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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동시에 독자인 사람의 노래

  • 작성일 2012-12-08
  • 조회수 937

 

   [내가 읽은 올해의 책]

 

 

작가인 동시에 독자인 사람의 노래

─ 이승우, 『지상의 노래』

 

서유미

 

 

 

 

 

   소설을 쓸 때는 독서를 자제하는 편이다. 좋은 소설을 읽게 되면 쓰고 있던 글이 형편없이 느껴져서 의기소침해지기 때문이다. 또 독서의 달콤함에 빠지면 소설쓰기를 작파해 버리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올라서 의도적으로 멀리하기도 한다. 그렇게 단속하는데도 열심히 써야 할 때는 읽고 싶은 책이 넘쳐나고, 작정하고 독서를 시작하면 뭔가 써야 할 것만 같은 불안감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상황은 반복되었다. 그래서 하루를 반으로 접어서 낮에는 읽고 밤에는 쓴다거나 일주일의 전반부는 읽고 후반부는 쓰자, 라고 정해 보기도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요즘은 마감이 끝나거나 책을 낸 후에 독서목록을 짜고 독서기간을 정해 놓은 다음 몰아서 읽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언제 또 바뀔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독서기간이다.

   가을에 소설집을 내고 나서 가장 먼저 집어든 책은 이승우 선생님의 『지상의 노래』였다. 그 책은 독서목록의 첫 줄에 자리 잡고 있었고, 나는 토막 독서가 아닌 온전히 하루를 할애해서 그 작품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렸다. 문학잡지에 연재되는 동안 잠깐 보았던 몇몇 페이지의 문장이 내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묵직하고 깊이 있는 서사에 목말라 있기도 했다. 초기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흔들림이나 기복 없이 힘 있게 밀고 나가는 작가의 작품세계 앞에서 나는 늘 경이로움을 느꼈고, 이번 소설은 여느 때보다 더 기대되었다.

   『지상의 노래』는 천산 수도원을 찾는 자와 그곳을 없앤 자들과 그곳에 머물렀던 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겹의 이야기가 다양한 인물을 통해 흘러나와 한 곳으로 고이는 동안 나는 후와 한정효의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거기 붙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표면적으로 아무런 접점도 없는 후와 한정효를 통해 작가는 세상과 절연하고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천산 수도원에 얽힌 비밀을 풀어 나가는데, 작가의 소설이 품고 있는 특유의 흡인력과 촘촘하고 유려한 문장 때문에 읽는 내내 마음이 풍성해졌다.

   소년이었던 후의 삶은 자신이 피해자라는, 압살롬이라는 의식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가해자이자 암논인 박 중위에게 복수하려고 계획하는 동안에만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었다. 압살롬일 때 후는 자신이 라면을 먹어서 사촌누이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라면 냄새를 맡을 때마다 구역질이 난다. 그 죄의식에 대해 작가는 “죄의식을 피하기 위해 죄의식을 필요로 했다.”라고 쓰고 있다. 우리가 삶속에서 발작처럼 혹은 미열에 들뜨듯 난데없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죄의식이란 결국 존재가 느끼는 부끄러움이므로 누구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 죄의식이 다른 죄의식으로 치환될 뿐인 것이다. 그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마음을 가만히 휘저었다. 나는 죄의식에 대한 그 역설의 문장들을 반복해서 읽었고 몇몇 문장은 옮겨 적었다.

   마침내 후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으로 박 중위를 지목함으로써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식과 혼란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 삶 속에서 후는 자신이 압살롬이 아니라 암논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고 무릎이 꺾이며 추락하는 것은 후만이 아니라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나의 몫이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이 끔찍하고 슬픈 깨달음은 이 소설 속에서 오롯이 빛나며 오래 남는다.

   독재자인 장군 밑에서 충성하던 한정효는 “그림자이기를 중단함으로써 그림자로 있는 동안 누렸던 영광의 휘장도 포기했다”. 그는 상관을 거역하고 선글라스를 벗음으로써 무용해지고 감금당하고 감시당하는 처지에 놓였으나 그럼으로써 오히려 본연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다 내려놓음으로써 그는 그림자가 아닌 자신으로 살 수 있는 회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천산 수도원은 카타콤(지하 공동묘지)이지만 동시에 체메테리움(쉬는 곳)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후와 한정효는 죄인도 아니고 감금되지도 않았으며 자발적으로 세상과 절연하며 새롭게 태어나 새로운 시간을 살게 된다.

   저 높은 곳에 모여(그들이 세상에서 죄를 지었거나 아니거나) 자신이 사랑하는 성경 구절을 옮겨 적는 수도사들의 일이 작가가 어느 때 세상에서 고립된 채 혼자만의 방에서 어떤 문장을 적어 내려가는 일과 닮았다고 하면 억지스러울까. 책을 읽는 내내 내게는 그런 두 개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책의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은 오래 담아 둔 채 망설여 온 고백과도 같아서 책을 덮은 후에도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한때 독자들은 내게 실체가 없는 추상이었습니다. ……요즘은 내 책을 읽는 누군가의 얼굴을 때때로 그려 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독자는 나와 아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가 나 같습니다. ……나를 닮은, 나와 같은 독자와 함께 이 벅찬 세상을 계속 잘 읽어 나가고 싶습니다.”

   작가의 이 말은 어쩐지 소설과 혼동되어 소설의 연장에서 읽힌다. 작가지만 동시에 독자인 사람의 진솔한 고백에 나는 후와 한정효가 지었을 법한 어떤 표정이 떠올라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올해 읽은 많은 책 중에서 이렇게 내 마음을 울린 소설이 있었던가. 이토록 인간의 내면에 대해 깊이 탐색하고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 소설이 있었던가.

   부족한 이해력과 문장으로 소개하게 되어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이 책에 대한 애정을 맘껏 표현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제 나는 차분하게 앉아 작가의 다음 소설을, 작가가 새롭게 들려줄 다음 노래를 기다려 볼 참이다. 그래서 작가와 닮은 얼굴의 독자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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