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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

  • 작성일 2011-06-23
  • 조회수 2,138

 

[장르소설 특집]

 

이빨

 

유현산

 

 

  


 

 

 

1993년 6월 23일─자수

 

형사가 이빨을 쑤셨다. 고추씨 기름이 묻은 밥알 대가리가 이쑤시개에 찔려 나왔다. 권재범은 형사를 부러워하며 오른쪽 어금니의 썩은 자리에 끼어 있는 밥알들을 혀끝으로 긁어냈다.

“지문을 숫돌에 갈았어요? 그게 요즘 유행인데, 어떻게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엄청 아팠을 텐데. 그 정성으로 숨어 지내지 뭐 하러 자수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뭘……. 한 가지 물어봅시다. 피의자는 딱 두 가지로 나뉩니다. 뭔지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곱게 들어가는 놈과 뒤통수치는 놈. 자, 내 얼굴을 똑바로 보세요.”

형사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벗어진 이마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형사는 연방 입을 쩝쩝거리며 반질반질한 면상으로 권재범을 노려보았다.

“내 얼굴에 사람 좋다고 쓰여 있죠? 나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죽여요. 바퀴벌레가 나타나면 마누라 등 뒤에 숨어서 벌벌 떨죠. 근데 자수한 피의자 중에서도 검찰로 넘어가서 딴 소리를 하는 분들이 꼭 있어요. 형사가 탁 쳐서 억 했네, 안 한 것도 불어버렸네, 하고 말이죠. 그런 일을 당하면 아무리 천사 같은 형사라도 화가 많이 나겠죠? 이 새끼는 목덜미에 송곳니를 콱 박아넣고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져야겠다,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런 일 없습니다.”

“좋습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가요?”

“제가요.”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그냥 세탁기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돼요. 더러운 놈들하고 엉켜서 한 바퀴 돌고 나면 하느님을 영접할 만큼 새하얘지니까 그때 나오면 됩니다. 아저씨는 자수하셨으니까 정상참작으로 탈수 시간이 몇 분 줄어들겠네요.”

순간 권재범은 형사의 멱살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몇 년이야?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이 반질반질한 새끼야. 몇 년이냐고! 권재범은 아랫입술을 씹었다.

 

 

1993년 5월 23일─자수 한 달 전

 

영등포 지하철역에는 늘 지린내가 난다. 영등포에서 시작된 지린내는 구로, 부천, 주안, 인천역까지 1호선 하행선 전 구간을 따라다닌다. 권재범은 티켓 자판기의 3구간 버튼을 누르고 100원짜리 동전 다섯 개를 넣었다. 자판기의 내장이 꾸르륵거리며 표를 토해냈다.

오후 3시인데도 인천행 전철은 북적였다. 1호선 객차는 수도권에서도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었다. 세월에 찌든 얼굴과 때에 찌든 점퍼들이 군내 나는 입김을 내뿜었다. 카키색 야상을 입은 노인이 출입문 입구에 서서 외쳤다. 이거 서울역 가는 거야? 칠면조처럼 늘어진 목살 위에 벌겋게 충혈된 눈이 뒤룩거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니미, 귓구멍에 좆대가리를 처박았어? 서울역 가냐고? 어? 노인은 주안역에서 하차하는 승객들의 물결에 휩쓸려 충치처럼 대롱거렸다. 뭐야 씨팔, 뭐야 이거. 문이 닫히기 전 노인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권재범은 한 달 전만 해도 2호선을 타고 출퇴근했다. 2호선 승객의 평균 연령은 1호선보다 훨씬 젊고, 최소한 정신 나간 칠면조가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상고를 졸업한 뒤 새마을금고에 취직한 권재범은 7년 전 합정역 근처의 건강식품 통신판매업체의 자금 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통신판매는 다단계 판매와 더불어 90년대 마케팅업계의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권재범을 스카우트한 회사는 규모는 작지만 영업력이 탁월했다. 건강식품 붐을 타고 녹즙과 오리진액 제품이 히트를 치며 매년 매출이 150% 이상 뛰었다. 권재범은 성실함을 인정받아 총무부장으로 승진했다. 회계뿐 아니라 제조업체 관리까지 책임지는 회사의 핵심 직위였다. 마흔일곱 살 권재범에게 불경기는 남의 일이었다.

모든 것은 친구의 빚보증과 함께 시작되었다. 불행은 도적처럼 온다.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친구가 원룸 임대사업을 벌이다가 1992년 말부터 시작된 중소기업 줄도산 사태에 휩쓸릴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일이 터지자마자 채무의 바통을 자신에게 넘기고 사라질 거라곤 더더욱 예상할 수 없었다. 한순간이었다. 친구가 도산 직전에 돈을 싸들고 동남아로 대피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요즘 동남아에는 그런 인간 말종들이 활개치고 있었다.

목동의 32평짜리 아파트 거실에 차압 딱지들이 붙던 날, 권재범은 회사의 판매대금을 횡령했다. 어음과 외상이 없는 통신판매업체는 현금 유동성이 좋은 편이었다. 권재범은 급한 대로 빌려 쓰고 사채를 내서라도 마감일에 금액을 맞춰 놓겠다고 생각했다. 횡령 금액이 1억을 넘자 후배가 눈치를 챘다. 권재범은 후배와 합정동 삼겹살집에서 마지막 술잔을 기울였다.

