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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시인의 전위

  • 작성일 2012-12-11
  • 조회수 1,850

 

   [내가 읽은 올해의 책]

 

 

고통스러운 시인의 전위

─ 서대경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를 읽고

 

김도언

 

 

 

 

 

   올해 참으로 많은 시집이 쏟아졌다. 두 가지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독과점의 지위를 구축하기 위한 문학 전문 출판사들의 과다경쟁의 여파로 젊은 시인들에게 시집 출간의 기회가 비교적 너그럽게(?) 주어진 것과, 우수문학도서 선정이나 문예지 지원 등 문화예술위원회의 각종 문학부양책이 일정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올해 출간된 시집 중에서 시인에게 첫 시집에 해당되는 것들을 주목해서 읽었다. ‘첫’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순정함의 의미와 예측할 수 없는 미지에 대한 설렘은 시집을 읽는 재미와 감동을 확실히 배가시켜 주기 때문이다.

 

   서대경의 첫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문학동네)는 이러한 첫 시집에 대한 나의 기대를 200퍼센트 충족시켜 준 시집이다. 이 충족에 대한 증거는 다름 아닌, 그의 시집이 앞선 세대의 시로부터 그 어떤 감염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문법을 구사하고 있으며, 그것이 동어반복에 젖은 오늘의 한국 시에 충격을 안기고 내일의 시로 갱신해 가는 전위가 될 수 있다는 나름의 확신이다. 서대경의 시는 먼저, 음악적 낭만성을 거부하는 데서 기존의 시와 명백한 변별력을 가진다. 그의 시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단편적이고 파생적인 서사를 직접적으로 도입하고 그 안에서 의도적인 모순과 부조리를 이끌어내면서 관념적이고 낯선 심상을 창출해 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의존하는 것인 바로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완벽한 논리다. 그는 병적일 정도로 논리적인 완벽을 추구하는데, 이것은 그가 조화와 균형을 최고의 미적 가치로 여겼던 고전주의 시대로의 회귀를 꿈꾸는 예술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만든다.

  

   할머니의 영혼은 비밀스러운 고독에 잠겨 홀로 돌아다닌다. 할머니는 나를 보러 내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할머니의 방식이란 걸 안다. 나는 창가에 팔꿈치를 괴고 어둑어둑해지는 백야의 길거리를 내려다본다. 그가 다시 나를 찾아와 줄까? 세상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왜 이럴까? 오늘따라 내 방은 왜 이리도 끝없이 슬퍼 보일까? 오늘 밤에도 그는 광대 모자를 쓰고 눈가에 붉은 물감을 칠한 채 어느 어두운 밤거리의 축축한 열기 속을 걷고 있을 것이다. 커다란 북을 두웅 울리며, 안나― 안나― 안나― 속으로 속삭이면서. 나도 눈을 감고 안나― 안나― 안나― 내가 모르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본다. 다락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건들이 쓰러지는 소리. 다락방 창문이 깨지는 소리. 깨진 틈으로 백야의 열기가 스며드는 소리. 할머니의 영혼이 헐떡이는 소리. 안나― 안나― 안나― 할머니의 영혼이 속삭이는 소리.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부분

 

   서대경이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의 쇄말적인 논리성은 위 시에서 잘 드러난다. 이 시의 화자는 매우 억압적인 심리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지만 시행 어디에서도 감정의 혼란과 파동을 노출하지 않는다. 시의 화자는 마치 3단 논법을 연습하는 철학자처럼, 어떤 명제를 전제하고, 추론하고, 대답하고, 다시 의문한다. 이 과정이 매우 논리적인 치밀함으로 조직되어 있다. 시인의 이와 같은 전략은 역설적으로 시적인 것의 중심으로 간주되어 온 감정의 파쇄를 막거나 위장하려는 무의식의 소산인 것처럼 보인다. 이 생각이 맞다면, 서대경 시가 추구하는 궁극은 놀랍게도 시적 욕망의 해방이나 해소가 아닌 오히려 억압과 절제에 더 가까운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그의 시가 내장하고 있는 새로운 가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시인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 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 가는 풀, 어두워져 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 「차단기 기둥 곁에서」 전문 

 

   사실 나는 서대경 시인을 두세 번 정도 잠깐씩 본 적이 있는데,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미지가 온통 무채색의 것이다. 주변의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은 총천연색인데, 그만 유독 모노톤의 빛깔로 마치 그림자처럼 서 있는 것이다. 그는 근원적으로 쓸쓸함과 정통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위 시를 읽다 보면, 그의 그런 이미지가 다시 눈앞에 고스란히 살아난다. 그는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는 염소라고 스스로를 묘사한다. 철둑길 차단기 옆이라면, 생각해 보라 얼마나 불안하고 위태로운가. 하루에도 수십 번 열차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차들은 브레이크를 밟고 대기하는 차단기에 매여 그가 생각하는 것은 “염소적인” 것, 그러니까 한없이 여리고 고요하고 쓸쓸한 것들이다. 그것이 이 시인의 순결하면서도 치명적인 지향점이다. 그는 이것을 도대체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엄마”, “검은 눈”, “여름 하늘”, “풀의 어둠”, “벌레들의 푸른 눈”, “예배당 종소리”. 그는 아마도 원체험 속에서 동경하는 이미지들로 자란 것들을 시의 언어를 통해 호명하는 것이다. 이 수줍은 호명이 있기까지의 망설임과 주저 사이에서 서대경 시의 특유한 미학이 탄생한다.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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