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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진 세계들

  • 작성일 2012-09-03
  • 조회수 1,580

 

   [고봉준의 젊은 작가 인터뷰]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진 세계들

─ 김중일 시인 인터뷰

 

고봉준

 

 

 

 

 

*

 

   한국 시사(詩史)에서 2000년대의 첫 십 년은 ‘미래파’의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 2005~2006년 무렵 문학계에선 ‘미래파’ 논쟁이 한창이었다. ‘미래파’라는 명칭은 당시까지 시의 주류적 경향을 점하고 있던 생태주의적 상상력이 퇴조기에 접어든 시기에 90년대의 시적 경향과는 전혀 다른 언어와 상상력을 내세우면서 등장한 젊은 시인들에 바쳐진 비평적 찬사의 일종이었다. 당시 ‘미래파’라고 호명된 시인들 가운데 몇 사람이 같은 시동인의 멤버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편’이라는 이름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시동인 ‘불편’의 멤버는 안현미, 이영주, 김민정, 하재연, 김근, 김중일, 장이지, 김경주다. 특히 동인들 가운데 김경주?김민정 시인의 이름이 문예지에 자주 오르내렸다. 반면 파편화?개인화된 감각에 기대어 색다른(일종의 가상공간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세계를 보여준 김중일의 시가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상대적으로 그의 시세계가 덜 파괴적인 것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일 터인데, 실제로 그의 시는 시인 자신의 모습처럼 겉모습이 현란하지 않다. 현란하지 않으면서도 파격적이고, 조용한 듯 보이지만 이질적인 매혹의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김중일의 시다. 그렇지만 한동안 그의 시들을 문예지에서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동년배 시인들에 비해 과작이고, 무엇보다 직장일로 바빴기 때문이다. 미래파 논쟁이 한창일 때, 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나눔사무국에서 일을 했고, 이후 서울문화재단을 거쳐 현재는 화성시에 위치한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런 그가 5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창비, 2012)를 출간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한여름의 어느 토요일 오후에 대학로에서 진행되었다. 일찌감치 더위에 지쳐버린 그와 나는 오랫동안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대화 자체를 녹음하지는 못했다. 인터뷰 장소가 녹음이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와 인터뷰는 서면으로 주고받기로 약속하고 이른 시간부터 맥주를 마셨다. 아래의 인터뷰는 당시에 나눈 이야기와 서면으로 주고받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고봉준_ 어떻게 시인이 되셨는지요? 등단 전후의 상황과 문학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중일_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시인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문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죠. 전형적인 이과생, 공대생이었고요. 대학에 갓 들어갔을 때 우연히 동아리방에 비치되어 있던 시집들을 읽게 되었죠. 창비 시선을 비롯해 몇 권의 시집을 읽었어요. 주로 노동시 계열이었어요. 금세 읽었죠. 비유적 장치가 거의 없는 정직하고 결기 있는 언어의 시들이다 보니 저 같은 문외한도 쉽게 읽을 수 있었죠. 일단 이해가 되니까.

   그냥 쉽게 읽은 정도였으면 거기서 끝났을 거예요. 제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구로공단 인근에 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자랐어요. 제 기억으로는 비교적 평화롭고 조용했던 유년이었죠. 골목에서 어울려 놀던 친구의 아버지는 손이 없는 한쪽 팔을 늘 바지 주머니 속에 찌르고 다녔어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죠. 그냥 원래 그랬으니까요. 저만 보면 활짝 웃어 주던 상냥한 옆집 누나가 공장에 다니는 건 어린 저에게 그저 당연한 일상이었는데, 성인이 된 후 생각해 보니 당시 그 누나는 겨우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였어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내 까마득한 유년의 기억 속에, 아내에게 생계를 맡기고 사라진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온종일 골목을 배회하던 친구 아버지의 잿빛 표정이나 지나가면서 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옆집 누나의 탈색된 안색 같은 것들이 다시금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것이죠.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하필 처음 접한 문학을 통해서 말이에요. 상당히 신선하고도 가슴 시린 체험이었고, 그때부터 저는 문학에 매혹되었던 것 같아요. 내가 몰랐던 세계가 있었구나, 싶었던 것이죠. 그게 시작이긴 한데, 따로 문학수업이랄 것은 없었어요.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던 남독의 시절이었고, 그 문외한의 오독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꽤 괜찮았던 문학수업이었던 것 같아요. 관련 학과에 들어가서 시인, 소설가, 평론가인 교수님들에게 추천받은 이른바 “좋은 작품”들만 선별해서 효과적으로 습득하는 것보다 말이죠.

