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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모임-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8

  • 작성일 2018-09-01
  • 조회수 1,754

[기획 - 문장웹진 독자모임]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8 :

지방과 문학

 

 

참여 : 김주선(사회, 문학평론가), 김영삼, 송민우, 이다희, 이서영

 

 

 

《자음과 모음》 2018 여름호

《자음과 모음》 2018 여름호


 

 

 

김주선 : 벌써 여덟 번째 좌담회입니다. 날씨가 정말 뜨겁네요. 오늘은 지방과 문학이라는 주제로 좌담을 하겠습니다. 지방이라는 문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인데 이제야 다루게 되네요. 마침 이번 《자음과 모음 2018 여름호》에서 지방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광주라는 지방에서 문학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갓 등단해서 활동하고 있는 송민우 평론가께서 먼저 말문을 터주시겠어요?

 

송민우 : 일단 등단 전과 후를 비교해 보고 싶어요. 등단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역성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보진 않았어요. 문화예술의 향유라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모종의 박탈감은 있었지만 그것이 제게 큰 영향을 주지도 않았고요. 오히려 등단 이후에 지역에 산다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실감을 하게 되었는데요. 서울과 광주가 멀어서 접근성이 낮잖아요. 접근성이 낮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소외감이 들어요. 하지만 이 소외감 때문에 저 스스로를 주변인으로 놓고 싶지는 않아요. 일단 이 정도 이야기할게요.

 

김주선 : 저는 2015년에 등단했어요. 이제 시간이 조금 지났죠. 그사이에 제가 느낀 건 지방이어서 특별히 문학 활동 하는 데 방해가 될 건 없다는 거예요. 일종의 사회적 의제나 이슈라고 할 만한 것들이 SNS를 통해서 다 퍼져 있잖아요. 전국에서 발생하는 웬만한 사건도 동시적으로 알아낼 수도 있고요. 이게 다 발달한 통신망 덕분인데 이 수많은 통로를 활용하지 못하는 건 개인적인 문제 같다고 생각해요. 또 지방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게 힘들다는 말도 성립하기 어려워요. 물론 정말 작은 단위의 도시에서는 어려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문예지를 받아 보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논문도 다 데이터베이스화 되어 있고, 또 학교 수업이나 동료들과의 공부에서 만족할 수 없다면 인터넷에서 문학, 철학, 미학 같은 수업을 들어도 되잖아요.
    그렇지만 확실히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열리는 포럼이나 학술대회에 참석하는 게 쉽지 않은 점은 있어요. 그곳에서 논의된 것들을 들을 수도 없고요. 서울에 다녀와야 한다는 게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어려워요. 그래서 동시대 다른 평론가들이 어떤 의제를 갖고 오프라인에 모이는지가 좀 궁금해요. 저 없는 곳에서 담론이 진행되고 있다는 상상을 멈출 수 없더라고요. 그들과 어울리면 당연히 제게도 뭔가 촉발되는 게 있을 것 같으니까요.

 

