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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픈 눈’의 작가, 소설가 염승숙

  • 작성일 2011-10-08
  • 조회수 1,506

 

〈고봉준의 '젊은작가' 인터뷰〉

 

 

가장 ‘아픈 눈’의 작가, 소설가 염승숙

 

고봉준

 

 

 

 

 

평일 오후인데도 고속도로는 주말처럼 막혔다. 고속도로에는 비상구가 없었다. 약속 장소인 홍대 앞으로 가는 내내 운전대를 잡고 있는 몸이 조금씩 흔들렸다. 이 거대한 교통 정체의 끝을 알고 싶어 귀는 교통방송에 던져 두었으나, 조바심이 난 몸은 연신 들썩거리기만 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인터뷰의 질문들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오직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시내를 가로지르고 새로운 길로 접어들기를 몇 차례, 약속시간에 임박해서 홍대 앞에 도착했을 때는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그제야 팽개쳐 두었던 질문들이 생각났다.

소설가 염승숙 2005년 월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두 권의 소설집을 출간했다. 『채플린, 채플린』과 『노웨어 맨』이 그것. 그녀의 소설들은 대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들면서 우리 시대의 문학이 현실을 대면하는 특유의 방식을 보여준다. 흔히 만화적, 탈현실주의적, 환상적 등으로 평가되는 그녀의 소설들은 얼핏 지난 시대의 소설이 감당했던 ‘현실’로부터 많이 벗어나 현실이라는 문학적 중력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설적 문법의 변화는 비단 그녀만의 특징은 아니다. 세대라는 범주를 동원하면 좀 거창한 일반화가 되고 말겠지만, 적어도 그녀의 소설은 80년대에 태어난 작가들의 소설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상상력의 비약이라는 공통점을 나눠 갖고 있다. 이들 세대의 문학이 지나치게 가볍다거나, 부정적인 현실을 외면한 채 상상력의 자유로운 발산에만 집중한다는 비판도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염승숙의 소설이 현실과 무관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속견이다. 그녀에게도 현실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감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다만 현실과 대면하는 방식이 이전의 리얼리즘적 문법과 다른 것은 분명하다.


작가의 첫인상은 단정했다.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알겠지만 그녀의 소설들은 동년배 작가들의 작품과 비교하면 무척 ‘착한 결말’을 고집하고 있다. 단문 특유의 속도감과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문장이 작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오랜 경험으로 문장과 그것을 쓴 작가가 일치한다는, 즉 문장은 그것을 쓴 사람을 닮는다는 말을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지만, 염승숙의 경우 이 말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우리는 먼저, 등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등단에 관한 한 염승숙은 엘리트였다. 대학 3학년 겨울 몇 군데 공모전에 출품을 생각했으나 시기를 놓쳐서 응모하지 못했고, 이듬해 대산대학생문학상에 응모했다가 ‘만화적 상상력’이라는 당시로서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평을 받고 낙선했지만, 그 후 월간 《현대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니 남들처럼 낙선의 고배를 여러 번 마신 것도 아니었다.

