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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신간 리뷰] 늙음이라는 젊음에 관하여

  • 작성일 2015-07-01
  • 조회수 1,953

 

[문학 신간 리뷰]

 

 


늙음이라는 젊음에 관하여

- 김기창의 『모나코』

 

 

 

이은지

 

 

 

 

monaco    삶의 불가항력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아마도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일 것이다. 삶의 시작점은 너무나 명확하며 그 작은 점 속에는 곧 생동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안온함 비슷한 것이 담겨 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에는, 죽음이라는 점을 곧 찍을 것만 같은 자세를 엉거주춤 취한 채 기력이 떨어져 절로 고꾸라지기만을 기다리는 무상함이 있을 뿐이다. 노인은 바로 저 자세로 삶과 죽음 사이에 엉거주춤 서 있다. “나는 죽고 세계는 남는다”는 쓴 진리를 삼키며 노인의 등허리는 죽음을 향해 곱아든다. 죽음은 시야 안에 들어오되 손에는 잡히지 않는 잔인한 물리감각을 행사하며 삶을 지치게 한다.
    김기창의 『모나코』(민음사, 2014)를 지배하는 감각이 그러하다. 이 감각의 주체인 노인에게 삶이란 기대도 쾌락도 모두 휘발된 허무와 냉소의 대상이다. 그러나 바로 그 허무가 노인의 삶에 특유의 관능과 힘을 부여한다. 죽음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지만 그렇다고 퍽 가깝지도 않은 거리감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저 관능은 젊음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주인공인 노인은 아는 이 한 명 없는 동네에 2층 단독주택을 짓고 20년 가까이 살고 있다. 죽는 날만 기다리는 그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반세기를 견뎌낸 습관”이다. 특별한 행도 유별난 불행도 없이 먹고 자고 걷는 것의 반복 속에서 사는 것은 곧 습관이 된다. 그런 노인의 유일한 주변인은 집의 연식만큼 그를 보살펴 온 도우미 ‘덕’뿐이다. 덕은 저 습관의 동반자로서 가족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한 존재이며, 노인에 대해서라면 노인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노인은 고독에 인색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혼자 외로이 있는 노인을 불쌍하게 보는 시선”을 촌스럽게 여긴다. 그는 “관계의 시달림보다는 외로움”을 택하며, 꺼져 가는 삶의 권태로움을 직면하고 향유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에게 고독은 습관을 넘어 천성이 되었다. 삶에 대한 구질구질한 미련을 떠나보낸 노인의 삶이야말로 삶의 민낯에 가장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노인의 삶이란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끝없이 계속”되는 세계와 대결하다가 끝내 꺾이고 마는 허약함을 속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곧 부러질 것에 가치와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부질없다.

 

    “노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는 법칙도, 도덕도, 일관성도 없었다. 죽음도, 여자도, 심지어 자신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관된 생각이라곤 위에서 내려다보면 무엇 하나 별것 아닌 높이와 깊이를 가졌다는 것 하나였다. 희망 없는 낙천주의자, 쾌락 없는 쾌락주의자, 절망 없는 비극주의자. 사는 것이 시작이고 끝이며 전부였다.”

 

