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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이야기하는 여섯 가지 시선 - 한국문학의 명장면

  • 작성일 2017-11-01
  • 조회수 1,941

[기획]

 

 

오늘을 이야기하는 여섯 가지 시선
- 한국문학의 명장면

 

 

 

 

하나.
박민정, 「버드아이즈 뷰」

 

강지희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박민정, 「버드아이즈 뷰」
《문학들 41》, 문학들, 2015년.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400"]박민정, 「버드아이즈 뷰」
『제6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6년.
[/caption]

 

 

    재혁은 자신을 찍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오래 전부터 꿈꿔 온 풍경이었다. 자살을 중계하는 쓰레기 같은 뉴스 카메라. 그가 사랑하는 호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디스토피아였다. TV뉴스채널이 쓸데없이 많아질 때 재혁은 그가 꿈꾸던 장면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반정부 집회 장면을 비추며 집회 참가자가 든 피켓에 쓰인 폰트가 북한에서 쓰이는 폰트라는 내용을 진지한 얼굴로 아나운싱하던 여자를 보던 날 재혁은 자신의 날이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미래는 항상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다. 엿 같은 모습으로. 재혁은 트위터에 멘트를 남겼다.
    재혁은 리모콘을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의 발치에 이미 스마트폰이 있었다. 꽃신을 벗어 두고 강물로 뛰어드는 소녀처럼. 재혁은 갑자기 이런 죽음의 장면이 진부하게 느껴져 당황했다. 겨우 술 먹고 뻗은 여자애들의 몸을 핸드폰 카메라로 몰래 찍던 녀석이 떠올랐다. 너도 찍어 봐. 괜찮아. 녀석이 하도 간곡하게 애원해서 재혁은 그 짓에 동참하는 흉내를 냈을 뿐이었다. 녀석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자신에게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대학 시절 녀석은 굳이 재혁에게 메일을 보냈다. 법대 간 소식 들었다는 둥, 다행이라는 둥, 보태 준 것도 없이 주제넘게 지껄이는 내용이었다. 주원은 자신은 오랫동안 깊이 반성 중이라고 떠들었다. 차라리 누가 나를 벌해 주었으면 좋겠어. 누나들에게 너무 미안해. 왜 나를 벌해 주지도 않지. 애초부터 재혁에게 솟대 녀석들은 죄다 하찮은 녀석들이었지만, 주원이라는 녀석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찐따 같은 행동이 지나쳤다. 재혁은 메일을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따위로 딸딸이나 치면서 살아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랑 내가 정말 잘못했다, 를 반복해서 뇌까리면서.

 

- 박민정, 「버드아이즈 뷰」 중에서

 

 

