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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신간리뷰] 살, 삶, 사라짐 그리고 사랑

  • 작성일 2015-09-01
  • 조회수 962

 

[문학 신간 리뷰]

 

 


살, 삶, 사라짐 그리고 사랑

- 안주철, 『다음 생에 할 일들』(창비, 2015) 리뷰

 

 

 

김태선(문학평론가)

 

 

 

 

book    사랑하는 이에게 다음 생에 할 일들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의 목소리는 쓸쓸한 느낌으로 들려온다. 무엇 때문일까. 다음 생이라는 말은 지금 이 생의 지나감을 전제로 한다. 다음 생과 지금의 삶 사이엔 현존하는 존재자가 건너 뛸 수 없는 심연이 자리한다. 벽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심연, 혹은 벽이란 건 나와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내가 쓰는 말처럼, 내 몸처럼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달라붙어서 나와 당신이 만나는 곳 사이에 놓여 있다. 몸과 말은 나와 타자를 만나게 하지만 동시에 둘을 분리시키는 벽, 인간은 이들을 얻는 순간과 함께 고독의 상태에 처하게 된다. 한 사람이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개체가 되는 사건이 바로 몸과 언어를 얻는 일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고독의 근원이다.
    고독의 상태는 존재의 결핍을 일컫는 게 아니라 근원의 순간부터 함께했던 상태가 주체에게 미치는 영향의 지속이다. 근원이라는 건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살갗처럼 표면에 있으며 언제나 함께하는 것의 이름이다. 때문에 인간은 매순간 함께 있어도 함께하지 못하는 것들의 이름을 부른다. 이를 두고 결핍이라 이름 붙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고독함은 타자를 부르는, 타자와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실증적 역량의 심급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어떠한 공통된 것이 없음에도 공동체를 이루는 요건이 자리한다. 안주철 시의 운명은 바로 그러한 자리에서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바깥과 유리시킴으로써 쓸쓸하게 만드는 벽이 되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자리인 ‘살’이 『다음 생에 할 일들』에서 주목할 시어다. 우선 살에 대해 살펴보자.

 

    물을 버리기 위해 대야에 들고 밖에 나가
    엄마의 허연 뼈 한마디를 들고 서서 고민한다.
    누구에게 엄마라고 불러야 하지?

    거울 속에 다시 노을이 끓는다.

    나는 내 살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

        - 「겨울이 내 살을 만진다」 중에서

 

    「겨울이 내 살을 만진다」에서는 저녁에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끓는 물을 대야에 담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말한다, “우리 집은 노을이 필요하지 않다”고. 노을은 어둠이 찾아오기 직전의 이름이다. 집에 이미 어둠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까. 빛과 달리 어둠은 차갑고 슬픈 기운을 느끼게 한다, 마치 겨울처럼. “겨울을 피해” 따뜻한 온기를 찾아 ‘늙은 개 워키’가 곁에 다가오자 그는 “저리 가”라며 매정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뒤에 이어지는 연들에서 밝혀진다. 곧, 따뜻한 물은 발을 다친 엄마를 위한 것.
    하지만 늙은 개 워키도 곧 어미가 될 몸, 아마도 따뜻한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의 이어지는 말은 이렇다. “구석에서 새끼를 낳는다. 낳다가 좁은 방을/ 돌아다니며 피를 흘린다. 몇 마리일까?” 한 생명이 살로 덮인 몸을 얻어 어미와 분리되는 탄생의 순간은 이처럼 출혈로 표현되는 아픔이 뒤따른다. 살을 얻은 개체는 다른 것들과 분리된 단독자가 된다. 동기가 여럿이라도 그들은 결국 각각 하나인 존재자들이다.
    그는 갓 태어난 새끼의 등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두고 “물고기들이 천장을 향해 헤엄을 친다”고 말한다. 차가운 겨울에 태어난 생명이지만 그 몸은 따뜻하다. 그러나 그 따뜻한 기운은 물고기가 되어 다시 “천장을 향해” 도망친다.(이처럼 나타남은 사라짐을 예비하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엄마가 쓸 대야에 담긴 따뜻한 물과 연결된다. 그는 엄마가 쓸 수 있도록 물을 식힌다, “물이 식는 속도를 센다./ 물고기를 세는 방법으로/ 물고기가 더 이상 도망가지 않을 때까지”.
    「겨울이 내 살을 만진다」에서 엄마가 발을 다친 이유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그 아픔은 화자인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만은 시에 드러나는 정서로 알 수 있다. “발가락을 감고 있던 붕대가 풀리자/ 피가 쏟아진다.” 이 구절은 마치 ‘늙은 개 워키’가 새끼를 낳다가 좁은 방에 피를 흘리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분명 살을 입은 몸임에도, 그러한 살로 인해 분리되어 개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들임에도, 그 모습들이 보여주는 닮은꼴과 그에 의한 연상 작용은 분리되어 있는 삶들을 연결시켜 준다. 연상에 의한 이어짐은 우리를 사물과 갈라놓는 것으로 여겼던 언어가 가진 힘 중의 하나다.
    연상에 의해 이루어진, 분리되어 있던 개체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아직 몸을 입지 않은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시인의 시선을 통해, 그리고 그러한 시선에서 빚어진 말로써 몸을 얻는다. 그러나 살을 입는 장면이 그리는 것은 다시 분리의 순간이다. 분리에 대한 예감을 “엄마는 등을 돌린다. 나는/ 저 등을 좋아하지 않는다”가 가리킨다. 등은 누군가의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뒷면이면서 동시에 ‘등지다’라는 말에서의 연상처럼 개체를 가르는 벽과도 같은 것이다. 그 “등 너머에 엄마의 발가락이 보인다.”고 한다. 거기서 “뼈 한마디가 톡/ 대야에 떨어진다.”고도 한다. 상처 입은 발에서 뼈 한 마디가 떨어져 나오는 모습은 또다시 ‘늙은 개 워키’가 새끼를 낳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대야엔 피가 ‘붉은 꽃잎’처럼 떨어진다. ‘나’는 물을 버리기 위해 나가 “엄마의 뼈 한마디를 들고 서서 고민한다./ 누구에게 엄마라고 불러야 하지?” 이 질문은 엉뚱하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자신의 운명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다음 생에 할 일들』에는 거울이 자주 등장한다. 「겨울이 내 살을 만진다」도 마찬가지, “거울 속에 다시 노을이 끓는다”고 한다. 거울은 타자화 된 나를 비추는 것이다. 그 안에 “다시 노을이 끓는” 모습이 비친다는 말은 곧 자신에게 그러한 장면이 비치고 있음을 일깨운다. 그런데 노을은 어둠이 찾아오기 직전에 보이는 해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끓는다’라고 할 땐 그 직전의 생생한 삶의 장면이 바로 이것임을 느끼게 한다.
    ‘나’는 말한다, “나는 내 살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고. 살은 분명 나와 타자를 가르는 껍데기다. 그러나 그 살은 동시에 나와 타자를 만나게 하는 접촉면이다. 그러한 살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고 하는 말은, 분리와 만남의 한계가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음을, 혹은 무한함을 알려준다.

