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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7

  • 작성일 2018-08-01
  • 조회수 1,356

[기획 - 문장웹진 독자모임]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7 :

최근 한국 문학에 나타난 집-인간-시대정신에 관하여

 

 

참여 : 김주선(사회, 문학평론가), 김영삼, 송민우, 이다희, 이서영

 

 

 

[caption id="attachment_142403" align="aligncenter" width="230"]김금희 - 미국식 홈비디오
(<문학3> 2018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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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tion id="attachment_142404" align="aligncenter" width="230"]박유경 - 가장 낮은 자리
(<문학3> 2018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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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tion id="attachment_142402" align="aligncenter" width="230"]장은진 - 외진 곳
(<창작과 비평> 201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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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tion id="attachment_142405" align="aligncenter" width="230"]이승우 - 소돔의 하룻밤
(<문학과사회> 2018 여름)
[/caption]

 

 

 

김주선 : 일곱 번째 《문장 웹진》 좌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 다룰 작품은 김금희의 「미국식 홈비디오」(《문학3》 2018 2호), 박유경의 「가장 낮은 자리」(《문학3》 2018 2호), 장은진의 「외진 곳」(《창작과 비평》 2018 여름호),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문학과사회》 2018 여름)입니다. 공교롭게도 작품 모두 집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한국 문학이 보여주는 집에 대한 상상력 ― 그러니까 결국은 그 집에서 사는 사람을 둘러싼 배경과 심리적 처지에 관해 말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은진의 작품부터 읽어 보겠습니다. 이 소설은 요즘에는 보기 드문 집을 배경으로 합니다. ㅁ자로 구성된, 굉장히 외지고 낡은 하숙집인데 여기 두 자매가 이사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죠. 모두 어떻게 읽으셨나요?

 

김영삼 : 한정된 공간에 모인 사람들을 한 화자가 관찰하는 소설의 모양새가 익숙한 느낌입니다. 이런 익숙한 구조를 이 작가가 왜 구성했을까를 생각하면서 소설을 읽다가, 147쪽의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잖아."라는 문장이 이 소설을 이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익숙함이 지겨움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과거에도 낮은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 것처럼, 지금도 이토록 낮은 자리에 사회의 변방에 내몰린 사람이 존재한다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슬프거나 절망적인 정조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어떻게든 겨울을 같이 이겨내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송민우 : 소설은 공동체의 필요성, 공동체의 온기를 기대하는 것 같은 인상이 있고, 또 제목에서도 작가의 의도가 잘 느껴져요. 익숙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여전히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곳에 대한 소설은 줄은 듯하고요. 그런 점에 이 소설이 갖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인물들의 비루함을 드러내기 위한 의식적인 작업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주인공의 젊음, 청춘에 대해 좀 피상적으로 이야기한다는 느낌도 있었고요.

 

 

김주선 : 그 피상적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말인가요?

 

송민우 : 현재 처해 있는 하나의 상황이 있다면, 그 하나에만 집중해서 깊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여러 사건을 배열한 듯했어요. 소설 구조적으로도 어색하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김영삼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문장이 나오는 장면을 기점으로 이야기의 분위기가 갑작스레 전환되는 것 같아요. 기점 전으로는 자매의 처지나 심리에 치중되어 있다면 기점 후로는 다른 여러 사건이 피상적으로 호출되고 있어요.

 

이다희 : 저는 중간에 배신과 배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게 재밌었어요. 이곳이 굉장히 후미진 살 만한 곳이 아닌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황인데요. ㅁ자 집에 사는 사람들 간의 무심한 배려를 보여주는 부분과, 그 집에서 하숙하던 사람 중 한 명이 나갔을 때 주인공이 배신감을 느꼈다는 지점은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게 보여줬다는 느낌이에요. 처지가 빤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데 그중 한 명이 탈출하는 데서 오는 배신감이요. 그런데 저는 이 소설 속에서 뭘 느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사건들이 배열되는데, 도대체 어디에 집중해야 하지?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이서영 : 저는 중심으로부터 먼 곳에 있는 사람들, 바깥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지탱해 내는 세계를 잠시 둘러보고 온 느낌이었어요. 어쩐지 아득한 느낌도 좋았고요. 하지만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변두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대변하기에는 조금 평면적이라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김영삼 : 말씀하신 문제들에 동의해요. 왜 그런지를 생각해 보면, (확실히 분석된 건 아닌데요) 장은진 작가의 초기작에도 많은 사람들이 등장했고 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 명의 초점화자에 의해 전달되었어요. 그 기법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때문에 소설에서 보여주는 여러 사건들이, 사실 각각의 사건 하나만 가지고도 깊이 있게 들어갈 수 있는 이야기인데 단지 표면적으로만 나온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어요. 때문에 단편에 넣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았나.

