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독자모임 - 소설의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 작성일 2017-12-01
  • 조회수 550

[기획]

 

 

독자모임

- 소설의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참여 : 정홍수(사회, 문학평론가), 장수라, 이영순, 김보배, 김지윤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230"]허희정 「우중비행」
《문장웹진》 2017년 10월호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230"]박민정 「당신의 나라에서」
《21세기문학》 2017년 봄호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230"]윤고은 「우리의 맥놀이」
《한국문학》 2017년 하반기[/caption]

 

정홍수 :벌써 네번째 모임이네요. 오늘 같이 이야기할 작품은 허희정 씨의 「우중비행」(문장웹진, 10월호), 박민정 씨의 「당신의 나라에서」(21세기문학 봄호, 2017), 윤고은 씨의 「우리의 맥놀이」(한국문학 하반기, 2017) 세 편입니다. 좌담을 진행하면서 이야기되겠지만, 세 작품은 소설의 상상력을 어떻게 마련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나름의 공통점이 있는 거 같아요. 이건 소설의 서사를 어디서 가져오고 어떻게 직조해나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할 텐데 젊은 세대 작가들의 고민의 일단을 엿볼 수도 있고요. 먼저 허희정 씨는 2016년에 등단한 신인 작가입니다. 「우중비행」 어땠나요.

 

오에 겐자부로 장편소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문학과지성사, 2014년.

 

김보배 : 재밌게 읽었어요. Q와 탐사팀이 온실을 가꾸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오에 겐자부로의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의 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를 보면,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 남겨진 아이들이 짐승 사체를 묻는 행위를 통해 좌절을 느끼기보다는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걸 느끼며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희망 같은 걸 품게 되잖아요. 「우중비행」에서도 온실을 가꾸며 Q가 가슴 깊이 느꼈을 희망 같은 걸 상상하며 읽었어요. 사체를 묻는 행위와 식물을 키우는 행위는 다를 수 있지만 희망을 심는다는 점에서는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알폰소 쿠아론 감독, 영화 <그래비티>, 2013년.

 

장수라 : 소설의 공간적, 시간적 배경을 우주로 설정한 게 특이했고 어렵다는 생각도 했지만 신선한 느낌이었어요. 영화 <그래비티>가 생각났어요. 마지막 한 사람이 남잖아요. 우주 안에서 식물을 키우는 일이란 결국 공기를 얻기 위한, 오직 인간을 위한 거겠죠. 온실과 화분, 생체 실험 등이 같은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화분이나 온실 속에서 식물을 키우는 상황을 통해 생명의 위기에 대한 경고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영순 : 저는 약간 서글퍼지는 지점이 있었는데, 땅, 산소, 비, 나무 등 우리랑 아주 친숙했던 생물체가 언젠가는 우리에게 외계 생물체 같은 존재가 될 날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서글펐어요. 이 작품에서는 방사능이라는 암시만이 제시되었는데 혹여 이런 대재앙을 겪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과연 생명체가 살아나는 그런 땅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두렵기도 했고요.

 

장수라 : Q가 우주에서도 식물이 산소를 만들어주는 매개체니까 그 중요성을 주장하는데, 내부 다른 팀원들은 인정을 안 하잖아요. 살리는 게 죽이는 거고 죽이는 게 살리는 거라는 문장이 있는데, 소설 속 그런 우주에서 살다보면 시각이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지윤 : 앞에서 말씀하셨듯이 아무래도 기존에 읽었던 작품들과는 다른 세계, SF적 세계, 미래적 시간과 공간적 배경이어서 흥미로웠어요.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끝까지 머릿속에 남는 강렬한 이미지들이 있었는데요. Q가 식물을 다듬는 모습, 어떻게든 지구에서 생존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Q의 모습이 강한 울림을 주었어요.

 

정홍수 : 이 소설에서 기대고 있는 SF적 상상력은 어땠나요.