등단에서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 온 과정과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불현듯 밀란 쿤데라를 떠올렸다. 아니, 쿤데라의 이름은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고속도로에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나는 쿤데라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소설들도 애독한 편이지만, 그의 글들 가운데 단연 내가 아끼는 것은 소설에 관한 두 권의 이론서와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의 산문집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인터뷰를 앞두고 쿤데라를 떠올렸을까? 아마도 염승숙의 소설을 이해하는 첫 문턱으로 쿤데라가 지적한 소설의 현대성이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쿤데라에 따르면 근대문학으로서의 소설에는 하나의 터닝 포인트, 즉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문턱이 존재한다. 쿤데라는 그 자리에 카프카를 놓는다. 카프카 이전의 소설들, 가령 19세기의 소설들은 리얼리티를 추구한 반면, 카프카 이후의 소설들, 즉 20세기 이후의 소설들은 리얼리티라는 소설적 관행을 벗어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설을 썼다. 카프카의 변신 모티프가 그 단적인 예다. 이렇게 본다면 21세기 한국 소설, 특히 젊은 작가들에게서 두드러지는 환상적인 요소는 그런 후반부의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등단한 이후에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어요. 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지. 소위 소설을 왜 이렇게 쓰는가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던 거 같아요. 그런데 사실 제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스스로 너무 진부하지 않나 생각할 정도로 근원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누구인가, 이 세계에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혼자 여러 가지 답안들을 만들어 봤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걸 연습한 게 소설에서도 여러 가지 작법이나 기법이 아닌가 싶은데, 제가 하는 이야기가 사실성 있고 진부하다거나 매번 해왔던 보편적인 것일지라도 새롭게 이야기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거 같아요. 늘 사람들이 A라고 말해 왔던 거를 나는 Z까지는 아니더라도 A′까지는 만들어 보자, 좀 비틀어서 이야기를 하는 거죠, 낯설게 하기 기법 같은 것을 딱히 노렸던 건 아니지만 누구나 말하는 보편적 방식에서 나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 답을 구하기 위해서 반대로도 생각해 보고 거꾸로도 보고 이랬던 게 기법상으로 신선하게 받아들여질 지 몰랐어요.

