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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 작성일 2011-10-18
  • 조회수 1,191

 

[최창근의 쉽고 재밌는 희곡 이야기_제4회]

 

 

우아하고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 나도, 내 친구처럼, 투덜거리며, 자동기술법을 흉내내 볼까?

 

최창근

 

 

 

 

 

고 재밌는 이야기? 게다가 ‘희곡’을? 처음 연재를 시작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야, 모두들 그런 표정들이었지. ‘연극’ 이야기도 아니고 ‘희곡’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써보겠다는, 조금은 무모한 발상에 도무지 신뢰가 안 간다던 지인들의 예상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어. 그럼, 그렇지. 네 글이 진지하면 진지했지 재미있을 턱이 있나, 부터 시작해서 감동을 주긴 하지만 재미하고는 좀, 같은 시큰둥한 반응이 대부분이었겠지만, 그러나 여기서 좌절은 금물. 나도 맘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쉽고 재밌게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안 그래? 자, 결심. 그리고 파이팅 하자! 뭐, 이런 식이었다고나 할까.

렇게 연재를 시작했는데 요즘 사정은 말이 아니군. 우선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던 날씨가 가을비 온 뒤로 기온이 뚝. 게다가 환절기 감기도 유행. 잔기침이 계속 나와 목 감기약을 먹었지만 별 소용없고.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으니. 게다가 이번 달 마감도 훌쩍 지나 한숨만 나오고. 문장지기도 이젠 의연하게 대처하는군.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거겠지. 아,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모든 것이 엉망이야.

런데 정말 이번 달은 무슨 얘기부터 쓴담? 스페인과 중남미의 희곡을 소개한다는 밑그림은 그리고 있지만 이것 참, 고민이네. 전혀 생각이 안 나. 어쩌지, 어쩌나. 아, 그래, 〈흐르지 않는 시간〉이 있었지? 원제목은 Cloud Tectonics, 그러니까 ‘구름 구조지질학’쯤 될까?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은 나왔었나? 그 희곡 정말 죽여줬는데. 호세 리베라였지, 아마도? 현재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극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던, 그러나 미국의 소수인종 중 하나인 히스패닉계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었다는. 역시 타고난 환경이 작가를 만든다는 건 어느 정도 진실인 듯해.

작품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나는군. 함축적이고 시적인 대사가 돋보였는데. 기적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어 하는 작가의 믿음이 잘 드러났었지. 그건 그렇고 난 왜 시간과 공간에 관심이 많을까? 이번에도 ‘시간’이잖아. 알 수 없는 일. 아무튼 〈마리솔 Marisol〉이나 〈태양의 거리 The Street of the Sun〉를 비롯한 대부분의 작품 경향이 매직 리얼리즘에 가깝다면? 아, 이 작가도 마르께스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네. ‘마술적 사실주의’ 자체가 중남미 독재정권 치하에서 비현실적이고 왜곡된 역사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탄생했으니까. 거 참, 아직까지도 어딜 가나 마르께스, 마르께스니 정말 할아버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군. 전성기가 지난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알면 서운하겠는걸.

러나저러나 어쨌든. 메갈로폴리스, 잃어버린 천사들의 도시, 캄캄한 로스앤젤레스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거리엔 사이렌 소리가 요란한, 마치 마법에 빠진 환상의 공간 같은. 망각의 도시를 배회하는 소외받은 하층민들, 히스패닉이 등장하는데. 냉정함이 지배하는 최첨단 현대문명을 가로질러 낯선 이방인처럼 부유하는, 그러나 그 자리에 멈춰선 한없이 그리운 시간의 저편 속으로 고단한 삶이 펼쳐지고. (이런 젠장, 여기까지 쓰고 원고를 다 날려버렸지. 참 허무하기 짝이 없어.) 그러고 보면 이 작품의 초연 공연도 가을에 올라갔군. 또 76극단이네. 왜 의미 있는 공연은 죄다 76극단이 했지? 다른 극단들은 뭐 하고? 아무튼.

치 시간이 없는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한 여인(셀레스티나 델 솔, 20대)이 차를 기다린다. 그 여인은 거리에서 형제(아니발 드 라 루나, 30대 & 넬슨 드 라 루나, 20대)를 만난다. 형제는 여인에게서 어머니의 따뜻함과 애잔한 그리움을 맛본다. 그들은 가족처럼 스페인어를 주고받으며 멕시코 음식을 먹고 낯선 도시에서 이방인이 된 서로의 처지를 위로한다. 멈춰진 시간, 단 한 번뿐인 사랑, 영원의 기억, 잃어버린 꿈. 뭐, 그런 것들.

