 

Q. 방금 나온 대화 중에 마치 혀가 짧은 듯한, 켬 동인만의 말버릇(일명 ‘켬체’)이 굉장히 중독적이어서 어느새 스며들 듯이 사용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기도 했는데요. 켬 여러분이 그렇게 이야기 나누시는 걸 보면 괜히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A. 민현 : 메신저에서는 제가 그런 말투를 제일 많이 쓰지 않나 싶어요. 편집자로 일하고 있어서 메신저에서는 일부러 문법을 파괴하는 식인데요. ‘꺄루루룽 호로로로 던말 더오 도소간 가는 중(꺅! 헉헉! 정말 더워. 도서관 가는 중.)’ 이런 식으로 일부러 오타를 내요.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들은 제가 뭘 잘못 먹었나 하더라고요.
 
영규 : 저는 여기서 유일하게 줄임말을 안 써요. 제가 줄임말을 잘 모르는 경향도 있구요. 저까지 그런 말을 쓰면 우리 켬이 중력을 잃고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것 같아요. 제 역할이 있다면, 저는 우리 동인 안에서 유일하게 시를 안 쓴다는 차별점이에요. (웃음)

 

2020년 문학주간 작가스테이지에서 켬 동인이 기획한 문학행사 ‘지구가 멸망해도 우린 명랑할 거야’ 포스터.


 

문학행사 ‘지구가 멸망해도 우린 명랑할 거야’를 진행 중인 켬 동인. 기후 변화와 지구 멸망을 주제로 켬 동인이 쓴 시와 평론을 읽으며, 기후 변화에 대한 경각과 함께 이를 명랑하게 돌파해 보고자 기획됐다.


 

Q. 동인 안에서의 역할과 캐릭터가 명확해서 서로 더 잘 맞는다는 느낌이에요. 켬 동인분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고 싶은데요. 서로의 시와 글에서 더 많은 독자에게 가닿았으면 하는, 혹은 가장 아끼는 작품이나 구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이 없겠지만 그중에서 한 편을 꼽아 본다면, 그 이유와 함께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영규 : 저는 소연 언니의 시 중에서는 「테이블」이 좋더라구요. “내가 만난 호수는 모든 말이 선명해서 좋다 / 후회하는 싸움들도 좋다 // 나는 오로지 팔꿈치를 적시려고 당신을 불러와 시를 쓴다.”라는 구절이 주는 느낌이 참 좋아요. 민현이 시 중에서는 시집 제목이 되기도 한 「킬트, 그리고 퀼트」 시 중에서 “우리의 성이 같아지는 건 아니지만 / 이 거리에서 우리는 모호하게 기워져 있지 / 깊다, 라는 것은 깊다는 것과 별 관계가 없지”라는 구절을 좋아해요. 그리고 서하 시 중에서는 「스테이플러」를 좋아해요. “역사에도 가정이 있다면 / 나의 말은 곧 네게로 향할 것이고 네 말에 업히는 이것은 사랑인가 사랑의 폭력인가.”라는 구절을 좋아해요.
 
민현 : 저는 소연 언니의 시 중에서 두 개의 시가 교차해서 읽는 방식의 「폐허라는 미래」를 좋아하고요. 그 시에서 “안젤리카는 조심조심 걸었다”라는 문장이 이상하게 좋아요. 서하 시 중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에 대한」에서 “그가 아끼던 원목 테이블은 거의 사랑 받았다 / 정확히는 그가 키우던 나무로 만든 테이블이었기 때문에 그 사랑은 그를 괴롭게 했다”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아요. 영규 언니의 글 중에는 ‘쓰레기 낭독회’ 때 언니가 낭독했던 할머니에 관한 글이 마음에 오래 남아요. 제 시 중에는 《AnA》 앤솔로지에 발표했던 「전구의 비밀」이 켬을 생각하며 쓴 거라 마음에 남아요.
 