    사는 것이 단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되었을 때 사는 것은 곧 죽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된다. 그러한 삶은 삶과 죽음을 모두 포괄함으로써 전능에 가까운 시야를 확보한다. 신과 같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야에서는 세상의 논리나 법칙도 무용하며, 단지 고독과 나이의 상관관계만이 유일한 법칙이 된다. 이 법칙의 오랜 지배자인 신을 향해 노인은 “당신도 너무 오래 사는 것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 살 만큼 살고 할 만큼 하고도 죽지 못하는 신을 동정하는 노인의 건조한 시선 앞에 세상의 모든 가치는 허무로 뒤덮인다. 피부의 주름처럼 자연스럽게 찾아온 냉소를 품고 사는 이 늙은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저 높은 곳에 있는 신의 죽음을 선고하는 것조차도 무의미해 보인다.
    다른 많은 노인들의 소망이 그렇듯 주인공 또한 아무 걱정도 아픔도 없이 편안히 죽기만을 원한다. 그의 소망은 넓은 히노키 욕조에서 “반신욕하다 죽는 것”, 그리고 주변 사람에게 폐 끼치지 않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며 죽는 죽음”이다.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죽음을 맞아들이자는 것이다. 노인의 표현을 빌리면 ‘미학적 죽음’인 그것은 결국 언제 어떻게 죽느냐에서 남은 생을 어떻게 사느냐로 귀결된다. 미학적 죽음의 추구는 자연스럽게 미학적 삶의 추구로 이어진다. 노인은 동네 거리를 나설 때면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등 절대 궁색한 모습으로는 나가지 않는다. 노인의 신체는 주름지고 처졌으나 꾸준한 운동을 통해 필요한 근육은 모두 붙어 있다. “먹는 것이 일상의 전부”인 그의 식단 또한 정갈하다. 예컨대 국은 간장으로 간하지 말고 반드시 마른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어 끓여야 한다.
    유부남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미혼모 진을 우연히 만난 뒤부터 노인은 주변 시선은 아랑곳 않고 그녀에 대한 욕망에 충실하려 한다. 노인은 덕이 필요한 것을 다 사오는데도 부러 진과 마트를 다녀오거나 공원을 산책하며 어떻게든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려고 애쓴다. 진이 니코틴을 필요로 하는 주기를 분석해서 담배를 피우러 테라스로 나올 때에 맞춰 우연을 가장해 그 앞을 지나가기도 한다.
    노인은 애 딸린 미혼모라는 진의 이력 따위는 상관없이 “온전히 그 사람, 지금 이 시각, 같이 있는 바로 이곳”만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진은 그렇지 못하다. 진은 노인의 호의를 무르지는 않지만 그를 친구 이상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노인의 저녁 초대에 진은 노인의 집에 가기는 하지만 둘은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의 결혼식장에 온 하객들”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어느 날은 진이 아이와 함께 노인의 집에서 잠을 잔 다음날 아이 아빠가 찾아와 둘이 그곳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한다. 남자에게 노인은 여타의 시선이 그렇듯이 “죽을 날이 머지않은 마음씨 좋은 동네 할아버지”일 뿐, 진의 연인이나 성적 상대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노인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세상의 법칙과 도덕의 사슬을 끊지 못한다. 동네 할멈은 노인에게 ‘욕심 부리지 말고 적당히 살다 가’라며 혀를 차고, 노인의 아들은 아버지가 혹시나 이용당할까 염려되어 진과 유부남을 뒷조사한다. 진 또한 ‘노인과 연애하는 젊은 여자’이기보다 ‘유부남의 아이를 낳은 미혼모’이기를 택하여 머지않아 아이 아빠와 살림을 합친다. 노인의 쾌락은 꿈과 환상 속에서만 성취된다. 그곳에서 노인과 진은 단지 한 남자와 한 여자일 뿐이다.

 

    “노인은 작은 시가를 입에 물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에 비추었다. 그림자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리는 사랑의 정황을 보여주었다. 그림자는 노인의 나이도, 진의 상황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림자는 눈이 멀었다.”

 

    그러나 꿈속에서마저도 세간의 도덕률은 고삐를 쥐고 있어 번번이 욕망의 성취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위의 꿈속 장면에서 몸을 밀착한 진을 향해 노인이 입을 여는 순간 객혈을 하고 진은 기겁하며 도망친다. 또 다른 꿈에서 진이 옷을 벗어던지고 노인과 정사하려는 찰나에 고양이의 방해로 침실 문 밖으로 나간다. 문을 열고 나갈수록 노인의 침실과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방들이 끝없이 반복되면서 꿈은 악몽이 된다. 진을 만난 이후로 노인은 거의 매일같이 불길한 꿈에 시달린다.
    진에 대한 노인의 감정이 순수하게 에로스에서 출발하는 반면 덕과 노인의 관계는 오랜 세월 함께해 온 부부간의 연정 비슷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인은 자신을 돌보는 것도 모자라 노모를 오랫동안 수발하며 지쳐 있는 덕에게 돈은 그냥 줄 테니 일을 그만두라고 다그친다. 덕 또한 노인이 진을 초대했다는 사실에 은연중에 신경을 쓴다. 덕의 노모가 죽은 뒤 노인은 덕의 가족들에게 여행을 보내주고, 덕이 없는 동안 그동안의 습관을 하나씩 버리며 급격히 쪼그라들어 어느 날 아침 거실에서 일출을 보다가 심장마비로 죽는다. 삶을 지탱해 주는 습관의 동반자인 덕이 부재하자 노인의 삶은 자연스레 허물어진다. 그 마무리는 스스로도 이만하면 잘했다고 여길 만큼 “어느 누구도 원망할 것 없”고 “놀랄 것도 없는” 미학적인 죽음이었다.
    죽음에 가장 가까운 삶으로서의 노년의 미학을 작가는 간결한 문체와 인물의 담담한 말투를 통해 상당 부분 설득력 있게 재현해 내고 있다. 그러나 몇몇 독자들이 지적하듯이 주인공의 지나치게 세련된 생활양식은 늙음 고유의 빛깔을 퇴색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쓴 돈보다 남아 있는 돈이 더 많은’ 노인의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은 그의 환멸과 냉소를 늙음보다도 권태로운 부르주아의 그것에 가깝게 만들어버린다. 중산층이 완전히 붕괴하여 허리가 끊어진 지 오랜 한국 사회에서 저 초현실적인 부르주아 영감의 푸념이 과연 호소력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작품 속 문장을 빌리면 “진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것”이기에, 삶과 죽음을 마음 놓고 냉소할 수 있는 노인의 풍요로움은 늙음의 진리를 보여주는 데 일정 부분 실패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명민한 글 솜씨는 그가 앞으로 전작을 뛰어넘는 작품만 선보이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작가소개 / 이은지(문학평론가)

- 1986년생.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 2014년 제21회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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