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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텍스타일 아티스트 정희기 ‘기억에서 멀어지는 대상들을 시각화하는 작업’

  • 작성일 2018-03-01
  • 조회수 2,720

[기획 - 인터뷰]

 

 

텍스타일 아티스트 정희기
“기억에서 멀어지는 대상들을 시각화하는 작업”

인터뷰 일시: 2018년 2월 5일

 

 

소설가 박민정

 

 

 


* 코너 소개: 소설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취재하고, '팩트'와 '디테일'을 확보해서 그것을 변주할까? 본 코너에서는 소설가가 작품을 쓰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취재했던 직업인을 만나 작품 속 특정 직업에 대한 묘사와 소설을 쓰게 된 경위를 이야기한다.   


 

 

    소설 「당신의 나라에서」(『아내들의 학교』, 문학동네, 2017 수록)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그곳에 대해 기억나는 바가 거의 없다. 부모가 말해 준 레닌그라드에 대해서”. 이제는 사라진 지명인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소설을 쓸 생각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내게는 놀랍게도 ‘소비에트’ 시절 모스크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가 있었다. 대학 시절 후배였던 정희기는 한두 번 그 이야기를 꺼내곤 했는데, 내게는 슬레이트 지붕 맥도날드 앞에 도열한 기마경찰에 대한 이야기가 머릿속에 깊은 이미지로 남았다. 또한 학교에 갈 때마다 본 엄청나게 큰 가가린 동상, 국민차라고 불리던 러시아산 저가형 빨간 차 ‘모스크비치’.
    물론 정희기가 역사학 공부를 하러 유학을 떠난 아버지, 가족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살 때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지만 어떤 어린 시절의 이미지는 그런 식으로 자동으로 공유되었다. 이후 소설의 디테일을 확보하기 위해 정희기의 어린 시절 사진 속 파이프 관을 걷는 소년들의 이미지를 꼼꼼하게 살펴보기도 했다. 사후적으로 나는 소설 속 디테일에 대해 정희기에게 검토를 부탁했는데, 예를 들면 그들이 소비에트의 유학생이었기에 그곳을 아직도 레닌그라드로 부르기를 고집한다, 는 이어지는 소설 속 진술에 관해 정희기는 전혀 무리가 없는 설정이라고 이야기했다. 자신의 가족들 역시 여전히 ‘레닌그라드’로 그곳을 부르고 있고, 그녀는 이 소설의 주요한 모티브가 되는 ‘잃어버린 코코’에 관한 전시를 준비할 때까지 지명이 바뀐 줄도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2013년, 정희기로서는 텍스타일 아티스트로서의 길을 걷는 시작과 다름없는 <잃어버린 코코를 찾아서> 전시를 열었을 때 나는 그곳을 방문했고, 그때부터 오랫동안 이 소설을 구상했다. 그리고 2017년 1월에 소설을 완성했다. 지금부터 그녀와 내가 나눈 이야기는 이 소설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기억과 삶의 편린에 의존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레닌그라드에서 잃어버린 인형’ 포니는 정희기의 전시에 등장하는 ‘레닌그라드에서 잃어버린 인형’ 코코를 모델로 한 것이다. 정희기는 1990년대 초반, 알마타(카자흐스탄)에 살고 계신 할아버지의 초청장을 받아 가족들과 함께 그곳을 방문한다.(그녀의 할아버지는 차이코프스키 음악 계보를 잇는 4세대 작곡가로 불리는 작곡가 정추 선생이다. 1957년 김일성 독재를 비판하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타로 추방되었다. 그의 형제인 정근 선생은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솜사탕’, ‘둥글게 둥글게’를 작곡한 정희기의 친할아버지이다. 소설 속에서 3대가 예술가라는 설정 역시 여기서 빌려오기는 했는데, 그 때문에 나는 소설을 쓰는 내내 정희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했다. 소설 속 ‘부르주아 예술가 3대’라는 설정과 실제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양해를 출간 전 미리 구하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 부모가 유학생이라는 설정, 삼대가 예술가라는 설정, 이것을 실제 모델로 삼았다는 점을 나는 계속 불편한 마음으로 의식했다. 