서하 : 학생들과 함께 읽을 시 자료를 준비하면서 다시 민현 언니의 시집을 읽게 되었는데요. 시집에 수록된 「오늘 우리의 식탁이 멈춘다면」 다시 읽어도 좋은 거예요.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 사라진다면 맨발로 길을 걸어가는 슬픔”이라는 문장이 이 시에서 압도적으로 좋았어요. 우리는 사물에 대해서 그것의 유용에 따라 사물을 찾지만, 사물이 있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노동이 있다는 것을 항상 잊잖아요. 영규 언니의 글에서는 「기억이 나다」가 좋았는데요. 여기서 이런 문장이 있어요. “과거의 기억은 복병과도 같다. 나에게 필요한 만큼 행복해지는 방법이란 과거의 기억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저는 이 문장이 좋지 않은 기억이 어떻게 복병처럼 한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그 기억을 마주하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드는 건지, 그 힘든 것을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초연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어요. 그 힘으로 영규 언니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소연 언니의 시 「고장 난 사람과 의자」에는 이런 구절이 나와요. “우리는 의자를 두고 다니지만 / 세상의 모든 의자는 우리를 들고 다녔지” 저는 이 한 구절을 본 이후로 의자에 앉으려 할 때 문득 생각이 나요. 이 구절이 인간 중심 서사에 익숙해진 채 살아가던 자신에게 인간의 시선이 아닌 사물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러한 지점이 탈인간화-탈경계-포스트휴머니즘으로 더 많이 확장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연 : 서하가 의자 앉을 때마다 제 시의 한 구절이 생각이 난다니, 서하가 의자에 더 많이 앉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서하의 시 중에 「스테이플러」를 정말 좋아했는데 영규가 얘기했으니까 그럼 저는 「정크시티」를 사랑합니다. 바로 저와 지하철 타고 가다가 제가 읽은 박세미 시인의 「알비노」라는 시를 보여줬던 이야기가 시가 되어서 저에게 자기 효용감을 높여 줬거든요. 그중에서도 “그래, 마음은 기억을 바꿀 수 있다”는 구절은 오래도록 곱씹게 해요. 마음으로 기억을 바꾸고 싶은 때가 많아서 그 구절이 주문 같다고 할까요? 민현이의 시에서는 「빈집의 미래」를 좋아해요. “시간을 훔치고 더욱 훔쳐서, 더욱 빈집이 될 것이다. 그것이 빈집의 미래.” 빈집이 훔치는 시간이란 빈집의 이미지를 닮았고 마음속에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기분이 드는 구절이었어요. 영규의 글 중에서는 산문이 정말 다 좋아요. 단어들을 단정하게 운용하면서도 에너지가 커요. 영규의 평론 중에서는 이병일 시인의 시집 「나무는 나무를」에서 “나의 시가 흙이 가진 빛을 닮고자 하는 시인의 순연한 욕망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구절을 거듭 읽게 되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순연한 욕망을 영규가 읽어 줘서 고맙고요.

 

Q. 네, 좋은 문장들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켬이 단순히 친분이 두텁기 때문에 사적인 모임으로 자주 뭉치는 게 아니라, 동인이라는 공적인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띠게 됐다는 것은 무언가 공통으로 지향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쓰는 데 함께 공유하는 목표나 주제의식 같은 게 있을까요?

A. 민현 : 서로가 고투하는 지점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느끼는 한계나 절망, 좌절에서부터 시가 출발하는 것 같아요. 거기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하고, 또 시에서든 현실에서든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 그 실천적 행위로서 동인이 더 동력이 돼요.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이들이 더 넓고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요.
 
영규 : 우리가 다 여성이라는 것이 켬 동인을 이루는 정체성이 아닌가 싶어요. 그렇다고 여성성‘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여성성‘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전에 웹진 《아는사람》 인터뷰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내가 남자이거나 여자여도 이상할 거 없는, 혹은 남성 언어도 아닌 여성 언어도 아닌, 남성성 혹은 여성성이라고 구분 짓는 기준마저도 무화하는 언어를 향하고 싶어요. 나중에 우리가 여성 동인이라는 것마저 특별할 거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고요.

 

켬 동인이 함께 맞춘 위안부 나눔 팔찌. 단순히 비슷한 목표와 지향점을 지닌 동인을 넘어 이들이 서로에게 지닌 남다른 연대감을 느낄 수 있다.


 

Q. 조심스러운 생각이지만, 언젠가 켬의 동인 시집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아요. 시집 전체를 아우르며 시들을 독자들과 연결해 주는 해설 역할에는 켬의 전영규 평론가님이 마땅할 테고요. 만약 동인 시집을 엮게 된다면, 시집의 제목 혹은 주제는 무엇이 될 것 같나요?