 



   고봉준_
등단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하셨어요. 요즘의 추세에 비추어 보면 꽤 과작에 속하는 편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첫 번째 시집에서 두 번째 시집 사이에 어떻게 지내셨는지 일상인 김중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김중일_ 이번 질문도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요. 10년 전으로 소급하자면 말이죠. 등단은 했지만 저는 여전히 문학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웠어요. 오랜 습작기간을 거쳐 등단한 시인들에 비해 모든 면에서 부족했죠. 다행히 운 좋게 “불편” 동인(김근, 안현미, 이영주, 하재연, 장이지, 김경주, 김민정) 활동을 시작함으로 해서 많이 배웠죠. 문인들의 분위기랄까 심지어 뭐 그런 것까지도요. 당시에는 실제로 매달 두 번씩 모여서 품평회도 했어요. 학창시절에 했던 것처럼 각자 준비한 인쇄물 나눠 읽고 표현 하나하나까지도 지적하고 칭찬하고 했죠. 모두가 첫 시집도 내기 전인 이십대 중후반이었고요. 잡지사에서 청탁이 오면 같이 기뻐하며 준비했고, 동인 품평회에서 좋은 말을 들으면 안심하고 잡지에 발표를 했죠. 지금도 웃으면서 그 당시 얘기를 해요.

   소위 미래파 논쟁이 있기 직전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갓 등단한 신인들에게 그렇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저 역시 발표지면도 그렇고 시집 출간이 가능이나 할지 모호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렇다 보니 제가 등단하고 만으로 5년 만에 시집을 냈는데, 당시로서는 그다지 늦은 편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사실 등단 이후부터 첫 시집을 내기까지는 저는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거의 습작기간에 가까웠다고 생각해요. 내가 앞으로 쓰게 될 나의 시는 어떤 모습일까, 라는 고민을 했던 습작기 말이에요.

   미래파 논쟁 이후 젊은 시인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같은 또래의 시인들은 굉장히 빠른 시일 내 다음 시집을 계약하고 출간했어요. 반면 저는 두 번째 시집을 내기까지 다시 만으로 5년이란 시간이 꼬박 필요했어요. 저는 등단 후 10년의 세월 동안 7~8년을 출퇴근하는 직장생활을 했어요. 갓 등단했을 때는 학부생이었던 걸 감안하면 졸업 후 계속 사무원이었던 거죠. 생업에 종사하며 시를 쓰는 시인들이 많아요. 그분들은 아실 테지만 하루를 놓고 봤을 때 출근 퇴근해야 하는 물리적인 시간의 문제도 있지만 사실 야근까지 하고 집에 돌아오면 어떤 창작을 하고 싶다는 마음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정신적인 방전 상태가 오기도 하죠. 창작자는 책상에 앉아서 쓰기에 앞서 뭐랄까 좀 이러저러한 몽상도 하면서 정신적으로 유연해질 필요가 있거든요. 마치 운동선수가 경기 전에 몸 푸는 것처럼요. 시가 소설과 달라서 워딩이 오래 걸리지는 않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일과 중에 행정문서를 작성하다가 밤에 시를 써야 하는데 도무지 모드 전환에 필요한 정신적인 준비운동 시간이 없다고 할까요. 가볍게 얘기하다가 좀 진지해져 버렸는데, 제가 본의 아니게 과작인 이유가 아무튼 그런 이유도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정작 드리고 싶은 과작의 이유는 다른 부분인데요. 저는 등단하고 첫 시집을 내기까지의 5년은 이른바 모색기, 첫 시집 이후 두 번째 시집을 내기까지는 모색한 것에 대한 실험기라고 생각해요. 첫 시집 때 모색했던 세계를 그간에 형성된 나의 미적 취향에 따라 더 집요하게 천착해 보았죠. 단지 저는 그 시간을 충분히 가졌던 거예요. 시집은 한 권이 나왔지만, 1.5권 분량의 시를 썼어요. 시집에서는 빠졌지만요. 물론 다음 시집은 가능하다면 3~4년 안에 내고 싶어요. 이전 시집보다 잘 읽히지 않는다 혹은 좋아했던 느낌이 희미해졌다는 얘기도 들어요. 감수해야죠. 쓰던 대로 쓰는 건 쉬워요.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가장 잘 내고 칭찬받았던 목소리를 어느정도 포기할 줄 아는 것이 다음 시집을 준비하는 첫 번째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 밖에도 시집을 내는 건 많은 또 다른 모색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힘들지만, 아무튼 즐거운 일이니까요.

