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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울음의 기록

  • 작성일 2012-12-11
  • 조회수 764

 

   [내가 읽은 올해의 책]

 

 

등울음의 기록

─김주영, 『잘 가요 엄마』

 

해이수

 

 

 

  

   원고청탁을 받은 곳은 미국의 필라델피아였다. 그날 나는 영화 〈로키(Rocky)〉에서 그 유명한 사운드트랙을 배경으로 주인공이 뛰어오르던 미술관의 계단을 오르내렸다. 트레이닝을 받는 한 무리의 운동선수들은 숨을 거칠게 토해 내며 수백 개의 계단을 빠르게 왕복했다. 미술관 한쪽에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챔피언의 청동상이 서 있었다. 영광의 제스처인 그 모습은 이상하게도 벌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승리자(winner)는 자신에게 끝없이 벌을 주는 징벌자(punisher)일지도 몰랐다.

   귀국 후 나는 서가에서 올해 출간된 책들을 따로 뽑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것은 작가의 응결된 시간이자 그들 목숨의 일부였다. 최근에 장편을 집필하며 나는 작가와 창작에 대해 새삼 고민이 많았다. 작가란 ‘아름다움에 깊이 병든 자들’이고, 창작이란 ‘완전한 아름다움에 도달할 때까지 스스로에게 끝없이 벌을 내리는 행위’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소설가 김주영의 책을 오래 매만졌다. 73세에 장편을 출간했다는 건 어떤 면에서 참으로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벌을 준 일과 다름없었다.

   어느 눈 밝은 기자의 표현대로 『잘 가요 엄마』는 사모곡이기보다는 참회록에 가까웠다. ‘길 위의 작가’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여행과 외유로 주름이 굵어진 작가는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새삼 탯줄의 원형인 ‘고향과 엄마’로 회귀했다. 그것은 함구하고 싶은 가족사에 관한 고백이고, 좌절과 수치심을 안겨 주던 가난의 기록이며,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우회적 자술로 읽혔다. 소위 ‘트카페(트위터, 카카오 톡, 페이스 북)’로 눈과 손이 분주한 시대에 작가는 근원적인 물음표를 들고 나온 셈이다.

  비 오는 새벽 3시경 일흔이 다 된 주인공이 성(姓)이 다른 동생에게서 어머니의 부음을 듣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어른들은 의붓아비에 빌붙어 눈칫밥을 먹는 천덕꾸러기로 취급하고 또래들은 품팔이로 빌어먹는 여자의 자식이라며 따돌리는” 고향을 떠난 지 50여 년 만이었다. 주인공이 바라본 어머니의 생애를 요약하면 애달픔 그 자체다. “글자는커녕 숫자도 모르는 까막눈에, 사내를 두 번 갈아치운 여자가 감당해야 할 이웃의 조소와 경멸을 모질고 벅찬 노동으로 극복하려 했던, 두 번 결혼했으나 혼례는 치른 적이 없으며, 혼인신고조차 되지 않아서 2남 1녀를 낳았지만 사망할 때까지 처녀로 기록된 해주 최씨.”

   유언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아흔넷에 숨을 거둔 그녀가 맞이한 것은 장례 절차도 없이 무허가 장례식장에서 화장되어 바람결에 사라지는 일이었다. 자칫 신파로 떨어질 법한 내용을 작가는 노련하게 절제된 표현으로 문학적 장치를 활용하여 그려낸다.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연민은 시신을 덮은 창호지 아래의 자줏빛 맨발에서 드러난 ‘무지외반증’과 독거아파트에서 발견한 ‘싸구려 핸드백 속의 립스틱’으로 형상화된다. 발이 큰 여자는 남편에게 버림받는다는 속설 탓에 무지외반증으로 고생하면서도 버선만은 유독 작게 재단하여 신은 일과 평생 벼르다가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빨간색 립스틱은 어머니 역시 사랑받고 싶은 여자라는 것을 핍진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참으려 해도 결국 터지고 마는 것이 슬픔의 속성이다. 울음 중에서도 등으로 소리 없이 우는 울음만큼 깊은 울음은 없다. 등은 감추어져 있으나 존재를 떠받치는 기둥에 해당한다. 가슴으로 소리 내어 우는 것보다 ‘등울음’이 더욱 처절한 까닭은 그 기둥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소년 시절 어머니와 맨살을 비비며 포근히 잠드는 시간을 새아버지에게 빼앗기고 썰렁한 건넌방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 어머니가 건너와 가만히 껴안은 채 흐느끼던 일을 기억한다. 어머니가 흘린 눈물에 모로 누운 소년의 뒷덜미가 젖고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멍울로 남는다. 어느덧 일흔이 다 된 그는 염습 중에도 감정을 억제하다가 연소실 벽에 기댔을 때, 어머니의 시신이 타들어가는 화염의 진동이 등으로 전해지자 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뼈저린 그리움에 휩싸인다.

   담담하지만 공들여 쓴 흔적이 역력한 노작가의 문장 투혼에는 고개가 숙여진다. 한 문장이 한 풍경을 이루는 내공의 경지를 엿보는 일은 그야말로 행운이다. 토속적인 방식으로 국수를 밀어내는 장면(pp. 163-165), 옹기전 항아리에서 고독하게 바라보는 은하수의 세계(pp. 198-199), 소년의 눈에 비친 시골 밤의 신비로운 풍경들(p. 209), 고향을 떠나며 행선지도 모르고 올라탄 기차 안에서 환각으로 처리한 결말 부분(p. 273) 등은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서정성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서글프면서도 서글픔에 함몰되지 않도록 피식, 웃게 만드는 김주영 특유의 페이소스 또한 오랜 잔상으로 남는다.

   소설가의 분신인 주인공이 유년부터 노년까지 어머니에게 투영한 감정은 고대 그리스인이 분류한 네 가지 색깔의 사랑, ‘아가페(agape) 에로스(eros), 필리아(Philia), 스토르게(storge)’가 빠짐없이 들어 있다. 김주영은 작가 후기에서 “내 생애에서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 부끄러움을 두지 않았던 말은 오직 엄마 그 한 마디뿐이었다. 그 외에 내가 고향을 떠나 터득했다고 자부했던 사랑, 맹세, 배려, 겸손과 같은 눈부신 형용과 고결한 수사 들은 속임수와 허물을 은폐하기 위한 허세에 불과했다”고 밝히고 있다.

   신문기사를 보니 작가의 모친이 실제로 세상을 뜬 해는 2010년 봄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장례절차에 의해 모셔졌겠지만 작가는 몇 년 동안 어머니를 땅에 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몇 년 동안 작가는 어머니를 수도 없이 찾아뵙고 아들로서 응석을 부리고 위로를 전하고 용서를 구했음에 분명하다. 아무래도 작가는 그녀(혹은 그)에 관한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야만, 아니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기어이 사랑을 고백해야만, 그녀(혹은 그)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별의식 덕분에 유언 한 마디 남기지 않은 한 여인의 생애가 소설 속에 오롯이 살아서 우리에게 선물처럼 남았다.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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