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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갯빛 즐김과 차이의 소송

  • 작성일 2012-09-22
  • 조회수 1,359

 

   사유의 드로잉_제2회

 

 

무지갯빛 즐김과 차이의 소송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1977년 6월의 첫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리세오 극장에서 단테의 『신곡』을 테마로 강연을 한다.(이하 관련 인용문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저, 송병선 역, 『칠일 밤 Siete Noches』, 현대문학, 2004년 판본이다.) 20세기 세계문학을 대표하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시인이자 문학자, 서구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원류이자 그 이론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는 그가 중세의 고전으로 ‘문학의 밤’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르헤스는 여느 촌스러운 문학인마냥 『신곡』에 대한 성서적 독해나 작가의 자의식을 추적하는 독서법을 강변하지 않는다. 그와 달리, 우선 그는 과거 단테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근거로 그 작품이 “글자 그대로 읽기, 도덕적 독서, 유추적 독서, 비유적 독서” 이렇게 네 가지로 읽힐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독자가 『신곡』을 접하는 다양한 독서의 가능성을 저자 자신이 밝혀 두었다는 말이다. 한 걸음 나아가 보르헤스는 그런 독서 방법이 복잡한 양식의 고딕 건축물과 세계의 모든 존재를 논했던 스콜라 철학이 가능했던 시대, 즉 중세의 특징이었음을 환기시킨다. 또 800년대 아일랜드의 신학자 스코투스 에리게나(Scotus Erigena)가 성경을 “공작새의 무지갯빛 깃털”에 비유하며 무한한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정의했다는 점도 알려준다.

   왜 보르헤스는 이런 이야기를 청중에게 들려주는가? 요는 이렇다. 독자마다 원하는 대로 읽을 수 있는 다양한 경로와 무한한 의미를 내포한 작품, 계속해서 독자를 불러들이고 그러면서도 존재가 고갈되지 않는 작품은 “우리의 삶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것이고, 각 세대의 독자들에 의해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는 사실. 얼핏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유의 진부한 예술론 엇비슷하게 들린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뜻은 그보다 섬세하고, 현대적이며, 생산적이다. 일례로 나는 그의 말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들을 새로 뽑아낼 수 있다. 예술작품은 절대 불가침의 캐논이 아니라, 시공간의 결에 따라 항상 이미 새롭게 직조되는 텍스트다. 또한 예술작품은 아우라에 덮인 고전의 권좌에서 시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생경한 태도와 이질적인 이해로 무장한 독자/감상자와 조우하는 삶의 매순간에 기꺼이 스스로를 개방하는 유연하고 다채로운 스펙트럼이다. 물론 이는 내 사유의 언어이고 보르헤스는 또 다르게 표현했을 테지만, 핵심은 앞서 공작새의 무지갯빛 깃털처럼 어느 것 하나도 같지 않고 각각의 색채를 발산하는 작품과 그 작품에 대한 향유를 상찬하는 일이다.

   이때 ‘같지 않음’과 ‘각자’는 ‘차이’의 가장 근본적이고 존재론적인 덕목이다. 그리고 다른 말로 여기 비동일성과 개별성은 보르헤스가 자신을 “쾌락주의적 독자”라 칭할 때 의미하고자 했던 바, 작품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명성에 영향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미학적 흥분”에 따라서 책을 읽는 자유의 토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지금까지 말했던 ‘차이’와는 다른 ‘차이’가 있다. 그 자체로 풍요롭고 다양하기 때문에 무수한 타자를 품을 수 있고 자유와 쾌락을 생산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 아주 비좁으며 작고 미세하기 때문에 서로 치열하게 셈하고 서로를 궁지로 밀어붙여야 하는 차이. 여기에 가장 들어맞는 한 사례가 퍼뜩 떠오른다.