물론 그 사실은 이제 그 사람의 사실이 아니라, 내가 픽션화한 이후부터 ‘내 사실’이라는 것을 알지만 정희기가 보면 불편하거나 상처받지 않을까, 어지간히 유념했었다. 정희기는 물론 소설 속 ‘그 어린 시절’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소설 속에서 가장 아픈 장면을 먼저 꺼냈다. 그럼 그 유학생 커뮤니티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쓰면서도 가장 힘들었던 장면이, 한국말로 ‘이걸로 밥이나 사 드세요.’라고 하는 장면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도 아이는 그저 그렇게 길러진다, 는 진술, 이렇게 불편한 장면을 그려냈다는 게 어땠는지……. 정희기는 그것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했고, 오히려 신기했던 것은 모스크바(당시 러시아 도심)의 풍경을 묘사한 게 무척 그럴싸하다, 실제로 기마경찰을 보기는 했지만 만약 소설에 나오는 대로 기마경찰에게 풍선을 받았다면 나는 어떤 기억을 갖고 살아갔을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픽션화하는 과정에서 내가 겪은 일을 쓴다고 하더라도 이미 내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는 일을 어려워한다. 정희기는 그렇지 않았다.
    다시 알마타에서, 정희기는 ‘큰할아버지’ 정추 선생의 손녀, 러시아인 혈통의 친척언니인 엘레나를 처음 만난다. 그녀는 러시아어를 썼고, 당연히 희기와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엘레나의 비밀 아지트라고 불리는 다락에서 똑같이 생긴 인형을 나눠 갖는다. ‘코가 특이한 코알라’인 인형 ‘코코’였다. 이 인형은 소설 「당신의 나라에서」 안에서, 부모가 수업을 받는 동안 보모와 놀았던 주인공 유나의 애착인형 ‘포니’가 되었다. 정희기는 실제로 모스크바에 체류했고, 레닌그라드 여행 중 코코를 잃어버렸는데, 소설의 이 대목을 읽고 자기가 잃어버렸다고만 생각했던 코코의 행방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고 했다.
    소설 속 인형의 행방은 명확하지 않다. ‘큰엄마’가 일종의 신경질적 증상이 있는 사람이니까 아이의 애착인형을 훔쳐갔을 수도 있고, 아이가 부지불식 버린 걸 주워갔을 수도 있다. 정희기는 이를 ‘어쩌면 수많은 까닭으로 인해 코코가 나를 떠나버린 건 아니었을까?’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정희기가 인형 코코와 레닌그라드라는 장소 자체를 상실의 이미지로 영원히 반추하고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3대에 걸친 그녀의 가족사와 말이 통하지 않는 사촌언니와 인형을 나눠 가졌다는 사실이 이미 드라마적이라고 생각했고, 내게도 애착인형이 있었지만 묻고 싶었다. ‘왜 그 아이였던 거야? 그 아이가 없으면 왜 안 됐던 거야?’
    정희기가 모스크바에 체류한 당시는 1990년대 초반, 소비에트 해체 직후이고 러시아의 격변기였다. 그때 우리는 미취학 어린이였고, 세상은 뒤집어지고 있었다. 나는 1985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민정당사 옆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고, 당시 전두환의 집권당 ‘민정당’ 시절에 작명소에서 받아온 이름 ‘민정’으로 평생을 살게 된 사실에 대해 의식하고 있다. 민정당 점거 농성이 내가 지근거리에 있는 동안 이루어졌으리라는 사실, 또한 1987년에 내가 세 살의 어린아이로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우리 부모는 집회에 참여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도 아프게 의식하고 있다. 정희기도 그런 사실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또렷하게.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모스크바 시내에는 항상 무릎까지 쌓일 정도로 눈이 내렸다. 그녀의 가족은 벨리돔 근처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벨리돔 쿠데타 당시 총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듯 들렸고 아파트 건물에 난 총자국과 지나가던 탱크를 기억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에서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으로 꼽는 것이, 아마도 1992년, 텔레비전 뉴스에 어느 대학교 기숙사 앞 엄청 큰 나무의 나뭇가지에 갓난아이 시체가 탯줄이 달린 채로 매달려 있는 장면이 보도된 적이 있다고 했다. 