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젊은작가의 樂취미들] 너무 맛있는 빵

  • 작성일 2016-01-05
  • 조회수 1,771

 

[젊은작가의 樂취미들]

 

 


너무 맛있는 빵

 

 

 

임솔아

 

 

 

 

    그 방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창으로 된 벽, 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남쪽으로 난 창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빛이 방에 가득 찼다. 창 앞에 서 있으면, 창밖으로 작은 도로가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작은 도로를 따라 이어진 번화가도 보였다. 손을 꼭 잡고 있는 커플이나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나 교복을 입고 있는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따위를 들고 걸어 다니는 것이 보였다. 번화가 가운데에는 야외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주말마다 소소한 공연이나 행사가 열렸다. 음악소리와 박수소리가 내 방에까지 들려왔다. 무대 가장자리에서 색색의 풍선을 파는 장수도 보이곤 했다. 무대 너머로는 또 다른 도로와 건물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그 겹겹의 끝 너머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강이 흐르는 것도 보였다. 아름다운 창이었다. 나는 그 창이 싫었다. 그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도, 창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도 싫었다.
    몸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몇 개의 핀을 가리키며 의사는 조심하라고 말했다. 행인이 핀을 치기라도 한다면, 다시 뼈가 부러질 것이라 했다. 다시 부러지면, 다시는 붙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환부에는 피딱지와 고름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고, 제대로 씻지 못해 안 좋은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밖으로 나가 몇 걸음 걸어 보려 하면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환부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누군가 유리조각이 자잘하게 붙어 있는 실로 내 발을 칭칭 감고 조금씩 실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행인이 내 옆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그가 내 몸을 칠까 두려웠고, 내 몸 냄새를 맡을까 봐 부끄러웠다. 결국 방 안에 틀어박혀 꼬질꼬질한 내 발과 밝은 창만 번갈아 보며 애꿎은 창만 미워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때 빵 생각이 났다. 일곱 살 때 엄마는 ‘계란빵’이라는 간식을 만들어주었다. 엄마가 빵을 만드는 동안 나는 엄마 앞에 쪼그려 앉아 빵 만드는 과정을 구경했다. 날계란을 반으로 쪼개, 양쪽 계란 껍데기에 노른자를 왔다 갔다 하며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했다. 양푼에 흰자만 가득 모아서 거품기로 한없이 저었다. 오른손으로 젓다가 왼손으로 젓다가 일어나서 젓다가 다시 앉아서 저었다. 투명했던 흰자는 조금씩 하얘지다가 나중에는 크림처럼 응고되었다. 머리 위로 양푼을 거꾸로 들어 올려도 흰자가 흘러내리지 않게 되면, 노른자와 설탕과 밀가루를 넣어 반죽을 완성했다. 반죽을 커다란 프라이팬에 부었다.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에 올린 후 가장 약한 불로 오래도록 구웠다. 반죽을 만드는 일도, 빵을 굽는 일도, 하루 종일 걸린다고 느낄 정도로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집 밖으로 놀러 나가지 않았다. 빵집에서 파는 빵에 비해 부드럽지도 달콤하지도 않았지만,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빵 냄새를 맡으며 부엌을 서성이는 일보다 설레는 일은 없었다.
    냉장고로 걸어가 계란을 꺼냈다. 엄마가 했던 대로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하고, 흰자를 휘젓기 시작했다.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흰자는 계속 투명하고 미끌거리기만 했다. 액체를 휘저어 어떻게 고체로 만들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젓다가 왼손으로 젓다가 일어나서 젓다가 다시 앉아서 저었다. 팔이 떨어질 것 같다가, 팔이 떨어질 것 같다는 느낌도 없어진다고 느낄 때쯤, 흰자가 하얀색을 띠기 시작했다. 완성된 반죽을 프라이팬에 부은 다음,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조금씩 퍼져 가는 빵 냄새를 맡고 있을 때, 쪽지 한 장이 떠올랐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나를 들춰 업고 사방팔방을 뛰어다닌 남자가 있었다. 모르는 남자였다. 그가 나를 업고 돌아다니는 동안 그의 얼굴에서 땀이 뚝뚝 흘러내려서 그의 목에 두른 내 팔이 다 젖었던 것이 기억났다. 119는 고사하고 도시 전체에 제대로 된 병원 하나 없는 외국의 시골 마을이었다. 그는 나 대신 다른 도시의 큰 병원을 알아봐 주었고, 그 병원까지 가는 차편도 마련해 주었다. 모르는 남자의 도움으로 나는 가까스로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위 말하는 골든타임을 삼십 분 앞두고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와 헤어질 때 그는 필요할지도 모른다면서 쪽지 한 장을 내게 주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쪽지를 찾아 펼쳐 보았다.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는 변 씨 성을 가진 남자였다. 이메일 아이디는 sattonari, ‘사또나리’였다. ‘변사또’라니. 오랜만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변사또나리님께 이메일을 썼다. 지금 난생처음으로 계란빵을 구웠다고. 익어 가는 빵 냄새를 맡으면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다고. 모든 것이 당신 덕분이라고. 감사하다고.
    첫 빵은 완전히 망했다. 윗부분에서는 익지 않은 반죽이 텀벙거렸고, 아랫부분은 새까맣게 타버렸다.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작은 도로를 지나고 상점들이 즐비한 번화가를 지나서, 통신사에서 행사를 진행 중인 야외무대를 지나고 또 다른 건물들을 지나서 마트에 들어갔다. 통장에 있는 돈을 모두 인출해서 오븐을 샀다.
    따뜻하고 밝은 햇살이 싫어지고, 그 햇살을 싫어하는 내가 더 싫어질 때마다 빵을 만들었다. 빵을 기다리면서 가끔, 그 남자에게 편지를 썼다. 엄마가 만들어주던 계란빵이 카스텔라의 한 종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베이킹파우더와 이스트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배꼽이 볼록하게 나오도록 마들렌을 구울 수 있게 되었고, 빵틀과 제빵 주걱과 제빵용 저울과 전동 거품기를 하나씩 하나씩 구입하게 되었다.
    빵을 만들지 않는 대부분의 날에 나는 괜찮았다. 그러다 햇살을 원망하는 날들이 쌓여 갔고, 빵이 맛있게 구워졌다. 점점 맛있어지는 나의 빵을 한 입 베어 물면서 생각했다. 너무 맛있는 빵은 만들지 말자고.