“내일 사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형사고발 들어갈 겁니다.”

“기다려 주면 안 되나?”

“제 입장도 생각해 주세요. 저도 공범이 되는 겁니다.”

“알겠네.”

“부장님을 존경하니까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자수하세요.”

“그렇겐 못해. 지금은 안 돼.”

“그럼 내일 출근하지 마세요.”

“고마워.”

“이제 어쩌실 겁니까?”

권재범은 술집 창 밖에 떠 있는 밤하늘을 보았다. 거리에선 꽃샘추위의 기습을 받은 행인들이 옷깃을 세운 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곳, 가야 할 곳, 갈 수 있는 곳, 권재범은 그런 것들이 애틋했다.

“기다려야지. 간단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땐 그냥 기다려 보는 거야. 자수를 하든, 도망을 치든, 일단은 시간이 필요해.”

“너무 오래 기다리진 마십시오.”

그날 이후 권재범의 일상은 1호선의 지린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불심검문이 언제 있을지 친절히 알려주는 영등포역 뒷골목의 만화방, 편의시설이라고는 욕실의 수도꼭지밖에 없는 구로역 인근의 여인숙 등을 전전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한 갑에 600원 하는 88라이트 담배를 끊었다. 기다림의 유통기간은 딱 한 달이었다. 한 달 만에 권재범은 수배를 피해 도바리치는 생활에 진력이 나 버렸다. 자수를 하든 자살을 하든 뭔가를 해야 할 시점이었다. 권재범은 자수나 자살 대신, 전혀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전철이 인천역에 도착했다. 권재범은 봄 햇살이 쏟아지는 옆 앞 광장으로 나섰다. 아지랑이의 장막 뒤편으로 차이나타운의 패루가 일렁였다. 권재범은 공중전화기에 30원을 넣고 만화방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늙은이가 일러준 전화번호를 눌렀다. 전직 사장이었다는 그 늙은이는 자수하는 대신 죽는 날까지 숨어살겠다고 말했다.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일전에 전화했던 사람입니다. 권재범이라고.”

수화기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금속성이었다. 묵직하고 거칠었다.

“벌써 물건을 찾소?”

“벌써라니요. 제 사진을 사서함에 보낸 게 일주일 전인데요. 며칠이면 된다고 했잖습니까.”

“그건 다 됐어. 하지만 기다리슈. 확인절차라는 게 필요하니까.”

“무슨 확인이요?”

“막말로 당신이 짭새인지 촉새인지 어떻게 알아? 확신이 서야 돼. 다음 달에 찾으러 오슈.”

“사정이 급해요. 100만 원 더 드릴게요.”

“그럼 내일 다시 전화해 보슈.”

“여기 인천역입니다.”

“뭐? 어딜 기어와? 죽으려고 환장했어?”

“지금 그리로 가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받아야겠어요. 아니면 자수해서 다 불어버리든가.”

“허. 나 참. 이런 씨팔.”

“이 근처인 거 알아요. 가르쳐 주세요.”

“지랄이 하늘을 뚫는군.”

권재범은 수화기 속의 목소리가 속삭인 방향으로 걸어갔다. 중부경찰서를 마주보고 있는 대한통운의 흉물스러운 창고를 지나 중구청 쪽으로 방향을 틀자 작은 상가 건물이 나타났다. 페인트칠이 다 떨어져 나간 건물 2층에 ‘세한 인력개발’이라 쓰인 작은 창문이 보였다. 권재범은 상가 입구로 다가갔다. 머리를 짧게 깎고 기지바지에 남방을 입은 젊은이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의 고소한 향이 코를 간질였다. 젊은이는 어깨가 두툼하고 목이 짧아서 압축기로 눌러 놓은 것 같은 체형이었다.

“권띠?”

청년이 혀 짧은 소리로 물었다. 압축기에 눌릴 때 혀마저 줄어든 것 같았다. 권재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다와.”

권재범은 청년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중간쯤에 이르러 청년이 권재범의 멱살을 잡았다. 정권이 계란만 한 험악한 손이 목울대를 눌러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왜 와떠? 띱때끼야. 두글라구.”

청년은 한 손으로 권재범의 멱살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점퍼와 바지를 뒤졌다. 지갑에는 만 원짜리 몇 장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흔한 가족사진 하나 없었다.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는 친구 명의의 차명계좌에 숨겨 놓았던 현금이 편지봉투에 가득 들어 있었다. 청년은 두툼한 봉투를 만진 뒤 미소를 지었다. 잇몸 밑에 노란 담뱃진이 보였다.

청년이 권재범의 뺨을 두드렸다. 잽을 날리듯 짧게 끊어 한 대, 두 대, 세 대, 손바닥의 굳은살로 아래턱을 가격했다. 권재범은 모욕감보다 통증을 먼저 느꼈다. 충치 때문에 양쪽 어금니가 위아래 할 것 없이 부서져 뿌리만 남아 있었다. 잇몸이 늘 부어 있어서 작은 충격에도 맹렬하게 반응했다.

청년이 사무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대여섯 평 정도 되는 작은 사무실에 책상 하나, 소파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소파 밑의 쟁반에서 된장찌개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고기를 많이 넣어 끓인 듯 비릿하고 느끼한 냄새였다. 책상에는 비대한 중년 남자가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역광을 받아서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남자가 입을 열자, 조금 전에 들었던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 오셨군.”