 

김지윤 : SF적 상상력 전체를 알레고리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소설 안에 배치된 상징들이 많아서인지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어요. 일단 저는 지구를 벗어나서 다른 세계에서 정착해 살다가 또다시 지구로 도착하려고 하는 게,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을 주어 신선했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 세계 역시 정치적인 문제들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게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지구 표면에 비가 많이 내려서 착륙하기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황폐화된 지구를 떠나 다른 곳으로 도피해왔지만 또다시 지구로 돌아간다는 것이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리고 또 지구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연구소 임원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들이 그 세상에서도 계급이나 젠더 차원의 문제 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정홍수 : 정치적인 갈등은 어쩌면 서사 구축의 방편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문제가 핵심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소설의 세계에서는 산소가 유해물질로 되어 있잖아요. 지금 우리에게는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산소가 말이죠. “식물들이 산소를 내뱉고 있었고, 그것들은 유해했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보여주는 것처럼 세상을 아주 낯설게 보여주는 것, 그런 쪽의 울림에 작품의 방점이 있는 것도 같아요. 그 낯선 세상에 떨어진 Q와 G의 고독감 같은 게 어떤 시적인 이미지로 남는데, 그게 몹시 강렬합니다.

 

김보배 :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건 사실 진짜 유해한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잘 적응해 살다보니 몰랐을 뿐이지, 밖으로 조금만 나가보면 인간 자체가 지구에 굉장히 유해한 존재일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그런 질문 말입니다.

 

정홍수 : 예.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지구 바깥에서, 지구가 유해한 공간으로 바뀐 다음에 지구로 복귀를 하려는 설정이 신선했습니다. 생각할 거리도 많이 주고요.

 

장수라 : 작가의 의도가 자연스럽게, 잘 전달된 것 같아요. 어찌 생각해보면 ‘자연스럽다’는 게 작가도 우리 모두도 지구를 떠나본 적도 없고 우주를 가본 적도 없으니 우리의 경험과 감정이 투영될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죠. 시공간을 넘어 다른 곳으로 독자를 데려갔다는 자체로 힐링이 되었던 소설이었어요.

 

이영순 : 이 작품은 SF소설의 형태를 빌리기는 했지만 아주 서정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너무 익숙해서 하찮게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서 이를 낯선 시각으로 뒤집어 보여줌으로써 그런 것들이 실은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자각하게 한다고나 할까요.

 

이영순 : 그리고 저는 Q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Q의 생존 가능성을 짐작한 게 어디에서냐면, 거의 마지막에 G가 지구에 오래 있었잖아요. 개인마다 공기 배합이 다른데 G는 지구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공기 배합을 지구와 유사하게 했다고 나오는데, Q가 지구에서 살아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어요. 아마도 Q는 식물을 재배하고 또 열매를 거두고 산소로 호흡해 가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요.

 

정홍수 : 예, 그 생존 가능성, 희망을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찾아 읽고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 이 소설의 미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소설인 거죠. 단기간의 지구 체류에서는 식물 재배의 결실, 그러니까 열매를 맺는 걸 보지 못하는 걸로 나오는데, Q의 실종이 역설적으로, 아니 희미하게나마 그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소설이 지금 지구의 현실을 문학적으로 성찰하게 한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겠죠. 좋은 단편소설이 주는 시적인 울림이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박민정 씨의 「당신의 나라에서」로 넘어가볼까요. 「우중비행」이 먼 미래로 가서 SF적인 상상력으로 지금 우리의 삶, 지구의 현재를 질문하고 있다면, 「당신의 나라에서」의 시간 여행은 과거를 향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는 과거의 장소 또한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은데요,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던 무렵인 1991년의 페테로그라드(당시 지명은 레닌그라드)가 소설의 주요한 무대로 등장합니다.

 

장수라 : 20년이 지난 뒤 윤지나로부터 소설 화자에게 메일이 오면서 과거의 어두운 일들이 드러나는데요. 20년의 시간도 지우지 못한 과거사의 심각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입장에서 소설을 구석구석 살피게 되더라고요. 갑과 을의 입장을 관찰해보고, 입장을 바꿔 생각하게 됐는데요. 어려우면서도 문장들이 세련됐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어요.

