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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와 이미지의 마성, 김유진 소설가

  • 작성일 2011-11-07
  • 조회수 2,860

 

[고봉준의 젊은 작가 인터뷰_02]

 

 

문체와 이미지의 마성, 소설가 김유진

 

고봉준

 

 

 

 

*

 

랑스의 독문학자 마르트 로베르의 책에는 소설의 정의불가능성에 대한 서술이 등장한다. 요약하자면 소설이 다른 어떤 예술 형식보다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현실 세계는 “그것을 충실하게 그리느냐 그것을 변형시키느냐, 현실의 크기와 색깔을 보존하느냐 왜곡시키느냐, 그것을 비판하느냐 하는 것은 소설의 자유”이며,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소설로 하여금 책임을 느끼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김유진의 등단작 「늑대의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그러니까 한 마을의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이유로 폭사(爆死)한다는 소설적 설정을 접했을 때, 나는 우리 시대의 소설이 더 이상 ‘개연성’이나 ‘리얼리티’ 같은 19세기적 관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인간을 거침없이 폭사(爆死)시키면서 현대의 음화를 그려내는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궁금증으로 이어졌었다.



설가 김유진은 2004년 단편 「늑대의 문장」으로 등단한 이후 한 권의 창작집(『늑대의 문장』)과 한 권의 장편소설(『숨은 밤』)을 출간했다. 그녀의 소설의 문법은 동시대의 작가들과 유사하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방식을 취한다. 그것은 80년대의 리얼리즘적인 것과도 다르고, 90년대의 내면적인 서사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脫)리얼리즘적 경향이 그녀 소설의 특이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리얼리즘의 영향권 바깥에서 창작을 시작한 그녀 또래의 집단적인 감수성에 가까운 것이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2000년을 전후해서 문단에 등장한 작가들에게 소설의 ‘리얼리티’란 더 이상 소설 바깥의 세계와의 일치 여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유진 소설을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의 그것과 구별시켜 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시적인 문체와 이미지의 압도적인 힘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의 작품을 읽고 ‘세계’와 ‘주제’의 문제성이 아니라 고작 문체와 이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자칫 결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소설을 이끌어가는 기본적인 동력이 문체와 이미지의 힘에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인터뷰의 첫 머리를 과거의 행적, 그러니까 그녀의 학창시절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문예창작과를 다녔어요. 원래는 시 학회에 있었는데, 학기말에 과제로 소설을 내야 해서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저희 학회 선배가 네가 쓴 시를 소설로 늘려 봐라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때 부랴부랴 늘려서 쓴 게 「늑대의 문장」 초고본인데, 그땐 한 60매 정도였던 거 같아요. 그리고 수업을 끝내고 나서 선배들이 공모전 준비를 한다고 우르르 몰려가는데, 저도 PC방에서 따라가서 늘리는 바람에…….

 


창과 재학 시 ‘시’를 전공했다는 것, 등단작 「늑대의 문장」은 수업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이미 썼던 시를 소설로 늘인 것이라는 그녀의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이제까지 내가 김유진 소설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느낌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시가 있었다. 그녀의 문학적 기원에는 ‘시’가 있었고, 소설을 쓰게 된 후에도 그 기원은 ‘흔적’으로 계속 그녀의 문장들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문체와 이미지의 힘’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시적인 것’의 정체였던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 ‘시적인 것’의 기원, 그러니까 소설가 김유진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한 사람의 작가로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힘들이 그녀에게 시 또는 소설을 쓰게 만들었을까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그래서 작가의 문학수업이나 문학적 연대기 등에 관해 들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질문이 너무 거창해서인지 “너무 보잘 것 없어서……”라는 겸양의 답변만 되돌아왔다. 그래서 질문을 조금 바꿔 ‘왜 문창과를 선택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보기로 했다.

