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연재에세이] 콘텐츠의 사회학②

  • 작성일 2013-11-01
  • 조회수 1,565

 


콘텐츠의 사회학 ②

 

장이지(시인)

 

 

 

 

    T: 문학사와 데이터베이스

 

    이나바 신이치로(稻葉振一郞)는 전근대와 근대, 포스트모던에 있어서 이야기의 양상을 각각 데이터베이스=이야기, 데이터베이스 없는 이야기(현실), 데이터베이스≠이야기로 정리한 바 있다(『모던의 쿨다운』, NTT출판, 2006). 물론 이것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을 염두에 둔 도식이다.
    ‘데이터베이스≠이야기’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큰 비(非)이야기로서의 데이터베이스’라고도 할 수 있다. 데이터베이스가 이야기의 형태가 아닌 다른 요소들의 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여기서 가장 주목한 것은 ‘캐릭터’지만, 이 데이터베이스에는 ‘캐릭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야기 아닌 것이 데이터베이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데이터베이스를 ‘비(非)이야기들의 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근대까지는 이야기(=소설)가 현실을 재현한다고 여겨졌고, 그 이야기는 시간축을 따라 선형적인 양상을 띤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에 있어서 이야기는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한 것으로서의 선형적인 양태를 띤 채 출현하지만은 않는다. 설사 선형적인 형식을 통해 출현하더라도 그 이야기는 포스트모던적인 소비자들에 의해 비선형적으로 소비되기 십상이다. 드라마를 줄거리 중심이 아니라 캐릭터 중심으로 소비하는 시청자들을 떠올리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데이터베이스’라는 용어 자체인지도 모른다. 이나바 신이치로는 전근대 이야기의 양상을 ‘데이터베이스=이야기’라고 정리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전근대의 이야기는 공동체의 기억을 담지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전근대의 이야기꾼은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이야기 속에서 공동체의 기억을 자기의 것으로 전유하며 후대에 이것을 전달하는 신성한 임무에 복무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어떤 대학에서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분류하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고 해도, 전근대에 있어서 이야기의 양상을 ‘데이터베이스=이야기’라고 정리할 수는 없다. 전근대인들에게 그 이야기들은 ‘데이터’와 같은 수준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다면 ‘문학사’는 데이터베이스인가 하는 점이다. 근대의 이야기(=소설)는 주지하다시피 작가라는 특별한 개인의 특별한 경험, 특별한 사건을 다룬다. 문학사는 그 특별한 이야기들의 집적이다. 가령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들면, 1920년대의 문학사와 1990년대의 문학사는 그 부피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특별한 작품들을 다량 집적한 1990년대의 문학사는 데이터베이스일까. 물론 데이터베이스처럼 문학사를 정리․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 작가가 문학사를 곁눈질하면서 자기 작품을 쓴다고 할 때, 그것은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는 식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 근대 작가는 현실과 대결하기 위해 문학사를 참조한다. 문학사를 어떤 데이터베이스, 혹은 데이터의 차원에서 참조한다면, 비로소 그때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포스트모던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의 문학사는, 그때만 분명히 데이터베이스다. 요컨대 데이터베이스라는 문제 설정은 수용자의 ‘태도’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첫 회만 보고 줄거리의 흐름을 예측하고, 여러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유형을 분류하면서 드라마를 시청하고, 영화의 관습에 ‘익숙해져서’ 특정한 장면 뒤에 일어날 사건을 알아맞힌다면 이미 그 사람은 드라마나 영화의 콘텐츠를 데이터베이스에 의거하여 소비하고 있는 것이 된다. 아즈마 히로키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세계관을 창작자 측에 적용해 보면, 가령 백일장에 간 학생이 불행한 가족사를 늘어놓으며 심사위원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 그 학생은 한국 문학사 안의 불행한 가족사를 ‘현실’이 아니라 ‘데이터’로 손쉽게 치환하여 활용한 것이 된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시가 양적으로 팽창했음에도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한 것 역시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이 그 경험의 얕음을 캐릭터나 외래어, 혹은 세계관의 데이터베이스로 커버해 왔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 볼 시점에 우리는 이르렀다.

 

 

    C: 세계의 위기, 세카이계(セカイ系) 소설

 

    지난 세기말의 종말문학 부흥에 대해 존 조지프 애덤스(J. Joseph Adams)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시도한 바 있다.

