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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신간 리뷰] 안녕, 안녕,

  • 작성일 2015-06-01
  • 조회수 1,427

 

[신간 리뷰]

 

 


안녕, 안녕,

- 박소란,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2015)

 

 

 

김태선

 

 

 

 

    우리는 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나타난 뒤에 사라짐에 이른다는 것을. 그러나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알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앎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 타자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인간의 유한성을, 우리 존재의 실존 조건을 이룬다. 앎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이들은 때때로 인간을 무력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알지 못하는 것들이기에, 이와 같이 보이지도 않고 포착할 수도 없는 것들이기에, 이들은 작가들의 관심을 이끈다.
    우리에게는 타자로, 암점(暗點)으로 머물러 있는 것들이지만, 글쓰기는 그러한 것들 주위를 배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박소란의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에선 그런 고통스런 세계에 속한 이의 노래가 들려온다. 쓸모없는 것처럼 버려진 존재, 혹은 사랑하는 이들이 떠나버린 자리에 남아 있는 존재의 모습이다. 고통은 의미를 형성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 고통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시인은 고통을 구원이나 희망의 메시지인 것처럼 꾸며내진 않는다. 다만 그 고통이 드러나는 순간을 눈으로 만지면서 겪어내고 있을 뿐이다. 마치 체념한 것처럼, 체념을 연습하는 것처럼. 그런데 기이한 일은, 박소란의 시에서는 체념이 삶의 힘으로 변모하는 순간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울음이 다 닳도록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안녕을 연습하는 일
        - 「나프탈렌」 중에서

 

    시인은 멀어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 나에게 다가온 것들은 언젠가 나에게서 멀어진다. 누구나 곁에 있는 것들을 붙잡고 싶은 욕망이 있겠으나, 멀어지는 일을 피할 수는 없다. 멀어지는 일, 사라지는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그것을 붙잡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라짐은, 어떤 것이 이 자리에 있었다, 라는 사건이 있었음 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의미 부여가 실패하는 자리에서 인간은 고통과 슬픔을 느낀다. 앎으로 포획할 수 없기에, 사라짐에 저항하며 이 자리에 붙잡아 둘 수 없기에. 슬픔을 드러내는 일 역시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고 싶다는 바람에서 발원한다. 사라지는 것들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무표정하기에 의미의 영토로 붙잡을 수 없다.
    시인은 멀어지는 것을 가만히 보며 “울음이 다 닳도록/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안녕을 연습하는 일”을 한다. 애도는 사라진, 혹은 사라지려는 존재자를 붙잡지 않고 놓아 주는 일을 연습하는 것이다. 안녕을 연습하는 일. 안녕을 연습하는 일은 특별하다. 안녕은 헤어짐의 인사지만, 동시에 만남의 인사다. 당신의 평안을 바라는 인사이기도 하다. 안녕을 연습하는 일은 헤어짐을 연습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헤어진 뒤에 나타나는 것과의 만남을 연습하는 일이기도 하다. 헤어진 뒤에 나타나는 것, 그것은 바로 사라진 존재자가 남긴 흔적이다.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고 하였지만, 사라짐 뒤에는 흔적이 남는다. 사라짐 그 자체는 어떤 의미에도 포획되지 않지만, 사라진 것들이 남긴 흔적은 그것을 보는 주체에게 의미의 덩어리로 다가온다. 특히 몸에 남겨진 흔적은, 그 몸이 사라질 때까지 현존한다. 몸에 남겨진 흔적의 이름 중 하나는 기억이다. 기억은 몸에 남겨진 것이지만, 동시에 몸을 둘러싼 세계 곳곳에도 침투해 있어, 둘 사이를 교통케 하면서 그에 따른 정념을 불러일으킨다.

 

    그 후로 종종 아무 삼계탕집에 앉아 끼니를 맞을 때
    펄펄한 뚝배기 안을 들여다볼 때면
    오오 어머니
    거기서 무얼 하세요 도대체

 

    자그마한 몸에 웬 얄궂은 것들을 그리도 가득 싣고서
    눈빛도 표정도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 「배가 고파요」 중에서

 