 

 

    마들렌 만들기.

 

    준비물 - 밀가루, 계란, 설탕, 버터, 베이킹파우더, 소금

 

    1. 밀가루, 설탕, 버터를 1:1:1 비율로 준비한다.
     (저울로 정확하게 계량하면 좋지만, 대충 해도 별탈은 없다. 각각 100g씩 준비하면, 마들렌 12개를 만들 수 있다.)
    2. 밀가루와 설탕, 베이킹파우더 한 꼬집과 소금 한 꼬집을 그릇에 넣고 섞는다.
      (체로 쳐주면 좋지만 안 쳐도 상관없다.)
    3. 계란 몇 알을 넣고 살살 휘저어 준다.
     (밀가루 100g 기준 2알. 이때 녹차가루를 넣으면 녹차 마들렌이 되고, 레몬 껍질을 넣으면 레몬 마들렌이 된다. 나는 바닐라 향을 넣지만, 아무것도 안 넣어도 맛있다.)
    4. 전자레인지로 버터를 녹인다.
     (펄펄 끓는 버터를 반죽에 넣으면 계란이 익어버리니까, 잠깐 동안 냉장고에 넣어 살짝 식혀 준다.)
    5. 버터를 반죽에 넣고 완전히 섞일 때까지 휘저어 준다.
    6. 반죽 완성. 그릇을 랩에 싸서 밀봉한 다음, 냉장고에 넣고 기다린다.
     (나는 3시간 정도 기다린다. 빨리 굽고 싶어도 잘 참고 기다려야 배꼽이 볼록한 마들렌을 만들 수 있다.)
    7. 숟가락으로 반죽을 떠서 빵틀에 놓는다.
     (빵틀에 식용유나 버터를 바르고 그 위에 밀가루를 솔솔 뿌려 놓은 후에 반죽을 떠 넣으면 나중에 빵틀에서 빵이 잘 떨어진다. 빵틀이 없으면 작은 컵 같은 것을 써도 상관은 없다.)
    8. 예열된 오븐에 넣고 구워 준다.
     (나의 경우 180도에서 15분 굽는다. 오븐에 따라 다르니까, 살펴보면서 굽도록 한다.)
    9. 꺼내 먹는다. 냠냠.

 

 

작가소개 / 임솔아 (시인)

-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2015년 『최선의 삶』으로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

 

   《문장웹진 2016년 1월호》

 

추천 콘텐츠

육지에서 쓴 일기

[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