 



   고봉준_
2006년 무렵 ‘미래파’ 논쟁을 시작으로 시에 관한 논의가 꽤 활발했습니다. 김중일 시인의 시적인 특징에 비춰 보면 당시의 논의에서 김중일 시인이 좀 소외된 듯한 느낌도 드는데, 당시의 논의들을 어떻게 지켜보셨나요?

   김중일_ 굳이 소외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세칭 ‘미래파’라는 그 당시의 시류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 주고 불씨를 댕겼던 일부 몇몇 시인들이 관성적으로 자주 거론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미래파’ 논쟁이 의미가 있는 지점이, 그 당시까지 전형적인 시로 인정되지 않거나 무관심의 영역에 있었던 다양한 형식의 시 텍스트를 밖으로 끄집어냈다는 것일 텐데요. 이 논쟁이 반복되면서 시나브로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젊은 시인들을 ‘미래파’라는 큰 타이틀 아래 일군으로 묶어버리는 과오가 종종 생겼지 않나 싶어요. 그나마도 묶일 수 없는 시인들은 논외가 되었죠. 가령, 신용목, 길상호 시인 등 시류와 무관하게 서정적이고 사실적이면서도 선배들과 구분되는 세련됨을 갖은 자기만의 시를 쓰는 좋은 시인들이 많았는데 말이죠.

   어쩌면 당시 주인공이었던 소수의 시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젊은 시인들이 갖고 있는 저마다의 개성에 대한 균형 있는 논의는 그들의 두 번째 시집 이후에나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가능했고 또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일단 저는 스스로를 “미래파”시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제가 알기로는 많은 또래의 시인들이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누구는 “근데 나 왜 미래파야? 그거 안 하면 안 되나?” 진담 반 농담 반의 소리도 했고요.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의 우리는 그저 나름의 시를 쓸 뿐이었죠. 본의 아니게 미래파 운운에 묶이면서 몇몇 시인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균형 있는 평가를 받지 못한 또래의 시인들도 많다고 생각해요. 물론 발표 지면이랄지 출간이랄지 혜택 또한 전혀 없었던 건 아니겠지만요. 물론 저는 당시의 논쟁 혹은 혜택과 상대적으로 무관했으니, 그런 점에서 제가 소외된 게 아니냐고 말씀하신 거 같네요. (웃음)

   아무튼 모든 논쟁들은 득실이 있기 마련이지만, 없었던 것보다 있었던 게 나았던 것이 우리 시문학에 어떤 “균형”을 가져다준 것만은 사실인 거 같아요. 이런 시도 있으면 저런 시도 있다. 이런 시가 좋은 시면, 저런 시도 충분히 멋진 시다. 뭐 이런 당연하지만 당시까지는 잘 되지 않았던 인식과 관점들이 생긴 거죠.

   2010년 전후로 또 다른 군의 젊은 시인들이 등장을 했고, 2000년대의 그런 과도기가 그들에게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확보하고 시집을 내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혜택으로 어느 정도는 돌아간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이 되네요. 동시에 미래파에 대한 평가와 반성도 이루어지다 보니 한때 젊은 시인들과 습작생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던 비슷한 소위 미래파스러운 시풍들도 어느 정도 걷히면서, 이제는 정말 다양하고 내밀한 개성들이 공존하고 존중받는 2010년대 시를 기대하게 돼요.

 

   고봉준_ 이어지는 질문입니다만, 김중일 시인의 시세계에는 시류적인 영향이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선배 시인이든 동세대 시인이든 혹시 영향을 받은 시인들이 있다면요?