    『심장에 가까운 말』에서 우리는 다양한 기억들과 만나게 된다. 화장실이 없는 집에서의 추억(「화장실이 없는 집」), 사랑하던 이들을 잃고 울던 시절 그 울음을 받아 주었던 자취방의 기억(「울음의 방」), 스팸 메일 때문에 떠오른 친구(「경에게」), 그리고 용산과 아현동이라는 구체적인 도시의 공간(「용산을 추억함」, 「아현동 블루스」)에 관한 것 등등. 기억은 주로 어떤 장소와 관련지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밥’과 관련지어 나타나는 것들도 중요하다.
    가족을 이르는 우리말 중에서 ‘식구’라는 낱말이 있는데, 이는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밥은 생명을 유지케 하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함께함’을 표상케 한다. 가령 「다음에」에서는 ‘당신’에게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말하는 이가 등장한다.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화자는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리는 생각을 한다. 떠나려는 ‘당신’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 바람은 언제나 ‘다음에’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 다음에. ‘당신’은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 사람이니까.
    「배가 고파요」에서는 “삼계탕집 인부로 지낸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시인의 끼니에 침투한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심장 가까운 말」에 수록된 시편 도처에 나타나긴 하지만, 밥과 관련해 등장하는 기억은 특별하다. 식구라는 이름의 당사자임과 동시에 밥이라는 표상이 무덤의 봉분(「향기로운 밥」)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죽음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먹는 밥은 다른 존재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때문일까 시인은 “밥 냄새가 솟구치는 저녁”(「아아,」)에 신음을 내듯 아프다고 하기도 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삼계탕 역시 닭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음식이다. 시에서는 직접적으로 삼계탕집 인부로 지내던 어머니의 고된 삶은 진술되지 않는다. 다만 중환자실에서 남긴 마지막 말, “얘야 뚝배기가, 뚝배기가 너무 무겁구나”로써 시인은 그 삶의 무게를 우리에게 직접 전해 준다. 어머니는 떠났고, 그에 대한 기억만이 남아 있다.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눈빛도 표정도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떠나감은 돌이킬 수 없다.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푸른 밤」)은 진리의 말처럼 들린다. 시인은 그와 같은 필연의 움직임에서 구원을 발견하려 하진 않는다. 다만 체념으로써, “마지막 구원의 싸이렌마저 함부로 외면할 수 있었던 조숙한 나약함에 대하여” 생각하며 “절망은 여전히 온 힘을 다해 절망할 것이고/ 나는 기어이 침묵으로 순교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절망은 여전히 온 힘을 다해 절망할 것이고”라는 말은 독특한 움직임을 산출한다. “늘 한발 앞서 오던 체념만이 오랜 밥이고 약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체념과 절망은 삶을 위한 독특한 연습으로 변용된다. 여기서 도출되는 하나의 정리는 이렇다. 진정한 만남은 떠나려는 존재를 떠나려는 모습으로 마주하는 것. 이러한 움직임이 「우연의 완성」에서 나타난다.

 

    안녕, 난생처음
    깡통을 뚫고 나온 골뱅이처럼 영원히 엔딩에 닿지 않는
    한편의 영화처럼
    서로가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일
        - 「우연의 완성」 중에서

 

    “종로3가역 1번 출구 계단”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우연한 만남이 일어난다. “당신은 골뱅이호프로 나는 서울극장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기다” 일어난 일이다. 둘은 “잠시 잠깐/ 서로를 바라본 일” 그리고 “어, 안녕하세요, 어 안녕, 인사를 건넨 일”만 하고 헤어진다. 서로를 붙잡지 않고 “아득한 길 위에 놓아 준 일”만 한 셈이다. 앞서 “안녕을 연습하는 일”(「나프탈렌」)을 두고 헤어짐을 연습하는 일이라 하였다. “희망과 야합한 적이 없었”기에, 시인에게 이 연습은 “체념”을 위한 연습이기도 하다.(「체념을 위하여」) 그러나 연습과는 다르게 「우연의 완성」에서는 만남의 인사로 쓰인다. 헤어짐이라는 필연에 체념하고 순응하려는 듯 부단히 연습했음에도, 이처럼 우연은 필연에 개입하며 필연과는 다른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만남 이후에는 분명 헤어짐이 뒤따르게 되지만, 그럼에도 우연한 만남은 뜻하지 않게 발생하곤 한다. 헤어짐만이 가능할 것 같은 현실에 마치 픽션처럼 보이는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우연이 개입된 필연에는 독특한 의미가 부여된다. 그리고 이 일은 ‘~처럼’이라는 말이 만들어내는 효과와 중첩된다. 습관이라 해야 할까, 『심장에 가까운 말』에서 우리는 시인이 ‘~처럼’이라는 표현을 쓰는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처럼’은 직유의 연결어 역할을 하는데, 이는 일어난 일에 주체가 거리를 두고 일종의 해석을 하며 그 일을 다시 구현하는 모습을 가리킨다. 즉 사실의 차원에 ‘마치 ~처럼’이라는 허구의 차원이 개입하면서 사태를 변용시키는 일이다. 이때 필연의 움직임은 의미를 획득한다. 「우연의 완성」에서는 “깡통을 뚫고 나온 골뱅이처럼 영원히 엔딩에 닿지 않는/ 한편의 영화처럼”이라는 말처럼, 하나의 끝으로 생각되었던 헤어짐이 더 이상 끝이 아니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처럼’은 헤어짐만 있을 것 같았던 세계, 그에 체념하며 살아야만 했던 세계를 뒤트는 마법의 주문이 된다. ‘~처럼’에 의해, 그리고 우연한 만남에 의해 사실의 세계가 영화와 같은 세계와 혼합된다. 그리하여 ‘안녕’이라는 말 역시 변용된다. ‘안녕’이라는 말에 의해, 이제 헤어짐은 이어질 만남을 상기시키고, 이로써 헤어짐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일”이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물론, 이는 영원히 함께 있음이라는 게 고착화된 형태로 머무름을 나타내는 건 아니다. 영원해야 할 것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일”이다. 머무름에 집착하지 않고 사라짐 그 자체를 만나는 일이다. ‘~처럼’을 통해 시인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없음으로’ 해낸다. 암점은 여전히 암점으로 머물 뿐이지만, 그 암점이라는 이름의 타자는 시인에게 힘의 원천이 된다. 우연히 만났으면서도 곧 헤어질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일”은 이제 고통스럽지 않다. 그러니, 안녕, 안녕,

 

 

 

작가소개 / 김태선(문학평론가)

-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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