건 그렇고 요즘 대학교 출판부도 심상치 않다며? 제일 먼저 출발을 한 것은 성균관대학교. 성대에서는 현대 독일 희곡 시리즈를 1차로 20권, 2차로 20권을 냈으니 놀랄 만하지. 성신여대 출판부에서도 독일 희곡 시리즈를 출판하고 있고. 이화여대 출판부에서는 예이츠 희곡선집을 시작으로 아일랜드 희곡 시리즈를 기획 중인가 봐. 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는 특별하게 셰익스피어 총서를 내고 있고. 반가운 일이야. 교양서로 여러 나라의 희곡들을 묶어낼 생각을 했다는 건 큰 변화지. 아, 양식 있는 학자들이 연극 쪽에도 있긴 있구나.

혹 전통과 권위가 있는 문학 출판사에서 유명 문인의 희곡집을 출간한 일은 있지. 그것도 외국 작가 말이지. 창비에서 아리엘 도르프만의 『죽음과 소녀』를 냈고 생각의 나무에서는 『루이지 피란델로의 대표 희곡선』을 출간했지. 문학과지성사에서는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몇몇 희곡집을 발간했고. 그러나 모두 외국 작가의 경우에 해당해. 지명도 있는 큰 출판사들은 한국 작가들의 희곡집은 아예 안 팔리고 수준도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나 봐. 아니면 희곡을 아예 문학으로 취급하지 않거나. 슬픈 일이야. 그렇지, 뭐.

2003년이었나, 브레히트 희곡선집을 낸 적도 있는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현대 스페인 희곡선』(임호준 엮고 옮김)을 펴냈어. 이 책엔 연극의 전성기였던 17세기 ‘황금세기’를 거쳐 20세기 초반 ‘은의 세기’라 불렸던 현대 스페인 연극의 흐름이 잘 소개돼 있고 베나벤떼의 〈이해관계 Los intereses creados〉, 까소나의 〈나무는 서서 죽는다 Los arboles mueren de pie〉, 부에로 바예호의 〈채광창 El tragaluz〉(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실험), 베넷의 〈E. R〉 같은 희곡들이 해설과 함께 실려 있지. 그중에서 까소나의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공연된 적도 있어.


레한드로 까소나는 스페인의 현대 극작가들 가운데에서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까와 더불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장 폭넓은 사랑을 받은 작가야. 1936년 일어난 스페인 내전으로 망명길에 오른 그는 라틴 아메리카를 순회하며 공연을 하게 되지. 그러다가 프랑코의 철권통치가 완화된 1962년 조국으로 귀국을 하고. 그의 작품들은 자국의 관객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는데, 그만큼 그의 희곡은 누구나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대중 친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다만 연극비평가들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 실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당시의 스페인 연극계에서 시적이고 신화적인 공간을 보여주었던 까소나의 희곡이 현실 도피적으로 여겨졌던 거지.

소나의 예술적인 감성은 사회문제보다 인간의 내면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의 전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꿈과 이상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거든. 그가 그리고 있는 현실과 환상 사이의 심각한 갈등은 작품 속에서 심리적 깊이를 얻게 돼. 환상에 의해서 설정되는 세계는 자연의 법칙 밖에 있는 세계이며 인간의 마음으로 구축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때로는 상징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표현이 가능해지지. 그만큼 고차원적인 세계라고나 할까.

의 희곡 중에서 〈여명의 숙녀 La Dama del Alba〉와 함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나무는 서서 죽는다〉는 대부호인 아리엘 박사가 세운 자선기관 ‘영혼의 집’이 역할대행인이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박애주의를 실천한다는 엉뚱한 발상으로부터 출발하지. ‘영혼의 집’의 도움으로 자살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된 젊은 여인 마르따와 ‘영혼의 집’의 운영책임자인 소장이 20년 전 집을 나간 손자와의 만남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할머니의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해 할머니의 손자 마우리시오와 그의 아내 이사벨 역을 맡아 거짓으로 연극을 펼친다는 내용이 사건의 전부라고 할 수 있어.

작품은 비현실적인 상황 설정과 다소 진부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자아내는 기발한 대사와 시종일관 유지되는 팽팽한 긴장과 극적 반전으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흡인력을 품고 있어. 특히 할머니는 그녀가 지닌 풍부한 감성 때문에 까소나 희곡의 등장인물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손꼽히지. “진실한 사랑 앞에서는 아무도 명령하지 않아요.” 같은 할머니의 대사는 작품 전반을 통해 긴 여운을 남기기도 하고.

복을 위해서 진실이 아닌 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일이 어둡고 암울해도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내일이 없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야 하는가? 극중 마르따의 고민처럼 이 희곡은 젊은 연인들의 사랑보다 더 짙고 넓은 사랑인 가족애를 포함한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지. 손자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나무’로 비유되고 그 나무는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늘 사랑의 대상을 지켜준다는 의미로 확장해서 해석할 수 있어. 이 우주처럼 위대하고 광활한 사랑을 하자, 그것이 작가가 이 희곡을 읽는 독자들에게 던져 주는 메시지겠지. 꿈을 꾸는 자는 그 꿈을 닮아 간다는 말처럼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에게 중요했던 연극의 본질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나 투쟁이 아니라 궁극적인 차원의 순수한 휴머니즘이었던 것 같아.