그랬다. 비슷한 연배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과잉 현실 내지 초(超)현실이라고 부름직한 기법들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은, 그녀의 소설들은 결말에 있어서, 또는 주제 면에서 전통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보편적인 주제를 낯선 방식으로 다루는 것, 이것은 염승숙의 소설을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개인적인 특이성보다는 젊은 작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유사한 기법이 두드러지게 들어오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나는 이러한 공통성을 세대의 문제로 쉽게 환원해 버리는 태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이들을 쉽게 같은 것으로, 유사한 것으로 간주해 버림으로써 작가의 특이성을 괄호 속에 넣어 버리는 분류학적 악취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악취미인 이유는 그 분류가 실상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 다수의 작가들을 부재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만 성립되거나, 기껏해야 예외적인 현상으로서만 존재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연배의 작가들이 유사한 방식으로 소설을 창작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형성해 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는 부정되지 않는다. 이 현상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궁금했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비슷한 또래, 비슷한 작가군, 비슷한 성향을 가진 개성이 넘치는 작가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굉장히 많은 작가들의 팬이고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정말 재밌다 기발하다 참신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읽을 정도로 2000년대에 들어서 신선한 발상을 보여주는 작가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전통적 리얼리즘에서 90년대를 거치면서 불안을 바라보고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조금 더 감추고 싶은 것이 많아진 세대이기 때문은 아닌가, 이전 세대는 불안을 직접적으로 소리 높여 외칠 수 있었잖아요 집단을 꾸려서 나 지금 이렇게 불안해 나는 이 세계와 이 사회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어라는 걸 정말 강하게 집단적인 의지로 표출하고 움직일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걸 당당히 했어요. 그리고 그것에 대해 뭔가 보상이 있었죠. 그런데 90년대를 거치고 뭐 개인주의랄까 이런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대를 거치면서 불만이나 불안을 굉장히 감추는 방식을 많이 훈련하고 단련된 세대가 아닌가, 2000년대에 접어들고 20대를 지났고, 70-80년대 생들이 갖고 있는 불안을 감추는 방식이 농담이랄지 의뭉스러움이랄지 ‘난 불안하지 않아’,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이런 것들이야’, ‘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기보다 내가 흥미 있는 것에 한평생 목숨을 걸 수 있어’, 이렇게 자신의 불안을 감출 수 있는 방식에 능숙해진 세대가 아닌가. 어떻게 보면 이렇게 다양한 개성적인 작가군이 나온 것도 불안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드러내는 방식을 개인주의화해서 터득하면서 그것이 음악이든 영화든 언어이든 사람이든 관계든 그래서 문학적으로는 토대가 훨씬 더 넓어진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대사회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불안. 그랬다. 현대는 ‘불안’의 시대다. 그런데 그녀는 젊은 작가들이 불안을 불안이 아닌 방식으로, 가령 유머러스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서 마치 그런 것은 자신의 삶에, 이 세계에 들어설 곳이 없는 것처럼 표현하는 데 익숙한 방식으로 성장해 온 세대이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소설의 문법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라고 대답했다. 그녀에 따르면 젊은 세대가 ‘난 불안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젊은 세대는 불안을 과거의 선배작가들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 질문을 물고 늘어지면 인터뷰는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질문의 방향을 조금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젊은 작가, 젊은 세대들은 자신의 불안은 물론 사회에 대한 불만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출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집단적인 의지로 표출하고, 일정한 보상을 받고, 심지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조건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차이가 직접적으로 소설에서는 문법의 변화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변화가 독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물론,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 작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염승숙은 그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변화가 독자와의 불화 속에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면 작가로서는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령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공지영의 『도가니』, 정유정의 『7년의 밤』 같은 소설들이 베스트셀러의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독자들이 소설에서 기대하는 것이 이 문법의 변화만은 아니라는 것, 젊은 소설가들의 상상력과 소설적 문법은 이미 현대의 첨단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정작 독자들은 익숙한 스타일에 더 많이 매혹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여기에서 또 다른 베스트셀러 소설가들, 가령 황석영, 김훈 등을 추가하면 우리 시대의 독자들이 소설에서 얻고자 하는 것, 소설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더 분명해진다. 그래서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은 독자나 비평가, 심지어 선배 소설가들 가운데 일부는 우리 시대의 소설이 지나치게 가볍고 형식적인 면에만 치중한다고 비판을 하기도 한다. 소설가에게 이 비판에 대한 응답은 적어도 작가라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걸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책을 내면서 그런 고민을 시작했어요. 등단작부터 한 권의 책을 꾸리기까지 정신없이 소설을 발표했기 때문에 그때는 “아, 이런 방식이 재미있다”라고만 느꼈어요. 그때는 우울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점점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상황에 이 인물들을 몰아넣고서도 계속 재밌는 농담들이 나오는 거예요 힘든데, “아, 나 힘들어 힘들어” 그렇게 말하는 성격도 못 될뿐더러. 그래서 작품 속의 인물들도 “아, 얘 되게 힘들어” 그런데 “힘들다, 힘들다”라고 말하기까지의 과정이 계속해서 “어, 나 괜찮아, 난 나쁜 일은 아무것도 안 일어났어”라고 말하게 만들었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계속 뭔가를 뒤틀게 되고 비틀게 되더라구요. 그런데 첫 창작집을 묶고 나니까 반응들이 ‘너무 어려워’, ‘이게 무슨 말이야?’, ‘이런 단어가 있어?’, ‘진짜 이런 직업이 있어요’라면서 의아해하고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은 느낌인 거예요. 그래서 아 소설쓰기가 혼자 즐거워서는 안 되는구나, 내가 누군가에게 읽혀야 하는 소설을 써야 한다면, 소설을 쓸 수 있게 하려면, 소통이 되어야 할 텐데 독자와의 소통을 염두에 두지 못했구나, 이런 근심이랄까 그런 고민이 되게 많이 들어서, 그게 너무 부끄럽고 어쩔 줄 모르겠는 거예요.

그녀는 독자와의 소통이라는 문제 때문에 첫 작품집을 출간하고 6개월 정도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 시기 동안 그녀는 ‘내가 어떤 소설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라는 원론적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고 했다. 물론, 독자의 반응, 소설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 한 소설의 가치를 드러내는 바로미터일 수는 없다. 독자들은 익숙한 것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고, 그런 점에서 예술의 역사는 늘 새로운 경향이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을 증언한다. 특히 문학(소설)의 경우는 독자들의 반응과 비평가들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어긋나기도 한다. 아니, 독자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은 작품들이 비평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어쩌면 그것은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한 편의 작품에 대한 서로의 기대치가 다르며, 평가의 기준 자체가 상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작가에 속한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내 기억으로 그녀는 드물지 않게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은 작가였다. 평단의 반응이 좋다는 것은, 제도적인 차원에서 그녀의 미래가 그다지 불투명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작가로서 자신의 독자를 확보하는 일은 작가와 독자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작가의 입에서 ‘소통’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조금은 놀랐다. 우리 시대의 문학인들은 ‘소통’이라는 말을 즐기지 않으며, 특히 비평가들은 ‘소통’이야말로 문학이 경계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라고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소통’이란 꽤 골치 아픈 개념의 하나다. 그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 간에 ‘소통’이라는 개념에 대한 정확한 합의가 불가능하며, 장르에 따라 사정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치가들은 ‘소통’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계몽’이나 ‘홍보’의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형편이 아닌가. 그렇지만 ‘소통’을 독자와의 관계라고 이해한다면, 분명한 것은 문학적 가치가 평가되는 데 있어서 소통이 크게 고려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작품들에게 문학상이 수여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이는 문학에 대한 대중의 독법과 비평의 독법 사이에 꽤 거리가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인터뷰의 성격상 ‘소통’에 관한 이야기를 오래 나누지는 못하고 이야기가 소설의 주제의식에 관한 것으로 넘어갔다.