A. 영규 : 생각만 해도 기분 좋고 의미 있는 상상이에요. 제목이나 주제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여성성 혹은 남성성이라는 것마저 구분 짓는 것을 무화하는, 그 너머의 세계를 지향하는 주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조심스러운 게, 우리 동인의 시가 워낙 개성 있어서 특정 범주를 정해 두고 보고 싶지는 않아요. 평론가의 입장에서 시를 쓰는 우리 동인들의 시 세계가 규정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다채로워질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거든요!
 
민현 : 영규 언니 말대로 아무리 같은 주제로 써도 서로 너무 다른 시나 평론이 나오니까 그게 늘 재미있어요. 아직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활발하게 토론하고 이야기하면서 모두에게 새롭고 좋다고 느껴지는 주제로 글을 묶을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Q. 오늘 켬 동인의 이야길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씀이 있다면 자유롭게 전해 주세요!

A. 서하 : 일단 이번 인터뷰가, 켬 동인이 진짜 오랜만에 뭔가를 같이한 것이거든요. 이렇게 같이할 수 있어서 즐겁고 재밌었고, 사실 저희가 어떻게 보면 비슷한 질문들을 받는데 그게 항상 시간이 흘러가면서 다른 생각들과 이어지는 것 같아서 그런 것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좋았습니다.
 
민현 : 저는 시 쓰기가 말하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이렇게 우리가 막 던지는 말에서 시작을 많이 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막 던지는 말들이 이제 앞으로 우리가 기획하는 것의 동력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저는 정말 좋았던 시간인 거 같고, 우리 때문은 아니겠지만 요즘 동인 활동이 활발해지고 점점 많이 생겨서 좋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여기 네 명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동인 문화가) 번져 나갔으면 좋겠어요. 불이 번지듯이.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소연 : 제가 동인을 만들고 같이 꾸려 나가면서 느낀 거는, 이 친구들이 좋은 점을 발견해 주고 그것의 의미를 찾아 주는 되게 좋은 동료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누군가한테 보여줬을 때 질타를 받을 수도 있고, 또는 안 좋은 점이 더 부각될 때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동인 안에서 그것의 좋은 점들, 사랑스러운 면들, 의미들을 발견해 주는 친구들과 함께 갈 수 있어서 되게 든든해요. 민현이가 이런 동인 활동이 번져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아마 되게 큰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작은 동인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윤택한 활동들을 많이 할 수 있고, 출판사나 어떤 거대한 자본에 이끌려서 작가들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동인 안에서 힘을 받을 수가 있잖아요. 뭔가 그렇게 힘을 받으면 되게 든든해요. 지금 다 활동 잘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좀 저조하더라도 활동을 열심히 하는 동료가 끌어 주면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좋습니다.
 
영규 : 종종 우리 켬 동인을 부러워하고, 보기 좋고, 닮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우리 켬 동인에게 많은 관심과 애정 주시는 거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도 서로가 건강하게 좋은 시너지 받아 가며 좋은 글 쓰며 오래오래 함께 가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켬 동인과의 인터뷰였습니다. 마지막에 전영규 평론가가 언급한 것처럼 저도 켬 동인을 만나면서 들었던 생각 중에 하나가 바로 ‘닮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아마 인터뷰 내내 보여주었던 네 분 작가님들의 명랑한 모습에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겠죠. 저도 켬과 같은 건강한 동인 활동이 글 쓰는 이들 사이에서 점점 더 확장되어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비슷한 지향점 아래 함께하는 이들이 내 주변에 있다면, 이소연 시인의 말마따나 외부의 어떤 영향력에 이끌려 움직이는 게 아니라 주변의 동료들로부터 힘을 받아 주체적인 활동을 해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켬 동인이 앞으로도 좋은 본보기가 되는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길 응원하면서 이번 달 〈느린 기린 큐레이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한 가지 전해 드릴 소식도 있어요. 《문장 웹진》을 통해 〈느린 기린 큐레이션〉이 연재된 지도 어느덧 1년이 다 되어 가면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는데요,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그동안 다루었던 이야기를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려고 합니다. 한층 더 가벼운 옷차림으로 시작하는 7월, 모두 청량하고 즐겁게 보내시길 바라며, 〈느린 기린 큐레이션〉은 다음 달에 마지막 연재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시현

작가소개 / 조시현

2018년 실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
2019년 현대시 상반기 신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조온윤

작가소개 / 조온윤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문장웹진 202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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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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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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