    올해는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세상에 내놓은 지 십 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에서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나온 지도 정확히 십 년이 되었다. 이 둘이 결합하면서 현실에서는 더없이 궁핍하고 무력하지만, 사이버 세상에서는 무엇이든 실현가능하다는 전능감을 느끼는 기이한 존재들이 탄생했다. 지난 십 년이 일베, 몰카, 소라넷, 여성혐오, 김치녀, 메갈리아 등의 키워드로 점철된 것은 바로 이 어긋난 접합의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격렬하게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며 만들어진 전선은 이제 세대 사이가 아니라 젠더 사이에 놓여 있다.
    위에 인용한 장면에서 ‘재혁’은 SNS를 통해 미리 세상에 예고한 자신의 자살을 실행에 옮기려는 중이다. 남성연대 대표였던 ‘성재기’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자학적 쇼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주목받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이를 단순히 원한 감정에 사로잡힌 루저의 일탈 행위로 보기는 어렵다. 재혁은 강남의 사립고와 서울법대 출신의 남자로 상정되어 있고,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세상 전체에 대한 멸시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재혁에게 유독 짙은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주원’에 초점을 맞춘다. 고등학교 시절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해 적극적인 자기반성을 드러내고 다니는 주원의 기만적인 면모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자신의 정치적 온건함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흔들어 놓는다.
    전체를 조감하는 ‘드론의 시선’은 재혁을 매개해 욕실에서 몰래 훔쳐보는 내밀한 ‘몰카의 시선’으로 매끄럽게 연결된다. 2000년대 초중반 편의점, 옥탑방, 고시원 등에서 고립되어 있던 청춘들은 지난 십 년 사이 쉴 새 없이 외설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하거나, 훔쳐보는 대상이 되었다. 세상을 조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버드아이즈 뷰’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개인과 사회는 이렇게 과잉 시선으로만 연결된다. 혼자 있을 때에도 온갖 SNS와 뉴스와 카톡으로 늘 함께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고독은 오히려 선망할 만한 특별한 존재방식이 되어 가는 중이다. 당신은 정말 재혁의 내면이 궁금한가? 하지만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서로의 내면을 알아보는 방식 역시 이미 파편화되어 있는 SNS의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자살을 중계하려는 죽음 충동과 타인의 육체를 훔쳐보는 에로스 사이에서 분열하는 재혁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매혹과 혐오 사이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되어 가는 우리의 존재 양태를 고스란히 노출한다. 박민정의 「버드아이즈 뷰」는 기민한 시대감각으로 가장 먼저 도착한 미래의 소설이다.

 

 

 

 

 

작가소개 / 강지희

이화여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둘.
서유미, 「검은 문」

 

고봉준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서유미, 「검은 문」
《문장웹진》 201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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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400"]서유미, 「검은 문」
『당분간 인간』, 창비,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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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쁠 것 없는 저녁이었다. 하지만 211번은 이런 평화가 거짓처럼 느껴졌다. 99번과 123번은 하루 종일 출구가 없는 것처럼, 등 뒤가 벽으로 막힌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의 생활은 철저히 철창과 배식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숫자와 밥그릇에 매여 있었다. 211번은 고개를 돌려 출구를 힐끗 보았다. 그것은 검고 음험한 수수께끼처럼 여전히 거기 있었지만 지워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출구는 외면하고 살 수 있지만 끼니때마다 제공되는 음식과 사탕, 쌓아 놓은 숫자, 새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무서운 것은 등 뒤의 출구가 아니라 눈앞에 버티고 있는 생활이다.”

 

- 『당분간 인간』, 창비, 2017, 215쪽.

 

 

    이 소설은 문학의 미적 가치가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독창적인 방식의 창조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숫자로만 지시되는 죄수들,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기계적으로 ‘벽돌’을 돌리는 행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숫자의 증가에 집착하는 강박…….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 정체불명의 ‘큐브’를 연상시키는 감옥 구조는 우리의 일상적 배치를 보여주는 알레고리적 장치들이다. ‘출구’를 향한 주인공의 탈주가 결국 ‘철창’으로 되돌아오는, ‘출구’ 없는 세계의 불가능성도 흥미롭지만, 현실 또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부조리극의 무대처럼 세부적인 맥락을 모두 제거해 버린 형식,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최소의 장치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면모를 복합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실 ‘세계’와 ‘현실’의 부조리한 측면을 드러내는 작품들은 많다. 하지만 그것을 독창적인 말하기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은 드물다. 낯선 이야기 방식으로 익숙한 우리 ‘세계’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이 지닌 매력이다.

 

 

 

 

 

작가소개 / 고봉준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다른 목소리들』,『유령들』『비인칭적인 것』이 있음. 현재 계간 《포지션》, 월간 《시인동네》편집위원.

 

 

 

 

 

 

 

셋.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김대산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문학과지성사, 2011년.

 

 

    “나는 오래도록 너무도 작위적인 삶을 살아왔고, 이제는 작위적인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웠다. 내가 작위적인 삶을 산 것은 삶의 그 무엇도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그에 따라 삶에 진지할 수 없었고, 삶의 어떤 사실들이 아니라 그 사실들에 대한 생각들에만 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나의 삶의 가장 큰 실질적인 어려움이기도 했다.”