남자는 권재범에게 소파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렇게 서두르면 재미 없는데.”

“사정이 있어서요.”

“우리 고객 중에 사정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그래도 다들 침착하게 기다리지.”

남자가 서랍에서 봉투를 꺼냈다.

“일찍 넘겨 드리는 거니 급행료를 받아야지. 얼마 더 준다고 했더라? 100만 원?”

“네.”

“150 더 주슈. 도합 250.”

남자는 권재범의 주머니 속에 있는 현금 액수를 꿰뚫어보는 듯했다. 권재범은 딱 250만 원을 봉투 속에 넣었다. 그리고 지갑 속의 4만 원, 계좌에 남아 있는 30여 만 원, 인생이란 수렁에 떠 있는 마지막 지푸라기들.

“알겠습니다.”

남자가 건네준 봉투 속에는 새로 코팅된 주민등록증과 등본 세 장이 들어 있었다. 빳빳하고 반짝거리는 주민등록증의 사진 속에서 권재범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회사에 다닐 때 여권을 만들기 위해 찍은 증명사진이었다. 권재범은 불과 몇 달 전에 찍은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사진 옆에 고영태라는 낯선 이름과 낯선 주민번호가 찍혀 있었다. 권재범보다 두 살 많은 고영태의 주소지는 서울시 강서구 화곡4동 798─22호였다. 남자가 말했다.

“권씨. 똑똑히 들어 둬. 여기서 나가는 순간부터 당신 이름을 잊어버려. 잊은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잊어버리란 말야. 뇌 속을 빡빡 밀어서 깨끗이 씻어버려. 당신은 이제 고영태야.”

“뭐 하는 사람인가요?”

“몰라. 분명한 건 어디선가 직장도 다니고 가족도 있고 버젓이 잘살고 있는 양반이라는 거야. 당신만 안 만나면 돼. 서로 만나지만 않으면 대한민국에 고영태가 둘이면 어떻고 열이면 어떻겠어? 근데 이 고마운 아저씨 이름을 빌려서 살려면 청소를 좀 해야 돼.”

“청소요?”

“그래. 짭새가 냄새 못 맡게 흔적을 지우는 걸 청소라고 불러. 수배자가 꼭 해야 될 일이지. 낮이건 밤이건 청소, 청소, 또 청소, 아주 대가리 속에 팍 박아 두고 씹을 할 때도 잊어선 안 돼. 아, 아, 자기야, 멋진데, 이름이 뭐야…… 이런다고 대뜸 권재범이요 하면 안 된다는 거지.”

“청소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돌아가자마자 숫돌을 하나 사서 손가락 지문을 갈아버려. 피를 한바가지 쏟을 만큼, 아주 존나게 열심히 해야 돼. 불공 드리듯이 저녁에 갈고, 반창고 붙이고, 아침에 또 갈고, 이렇게 며칠만 하면 돼. 정규직으로 취직할 생각은 하지 마. 그러면 통장도 개설해야 되고 보험도 들어야 되고 어떻게든 뽀록나게 돼 있어. 어디 일당을 받는 노가다나 아르바이트를 뛰어. 그런 덴 주민등록증만 확인하고 땡이니까. 할 수 있겠어?”

“예. 어렵지 않은데요.”

“존나 어려워, 이 물정 모르는 아저씨야. 좌우당간 뽀록날 짓은 하나도 하지 말란 말야. 절대 사진 같은 거 찍지 말고 삐삐도 만들지 마. 집이 어디라거나, 자식이 졸업식 한다거나, 마누라 젖가슴이 밤톨만 하다거나, 하여간 진실이 될 말은 하지 마. 당신, 진실을 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아? 거짓으로 사는 건 나쁜 게 아니라 어려운 거야. 존나, 존나, 존나의 세제곱 존나만큼 어려운 거야.”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여기로 다시 오거나 여기 일을 떠벌리는 날엔 고영태라는 이름으로도 살 수 없을 거야. 알지?”

남자는 그때까지 문 앞에 서 있던 덩치 큰 젊은이를 가리켰다.

“저 놈이 원래 수다가 많은 놈이었어. 하여간 잠시도 못 참고 재잘재잘 댔지. 이 바닥에선 그런 놈을 가만 두지 않거든. 몇 년 전에 새끼손가락 하나 잘린 뒤로는 하루에 몇 마디밖에 안 해.”

“혀도…… 좀…… 잘린 겁니까?”

“아니. 점심 먹다가 씹었대.”

권재범은 청년과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상가 현관문을 나설 때 청년이 작별인사를 속삭였다. 다시는 오지 마, 띱때끼야. 해가 서쪽으로, 낡은 횟집들이 모여 있을 월미도 앞바다 쪽으로 기울어졌다. 아지랑이를 피워내던 거리가 차갑게 식어 갔다. 권재범은 인천역으로 가서 아내와 아들이 사는 반지하 사글세방에 전화를 걸었다.

“별일 없어?”

“매일매일이 별일이야.”

“나, 일할 거야. 매달 조금씩 보낼게.”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기한이는 대학 못 가겠지?”

아내의 질문을 듣고 권재범은 숨이 막혔다. 만화방 소파나 여인숙 장판에 누워 있을 때도 고3짜리 외아들의 이름만 떠오르면 숨이 막혔다. ‘권기한’은 권재범의 가슴에 파인 거대한 공동(空洞)이었다.