 

김지윤 : 저는 굉장히 좋게 읽었고요. 다 읽고 나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작품은 절대 쉽게 쓰인 게 아니고, 여러 겹의 서사들이 복합적으로 잘 짜여 있어서 굉장히 잘 쓴 소설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단 현재의 ‘내’가 나오고 또 나의 ‘부모’가 나오고 러시아에서 있었던 ‘과거’가 나오고 또다시 ‘현재’가 나오는 구조 때문에, 처음엔 복잡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연필로 적어가면서 읽었거든요. 일단 폭력, 권력 앞에 무력해지는 인물들이 등장해서 인상 깊었고요. 읽으면서 놀라게 된 부분들이 많았는데, 이를테면 나에게 메일을 보내왔던 ‘윤지나’라는 인물의 엄마는 러시아에 있을 때 나의 ‘보모’였잖아요. 그런데 보모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사실은 자기 자식에게 학대를 한 정황이 있다는 것, 게다가 윤지나는 가면 쓴 사람(나의 부모의 러시아 유학 시절 동기)으로부터 강간을 당했다는 정황도 드러나고요. 서사가 진행되면서 어떤 ‘비밀’ 같은 것이 풀리는 느낌이 들면서 유년 시절 ‘나’의 기억도 함께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또한 결말에서 윤지나의 메일에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계속 수신만 하던 ‘나’가 그렇다면, 아버지의 열등감을 타당하게 여기고 이제 와서 부모 잘못을 따져 물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공범일까라는 질문이 나오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정홍수 : 과거 세대, 아버지 세대에 대한 심문과 부정이 아주 강렬하죠. 진보적인 예술을 한다던 이들의 위선, 이중성, 변절, 비열함 등등이 한꺼번에 심문의 무대에 오릅니다. 윤지나 교수가 당한 모욕과 성폭력도 그렇지만, 소설 화자 ‘나’ 역시 그 가면 쓴 아버지의 동기에게 어떤 폭력을 당했을 가능성이 암시되고 있는데 끔찍합니다. 고려인 2세 윤지나 교수의 어머니, 보모로부터 받은 학대도 있고요. 그런데 ‘나’가 피해자의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심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대 역시 그 과거를 외면하고, 과거를 묻어두는 한 공범자일 수도 있다는 데까지 소설의 질문을 끌고 나가는데, 그 점이 이 소설의 만만찮은 두께를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장수라 : 저는 인물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입장을 나눠보며 이해하려 애썼어요. 먼저 윤지나 입장에서 볼 때 강간의 상처가 읽혀서 주변의 경우를 살펴보게 되더군요. 어릴 때 당한 성추행이나 성폭력으로 인해 어른이 되어서까지 고통 받는 경우를 봤어요. 평생을 상처와 고통 안에 있으면서 치유 받지 못하는 거죠.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용서를 받고 싶다고 하는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됐습니다. 유나의 입장에서 볼 때 윤지나 교수의 메일과 함께 ‘1991년 라이너스의 악몽’이라는 사진 작업을 통해 애써 외면하며 무의식 속에 덮어두었던 어릴 적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면서 치유의 계기를 만나게 된 듯해요. 현재 자기 위치나 남자 친구와의 관계 등을 새롭게 다듬어가는 것으로 보였어요. ‘당신의 나라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는 마지막 문장은, 자기 부모의 잘못을 옹호하지 않고, 젊은이로서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겠다는 태도인데, 굉장히 건강하고 희망적인 몸부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독자로서 ‘나’의 부모와 보모를 바라봤을 때, 저는 답답한 느낌이 들었어요. 윤지나가 강간당했다고 피해를 호소했을 때, 유나의 어머니가 회피하잖아요. “악마가 돈을 건네며 했던 말, 이걸로 밥이나 사드세요. (…) 치떨리는 한국어였죠. 당신 어머니는 내게 말합니다. 선생님 그걸 저희한테 이야기하시면 어떡하란 말씀이세요. 그 친구는 모교 학과장의 아들이에요. 힘없는 유학생인 저희더러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고 그의 처벌을 위해 애써달란 말씀이세요?”라는 대목인데, 비슷한 경우를 많이 봤어요.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봐 방관자로서 입 다물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정홍수 : 그런 문제에 대한 질문이 있죠. 과거 세대들이 겉으로 표방했던 삶의 가치나 태도하고 실제로 그들이 행하고 저지른 일들 사이의 괴리에 대한. 생각해보면 이들은 일정한 역사적 기여를 명분으로 삼아 그런 문제들은 덮고 회피하는 방식으로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죠. 이제 그런 문제를 자식 세대인 화자가 ‘알아보겠다’고 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생각은 안 해봤나요? 가면을 쓴 인물이나 화자의 부모, 보모에겐 변명의 공간이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생각 말입니다. 특히나 여당 실세 정치인으로 변신한 그 가면의 인물의 경우에는 너무 스테레오타입화된 느낌도 없지 않아요. 살아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어떤 표본으로 제시된 듯한 느낌 말입니다. 현실 속에 그런 인물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소설 속에 그런 인물이 들어와 살아 있는 인물로 구축되는 문제는 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김지윤 : 기성세대를 지나치게 폭력의 주체로 만들어버린 측면이 있었던 거 같아요. 여당 실세로 변신하는 그 인물의 경우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이영순 : 요새 한창 뜨거운 주제가 되고 있는 페미니즘의 문제라든지, 젊은 세대의 어려움 같은 것들이, 그러니까 이런 문제에 대한 원망이 기성세대를 향하면서 기성세대에게 집중 공격을 퍼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렇지만 그들 역시 이 소설에 나오는 부모나 보모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했을 때, 과연 약자에게 그런 폭력적 행위를 하는 데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죠.

