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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에세이]콘텐츠의 사회학④

  • 작성일 2014-01-01
  • 조회수 633

 

 


콘텐츠의 사회학④

 

장이지(시인)

 

 

 

 

    C: 도시괴담과 소녀

 

    니시오 이신(西尾維新)의 ‘모노가타리(物語)’ 연작(2006~ )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민담’처럼 읽힌다. 작가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소설 형식에 미달하는 것을 실험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거기에는 물론 순수문학과는 구분되는 라이트노벨의 태생적 특징과도 관련되는 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자리에서 그러한 면을 깊이 살펴볼 여유는 없다. ‘모노가타리’ 연작을 ‘민담’처럼 읽을 수 있는 것은 일단 이 작품의 화자가 ‘이야기꾼’으로서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고, 근대소설의 플롯과는 상치되는 잡다한 만담이 개입되고 있으며, 게나 뱀, 원숭이, 달팽이 등과 ‘괴력난신(怪力亂神)’이 얽히는 민속학적 코드들이 전면에 내세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역시 ‘민담’은 농경사회의 소산으로 ‘상민(常民)’을 그 주요 담당 층으로 하는 데 대해, 니시오 이신의 ‘모노가타리’는 농경사회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소녀’들을 주요 배역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소녀’가 주요 배역이 된 것은 전적으로 라이트노벨의 주요 소비층이 십대 학생들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단 하나의 ‘전적인’ 이유라고는 역시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유명한 「여고괴담」 시리즈(1998~ )의 주인공들도 ‘소녀들’이다. 게다가 그녀들은 ‘괴담’에 쉽게 연루된다. 그녀들은 ‘분신사바’와 같은 어쩐지 기분 나쁜 주술에 빠져들곤 한다. 그녀들은 긴 복도에서 언젠가 학교에서 자살한 여고생의 영혼과 조우하고, 학교 안의 외진 장소에서 귀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연애나 성적 문제와 같은 고민들을 해결해 달라고 귀신에게 빌기도 한다. 도시괴담과 소녀들이 쉽게 얽히는 것은 소녀들의 감수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들은 일상과 영계(靈界) 사이의 접경지대에 존재한다. 일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소녀들의 자부심이 될 수도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의 오컬트적인 요소도 그런 맥락에서 ‘여성적 감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거나 미래에 대한 예감이 잘 맞아떨어진다거나 하는 비합리주의적 요소는 여성을 남성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한다. 김애란의 단편 「벌레들」을 읽고 “아, 이것은 도시괴담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하면, 물론 상당히 지엽적인 부분을 물고 늘어진다는 비판을 받겠지만, 그 단편을 읽고 문득 나는 도시괴담을 떠올렸다. 임신 뒤 행동의 제약 때문에 한정된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 여성이 겪는 불안이 ‘벌레들’의 형상을 통해 나타난 것이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지극히 전형적인 도시괴담의 패턴이라고 할 수도 있다.
    도시괴담은 현실과의 연결성이 희박해진 패쇄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시뮐라크르’라고 오쓰카 에이지는 말한다(「소녀만화가와 도시전설」, 『가상현실비평』, 1992년 12월호). 소녀들은 일상적이지 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지만, 사실 그녀들은 ‘학교’라는 폐역(閉域)에 들어감으로써 현실과의 접점을 잃어버린 채 그 잃어버린 현실의 자리에 시뮐라크르로서의 괴담을 만들어 공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최근에 아이돌 스타들이 나와서 ‘녹음실 괴담’ 같은 것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아이들의 세계도 또한 얼마나 지독한 폐역이라는 것일까 하는 착잡한 심정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또 마케팅의 차원에서 조작된 괴담인지도 모르지만, 스타들도 일상에서 벗어나 영계가 열리는 문 근처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단순히 소녀들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C: 여러분의 일상은 안녕들 하십니까

 

    야마우치 야스노부(山內泰延)의 개그 만화 『남자고교생의 일상』(2010~2012)을 보다가 혼자 웃는 나를 발견한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남자고교생들의 일상은 매우 흔해서 딱히 콘텐츠로 만들 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대표적인 근대 서사 양식인 소설은 서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을 다룬다. 일생에 있어 딱 한 번만 일어날 듯한 사건을 다룬다고 하는 것이 근대소설의 일반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남자고교생의 일상』은 근대 서사로서는 낙제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화에 무엇을 기대하는가라고 반문이 돌아올 것 같은 분위기지만, 만화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뭔가 당혹스럽다. ‘일상물’이라기보다는 트리비얼리즘도 정도가 있다는 식으로 빈정거려 주고 싶다.
    소위 ‘일상물’로 불리는 서사가 일본에서는 ‘세카이계’ 이후에 각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야기의 소비자들이 허황된 이야기에 질린 나머지 지극히 ‘리얼’한 세계로 퇴피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부자연스럽다. ‘리얼’도 정도가 있다.
    솔직히 ‘일상물의 유행’이라는 담론에 대해 나는 정치한 설명은 할 자신이 없다. ‘일상물’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별로 읽거나 보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고교생의 일상』은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가령 「꽃보다 할배」나 「꽃보다 누나」(tvN, 2013)와 같은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도 ‘일상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무언가 게임적인 요소가 끼어 있기 마련인데, 최근의 흐름은 그런 장치마저도 최소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꽃보다 누나」의 경우, ‘여정(旅程)’만 있을 뿐 서사적 장치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보다도 여행 자체가 일상과는 다르다고 딴죽을 걸어 올 분들도 있지 않을까 싶다(어쩌면 그 말대로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포맷이 그전의 예능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지극히 소소한 이야깃거리만 주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야마우치 야스노부의 만화도 「꽃보다 누나」도 지나치게 평화롭다. ‘판타지에서 리얼리즘으로’라고 하는 미학적 흐름에 있어서의 궤도 수정 같은 것이 아니라, 작금의 ‘일상물’은 어쩌면 ‘평화로운 일상’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판타지’는 세카이계의 몰락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평화로운 일상은 없다. 베이비붐 세대가 퇴직을 하고 유럽 여행을 간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다. 여행지에서는 테러도 없고 금융위기도 없고 인종차별도 없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그것도 역시 실제의 일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제의 일상은 대지진으로 훼손되어 버렸다. 원전(原電) 사고로 일상은 오염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선을 전후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종합편성 채널들은 대선과 국정원, 북한과 관련된 자극적인 ‘속보’들을 계속 내보낸다. 과잉 공급된 정보가 범람하고, 사람들은 진위를 알 수 없는 정보들 앞에서 혼란을 겪는다. 대선 공약이 보란 듯이 폐기된다. 수많은 철도 노동자들이 직위 해제 통보를 받는다. 모두가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어떤 대학생이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우정이나 신의가 사라진 세계에서 『남자고교생의 일상』은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다. 우리들의 일상은 안녕하지 않다.

 

 

 

   《문장웹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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