 

-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문학과지성사, 2011년, p.190

 

 

    정영문의 소설은 생각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우리 모두는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을 생각하는 일은 드물다. 생각이 생각된 대상으로 표상(재현)되기 이전에 발생하는 생각의 현실적 운동의 과정을 경험하는 일은 더욱 드물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연적인 감각세계와 사회적 관습의 세계에 대한 적응을 강요하는 실용적 삶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쁜 사업적 생활(혹은 생존) 속에서 생각 자체를 생각할 틈이 없다. 생각은 항상 생각의 현실이 아닌 다른 현실로 대체된 실용적 삶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실용적 삶에서 분리된 순수한 생각의 현실성은 비-현실성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대인이 처해 있는 의식 속에서 물리적 세계와 분리된 생각 자체는 비-현실적(혹은 비-사실적) 허구이거나 무용한 추상물이다. 정영문의 소설이 생각을 생각하기를 주제화하면서 드러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렇게 ‘그 자체로 생각된 생각 자체가 갖는 비-현실적 무능함에 대한 현대인의 일상적 의식’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과 사물(혹은 언어와 존재)을 대립시키듯이 생각과 실천적 행위를 대립시킨다. 즉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말한다. 말이 사물이 아니듯이, 생각은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과 생각을 부정하는 일도 역시 말과 생각의 일(활동)이다. 말과 생각을 부정하면서 사물과 행위에 이르는 길은 인간에게 없다! 그러므로 정영문 소설에 등장하는, 말과 생각에 작위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의 유희적 말과 생각은 인간의 숨겨진 본성(말과 생각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 말과 생각과의 본질적인 내적 관계성을 갖는 존재)에 관한 진지한 관찰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파악된 말과 생각은, 대개 자연과학이 그렇게 하듯이, 어떤 주관에 맞세워져 그 주관과 분리된 객체 같은 것으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일반적으로 생각을 생각하는 학문으로 알려진 논리학에서처럼 형식적으로 관찰되는 것도 아니다. 주관과 객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함이 없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말을 말하고 생각을 생각하는 일, 혹은 말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말하는 일에 관한 진지한 관찰과 결합된 유희적(놀이적) 서술은 문학의 가능성에 속한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을 위해 왜 작위적이거나 허구적인 공간이 필요한지, 혹은 왜 창조성이 요구되는지 등에 대한 물음의 해답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말과 생각의 비밀스러운 본성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 비밀스러운 본성은 존재인가 무인가? 의미인가 무의미인가? 정영문의 소설은 그런 물음과 연관된 삶의 어려움을 ‘진지한 언어놀이와 관련된 창조적 활동’으로 파악될 수 있는 문학적 예술로 변형시키고 있다.

 

 

 

 

 

작가소개 /김대산

1974년 출생. 2006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으로 등단. 평론집 『달팽이 사냥』(2011)이 있음.

 

 

 

 

 

 

 

넷.
황정은, 「백의 그림자」

 

노태훈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황정은, 「백의 그림자」
『세계의 문학 133』, 2009년.
[/caption]
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년.

 

 

은교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 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39쪽

 

 

