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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에세이]콘텐츠의 사회학⑤

  • 작성일 2014-02-01
  • 조회수 1,299

 

 


콘텐츠의 사회학⑤

 

장이지(시인)

 

 

 

 

    신카이 마코토, 거의 시적인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에 대해 김동인은 ‘햄릿의 출현’이라는 말을 한 바 있다. 그것은 이른바 번민하는 근대적 자아의 출현이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것과 완전히 경우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신카이 마코토(新海誠)에 대해서도 ‘햄릿적인 것의 출현’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2000년대에 거둔 성과 중에서 그의 출현은 도저히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2010년대에 오면 그 의미도 상당히 퇴색해 버린 감이 없지 않지만, 「별의 목소리」(2002),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 「초속 5센티미터」(2007)로 이어진 그의 2000년대의 작품들은 분명히 기념비적인 작품들이었다.
    신카이 마코토의 이질성이랄까 획기성에 대해 아즈마 히로키는 신카이 마코토, 만화가 니시지마 다이스케(西島大介)와 한 어느 좌담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아즈마 히로키 : 「별의 목소리」를 처음 보았을 때, 저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동영상이 아니고 말을 바꾼 것뿐이지만, 정지화면이 가끔 움직이는 화집(畵集) 같다고 느꼈습니다. 한 장의 그림이 막대한 인적 자원으로 이어져 25분이 되었다고 하는 상품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킹게이너」와 「별의 목소리」에서 그림 한 장만 취해서 비교했을 때, 「별의 목소리」 쪽이 더 보기 좋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인터넷에서 “원래 애니메이션은 정지화면의 연속이다, 당치 않은 소리를 한다”든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겠지만, 제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별의 목소리」는 종래의 애니메이션보다 게임의 오프닝이나 매드 무비(MAD Movie)에 가깝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별의 목소리」 직후에 신카이 씨가 작업한 「Wind」의 오프닝을 보았습니다만, ‘「별의 목소리」라고 하는 건 이거였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소녀 게임은 요컨대 한 장의 그림에 텍스트와 음악을 넣은 전자적인 그림 연극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미소녀 게임의 오프닝은 거기에서 좋은 느낌의 그림을 뽑아내서 템포 좋게 짜맞춰 나간다고 하는 논리로 만들어집니다.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별의 목소리」라고 하는 것은 한 개의 완성된 작품이 아니고, 오히려 거대한 미소녀 게임의 오프닝이나 그 예고편과 같은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나 설정이 그 가운데서 완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아즈마 히로키 편, 『콘텐츠의 사상』, 청토사, 2007)

 

    이에 대해 같은 좌담에서 신카이 마코토도 대체로 수긍하고 있다. 애초에 그는 일본 팔콤(Falcom)에서 PC게임 「영웅전설 가가브 트릴로지」, 「YsⅡ eternal」 등 오프닝 무비를 제작한 경력이 있다.
    그렇지만 「별의 목소리」는 ‘게임의 오프닝’이라든지 정지화면의 패닝(panning)으로 보인다든지 하는 기술적인 부분에서만 돋보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남녀 간의 연애 감정을 세계의 위기에 바로 연계시키는 세카이계 상상력의 서사적 매력이나 ‘휴대전화 메일’이라고 하는 미디어의 새로움을 시대적 아이콘으로 응결시킨 사회의식의 예리함이 곁들여져 있다. 그리고 상대에게 마음을 전하는 미디어로서 편지나 문자메시지, 이메일 따위가, 혹은 더욱 본질적으로는 언어 자체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 하는 철학적인 주제도 만만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 새삼 느낀 것이지만, 신카이 마코토에게는 미지의 것과의 조우에 대한 외경(畏敬)도 있다. 가령 평행 세계를 감지하고, 평행 세계의 문을 여는 장치로 활용하기 위해 ‘유니온’ ― 소비에트 연방을 염두에 둔 국명 ― 이 ‘에조’에 세운 탑에 주인공 ‘히로키’가 근접 비행하는 장면이 그렇다.