   김중일_ 첫 번째 질문과 연계해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본의 아니게 처음 접한 문학은 이른바 노동문학이었어요. 그리고 서정적이고 사실적인 시들을 읽었고요. 차차 모던한 시들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냥 쉽게 말해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제 깜냥에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용이했던 시부터 읽기 시작해서, 점점 문학적 호기심을 채워 가는 쪽으로 진행됐던 것이죠. 당연히 제가 끄적거렸던 글들의 모양새도 비슷한 변곡점을 그리며 따라갔고요. 매혹되었던 시인들은 너무 많아서 몇 명을 거론하기가 힘들어요. 이 땅에 시를 쓰고 읽는 모든 습작생들이 한번쯤 좋아했던 시인들은 저도 다 좋아했고 영향을 받았다고 보시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다만 그런 건 있어요. 국문과나 문창과생들의 경우 자신보다 먼저 그 과정을 치열하게 보냈던 선배들이나 교수님(기성 시인, 소설가)들이 추천해 준 효율적인 방법에 직간접적으로 따라갈 기회가 있었다면, 그런 형편이 되지 못했던 저는 완벽한 난독(亂讀)과 난문(難文)의 시절을 보냈어요. 한때는 그 과정이 매우 더디고 칠흑같이 막막했는데, 지금은 그게 지름길이었던 것 같아요. 한 가지 스타일에 대한 흥미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어요. 그런 점에서 변덕이 심했다고 해야 할까. 그저 제가 매혹되는 대로 읽고 느낌 대로 쓸 뿐이었어요.

 



   고봉준_
모든 시가 그렇겠지만, 특히 2000년대 시인들의 시를 읽을 때면 시인의 외부 세계보다는 사적인 공간과 세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두 권의 시집을 읽으면서 여전히 이 시들의 시공간이 가상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이런 의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만일 동의한다면 그것은 시대적?세대적인 문제일까요 개인적인 문제일까요?

   김중일_ 현실적 외부 세계와 사적인 세계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 게 어떨까 싶어요. 내가 아무리 사적으로 굴어도 우리 한 명 한 명이 저마다 세계를 구성하는 현실적 징후들일 테니까요. 온종일 방안에서 상실과 우울 그리고 몽상에 빠져 있는 히키코모리 역시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분히 현실적인 한 단면이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저는 한 시절을 사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느끼는 우울, 고독, 두려움 같은 것들을 시라는 장르 속에서 재구성하는 데 충실한 것은 현실적인 시 쓰기와 다름 아니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저렇게 부조리투성이인데 나는 몽상 속에서만 허우적거리고 있구나 이런 부채감은 갖지 않기로 한 거죠. 환상적 글쓰기랄지 뭐 이런 건 단지 방법론적인 부분이고요. 가상의 공간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작의가 무엇이냐가 핵심이죠.

   사실 시라는 텍스트 자체가 완성되는 순간 그건 이미 가상의 시적 공간 아닌가요. 아무리 사실적인 묘사와 내용과 현안을 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시라는 장르 속에 재구성된 그래서 현실을 담을 수는 있어도 현실과 구분되는 한 편의 언어 구조물이니까요.

   그리고 앞서도 말씀드렸던 제 문학적 관심의 촉발점은 지극히 현실적인 노동문학이었고, 일단 저는 지금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현실세계에서 자유롭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철저히 귀속되어 있죠. 그래서 저의 몽상은 이탈한 자의 발랄함보다는 다소 무거운 우울과 피곤에 물들어 있는 경우가 많죠. 말하자면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발굴된 또 다른 층위의 현실이에요.

   뭐 그리고 이제는 젊은 세대도 개인에게 영향을 주는 현실적 사회 현안들에 대해 절대 무심하지 않죠. 저 또한 그렇고요. 다만 이 현실들을 소설도 아닌 특히 시라는 장르 속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과 형식적 노력들이 필요하겠죠. 적지 않은 시인들이 그 지점을 고민하고 있을 듯싶어요.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 미적 취향, 개성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시라는 첨예한 미적 형식 속에 여러 현실을 담아 보는 노력은 제게도 있어요. 이번 시집 속에도 몇몇 시편들이 그런 고민의 결과물로 수록되어 있고요. 저를 비롯해 많은 시인들이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고봉준_ 첫 번째 시집 『국경꽃집』을 읽으면서 이 시집의 공간(세계)이 현실 세계의 시적 재구성이 낳은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시를 쓰실 때의 창작방법 같은 것을 잠시 소개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어주시면 더 좋겠는데요.

   김중일_ 지금 눈앞에 존재하고 선명히 보이는 하나의 이미지만을 잘 활용해서 시적인 포인트를 잡아 엮어낸다면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 훨씬 수월할 거예요. 좀 더 현상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 하나의 텍스트 속에서도 하나 이상의 시선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공간이란 것도 통시적으로 접근하면서 생각해 봐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대대손손 각자의 시선을 통해 전혀 다른 의미로 공유되어 왔던 것이고요.

   저는 제가 표현하고 싶은 지점에 최대한 근접하기 위해서 하나의 공간 속에 여러 개의 시간이 혼재되기도 하고, 한순간에 몇 개의 공간이 겹쳐지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야 뭔가 쓰고 나서 안 빠뜨리고 다 썼다 생각되거든요. 이런 방법론은 대체적으로 적용되는 부분이에요.