    어떤 작가는 그저 좋은 작품을 써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스타일과 정서를 만들어 당대 소설의 흐름과 분위기마저 바꿔 놓는데, 정확히 황정은의 지난 십 년이 그랬다. 2008년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로부터 2016년 『아무도 아닌』에 이르기까지 황정은은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걸으면서 한국 소설을 좀 더 섬세한 쪽으로, 좀 더 사려 깊은 방향으로 밀고 왔다. 황정은 소설의 인물들은 슬픔과 쓸쓸함을 꾸준히 단련해 쉽사리 절망이나 체념으로 빠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게끔 스스로를 곱씹는 힘을 보여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어쨌든 그들에게는 삶이 지속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함을 끈질기게 증명해 왔다. 그것은 그들을, 그리고 이 세계를 오래도록 응시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시선이었고, 그러한 시선은 때때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빛나는 눈으로 포착해 내는데, 오래된 전자상가를 배경으로 은교와 무재의 사랑을 그려낸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한국어로 쓰인 문장과 대화가 어떻게 그토록 낯설면서도 정확할 수 있는지, 그래서 그 흔한 사랑 이야기 없이도 얼마나 풍성한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속한 세계가 왜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되는지, 이 소설은 정말로 아름답고 감각적으로 증명한다. 지금도 황정은 문학의 본령은 이 작품에 있고, 우리가 끝내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할 세계의 한 풍경도 이곳에 있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꽤 오랫동안 생각하고, 바라게 될 것이다. 은교와 무재가 여전히 서로를 확인해 가며 무사하기를.

 

 

 

 

 

작가소개 / 노태훈

문학평론가. 1984년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다섯.
박성원, 「고백」

 

서희원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박성원, 「고백」,
『문학과사회 100』, 문학과지성사, 2012년.
[/caption]
박성원, 『고백』, 현대문학, 2015년.

 

 

   “나는 월리스 컬렉션의 「Daydream」을 신청하고는 술을 마셨어. 난 ‘젖 나오는 남자’에게 물었어. 이봐, 대체 저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라고. 그러자 박성원이 말했어. 글쎄, 하고 말이야.”

 

- 박성원, 『고백』, 현대문학, 2015년, 38쪽.

 

 

    “한국 문학의 명장면”을 추천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유의 범위를 ‘나’로 한정한 후 잊히지 않는 하나의 장면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고백」의 마지막 장면에서 발췌한 이 문장에는 네 개의 고유명사가 등장한다. 월리스 컬렉션(Wallace Collection)은 근대 유럽 장식미술의 걸작들을 모아 놓은 미술관이 아니고 1960년대 말 결성된 벨기에 출신의 록밴드이다. 그들의 대표곡인 「Daydream」은 영화 <미스터 노바디(Mr. Nobody, 2009)>에 삽입되어 영화팬들의 귓가에 아른거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 명의 등장인물인 ‘나’와 친구인 ‘젖 나오는 남자’, 그리고 실제 작가의 이력을 참조한 인물 ‘박성원’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동일인물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듣지 않는 오래된 음악을 틀어 주는 LP바에서 ‘나’, ‘젖 나오는 남자’, ‘박성원’이 나누는 이 대화는 사실 분열된 자아가 나누는 독백에 불과하며,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고백」의 모든 장면에서 예술, 특히 소설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고민을 대화와 사건으로 펼쳐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마지막 장면에서 독백임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정신이 분열된 한 자아의 기록으로 읽어야 하나? 아니면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는 사라져 가는 예술을 향수하고 간직하려는 자아의 안간힘으로 읽어야 하나? 내게는 후자로 읽힌다. 저 많은 사람들은 여기가 아닌 어디로 가버렸고,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을 들으며, 이젠 아무도 읽지 않는 문자예술의 한 장르에 대해, 아무하고도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의 「고백」을 읽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쓸쓸했지만,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작가소개 / 서희원

2009년 《세계일보》,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으로 등단. 《문예중앙》 편집위원 역임. 지금은 《현대문학》 편집자문위원.

 

 

 

 

 

 

 

여섯.
배명훈, 「예술과 중력가속도」

 

허희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배명훈, 「예술과 중력가속도」
      『창작과비평 150』, 2010년.
[/caption]
배명훈, 『예술과 중력가속도』, 북하우스, 2016년.

