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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청년이 21세기 청년에게, 2011 장편소설 현장에서

  • 작성일 2011-09-01
  • 조회수 2,256

 

[기획특집좌담]

 

 

20세기 청년이 21세기 청년에게

─ 2011 장편소설 현장에서

 

일시 : 2011. 8. 12(금) 오후 4시

장소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본관 대회의실

 

진행 : 소영현(문학평론가)

좌담 : 김이듬, 이은조, 장강명, 전석순(이상 소설가)

 

 

 

 

 



나는 (이제) 소설가다

 

소영현 : 인사를 간단히 나눴습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오늘은 네 분의 작품에서 한국문단에 이르기까지 두루 이야기를 나눠 보고자 합니다. 말문을 연다는 차원에서 간단한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오늘 모신 분들은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소설가가 되신 분이 많아 먼저 소설가가 되신 계기부터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00년 중반 이후 장편소설이 중심이 된 문단의 분위기를 염두에 두시고 장편을 출간하시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장편에 주목하는 상황과는 무관하게 한국문학에 대한 독자의 관심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시면서 이 사회에서 소설가가 된 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도 한 말씀씩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장강명 : 여기 계신 다른 분들은 문창과를 나오셨거나 소설이 아닌 다른 문학 분야로 이미 등단하신 분들이지만 전 그렇지 않아 문단 상황은 잘 모릅니다. 그것을 감안해서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소설을 쓰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제 경우엔 어렸을 때 SF 소설을 좋아했습니다. 이후 PC 통신 동호회가 활성화 됐을 때 거기서 자연스럽게 SF 단편소설을 쓰며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쓰고 싶어져서 PC 통신 동호회와도 멀어지게 됐고 혼자 쓰기 시작 했습니다. 출간 계기는 한겨레 문학상에 당선이 되면서 책이 나오게 됐습니다.

 

소영현 : 지금은 경계가 애매하지만 장르 문학에서 본격 문학으로 넘어가게 된 계기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단지 글 쓰는 것이 재밌었다면 계속 장르 소설을 쓰지 않으셨을까 싶기도 하고요.

 

장강명 : 거창하게 말하자면 쓰는 사람으로서 자의식이 생긴 건데 추리소설의 경우는 모르겠으나 SF 소설은 뭘 써도 그건 비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다 더 직접적으로 쓰고 싶은 걸 써야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장르 문학의 풀이 좁고 독자층도 좁잖아요. 그런데 그 독자층이 아무래도 장르 문학의 재미를 좋아하는 독자층이다 보니까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서는 이 안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할 것 같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은조 : 어렸을 때부터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고, 글자를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등단작이 「우리들의 한글나라」) 고등학교 때까지 시를 썼지만 구체적으로 시인이나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꾼 건 아닙니다. 인생의 진로를 결정해야 했던 시기에 오랫동안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나름의 선택 기준을 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쓰기가 다가왔고 희곡 전공을 하게 됐습니다. 인생의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했던 시절, 폐쇄적으로 지냈고 모든 관계에서 서툴고 소극적이었습니다. 극작과 활동은 매우 적극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연극을 만들기도 하고 배우나 스태프로 활동하는 게 무척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연극 활동을 하면서 회의를 느끼게 됐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건 관객이 오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자책감도 들었고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당시엔 돌파구를 찾지 못했고 그게 감당이 잘 안 됐습니다. 그때 연극하던 친구들은 이제 대학로에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끔 그 친구들을 보면 나도 계속 연극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전 소설을 쓰게 됐죠. 계기는 희곡을 쓰다가 소설적인 문장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희곡의 지문도 소설적으로 쓰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소설 공부를 하기로 했는데 블랙홀처럼 소설로 빠져들더라구요. 그때도 중대 결심을 해야 했습니다. 이제 소설을 시작하면 여기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이며 절대 도망치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그래서 도망치지 않고 지금까지 열심히 작업하고 있습니다.

 

전석순 : 제가 소설 쓰게 된 계기는 어떤 말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 중학생 때 처음으로 글을 썼어요. 계기는, 국어 선생님이 문집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이들이 글을 너무 안 내니까 수행평가로 무조건 시 한 편씩 써서 내도록 시켰습니다. 전 그때 국어 선생님을 좋아해서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때 시를 써서 제출했는데 선생님이 ‘써보지 않을래?’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국어 선생님이 담임선생님과 다투시면서 저를 백일장에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백일장에 가려면 수업을 빼먹고 가야 하는데 저흰 고등학교 갈 때 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애를 자꾸 백일장에 데리고 가니까 담임선생님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습니다. 어렵게 서너 번 백일장에 나간 건데 한 번도 상을 못 탔습니다. 죄송스럽고 창피하기도 했는데 그때쯤 김유정 문학상 공모가 있었습니다. 중고등학생과 일반인 모두 참가할 수 있는 공모였는데 처음으로 수필을 쓰게 됐습니다. 자꾸 압축하고 함축하니까 안 써지는 게 아닐까 싶어 제가 겪었던 일들을 하나씩 풀어서 썼는데 그게 장려인가 가작인가, 아무튼 가장 낮은 상을 받았습니다. 산문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는 데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지요. 이후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당시 분위기가 공부보다는 특기 적성을 활성화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소설을 많이 읽으시는 문예부 선생님과 신춘문예 등단하신 작문 선생님도 계셨는데 그때부터 소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수필이나 간단한 산문 정도를 생각하다가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소설을 쓰게 됐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그때 일기장에다 너무 거창하게 ‘나는 2000년 6월 1일 밤 7시부터 소설을 쓴다’라고 썼습니다. 그땐 꼭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메모해 놓고 단편소설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쩌면 그래서 제겐 더 의미 있는 시작이었던 같습니다. 사실 그땐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볼까 봐, 또 남들이 다 하니까, 하는 식의 결정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소설 쓰는 것은 유일하게 그런 것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문창과를 가려 했는데 부모님 반대가 너무 심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백일장에서 상 타오는 건 좋아하셨지만 취미로 글 쓰는 걸 원하신 거지 본격적으로 글 쓰는 것에 대해선 반대를 하셨습니다. 고 3 올라가서 담임선생님과 일 대 일로 진학상담 하는데 저를 보자마자 하시는 말씀이 “앞으로 너 백일장 나가면 선생님한테 혼난다”라는 거였습니다. 수능과 내신을 준비해야 하는데 제 성적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은 국문과를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국문과는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배우는 것 같아 문창과를 생각하고 있던 터라 많이 싸웠습니다. 또 강원도 내에 문창과가 설치된 대학교가 없었습니다.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하는데 서울로 갈 만한 성적은 안 됐습니다. 부모님 반대가 심하니까 오히려 오기가 생기고 글 쓰는 데 더 집착하게 됐습니다. 부모님이 등록금도 안 주신다고 하셔서 그러면 아르바이트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알았다’고 했는데 부모님은 그걸 내가 ‘알아들었다’고 말한 걸로 오해하셨습니다. 전 단지 부모님의 생각을 알았다는 의미였는데. 그런데 부모님이 제 성적을 아시니까 웃으시면서 서울로 간다면 보내 줄게, 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엔 특기자 제도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성적이 좀 부족했지만 운 좋게 학교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처음 스무 살에 대학에 갔을 땐 서울이 너무 신기하고 대학생활도 재미있었습니다. 또 월드컵 시즌이었거든요. 노느라 정신없다가 여름방학 때 문득 글 쓰려고 입학해 놓고선 한 줄도 못 쓰고 놀고만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무 살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게 됐습니다.

 

김이듬 :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시로 등단한 사람입니다. 흔히 시인이라고 하죠. 그런데 2009년 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김민정 시인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청소년 계간지 ‘풋’이라는 잡지에 소설 연재를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진주라는 소도시에서 고독하고 즐겁게 시를 쓰고 있던 터였습니다. “왜 하필 나예요? 난 소설가도 아닌데”라고 물었지요. 그러곤 김민정 시인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고 조금 생각하다가 쓰기 시작했습니다. 왜냐면 전 누군가 절 믿어 주면 하는 편입니다. 가령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뒤쪽에 창고가 있었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창고 옥상으로 올라가서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한 친구가 내게 “네가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걸 믿는다”라고 말해서 뛰어내렸어요.(웃음) 물론 1층 높이 정도 되는 곳이라 별로 높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발목을 접질려서 깁스하고 다녔지요.

 

장강명 : 그런 일이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사람 말을 안 믿을 것 같은데요.

 

김이듬 : 제 실수잖아요. 그냥 ‘착지만 잘했으면 됐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으로 깁스를 했는데 패션도 멋지고 관심도 받고 체육 시간에 안 해도 되니까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후엔 저를 믿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새로운 시도를 할 계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해라,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어쨌든 김민정 시인의 전화를 받은 뒤 소설을 썼고 2010년 봄, 여름, 가을, 겨울 200매씩 연재할 수 있었고, 그걸 정리해서 2011년 봄에 책을 내게 됐습니다.

▲ 김이듬(시인 겸 소설가)

소영현 : 김이듬 작가님의 시엔 산문 분위기가 있어서 이미 많은 사람이 예감하고 있었어요.(웃음)

 

김이듬 : 그래요? 아무도 제게 그런 말씀을 해주지 않았어요. 소설책이 나오니까 다른 분들이 쓸 줄 알았다고 말씀하셔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미리 말해 주셨으면 준비라도 했을 텐데.

 

 

말하기, 쓰기, 치유하기, 그리고 세상과 만나기

 

소영현 : 소설을 쓰게 된 계기에 관한 네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좀 정리를 하자면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나 바람, 혹은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고 싶어서 소설을 쓰게 됐다는 입장도 있으신 것 같고, 나를 치유하고 내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 그러니까 현실이 준 상처나 고통을 치유하는 방책으로 소설을 쓰게 된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 네 분 말씀을 들어 보니까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것이 현실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쓰게 됐다고도 하셨는데 현실과의 관계를 두고 뭘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궁금합니다.

 

전석순 :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것과 말씀하신 치유의 개념은 제겐 맞닿아 있는 거 같습니다. 전 무척 치열하고 고민도 많은 편이지만 남들 보기엔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보인다면, 그건 하고 싶은 말을 어떤 형태로든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치유의 개념이라 봅니다. 또 소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쓰면서 마음도 편했던 것 같고 현실에 대해 불편했던 감정도 많이 사라졌던 것 같습니다.

 

소영현 : 이번 작품을 통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는 말씀도 해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전석순 : 작품마다 하고 싶은 말도 달라졌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마다 소설을 쓸 시기가 됐다고 생각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는데 저 혼자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이야기를 안 하면 병이 생길 것 같고 가장 유연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소설이었습니다. 제 눈엔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는 문젠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무시하거나 혹은 모른 척하고 있을 때 소설이란 형식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됐습니다. 『철수사용설명서』도 그런 부분과 맞닿아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백수가 됐을 때, 주말엔 아르바이트하고 평일에 글을 썼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십대가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자 이십대가 가기 전에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른 살이 돼도 여전히 직장이 없거나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어쩌나 싶어 겁이 나기도 했고요. 그러다 이십대에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이십대에 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만한 일은 무엇일까, 고민했는데 그때 ‘이야기’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십대에 하지 않으면 후회할 이야기’는 과연 무얼까.