 

침묵처럼 뚜렷한 살은 없다.
나는 사라질 것이다. 내 살을 문지를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 내 살을 문지르면서
나는 녹는다.

        - 「눈 4」 전문

 

    「눈 4」에서 시인은 “침묵처럼 뚜렷한 살은 없다.”고 한다. 침묵은 통상적으로 말없음, 말의 부재를 의미한다. 말이라는 형식을 입지 않았기에 무형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침묵을 두고 ‘뚜렷한 살’이라 한다. 즉 가장 명징한 것으로서의 표면이다. 침묵을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묘사하는 일은 「혀로 지은 집」에서 “간판을 내걸고/ 세련된 침묵을 진열할 것이다.”와 같은 쓰임에서도 나타난다. 안주철의 시에서 엿볼 수 있는 독특한 점 중 하나는 이처럼 손에 잡힐 수 없을 것 같은 무형의 것들에 살을 입혀 감각적으로 구현해 낸다는 점이다. 관념과도 같은 것들이 감각을 덧입음으로써 구체적인 것으로 변한다. 동시에 단일해 보였던 의미가 다양한 것으로 변한다.
    이제 침묵은 단순히 말없음의 상태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드러낼 수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렇게 드러나는 모습이 보여주는 건 있었던 존재자가 사라지는 모습이다. 침묵은 말이 시작하기 이전에 위치한 말의 근원이요, 말이 끝난 후에 이르는 말의 최종 지점이다. 따라서 시인은 “나는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언표상으로는 ‘뚜렷한 살’과 반대되는 방향의 움직임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선언은 오히려 지금 자신의 현존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리고 “내 살을 문지를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라질 모든 것들은 지금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 말은 동시에 지금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사라짐에 이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의 현존을 무의미한 것으로, 비접촉의 지점으로 내모는 태도다. “나는 녹는다.” 이 말은 자신의 현존을 충만하게 접촉하는 방식이다. 모든 나타남은 사라짐으로 이행한다. 「겨울이 내 살을 만진다」에서 본 갓 태어난 강아지의 몸에서 물고기들이 천장으로 도망치는 것처럼. 그러나 그 사라짐으로의 이행과 만나려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만남의 시작이 된다.

 

    숲이 서서히 등장하고, 잊었던 기억과 잘못된 기억이 눈이 되어 내릴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어서 서러울 것이다. 눈이 내리고, 눈이 쌓이지 않을 것이다. 눈이 쌓이고, 숲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있었던 나도 없었던 나도 사라지는 밤이지만 괜찮다. 초대는 남는다.