 

    적어도 내게, 그 이유는 분명하다. 종말문학이 모험에 대한 우리의 기호, 즉 새로운 발견이 가져다주는 전율 및 뉴프런티어에의 갈망을 실현해 주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과거의 빚을 청산하여 새 출발을 가능케 해주며, 또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조금 더 빨리 알았을 경우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보여주기도 한다.(『종말문학걸작선1』, 황금가지, 2011)

 

    이 선집의 편집자는 종말문학을 상당히 효용론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는 다른 작가의 말을 인용하여, 세계 종말에 임하여 인간은 자신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기를 원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개인적인 체험을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영화 「피크닉」(岩井俊二, 1996)을 보고 종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내가 죽으면 세계도 끝”이라고 하는 독일 관념철학에나 어울릴 법한 대사를 남기고 권총 자살을 한다. “적어도 내게” 종말서사는 『종말문학걸작선』 편집자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개인적인 성격을 띤다.
    ‘세카이계’라고 하는 일본 서브컬처의 한 분파 역시 세계의 위기에 대해 다룬다는 점에서 종말문학과 친족관계에 있다. ‘세카이계 상상력’이란 “한마디로 주인공과 연애 상대의 작은 감정적인 인간관계(‘너와 나’)를 사회와 국가 같은 중간항의 묘사를 넣지 않고, ‘세계의 위기’나 ‘세계의 종말’이라는 거대한 존재론적 문제에 직결시키는 상상력”을 의미한다(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현실문화연구, 2012).
    「영원한 팔월, 어린 신의 세계」(『문장 웹진』, 2013년 10월호)에서 황인찬이 ‘세카이계’에 대해 논하면서, 그것은 “갑자기 비대해진 자아를 추스르지” 못한 소년소녀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를 서사화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을 보고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독자 측에서 볼 때, “왜 십대들의 연애에 ‘세계의 위기’니 ‘종말’이니 하는 이야기가 끼어드는 거지?” 하는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가령 세카이계 소설이 출현하기 전에도 십대들은 비대해진 자아 때문에 나름대로 괴로웠다. 그래서 ‘교육 제도’를 문제 삼는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대응을 했는데, 세카이계 이후의 서사는 손쉽게 더 거창한 문제를 연애와 결부시키고 있는 셈이다.
    세카이계 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의 「편집증 환자 슈레버」(1911)를 먼저 읽는 것도 한 방법이다. 독일에서 고검장을 지낸 슈레버 씨는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으며, 때가 되면 자신이 신에 의해 여성으로 화하여 세계의 위기를 극복하리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이 ‘세계의 종말’이라는 망상을 리비도의 회수로 설명한 바 있다. 쉽게 말해 ‘세계의 종말’이나 ‘위기’는 사랑의 대상을 상실한 자가 겪는 정신적 곤경, 정신적 폐허 상태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한참 연애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세계는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실연한 사람에게 세계는 그저 잿빛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스즈미야 하루히’가 우울해지면 세계에 위기가 찾아온 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谷川流, 『涼宮ハルヒの憂鬱』, 2003). 세계의 종말이 있고 나서 우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울함이 세계의 종말을 선도하는 구조다. 바로 이 점이 세카이계 소설을 규정하는 핵심인 것은 아닐까.
    세카이계 상상력은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창작과비평》, 2010년 겨울호) 같은 작품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 단편에서 주인공 소년소녀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세계의 마지막 잔존자가 되어 허공으로 떠오르면서 부서지는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소녀가 먼저 죽고 소년은 홀로 남겨진다. 나는 이 단편이 결국은 홀로 남겨진다는 것의 의미를 탐문하는 작품이라고 읽었다. 작가는 그 물음을 위해 세계의 종말이라고 하는 거대한 세트를 마련한 것이다.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자음과모음》, 2010년 여름호)도 이 계열이다.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우울이 ‘대홍수’와 같은 재난의 상상력을 추동하고 있다. 이 ‘위기상황’을 주인공은 아버지의 유령과 조우하면서 넘어간다. 이러한 착한 결말이 조금 맥빠지기는 하지만, 그것도 분명히 치유의 한 방식일 것이다.
    세카이계의 출현이 ‘거대 서사의 몰락’ 이후의 공허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아직 우리는 이 공허 속에 있다. 인터넷에 접속한 채 웹 스페이스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자주 느끼는 고립감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문득 가상현실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왔을 때, 주위엔 아무도 없고 나만 섬처럼 떠 있음을 깨닫는다. 다카하시 신(高橋しん) 원작의 애니메이션 「최종병기 그녀」(加瀬充子 監督, 2002)에서 평범한 여고생인 ‘치세’가 병기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를 때 내는 ‘슈-웅’ 하는 소리는 한없이 외롭게 들린다. 오늘도 ‘치세’는 홀로 정체 미상의 적기들과 외롭게 싸우고 있구나! 뭔가 전망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날마다 싸우면서 살고 있다. 세계의 종말에 대해 생각하면 왠지 쓸쓸해지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삶의 부하(負荷)가 정말 이 정도인가 되묻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문장웹진 11월호》

 

추천 콘텐츠

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