   아시다시피 창작물이 어떤 공식에 의해 제작되는 게 아니다 보니 전편에 걸쳐 아주 정확하게 적용되는 특징은 또 아니고요. 그냥 저의 습관 정도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집(시)의 공간이 현실 세계의 시적 재구성이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의외로 저는 몽상만으로는 시를 쓰지 못하는 부류거든요.

   그리고 이건 또 다른 층위인데요. 세계를 바라보는 저만의 관념적 관점 또한 제 시의 동력이 되곤 해요. 첫 번째 시집에서는 세계가 구조적인 건축물처럼 완고하게 자리잡고 또 움직이고, 그 속에서 속절없이 휘둘리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 두 번째 시집에서는 우리가 사는 이 시간을 세세연년 반복되는 후렴(허밍)의 세계, 표현컨대 “커튼콜의 세계”로 바라봤어요. 즉 본 공연(노래)은 이미 끝났다고 설정한 것이죠. 아닌 게 아니라 인류의 역사도 그렇고 소소하게는 한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일련의 과정이 끊임없이 변주되는 후렴 같잖아요. 요컨대, 시뮬라크르 같은 거죠.

   일단 그런 관념적 인식 자체가 저로 하여금 무척이나 쓸쓸하고 허무하고 고독한 감성을 자아내게 했죠. 그러나 실존적인 지점도 있어요. 우리는 고작 후렴들인데 그것은 끝없이 변주되거든요. 이전과 같으면서도 다르게 편곡되거든요. 이를테면 아버지와 내가 같으면서도 다르듯 말이죠. 그 차이, 다른 지점을 섬세하게 포착해 가는 것이 우리 세대의, 저의 시 쓰기인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인식의 지점은 두 번째 시집의 거의 모든 시가 갖는 공통분모 같은 거에요.

 



   고봉준_
두 번째 시집의 중간부분에는 사회성이 느껴지는 시들이 몇 편 있습니다. 이전의 시 스타일에 비춰 보면 이례적인 경우라 하겠는데요, 물론 재구성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소위 ‘현실성’이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이런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더불어 2010년 전후에 시단에서 한창 ‘시와 정치’라는 주제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어떻게 보셨는지요?

   김중일_ 역사와 사회가 개인의 감성에 주는 영향은 커요. 제가 처음 노동시를 읽었을 때 유년시절의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이 강하게 반응해 왔던 것처럼요.

   등단하던 2002년에는 월드컵도 있었지만, 대선도 있었어요.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죠. 5년 뒤 제가 첫 시집을 출간했던 그해에도 대선이 있었어요. 정권이 바뀌었고 제가 등단하던 해에 대통령이 되었던 그는 비극적으로 서거했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현실 속에서 상상하기 힘든 많은 일들이 일어났잖아요. 이건 뭐 당최, 제가 아무리 책상머리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아무튼 그리고 두 번째 시집을 낸 올해에는 총선이 있었고, 또 한 번의 대선을 앞두고 있죠.

   저는 시라는 장르적 형식에 대한 자의식이 강한 편이에요. 말하자면, 시에 대한 개인적인 미적 취향에 다분히 충실한 편이에요. 어떤 형식의 시가 새롭게 가능한지 생각하죠. 반드시 시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요.

   다만, 사회 구성인이자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제가 감각하는 현실 세계를 저만의 형식 속에 담아 보고자 노력해요.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또 다른 형식에 대한 고민으로도 이어져요. 좋은 거죠. 아무튼 그런 고민의 결과물로 쓰게 된 몇몇 시들이 두 번째 시집에도 있어요.

 

   고봉준_ 많은 비평가들이 평론을 통해서 시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자들에게 시는 어려운 장르로 인식됩니다. 만일 독자들이 김중일 시인의 시를 읽는다고 한다면, 어떤 점에 주의를 기울이면 조금 수월하게 다가갈 수 있을까요?