 

 

    은경 씨는 몸을 잔뜩 구부려 온몸에 힘을 가득 모으더니 몇 발인가를 빠르게 앞으로 내디디며 공중으로 힘차게 뛰어올랐다. 그리고 두 팔을 자연스럽게 벌리고 가슴을 쫙 편 다음 긴 목선이 최대한 드러나도록 목을 쭉 뻗었다.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언젠가 은경 씨가 한 말처럼 천장에 닿을 듯 굉장한 점프였다. 저쯤 가면 이제 아래로 내려가겠지 하는 지구인의 상식 때문에 위로 솟구쳐 올라가는 은경 씨의 동선이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제는 떨어지겠지, 이제는 떨어지겠지. 은경 씨는 그런 상식의 착각을 세 번이나 저버리고 계속해서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등에 로켓 엔진이라도 단 듯, 누군가 위에서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 아니, 처음부터 하늘에 속해 있던 사람이 온몸에 지워진 중력의 구속을 끊어내고, 마침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은경 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그시 감은 눈, 온몸 가득 무언가 소중한 것을 품은 듯 애틋한 표정. 저런 거였구나! 나는 처음으로 진짜 은경 씨를 만난 것 같았다. “예술 하는” 은경 씨. 환희에 찬 은경 씨. 다시는 보지 못할 은경 씨의 진짜 얼굴. 은경 씨는 그 상태 그대로 영원히 지면에 닿지 않을 것처럼 공중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 배명훈,『예술과 중력가속도』, 북하우스, 2016, 196쪽.

 

 

    은경 씨는 달에서 예술―현대 무용을 했다. 하지만 달 기지가 폐쇄되면서 그녀는 지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지구 중력은 달의 6배이다. 달에서 할 수 있었던 어마어마한 도약을 더 이상 은경 씨는 할 수 없게 됐다. 그녀의 남자 친구인 ‘나’의 말마따나, “달 출신들에게 지구의 중력이란 엄연히 실체를 가진 짐이었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은경 씨가 ‘나’에게 티켓을 한 장 준다. 달 환경을 재연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 입장권이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점프를 보여줄 수 있다고,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보러 와야 한다고 ‘나’에게 말한다. 은경 씨와 결혼을 약속한 마당에 뭐가 대수겠는가. 기꺼이 ‘나’는 공연이 열릴 미국으로 향한다.
    그런데 공연장에 도착하고 보니 이상한 느낌이 든다. 고래를 닮은 커다란 비행기가 공연장이었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탑승하자 비행기는 이륙한다. 그리고 서서히 하늘로 솟구쳤다가 갑자기 곤두박질친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그러나 관객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공연에 맞게 중력의 크기를 조정하는 것이다. 엄청난 멀미에 시달리며 구토를 하는 사람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와중에 은경 씨가 출연하는 공연이 시작된다. 그녀는 “처음부터 하늘에 속해 있던 사람이 온몸에 지워진 중력의 구속을 끊어내고, 마침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점프를 했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멀미를 잊고, “공중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은경 씨에게서 경이감을 느낀다.
    물론 우리는 안다. 은경 씨가 하는 예술도 결코 중력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아무리 높이 올라도 그녀는 결국 지상으로 내려오고 말 것이다. 노력해 봐야 어차피 환경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식의 빤한 체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은경 씨가 증명했듯이, 예술은 잠시나마 모든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에너지를 갖는다. 또한 그것은 ‘나’에게서 드러나듯이, 예술가가 아닌 예술을 감상한 사람마저 예술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파급력이 있다. 문제는 구조적 억압—중력이 아니라고, 이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예술로 한번 훌쩍 초월해 볼 수 있지 않겠냐고, 「예술과 중력가속도」는 은경 씨가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우리에게 제안한다.

 

 

 

 

 

작가소개 / 허희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 평론 부문에 「감각적 경계인의 정치적 사색―김경주론」과 「잔혹한 세계 : 청춘의 테제―김사과‧윤이형‧박민규 소설에 나타난 청춘의 양태」가 당선되며 등단.

 

 

 

   《문장웹진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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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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