 

송민우 : 소설 앞부분에 나타났던 물질적·심리적 궁핍함에 비해 마지막의 희망찬 생각은 괴리가 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깊이 들어가서 화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중간 중간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가 나타나지만 그게 자연스럽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김주선 : 네. 여러 장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표면적인 느낌이 강해서 아쉽다는 평이 주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은 김금희 작가의 「미국식 홈비디오」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요 작품도 집에서 일어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은 장은진 작가의 집과 굉장히 다르죠. 집의 양식은 한 사회적 시기의 물질적·정신적 차원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장은진 작가의 「외진 곳」은 공동체적인 집의 구조를 보여주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 사이의 인정을 보여줍니다. 반면 김금희 작가의 「미국식 홈비디오」는 에어비앤비를 보여주잖아요. 가정집을 그대로 타인에게 대여해 주는 거죠. 집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뀐 건데, 여기는 돈으로 매개된 극히 피상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집주인은 자기 집에 대한 좋은 평가를 위해 손님을 맞이하고, 손님 역시 집주인과 일시적인 관계를 맺는 데 불과하니까요. 두 작품이 같은 시기에 나왔다는 것도 재밌는 현상입니다.

 

이다희 : 매튜는 동양계 미국인인데 특이해요. 그는 굉장히 프라이빗한 사람인데 이런 모습은 다른 많은 외국인과 다른 모습이잖아요. 다른 외국인들은 일종의 코스라고 할 만한 곳을 돌아다니지만 매튜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요. 특히 매튜가 찍은 영상을 보면 사람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아요. 자기 자신도 찍혀 있지 않고요. 영상은 보통 사람들이 잘 찍지 않는 것을 담고 있어요. 한데 주인공은 그 영상을 보면서 자기 주위를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갑자기 낯설게 느껴요. 시계만 보고 있는 사람들, 24, 25라고 적혀 있는 편의점 간판들 따위를 보면서요. 그러니까 이 소설은 우리가 사는 공간을 낯설게 보여줘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그저 통과만 하면서 지나가는지를 보여주죠. 머무르고 배려와 관심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요.

 

이서영 : 확실히 에어비앤비는 모종의 교차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장과 사적 영역인 가정집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 곳 같아요. 그 장소성을 능숙하게 그려내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저는 특히 백반집에 등장하는 늙은 남자들의 대화가 재밌었는데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모기와 자신을 비교하는 동료에게 모기는 모기고, 당신은 당신이라고 위로하는 말이 너무 좋았어요.

 

김영삼 : 에어비앤비는 '잠시 머묾'의 공간이고 셋방은 '잠시 멈춤'의 공간이잖아요. 그러다보니까 거기 찾아오는 사람과 만남의 패턴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에어비앤비는 가정집에 초대한다는 허상을 보여주는데, 때문에 이 공간은 주인이 보여주는 것과 손님이 보는 게 다르고, 주인이 그들에게 보고 싶은 것과 손님이 주인에게서 본 것이 달라요. 많은 외국인들이 한강에서 소주 맥주에 치킨 먹는 건 힙하지만, 이게 우리나라의 모습은 아니잖아요. 또 상구는 자신이 준비한 것을 통해서 매튜가 만족하길 바라지만 매튜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죠. 매튜에게 이 나라는 자신이 하는 작업의 한 과정일 뿐이에요. 호스트의 바람과는 달리 말이죠. 즉 에어비앤비가 표상하는 가정집이라는 것은 텅 빈 허상과도 같습니다. 집이지만 집이 아니죠.

 

송민우 : 말씀하신 것들에 동의하면서 저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해볼게요. 저는 이 소설에서 호의의 어긋남을 읽었어요. 자신이 호의라고 생각했던 게 상대에게는 불편하게 다가오는 그런 경험이 있을 수 있잖아요. 이 소설이 그런 걸 보여준 것 같아요. 특히 젓가락질 하는 장면에서 상구는 대단하다고 말하는데 매튜는 심드렁하게 반응하거든요. 소설 마지막 부분에도 젓가락 이야기를 하고요. 매튜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상구는 매튜에게 다가가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잖아요.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는 듯해요.

 

 

김주선 : 네. 그럼 이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박유경 작가의 「가장 낮은 자리」예요. 여기에도 집이 나와요. 모델하우스. 사실 모델하우스 자체가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 마지막 장면과 관련해서 해볼 만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쉽게 볼 수 있는 건 남자들의 온갖 찌질한 모습이죠.