 

장강명 : 삼십대도 괜찮아요.

 

전석순 : 아, 삼십대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이십대에 하고 넘어가야 하는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라는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그때 생각하던 문제의식과 써야겠다는 생각이 맞물려서 쓸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단편 위주로 많이 썼는데 강원일보에 당선되고 나니까 규정에 변화가 생겨서 더 이상 단편 응모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장편소설은 단편을 조금 더 공부한 다음 쓰고 싶은 장르라 미뤄 뒀지만 단편으로 작가 활동을 할 수 없게 돼서 쓰게 됐습니다. 또 당시 하려던 이야기는 짧게는 할 수 없던 이야기란 생각이 들어서 『철수사용설명서』를 쓰게 됐습니다.

 

이은조 : 말씀을 들으니까 제 이십대가 떠오르는데 제 경우는 약간 달랐습니다. 전 이십대 때 희곡을 썼잖아요. 그때 연애와 우정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많이 썼는데 어느 날 교수님께서 “지금 써도 좋지만 나이 들어서 한번 써봐라. 그러면 더 좋을 것이다”라고 권하셔서 이십대 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아껴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삼십대가 되어서 이십대 친구들을 만나면 여러 가지 징후들을 포착해서 메모도 해두며 준비하고 있었는데 연애에 관해서는 달라진 게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인터넷이나 핸드폰 같은 소통 방식이 변한 것을 빼곤 비슷했습니다. 처음 만나면 하는 말이, ‘뭐 좋아하세요?’, ‘어떤 옷 스타일 좋아하세요?’, ‘어떤 남자가 좋아요?’, ‘커플이 되면 어디를 가장 먼저 가고 싶어요?’, 이런 질문을 지금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질문들은 유사 이래 계속되는 연애의 첫 대면이고, 패턴이죠. 이십대는 세상과 처음 만나는 시기이지만 삼십대처럼 즐기거나 사십대처럼 여유롭게 지나갈 수 없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그 어떤 세대보다 무겁고 진지하고 과장해서 말하자면 처절하기까지 하죠. 우리나라의 특성상 이십대에 처음으로 사회와 부딪치게 되는 일면이 있는데 그 시절엔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보다 나에게 부딪쳐오는 타인, 친구나 동료, 애인에 대한 관계가 더 힘든 것 같습니다. 그 시절을 지나기 때문에 즐기는 삼십대, 여유 있는 사십대를 맞이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를 잃지 않는다면, 즉 내가 할 일에 대한 뚜렷한 지표를 얻는다면 허둥거리는 빈도를 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를 생각해』를 쓰게 됐습니다. 이 책을 쓰면서 친구들과 함께 지나온 이십대를 정리할 수 있었어요. 제 스스로 통과의례를 거쳤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소설의 기술에 대하여 : '스킬'이 필요한가요

 

소영현 :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를 질문 드렸는데 자연스럽게 하나 더 추가할까 합니다. 누구에게 어디를 향해 말하려는 걸까요. 할 말이 굉장히 많다고 하셨는데, 누구한테 할 말이 많은 걸까요. 어디를 향해 누가 듣기를 원해서 이 많은 말들을 쏟아내려고 하는 걸까요.

 

김이듬 : 다른 분들은 할 말이 넘친다고 하셨는데 사실 전 할 말이 별로 없고 중요하게 할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연재소설이라 원고지 한 매당 원고료를 준다니까 조금 많이 써야겠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웃음) 전 이야기의 고갈에서 늘리는 재미, 캐내는 재미가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을 쓰면서 깨달았습니다. 예컨대 ‘내가 하수구에 빠졌다’ 이 한 가지 사건이 있을 때 이걸 늘리면 장편이 되겠다, 이런 생각이었지요. 그리고 특별히 누구에게 뭘 이야기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소영현 : 늘리고 싶다고 해서 늘어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사실 김이듬 작가님의 소설에서는 자전적인 듯한 요소들이 많이 느껴집니다.

 

김이듬 : 전 세상에 대한 원한 같은 것은 있습니다.(웃음)

 

소영현 : 『블러드 시스터즈』에는 전형까지는 아니라도 그 시대를 살았던 아픈 청춘의 대표적 사례들이 많습니다. 직접 작품에서 발언하지 않더라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에 대한 이유는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이듬 : 일단 ‘알았다. 소설을 쓰겠다’고 말하고 나니까 제가 만만하게 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본인 이야기를 쓰면 진도가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했습니다. 하지만 내 이야기가 다 드러나면 창피하니까 너무 경험 위주로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제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신은 진짜 죽었나, 부모들은 왜 이럴까, 세상은 왜 이따위인가, 사랑과 우정의 차이는 뭔가 등등 그렇고 그런 의문들에 대한 제 나름의 해석, 저 자신을 설득시키려는 답변이었어요. 의식적으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겠다는 게 아니라 쓰다 보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원한에 사무치기도 했고요. 그런데 돌이켜보건대 원한에 사무친 글쓰기는 별로 안 좋은 것 같아 반성하고 있습니다.

 

소영현 : 너무 자기 이야기를 하면 안 되겠다, 그런 말씀이신가요?

 

김이듬 : 누가 제 소설을 읽고 개연성이 없다는 이야길 했는데 이번에 배운 게 있습니다. 소설은 진실과 거짓, 혹은 사실과 허구의 중간쯤에 위치하여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저는 주로 제가 겪은 일 그대로, 리얼 쪽에 경도된 글쓰기를 한 거죠. 연극배우들이 정말로 슬퍼서 울면 관객들이 보면 정말 실감 안 난다고 하잖아요. 정말 우는 포즈를 연극적으로 하면 감동을 느끼고요.

 

이은조 : 연극적인 패턴화된 몸짓이 있어요.

 

김이듬 : 패턴화된 몸짓을 해야 관객들은 비로소 감동을 느끼고 교감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실제로 울면 ‘저 사람 연기 못 한다. 실감나게 울 줄 몰라’라고 합니다. 그것처럼 ‘개연성’에 대한 이야길 들으면서 난 장편에 대한 스킬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소영현 : 그동안 다른 형태의 글들을 많이 쓰셨는데, 소설에 적합한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과연 '스킬'이 필요할까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소설적 테크닉이 필요한가, 에 대한 이야기를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까 질문과 연결시키자면 자기 이야기를 보통 많이 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소설 쓰기를 어떻게 할 것이냐'의 질문으로 받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장강명 : 일단 소설이 치유의 과정인가, 에 대해선 제 경운 약간 다릅니다. 물론 글을 쓰면서 마음이 치유될 때도 있었습니다. 다만, 일기를 오래 전부터 써왔는데 그 정도로 족한 것 같습니다. 일기에 써야 할 내용까지 소설에 써서 제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고 한 맺힌 것도 제겐 없습니다. 제 직업이 기자다 보니까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기사를 쓰면 되고 평기자도 칼럼은 쓸 수 있기 때문에 공적인 채널은 제겐 있었던 셈입니다. 또 직장생활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엮이니까 소설을 안 쓴다고 해서 세상과 소통이 안 된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 글은 제 안에 이야기꾼으로서의 본능 같은 것이 있고 재밌는 이야기로 앞에 있는 관중을 사로잡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던 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소설 쓰기에 있어 스킬이나 테크닉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 보고 이를 갈고닦아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싶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소영현 : 사실 다 아시다시피 소설은 매우 자유로운 장르입니다. ‘브릿콜라주’라고도 할 수 있듯이 타 장르가 다 들어올 수도 있지요. 자유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설에는 괴물적인 글쓰기가 곧 소설일 수도 있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소설이 계속 살아남고 상대적으로 시가 위축된 것만 봐도, 소설은 몸을 바꿔 가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설의 형식적인 자유로움이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원하는 어떤 틀에 대해 잠깐 논의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큰 특징을 정리하자면 ‘비관적인 세계관’과 ‘환상적인 기법’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말론적 세계관과 환상성의 도입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장르적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컨대 김애란, 박민규 소설의 경우에도 판타지 요소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네 분 소설은 약간 경향이 다르다는 생각도 듭니다.

▲ 소영현(문학평론가)

김이듬 : 최근 소설에 서사 부분을 일부러 결여시킨 작품도 많잖아요.


소영현 : 네, 그것도 논의의 대상입니다. 김태용 씨나 한유주 씨 소설처럼 정통서사를 보여주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김이듬 : 장편소설이 어느 정도 서사를 지녀야 한다, 는 말 또한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더라고요. 그렇다면 장편소설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규정 자체에 무리가 있을 것도 같아 저도 그 의견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전석순 : 장편이 많이 활성화됐다는 건 제가 보기엔 서사를 강화시키려는 움직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소설의 서사는 과연 절대적이어야 하고 중심축이어야 하나. 문창과에 들어가면 이른바 ‘스킬’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수업 자체가 ‘스킬’입니다. 인물이나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다양한 방법에 대해 배웁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는 정해 주진 않지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수업이 진행되고 저 역시 그것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대학 4년 동안 공부하면서 그것이 소설 공부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스킬이란 건 그대로 연마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넓게 보면 그렇게 쓰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대학 1, 2학년 때 창작이론책 한두 권은 보게 되는데 그 가운데 이승우 선생님이 쓰신 창작이론책이 인상 깊었습니다.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쉽게 설명해 주신 책이었는데, 마지막 장에는 ‘기술을 다 익혔으니 이제 그렇게 쓰지 말지어다’라는 내용의 문장이 있었습니다. 뒤통수 맞는 기분이 들었죠. 4학년 끝나 갈 무렵 여기저기 응모하다가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습니다. 칭찬도 많았는데 그건 하나도 기억 안 나고 욕만 기억에 남았습니다. ‘누가 봐도 문창과에서 배운 대로 쓴 거고 누가 봐도 올바르게 쓰려고 노력한 티가 난다’는 이야기가 여러 방면에서 들리는 겁니다. 교수님은 직접적으로 말씀 안 하셨지만 ‘너무 틀에 박힌 이야기다’라는 평이 많았고 저 역시 공감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졸업하게 된 거예요. 어떻게 보면 틀에 박힌 제한된 선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에 대한 고민을 2, 3년 지속적으로 했습니다. 『철수사용설명서』는 이렇게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서사가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왜냐면 사용설명서에는 기승전결이 없잖아요. 수평적인 관계에서 다양한 측면을 보는 이야기라 긴장을 유지하기엔 부적절하고 우려되는 점이 많은 형식이었습니다. 튀려고 쓴 형식의 소설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서사가 무너지고 소설이 아닌 게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조금 미뤄 뒀습니다. 그러다 문득 서사가 중심에 있어야 하고 그것이 약화되고 해체되면 그것은 소설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습작기에는 저 혼자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잖아요. 형식뿐 아니라 인물이든 배경이든 뭔가 하나씩 해체해 보기도 하는데 사용설명서라는 형식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지금 내가 그리는 인물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로는 기승전결이 있고 서사가 강화될수록 오히려 나올 수 없는 메시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믿고 쓰게 됐습니다. 만약 이게 뽑히면 이런저런 시끄러운 소리가 많을 거라 예상했는데 당선 과정 가운데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모두 찬성하셨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저로선 조금 의아한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소영현 : 서사가 약화된 측면이 오히려 『철수 사용 설명서』의 장점이라는 말씀인가요.