이 대목에서 내가 던진 질문의 요지는 이렇다. 비슷한 기법과 상상력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작가들이 모두 동일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는 않다는 것, 그런 점에서 염승숙의 소설은 세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폭발력이나 그로테스크한 묘사보다는 보편적인 주제의식 때문에 세계를 보듬는 방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장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마무리가 약하고 도덕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리를 어색하게 만들 법한 질문이었지만 작가의 안색은 크게 요동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런 얘기 많이 들었었어요. 결말 부분이 조금 쌩뚱맞다거나, 결말이 너무 착하게 수렴된다. 특히 전작인 『채플린, 채플린』에서 모든 인물들이 너무 선하게 그려져 작가가 윤리적으로 선한 결말을 고집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채플린, 채플린』을 쓸 때는 늘 결말의 장면이 떠올라서 그 소설을 구상했거든요. 제가 소설 쓰는 버릇이 결말이 생각나고, 제목이 떠오르고, 그 제목에 맞춰서 모든 구상을 하는 편인데요, 결말이 그렇다고 하니까 조금 당황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정말, 왜 결말이 그렇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그럼 그 에티카라는 게 뭘까, 윤리적이란 게 뭘까. 나는 다만 윤리적으로 선한 낙천적인 긍정적인 성격의 작가일 뿐은 아닌가. 왜 모든 걸 ‘괜찮다, 괜찮다’로 수렴하고 나서 작품이 끝나는 걸까. 그리고 그런 고민을 계속하면서 ‘아,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는 걸 깨달았어요, 소설을 못 쓰는 6개월 동안. 아, 말만으로 되는 건 하나도 없고, 세계는 좀처럼 나아질 것 같지 않고, 이 비정한 세계에서 다분히 윤리적인 인물들을 배치시켜 놓는 것이 능사는 아니구나라는 고민이 많이 들었던 거 같아요.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윤리적 강박을 발견하게 될 때, 자주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 냉소는 항상 강박의 후유증이다. 그런데 ‘에티카’에 대한 고민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염승숙의 소설에서 냉소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작가의 세계가 냉소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염승숙에게는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기성의 질서와의 극단적인 갈등이다. 그녀의 가족 이야기에서는 아버지와의 갈등이 없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극적으로 흘러가면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라도 생길 텐데, 그녀의 소설은 상징적인 차원에서라도 아버지와의 전면전을 치르려는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소설 속에서 아버지는 왜소하고 비루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녀는 소설 속의 아버지 표상이 실은 ‘나’의 발견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은 ‘나’라는 존재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쓰여졌고, ‘나’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근원적인 물음에 있어서 아버지를 거치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지점이 있었고, 아버지 자체가 ‘나’의 본질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굳이 말하자면 아버지가 의도하는 건 이 세계의 왜소함이었고, 나의 비루함이었던 거거든요. 그래서 아버지와 전면전을 벌이지 않은 이유가 그만큼 나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었겠네요. 나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잖아요.”

