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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에세이] 콘텐츠의 사회학⑥

  • 작성일 2014-03-01
  • 조회수 1,788

 

 


콘텐츠의 사회학⑥

 

장이지(시인)

 

 

 

 

    나루토와 자기계발

 

    언젠가 <우리 결혼했어요>(MBC)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걸 그룹 소녀시대의 한 멤버가 나와서 자신은 ‘자기계발서’류(類)의 책을 즐겨 읽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스무 살쯤 된 소녀가 자기계발서를 즐겨 읽는다니 이것은 조금 가혹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이십대 젊은이들에게 자기계발서는 뜻밖에도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 뜻밖인가 하면 자기계발서에는 별로 ‘내용’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학자는 자기계발서는 인간을 성공한 부류와 실패한 부류로 나누는 이분법, 성공과 실패의 요인을 전적으로 개인적 자질에서 찾는다고 하는 원칙 등 두 가지 장르 규칙에 의해 떠받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 “자기계발서는 읽을 만큼 읽었다. 이젠 그 책을 덮고 한번 물어보자. 이건희의 성공은 자기계발서 덕택인지, 아니면 이건희의 아버지가 이병철이었기 때문인지.”(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사계절, 2013)
    자기계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루토 질풍전」(테레비 도쿄, 2007~ )의 ‘나루토’를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짠해진다. ‘나루토’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미호’를 내면에 봉인당한 채 살아간다. 게다가 ‘아카쓰키(?)’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테러리스트 집단이 ‘구미호’를 빼앗기 위해 그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돈다. 심지어는 ‘나루토’가 사는 마을을 침략해 ‘나루토’의 지인들과 마을 사람들을 마구 죽이기도 한다. ‘아카쓰키’에 대적할 수 있는 ‘닌자’는 없다. ‘구미호’를 마음에 품고 사는 ‘나루토’를 제외하면, ‘아카쓰키’에 맞서 마을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아카쓰키’에 대적하기 위해 ‘나루토’는 피 나는 수련을 거듭한다. 그 수련 과정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스스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닌자’의 길은 그렇게 고독한 것인가.
    ‘나루토’를 보고 있으면 ‘88만 원 세대’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떠오른다. 그들 역시 ‘나루토’처럼 피 나는 수련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피 나는 수련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취업 시장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자기계발에 매진하고 있다. 그들은 ‘꿈’을 위해 ‘청춘’을 희생하고 있다.
    그러나 ‘나루토’는 딱히 수련을 ‘자기희생’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아이는 밝게 성장하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어딘가 점점 일그러져 가고 있는 느낌이다. “짜증나.”라든지 “꼰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역시 ‘나루토’ 같은 아이는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짜증나.”라든지 “꼰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이 딱히 문제아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단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이다. 아이들을 그렇게 일그러뜨리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자기계발이 과연 나쁜가 하는 질문이 되돌아온다. 오찬호는 우리 사회의 대학생들에게 자기계발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013). 첫째, 그것은 전적으로 ‘취업’을 위한 활동으로 정의된다. 둘째, 그 결과가 보장되지 않음에도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저 ‘계속’ 해나가는 활동이다. 셋째, ‘자기계발에 열심이지 않은 게으른 자’와의 비교에서 자신의 현재에 대한 위안과 만족을 구한다는 특징이 있다. 오찬호의 분석에 따르면, 요즘 대학생들에게 ‘자기계발’이란 취미활동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며, 신체에 각인되어 어느 순간 무반성적으로 지속되고, 항상 타자와의 비교, 타자에 대한 멸시를 통해 그 지속의 동력을 얻는 활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자기계발이 나쁜가 하는 물음은 상당히 기만적인 문제제기 방식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타자와의 비교, 타자에 대한 멸시를 통해 자기계발의 동력을 만들어 가는 방식은 타자를 멍들게 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멍들게 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우려된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저서에서 오찬호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이 된 사람보다 덜 노력한 사람들이 가는 자리로 인식하는 대학생들, 수능 성적에 의해 매겨진 대학 서열을 내면화하여 또래 젊은이들을 평가하는 대학생들, 심지어 같은 대학 안에서도 수능 성적에 따라 학과의 순위를 매기고 비인기 하위 학과 학생들을 멸시하는 대학생들 등 자기계발의 논리에 함몰되어 스스로 ‘괴물’이 된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정규직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이 ‘자기 책임의 논리’에 의해 교묘하게 은폐된다.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주제도 마찬가지로 개인의 나태로 비난당하기 십상이다. 이러한 ‘괴물’의 논리는 사실 기업의 오너들이나 반길 법한 논리가 아닌가. ‘아프니까 청춘’이라든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든지 하는 위로 역시 기업의 오너들이나 좋아할 말들이다. 그러한 위로는 현재의 과도한 경쟁 구조를 온존시킬 뿐이다.
    오찬호의 저서에서 매우 인상 깊었던 것은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오찬호는 이 자기계발의 논리가 거대한 세계 체제의 내부에서 중층적으로 결정된 대세로 보이게는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개인은 바꿀 수 없는 사회 구조의 문제라기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라는 것이 아닐까. 딱 들어맞는 대안이 그의 저서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 논리에 길들여진 ‘자기계발의 서사’가 사실은 지극히 반인권적이며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는 회의야말로 ‘아프니까 청춘이다’류(類)의 낯간지러운 위로의 말보다 훨씬 값진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 스테이지에선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세요!