“끊자.”

“언제 올 거야?”

“밤에 한번 갈게.”

“괜찮아?”

“괜찮아.”

 

 

1993년 6월 22일─자수 하루 전

 

밤이다. 빗줄기가 거미줄처럼 반짝인다. 장마전선이 상륙하면서 어제부터 수도권에도 간간이 보슬비가 내렸다. 한동안 28도를 넘나들던 낮 최고기온이 오늘은 25도로 떨어졌고 밤에는 14도까지 내려간다고 기상청이 예보했다. 차갑고 스산한 밤이다.

권재범은 신문로2가의 골목들을 어슬렁거렸다. 어둠과 습기가 모든 감각기관에 들러붙었다. 방향감각을 잃은 권재범은 며칠 전에 직접 위치를 확인한 건물을 찾지 못했다. 벌써 11시가 넘었다. 그가 11시 30분에 사무실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권재범은 더욱 조급해졌다.

11시 10분, 건물을 찾았다. 가정집을 개조한 출판사와 맞붙어 있는, 경희궁 뒤편의 허름한 5층 건물이었다. 권재범은 지하주차장 입구의 담벼락에 기대 사물의 경계를 지우고 있는 빗줄기를 노려보았다. 멀리 광화문 대로에 솟아 있는 빌딩들이 검고 걸쭉한 덩어리로 보였다. 네온사인마저 파스텔 톤으로 흐려졌다. 비옷 속으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권재범은 위조 주민등록증을 받은 지 사흘 만에 부천 상동에 있는 완구공장에 잡역부로 들어갔다. 일당을 따져 보니 한 달 꼬박 일하면 60만 원 정도 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점심을 회사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쪽방의 월세 15만 원을 제하면 월급에서 45만 원이 남는다. 아침은 건너뛰고 저녁을 김밥으로 때우면 수중에 40만 원이 떨어진다. 권재범은 그 40만 원을 한 푼도 건드리지 않고 집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권재범은 트럭에 실려온 바비 인형의 팔, 다리, 머리통을 컨베이어 벨트에 날랐다. 스물을 갓 넘긴 여자아이들이 고정핀에 머리통을 끼우고 코발트색 눈알을 박았다. 팔, 다리, 머리와 가슴이 불룩 솟은 몸통이 조립되는 순간, 인형은 플라스틱의 무표정한 질감에서 벗어나 음란해졌다. 하루 종일 눈알을 박는 여공보다, 그들이 박스에 집어던지는 미색의 나신들이 더 생명체에 가까웠다.

일주일 일하고 난 뒤 권재범은 공장에 뭔가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경기가 좋든 안 좋든, 제조업체는 일말의 생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생산성을 높이자는 사장의 훈시, 매출 분석을 통한 생산라인 조정, 반장들의 독촉, 불량률 집계, 재고물자 관리, 이런 것들이 필연적이다. 한때 100만불 수출탑을 받고 국내 완구시장의 50%를 점유했다는 ‘태용실업’에는 이런 것들만 빠져 있었다.

제품 상자를 운반하는 잡역부는 권재범과 대학생 아르바이트 두 명뿐인데도 일이 많지 않았다. 재고상자들이 거미줄을 뒤집어쓰고 창고에서 썩어 가는 원인이 과잉생산 때문은 아니었다. 작년과 올해 사이 생산라인의 절반 이상이 폐쇄되었다. 석 달에 한 번씩 대량감원을 단행하여, 전성기에 비하면 직원이 10분의 1 수준이라고 했다. 잔업도 없고 휴일근로도 없었다. 태용실업은 장사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회사였다. 폭풍우 치는 바다에 표류하도록 방치해 놓은 유령선이었다.

권재범은 완구가 신발이나 섬유와 마찬가지로 사양산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소기업들이 줄도산하는데도 은행은 돈놀이에 바쁘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 해도 공장이전을 검토하든가, 업종 다변화를 꾀하든가, 하다못해 직원 총회 한 번 열지 않고 이렇게 방치해 놓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회사에 들어온 지 열흘쯤 되었을 때, 권재범은 간식으로 나온 보름달 카스텔라를 씹으며 사무실 여직원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사무실도 할일 없는지 오후에는 저희들끼리 노닥거리기에 바빴다. 창고 옆의 커피 자판기 앞에서 경리를 보는 한경화라는 직원과 이름을 모르는 또 한 명이 굳은 표정으로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언제 그만둬?”

“25일에. 월급 받고 바로.”

“그래. 잘했다.”

“너는?”

“나도.”

그들이 돌아가려 할 때 권재범은 한경화를 불렀다. 눈 밑에 주근깨가 있는 이십대 중반의 이 아가씨는 세상 모든 일에 호기심이 많았다. 아저씨는 왜 이런 일을 해요? 권재범이 회사에 들어온 첫날, 그녀가 콜라를 건네며 물었다. 사업이 망해서라고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권재범은 그녀의 눈에서 연민을 읽었다. 그 후로 한경화는 권재범에게 사근사근했다.

“경화씨. 얘기 좀 해. 바빠?”

“바쁘긴요.”

“회사 그만둘 거야?”

한경화가 한숨을 쉬었다. 루주를 바른 작은 입술이 뾰족 튀어나왔다.