        - 「나를 초대하는 밤」 중에서

 

    『다음 생에 할 일들』에는 어둠이 자주 등장한다. 이 시 「나를 초대하는 밤」도 그렇다. 시인은 멀리서 들려오는 “갓난아이 울음소리”를 듣고는 딸아이가 탄생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한쪽 눈을 먼저 뜬 수술실에서 딸아이와 함께 태어난 어둠을 안고 눈물을 흘리던 아내가 떠올랐다.” 한 생명과 함께 어둠이 태어난다.
    어둠이란 말은 내포가 무한하기에 한두 가지로 명료하게 그 의미를 한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다른 시들에서의 쓰임을 살펴보면, “길고 긴 어둠에 붙어 어디론가/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마을」)라든가 “병아리 주둥이를 자르는 일에도/ 적정의 어둠은 필요하다.”(「별들의 서열」)라든가 “죽음은 넘어온다. 먼 산으로부터 어둠이 어둠을 타넘으며 캄캄해지듯이” 등의 쓰임을 살펴보면 이 땅에 나타난 모든 존재자들이 겪어야 할 운명을 가리키는 것임을 짐작할 수는 있겠다. 이를 두고 단순하게 ‘죽음’이라 명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무엇으로도 이를 수 없는, 침묵해야 할 수밖에 없는 그것의 이름을 우선 ‘어둠’이라고 하자.
    어둠에는 ‘죽음’을 넘어서는 어떤 것들, 가령 계속해서 무언가와 떨어져 가는 일, 그에 따르는 슬픈 정서 등이 함께 자리한다. 아무리 의미를 부여해도 붙잡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때문에 ‘어둠’이라 이름 붙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러한 차원에서 어둠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침묵이 청각적인 것이라면, 어둠은 시각적인 것이다. 둘 모두 그들을 감각하는 기관에게는 초과되는 지점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때문에 둘은 모두 비유로써만 지칭 가능한 것들이다. 분명 세상에는 직접적인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시인의 운명은 그러한 것들을 언어에 담고자 한다. 생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에둘러 가야 할 때도 있다. “나는 나의 비유를 사랑한다.”는 말, 이는 바로 그러한 시인의 운명을 사랑한다는 선언이다.
    어둠, 분명 그것은 심연이고 살아 있는 존재자가 넘을 수 없는 벽이지만, 탄생의 순간과 함께 늘 곁에 있는 것의 이름이다. 이런 것들을 떠올리는 밤을 두고 ‘나’는 “내가 나를 초대하는 밤이다. 어둠속에 숨죽인 짐승을 겁내지 않고 내가 나를 마중할 준비를 마친 밤이다.”라 한다. 그는 아마도 어둠을 겁냈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겁내지 않고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고 한다. 그건 ‘나’가 이 땅에 살을 입고 나타나는 순간부터 함께하는 또 다른 ‘나’인 어둠이다. 그 ‘나’를 위해 시인이 준비하는 것들은 “아내와 함께 걸었던 밤베크 병원에 내리는 비와” 그때 함께했던 시간의 움직임들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고정된 형태를 갖지 않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시간과 함께 사라진 것들이다. 다만 그것들을 추억하는 이의 기억에는 남아 있다.
    분명 모든 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사라짐 자체가 우리가 ‘살아지는’ 모습이기도 하다. 안주철 시의 독특한 지점은 바로 이런 말의 모습들이 닮은꼴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앞서 존재론적인 유비에 의한 연결이 언어의 차원에서도 실현되는 셈이다. 시인이 주로 사용하는 시어는 ‘살’ ‘삶’ ‘사라짐’ 그리고 ‘사랑’, 모두 마찰음 ‘ㅅ’과 유음 ‘ㄹ’이 포함되어 있는 낱말들이다. 각각의 낱말들은 서로 뜻을 달리하며 심지어 대립되기도 하지만, 유사한 소릿값으로 인해 나타나는 울림은 그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의미의 차원이 아닌 감각의 차원에서 서로 맞닿아 있음을, 닮은 것임을 느끼게 하며 서로를 연결시킨다.
    사라짐은 소멸해 가는 것의 이름이다. “잊었던 기억과 잘못된 기억이 눈이 되어 내릴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어서 서러울 것이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사라짐은 분명 슬픈 정서를 낳는다. 그러나 시인은 “있었던 나도 없었던 나도 사라지는 밤이지만 괜찮다.”고 이어서 말한다. 초대는 남기 때문이다. 사라짐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처할 운명, 거대한 수동성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동성을 적극적으로 삶의 안쪽으로 끌어안겠다는 의지는 그러한 수동을 능동으로 변형시킨다. 때문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더라도, 이 시에서는 ‘초대’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존재자들이 존재하면서 했던 움직임과 마음은 사라짐 뒤에도 남을 것이다. 이때 사라짐은 살아짐이 된다. 삶이 수동의 형태로 쓰이곤 있지만, 이는 거대한 능동으로 전환된 것의 이름이다. 산다는 건 사라짐을 향해, 함께했던 또 다른 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인 셈이다. 사라짐에 처한 운명은 비극적이지만, 안주철 시의 독특성은 그러한 비극성 속에서도 유머와 사랑이 함께한다는 점에 있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아내는 눈물을 문지른 손등같이 웃으며 말한다.
오늘 급식은 여기까지