▲ 전석순(소설가)

전석순 : 만약 철수란 인물이 사용설명서를 완성한 다음 세상에 복수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뭔가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면 서사가 강화될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이 소설에서 하고 싶었던 건 표준에 대한 기준을 의심하고 개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표준을 제시하며 끝나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적인 요소가 부족하더라도 끝내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서사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본 작품이었습니다.


장강명 : 소설의 정의야 원래 합의된 것이 있을 테고, 그와 별도로 저는 개인적으로 좀 좁게 잡고 있습니다. 비전공자로서 장편소설은 하나의 이야기이고 단편소설은 어떤 인상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편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저만의 인상인지 모르겠으나 한국 문단이 그동안 단편의 미학을 추구하고 재밌는 이야기엔 다소 소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 경우엔 장편소설부터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최근 탈 서사나 환상적 기법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선 일단 의심이 됩니다. 환상적 기법으로 쓴 소설을 볼 때 과연 이 사람이 환상적 기법을 도입하려고 쓴 건가, 아니면 결말을 어떻게 낼지 모르거나 적당한 감정적 충격을 주고 싶은데 현실 세계를 잘 취재하지 않았기에 그걸 은폐하려는 수단으로 갑자기 안드로메다로 가는 식으로 가는 형태를 취한 것 아닌가 의심되는 소설이 몇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의심하다 보면 비관적 세계관도 소위 쿨 해보이려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분들 소설을 읽은 감상을 잠깐 말씀드릴까 합니다. 전 『블러드 시스터즈』와 『나를 생각해』를 좋게 봤는데 두 소설 모두 비관적인 세계관은 아닌 듯합니다.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특히 『나를 생각해』의 경우엔 주인공은 결말에 가면 다 떨쳐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남자친구하고 헤어졌는데도 그 연출가와 맺어질지는 잘 모르겠고 패배적인 느낌은 안 들었습니다. 『블러드 시스터즈』의 경우엔 배경이 되는 시대나 인물이 처한 상황은 우울하지만 정서는 발랄하고 마지막 문장도 ‘어이쿠’ 하고 가는 게 딱히 비관적인 세계관은 아닌 것 같아 개인적으로 호감이 갔습니다. 그리고 『철수사용설명서』의 경우엔 제가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 것은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했기에 죄송하지만 판단이 유보됩니다. 다음에 어떤 것을 쓰실까 궁금해집니다. 그렇다고 탈 서사적인 소설이라 해서 좋은 소설이 될 수 없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최근 그런 소설 가운데 ‘참 훌륭하다’는 작품을 딱히 보지 못한 것이 첫 번째 이유고요. 두 번째는 독자로서 고전적인 소설적 정의에 구태여 벗어나는 누보로망 계열의 소설은 솔직히 재미없습니다. 브레히트 연극의 경우도 깊이가 있고 사유를 많이 해서 이런 연극이 나왔구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 그걸 재미있게 보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고요. 저는 그런 생각이기 때문에 그런 소설을 쓸 의향은 별로 없습니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알겠으되 그걸 명분 삼아 안이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김이듬 : 두 분 의견이 상반된 것 같은데 들으니까 전 오락가락합니다. 조금 더 잘생긴 분의 의견으로 기울기도 하고요.(웃음) 제 경우엔 가령 서사성이 강한 소설도 재밌게 읽히고 그렇지 않은 소설도 신기하고 난해하고 재밌어서 두 분의 취향이 계속 유지되길 바랍니다. 우리 한국문단에서도 서사의 중요성을 믿고 끊임없이 소설의 전형이라는 틀을 계속 고수해 나가면서 정진해 나가는 소설가도 필요할 것 같고 규범이나 문법을 파격적으로 해체하면서 ‘이거 소설 맞아?’ 이런 식의 소설들도 계속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두 소설이 함께 간다면 취향이 뒤범벅된 저 같은 독자는 이것도 읽고 저것도 읽는 즐거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은조 : 서사 때문에 소설 퇴고를 많이 했어요. 희곡 습작이나 공연을 올린 경험이 적어서 저는 나름대로 소설과 처음 만난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는데 소설을 쓰면서는 제 안에 축적되어 있던 희곡의 습성을 몰아내느라 힘들었어요. 대사로 해결하고, 지문으로 해결하면 외려 더 편안하다는 걸 느낄 정도였어요. 희곡과 소설의 경계를 허물어야 하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제가 결론 내린 것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따라 서사의 구성은 달라지는 것이다, 라는 거였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그것이 기준이겠지요. 저도 서사가 탄탄한 소설이 좋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소설도 좋아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과 내가 이 소설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간극을 좁히는 것도 첫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습작시절에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환상 기법을 시도했는데 그건 하고 싶었던 이야기, 소재에 따라 요구됐던 기법이었습니다. 가령 어떤 필연적인 장면을 묘사해야 할 때 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표현기법들이 있거든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이야기에 필요한 서사기법을 설정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꾸준하게 공부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김이듬 : 전 기승전결이 있는 소설에 다양한 인물이 나올 때 한참 읽다가 ‘얘가 누구였지?’ 하면서 앞으로 가서 다시 읽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석순 작가님 소설은 서사 구조가 꽉 짜여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 이름 헷갈릴 일도 없고 메시지 과잉도 없고 굉장히 쉽고 빠르게 읽혔습니다. 머리가 복잡하여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독자들은 호감을 느끼며 신선한 기분으로 읽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쉽고 재밌게 읽힌다고 해서 그 소설이 과연 좋은 소설인가, 하는 부분은 또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전석순 : 제 의도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안일하게 글 쓴 것으로 판단할 것도 같습니다. 일부러 서사 구조를 약화시킨 건지, 아니면 그걸 할 줄 모르고 부족한 상태에서 소설을 써서 약화된 것인지, 하는 부분에 대한 반응은 판이하게 갈려질 거라 여겨집니다. 이십대를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기승전결을 주면 제가 생각했던 바와 너무 달라질 것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뒤의 이야기가 정해지면 그것도 제가 원하는 의도와 다를 것 같았습니다. ‘다음 작품 보고 판단하겠다’는 이야길 많이 들어서 그런지 다음에 뭘 쓸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집니다.


김이듬 : ‘철수사용설명서’라는 제목은 조르주 페렉의 『인생 사용법』, 천운영 소설가의 『그녀의 눈물 사용법』 등의 표제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그보다 훨씬 명쾌하고 위트가 넘치는 느낌을 주었어요. 그런 첫인상이 대중적 코드와 잘 맞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 또한 연인을, 청춘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니까요. 게다가 내용이 너무 앞서거나 뒤처져도 대중으로부터 멀어질 텐데 지금 시대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석순 작가의 경우 첫 소설이고 아직 어려서 앞날이 창창한데 (웃음) 두고 봐야 하는 거죠.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다루고 시대와 착 맞아떨어진 소설과 똑같은 루저를 다룬 소설인데 거기에 나름의 서사 구조를 가진 소설도 있고요. 지금 이 순간, 이번 달, 올해의 시간이 축적되면서 그것이 어떻게 진행될지 흥미진진하게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시대, 세대, 그리고 청춘들

━ 작은 품평회 : 『블러드 시스터즈』

 

장강명 : 저는 김이듬 작가님께 여쭤 보고 싶습니다. 저희 네 사람 소설 주인공이 다 이십대입니다. 세 사람은 시대적 배경이 현재인데 김이듬 작가님의 경우 굳이 1980년대 말로 시대적 배경을 설정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감수성 자체는 현대와 같은 감수성이라 조금만 고치면 현대로 해도 크게 다를 바 없을 것 같았습니다.


김이듬 : 1980년대도 현대입니다. 아이스크림이 그때도 달콤하고 맛있었는데 지금 아닌 건 아니잖아요.


장강명 : 1980년대 한국이라 하면 연관되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런 것을 의도하신 건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론 1980년대 배경과 문장 분위기가 충돌해서 재밌는 부분도 있었고 소제목은 다 영어로 하신 건 요즘 소설 같은 분위기인데 왜 굳이 1980년대일까, 학생운동을 끌어들이려고 했던 걸까, 아니면 여권이 낮았던 때가 필요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왜 1980년대 배경으로 쓰셨나요?