 

아주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작가나 시인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선수들이 있잖아요. 그렇게 지냈던 것 같아요. 문창과는 의무적으로 글을 써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시인이나 작가가 될 거라는 상상도 못하고, 그냥 수업 같이 듣고, 시 합평회 하고, 시 쓰고 몰려다니고 술 마시는 게 너무 낭만적이어서. 몰려다니면서 흡수하게 된 경우가 많아요. 어영부영 얼떨결에 소설가가 되었고 등단하고도 어리버리하게 지냈죠. 시 학회였는데 소설로 등단이 되어버려서, 등단하고 나서가 굉장히 큰 문제였어요. 덜컥 등단을 해버렸으니까 등단 이후부터 새로 쓰는 작품들이 다 계속 신세계를 보아야 하는 거고. 경험이 없으니까. 어둠 속에서 썼던 것 같아요. 예상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계속 해나가야 하니까. 그 두려움이 되게 컸어요.

 


주 오래전에 읽은, 작가의 이름마저 가물가물한 인터뷰의 한 구절을 잠시 떠올려 본다. 그 인터뷰의 전체적인 내용은 이미 잊혔지만, 자신이 왜 작가가 되어야 했고, 그것은 우연보다는 필연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주장하던 작가의 육성은 여전히 귓전을 맴돌고 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대답은 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우연 아니면 필연. 그런데 최근에 내가 만난 작가들 또는 내 주변의 작가들이 자신이 문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필연으로 인식하는 경우는 무척 드문 듯하다. 전혀 관심이 없었다거나, 순도 100퍼센트의 우연으로 작가가 되었다고 말하는 건 거짓이겠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작가’라는 직업적 글쟁이가 필연적인 운명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김유진 또한 자신의 작가로서의 출발점에 ‘우연’이라는 단어를 제시했다. 작가가 되는 것이 ‘우연’이었다면, 그 이후의 시간을 견디게 해주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더군다나 그것이 ‘시’에서 ‘소설’로의 전향(?)이었다면, 뿐만 아니라 단 한 편의 습작도 없는 상황에서 밀려드는 청탁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말이다. 텔레비전 연속극의 열혈시청자처럼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묻고 싶었으나, 글 쓰는 사람들이 직면하게 되는 그런 두려움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말하자면 항상 끼고 살아야 하는 운명 같은 것이기에 그 극복과정에 대해서 묻지는 않았다. 다만, 글을 쓰는 사람들이 대개 유사한 습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던 건 부인할 수 없다. 그 습관이란 글쓰기의 두려움을 타인의 글을 읽는 것, 즉 독서를 통해서 잠시나마 유예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두려움의 순간에 길잡이가 되어 준 작가나 작품이 있는가에 대해서 물었다. 두려움을 이겨낸 작가의 성공담보다는 소설의 세계에서 그의 항해를 도운 방향타에 관해 묻는 것이 더 적절해 보였다. 이 대목에서 예기치 못하게 녹음이 지워져 작가의 육성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김유진 소설가의 말과 희미한 기억의 조각을 모아서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듯하다. 등단 이후 처음에는 청탁이 오는 원고들을 정신없이 썼고, 그러다가 점점 소설을 쓰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즈음 프랑스에 1년 체류하게 되었으며, 그 시간들을 견디게 해준 것이 박상륭의 소설이었다는 것. 박상륭의 소설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멀리 가 있는 아름다운 문장’이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더디게 흘러가는, 자칫 지루하기까지 한 박상륭의 만연체가 김유진 소설가의 단문들, 특히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연결점들을 잘라먹은 것 같은 작가의 문체와는 매우 다른 질감이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그냥 마음의 의지”가 되었다고 간명하게 대답했다.

 

제가 23살 정도부터 20대를 보낸 건데, 그땐 항상 불만이 많았어요. 뭐든 잘 안 되는 것 같고. 굉장히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것 같고. 굉장히 불안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런 불안함이 계속 커지다 보니 세상에 적대적이 되더라구요. 불만이 많아지고 극단적이 되고.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 같아요. 내가 정말 보았다고 느끼는 것들, 환영 같은 것들에 많이 의지를 하고 쓴 소설이어서 그야말로 내면이 그대로 드러난. 어떤 불안이라든가 소외감이라든가, 아마 그것이 현대 사회의 알레고리라면 알레고리겠죠. 저도 우울하니까.