“영태 아저씨. 아저씨가 어떻게 여기 들어왔는지 아세요? 2년 전에 제가 입사했을 때 박스 나르는 아르바이트만 열 명이 넘었어요. 아홉 명, 여덟 명, 일곱 명, 점점 줄어드는데 일감이 같이 줄어들어서 뽑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기가 막히죠. 결국엔 한 명도 남지 않았어요. 박스가 공장에고 마당에고 자꾸 치이니까 어쩔 수 없이 아저씨랑 대학생 알바 한 명 뽑은 거예요.”

“회사가 망하나?”

한경화가 눈을 치켜떴다. 흰자에 마스카라 조각이 보였다.

“곧 망해요. 내가 직원들하고 데모라도 할까 하다가 남은 인생이 아까워서 참고 있어요.”

“사장이 돈 싸들고 튀려 그래?”

“아뇨. 사장은 아무것도 안 해요. 횡령도 안 하고, 주식이나 자산을 몰래 팔지도 않고, 추가 대출도 안 받고, 비자금도 안 만들고.”

“그럼 어쩔 수 없지. 사정이 어려운 걸 사장 탓만 할 순 없잖아.”

“아저씨도 돈 받을 수 있을 때 빨리 그만두세요.”

“내 걱정 해주는 거야?”

“아저씨는 우리 아빠랑 닮았어요. 아빠 이름도 영태예요. 한영태.”

“이름 좋네.”

“아저씨,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건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알았죠?”

“내가 말할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총무과에 무스를 처바르고 다니는 뺀질뺀질한 남자 있잖아요. 김영석 대리라고. 걔가 요즘 저한테 치근덕거리는데, 지 자랑이 장난이 아니에요. 지가 사장의 비밀을 다 알고 있고, 사장 덕택에 한몫 챙길 거래요. 제가 자꾸 캐물으니까 은근슬쩍 흘리더라고요.”

권재범은 수시로 사장실을 드나드는 양복쟁이 애송이를 떠올렸다. 회사 차를 제 차처럼 쓰고 어디서나 싱글벙글거리는 넉살 좋은 놈이었다.

“복잡해서 잘은 몰라요. 사장이 남의 이름으로 건축자재 같은 걸 유통하는 회사를 차렸대요. 돈 같은 건 필요 없대요. 회사 돈을 은행에 넣고 어음을 받은 뒤엔 도로 뺀대요. 그 어음으로 물건을 사서 팔아넘기고 판매 대금을 사무실 금고 안에 넣어 둔대요. 그 새끼가 사장 돈 심부름을 도맡아 해요.”

“그게 가능해?”

“벌써 한 십억 벌었대요. 사장이 매일 밤 혼자 차를 몰고 그 회사 사무실로 가서 돈을 확인한대요.”

“미친놈이군. 쇠고랑 차겠어.”

“냅둬요. 어차피 25일이면 빠이빠이예요.”

권재범은 사장이 벌이는 미친 짓을 분석해 보았다. 망하는 회사를 이용해 한몫 챙기도록 잘 설계된 범죄였다. 단순 횡령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태용실업의 돈을 빼돌리면 금방 탄로가 나기 때문에 사장은 우회로를 택했다.

차명으로 유령회사를 차린다. 태용실업 자금을 유령회사 계좌에 수시로 넣었다 빼서 유령회사 명의의 약속어음 용지를 받는다. 돈을 잠깐 넣었다 빼는 것이므로 횡령죄에 걸릴 염려가 없다. 그렇게 받은 약속어음으로 건축자재를 사고, 이를 헐값에 도로 팔아넘긴다. 판매 대금을 계좌에 넣을 순 없다. 본명으로 하면 금방 탄로나고, 차명으로 해도 곧 시행될 금융실명제 때문에 안전하지 못하다. 사장은 비자금을 금고에 보관했다가 한꺼번에 들고 튈 것이다.

유령회사가 돌린 ‘딱지어음’은 만기일에 휴지조각이 된다. 그러나 차명으로 등록된 유령회사의 소유주를 파악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태용실업은 언제 망하든 지분포기 각서를 쓰고 법정관리 신청을 하면 그만이다. 누가 사장에게 수십억대의 비자금이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이 범죄의 탁월한 점은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다. 금융당국과 검찰이 딱지어음 관련 서류에 파묻혀 있는 동안 사장은 천천히 돈다발을 포장하여 은신처를 찾으면 된다. 어쩌면 영원히 미제 사건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가명이 대한민국에 돌아다니는 걸까. 얼마나 많이 사기와 협잡이 사람들을 물어뜯는 걸까. 세상은 거대한 원심분리기다. 한쪽에는 주민등록증을 위조해 월급 60만 원을 버는 쭉정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회사를 위조해 수십억을 버는 알맹이가 있다. 알맹이에겐 알맹이의 밥그릇이 있고 쭉정이에겐 쭉정이의 밥그릇이 있다.

열흘 전 왼쪽 송곳니 옆에 붙어 있는 어금니가 치통을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해머가 심장박동에 맞춰 잇몸을 두드렸다. 권재범은 밤새 미지근한 물을 머금고 신음했다. 침과 섞여 끈끈해진 물이 베개를 흠뻑 적셨다. 그의 좌우 측면 구강은, 뿌리까지 썩어버린 어금니들 사이에 반쯤 부서진 골조물들이 서 있는 황무지였다. 이빨이 그의 십자가였다. 어릴 때는 돈이 없어서 치과에 가지 못했고, 커서는 두려움 때문에 못 갔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가끔 들르긴 했지만 금니를 박거나 아말감을 씌우는 장기적인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1분이 1시간 같은 밤을 보내고 거울을 보니 잇몸이 밤톨만큼 부어 있었다.