소영현 : 제가 먼저 말씀드리자면, 각자 자기 세대의 이십대를 썼고, 그러면서도 시대와 무관하게 비슷한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컨대 각 시대별로 유형화된 청년상의 능동성을 말하자면 80년대 청년의 능동성과 90년대 청년의 능동성 즉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지만 개별화된 능동성이 있습니다. 2000년대엔 상당히 왜소화된 능동성이 있습니다. 시대에 따른 청년의 능동성을 이렇게 유형화할 수 있겠으나, 어떻게 보면 80년대에도 다양한 청년상이 있었고 90년대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예전엔 상대적으로 주된 청년상에 주목했다면 그 아래 가라앉았던 것들이 지금 복원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장강명 작가님 작품 경우, 2000년대 이야기 같지만 실제 이야기나 인물들이 시대에 반응하는 방식은 일면 80년대적이거나 90년대적이기도 합니다. 청년들이 세상에 대해 저항하거나 기획해서 뭔가 조직적으로 하려는 것은 상대적으로 2000년대적인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2000년대 이후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는다고 해서 2000년대적인 반응을 했는가 혹은 해야 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김이듬 작가님도 90년대 전후 그러니까 80년에서 90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을 그리고 있는데 인물들의 반응이 그 시대적이었냐 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어서 두분의 작품을 포함한 네 작품 모두 시대와 무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이듬 : 우리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라 구획 지을 때 그것이 굉장한 차이가 날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문학연구나 비평에서 10년 단위로 세분화하거나 그보다 더 짧은 시간 간격을 두고 어떤 변화나 특징을 감지해 내려는 움직임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그건 편의상 그렇게 나누는 것일지 모르지만 굉장히 조급한 접근이 아닐까 싶습니다. 10년 단위로 획기적인 감각의 신인류가 탄생하는 게 아닐 텐데…… 문학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기도 할 테죠. 소설이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하지만, 공장에서 매일 찍어내는 신상품도 아니고 매 순간 업그레이드되는 전자제품도 아니잖아요. 우리는 동시대를 살며 부대끼고 실존적인 모멘트로 창작을 고민하는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알게 모르게 서로 공감하며 이전 세대나 먼 곳 타 매체의 영향을 아우르면서요. 전 장강명 작가님 소설에서 트뤼포 감독의 <쥘 앤 짐(Jules Et Jim)> 영화 같은 느낌도 받았습니다. 오래된 흑백영화에서 보여주던 향수나 성향, 낭만성 같은 것도 느꼈고요. 제가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는데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하고 싶습니다. 1980년대라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이 학생운동, 군부독재 등 이런 것들입니다. 이 정치적 거대 담론으로 그 시기가 포획되어지는 것에 저는 불만이 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투쟁, 민주화의 열기로 기념할 만한 시기로 수렴된다 하더라도 뭔가 고수된다는 생각입니다. 즉 민주화 세력 아니면 비민주적 세력, 아군 아니면 적, 이런 식의 이분법에서 누락된 존재가 있고 굵직굵직한 정치적 사건으로 은폐된 소소한 저항과 싸움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저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인물, 주축이 되어 시선을 받는 사람, 결단과 행동이 빠른 사람보다는 갈팡질팡하는 존재의 고뇌와 절망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선배가 혼자서 운동 다 한 것처럼 떠들고 정치판으로 들어가 자신의 신념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경우도 보았고 몇 번의 가투 경험을 부풀려 시대적 책무를 다한 것처럼 쓰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당시를 살았던 청춘들의 대단치 않은 이야기, 남자들의 의리나 동지애 등에 반해 덜 인식되어 온 여자애들 간의 그것, 싸웠으나 싸우지 않은 게 되어버리는, 사랑했으나 사랑하지 않은 게 되어버리는 징후, 주축과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에 관해 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80년대를 부각하였고 그 시대로 표상되는 어떤 합의에 균열을 내고 싶었습니다. 물론 작정하고 그렇게 쓴 건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좀 더 개인적인 부분인데요. 과거에 대한 제 기억이 자꾸 훼손되더라고요. 그 기억은 언제나 고통을 동반하는데 스스로 기억을 상실하려는 욕구와 잡아 두려는 마음이 있었어요. 점점 희미해져서 다 사라지기 전에 써두고 싶었습니다. 지금 처음 고백하는데 일종의 애도라고 할 수 있어요. 소설 속 P 대학이 부산대학인데, 실제로 국문학을 전공하던 제 친구가 학교 옥상 본관 뒤에 있는 재료관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전 학교를 일 년 휴학하고 삶을 엉망진창인 상태로 지내 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직접 할 수는 없으되 이것을 둘러싼 세계를 이야기함으로써 그 친구를 잘 보내고 속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친구를 많이 잊어버렸지만 지금도 내가 너를 기억한다는, 미안하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고 그것이 이 소설을 쓰게 된 보다 심층적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뭔가를 써야 한다면 그 이야기를 쓰되 직접적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전쟁의 중압감 아래에서 쓴다는 것, 그것은 전쟁에 대해 쓴다는 것은 아니며, 마치 전쟁을 침대를 같이하는 여자 친구인 것처럼 여기면서 (그러나 그녀가 당신에게 약간의 자리를, 자유의 여백을 남겨 준다는 전제 하에) 전쟁이라는 지평 내에서 쓴다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저는 지금까지 저를 억눌러 온 문제들을 다른 방식으로 직면하고 싶었습니다.

전석순 : 80년대 배경에 대해 생각할 때 큼직하게 이야기되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블러드 시스터즈』에는 운동권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나오는 데다 80년대를 환기시켜 주는 부분이 없다면 그냥 지금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도 같아 시대적인 부분이 약화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너무 큰 이야기만 해서 놓쳤던 작은 부분들, 또 우리가 놓쳐버린 것들에 대한 부분이 많아 재밌게 읽을 수 있었고 또 그 부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하나 궁금했던 점이 있는데요, 이 소설이 ‘풋’에 연재됐다면 청소년들이 보는 잡지잖아요. 독자층이 한정됐다고 볼 수 있는데 쓰시는 데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김이듬 : 최소한의 영향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풋’에 연재를 시작할 때 김민정 시인에게 어떻게 쓰면 되냐고 물었더니 “언니가 알아서 재밌게 써요, 마감만 맞춰 주고요”라고 했습니다. 그 전에 이미 김민정 시인은 제가 쓴 산문이나 콩트 같은 걸 봐왔더라고요. 주로 카페에서 원고를 썼는데 처음 보내고 나니까 조금 걱정이 됐습니다. 마감보다 조금 일찍 보낸 다음 김민정 시인에게 먼저 읽어 보고 재미없고 글이 별로라면 난 상관없으니까 그냥 안 싣는 걸로, 다 없던 일로 하자고 했습니다. 하루 이틀 지난 뒤 그 글을 읽었는데 재밌다고 하는 겁니다. 다른 편집자도 재밌다고 하니까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두 번째 원고는 내용이 더 세졌죠. 원고를 보내고 전화를 하니까 김민정 시인의 목소리가 조금 안 좋았습니다. 그러곤 제게 “언니, 이거 청소년 잡지인 거 알지?”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나름 절제하며 썼습니다. 그다지 성적인 표현의 수위를 높일 필요도 없는 게 사실이었고요. 사건들이 막 가는 것도 아니고 등장인물들이 알아서 행동을 조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은 성관계를 통해 영혼이 오염된다고 믿는 애였거든요. 소설책이 나오고 나서 김민정 시인이 “사실 연재되는 동안 학부모에게 애들 보는 건데 내용이 너무 세지 않냐는 항의가 들어와 좀 힘들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느냐고 물으니까, “요즘 애들은 이거보다 더 잘 알아요”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유능한 편집자이고 타인들과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어갈 줄 알거든요. 또 언급하셨던 부분에 대해 부언하자면, 80년대는 투사들만 살았던 것 같고 대학생들은 모두 데모했을 것 같은 분위기로 보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과 큰 차이 없었습니다. 취업고민, 학교나 군대 문제, 생활비는 언제나 모자라고 연애가 꼬여 죽을 지경인 건 지금도 마찬가지, 당시도 부모와는 아옹다옹했습니다. 마치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 영웅담을 늘어놓듯 그 시기가 일반적으로 왜곡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작은 품평회 : 『철수 사용 설명서』

 

소영현 : 80년대와 90년대를 자의적으로 나눠서 특징을 짓는 것이 별로 의미 없다는 것이고 실제 사는 사람들의 삶이라는 건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장강명 선생님이나 전석순 선생님의 입장은 조금 다르지 않나 싶습니다. 예를 들어 표백 세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전 세대와 우리는 다르다는 거고 『철수사용설명서』도 마찬가진데 이전 세대는 상대적으로 인간 대접을 받았다면 지금 우리는 완전히 도구화되고 사물화된, 어떤 사용법으로만 활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냐,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니까 세대 경험보다는 시대 경험을 강조하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전석순 : 사람을 물질화시키는 문제나 취업에 대한 고민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늘 있어 왔습니다. 지금 더 부각되는 이유는 늘 있어 왔던 문제가 조금 더 불거졌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전 좀 더 극단적으로 가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사람은 물건이다, 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 의견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나 기준에 대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만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전에 의문과 의심의 과정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또 스물아홉 살의 인물을 잡았던 이유는, 그 나이가 사회적인 분위기나 시선을 가장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취업해야 하고 사회에 처음 나가는 인물로 잡아보고 싶었습니다.


김이듬 : 참 순진한 작가의 생각 같습니다. 사회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대단한 메시지를 함의하고 있다는 건 어쩌면 착각인 거 같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를 보면 그때 이미 부품화된 인간, 볼트와 너트가 된 인간 군상을 이미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루저고 도구고 제품이다, 이런 얘기는 어쩌면 낡은 사회적 메시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뻔한 이야기임에도 이 소설이 무척 재밌 게 읽혀진 건 형식의 신선함 때문인 거 같습니다. 이 소설이 흥미를 끈 건, 형식의 참신함과 신선한 재미, 산뜻하고 기발한 어투,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문제의식 때문이지 메시지에 대한 신선함은 아닌 거 같습니다.


전석순 : 사용설명서를 다 쓰고 나서 자기 자신에게 보여주는 장치가 있잖아요. 남들이 저를 물건 취급하고 볼트나 너트처럼 봤을 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저항하는 모습, 가장 처음 읽어야 하는 사람은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설정을 통해 다른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김이듬 : 『철수사용설명서』에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기발하고 귀여운 문장들이었습니다. 나도 이런 생각을 했는데 먼저 이 친구가 썼네, 하는 친밀한 느낌도 들었고요, 문장 문장들이 참 재밌었습니다. 설명서를 이렇게 재미나게 쓸 수 있구나 싶었고 달콤하고 산뜻한 과일을 먹는 것 같았습니다. 잘 읽힌다는 만족감도 있었지만 다 읽고 나면 돈이 조금 아깝다, 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웃음) 오래 잡고 끙끙대게 만드는 소설이 주는 묘미에 비해 후루룩 빨리 읽히니까요. 그런데 마지막이 너무 안일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스물아홉 살인데 ‘이게 다 나의 문제지 않겠냐’라는 식은 착한 척하는 건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석순 : 안일하고 뻔한 질문인데 요즘 이십대들은 그런 질문조차 안 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맞춰진 대로 남들이 가는 길대로 고민 없이 가고 있는 것 아닌가. 이십대에 대한 고민들이 너무 많이 생각되어지고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고민이나 질문조차 하지 않는 것 아닌가.


이은조 : 문체나 문장이 굉장히 여성스러운데 전석순 작가님을 본 순간, 아 맞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작가도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운 문장을 구사하셨더라고요. 또 이 작품은 읽는 사람을 자꾸 움직이게 합니다. 독서를 하면서 자유롭게 상상하고 싶지만 마치 내가 레고인형이 된 것 같이 규격화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읽으면서 철수가 사용설명서처럼 구겨지고 접혀져서 어느 박스에 들어가겠구나, 란 생각을 했는데 마지막에 박스에 들어가잖아요. 중간까지는 재밌게 읽었으나 사용설명서라는 형식으로 끝까지 반복되다 보니 약간 지루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다 읽은 다음 이 책이 들어갈 자리는 서재일까, 아니면 사용설명서가 들어 있는 서랍일까, 잠시 생각하기도 했는데요.(웃음) 먼저 사용설명서라는 형식에 대해 고민하셨던 부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전석순 : 사용설명서는 각자 개별적인 이야기라 각 모드나 주의사항을 하나로 연결돼 굵은 틀로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예전에 어떤 기자님이 인터뷰하셨을 때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인 〈남녀탐구생활〉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 역시 기승전결 때문이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하고 조금 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때문에 재밌는 부분이 생기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고 형식은 반복되면 지루한 부분은 당연히 생기리라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그 형식을 빌려 쓴 것은 두 가지 시선을 한꺼번에 던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루저’라는 인물에 대해 두 가지 시선을 같이 던져 보고 싶었습니다. 이 사람이 잘하는 것이 있으면 ‘기능’이라고 하고 못 하는 것이 있으면 미흡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고장났다’고 얘기해 버리는 차갑고 냉정한 시선이 그 하나였습니다. 또 사용설명서를 쓰려면 이 사람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 하잖아요. 그러나 요즘엔 ‘이해’라는 과정이 너무 생략되어 있는 것 같아 ‘이해’를 통해 따듯하게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시선입니다. 그래서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과 따뜻하게 위로해 줄 수 있는 시선을 같이 가져올 수 있는 형식이 아닌가 싶어 사용설명서라는 형식을 썼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복되면 지루해지고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강요받는 것 같은 느낌도 들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부분은 문장이나 에피소드로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은조 : 이 소설을 변사가 나오는 연극으로 하면 매우 재밌을 것 같습니다. 내러이터보다는 21세기 새로운 스타일의 변사가 출연하는 형식으로 해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 작은 품평회 : 『나를 생각해』

 

소영현 : 분위기가 품평회로 변질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웃음) 잠깐 잊고 계신 듯 한데요, 우리 시대 감각의 차이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장강명 : 개인적인 생각인데 한국사회에서 세대 담론이 너무 유행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나라도 베이비붐 세대, X세대 구별은 하겠지만 우리나라처럼 연령대로 토막 내서 세대를 구분하여 분석하는 방식을 언론이나 사회학자가 많이 하나 궁금합니다.