 

장수라 : 기성세대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잖아요. 민주화 운동하며 시대를 이끌고자 애썼던 사람들도 사회에 나와 일상으로 복귀하고 세월을 살다보니 그렇게 변한 측면도 있겠고요. 알고 보면 그들만의 탓이 아닌 거죠. 전후 세대인 우리의 아버지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아버지 세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점이 있었듯, 우리 자식 세대들도 우리 세대를 부정하려고 하는 점은 이해가 됩니다만.

 

정홍수 : 명백한 개별적 폭력은 당연히 정죄되고 심문받아야 하죠. 그러나 이 문제가 세대적 차원으로 확장될 때 소설은 좀 더 세심해질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인물 배치가 어떤 문제의식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김보배 : 제가 생각하기엔 아버지에 대한 시각도 비슷한 움직임으로 변화했다고 생각해요. 그전까지 묘사된 아버지의 표본을 깨뜨리고 다르게 보겠다는 어떤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소설 속 다양한 아버지들이 생겨났다고 봐요. 여성 문제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여성 문제도 이제 막 대두되고 있다 보니 흑과 백이 극명하게 갈리는, 다소 폭력적인 방향으로 해석되는 문제가 있지만, 조금 지나다 보면 여성 문제를 다루는 소설들도 더 다양한 해석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은 이르지 않나 해요. 우선 그런 단계에 도달하려면 다소 거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시기가 필요한데 지금이 그런 시기 같거든요. 세대 간의 갈등도 마찬가지 같아요. 지금은 젊은 세대의 상황을 알리는 데 급급한 부분이 분명 있기 때문에 변명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여유가 없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 결과로 나온 인물들 같아요.

 

이영순 : 저도 지금이 과도기적인 시기에 있다는 것에 공감해요. 아직까지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다보니 인물이 극단적이라고 느껴지는 점도 있고, 배치가 공평했는가라는 이야기가 나올 만하다고 생각해요. 또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있어 세대 간 성향이 극명하게 엇갈리다 보니 문학 작품에서도 그런 점이 더 부각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런 시기를 거치고 나면 뭔가 다른 시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있을 테고, 기성세대에게도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지겠죠. 각각의 입장에 따라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요.

 

김지윤 : 앞에서 언급했던 기성세대로 대표되는 인물은 ‘악’을 보여주는 인물로만 그려져서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에 실패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 답이 잘 내려지지 않기도 해요. ‘세대 차이’라고 단순명료하게 말할 순 없겠죠. 갑을 관계 또는 권력의 문제와 연결시켜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런 맥락에서 과연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변명의 기회를 줘야만 하는가? 우리는 이미 그들에게 많은 폭력과 억압을 받았고 상처가 남았는데, 그럼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래도 작가는 작품의 말미에서 ‘윤지나’의 메일에 답을 보내잖아요. 이제 나는 과거를 알아볼 준비가 되었다는 태도로 말이죠. 그나마 조금 희망차고 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해요.