프로이트의 후예들은 아버지를 부정하는 과정에서 ‘나’를 발견하려 하지만, 염승숙은 아버지라는 존재 안에서 ‘나’를 찾으려 한다. 아버지와 ‘나’의 겹침, 그리하여 아버지의 나약함이 곧 ‘나’의 나약함이 되는 세계, 그러니까 아버지를 공격하는 것은 곧 ‘나’를 공격하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이 실존의 법칙이 그녀의 소설들을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에 대한 이러한 문학적 표상은 어쩌면 그녀가 부침이 별로 없는 평탄한 삶을 살아 온 개인이거나, 또는 집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가 회상하는 자신의 과거는 이렇다. “사실 저는 굉장히 평범하게 자랐어요. 아무런 부침 없는 초중고 유년 시절을 보냈고, 대학에 재수하지도 않았고, 혹은 애인과 헤어져 본 경험도 없고, 애인을 군대 보내고 슬퍼해 본 적도 없고…… 늘 지켜보는 입장이었지 제가 부침을 겪는 입장이 아니었어요. 친구들과의 관계도 굉장히 원만했고 그 친구들의 험난한 인생사나 힘겨운 관계들을 늘 지켜보는 입장이었던 것 같기는 해요.” 그런데 이런 무난한 삶이 작가로서 결핍 요소이기도 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선배작가들은 굴곡이 많은 근현대사를 겪으면서 살아 왔고, 그 덕분에 드라마틱한 삶 자체가 소설의 배경이 되어서 창작의 에너지가 되는 데 비해, 산업화 이후의 세계에 태어나 고도성장의 기반 위에서 성장한, 비교적 풍요로운 배경 속에서 살아 온 세대의 작가들에게서는 입담이나 형식 실험 이상의 것이 나오기 어렵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왜 나는 경험이 없는 세대고, 왜 나는 전쟁을 겪어 보지 않았고, 식민지를 겪어 보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무엇을 쓸 수 있나 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 고민에 함몰되기보다는 식민지 시대의 소설을 읽고, 50-60년대 전후소설을 읽고, 산업화 시대의 소설을 읽으면서 공감했던 거죠, 아 시기는 이랬구나 공감하고.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겪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요. 그 모든 게 축적된 시대를 살고 있거든요 그 모든 게 축적되어서 아무것도 회수되지 않은 시대에서 살아간다는 것 또한 충분히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거든요. 전쟁이 끝난 게 아니고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식민지 같은 그런 국가적 위기나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세계의 폭력과 비폭력 풍요는 여전히 동시다발적으로 폭발되고 있잖아요. 이 모든 게 축적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런 불안이나 그런 절박함이 어떻게 작가의 개성적인 스타일로 표현되느냐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식민지, 폭력, 전후, 산업화, 분단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창작집으로 넘어갔다. 염승숙이 출간한 두 권의 창작집은, 기법상의 차이는 크지 않지만, 그 느낌에 있어서는 많이 다르다. 느낌의 차이를 설명하려면 꽤 많은 지면이 필요할 것 같아서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변화의 방향이 ‘나’에서 ‘우리’ 또는 ‘타인’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느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변화의 과정과 원인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변화는 있었다. 변화가 있었다면 응당 그 계기도 있었을 것이다. “첫 책을 내고 6개월 정도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어요. 정말 쓰질 못했어요. 이야깃거리가 생각이 나도, ‘아, 이게 정말 지금 쓸모 있는 이야기인가’, ‘정말 진정성 있는 이야기인가’ 하는 고민이 많이 됐었고, ‘나를 알기 위해서 또 세상에 나무 몇 십 그루를 베어서 이런 책을 만들어 놨구나’라는 자괴감이 너무 심해서 책 자체가 너무 부끄러웠어요……. ‘괜찮아, 나쁜 일은 아무것도 안 일어났어’라구 한 권의 책을 던져 놨는데, 여전히 나쁜 일은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 같고,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작가가 답을 구하는 사람은 아닐지언정 질문의 깊이는 나에 한정되어 있어서는 안 될 텐데’, ‘조금 더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돌파구가 손이었어요. 「당신과 악수하는 오늘」에 나왔던 손. 이 손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던 같아요. 때때로 그 6개월 동안 너무나 자주 난 이걸로 뭘 할 수 있지. 그리고 정말로 손만 갖고 사는 사람들은 이 시기에 너무나 많잖아요. 세계인구의 절반 이상, 4분의 3 이상은 손만으로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손에 펜을 쥐고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고 펜이 아니고 두 손으로 모든 걸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을 텐데, 이 손을 갖고 나는 뭐를 쓸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다가 「당신과 악수하는 오늘」 같은 게 나온 것 같아요. …… 내가 갖고 있는 자원, 몸밖에 없구나. 손만 있으면 쓸 수 있는 게 소설이라면, 아무나 쓸 수 있을 텐데, 나한테 그 기회가 주어졌으니까 보다 더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작업이 되어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손에 대해서 써버리고 나니까 다시 쓸 수 있었어요.