권재범은 일을 끝내기 무섭게 공장 근처의 치과를 찾아갔다. 이런 이빨 처음 봅니다……. 의사는 입안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보험이 없으니 아프지만 않게 해주세요……. 수중에 남은 마지막 10만 원이 치과 카운터 너머로 사라졌다. 권재범은 저녁을 굶고 쪽방에 누웠다.

남의 이름으로 사는 40만 원짜리 삶의 유효기간이 끝났다고 권재범은 느꼈다. 남의 이름으로 사는 건 누구 말대로 존나, 존나, 존나의 세제곱 존나만큼 어려웠다. 1년, 2년, 10년, 20년, 공장에서 쪽방으로, 쪽방에서 공장으로, 또는 공사판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되는 반복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권재범은 부어오른 잇몸을 계속 핥았다. 유선형으로 솟아오른 부위를 혀끝으로 누르면 통증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온몸이 저릿하고 눈에 불똥이 튀는 그 순간, 만 원 다발이 가득한 사장의 금고가 떠올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흐린 영상처럼 떠오르던 그 돈다발은 새벽이 깊어 가자 손에 닿을 듯 선명해졌다. 지폐의 날카로운 모서리와 누릿한 종이냄새까지 생생했다.

권재범은 다음날부터 사장의 일과를 관찰했다. 사장은 오후 2시에 출근하여 머리가 반질반질한 김영석 대리의 보고를 받는다. 저녁에 공장을 나섰다가 밤 10시경 경비만 남아 있는 공장으로 돌아온다. 밤 10시 30분경 혼자 차를 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주말을 빼고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한밤중에 공장문을 나선 사장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라고 권재범은 확신했다. 권재범은 한경화에게 유령회사 사무실의 주소를 슬쩍 물어보았다. 사무실 관리비가 태용실업 계좌에서 바로 나가진 않겠지만 경리 담당인 한경화가 어떤 식으로든 결재할 것이 분명했다. 한경화는 신문로2가 한동빌딩이라는 이름을 내뱉었다. 나흘 뒤 권재범은 한동빌딩을 찾아냈다. 사장은 정확히 11시 30분에 그랜저를 몰고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고, 몇 분 뒤 4층 사무실에 불이 들어왔다. 그동안 건물에는 다른 인기척이 없었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가는 엿가락 같은 비의 몸뚱이가 바람에 밀려 비스듬하게 누웠다. 투둑투둑, 길바닥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커졌다. 권재범은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습기가 폐포 가득 들어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 사장의 그랜저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권재범은 야구방망이를 들고 따라 들어가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비옷에 묻어 있던 물방울이 우레탄을 깐 주차장 바닥으로 똑똑 떨어졌다. 사장이 차 밖으로 나왔다. 권재범은 사장에게 달려들어 야구방망이로 뒤통수를 갈겼다. 두개골의 둔탁한 감촉이 방망이 손잡이로 전해졌다. 사장이 희미한 신음을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권재범은 어깨에 멘 40리터짜리 등산용 배낭에서 테이프와 노끈을 꺼내 입을 막고 온몸을 포박했다. 양손을 뒤로 돌려 묶을 때 사장이 통증을 느끼는지 어깨를 움찔했다. 권재범은 사장을 어깨에 메고 계단을 통해 4층으로 올라갔다. 한기가 사라지고 온몸에 땀이 쏟아졌다.

4층 복도에 대영건업이라는 현판이 붙은 사무실 문이 보였다. 권재범은 사장의 양복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과 함께 열쇠꾸러미가 손에 잡혔다. 제일 큰 열쇠를 자물쇠에 집어넣자 구멍이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권재범은 사장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골랐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고층빌딩의 희미한 불빛들이 사무실 바닥을 기어다녔다. 큰 책상, 캐비닛 세 개, 접대용 소파, 전화기와 팩스, 386DX 컴퓨터가 어둠에 젖어 있었다. 권재범은 금고를 찾기 위해 불을 켰다. 불이 들어오기 무섭게 사장이 눈을 떴고 책상 뒤에 있는 신형 금고가 광택을 쏟아냈다. 권재범은 금고를 찬찬히 살폈다. 번호를 돌리는 다이얼이나 열쇠구멍이 없는 희한한 금고였다. 굳게 닫힌 아가리 위에 뭔지 모를 전자장치만 붙어 있었다. 권재범은 배낭에서 식칼을 꺼내고 사장의 입을 막은 테이프를 떼어냈다.

“나 알아보겠어?”

사장은 권재범을 올려보기 위해 눈을 희번덕거렸다.

“당신…… 우리 공장에 다니지?”

“그래. 나 고영태야. 박스 나르는 고영태. 내 이름 잘 기억해 둬.”

“어쩌려고 이래? 당신은 곧 잡혀. 일주일 안에 잡혀!”

테이프와 함께 입술 피부가 떨어져 나갔는지 사장은 피를 흘렸다. 권재범은 형광등을 바라보며 까르르 웃었다.

“그래, 비자금 훔쳐간 놈 잡아 달라고 신고한단 말이지? 사기 친 돈 뺏어갔다고?”