소영현 : 일본에서 많이 하죠.

▲ 장강명(소설가)

장강명 : 일본에서 많이 하나요? 전 우리나라에서 유독 심한 줄 알았는데……. 그렇다 치고 그렇게 나누는 방식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끌리는 이유가 뭘까요. 고속성장을 하다 보니 가치관이 급변할 테고 그러니 서로를 이해하는 도구로서 용이하겠지만 매몰되다 보면 사람들의 시선이 좁아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80년대 학번은 이렇다, 는 식의 생각에 매몰되면 개인이 소외되고 그 담론을 쓰려다 보면 소설이 재미없어지는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김이듬 선생님이 그런 부분에 문제의식을 느끼셨다는 것에 동감합니다. 한편으론 세대 담론 자체에 편승해서 저 역시 이 소설을 썼지만 그다지 유용한 시대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90년대 학번과 00년대 학번이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고 10년 뒤 스마트폰이 아닌 뭘 쓰는 세대가 나온다 한들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반영돼 거대담론이 안 나오고 인물이 작아지고 사소설 이야기가 나온다거나 우리 세대는 이렇다고 이야기하면 조금 촌스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엔, 말은 ‘표백 세대’지만 꼭 세대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세대라기보다는 ‘세태’죠. 그런데 굳이 왜 이십대가 주인공이었냐 하면 이십대는 흔히 시대적 정수가 반영된 세대니까 그런 도구로 생각했습니다. 『나를 생각해』의 경우가 좋은 세태 소설인 것 같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홍보담당 이사를 만난 다음 둘이 술을 먹고 주인공도 많이 취했지만 홍보담당자를 길거리에서 또 마주치잖아요. 이게 만약 세대 소설이라면 홍보담당자가 가진 권한을 활용해서 애를 착취하거나 할 텐데 그런 것이 아니라 거긴 거기대로 어려운 게 있고 걔도 힘들고 나도 힘들구나, 그런 부분이 좋았습니다. 그런 반면 듣기 거북하실 말씀을 드리면 갑자기 남자 친구가 우리 세대는 뭘 해도 안 되는 세대야, 라고 얘기하는 부분은 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 부분이 남자 친구를 찌질하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면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고 혹시 그 세대를 설명하기 위해 들어간 대사라면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은조 : 이십대의 장유안과 동갑내기 남자 친구 이야기가 주요 골자이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이야기를 조금씩 모아 보고 싶었습니다. 처음 소설을 출발할 때는 아버지 이야기가 많이 있었는데 소설을 고치면서 아버지 역할이 점점 줄었습니다. 우리 문학사에도 아비 부재의 문학이 있는 것처럼 이 시대 아버지 자리가 작아지고 있잖아요. 제 소설에서도 인물들이 알아서 자신의 자리를 축소하는 느낌이었어요. 여자 역할이 커지고 엄마들이 직업을 가진 이유도 있지만 아버지들 스스로 위축당하고, 진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취재할 수 있었어요. 아버지에게 아무도 사라지라고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를 포함한 남자들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축소한 것 같아요. 가부장적인 사회의 뿌리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깊고 그 틀에 안착해 있는 걸 스스로 편안하고 자유롭게 생각했던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변화할 기회가 적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면 그 세계가 주는 안락함을 스스로 떨고 나오기에는 여성들보다 더 어려웠을 테니까요. 그리고 ‘찌질하다’는 표현도 대개 여자가 아닌 남자들에게 많이 붙이더라고요. 그걸 볼 때마다 참 안타깝다고 느꼈습니다.


장강명 : 홍보이사는 찌질하지 않고 굉장히 멋있던데요.


이은조 : 아, 그런가요. 그 남자에게는 돈을 벌어야 하는 아버지, 사회에서 은퇴하는 수명이 빨라진 사, 오십대 가장의 고충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소설에서 남자들이 세대별로 나오는 건 의도한 바였고 소설에서 다루고자 했던 남자들에 대해선 연민이 있는 상태에서 쓴 겁니다. 그것에 비해 찌질한 이십대 남자 친구에겐 의도적으로 사랑할 부분을 많이 주지 않았습니다.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응징을 하는 것처럼 그 인물에게는 역할을 많이 줄였던 것 같습니다.


김이듬 : 이은조 작가님은 이 세상 자체를 어떤 희곡의 무대로 생각을 하시는 편인가요?


이은조 :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 면도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버릇이 있는데,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자리에 가야 할 상황이 되면 ‘난 지금 연극하는 거야’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난 지금 내가 아니고 다른 누군가가 대신 연극하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소영현 : 아바타놀이네요.

▲ 이은조(소설가)

이은조 : 네, 그런 생각을 고등학교 때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되면서 ‘난 지금 내가 아니고 다른 누군가야’보다는, ‘괜찮아. 이 순간은 금방 지나가고 견디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야’라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그 자리를 견딜 만하고 즐길 수 있게 되더군요. 어느 날 고 3 때 낙서에 장래 희망이 ‘연극배우’라고 써놓은 걸 발견했습니다. 당시 연극을 한두 편 본 정도고 경험하지도 않았는데 왜 장래 희망을 연극배우라고 했을까. 의문이 들었어요. 그 이유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잠재의식 속에 나를 표현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여 보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바타놀이를 즐겼던 것도 나를 깨고 나오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 작은 품평회 : 『표백』

 

김이듬 : 이번엔 장강명 선생님 소설에 대해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표백』의 화자는 주로 자취방에 오는 후배나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작가는 어떤 인물에 대해서 애정을 갖고 있는지요,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애썼는지 궁금합니다.


장강명 : 애정을 갖고 있는 인물은 아무래도 화자입니다. 그리고 『표백』의 주제는 질문으로 끝나는 셈인데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세연이고 제가 여성을 잘 모르기도 하고 질문이 너무 명확한 이야기인 것 같아 질문을 던지는 도구 이상으로는 크게 몰두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질문을 던지면서 제가 답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이 그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나, 그런 것을 생각하다 보니까 화자가 제 성격을 많이 반영하게 됐습니다. 기본적으로 또 하나는 패배적인 자세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더라도 그 인물이 전투성 자체가 부족한 사람이 되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공이 전투력과 자존심이 강해야 좌절할 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인물로 그렸습니다.


김이듬 : 선수는 냄새를 많이 풍기지 않는다잖아요. 가령 희대의 바람둥이가 티내지 않듯이. 그런데 소설에 쓰는 자의 직업이 티 나고 본문에 기사가 삽입되는 것이 좀, 전 읽는 데 방해가 됐습니다. 기사와 인용문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굳이 넣어야 했나 싶었습니다.


장강명 : 전 다르게 생각하는데, 기사를 넣어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자평합니다. 허무맹랑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기사 인용문을 넣음으로써 독자들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김이듬 : 제가 몰랐던 ‘스킬’이란 게 이런 것인가요?(웃음) 그래서 설득력을 얻고 개연성 있게 느낀다는.


장강명 : 만약 ‘나’라는 화자가 이런 일이 있었다고 직접 설명하면 설득력이 없을 것 같아 기사를 넣었습니다. 또 하나는 보통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세상을 파악하는 시대에, 소설에나 기사가 잘 안 등장하지 이미 그런 글에는 기사가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십대인 전석순 선생님이 보시기에 제 소설이 호소력이 있었습니까?


전석순 : 전 이십대를 생각할 때 오히려 검은색이 떠올랐습니다. 붉은색을 주장해도 도드라지지 않고 다 흡수돼 버리는 검은색을 생각했는데 『표백』이란 작품은 그 이후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색깔이란 것 자체가 다 빠져버린 상태를 이야기한 것 같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표백의 의미에 대해 작가님의 육성으로 직접 듣고 싶습니다. 또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자꾸 다른 사람도 자살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우스운 생각도 잠시 들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몇몇 있습니다. 물론 행동하지는 못할 것 같지만. 소설을 읽고 이렇게 행동할 수는 있겠구나, 라는 생각은 들고 거기엔 동의하지만 이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은 조금 남아 있습니다.


김이듬 : 저도 자살에 관해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 책을 사기 전에 검색을 하다 장강명 작가님 블로그에 우연히 들어가게 됐는데 거기에 ‘자살을 꿈꾼 적이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한번 받고 싶다, 란 글이 있어서 제가 해드립니다.(웃음) 그리고 혹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나오고 많은 청년이 죽었고 영화 〈글루미 선데이〉가 나온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자살했잖아요. 그것처럼 『표백』 이후에도 혹시 그런 파장을 기대했었는지요?

이은조 : 겹치는 질문이 있어 제 질문 뒤에 대답하시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한때 희곡을 쓸 때 저희 과 아이들이 다 자살에 대해 쓰니까 교수님이 보시곤 처음 작품을 쓸 때 자살과 무속, 종교 관련 이야기 그리고 이십대의 나이에 오십대 교수의 애환을 쓰는 것처럼 세대를 뛰어넘어 쓰는 것, 이런 이야기는 습작을 여러 편 한 후에 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경험이 없다는 걸 떠나서 실체에 대한 판단을 하기에는 이르다고 우려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주제가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첫 작품을 쓰는 작가들에게 그 주제는 아주 매력적인 징후로 다가온다고 생각해요. 물론 『표백』에서 자살에 대해 나쁘게 본 건 아닙니다. 이십대니까 가능하다는, ‘무모한 순수’ 혹은 ‘맹독성이 있는 순수’라고 읽혔습니다. 어차피 이 소설에 나오는 세대는 무지개를 잃어버린 세대잖아요. 그런 면에서 세화와 세연이가 굉장히 여신급으로 나옵니다. 능력도 출중한 이 여성이 선택한 것이 자살인데 주장은 했지만 행동은 못 보였던 것 같아 독자로서 감정이입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 왜 하필 여자로 했을까, 도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화자에게는 공감을 많이 했고 특히 우울증이 있는 아내를 둔 휘영이란 남자가 독백하는 부분은 공감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세화와 화자가 한강변에서 이야기할 때 세화의 대화 패턴은 조금 촌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아, 이분이 여자를 잘 모르시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정형화된 패턴의 대사나 어조들이 좀 보였는데 문제될 건 없지만 나중에 다른 소설에서 여성을 다룰 때 참조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웃음)