        - 「다음 생에 할 일들」 중에서

 

    이번 생에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사회의 계층 구조가 공고해진 오늘날의 현실에서 한 개인이 이루어내지 못할 일이란 건 대개 물질적인 소유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물질적인 소유라 일컬었지만, 이는 비단 물질에만 작용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도 함께 작용한다. 가난이라는 이름을 두고 어떤 이는 적게 소비하여 남들에게 돌아갈 몫을 충분히 남겨 두는 미덕이라는 말로 아름답게 포장하곤 하지만, 그럼에도 가난에 처해 있는 이들은 자신이 속한 환경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여러 일들로 인해 떨쳐내기 힘든 비애감과 함께 살아가곤 한다.
    이 시대에선 경제적으로 적게 가진 이들에겐 할 수 있는 일들이 제한된다. 때문에 지금 이 생에 할 수 없는 일들을 다음 생에 할 일들로 남겨 두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을 수밖에. 「다음 생에 할 일들」의 화자 역시 울고 있는 아내에게 “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올게.”라는 말을 하는 인물이다. 이 말로 짐작해 볼 때 아마도 아내가 우는 이유는 돈 때문일 것 같다. ‘다음 생’이라는 말로 어떤 약속을 한다는 건 허황된 일처럼 보인다. 지금 이 생에선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황된 일을 약속으로 한다는 건 상대를 웃게 하려는 속셈이 담겨 있다.
    “다음 생에는 집을 한 채 살 수 있을 거야.” “다음 생에는 힘이 부칠 때/ 아프리카에 들러 모래를 한줌 만져 보자.” 모두 이번 생에는 이루기 힘들 일이라는 듯이. 이런 말들에는 비애감이 도사리고 있지만, 반복을 통해 슬픔이라는 부정적 정서에서 기쁨이라는 실증적 역량으로의 도약이 일어난다. “아내는 피식 웃는다.” 그러나 그 기쁨은 단순한 긍정이 아니라, 항상 생의 비극이 함께 자리한다. “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나’는 “재빨리 아이가 되어 말한다. 배고파.”라고. 밥 먹는 장면에서는 역할의 전이가 이루어진다. ‘나’는 아이가 되어 반찬 투정을 한다. 동시에 ‘나’는 아내가 되어 다시 그런 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잘 안 된다.”고 한다. 그때 “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는 상황이 연출된다. 저마다의 존재자들은 개체로서 홀로 있는 몸이다. 살로 뒤덮여 타자와 분리되어 있는 단독자들이다.
    그러나 ‘되기’에 의한 전이가 일어나면서 분리되어 있던 개체들은 서로 연결된다. 이것이 시인이 존재론적인 닮음, 그리고 언어의 닮은꼴을 통해 보여주었던 연결들이 생명의 실재 차원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 생명은 언젠가 끝나지만, 그 기억은 다음 생으로 계속 이어진다. 비록 그 삶들이 척박한 환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비극적일지라도, 이러한 이어짐, 즉 반복은 그 안에 긍정의 힘을 담고 있다. 서로 다른 개체를 이어 주는 이 힘을 일컬어 사랑이라 이를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이 힘이 어떠한 동일성도, 목적도 없음에도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요건이다.
    척박한 환경(이 역시 ‘어둠’이 지칭하는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에서도 아름다운 시선은 존재한다. 그 시선에는 존재의 근원적인 움직임을 포착해 냄으로써 물질적인 제약을 제 품에 안으면서도, 동시에 그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강인한 정신이 도사리고 있다. 강인한 정신이라 이르는 까닭은, 시인의 언어가 운명을 앞에 두고 그에 저항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긴장을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그 운명은 우리가 안고 갈 수밖에 없음에도 끊임없이 외면하고 싶었던 것일 테지만, 시인은 이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마치 ‘거울’을 보듯이. 안주철이 시에서 그려내는 세계가 어둠으로 가득하고,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 존재자들에 대한 것들을 노래하며 그 비극에 대한 슬픈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슬픔으로만 점철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슬픈 눈으로 사라짐이라는 운명에 속한 것들을 바로 바라보는 시선에는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가소개 / 김태선(문학평론가)

-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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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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