 

    『사회적 신체』(고단샤, 2009)에서 오기우에 치키(荻上チキ)는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신체의 변형’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닌텐도 게임 <슈퍼마리오>(1985) 등 서브컬처의 콘텐츠들을 예로 들면서 논의를 진행한다. 게임 서사에서는 흔히 각 스테이지마다 다른 환경, 가령 수중이라든지 공중이라든지 높은 절벽 등 커뮤니케이션의 지형에 따라, 혹은 대치하는 적(敵)에 따라, 그에 적합한 신체를 플레이어가 선택하여 ‘스마트하게’ 싸워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오기우에 치키는 그러한 게임의 세계관을 현실 사회의 아날로지로서 이해한다.
    오기우에 치키는 이 ‘신체의 변형’과 관련하여 ‘휴대전화’ 이야기를 한다. 오늘날은 휴대전화야말로 사람들의 변신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유효한 미디어로서 상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 갤럭시 노트3’와 ‘갤럭시 기어’를 떠올리면 그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굳이 삼성 제품이 아니더라도, 스마트폰은 유저의 사회적 신체를 변형시킨다. 스마트폰 유저들은 개인용 컴퓨터의 전원을 켜지 않고도 스마트폰 기기를 통해 이메일을 확인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다른 스마트폰 유저와 SNS로 대화할 수 있으며, CD 플레이어 없이도 최신 유행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지도 검색 앱을 설치하면 어디든 가고자 하는 곳까지의 길을 스마트폰을 통해 찾아볼 수도 있고, 생소한 어휘를 접했을 때 종이사전을 보는 대신 스마트폰 앱이나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여 검색해 볼 수도 있다. 인상 깊은 광경을 곧바로 촬영할 수도 있다.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는 이 모든 작업을 별도의 기기를 가지고 따로 했어야 했다. 게다가 스마트폰은 항상 휴대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거의 신체의 일부처럼 여겨지고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초사이언’(도리야마 아키라(鳥山明), 『드래건볼』)이 부럽지 않다. 스마트폰의 기능은 인간의 사회적 신체를 그만큼 바꾸어 놓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을 거쳐, 인류는 드디어 스마트폰을 들고 들여다보는 존재로 ‘진화’한 것이다. 서울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무언가에 몰입해 있는 젊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무언가 여분의 시간이 모두 스마트폰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느낌이다.
    과거에는 ‘전자시계’가 변신의 매개체로 자주 등장했다. ‘전대물(戰隊物)’에서는 어김없이 ‘전자시계’를 통해 본부와 교신하는 히어로들이 나왔다. 그래서 초등학생들에게 ‘전자시계’가 필수 아이템이 된 적도 있었다. 요즘에는 그것이 스마트폰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스마트폰은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사실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변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한동안 대중문화계에서 대국민 오디션이 유행했지만, 거기서도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 ‘변신’과 관련된 주문이었음을 상기해 볼 만하다. “다음 무대에서는 달라진 모습을 보고 싶다!” <슈퍼스타K>(Mnet, 2009~ )의 심사위원들이 조자룡 헌 창 쓰듯이 하는 주문이 바로 그것이다. <서바이벌 오디션 K팝 스타>(SBS, 2011~ )의 심사위원들은 저마다 자기 회사에서 훈련을 받은 참가자들이 그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놀랍다는 듯이 자랑을 한다. “어떻게 한 거죠? 고음을 낼 때 소리가 단단해졌어요!” 이 ‘변신’과 관련된 주문이 항상 ‘경쟁’을 유도하는 자리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눈여겨보아야 하는 대목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스마트’해져야 한다. 앞에서 다룬 자기계발의 서사는 항상 그 이면에 ‘변신’의 서사를 감추고 있다. 자기계발의 서사를 내면화한 사람들은 ‘변신’을 주문하는 사회의 목소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지금 ‘내’가 이곳에서 ‘졌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 완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완전체가 되어야 한다. 마치 ‘포켓몬’이나 ‘디지몬’처럼! 완전체를 향해 진화를 거듭하는 몬스터처럼 우리는 되어 가고 있다.
    ‘포켓몬’이나 ‘디지몬’은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정말 진화를 하고 있는지 자신할 수는 없다. 심지어 ‘서정’에도 ‘진화’라는 말을 쓰고, ‘문학’도 ‘진화’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에도 ‘진화’라는 말을 쓸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스마트폰을 쓰면 정말로 ‘스마트’해지는 것일까. 모두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대중교통의 한 풍경을 보면, 거기에는 어떤 의제를 중심으로 함께 움직이는 ‘시민’은 없고, 시각적인 자극에 반응하는 ‘반응체’만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든다. 그것이 ‘진화’든 아니든, 혹은 스마트한 것이든 아니든,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변신을 요구하는 사회에 의해 우리는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인간의 육체를 괴물적인 것으로 왜곡하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 어쩌면 더 중요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 이것으로 여섯 달간의 연재가 끝납니다. 내용을 보완하여 가까운 시일 안에 단행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이 연재에 관심을 보여준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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