 

정홍수 :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김지윤 씨나 김보배 씨는 작가와 비슷한 세대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작가의 문제의식에 대한 공감도가 남다를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작품은 그런 문제의식에 더해 살아보지 않은 과거를 소설 속으로 들인다는 점에서 상당한 공부와 취재가 필요한 소설이잖아요. 자신의 경험에서 길어 올리는 소설과는 조금 결이 다르죠. 이런 점도 새로운 세대의 소설 쓰기 방식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만한 것 같습니다. 허희정 씨의 <우중비행>도 그런 측면이 있고요.

 

김보배 : 우리도 기성세대가 쌓아온 문제에서 완전히 피해자일 수만은 없겠다는 질문이 남더라고요. 공감보다도 충격이었어요. 어쨌든 잘 모르는 나이이긴 하지만 지금의 부모 세대에게 업혀 지낸 시기가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 어떤 세대도 그 전 세대로부터 완전히 피해를 받았다고 말할 순 없겠다 생각도 들었어요. 세대 갈등이 계속 일어날 수 있다는 건 두 세대가 공범이었던 시기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김지윤 : 아무래도 이런 문제의식에는 많은 공감을 하고 있는 편이에요. 기성세대와 현세대와의 대립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각 세대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체험한 것들을 서로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시간’과 ‘역사’라는 단어가 생각나는데요. 특히나 현세대는 기성세대가 느꼈던 과거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을 것이고요. 기성세대는 현세대, 즉 우리와 같은 나이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요. 당연히 서로가 느끼는 것은 다를 테고 여기에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이 두 세대는 평행선의 모습을 그릴 수밖에 없는 거겠죠. 또 이건 제가 나중에 나이가 들고 ‘기성세대’라는 소리를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다만 서로가 서로의 시대를, 과거를, 현재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정홍수 : 마지막으로 윤고은 씨의 「우리의 맥놀이」입니다. 맥놀이가 무슨 말인가 해서 찾아보니, ‘주파수의 차이가 다른 두 개의 파동이 간섭을 일으켜서 합성파가 이뤄지는 현상’이라고 하네요. 이 소설에 나오는 공진 현상과 반대에 놓이는 개념이겠군요. 공진은 물체들의 고유 진동수가 겹치는 순간 에너지가 발생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군인들이 발 맞춰 행군할 때 다리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그런 예라고 소설에 나옵니다. 말하자면 공진의 충격을 완충시키는 것이 맥놀이인 셈이죠. 윤고은 씨의 소설은 이 두 과학의 개념을 지금 우리네 삶을 설명하고 은유하는 적절한 상상력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은 윤고은 씨 소설의 특장이기도 하죠. 위트도 넘치고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땠나요.

 

이영순 : ‘공진’과 ‘맥놀이’를 연결하면서 통근버스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재미있었어요. 물리적,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고 연결고리도 없는 사람들인데, 다른 시간 다른 노선에서 버스 좌석이 같다는 이유로 그 자체만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게 생기고, 심리적으로 뭔가가 일어나잖아요. 또 직장 생활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공진과 맥놀이의 이야기로 확장한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작가의 상상력이 신선하고 좋았어요. 직장에서 변기 뚜껑이 일시에 사라진다는 설정 같은 것은 정말 재치가 있었어요.

 

장수라 : 작가가 유머감각, 언어감각이 뛰어난 것 같았어요. 차의 문짝에 패인 곳을 보고 문짝의 보조개라고 표현한 곳이 떠오릅니다.

 

정홍수 : ‘문콕테러’라는 표현도 있죠.

 

장수라 : 맞아요. 직장 상사가 배변 문제를 거론할 때 ‘회사에서 만든 똥이니까요’ 하고 받아치는 장면에서는 정말 많이 웃었어요. 평사원으로서 프리미엄 버스비를 내는 문제를 두고 벌이는 부부간의 밀고 당기기는 웃기기도 하면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어요. 대부분 출퇴근 버스에서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진동수가 일치하면 스파크가 튄다는 ‘공진’이라는 말을 가져와 ‘사랑도 공진의 결과물이다’라고 하는데 참 적절한 비유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타이어에 패턴이 다른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해주는 대목도 잘 이해가 되면서 지혜롭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홍수 : 그런 개념이나 상상력을 삶을 은유하는 보조관념으로 활용하는 감각은 윤고은 씨가 정말 뛰어난 것 같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우중비행」도 비슷한 계열로 생각해볼 수 있고요.