글쓰기 방식은…… 일단은 첫 문장과 끝 문장을. 근데 제가 구상이라고 하는데 뼈대를 적어 놓는 거라면, 저는 포인트로 찍고 싶은 문장들을 적어 놓는다거나, 그러니까 흐름을 따라간다는 것이 이야기의 흐름을 따른다는 것보다는 그런 쪽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저는 제 안의 논리가 있죠. 이미지의 논리라거나 문장의 논리 같은 것들을 따라가기 마련이죠.



유진의 초기작들, 특히 「늑대의 문장」에는 공포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세기말적인 분위기라고 해도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것들은 현대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읽히는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문학적 장치와 분위기가 의도된 것이냐고 물었는데, 작가는 불안의 20대를 경험하면서 쓴 작품들이라 자신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난 감이 있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것이 의도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한 편의 소설이 갖는 의미란 그런 의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텍스트로 씌어졌을 때, 그리고 독자들이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맥락화하면서 읽었을 때 생산되는 효과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작의 방법에 대해서는 어떨까? 의도/비의도의 문제를 떠나서 나는 그녀가 소설을 쓰는 방식이 궁금했다. 그녀의 첫 창작집은 대개의 소설이 그러하듯이 결론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간다는 느낌이 있지만, 첫 장편 『숨은 밤』에서는 그러한 느낌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그녀는 자신의 소설 쓰기는 첫 문장과 끝 문장을 먼저 써놓고 시작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야기의 흐름보다는 이미지나 문장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쓰는 편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시를 쓰는 방식으로 소설을 쓴 것이다.

 

고봉준 : 설정은 어떤가요? 여기에도 배가 불룩한 아줌마(임신부)가 길을 가는데,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전제가 되는 게 한국 소설의 특징인데요. 일상적이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실제로 그 도시가 어디이며, 그 지명이 어떤 곳인지 하는 것들이 지워져 있는 것 같아요. 그 지워지는 방식이 대개 이미지로 처리되고 있어요. 약간은 추상적이기도 하고 몽환적인 설정이 되고 있는데. 왜 굳이 이런 방식을 고집하세요?

 

김유진 : 여기 나오는 소설의 배경들은 널려 있는 것을 배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니라 그냥 순간의 독특함 같은 것을 드러내고자 했던 거죠. 평범한 곳을 그려도 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잖아요. 좀 틀어진 방식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거죠. 제가 간과했던 것은 제가 그렇게 묘사하고 표현한 곳들이 완전히 이질적으로 다가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고봉준 : 선생님의 소설은 어둠이 잔뜩 깔려 있는 느낌이고, 굳이 그림을 그린다면 새까만 어둠 속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사는, 그런데 ‘산다’라는 것이 어둠과 싸워서 이겼다기보다는 겨우 살아남은 듯한 느낌으로 그려지는 것 같아요., 죽음의 이미지가 드리워져 있어요.

 