   김중일_ 한 권의 작은 시집 속에도 꽤 많은 층위들이 있기 때문에 시 한 편 한 편 말씀드리기는 쉽지 않아요. 첫 번째 질문에서부터 지금까지 제가 드렸던 대답에서 그 힌트를 어느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제 시집을 읽은 동창 한명은 이런 말을 해요. 왜 한국어로 된 글이 외국어보다 어렵냐고요. 사람들은 어려운 음악이나 그림에 대해서는 비교적 너그러운데, 인간이라면 일상 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재료로 하는 문학에 대해서만큼은 불만을 터뜨리죠. 당최 뭔 말이냐 이거죠. 두세 살 때부터 사용했던 한국어가 독해가 안 되니 화가 나는 거예요. 답답하고. 내가 무식한가 싶고(웃음). 그런 거 아니고요. 시집 속의 언어는 가공된 예술적 언어잖아요. 일상적으로 우리가 대화할 때 쓰는 언어가 아니에요. 시 속의 언어는 악보 속의 음표에 가까워요. 시라는 악보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는 거죠. 악보를 벗어나면 단지 지시적 기표에 불과해요. 오로지 의사소통을 위한 단어처럼요. 잘 연주하듯 읽다 보면 노래가 되고 음악이 되는 거죠. 자기 나름대로 읽으면 자기만의 음악이 되기도 하는 거예요. 정답이 없는 거죠. 쇼팽을 모든 피아니스트가 녹음 뜬 것처럼 똑같이 해석하지는 않잖아요?

   아무튼 여러 기회를 통해 많이 말씀드렸던 팁인데요. 우리가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할 때나 처음 듣는 음악이나 초현실적인 그림을 볼 때 우리는 그런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 왔는지 잘 한번 복기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당최 어디가 어딘지 이 길이 저 길인지 모르겠고 당황스럽고 인상적인 풍경도 눈에 잘 안 들어오죠. 낯선 음악은 지루하거나 심지어 소음에 가깝고, 저 그림은 왜 꼭 저런 식으로 표현되어야만 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지요.

   그러나 조금만 참을성 있게, 헤매더라도 나름의 길 찾기를 한다면 곧 그 낯선 마을의 길섶에 피어 있는 작은 꽃까지도 눈에 보이게 되잖아요. 안 들리던 새소리도 그제야 들리고. 그러니까 좋아하고 관심을 갖고 익숙해지는 것밖에 왕도는 없지 않을까요. 어떤 효용성이 강조되지 않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듯 말이죠.

   끝으로 이번 대화 중에 제가 보냈던 남독의 시절을 말씀드렸듯 저는 오독이 매우 창의적인 독서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편이라 어떤 가이드를 통해 제 글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평론가들의 해석도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텍스트에 접근하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잖아요. 훨씬 더 재미있게 읽는 나만의 방법이 많이 있거든요.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하는 논문을 쓸 것도 아니고 나만의 독후감이 모두를 공감시킬 필요도 없고요. 부담을 떨쳐버리세요.

 

   고봉준_ 마지막 질문입니다. 시인이 되려고 생각하거나, 등단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세요? 문학, 일상,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김중일_ 이 시대에 시를 읽는 것도 모자라 시인이 되고자 하는 분들에게 애정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시는 다른 예술 장르가 그렇듯, 한 시절의 세계와 그 속의 나를 증명해 주는 기록이에요. 시는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지극히 내밀한 나만의 감성이고요. 더욱이 시인이 된다면, 동시에 나의 그 감성을 공유하길 원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것이 되기도 하죠. 멋지지 않나요.

   값비싼 미술품 같은 건 돈 많은 사람들이 사서 쟁여 놓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문학은 정말 누구나 쉽게 큰 비용 없이 향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예술 매체에요. 문학 중에서도 시는 더더욱 그렇죠. 시를 쓰는 창작자가 된다는 건 그렇게 상당히 의미 있고 재미있는 일이다, 라는 인식만 확고하다면 자연스레 포기할 수 없는 열망이 생기고, 그 열망을 실현하는 과정은 순전히 스스로의 성실과 감각과 우연에 꾸준히 맡겨 보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요즘에는 직접 작가와 소통할 수 있는 자리가 많이 마련되어 있어요. 지역문학관을 거점으로 기성작가가 정기적으로 초대되고 있고, 그 밖에 연희문학창작촌을 비롯해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여러 시설 또는 공공도서관 등에서도 창작 강의나 문인간담회가 수시로 마련되고 있어요. 창비, 문지, 문학동네 등의 출판사에서도 신간이 나오면 꾸준히 낭독회를 개최하고 있고요. SNS도 있고요. 친구가 될 수 있죠. 잘 활용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

 

   인터뷰 원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김중일 시인이 제30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동년배의 시인들에 비해 조금은 늦은 조명이지만, 비로소 그의 잠재성이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는 느낌이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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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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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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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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