 

    거기에 탑이 있었다.
    나는 날고 있었다.
    스틱을 왼쪽으로 눕혀 탑 주위를 선회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벨라실라가 탑 그늘에 들어가자 새카맣게 어두워진다. 그 대신 탑은 선명한 거울이 되어 하얀 구름과 하얀 벨라실라를 비추었다. 햇빛 아래로 나갔다. 탑은 새하얘진다. 콕핏 안에도 빛이 가득 차서 새하얘졌다. 내 의식도 하얗게 타오른다. 계속 선회했다. 탑 주위를 끊임없이 휘돈다. 천천히, 어둠. 거울. 이윽고 천천히 빛…… 그리고 어둠.
    나선을 그리듯이 조금씩 올라갔다. 휘돌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한계 고도까지 다다랐지만 탑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벨라실라는 상방 시야가 좋지 않아 기수를 세우곤 해서 위쪽이 잘 보이도록 손썼다. 탑의 정상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멀리 멀리 이어지고 있었다. 가늘어지며 흐릿해져 이윽고 소실점이 되었다.
    줄곧 이렇게 탑 주위를 맴돌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타쿠야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사유리에게도.(신카이 마코토 원작, 가노 아라타(狩野新),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Ⅱ』, 민용식 옮김, 대원씨아이, 2008)

 

    ‘에조’에 세워진 탑은 그것이 실제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와는 별개로 중학생인 ‘히로키’ 등에게는 동경의 대상이다. ‘히로키’와 ‘타쿠야’는 그들이 손수 만들고, ‘벨라실라’라고 명명한 비행기를 타고 국경 너머 적국에 세워진 탑을 향해 간다. 비행 경험이 없는 고등학생이 비행기를 몰아 적국으로 월경을 감행한다는 설정의 황당함을 문제 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사유리’는 왜 그 탑의 장치와 연동하여 특수한 기면증에 빠져 평행 세계의 꿈을 꾸는가 하는 정당한 질문도 사실 애니메이션의 감상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부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사유리’의 할아버지가 설계한 탑이라는 설정으로 납득한 채 서사를 따라가기만 하면 될 것이다. 탑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히로키’가 모는 ‘벨라실라’는 어느새 탑에 이르러 그 주변을 선회한다. 거기서 ‘히로키’는 ‘사유리’와 동조하여 그녀가 보는 평행 세계의 꿈을 보게 된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별의 목소리」에도 나온다. ‘타르시안’과 접촉한 ‘나가미네’는 ‘노보루’가 있는 지구의 환영을 본다. 목소리가 없는 ‘타르시안’은 그런 방식으로 지구인과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지도 모른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타르시안’은 좀 볼품없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의 탑을 보고 이 디테일의 결여라고 할 만한 타르시안의 추상적인 외관과 어딘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은 일종의 ‘거울’로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비춘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담이지만, 「별의 목소리」의 노벨라이즈의 경우, 고단샤의 디자인(2005년 판)보다는 대원씨아이의 그것(2009년 한국어 판)이 신카이 마코토의 이 신비주의적 비전을 잘 살린 게 아닌가 싶다. 대원씨아이 판 『별의 목소리』의 표지는 약간 푸른빛을 띤 은색으로, 희미하게나마 보는 사람의 모습을 반영한다. 얼굴이 적나라하게 비치지 않아 아주 마음에 든다.
    별것 아닌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신카이 마코토의 대중성에 대해서는 또 다른 요소도 고려해야 한다. 그에게는 정념에 직접 호소하는 무언가 ‘육체적인 것’이 있다. 배경음악을 깐 채 오 분 남짓이나 이어지는 그 특유의 엔딩에서 나는 처음에 그 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것은 그것대로 그만의 고유성이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언어의 정원」(2013)에 이르러서는 왠지 지겹게 느껴질 정도로 그 방식은 이제 관객들에게는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심하게 말하면, 타성에 젖어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목소리가 좋다. 자신이 만든 애니메이션에, 그것도 주인공 역의 성우로 참여한다는 것은 여간한 자신감이 아닐 것이다. 「별의 목소리」에서 그가 성우로서 속삭이듯 들려주는 내레이션은 관객들을 집중하게 한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사건의 경위를 들려준다. 그리고 사랑의 만료에 대해 담담하게 고백한다. 거의 시적이다. 그 음성은 무기질의 도시를 연상케 한다. 삶은 계속된다. 첫사랑의 ‘그녀’들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우리는 날씨가 있는 세계에 그대로 남겨진다.