이서영 : 저는 광주에서 태어나 여기서 쭉 대학까지 다녔던 만큼, 한때는 저와 아주 다른 것들, 혹은 아주 낯선 것들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방으로 가서 얼마간의 생활을 하고 오기도 했는데요. '나'와 전혀 다른 것들, 혹은 '나'보다 더 훌륭한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유창하고 왕성하게 교류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새로운 것들을 만나 기분 좋은 좌절이 거듭될수록 축적되는 힘이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사실 글이라는 것은 어디에서든지 쓰면 그만인 것 같다는 마음도 들고요. 광주 혹은 어디든 간에 머물러야 할 때는 진득하게 머무는 게 중요한 것 같고요. 그래야 그 환경이 말과 힘이 되어 한 개인 속에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러다 보면 일종의 사유지와 비슷한 무엇인가를 일궈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작은 텃밭에서 열심히 소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들의 모습을 좋아해요. 나이브한 소리겠지만 결국 매일 반복되고 제한된 환경 속에서도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낼 수 있는 눈을 획득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때 기약할 수 있는 해방의 순간이 있을 것 같고요. 물론 스스로가 지나칠 정도로 맹신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힘겹게 몸을 떼어낼 수 있는 힘은 필요하겠지요. 그 맹신의 대상이 어떤 환경 혹은 그 환경을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일 경우에는 더더욱 날카롭게 여러 가지를 점검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김영삼 : 생각들이 다 비슷한 것 같아요. 거칠게 분류해서 문학의 생산과 소비의 차원을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예술적 영역이고 개인적인 작업인데, 여기서 굳이 중심부라고 하는 공간이 문학 생산에 중요한 조건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생산 활동을 할 때 중심과 주변이라는 구분은 불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나 소비적인 차원은 확실히 달라요. 작품이 쓰이고 독자가 읽고 감상을 얻는다는 것으로 문학 활동이 끝나는 건 아니잖아요. 작품을 읽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또 다른 담론을 생성할 수 있어야 소비가 생산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건데, 그런 점에 있어서는 좀 아쉬워요. 문제는 규모인 것 같아요. 제가 말하는 규모는 뭐냐면 아주 쉽게 말하면 인구예요. 인구가 많으면 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어느 정도 담보가 될 거예요. 하지만 광주에서 문학 이야기를 할 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상당히 한정되어 있어요. 커뮤니티는 많을수록 좋은데 여기는 커뮤니티가 적어요. 저는 그 지점이 아쉬워요. 광주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담론을 생성하는 사람으로서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가끔 외로운데, 외로움이 문학 하는 사람의 숙명은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여기서는 점점 숙명처럼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에요.

 

김주선 : 확실히 교류를 한다는 게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텐데, 교류의 기회가 적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가능성이 닫히는 경험이 될 수 있겠어요.

 

김영삼 : 서울에서 소설이나 시를 쓸 때 더 많은 경험을 얻을 수는 있어요. 더 다양한 경험을 하는 건 작품 생산에 도움이 되긴 하잖아요. 하지만 반드시 그런 장소에서만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니죠. 갇혀 지낸 사람이 좋은 작품을 써낸 일화는 정말 많으니까요. 하지만 담론을 생산하는 입장에서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이 세계에서는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게 좀 더 큰 의미가 있는데 어렵잖아요.

 

송민우 : 저는 예전에 서울에 있는 모 대학의 습작품과 광주 소재의 대학에 있는 습작품을 비교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상당히 충격이었어요. 그전까지는 순진하게도 둘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서울에서 습작을 하는 사람들의 작품 수준이 더 좋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없다고 말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김영삼 : 어떤 차이였어요?

 

송민우 : 저에게는 저 나름대로 잘 썼다 싶은 기준이 있는데요. 서울 습작생들의 작품을 보면서 등단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제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차이가 어디서 오는 건지 궁금했어요. 개인차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김주선 : 아무래도 서울에 인재들이 많이 모여서 그럴까요?

 

송민우 : 그런 것도 있을 텐데,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문학만 하겠다는 게 아니라 원한다면 다른 예술 장르의 길을 찾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는 것도 큰 것 같아요.

 

김주선 : 서울에 여러 통로가 있다는 건 정말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서영 : 단순히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만큼 교류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아지니까, 좀 더 기민하고 민첩하게 자신의 작업을 검토해 볼 수도 있겠지요. 어떤 작가 분이 서울이라는 곳의 한계와 지방이라는 땅이 가진 좋은 것들에 관해 언급하시던 것도 문득 생각나네요.

 

송민우 : 지방에서 문학을 한다는 특별한 이점은, 제 생각엔 없는 것 같아요. 지방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도 많지 않고요. 만약 지방에서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건 서울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단지 개인 경험의 문제죠.