장강명 : 가슴 아픈 말씀이네요.(웃음) 먼저 ‘표백’이란 제목이나 하얗게 되는 것을 쓴 이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검은색은 악하거나 그것 자체로 타도 대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완전무결한 세상, 흰색이 되어 가는 과정, 즉 ‘표백’이 나온 겁니다. 지금 세대가 느끼는 좌절감은 세상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이미 세상이 완벽해서 느끼는 좌절이라고 봤기 때문에 ‘표백’이 됐습니다. 제 소설은 주제가 먼저 있고 다음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풀까 고민하다가 나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질문을 던질 도구, 말해 줄 사람, 대응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왜 여성이었느냐, 엔 큰 의미는 없고 인물 배치상 미학적 구도를 생각해서 설정했습니다. 이십대 남자가 이십대 여자보다 조종하기 쉬울 것 같고 원래 예쁜 여자들한테 잘 넘어가잖아요. 그렇게 된 건데 제가 잘 모르는 인물에 대해 생생하지 않은 부분도 있고 대충 넘어간 부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반응하는 남자도 어차피 도구의 남자 이야기지만 제가 잘 아는 성격이니까 쉽게 쓸 수 있었는데 던지는 여자 이야기 같은 경우엔 나오자마자 죽어버리는 인물이라 쉽게 넘어간 부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제가 결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도발적인 질문이잖아요. 그것에 누군가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 제겐 하등의 비판이 안 되고 오히려 누군가 심각하게 동의를 하면 제가 더 무서워질 것 같습니다. 인터넷 평이나 트위터를 검색해 보면 동감한다는 평이 가끔 있는 게 그걸 보면 불편합니다. 무섭게 읽었다거나 불편한 책이라고 하는 것이 제일 만족스러웠습니다. 읽는 사람에게 뭔가 꽂히긴 꽂혔구나, 이 질문에 대해 이 사람이 답을 못 하니까 무섭다는 반응이 나오는 거구나 싶어서 그런 반응이 제일 좋았고요. 행여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모방 자살을 일으킨다면 저로선 피하고 싶습니다. 조만간 답을 찾겠지만 지금으로선 이 주제에 대해선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겠으나 자살선언문 자체가 난센스라고 봅니다. 독자들 역시 난센스라는 관점에서 소설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게 자살을 꿈꾼 적이 있냐고 물으시면 꿈꾼 적이 있으나 소설 속 내용과 관계는 없습니다. 단지 어린 시절부터 살고 죽는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니까 내가 죽음까지도 완결해 버리고 싶다는, 순수한 맹독적인 발상이라고 할까요. 완결, 그러니까 사무라이가 할복하는 심정을 막연하게 동경하는 정도지 여태까지 자살을 시도한 적도 없고 자살을 할 정도로 힘들었던 적도 없고 수십 년 내 자살할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은조 : 얼마 전 카이스트 학생들과 교수까지 잇달아 자살을 했는데요, 『표백』을 쓰셨던 시기가 혹 그 사건이 있었던 때였나요?


장강명 : 그건 아닙니다. 원고 마감이 3월 말이라 원고를 접수한 후에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쓸 때는 설마 모방 자살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 컸고 반쪽으로는 저도 이십대가 지난 지 조금 돼서, 지금 이십대들이 읽고 아무런 반향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이게 무슨 우리 얘기냐, 라고 무시해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정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독자가 없지 않았던 데다가 응모하고 난 뒤 카이스트 자살 사건이 일어난 걸 보니까 자살이란 것이 조명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전염성이 있겠다 싶어 조금 섬뜩해졌습니다. 소설가로서 제 위치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요, 전 예술이 삶보다 앞선다거나 예술을 위해 삶을 버릴 수 있다거나 소설가의 욕망이 시민으로서 느껴야 하는 책임을 넘어선다거나 하는 생각엔 반대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보고 한 명이라도 모방 자살을 한다면 차라리 책이 묻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문학의 경계들, 혹은 접속의 지점들

 

소영현 : 자연스럽게 말씀 나누시는데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갈 겸 질문 드릴까 합니다. 호모섹슈얼한 상상력이 공교롭게도 두 분 소설에 많이 나와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문제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남성 여성의 관계를 그린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호모섹슈얼한 상상력을 경계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이야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연장하자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한국문학과 내가 접목되는 지점은 어디일까, 라는 질문입니다. 작가들 가운데 한국문학에 빚진 것이 없다고 선언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문창과 출신의 작가들이 급격하게 늘어난 경향도 있습니다만, 한국 작가들을 알지 못하고 한국문학을 읽지도 않았고 국문과나 문창과 출신도 아니라 난 모른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심지어 선언하는 작가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다, 라는 뜻은 아니고요. 많은 분들이 동의하는 점이기도 한데요, 이런 맥락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국문학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한국문학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하루키지 이광수도 아니고 김동리도 아닌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한국문학과 내가 접목되는 지점이란?’란 질문을 드리고 싶고요. 연동해서 한국문화와 내가 접목되는 지점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김이듬 : 호모섹슈얼리티와 레즈비어니즘은 다른 층위의 개념인데요……. 이 문제는 저보다 이은조 작가님 소설 속에서 더 심도 있게 다루신 것 같아, 이 작가님이 답변해 주시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소영현 : 사실 남녀 관계가 수평적인 관계가 되기 어렵기도 하고 남녀의 위계와 차별은 시대를 초월해서 여전히 제기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것에 비하면 여성끼리의 관계는 상당히 편안하고 안정적이고 어떻게 보면 미래지향적이기도 한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블러드 시스터즈』와 『나를 생각해』가 보여주는 것은 경계 넘기의 상상력이면서 새로운 관계에 대한 입장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철수 사용 설명서』를 읽으면서 약간의 저항감이 있었습니다. 기분 나쁜 저항감이 아니라, 내가 아직 쓸 만한 남자야, 라고 얘기할 때 여자한테 어필하는 남자가 왜 쓸 만한 남자일까, 개인적으로 궁금했습니다. 비정상도 아니고 불량품도 아니고 나는 나야, 라고 얘기할 때 ‘저 사람들의 기준이 잘못된 거야’라고 이야기 하는 것과 ‘내가 아들의 기능, 남자의 기능을 잘 못해’라고 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특히 가장 중요한 연애 모드와 취업 모드에서 부적합하다고 판정 내릴 때 두 가지 측면이 생각났습니다. 연애 모드에 있어서 왜 남자 기능을 잘 못한다는 것이 하자가 되어야 하는가, 왜 이렇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에 대해 안타깝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전석순 : 일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생각해야 하는데 자꾸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철수의 연애모드를 쓰면서 저도 솔직히 좀 답답했습니다. 연애모드에서 자신에 대한 판단을 여자 친구에게 떠넘기잖아요. 답답하지만 그런 모습을 그리고 싶어 표현했습니다.


장강명 : 혹시 여자 친구 있으신가요?


전석순 : 없습니다. 만나시는 분들마다 거의 그 질문이 나오더라고요.


장강명 : 『철수 사용 설명서』에 나오는 여자들은 다 다른 여자들인가요?


전석순 : 그건 제가 약간 열어 둔 부분입니다. 어떤 분들은 좀 극단적으로 보셔서 다 환상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철수가 연애를 할 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녀 자체를 철수가 상상 속에서 만든 인물이라고 보시기도 하고요. 그렇게 되면 철수가 너무 불쌍하고 우울해질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녀들마다 이름을 안 정한 건 일부러 열어 둔 부분이기도 합니다.

장강명 : 네 명 여자들이 모두 다른 인물로 본다면, 그녀들을 여관에 데려갈 정도니 능력자 아닌가요. 발기부전 같은 게 있을 뿐이지 연애 면에선 성공적인 거죠.


전석순 : 밑바닥에서 실패하는 것보다 결정적인 순간에 실패하면 더 강렬해지지 않나.


장강명 : 단순한 비뇨기적 장애이고 세대적 좌절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전 책을 읽으면서 전석순 작가님이 굉장히 능글맞은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주제나 소재가 영악하게 심사위원을 사로잡는 포맷인 데다가 시류를 잘 탄 것 같기도 하고 문장도 감칠맛 나잖아요. 나이만 이십대고 구렁이가 아홉 마리쯤 있는 분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지금 드는 생각은 이것이 바로 ‘아바타놀이’인가, 지금 현장에서 전 작가님 모습이 연기가 아닐까, 아니면 글 쓸 때만 이중인격이 되는 걸까?


전석순 : 그런 것 같습니다. 습작을 쓸 때는 아무래도 쉽게 제 이야기 위주로 썼습니다. 그러다 제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쓸 때 흥미가 커지고 재밌다는 걸 알았습니다. 물론 주제의식과 뒷받침됐을 때 이야기지만,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나 나라면 절대 처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 대해 쓰는 것이 더 재밌었습니다.


 

인공가족, 동성커플, 호모섹슈얼한 상상력

 

소영현 : 다시 한번 호모섹슈얼한 상상력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일반적으로 청년세대를 동성커플로 그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모 세대나 그보다 윗세대를 그리는 경우는 실제로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를 생각해』와 같은 작품에는 뭔가 지향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은조 : 저는 굳이 동성애를 강조하고 싶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사랑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태생적으로 태어난 레즈비언도 있지만 상황과 처지로 만들어진 동성애도 있습니다. 여자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보이시한 여자애가 굉장히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자 고등학교로 가면 더 심해진다고 합니다. 어릴 땐 금남, 금녀 구역에서 발생하는 편협한 상황, 하나의 성이 사라진 구역의 특이성 때문에 그럴 수 있겠지만 할머니 경우엔 태생적으로 설정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겪었던 할머니니까 당시엔 금기이고 스스로도 내가 남들과 정말 다를까, 의심하던 시대잖아요. 그런 엄마에게서 태어난 딸은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 외로움을 읽어 준 친구에게 자연스레 끌리게 됩니다. 굳이 성적인 것을 교감하지 않더라도 말이죠. 그리고 인간은 태생적으로 외로운 데다 나이가 들면 외로움을 나눌 상대가 더 필요해지는 것 같아요. 구체적인 상대를 찾아 나서는데 마음이 맞고 상황을 이해해 주는 친구가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요. 그렇게 나이든 여성들, 동성 친구들의 진한 우정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혹자들은 동성애로 볼 수도 있겠지만 소유하지 않는 우정의 속성과 결핍과 상처로 이어진 사랑이야말로 외로운 이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의 여지는 열어 두었습니다. 그 사이를 조절하여 넘나들 수 있다면 이상적인 형태의 관계가 되겠지요. 인공 가족을 만든 유미연과 재영은 동성애는 아닙니다. 그야말로 마음이나 취향이 맞아서 같이 사는 사람들이죠. 그런 가족 형태가 많이 드러나지 않았다 뿐이지 실제로는 더 많으리라 봅니다. 앞으론 시대가 변하면서 인공 가족의 의미와 형태가 더 강해지고 다양해질 것 같고요. 만약 매장에 진열되듯 가족을 취사선택할 수 있다면 가치관, 취향,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읽어 주고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우선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두 사람은 인공 가족의 의미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전석순 : 저도 예전에 동성애에 대해 써보고 싶어서 일부러 거짓말하고 만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쁜 짓인데 일 대 일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커플이 절 만나 주진 않을 것 같아, 몇 명을 직접 만나 봤는데, 이건 쓰지 말아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정말 별다를 것 없는 똑같은 사랑이거든요. 그래서 이걸 갖고 쓸 수 있는 이야기는 너무 한정적이고 특별할 것도 없는 이미 나왔던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못 썼고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의문은, 동성애 하는 젊은 사람들은 찾으려면 찾을 수 있는데 우리 아버지 이전 세대는 왜 적을까, 할아버지 세대는 당시 어떻게 자라서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됐을까, 라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알아보니까 어떤 분들은 레즈비언과 게이가 합의를 해서 결혼하기도 하고 뭔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부분이 애틋하면서도 관심이 갔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세대의 동성애적 요소들은 조금 낯설기도 하지만 많이 드러나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인공 가족이란 부분도 동의하면서 읽었습니다. 처음엔 둘이 산다니까 동성애적 생각이 들었는데 남자 친구가 생기는 부분을 읽고는, 여자 둘이 애틋하게 살면 나부터 그런 선입견부터 갖나 싶어 약간의 깨달음과 뒤통수 맞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미 드러난 부분임에도 소설에서 말해 줘서 한 번 더 생각하게 해서 좋았습니다.