 

이영순 : 진시황 병마용갱 삽화도 정말 잘 찾아낸 거 같아요.

 

정홍수 : 병마용에 숨어 들어가는 다큐멘터리의 에피소드도 소설의 구도에 잘 스며들어 있죠. 바로 그 다큐멘터리를 보는 곳이 프리미엄 출근 버스의 좌석인데, 소설 화자 ‘나’가 임원급들만 모여 있는 그 버스 안에 숨어 들어가 있는 형국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그 버스 안에서 시간대를 달리해서 좌석을 공유하는 천칭이라는 여자에 대해 화자는 이상한 마음을 품게 되잖아요. 일종의 ‘바람’이죠. 그런데 이야기를 그쪽으로 끌어가지 않고 어느 선에서 끊어버립니다. 그런 방식도 세련된 수법인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조금씩 과장된 삽화들을 제시하면서 웃음, 블랙유머를 끌어내는 솜씨가 뛰어납니다. 저런 프리미엄 버스가 있을까요? 직원들이 쉬지 못하게 화장실 변기 뚜껑을 다 떼어버리는 회사는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이상하게 작가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고급한 블랙유머 같습니다.

 

황정은 외 『2017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은행나무, 2017년.
윤고은 『1인용 식탁』, 문학과지성사, 2010년.

 

김지윤 : 저는 윤고은 작가의 작품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최근 ‘김유정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렸던 「평범해진 처제」도 재밌게 읽었어요. 『1인용 식탁』도 재밌게 읽었고요. 항상 유머도 있고 톤도 발랄하고, 그럼에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가볍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고요.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나’와 같이 버스의 12B자리에 앉는 ‘천칭’이라는 여성 이야긴데요, ‘나’는 왼쪽으로 허리가 틀어졌는데 천칭은 오른쪽으로 허리가 틀어졌고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붙어 있는 모양이 사람 인(人)자를 만드는 것 같았다,고 하는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이영순 : 천칭이 이 남자를 팀장님이라고 하면서 만나자고 했잖아요. 대기업에서 팀장이라고 하면 보통은 유부남인 경우가 많은데(실제로도 그렇고요), 삼십 세의 젊은 여자가 유부남이라는 걸 알면서 만나자고 했다고 봐야 하기 때문에 이 남자가 덜컥 겁먹은 것도 있지 않나 싶어서 웃겼어요. 저 같으면 심리적으로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장수라 : 나라면 팀장이 아니라 일반 직원이라고 사실대로 밝히고 만났을 것 같아요.(웃음)

 

정홍수 : 아마 만났으면 실망했기 쉽겠죠.

 

김보배 : 저는 화자가 아들이랑 대화하는 과정에서 공진을 막는 해결방안을 떠올리는 장면이 재미있었어요. 스프링에서 댐퍼까지 생각이 이어지는 부분이요. 공진과 댐퍼가 균형을 이룰 때 삶이 유지되니까, 그건 ‘천칭’의 이미지로도 이어졌고요. 좋았어요.

 

이영순 : 살다보면 늘 충격을 느끼게 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스프링 같은 것들이 완충작용을 해주지 않나 생각했어요.

 

정홍수 : 윤고은 씨는 소설이라는 게 뭐 그리 거창한 게 아니다, 소설은 댐퍼다, 라는 메시지도 던지는 거 같아요.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 작게라도 위로를 받잖아요. 이 소설 역시 앞의 「우중비행」, 「당신의 나라에서」처럼 상당한 공부가 필요한 작품 같아요. 과학적인 것, 세대론적인 것, 역사적인 것들을 탐구해나가면서 이 세대들이 자신의 소설적 공간, 상상력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게 인상적입니다.