 

이서영 : 하지만 중심이라고 믿는 것들이 더 앙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리적 의미에서든, 문학적 영역이든 간에요. 어떤 한 곳을 중앙, 혹은 내핵이라고 설정해 버릴 때 생겨나는 정치성은 어마무시한데, 그 권위에 비해 깃발이 꽂혀 있던 곳은 실제론 영 볼품없거나 텅 비어 있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이야기하다 보니 정말 서울과 지방이라는 말 자체가 포괄하고 있는 것들이 무수하네요. 그래도 부득이하게 존재하는 외곽이라는 곳이 있다면, 그 외곽에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가치들은 아주 절실한 것들이 아닐까 싶네요.

 

김영삼 : 말씀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해 볼게요. 광주가 외곽으로서 힘이 있다면 그건 광주라는 '장소성'이 갖는 힘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요. 이 장소성은 어디에나 있겠죠. 서울의 장소성이나 부산의 장소성을 떠올려 볼 수도 있고요. 모두 아시다시피 서울과 지방,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적 프레임은 한계가 자명하잖아요. 장소성은 그 장소에서 생동하고 생성되는 정서, 다시 말해 해당 장소에서 사건을 겪은 사람들과 그 후대 사람들이 공유하고 대화하면서 생산되는 담론들의 총체라는 점에서 '공간'과는 다르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오월 광주를 사례로 들어 볼 때, 금남로라는 '공간' 자체는 관광지와 같은 문화생산품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건과 공유되는 장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는 그 어떤 것들이 있잖아요. 우리는 서울에 가지 않아도 촛불집회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대만에 가지 않아도 우산혁명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요. 물론 실제로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느꼈던 정동은 다르겠지만요.

 

송민우 : 저는 광주에서 살았기 때문에, 광주가 갖는 장소성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80년 5월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든 듣고 지냈으니까요. 만약 제가 다른 지방에 살았다면 그 영향은 좀 덜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김주선 : 장소성이라는 개념은 그 장소에서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이 초점화가 되기 때문에 좀 더 보편적인 틀에서 지방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장소가 아니라,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성을 마음에 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무엇을 통해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가가 핵심이 되겠죠? 광주에 있으면 아무래도 광주 특유의 장소성에 영향을 받을 테고요.

 

김영삼 : 그렇죠. 그럼에도 아쉬운 건 사람들이 그 장소성을 도구화하는 경향이 있고(5·18은 타자의 윤리를 이야기하면서 쉽게 소비되죠), 또 장소성에 대한 충실성을 그 물리적 장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김주선 : 이런 반론을 할 수도 있겠는데요. 광주만 그렇게 중요하느냐, 5·18만 그렇게 다루어야 하느냐, 같은 거요.

 

김영삼 :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지리적 차원에서 수도와 지방을 나누지 말자는 거예요. 장소성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야 우리가 좀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만날 수 있으니까요.

 

김주선 : 이제 광주 출신 작가, 광주 지역지에서 등단한 작가, 광주로 와서 활동하는 작가 등에 관해 이야기해 보면 좋겠는데요. 일단 젊은 작가들로 한정해서 얘기하면 조대 출신 작가로 저와 송민우 평론가를 포함해 김엄지 소설가, 박솔뫼 소설가, 이수진 소설가, 정용준 소설가, 신두호 시인, 이다희 시인이 있고요. 최근 광주대에서 남궁지혜 씨가 소설로 등단해서 활동하고 있고, 또 전남대 출신의 김청우 평론가, 김복희 시인, 서효인 시인, 임현 소설가도 있습니다. 김복희 작가는 최근에 시집을 냈죠.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굉장히 많네요. 제가 모르는 분도 있고 거론하지 않은 분도 있는데. 어쨌든 이분들의 작품을 읽으면 광주라고 하는 장소성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고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광주라는 장소성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이런 현상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송민우 : 언급하신 작가들의 경우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지방만의 어떤 색깔에 갇혀 있는 사람인가 생각해 보면 그런 건 전혀 아닌 것 같고요. 박솔뫼 작가는 광주를 소재로 한 작품을 몇 개 썼는데 광주만 소재로 삼은 건 아니잖아요. 부산도 나오고. 그래서 박솔뫼 작가야말로 특정 지방을 염두에 둔 소설을 쓴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외 다른 분들은 프로필에 광주가 있을 뿐이고 실제 작품 활동은 광주라는 장소성과는 큰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광주만의 고유한 '무엇'이라고 하는 것에 관해서요. 반면 광주에서 출간되는 문예지에 실린 작품을 보면 광주라는 곳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 꽤 있어요. 의식하는 게 나쁜 건 아닌데, 작품이 점차적으로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못 받았어요. 지방 자체를 다루는 건 전혀 문제가 없는데 그런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왜 달라지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 학부 때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면 지방지 등단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져 있는 걸 언제나 확인했었는데요. 그 이유도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지방에서 나오는 작품들에 대한 손쉬운 경시는 반드시 피해야겠죠.

