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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녹슨 꽃 외

  • 작성일 2015-12-02
  • 조회수 1,129

 

[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녹슨 꽃

 

 

 


강정

 

 

 

 

희열에 찬 눈을 보고 있으면 많이 생각난다
내가 그것을 보고 있지 않을 때도
너의 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이 고체처럼 느껴질 때도
긴 섹스가 어두운 사막 속에서 차가운 돌을 꺼내는 일 같을 때도

 

내 입맛은 텁텁하고 무거웠다
피부를 떼어내면 비명 대신
입안에서 붉고 차가운 항아리 같은 게 쏟아져 나올 거다

 

너는 꽃이라 여겨 방긋 웃고
나는 근육마다 굳어 있는 피를 벗겨낸다

 

푸르스름했다가 누랬다가 다시 하얘지는 그것은
착각의 거울이었다
이를테면, 죽음의 여러 낯빛이었다
산 사람의 열망을 해체한 도끼날처럼
행동과 판단 사이를 쪼개 놓은 물체의 그림자였다

 

벽 앞에 서 있다
꽃이 흠집처럼 꽂혀 있다
오래 닳아 가루가 돼버리기 직전인 쇳덩이의 벽
죽음 쪽에서 버짐 핀
영생의 총안 같은 膣

 

너는 꽃이라 여겨 피워 올리려 하고
나는 온몸으로 퍼뜨려 더 큰 상처로 내보이려 하는

 

 

- 2015년 《21세기 문학》 여름호 수록

 

 

 

 

 

 

서로의 아픈 등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어서 가만히 눈만 바라보았다. 소리는 없지만, 그리고 언어로 표명된 그 어떤 뜻도 의도도 없지만, 눈의 반짝임은 별 같기도 꽃 같기도 했다. 비유가 식상하거나 유치하다면 미안하다. 너에게가 아니라, 단어 자체에게. 그리고 굳이 그 단어를 들어 네 눈을 수식하려 한 나에게. 잠깐씩 눈꺼풀을 깜빡여 눈동자가 감춰지면 그제야 네가 내게 하려던 말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아 암담했다. 그건 너 자신도 모를 말이고, 내가 듣고 싶었던 말도 아닐뿐더러, 이 세계가 우리에게 던져 준 그 어떤 의미 맥락 안에도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그 짧은 순간 나타났다 사라진 말의 그림자를 좇아 서로가 상대의 눈에 자기의 말을 얹어 보려는 노력뿐이다. 쓰면 쓸수록, 그리고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전달 불가능하고 멀기만 한, 네 안에서 반짝이다 별이나 꽃이 되어 사라질 말들.

 

우리는 서로의 벽이 된다. 가느다란 금이 그어진 벽. 밋밋해 보이나 만져 보면 까끌까끌한 상처의 표면이 상대의 피부를 아프게 하는 벽. 코앞에 있으나 결국 서로만의 것이 되기 힘들어 스스로 문을 닫는 외로우나 오만한 벽. 거기 꽃이 피었다. 그 꽃을 통해 어느 먼 광년의 시간, 우리보다도 훨씬 먼저 더 절박한 우리였던 어떤 별의 흔적을 더듬는다. 손은 바스러지고 눈은 암흑 속을 떠돌며 서로를 향하던 몸의 통각들이 짐짓 흉기로 변한다. 나는 아프다, 란 말이 너를 아프게 하겠단 말이 되고, 너를 사랑해, 라는 감정이 네 죽음을 보겠어, 로 전이돼 시간의 더 깊은 파형을 시리도록 각인케 한다. 그렇게 서로의 상처 난 등에 꽃이 피었다. 서로의 과거가 미래의 별이 되어 뒤늦게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 함께 폭사한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시간. 너는 있다. 그리고 내가 있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짧은 시간이 그렇게 우주의 다른 영역에서 만나고, 부딪치고, 영원이 된다.

 

그렇게 다시 돌아선 벽에 꽃이 피었다. 그걸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작가소개 / 강정(시인)

-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했다. 시집 『처형극장』『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키스』가 있고, 문화비평집 『루트와 코드』를 펴냈다.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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