 

염승숙의 소설에서 「당신과 악수하는 손」은 사회적 자아의 출현이다. 작가에게 ‘손’이란 자신의 일부이며, 소설을 쓸 수 있는 중요한 기관이지만, 또한 그것은 타인의 신체를 향해 뻗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 타인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두 번째 창작집 『노웨어 맨』의 동력이라고 말하면 과장일까? “『채플린, 채플린』의 경우에는 제가 개인적인 소동극을 즐겼다면, 『노웨어 맨』에서는 보다 좀 사회적인 것이 강해진 것 같긴 해요.” ‘나’의 세계에서 독자와의 ‘소통’으로, 다시 ‘타인’에게로, 이렇게 두 권의 창작집은 변화해 온 셈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 불현듯 작가의 ‘소설관’이 궁금해졌다. 시간이 허락했다면 긴 강의를 부탁했을지 모른다. 나는 뜬금없이 “소설이 뭘까요?”라는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이미 주워 담기도 어려운 그 질문은 잠시 동안의 침묵을 가져왔고, 이내 길지 않은, 그러나 잘 정리된 답변이 돌아왔다.

 

소설을 쓰는 게 너무 어려워요. 쓰는 게 어렵다기보다는 이 소설이 쓰여서 발표된다는 가정 하에 그것이 정말 가치 있는 소설거리인가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서. 누군가 내 소설을 읽고 있을 때 그게 시간낭비가 되면 안 되잖아요. 가능한 한 웃음이라도, 슬픔, 공포라도 감정이 촉발되는 지점을 생성해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작가는. …… 시대나 사회를 살아가는 동시대에 눈들이 너무 많잖아요. 누구나 다 바라보고 판단하고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와중에도 작가는 - 이건 아룬다티 로이가 말한 얘긴데 - 아픈 눈인 거죠. 너무 아픈 눈을 뜬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같은 걸 봐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사람들……. 다들 제 목소리만 내는데 그 와중에 어, 너 이런 목소리도 있구나, 난 이렇게 생각했어라고 그것을 조금 더 포장해서 보여주는 책무가 있는 사람.

 

소위 환상파에 속하는 젊은 작가에게서 아룬다티 로이의 이름을 들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다. 왜 그랬을까는 전적으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상상에 맡긴다. 다만, 그래서 이야기를 조금 더 ‘사회’나 ‘현실’에 근접시켜 보고 싶었다. 이를테면 그것은 한동안 여러 문예지들의 특집을 장식했던 ‘문학과 정치’라는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아룬다티 로이도 소설보다는 다른 활동으로 우리에게 더 유명한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아픈 눈’과 작가의 사회적 ‘책무’라는 맥락에서 작가에게 소설을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게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질문의 요지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관심, 아픔에 대한 공감과 연대라는 것이 반드시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해야만 하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녹음 파일을 다시 들어 보니 꽤 진지한 이야기를 장시간 나누었지만, 정작 이 질문만큼은 질문자와 답변자가 서로 겉돌았던 듯하다. 인터뷰 분위기에 취해서였을까, 아니면 서로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이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다시 책을 펼쳐들었다. 「당신과 악수하는 오늘」, 생각해 보니 인터뷰의 처음과 끝, 한 번도 악수를 하지 않았다. 불현듯 ‘손’을 펼쳐 보고 싶은 밤이었다.


《문장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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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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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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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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