 

김영삼 : 지방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첫째는 지역 출신 작가들에게 지역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에요. 특히 호남 쪽이 그래요. 광주 출신 작가는 많아요. 하지만 예술은 특수성이 보편화된 것이잖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지역 출신 작가에게 편협한 특수성을 원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지역성에 대한 생각 자체를 좀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단지 작품에 금남로나 도청이나 전라도 방언이 구사되었다고 해서 지역성을 띤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 건 아주 수준 낮은 지역뽕이죠.

 

(일동 웃음)

 

김영삼 : 이런 사례를 보여줄 수 있는 게 이번 《문학들 2018 여름》에 실린 박이수의 소설인 것 같아요. 작품의 완성도와는 무관한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건데요. 이 소설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도 「여기 별은 다른가」예요. 읽어서 아시겠지만 소설 쓰려고 시골로 가는 내용이잖아요. 시골 가면 소설이 잘 써질 것 같아서. 하지만 소설은 시골 내려가 봤자 별로 좋을 거 없다는 걸 보여주죠. 엄청 피곤해 하잖아요. 장사도 안 되고. 그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다른, 낯선 환경으로 가는 건데, 이런 내용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지역에 대한 환상을 깨트려 준다고 봐요.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 대표적인 예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예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사투리가 나오는데요. 이 사투리는 5·18이라는 사건이 남긴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5·18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인간의 폭력에 대한 보편적인 차원의 탐구를 하는데, 사투리는 그 폭력이 남긴 끔찍함을 처절하게 전달해요. 이런 게 광주의 장소성을 깊이 생각한 작가에게서 나오는 작품이죠. 그리고 이건 사담인데요. 작가 이력 좀 없앴으면 좋겠어요. 어느 지역, 어느 대학 이런 거요.

 

이서영 : 말씀에 동의해요. 미처 체화되지 않은 채 진행되는 기획은 결국 노골적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지독한 체화 이후에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써진 작품 앞에서는 압도될 수밖에 없겠지요.

 

김주선 : 앞서 한 얘기와 비슷하긴 한데, 한 사람이 속해 있는 공간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삼는 역사성이나 사건이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느 공간에 살고 있든 작가들은 자신이 느끼는 것을 쓰려 할 텐데 그 느낌이 반드시 자신이 살고 있는 그 공간에 대한 것이어야 하는 법은 없으니까요. 시간이 늦었는데 이제 마무리해 볼까요.

 

김영삼 : 지방을 생각하는 것에도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한 사고방식과 분류방식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상당히 아쉽습니다.

 

송민우 : 지역성에 대해 더 오랜 시간을 두고 탐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주선 : 네, 수고하셨습니다.

 

일동 : 수고하셨습니다.

 

 

 

 

 

 

 

 

참여자 소개 / 김주선

전남 화순 출생. 2015년 문학과사회 평론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강사

 

참여자 소개 / 김영삼

전남대학교 국문과 강사

 

참여자 소개 / 송민우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참여자 소개 / 이다희

대전 출생. 광주 거주.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참여자 소개 / 이서영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재학

 

 

   《문장웹진 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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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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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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