   삼성전자와 애플사는 2011년 4월부터 현재까지 자사 스마트폰의 특허권과 디자인권을 상대방이 침해했다며 소송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과 미국은 물론 독일, 일본, 네덜란드, 영국, 호주 등 무려 9개국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글로벌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내놓은 글로벌 상품을 두고 벌이는, 글로벌 소송이라 할 만하다.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글로벌(global)’이 필수 접두어처럼 작동하는 경제 격전지에서 정작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극히 작은 ‘차이들(differences)’이고, 그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전 지구, 세계 전체를 웅변하면서도 깃털의 몇 십만 분의 1보다도 가볍고, 머리카락의 몇 백만 분의 1보다도 가는 다름을 따져드는 쟁투. 예컨대 애플은 검은 평면 사각형 스크린에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 자사 아이폰(iphone) 디자인을 삼성 갤럭시 에스(Galaxy S)가 베꼈으므로 특허권을 침해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삼성은 스마트폰에서 이메일로 사진과 메시지를 동시에 전송하는 기술 및 간단한 터치로 사진을 빨리 넘겨보는 스크롤링 기능의 특허를 애플이 침해했다며 맞선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그리 큰 차이도 아닌 사안들로 싸우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해당사자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사활이 걸린 만큼, 이때 차이는 보다 크고 풍요로우며 담대한 문명의 창조와 그것의 쾌락적 나눔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조차도 축소시키고 폐색시키며 옹졸하게 만드는 식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공작새의 무지갯빛 깃털’ 같은 은유는 순진한 과거의 낭만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는 일’은 보르헤스식 즐거운 공유를 비껴나가, 그와 어긋나게 비정한 분할에 따른 독점을 완수해 내는 데 있다.

   문학 장(場)이나 비즈니스 영역에서 보기의 스펙트럼을 조금 좁히면 글로벌시대 우리의 일상생활이 눈에 들어오는데, 거기서도 우리는 어느 샌가 ‘같음’과 ‘공유’보다는 ‘다름’과 ‘분할’을 훨씬 긍정하고 강조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 다름과 분할은 애석하게도 앞서 우리가 보르헤스를 통해서 둘러본 미적인 것들의 다양성과, 그것을 각자의 감성으로 향유하는 개별적 자유와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인다. 실제로는 삼성과 애플 같은 거대 기업의 글로벌 비즈니스 전쟁처럼 일상의 곳곳에서, 삶의 순간순간에서 차이의 정치경제학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 A는 너 B보다 알파벳 순서에서 하나 앞선 자리에 있으니 더 권위를 가져야 한다, 해외 명문대 출신인 당신은 한국의 지방대 출신인 그보다 학벌이 앞서니 더 많은 보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사람들이 전통 시가지 강북에 사는 것보다 첨단 소비문화의 상징인 강남에 사는 것을 더 높게 치니 우리는 그녀보다 우월한 계층이다 따위의 정치경제학이다. 그것이 지속적이고 첨예하게 나, 너, 그, 그녀, 우리를 가르고 쪼갠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라서 이렇게 각자로 나뉘고, 각자의 자리를 배정받아 앉혀진다.

   사실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집단보다는 개별을 긍정하고, 후자를 세계의 새로운 기준(global standard)으로 제시한 것이 글로벌리즘이다. 글로벌리즘은 서구 모더니즘의 폐해, 요컨대 이분법의 논리에 따라 옮고 그름, 강함과 약함, 논리와 비논리, 선진과 후진, 주인과 노예를 나누고 앞의 항목에 맞춰 세계가 줄 세워지면서 발생한 폭력을 극복하고자 1970년대 서구 학계와 문화예술계에서 일기 시작했다. ‘동일성의 폭력에 맞선 차이의 긍정’, ‘집단의 전체주의가 아니라 개별의 다원주의’가 그 모토들이다. 반면 현실 정치와 경제의 차원에서 글로벌리즘은 동서 냉전이 종식된 이후인 1990년대 본격화됐다. 이때부터 세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당사자들은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에 입각한 글로벌리즘을 주창했고, 패권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측은 자의든 타의든 그러한 글로벌리즘의 조류에 편승하려 애써왔다. 그러는 와중에 세계를 움직이는 다수의 현실 질서들이 변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디테일까지도 그 영향 아래서 변화했다.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FTA)의 전 지구적 확대부터 다국적 상품을 당연한 듯 소비하는 우리의 라이프스타일까지, 문화적 차이와 다양성을 축복하는 인류학적 전환에서부터 만성화된 세계 경제위기와 사회의 불안정성에 완전히 지쳐버린 우리의 감수성까지. 큰 판이 전면적으로 변했고, 셀 수 없이 많은 세부들이 심층까지 달라졌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삼성과 애플의 소송전, 나와 당신의 경쟁이 그런 판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그런 세부들의 더 세부적인 상황이다.

   차이와 개별성의 지나온 궤적이 위와 같고, 그것을 날카롭게 사용하는 현실이 또 위와 같다면 문득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보르헤스가 말한 개별성의 쾌락, 다양한 차이들의 풍요를 누리고 산출하는 쪽이 아니라, 이권을 독점하기 위한 차이와 경쟁에서 나 혼자 살아남으려는 개별성 쪽으로 흘러왔을까? 답은 많겠지만, 적어도 나는 여기서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라는 식의 답변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과로 원인을 정의하는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문장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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