러시아 젊은이들의 참혹한 불행이 정희기에게는 그토록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정희기는 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모스크바에 체류했던 2년 반 동안 말이 통하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기 전까지 부모, 가족의 사랑과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을 인형인 코코에게서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사실은 코코를 갖고 있던 기간은 고작 3개월이었다. 그때 찍은 사진들에서 코코를 오려내어 점, 선, 면, 입체로 복원하는 과정이 전시 <잃어버린 코코를 찾아서>이다. 사실 정희기는 사진을 찍고 인형을 만드는 두 작업을 함께했는데, 나는 소설 속에서 이를 두 인물의 작업으로 감수 분열했다. 이 부분이 어쩌면 인터뷰의 핵심일 수 있었다. 나는 한 인물의 작업이 두 인물의 작업으로 분열되는 것을 본 소감이 어떠했는지 물었다. 정희기 자신은 사진은 사진대로, 인형은 인형대로,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 사진작가로도 인형작가로도 불리는데, 대중들에게는 작가는 단 한 분야에만 종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런 고민 안에서 한 사람에게 하나의 작업만 부여했던 것 같다. 정희기는 한국에서 창작자로서의 자신을 설명할 때 “기억에서 멀어지는 대상들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는데 주로 그 재료를 천으로 사용합니다.”라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그래야 ‘열린 결말’이 되는 것 같다는 표현이 나로서는 재미있었다.
    사실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표현할 때, 실제로 이 사람들의 작업에 대해 얼마만큼의 디테일을 확보할 수 있을까가 고민인데, 실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기에는 어땠을까. 어쨌든 주인공의 직업이라는 것(사진작가)도 굉장히 중요한데, 어릴 적엔 굉장히 보호받는 중산층 아이였지만, 지금은 에어컨도 없는 작업실에서 진짜 작가가 된다는 건 뭘까 고민하는 굉장히 불안정한 예술가이고, 마지막 도록의 문장은 그런 자신의 예술가적 입장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고, 첫 사진전 자체가 자신이 밀어 둔 무의식이 반영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 남자 친구가 좌판에서 인형을 팔다가 자기 브랜드로 유명해지는 과정이 실려 있다. 서울 변두리 지역에 일상예술협동조합이 늘어나면서 작가로 자리를 잡아 갔다, 이런 설정이 무리수는 아닐까? 이를테면 나는 내가 ‘해봤던’ 걸 다른 작품에서 묘사하면 불편한 것들이 많다. 소설가가 재현되는 방식은 타자화 되었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작은 설정을 예를 들어 물었다. ‘찢어지지 않는 헤링본 라미네이트 패브릭.’ 나는 그 원단을 실제로 그렇게 부르는지도 몰랐다. 정희기는 그 대목에 대해서는, 패브릭은 무조건 찢어지게 되어 있으므로, ‘안 찢어지는 원단’이라고 쓰기보다는 ‘쉽게 찢어지지 않는 원단’이라고 썼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전 남친이 자기 브랜드를 시장에 알리는 과정은 소설에서 생략되었는데, 마켓이나 페어에 투자를 하고 계속 얼굴을 비추는 그런 과정이 실제로는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 나는 나이브하게, 소설가가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처럼 그저 작품이 좋다고 알려지면 되는 것인 줄 알았다. 이에 대해 정희기는 “어느 정도는 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했고, 우린 그런 각도로 소설의 한 대목을 재해석했는데, 전 남친과 나이 차이가 좀 나는 설정이기도 하지만, 함께 식사를 하다가 왜 갑자기 늙었어? 하는 것이 그런 닳고 닳은 자기 마케팅 과정을 겪은 후라서 그래 보이기도 할까, 싶은 것이었다.
    소설 속 ‘비비안 마이어’의 전시와 전 남친과 작업실을 나눠 쓰는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본다.