 

이서영 :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그려냈다는 인상이 들어요. 가장 불순하고 더럽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고이는 모서리에 언제나 약한 것들이 위치합니다. 이 소설에서는 그곳에 여성이 위치해요. 자신들의 수치를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낮은 곳에 있던 여성의 위치를 한없이 강등시키는 방식은 현실 속에서도 비일비재한 것 같아요.

 

이다희 : 정말 현실적인 이야기예요. 이런 상황을 겪어 보지 않은 여성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서 가장 낮은 자리라고 말하는 건 상대적인 거예요. 이 남자들이 올라가면서 낮아지는 자리죠. 서영 씨가 말한 대로 소설 속 남자들의 수치를 목격한 주인공에게 성희롱을 하면서 자신이 받은 모욕감을 떠넘기잖아요. 주인공은 여기서 벗어야 벗겨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죠. 이건 쉽게 나올 수 있는 문장이 아니에요. 소설의 마지막에 주인공은 차 안에 갇혀 뾰족한 돌을 들고 차 주위를 빙빙 도는 상상을 하는데요. 떨면서 하죠. 자신이 모욕 받은 공간인 바로 그 차 안에서요. 저는 이런 모든 것들이 참 현실적이고 섬세하다고 생각해요. 같은 계급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참 어김없이 그중에서도 약자를 찾아내죠. 그래서 마지막의 상상이 통쾌함을 주나요? 아니면 인물의 저열함이 드러나나요? 묘하게 광기가 서려 있고 슬프죠. 낮고 낮아진 후에 나오는 상상이니까요. 이것을 앞선 남자들의 공격성과 구별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게 지금껏 우리가 둔감했던 일이기도 하죠.

 

김영삼 : 젠더적 관점에 동의하면서 저는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해 볼게요. 주인공인 지민과 은호, 김 기사는 탈착된 존재예요. 다들 별 볼일 없는 존재죠. 작가는 이들에게서 공격성을 보여줘요. 자기보다 더 낮은 존재에게 자신의 열등감을 공격적으로 표출하죠. 이런 공격성이 비단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주인공 여성도 뾰족한 돌을 들고 자동차를 긁어버리는 상상으로 자신의 열패감을 해소하려고 하고 있다는 점이 증거예요. 이 사회에서 일등의 자리에 놓이지 못한 사람들의 자기 확인이 이런 방식으로밖에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송민우 : 마지막 장면이 흥미로웠어요. 주인공은 어디에서도 편안하게 거주할 수 없는 인물로 보이는데요. 그래서 모델하우스의 구석진 자리 ― 내장재와 바닥 처리가 안 되어 있어서 먼지가 풀풀 나는 곳을 대피소로 생각하고 그 장소를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성 계급의 차원에서나 경제적인 차원에서나 가장 낮은 존재인 주인공은 모델하우스 내의 다른 어떤 공간도 아닌 가장 허름한 공간에 위치하고 있어요.

 

김주선 : 주인공은 아파트가 갖는 상징적 위상 구조와 성 계급 구조 속의 하층민이고, 이 소설은 그 하층 계급의 억압 받는(은) 심리가 잘 나타났다고 정리할 수도 있겠습니다. 모델하우스의 먼지 날리는 작은 방이 그녀의 정체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폭력성에 관한 논의는 다음에 기회 되면 논의하죠. 이제 마지막으로 이승우 작가의 「소돔의 하룻밤」 차례입니다. 구약성서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 내지는 주석으로서의 이야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 유명한 롯(주인)과 손님이 등장합니다. 자기 집에 쳐들어온 사람들이 이방인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자기 딸을 내놓는다는 다소 어리둥절한 이야기죠. 여기서 집은 초대와 보호의 기능에 충실한 편입니다. 구약성경 속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요. 무슨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이서영 : 저는 보이지 않는 힘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에 대한 가장 훌륭한 답을 들었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의 구성이 신기했는데, 이렇게 한 사건을 두고 여러 각도로 비틀어 가는 진행이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면서 무언가가 이어지는데 그 이어짐이 끝날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서 끝까지 간다는 느낌도 있었고요. 시의적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아주 세련된 방식의 원형소설이라는 인상도 있었어요.