 

 

    어떤 평행 세계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는 그 자체로 평행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와 아주 많이 닮았지만 몇 군데인가는 다른 부분도 있다. 애니메이션이니까 당연하잖아,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애니메이션과 같은 허구라도 그 자신은 관객들이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신카이 마코토의 「초속 5센티미터」는 어떨까. 어느 대학에서 이 애니메이션으로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발표를 맡은 학생이 인터넷에 떠도는 담론을 참고하여 이 애니메이션의 설정을 문제 삼았다. 이 애니메이션에 묘사된 도쿄 전철의 티켓 발매기가 시대적 배경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상당히 세세한 부분까지 살폈다는 느낌은 들지만, 이 문제 제기는 사실 타당하지 않다. 문제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이 애니메이션 중간에는 하늘에 지구처럼 보이는 거대한 달이 떠 있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이 장면이야말로 사실은 도쿄 전철의 티켓 발매기보다 훨씬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초속 5센티미터」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시대의 연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를 그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밤하늘에 거대한 달이 뜨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평행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평행 세계에서의 전철 티켓 발매기 모양이 이 세계의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의 설정은 매우 흥미롭다. 그 세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일본 국토가 분단된다. 혼슈는 일본이지만, 홋카이도는 유니온이라는 적성국에 편입되어 ‘에조’라고 불린다는 설정이다. 한반도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 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 분단되었다면 아마도 한반도의 상황은 다소 달랐으리라고 여겨진다. 분단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설정은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만은 없다.
    일찍이 일본의 법학자 오다카 도모오(尾高朝雄)는 세계대전의 결과로 일본이 분단될 수도 있었다는 지적을 한 바 있다.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어전회의는 8월 9일 밤이었다. 만약 그것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8월 6일이었다면 소련은 참전의 기회를 잃었고 조선의 38도선 분할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반대로 8월 9일 밤의 회의에서 초토결전(焦土決戰) 강경론이 승리를 얻었다면 적군(赤軍)의 기갑부대는 조선으로 남하하고, 미군은 인명의 손상을 피해서 상륙작전을 감행하지 않는 사이에 소련이 남사할린, 북해도 오쿠우(奧羽)까지 진출하여, 결국 일본은 미소에 의해 분단되었을 것이다. 실로 8월 9일 밤의 천황의 (항복) 결정은 일본을 이 운명에서 구한 대신 조선이 일본을 대신해서 둘로 분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강만길,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 증보판, 서해문집, 2008에서 재인용함.)

 

    오다카 도모오의 지적이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의 세계 설정에 어떠한 참고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역사에 있어서 ‘만약에’라는 가정은 언제나 다소 허망함을 남긴다. 결과론적으로 한반도가 분단되었다. 그러나 이 분단은 아무리 봐도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대전 이후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목으로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 진주했다. 38도선이 그어졌다. 우리나라는 패전국도 아닌데 분단되었다. 유럽에서는 패전국인 독일이 동서로 갈렸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아니라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된 것이다. 미소 양군의 진주로 두 개의 정부가 구성되고 나중에는 전쟁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다음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휴전선이 만들어지고 분단이 고착화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가 왕조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제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조선 왕조는 조금 더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내발적인 요인에 의해 국민국가의 길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분단도, 군사독재도, 레드 콤플렉스도 이 땅에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에 매달리는 것은 앞서 밝힌 대로 허망한 이야기일 뿐이다. 어찌 됐든 우리는 일제의 침략에 의해 비정상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매우 부당하게 외세에 의해 분단국가의 가시밭길을 가게 되었다. 분단된 한반도의 주민들은 이 ‘분단’이라는 불행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은 이 점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과제다.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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