장강명 : 두 분 작품을 읽으면서 동성애나 남녀 관계에 대해 느낀 점을 짧게 말씀드릴까 합니다. 『나를 생각해』는 크게 티내지 않는 성장 소설 같다고 느꼈습니다. 주인공이 성숙해지고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는 소설 같았습니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는 게 ‘성숙’인 거고 콤플렉스 있는 지나와 화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성인 대 성인으로서 관계가 설정되고 오 연출과의 관계도 어쩐지 응원해 주고 싶었습니다. 주인공의 엄마도 아이덴티티를 찾아 다른 아줌마와 동거하는 과정도 성숙 내지는 성장의 개념으로 봤고 성숙한 인간의 롤모델로 재영이와 유미가 제시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이해했습니다. 반면에 『블러드 시스터즈』는 인간관계가 끝까지 성숙되지 않아 오히려 참혹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잘 됐으면 하는 선배는 일찍 자살해 버리고 친어머니도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으로 끝나버리고 계모와 친아버지도 그 집을 찾아가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으로 끝나버리잖아요. 물론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이기도 합니다. 참혹하지만 발랄한 묘사 부분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질적으로 느꼈던 부분은 남자 친구와 남자 친구의 어머니, 그러니까 미래의 시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있는 여성과 주인공의 관계가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런 천사표 남자 친구, 그리고 현실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시어머니가 있을까. 혹시 주인공 어머니와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있어서 뒤에 폭로되는 것이 있는가, 그래서 못 맺어지는 건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 읽어 보니까 그건 아니더라고요. 사실 시어머니는 주변인물이니까 상관없을 수 있지만 남자 친구는 어떻게 그렇게 완벽할까 싶었습니다. 동성애 관계에 있는 선배나 쫓아다니던 스토커 여고생은 참혹할 정도로 현실적인데 그런 면에서 남자 친구는 조금 이질적이었습니다.


김이듬 : 아까 말씀드렸듯 실존하는 인물일수록 소설로 표현하면 이렇게 허구성을 띠는구나, 싶습니다. 사실 현실 속에선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당연시되는데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나올 때는 납득이 안 되면 용서가 안 됩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빡빡해졌죠?(웃음) 어디에나 말도 안 되는 인물이 있는데, 머저리같이 자기 나름의 사랑이란 환상으로 사랑을 완성하려고 노력하는 인물이 있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밸런스 맞지 않는, 이질적이고 껄끄럽고 장애적인 요소가 하나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장강명 : ‘블러드 시스터즈’라는 제목은 생리기간이 같아진 두 여성 때문에 지은 건지요? 원래 있는 단어인가요?


김이듬 : 영어에 ‘의형제’라는 의미의 ‘블러드브라더스’는 있는데 ‘블러드시스터즈’는 없습니다. 동서양 마찬가지, 남성 위주의 세상에서 여성 간의 연대감, 우정, 의리를 지칭하는 어휘가 필요 없는 거죠. 그렇게 여성을 개별화하고 분산시킴으로써 유지되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있을 테니까요.


장강명 : 그럼 생리하고는 관계가 없는 단어입니까?


김이듬 : 음, 무관하지는 않죠. 여성들이 같은 공간에서 얼마간 함께 생활하다 보면 이상하게 생리주기가 비슷해 가서 나중엔 하루 이틀 차이로 출혈하고 끙끙 생리통을 같이 앓고 그러기도 해요. 감정과 생리대, 생물학적 호르몬 등을 공유하는 느낌인데요. 저도 룸메이트와 그런 경험을 했고요.


 

기타 등등, 제목을 둘러싼 엇갈린 감각들

 

장강명 : 제목에 대해 질문 드리자면 이은조 선생님 책 제목은 솔직히 조금 안 와 닿았었습니다.


김이듬 : 『표백』은 좋아요?


장강명 : 『표백』은 궁금증이 드는데 『나를 생각해』는 딴 제목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이듬 : 『나를 생각해』는 부드러운 느낌이어서 자극적인 요즘 다른 책 제목과 차별성을 갖고 있어 전 오히려 좋았어요. 타자에게 ‘나를 생각해’라고 요구하는 건지, 스스로가 나를 생각해 본다는 건지 모호한 점도 괜찮고요.

이은조 : 저도 제목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나쁘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어요.(웃음)


장강명 : 아, 그런가요.(웃음)


이은조 : 제목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첫 장편이어서 서사와 구성 등에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목도 많이 바뀌더라구요. 어떤 인물로 포커스를 맞추느냐에 따라 제목도 달라졌어요. 등장인물들이 사는 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멋진 로맨틱한 세계라는 느낌이 들어서 ‘로맨틱 세계’로 제목을 바꾸었다가 인문학 서적 같다는 평이 있었어요. 결국 ‘로맨틱 세계’는 극 중 연극 제목으로 넣었습니다.


장강명 : 그게 전 더 좋은데요.


이은조 : 감사합니다.(웃음) 결국 ‘나를 생각해’로 정했을 땐 이 제목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하나는 나를 떠난 너, 먼 훗날에라도 나를 생각해 달라는 의미와 또 하나는 너에게서 떠나온 나는 이제 나를 생각하며 살아 보자는 뜻입니다.


김이듬 : ‘철수사용설명서’는 제목을 어떻게 지으셨나요?


전석순 : 제목에 대한 고민이 조금 덜했습니다. 처음엔 1인칭으로 썼기 때문에 제목이 ‘나 사용설명서’였습니다. 그런데 1인칭으로 하니까 자조적인 느낌이 강해지고 내가 내 이야기를 하니까 귀 기울이기도 전에 거부감이 들겠다 싶었습니다. 3인칭으로 가면서 인물 이름을 정하는 덴 그리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철수’라는 인물은 누구나 알고 있고 캐릭터와 잘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아 ‘철수사용설명서’라고 했습니다. 당선됐다는 연락받고 출판사에 갔는데, 책으로 나오면서 제목 바뀌는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제목 바꿀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나를 생각해’라는 제목은 처음 들었을 때 너무 평이한 것 아닌가 싶었는데 두세 번 생각해 보니까 좋았습니다. 나를 둘러싼 것, 나와 관계된 것이 아닌 나를 생각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아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표백’은 처음부터 ‘표백’이었나요?


장강명 : 처음부터 ‘표백’이었는데 출판사에서 제목이 조금 이상하다고 바꿀 생각 없냐고 물어보긴 했었죠. 제가 제목 센스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습니다.(웃음)


전석순 : ‘표백’은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은조 : 타이밍을 놓쳐서 말씀 못 드렸던 『블러드 시스터즈』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드릴까 합니다. 전 이 작품이 ‘노래’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80년대 카페가 나오는데 공간도 좋았고 인물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여울이를 ‘야생의 처녀’라고 나름대로 닉네임을 정했는데 여울이가 지나가는 곳마다 다 사라지잖아요. 나중에 책장을 덮으면서 느꼈던 것은 어느 날 문득 들른 낯선 카페에서 주인이 무작위로 틀어 주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이동한다’는 마침표를 찍는데 그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야생의 인물인 여울이의 행방에 대하여, 어디에서 무얼 할까, 라는 상상을 하게 되어서 독후 에도 여운이 오래 남았습니다.


김이듬 : 소설 마지막 문장이 아마 ‘단순하고 평범한 방식으로 나는 이동한다’일 겁니다. 저는 단순하고 평범한 방식의 이동은 죽음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게 보편적일 텐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나의 창작노트는 이렇게 시작된다?

 

소영현 : 평론하는 사람으로서 더 많은 질문을 드리고 싶지만 마무리 지을 시간입니다. 부족한 부분은 뒷자리에서 더 이어 나가고요. 아까 드린 질문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다양한 문화체험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글을 쓰실 때 가만히 앉아 머리 짜내서 이런 소설을 쓰시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김이듬 작가님 작품 속 소제목만 보더라도 그렇고요. 각자의 문화체험의 의미를 네 분 작가님들이 서로 나누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혹시 창작 비밀인가요?