 

박민정 : 사실 주인공은 내가 프로 작가로서 어떻게 남을 수 있을까 그게 큰 고민인데, 비비안 마이어는 그게 없었단 말이지. 나는 그게 기묘했고. 누구나 창작자라면 일종의 배타적 권리를 갖고 싶은 욕망이 있을 텐데, 어떻게 그게 없었을까……. 이 주인공이 나는 어떤 작가로 남을 수 있을까, 고민한 건 분명히 프로 작가에 대한 고민인데, 이 지점이 비비안 마이어랑 충돌하는 부분이 있지. 물론 내가 작가 후기에 쓰긴 했지만,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이, 인형을 만드는 남자, 사진을 찍는 여자, 이렇게 나눴는데 둘이 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 재미있을 것 같아. 둘이 헤어진 연인인데 작업실을 같이 쓰잖아.

정희기: 저라면 절대 못 해요.

박민정: 나도 절대 못 하지.

정희기: 그냥 쿨한 녀석들인가. 작업적 영혼이 통하나.

박민정: 실은 내가 생각하기에 이 남자는 별 생각이 없고, 여자는 미련이 있어. 훔쳐보기도 하고 그러니까. 사실은 작가인 내가 가진 헤어진 연인에 대한 판타지인데, 나라면 안 돼, 하지만 가능할까? 싶은 지점. 실제로 들은 적도 있어. 헤어지고 계속 같이 작업실을 쓰면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선을 지키고. 리미널리티라고 표현한 부분. 그런데 나라면, 나라면 절대 안 되는…… 그리고 실은 쿨한 녀석들인가 싶다가도 마지막에 떠나잖아. 그리고 남자가 평소에 ‘그냥 두자’고 말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는데, 항상 그냥 두자고 말하던 남자가, 네가 이 편지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을 할 때, 강렬함도 있지 않았어? 내가 해설을 하고 있네. (웃음)

정희기: 이 남자 친구가 이 소설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박민정: 그러네? 나도 지금 처음 느꼈는데, 혼자서 정치적 올바름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네?

정희기: 그래서 진짜 이런 인물이 있을까? 이 인물이 너무 주인공의 서사에 맞춰서 만들어진 인물 같기도 했어요. 항상 올바른 말만 딱딱 해주고, 도식화되어 있고 작위적이고.
박민정: 이 남자 말고 작위적인 인물 또 없었어? 그 아저씨가 좀 심하게 악마화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정희기: 그런데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 있죠. 유학생활의 그 복합적인 감정이나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얼마든지 적대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사람 같아서 별로 그렇지 않았어요.

 

인터뷰 사진


인형 코코



 

    정희기는 여러 길을 돌아서 ‘천’에 도착했다. 나는 그녀에게 천, 패브릭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정희기는 인형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천을 만지게 되었는데, 천 자체가 늘 우리 몸을 감싸고 있기도 하고, 사람과 물 다음에 가장 많이 닿는 게 천이고, 어떻게 보면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 자체라고 볼 수도 있고, 조금 과장하면 한 사람의 삶 자체, 신체의 일부에 가까운 물성을 갖고 있으니까 삶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나는 소설 속에 ‘도록을 쓰기가 너무나 힘들었다.’라고 쓴 대목에 대해서 내 작업을 하면서, 내 가족의 추악한 면을 들춘다거나 모른 척하지 않겠다, 에 방점을 찍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도 그러했는지 물었다.
    정희기 역시 첫 도록을 쓰면서 개인사를 꺼내게 되었는데, 오히려 너무 지나치게 유년 시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게 성장하지 못함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덜 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유년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 속에서 결코 단절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최근에 정희기는 인형 수선을 하면서, 사람들이 어릴 때 잃어버린 인형에 대한 기록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유년 시절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내가 그녀의 잃어버린 인형에서 본 것도 그것이었다. 격변기 러시아에서 살던 한국 여자 아이가 들고 다니던 인형. 나는 그 인형을 다른 어두운 유년 시절을 가진 아이의 손에 넘겨주는 소설을 썼다고 생각한다. ‘토끼인형처럼 무력했던’ 우리들은 그러나, 1987년이나 1991년에 분명 머물러 있었고, 우리 육체 속에 연약하게 머물러 있던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렇게 만들고 쓴다.

 

 

 

 

 

작가소개 / 박민정

1985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와 동 대학원 문화연구학과 졸업. 2009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 『아내들의 학교』가 있음.

 

  《문장웹진 201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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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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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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