사장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우리 좋게 해결하자고. 죽이지만 마. 날 죽이면 당신은 진짜 오도 가도 못해. 당신을 아는 사람이 회사에 널렸어. 이틀 안에 살인범 고영태 사진이 전국에 쫙 깔릴 거야.”

“사진은 안 깔려. 등본을 뒤져 봤자 이상한 얼굴만 나올 거야. 기껏해야 몽타주 정도지. 몽타주로도 날 찾을 순 없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을 거거든. 다행히도 죽일 마음은 없으니까 안심하라고. 한 가지만 대답해. 금고 어떻게 여는 거야?”

“저건 지문 인식장치가 달려 있는 최첨단 금고야. 내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찍어야 열린다고. 한몫 떼 줄 테니까 이 손 좀 풀어 줘.”

“지랄하지 마.”

권재범은 사장을 금고까지 질질 끌고 갔다. 사장이 권재범의 오른손에 들린 식칼을 보며 말했다.

“이러지 마. 내가 이런 짓 하는 것도 다 아들놈 때문이야. 당신도 자식이 있지?”

권재범의 가슴에 뚫린 구멍에 찬바람이 지나갔다. 아들의 환영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아빠, 뭐 하는 거야 지금?

“아들? 아들이 뭐 어쨌다고?”

“아들놈이 고3인데 공부를 못해. 아주 망나니야. 돈 천만 원만 쓰면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 알다시피 올 초에 부정입학 사건이 터졌잖아. 다음 입시에선 브로커도 못 구해. 그래서 기를 쓰고 돈을 모으는 거야. 유학 보내 줄려고.”

권재범의 아들은 중학교 때부터 전교 10등 밖을 나가 본 적 없지만 대학에 가지 못한다. 사장의 아들은 개망나니 오렌지족인데 미국 유학을 간다. 10년 후 이 두 놈의 인생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권재범은 치통을 느꼈다.

“제발 이 손 좀 풀어 줘. 금고 열어 줄게.”

“묶여도 누를 수 있잖아?”

“지문을 정확히 눌러야 돼. 안 그러면 경보가 울린단 말야. 경찰이 오면 당신도 나도 개털 신세 되는 거야.”

권재범은 사장의 손을 풀었다. 사장이 지문인식장치에 엄지손가락을 눌렀다. 찌르르 소리를 내며 금고문이 열렸다. 빳빳한 만 원짜리 신권이 그 안에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됐어. 물러서.”

“잠깐만. 돈 좀 확인할게.”

사장은 오른손을 금고의 어둠 속에 깊이 담갔다.

“야 이 개새끼야. 뒤로 꺼져!”

사장이 검은 물체를 꺼냈다. 권재범이 식칼로 사장의 손목을 때리는 순간, 가스총이 발사됐다. 쉭 소리와 함께 과녁을 잃은 매캐한 가스가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권재범은 사장의 어깻죽지를 찔렀다. 사장이 뒤로 넘어졌다.

가슴의 빈 구멍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두 달 동안 농축된 울분과 슬픔이 격랑이 되어 흘렀다. 의식이 매끄러운 경사면을 타고 어둠의 아가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감정의 파고가 너무 격렬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손에 걸리는 건 뭐든지 부숴버리고 이 충치 같은 세상과 함께 자폭하고 싶었다. 안 돼, 안 돼! 권재범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미끄러지는 의식을 잡아 보려고 손을 뻗었지만 간발의 차로 놓치고 말았다. 갑자기 주위의 모든 것이 하얘졌다. 권재범은 사장의 몸뚱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어디를 찌르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칼날이 푹푹 빠지기도 하고 갈비뼈 같은 것에 걸리기도 했다. 권재범은 쾌감을 느꼈다.

“그래, 너는 사장. 니 아들은 유학생. 나는 버러지. 인간 말종. 노가다나 하다가 죽을 인생. 벽에 똥칠하면서 혼자 죽을 인생. 내 이름으로 살지도 못하고, 집에도 못 가고, 아들 얼굴도 못 보고. 이런 씹새들. 이런 개좆 같은 세상. 그래, 나는 병신. 나는 횡령범. 나는, 나는, 이런 씨팔, 아이구 하느님, 나는, 나는, 살인자!”

정신을 차려 보니 사무실이 피의 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권재범은 배낭 지퍼가 찢어지도록 돈을 담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사장의 그랜저는 가속을 해도 차체가 흔들리지 않았다. 권재범은 아내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아내와 아들이 사는 반지하방은 골목을 걸어가는 사람의 발부리께에 창문이 나 있었다. 권재범은 무릎을 꿇고 창문을 두드렸다. 머리를 산발한 아내가 창문을 열었다.

“빨리 나와. 줄 게 있어.”

몸뻬를 입은 아내가 골목으로 나왔다. 두 달 만에 눈가의 주름이 두 배로 늘어난 것 같았다. 권재범은 아내에게 배낭을 건넸다.

“받아. 그거면 기한이 대학 보낼 수 있을 거야. 한동안은 숨 좀 쉬면서 살겠지.”

“어디서 났어?”

“비자금이야. 알려고 하지 마.”

“여보, 인제 어떡할 거야?”

“인혜야…….”

권재범은 아내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 자수할 거야.”