김이듬 : 저는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해서 일상이 혼란스럽고 피곤한 사람입니다.(웃음) 농담 반 진담 반이고요. 상상력을 기르기 위해 특별히 하는 건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처럼 음악 듣고 산책하고 여행을 떠나가도 합니다. 그럴 형편이 안 되면 ‘여기는 여기가 아니야’ 스스로 세뇌시키면서 집 앞 골목을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요즘 바꾸려는 건, 너무 혼자 성을 쌓고 폐쇄적으로 살지 말고 조금 더 일반적 체험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작가로서 더 소중한 것일 수 있는데 그동안 간과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전석순 : 저도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건 딱히 없습니다. 인터넷 게시판 글 읽다가도 떠오르는 경우도 있고요. 『표백』에도 인터넷 사이트가 나오는데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 거기도 자주 갑니다. 텔레비전을 거의 안 보는데 거기 가면 요즘 나오는 프로그램 명장면이 올려져 있어서 그것만 봐도 드라마 내용은 알겠더라고요. 처음엔 그래서 봤는데 게시판이 익명성에 기대어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거기서 얻을 때도 있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또 개인적인 일상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합니다. 『철수사용설명서』는 작업실을 구하고 이사했을 때 면도기를 거금을 주고 샀는데 몇 번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망가지더라고요. 밤이라서 회사로 전화할 수도 없어 짜증이 났습니다. 그제야 사용설명서를 찾아봐야지 생각했는데 이미 버렸더라고요. 다행히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사용설명서를 받아 볼 수가 있어서 봤는데 충전을 안 한 것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처음 느꼈던 짜증과 화는 면도기 제조회사에 내는 게 아니라 그걸 몰랐던 자신에게 내야 하는 거였습니다. 그때 사용설명서라는 형식이 물건과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갈등에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어 달 정도 지난 뒤 여자 친구와 다투게 됐는데, 우린 왜 이렇게 자주 다툴까, 에 대해 말하다가 우스갯소리로 너와 나의 사용설명서가 있다면 덜 다투지 않을까, 라는 이야길 했습니다. 왜냐면 전 그 친구와 걷는 걸 좋아해서 자주 걷자고 했는데 여자 친구는 그때마다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는 겁니다. 좋은 뜻으로 한 것인데 상대는 불편하게 받아들였던 거죠. 사용설명서가 있다면 이런 사소한 오해들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소설 구상이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누구와 이야기해서 얻는 경우도 있고 다양한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영현 : 일상 전체가 소설과 직결돼 있네요. 장강명 선생님 경우엔 직장이 있으니까 소설 쓰는 시간을 내는 게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장강명 : 그건 제가 관리할 수 있는 부분이라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직업에서 도움도 받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타인과 억지로라도 얽혀서 그 사람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까 글 쓸 때 피가 되고 살이 된 것 같습니다. 직업이 제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면, 기사라는 것이 일도양단을 하는 건데 그러다 보니 일도양단이 안 되는 문제나 소재들에 관심이 갔습니다. 이런 사람 이야기도 하고 싶고 저런 사람 이야기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서 그런 소재에 더 끌리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 작품 구상한 건 없는데 제가 늘 관심 가는 이야기는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게 볼 수 있는 소재들입니다. 문화체험에 관해서는 제가 좀 잡식성이라 논픽션도 좋아하고 대중문화 자체를 즐기는 편인데 아마 제 또래는 다 그럴 겁니다. 컴퓨터 게임도 즐기고요. 그 와중에 한국 소설은 덜 즐기고 있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굳이 한국문학에 빚진 것 없다고 선언하고 싶진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선언의 순수성이 의심됩니다. 한국문학이 빚 갚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빚지지 않았다고 왜 굳이 선언할까, 나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러는 것 내지는 선배에 대한 비판의 의도인 것 같은데요. 제가 덜 읽긴 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국 소설은 일본이나 미국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의식이 강한 것 같습니다. 자의식이 과잉되면 그것대로 어글리한데요, 조선시대나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작가에게 오피니언 리더로서 사회적 이슈에 대해 해석하길 바라고 기대하는 사회적 풍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영향을 받고 있고 그 자체는 굳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루키는 한때 탐독했는데 지금 제게 영향을 미친다거나 대단한 모범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안드로메다로 가거나 되도 않는 환상적 소재를 차용한다거나 하는 대표 사례로서, 앞으로 저렇게는 쓰지 말자는 안티 케이스가 제겐 있습니다. 그런 면에선 영향을 미치고 있죠. 적당히 환상적 기법을 차용하고 싶어도 이건 쓰지 말자고 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선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은조 : 특별하게 문화체험 하는 건 없고 전 인공적으로 잘 디자인된 상품 보는 걸 좋아합니다. 아이디어 상품과 가구 보는 것을 즐기는데 특히 책상과 관련된 가구를 좋아합니다. 나만의 큰 공간이 생긴다면 그곳을 책상으로 채워 놓고 싶은 꿈도 있어요. 책상을 볼 때마다 의욕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싫증을 많이 느끼는 편인데 그 가운데 그렇지 않은 부분은 소설 읽는 것, 글을 읽는 겁니다. 글자를 보고 있으면 절로 차분해지는 걸 느낍니다. 희곡, 시를 자주 읽고, 영화도 많이 봅니다. 또 하나는 산책입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걷거나 뛰는데 매일이 다르더라고요. 매일이 다르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최근에 깨달았습니다. 폴 오스터가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괜히 쓴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산책로에 가면 어제 혹은 지난주에 만난 이들을 또 만나게 됩니다. 네 시에 만나는 산책객, 다섯 시에 만나는 산책객이 다르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어떤 여자가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걷기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배가 점점 불러 오고 나중엔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 겁니다. 1, 2년 사이의 일이었는데 장편 영화를 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사소한 일상을 관찰하고 탐색하는 걸 즐깁니다.


 

하루키, 경계, 그리고 운우지정 

 

소영현 : 네, 역시 소설 구상과 관련한 사항들은 창작 비밀 맞군요.(웃음)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시고, 아울러 아까 지나가면서 이야기했는데, 경계에 서 계신 분들이란 생각도 듭니다. 전체적으로 타 장르(?)이기도 하고요. 여러 맥락에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앞으로의 일상과 함께 경계에 대한 것이 오늘 좌담을 전체적으로 정리해 주는 단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경계와 나의 관계에 대한 말씀 들으면서 마무리 할까 합니다.


장강명 : 다음 소설은 써야겠다는 생각만 있습니다. 장편 연애 소설을 쓰면 어떨까 하는데 루저가 아닌, 잘사는 애들이 나오는 걸 쓰고 싶습니다. 『표백』에서 질문을 던졌고 질문에 호응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그 소설이든 다음 소설이든 제가 생각하는 답도 어딘가에 녹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전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에 서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성취나 완결성 내지는 이루고자 하는 것들과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에 있어서 균형, 양쪽 토끼를 다 잡는 경계에 서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까 소 선생님께서, 하루키가 한국문학 아니냐, 고 하신 게 뇌리에 꽂힙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지금 당장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런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 공교롭게도 지금 저를 포함한 네 분의 소설이 하루키 소설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하루키 세례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해석되는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가, 나름대로 흥미롭다면 흥미롭다는 생각도 듭니다.


소영현 네 분의 소설이 하루키 소설을 극복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문제가 아니고요. 90년대 등장한 새로운 경향의 소설들이 있었습니다.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조금 떨어져 나온,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소설 경향이 있었죠. 예컨대 은희경, 윤대녕과 같은 세대가 있었고 그 이후에 다른 세대들이 등장햇는데 비슷하면서도 다른 경향이 두세 세대 정도 더 있었다고 봅니다. 그 첫 세대 이후로 하루키의 영향이 컸는데 그건 개인적으로 무드냐 아니냐, 문체냐 아니냐, 하루키적인 색채냐 아니냐가 아니라 하루키를 읽으면서 이전의 한국 소설과는 좀 더 다른 것을 내가 써보고 싶다는 마음, 한국 소설과 단절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키 소설을 계기로 생겨났다는 것이죠. 하루키가 한국 소설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이유는 이런 겁니다. 물론 국경 너머의 이야기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측면도 있지만, 유럽 소설을 두고는 1900년대 소설과 2000년대 소설도 우리는 동시대적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주인공이 100년 차이지만 굉장히 다르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다른 국경의 이야기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측면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한국 문학에 대해선 이광수 소설과 1990년대 소설은 같이 안 읽는 편입니다. 저건 굉장히 올드한 거고 이건 모던한 거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암암리에 갖고 있는 깰 수 없는 틀 같은 것이 한국문학엔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하루키가 한국문학이다, 라는 말 자체에는 이런 걸 깰 수 있는 힘이 담겨 있지 안나 싶습니다. 그걸 다 뒤섞어서 생각하게 하고 80년대 소설을 극복한 게 90년대 소설이고 그걸 극복한 게 2000년대 소설이다, 이런 단선적이고 일직선적이고 역사적이고 발전단계적인 발상에서 약간 벗어나서 다른 소설도 가능하다고 믿게 된, 아니면 자기가 그걸 만들겠다고 생각하게 된, 그런 기점이 하루키가 아닐까. 국경 문제도 희미하게 만들고 많은 경계들을 희미하게 만든 게 아닐까. 이 안에 무드가 있느냐 없느냐와 무관하게 그런 의미입니다. 제가 너무 긴 강의를 한 것 같네요.(웃음) 마무리 발언으로 정리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전석순 : 학교를 졸업하고 세운 계획은 스물아홉 살까지는 평일에 글 쓰고 주말에는 일하는 생활을 계속하려 했습니다. 소설 쓰는 것 때문에 누군가에게 손 벌리는 일이 안 내켜서 부모님과 떨어져 독립해서 생활비 벌며 소설 쓸 생각이었습니다. 스물아홉 이후에는 『표백』의 화자처럼 일하면서 글을 쓸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었습니다. 올해 봄까지는 그 준비단계였습니다. 봄에 단편이 될 만한 글들의 구상을 끝내 놓고 다음 주부터 그걸 쓰는 데 매달리려 했는데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름에는 잘 못 쓰기도 해서 그걸 지금도 못 쓰고 있었습니다. 당장 계획은 날이 선선해지면 일단 준비해 두었던 단편을 쓰고, 더 다양한 이야기들,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쓰는 게 제겐 눈에 보이는 목표입니다. 끝으로 오늘 작품이 아닌 작가님을 실제로 뵙고 귀한 목소리 들을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김이듬 : 저는 그저 막막한 기분입니다. 앞에 말씀하신 작가들처럼 주도면밀한 계획이나 목표가 없습니다. 단지 지금 배가 고프고 내일도 배가 고프겠지만 희망이든 절망이든 앞당겨 가질 필요가 있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시든 소설이든 아무것도 아니든 뭔가를 끼적거리면서 이 세계를 견뎌 가겠지요. 시인이 시나 쓰지 소설은 왜 써, 이런 분위기가 약간 있는 것 같은데 다행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심심할 때 몇 편의 아주 짧은 소설을 썼는데 그게 모두 방에 관한 얘기, 좁은 공간을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 이야기라서 그걸 재밌게 결합해 볼까 해체하거나 아예 망가뜨릴까 궁리하고 있습니다. 전 사실 소설가로서의 자의식은 없습니다. 여기 세 분의 소설가 분들께 미안한 감정도 사실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길 오면서도 심리적으로 힘들었습니다. 뜻밖에 불러 줘서 감사했지만 내가 과연 낄 자리인가 싶어 묘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덕분에 많은 이야기를 듣고 배웠습니다. 그렇다고 시인으로서 확고한 자의식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전 지금 휘청거리고 뒤뚱거리는 상황인데 한편으론 자의식이 없고 흐리멍덩해지는 것,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에 대한 희열, 해방감도 있습니다. 당분간 이걸 즐기면서 엉거주춤하게 살아 보고자 합니다.


이은조 : 전 소설 습작 기간에 비해 등단이 빨랐던 것 같아요. 그게 제게는 어떤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써야 한다는 생각이 무척 강했습니다. 악착스러운 면도 있었고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편소설 내고 난 뒤엔 그런 것들에서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래오래 끝까지 꾸준히 하겠지만 나를 혹사시키면서까지 할 정도로는 하지 말자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번 소설을 그렇게 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요. 첫 책이라는 압박과 부담이 있다 보니 많이 피폐해져서 오히려 건강과 생각이 악화되어 책 출간 후에 힘들었어요. 자기 관리에 실패했던 부분이지요. 소설은 제가 집착할수록 저를 밀어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평상심을 유지할 때 글을 쓸 수 있었어요. 또, 니체가 말하길, 2페이지를 넘지는 않지만 거기에 포함된 모든 단어가 필연적이라고 할 만큼 명확한 소설을 백 개 이상 습작해 보라고 했습니다. 소설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책상 앞에 붙여 놓은 글귀인데 그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 꾸준히 쓰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스타일과 호흡을 찾아 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오늘 작가님들 만나서 아주 좋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책을 낸 인연이라 특별한 운우지정이 생겨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늘 응원하겠습니다.


소영현 : 대충 마무리가 된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서먹함이 많이 해소됐는지 네 분 말씀 고맙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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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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