 

김영삼 : 저는 세 가지 측면을 이야기해 볼게요. 첫 번째는, 정확하게 쓰인 문장들이 다양한 의미의 변주를 생산하는 글을 읽는 행복감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한동안 우리 사회는 이방인, 낯선 사람, 흔히 타자라고 부르는 사람에 대한 윤리적 태도에 대해 고민해 왔잖아요. 여기에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라는 텍스트가 긴요한 역할을 했고요. 여기서 촉발된 물음, 그러니까 '무조건적 환대는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소설적 응답이 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화적이고 시적인 문장으로 남겨진 기록에 작가는 소설적 상상력으로 그 빈자리들을 메우고 있어요. 그래서 왜 무조건적 환대여야만 하는지, 왜 그들의 구원이 우리의 윤리적 태도여야만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소설적 주석 쓰기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소설의 구조와 문장들이 비슷하게 반복되다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재진술 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챕터마다 반복되며 넘겨지는 문장이 다른 챕터에는 다른 이야기로 확장되고 연장되기도 합니다. 의미가 확정되지 않고 반복되고 지연되는 차연의 방식을 소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면 얼마든지 다름이 생성될 수 있어 보입니다.

 

이다희 : 성경은 차가운 텍스트죠. 소설이라면 몇 장을 썼을 사건을 단 몇 문장으로 처리하죠. 때문에 이 소설은 차가운 텍스트에 대한 뜨거운 응답입니다. 이 소설의 형식은 같은 사건과 같은 상황을 두고 각각 다른 시각을 보여줍니다. 1인칭으로만 진행하는 소설에서는 느끼지 못한 차이들이 보이면서 거기서 느껴지는 재미가 있죠. 재미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서 거의 이런 형식 자체가 주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도 듭니다. 또한 짚어 볼 만한 점은 롯과 그의 삼촌의 인간적인 구별입니다. 그들은 착하죠. 롯은 나그네를 대접하고 천사의 경고를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있죠. (그런 의미에서 롯의 사위들은 귀가 있어도 귀가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촌 또한 성이 타락했다 해도 그중에 선인은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롯의 지극히 인간적인 구별은 소돔과 고모라로 추정되는 성의 구별입니다. 도시가 타락했다는 것도 알고 멸망에 저항하지도 않지만 자신은 이미 도시인이니까요. 인간적인 구별은 인간적인 욕망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신의 무한성은 그런 인간의 구별과 뭔가 차원이 다른 느낌이 들죠. 우여곡절이 있지만 결국 롯은 신의 계획대로 산으로 갑니다. 이 소설에 문제시되는 것도 '환대'의 문제인데, 강요와 환대의 한 끗 차를 길게 이야기합니다. 롯의 환대도 자신이 나그네와 다를 바 없는 처지에서 나오니까요. 환대에 묶여 있는 환대하는 자와 받는 자의 위치와 환경에 대한 서술이 흥미로웠습니다. 인간의 환대에 회의적인 입장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소설은 결국 이런 인간의 섬세한 차이를 무력화하는 신의 무한함, 절대성이 문제시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삼 : 저는 거기에 대해서 약간 다른 의견을 갖고 있어요. 이승우 작가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의 환대는 타인이 요청하면 들어주는 거예요. 하지만 여기서는 천사가 요청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다희 : 리액션이 아니라 액션이다?

 

김영삼 : 네. 저는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그런 장면을 넣었다고 봐요.

 

 

송민우 : 롯이 강요적인 환대를 한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컨대 롯의 환대를 통해서 이 소설은 관용적 휴머니즘이나 인도주의적 보편화에 대한 경계에 대해서도 말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여요.

 

김주선 : 베푸는 자도 강요를 받아서 베푸는 자가 된다는 말도 있지요. 정말 순수한 의미에서 무조건적인 환대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김영삼 : 물론 그 부분에서는 롯의 환대를 의심할 수 있겠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환대의 내면화에 대해 이야기하거든요. 따라서 내면화된 환대의 법칙은 무조건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주선 : 그럴 수도 있겠네요. 혹시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이서영 : 소설의 입체적 면이 제게는 거대한 동공처럼 느껴졌어요. 처음에는 제가 소설을 읽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소설이 저를 읽는다고 생각했어요. 뭔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차 구성되어지는 입체가 있다면, 그것은 소설 너머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눈알과 닮아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뭔가 신의 동공이 저를 지켜보는 느낌?

 

이다희 : 완전 멋있는 표현인데. (웃음)

 

이서영 :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웃음)

 

김주선 :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씀이네요. 그것만 가지고도 이 소설의 형식적 특징에 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좌담회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일동 : 수고하셨습니다.

 

 

 

 

 

 

 

 

참여자 소개 / 김주선

전남 화순 출생. 2015년 문학과사회 평론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강사

 

참여자 소개 / 김영삼

전남대학교 국문과 강사

 

참여자 소개 / 송민우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참여자 소개 / 이다희

대전 출생. 광주 거주.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참여자 소개 / 이서영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재학

 

 

   《문장웹진 2018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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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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