아내가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

권재범은 그랜저를 몰고 여의도 고수부지로 갔다. 저녁부터 내리던 가랑비가 안개비로 변해 있었다. 검은 물, 검은 하늘, 검은 운무가 세상을 가득 메웠다. 권재범은 63빌딩 인근의 편의점에서 88라이트를 사왔다. 하얀 연기가 검은 안개를 뚫고 피어올랐다. 두 달 만에 맛보는 담배가 머리에 스파크를 일으켰다. 졸음이 달아나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성기가 살짝 발기했다. 권재범은 가짜 주민등록증을 태워버렸다. 한 달짜리 가짜 인생이 불길에 사라졌다.

날이 밝자마자 권재범은 영등포 경찰서에 자수했다. 길어야 몇 년 살고 나올 횡령범 권재범의 이름으로.

 

 

1993년 7월 23일─자수 한 달 후

 

영등포 구치소에는 냄새의 낙인이 찍혀 있다. 재소자들의 땀 냄새, 발 냄새, 지린내가 침상 바닥에 눌러붙어 밤새 발효된다. 기상나팔과 함께 거실 문이 열리면 독한 증기가 복도로 쏟아진다. 여름은 냄새의 감옥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권재범은 고영태라는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사건 다음날 경찰은 고영태의 화곡동 집이나 회사로 들이닥쳤을 것이다. 고영태는 자신의 알리바이에 대해 일관된 진술을 했을 것이다. 경찰은 가짜 고영태의 사진과 연고를 찾아 헤맸을 것이다. 사진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쯤 이름도 없는 몽타주들이 전국 경찰서와 파출서의 벽면에 걸려 있을 것이다.

선고공판이 얼마 남지 않았다. 권재범은 더러운 인간들과 세탁기에 들어가 몇 바퀴 돌고 난 뒤 배수구로 빠져나올 것이다. 자수를 했으므로 형기가 최소한 몇 달은 단축될 것이다. 권재범은 감옥 문 밖의 푸른 하늘과 직사광선을 떠올렸다. 아낙네들이 아파트 베란다에 빨래를 널고, 햇살에 두드려 맞은 옷들이 한 점의 얼룩도 없이 표백된다.

복도 끝에서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찍찍대는 운동화와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섞여 들렸으므로, 권재범은 형사와 교도관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보는 형사 두 명과 교도관 두 명이 감방 문을 열었다. 여름 근무복을 빳빳이 다려 입은 교도관들은 표정이 경직돼 있었다.

교도관들이 쇠사슬로 연결된 이상한 가죽 벨트를 들었다. 양손에 가죽을 채우고 쇠사슬로 상체를 포박했다. 권재범은 저항하지 않았다. 머리를 밤송이처럼 깎은 덩치 큰 형사가 말했다.

“이게 중범죄자들이 차는 혁수정이야.”

권재범은 물었다.

“중범죄라니요?”

“그래. 중범죄자들. 쉽게 말하면 살인자들.”

교도관들이 권재범의 허리에 챔피언벨트만 한 가죽 띠를 둘렀다. 권재범은 교도관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로 감방을 빠져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교도관들이 권재범의 휘청거리는 몸뚱이를 어깨로 떠받쳤다. 권재범이 묻지 않았는데도 덩치 큰 형사는 계속 지껄였다.

“여기 있는지도 모르고 한참 찾았잖아. 당신 때문에 좆뺑이쳤어. 복날 개마냥 헐떡대면서 돌아다녔다고.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해?”

권재범은 대꾸하지 않았다.

“난 말이야, 당신 이빨에 큰절이라도 하고 싶어. 공장에서도 이빨이 아파서 고생했다며? 공장 근처 치과를 뒤지니까 바로 나왔어. 당신 몽타주를 보면서 치과의사가 그러는 거야. 자긴 의사생활 하면서 이런 이빨 처음 봤다고. 그래서 그 진료기록을 수도권 치과에 다 뿌렸지. 얼굴 몽타주에 이빨 몽타주 첨부해서. 이빨 몽타주가 아주 예쁘게 나왔어. 갈라진 논바닥하고 비슷해. 며칠 전에 합정동 치과에서 연락이 왔어. 자기가 진료한 권재범이란 인간 이빨하고 똑같다고. 그렇게 엉망인 이빨은 흔치 않다고.”

권재범은 주저앉았다. 교도관들이 억지로 일으켰다.

“당신 충치가 하도 진기명기여서 찾을 수 있었어. 당신 이빨은 참 정직해.”

 

《문장웹진 7월호》

 

 

 

[창작 노트]

 


요즘 90년대의 신문들을 읽고 있다. 90년대는 지나간 시대와 다가올 시대 사이에 놓인 어두운 터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눈을 질끈 감고 터널을 달렸고, 무언가를 놓친 채로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지금 불안하고 두렵다면, 잃어버린 것들이 터널 안에 있기 때문이다. 불안과 공포를 양식으로 삼는 대중작가에게 90년대만큼 매력적인 소재는 없다.

 

나는 다시 터널로 들어가서 어둠 속을 기웃거리고 싶었다. 이유 없는 불안, 과녁을 빗나간 분노, 과장된 슬픔, 터무니없는 희망, 이런 것들이 직조하는 스릴러를 쓰고 싶었다. 이 단편은 나의 조촐한 시작이다. 한 가지만 분명히 해두고 싶다. 후일담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시대를 기억하는 방식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오히려 환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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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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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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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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