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가운데 한 권으로 출간된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어느 계단의 이야기』(김보영 옮김)도 꼭 한 번 읽어 보았으면 해. 바예호는 학생 시절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였지만 오히려 미술 쪽에 더 관심이 많았지. 스페인 내란 때 아버지와 형은 총살당하고 그는 공화정부군에 가담한 혐의로 감옥에 투옥되기까지 하는데, 그가 본격적으로 희곡을 쓰기 시작한 것은 출옥하고 나서부터였어. 첫 희곡인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En la ardiente oscuridad〉도 훌륭한 작품이지만 그의 대표작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어느 계단의 이야기 Historia de una escalera〉라고 할 수 있단다.

두 3막으로 구성된 이 희곡은 실존주의적인 동시에 사회주의적인 작품으로 네 가족의 일생이 담겨 있어. 전후 시대 중, 하류층의 일상생활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고. 어느 도시의 허름한 연립주택 계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모든 사건은 이 계단에서 벌어지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등장인물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사랑과 증오가 싹트지. 제1막은 1919년의 어느 날, 제2막은 10년이 흐른 1929년의 어느 날, 그리고 제3막에서는 20년이 지난 1949년의 어느 날이 무대 위에 펼쳐지는데 한 세대가 바뀐다는 30년의 세월 동안 3세대에 걸친 주인공들의 좌절된 삶을 통해 스페인의 어두운 현실을 포착해 내고 있어.

1막. 잘생겼지만 게으른 낭만주의자 페르난도와 현실적이지만 희망이 없는 우르바노가 친구 사이로 나온다. 부유한 엘비라는 페르난도에게 관심이 있지만 페르난도는 아름다운 여인 카르미나를 사랑한다. 2막. 시간이 흘러 페르난도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돈 많은 엘비라와 맺어지고 연인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카르미나는 우르바노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하게 된다. 3막. 다시 오랜 세월이 흘러 양가의 아들과 딸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작가는 그들 자식들의 미래에 대한 결론을 성급하게 내리지 않고 관객들에게 맡겨 둔다는 점이 이 극의 특징이기도 하지.

의 작품에 ‘희망적인 비극’이라는 수사가 따라다니기도 하는 바예호는 극작가에 대한 자의식을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지. “처음에는 다 작가로 글을 쓴다. 분야는 나중에 정해지는 것이고. 그런데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전문 분야가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한 작가가 인생을 ‘상황’으로 본다면 그는 극작가인 것이다.”

근엔 우리나라에서도 스페인 현대 극작가들의 희곡이 꽤 많이 공연되는 듯하다. 삶과 죽음에 관한 명쾌한 상상을 이끌어낸 세르지 벨벨의 블랙코미디 〈죽음(혹은 아님) morir〉이라든가 현존했던 복싱스타의 일생을 다룬 후안 까베스따니의 〈우르따인 urtain〉이라든가 진화론 논쟁에 새로 불을 붙인 후안 마요르가의 〈다윈의 거북이 La Tortuga de Darwin〉 같은 뛰어난 작품들을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지. 알프레드 자리나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과도 통하는 1950년대의 혁신적인 희곡작가인 미우라의 해학극 〈세 개의 해트모자 Tres sombreros de copa〉도 번역이 되어 출간됐어. 이런 작가들의 작품은 스페인의 현대작가로는 생의 철학자이기도 했던 우나무노나 실험연극의 대가 페르난도 아라발만 알고 있던 내 인식의 지평도 훨씬 더 깊고 넓게 확장시켜 주었지.

페인의 현대극은 1982년에 집권한 사회당의 문화장려정책에 힘입어 더욱 발전하고 있기도 해. 장기간에 걸친 전체주의 정권의 집권과 프랑코 독재정권의 영향으로 야기된 상업주의 문화의 폐해를 딛고 문화 재건에 나선 거지. 스페인 전역에 크고 작은 공립극장과 사립극장이 지어지고 많은 재원을 들여 안정적인 공연 환경을 확보해 나가고 있어서 스페인 연극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거든. 다양한 연극제와 지방문화의 활성화로 젊고 새로운 작가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고. 현재 처한 우리나라의 공연 여건을 고려하면 정말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아하고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새 시대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어느 철학자의 전언처럼 한국의 희곡도 언젠가는 세계의 명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날이 오겠지. 그날을 고대하며 오늘 스페인과 중남미 희곡들을 돌아보며 시종일관 투덜거렸던 나의 불만은 여기서 살며시 접어 본다.

 

《문장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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