 

장수라 : 여기에서 ‘관성의 법칙’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더라고요.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모든 물체는 자기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성질 말이죠. ‘천칭’이란 이름도 균형의 원리를 의미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김지윤 : 저는 이 소설이 단순히 재미 혹은 과학 원리를 차용한 상상력으로만 쓰인 소설일까? 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들었고요. 결론적으로는 이 의문들이 시원하게 풀리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일단 첫 번째로, 제목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맥놀이’라는 것이 두 개의 비슷한 파동이 간섭을 일으켜서 새로운 파동이 생기는 현상이라면 작품 속에 상징으로 드러나는 맥놀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걸 텐데요. ‘나’와 아내의 관계, ‘나’와 천칭과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이 소설을 다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왜냐하면 소설 안에서는 ‘부장님’이라고 불리는 직원이 등장하잖아요. 소설 화자처럼 평사원임에도 불구하고 프리미엄 버스를 타는 인물이죠. 그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의 ‘말’들도 분분하고요. 그 사람이 회사를 그만둔 이유가 ‘다른 회사에 스카웃 된 것이다’라는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사실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 그만둔 것이라는 진실이 밝혀지게도 되고요. 그렇다면 사실 ‘나’ 역시 ‘부장님’이라는 인물과 같은 위치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이것과 저것은 어떻게 연결시켜서 생각해볼 수 있을까? 하면서 여러 의문이 들었던 것 같아요.

 

장수라 : 김지윤 씨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읽으면서 미미하게 내부에서 거슬리는 지점이 있었는데, 소설 앞부분의 버스 장면이 조금 길게 느껴졌을 때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작가가 웃음 코드를 유지하려 의도적으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경쟁사회에서 살아 남기위해 매일 야근을 하고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아픈 배를 움켜쥐며 ‘공진’에 적응하는 모습을 슬프거나 어둡지 않게 풀어놓은 작가의 여유가 느껴졌어요.

 

김지윤 : 인물이 버스에서 계속해서 멀미를 하는 이유는 아내의 말처럼 공진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공진의 이유는 버스 안에서 계속해서 들려오는 ‘말’ 또는 ‘정보’라고 ‘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이에요. 나중에 프리미엄 버스가 한 대 더 생길 것이라는 얘기가 들려오고 다른 사원들 역시 이 버스에 승차하기 위해 대기번호까지 뽑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소 짐작 가능하게 경쟁사회에 대한 비판의 의미로 이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렇다면 ‘나의 공진’의 원인은 직장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고요. 작품 후반부에 회사 건물이 공진 때문에 흔들렸고 그 시각 화장실에 있던 사람이 ‘나’ 뿐이었다고 나오는데요. 그 장면에서 초반부에 등장하는 변기 뚜껑이 사라진 장면이 떠오르긴 하지만 전체 이야기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는 조금 실패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김보배 : 부장님이라 불리는 남자는 회사와 자신 사이의 공진을 완충해줄 댐퍼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나간 거라고 생각했어요. 버스에서의 멀미는 댐퍼가 흡수하는 어떤 힘처럼 느껴졌어요.

 

이영순 : 저는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않고 ‘나’의 5년 후배인 부장님이라는 직원은 이 회사와는 진동수가 겹쳐서 잘 안 맞기 때문에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른 곳을 찾아간 것으로 생각했어요. 화자인 ‘나’는 나름대로 회사와의 관계에서 댐퍼를 찾았기 때문에 계속 다니는 것으로요. 의미를 꼼꼼히 따지기보다 저는 편안한 마음으로 읽었어요. “공진은 사랑을 일으키지만,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진동수가 겹치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고 말이다”라는 문장이 와 닿았어요. 진동수가 겹치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 맥놀이이고, 스프링, 댐퍼 이런 것들이 충격을 줄여주면서 파국이 오지 않도록 맥놀이를 일으킨다는 것. 내가 사는 삶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여운이 남았다고 할까요.

 

정홍수 : 김지윤 씨처럼 충분히 읽을 만한 게, 이 소설의 삽화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는 재미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조금 산만하다는 느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공진이나 맥놀이는 하나의 보조관념일 뿐, 삶 자체의 복잡성이나 모순을 다 담아낼 수는 없는 거죠. 아마도 그런 게 이런 계열의 소설이 갖는 어려움일 거예요. 결말에서 버스가 매뉴얼대로 가느냐 아니냐 하는 지점을 질문으로 남겨두면서 모호하게 처리한 것도 그런 고민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단편소설의 단일성, 그런 측면에서는 잘 모이지 않는 부분이 분명 있는 거죠.
오늘 세 편 소설 모두 재미있고, 이야기할 대목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상상력의 신선함이 돋보였던 것 같네요. 긴 시간 수고 많았습니다.

 

 

   《문장웹진 2017년 11월호》

 

 

추천 콘텐츠

육지에서 쓴 일기

[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