김유진 :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느라(웃음) 그런가? 주변에서 폭력적인 것들을 많이 보고, 그에 반해서 저는 저 하나만 오롯이 평온한 상태를 항상 유지해 왔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더 극단적으로 바라보게. 살아 있는 자체가 그냥 어쩔 수 없이 살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 소설에서 살아가는 것의 당위성들, 무엇 때문에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살아가는 것은 늙는 과정인데, 굳이 그런 게 있나, 있어도 찾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것이 없으니까. ‘왜 살아야 하는가?’가 끊임없이 변주되는 것이죠. 글 쓸 때 가장 중요하니까. 그럼 사는 건 왜 사는 것인가?(웃음) 앞으로 좀 더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약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단락’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김유진의 소설쓰기가 시적인 방식으로 세상과 사물을 보던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장이면 문장, 이미지면 이미지, 느낌이면 느낌 모든 면에서 김유진의 소설은 세련되었고, 또 아름답다. 그런데 이 모든 장점들이 ‘소설’이라는 장르에서는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소설’을 장편이라는 장르 법칙에 맞춰서 사고하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이런 장점들을 ‘단점’으로 읽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김유진의 소설에는 ‘서사가 없다’라는 평가가 가능하며, 또 그것은 결코 칭찬이 될 수 없다. 특히 이러한 단점(?)은 그녀의 첫 장편 『숨은 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그녀에 따르면 이 소설은 매일 일정한 분량을 써야 하는 일일연재 형식으로 씌어졌다. 그래서 하루치의 호흡이 하나의 단락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장편소설의 형식으로서는, 특히 그동안 우리의 눈에 익숙했던 장편의 형식과는 무척 달라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형식적인 접근보다 더 궁금했던 건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의 존재였다. 그녀는 왜 자신의 첫 장편의 주인공을 아이들로 결정해야 했던 것일까? 혹자의 말처럼 우리는 장편소설이 성숙한 남성의 장르라고 인식해 오지 않았던가? 그녀는 ‘버려지는 아이들의 내면’에 주목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형식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기본적으로 어떤 것을 드러낸다거나 줄거리를, 사건을 드러내는 것을 자꾸만 감추게 된”다고 대답했고, 나는 그게 결국 ‘시’ 아니냐는 절반의 농담으로 응수했다.

 


처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저는 전학생이라서 학교를 굉장히 많이 옮겼어요. 전학과 전학 사이에는 항상 공간이 있어요. 예전엔 바로 전학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서 한 달 정도를 쉰 적도 있어요. 대기상태로 집에 앉아 있는 경우도 많았구요. 전학이 되어도 거기에 적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들이 또 있죠. 그걸 무한히 반복하면서 지내 왔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학업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이름을 쓰게 시키는데 항상 덜덜 떨며 썼던 기억이 나요.


 

부분 역시 녹음 파일이 지워져 전적으로 기억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녀의 첫 장편 『숨은 밤』이 소녀가 아니라 소년의 시선과 목소리로 채워졌더라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아이들이 갖고 있는 고독과 세상에 대한 저항이나 분노 같은 것들이 훨씬 더 직접적으로 드러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질문해보았다. 그건 ‘기’라는 소년이 군청 직원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연기할 수 있는 영악함도 지니고 있고, ‘학교’라는 제도 속으로 들어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그곳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에 불을 지르는 과감함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제안에 대해 작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답변을 했었는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학교’라는 제도에 관한 작가의 경험담을 듣게 되었고, 대학시절 소설론 시간에 들은 약간의 지식이 떠올랐다. 그건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대상으로 어떤 교수님이 이야기해 준 것인데, 장편소설이 ‘아이’를 화자로 내세울 경우에는 관찰자 이상의 수준을 부여하기가 어렵다는 일종의 핸디캡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른들의 세계가 지닌 속물성을 ‘관찰’하는 것이 소설의 포커스라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아이’가 등장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약점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실제로 나는 작가에게 ‘소년’이 왜 학교에 불을 질렀을까에 관해 물었는데, 그녀는 “가장 크게 화제가 될 수 있을 만한 사건”이었기 때문은 아닐까라고 답변했다. 그랬나 보다.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불’이 가장 끔찍한 복수이기 이전에 가장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수 있는 사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터뷰를 여기까지 진행했음에도 나는 끝내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털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준비했던 질문의 하나, 즉 플롯이 뚜렷하지 않고, 서사가 두드러지지 않는 그녀의 소설에 대한 원론적이고 이론적인 비판이 정작 그걸 쓴 사람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느낌이 어쩌면 나만의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마지막 질문을 그런 비판에 대한 작가의 응답으로 대체하기로 결심했다. 요컨대 독자들 중에는 왜 이야기가 없느냐, 플롯이 없느냐, 이런 불평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가가 질문의 핵심이었다. 녹음 파일의 일부가 지워져 버려 그녀의 육성 그대로를 옮길 수는 없지만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서사를 따라가는 구조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 근데 이 책을 너무 쉽게 읽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신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잠시 버려두고) 편안하게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을 약간 버린다면 다른 재미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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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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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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