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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극작가다

  • 작성일 2011-06-07
  • 조회수 1,822

 

최창근의 쉽고 재밌는 희곡 이야기

[들어가는 글]

 

 

나는 극작가다

 

최창근(극작가)

 

 

 

 

 

1

 

요즘 한 방송사에서 전파를 타고 있는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라는 프로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프로 가수들이 출연해서 경연을 벌인 뒤 청중평가단으로부터 가장 낮은 순위를 받은 한 사람이 탈락하는 서바이벌 연예오락프로인 셈. 소설가 이외수 선생이 각자 개성과 매력을 지닌 자의식 강한 예술가들을 일률적인 점수를 매겨 평가할 수 없다는 문제제기를 해서 더욱 화제가 된 이 프로의 진행방식에 처음엔 나 역시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식의 동물의 왕국에서나 존재할 법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정글자본주의 논리가 판을 치고 조화와 협력, 상생의 길보다는 무한도전을 통한 끝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한국사회에서 또 하나의 괴물 프로그램이 탄생했구나 하는 생각에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이 프로를 볼 기회가 생겨 몇 번 시청하고 나서는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부정적인 측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나가수’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프로 가수들의 선의의 경연장이 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매주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실력과 역량을 겨루는 가수들에게서 자만심이나 매너리즘을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나가수’의 생명력은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듯싶었다.

‘나가수’가 아니었다면 윤복희의 명곡 〈여러분〉을 혼신의 힘을 다해 열창해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기립박수를 받았던 임재범의 황홀한 무대와 가슴이 뭉클할 만큼 너무나 멋지게 박정현식으로 소화하고 해석해 낸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를 만날 수 있었을까. 강호에 숨어 있던 무림의 고수들을 불러내 진검승부를 펼쳐 보이고 있는 ‘나가수’를 보며 엉뚱하게도 나는 한국희곡의 초라한 현실을 떠올렸다. 정확하게 말해서 ‘한국연극’이 아니라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한국희곡’의 현주소 말이다.

 

 

2

 

재작년이었던가. 희곡으로 먼저 데뷔한 후 시와 소설도 왕성하게 발표하면서 1990년대 한국문학의 대표적인 주자로 한 획을 그었던 내가 좋아하는 선배작가가 시나 소설에 비해 현저하게 위축돼 있는 희곡을 살려 보기 위해 시인과 소설가들의 희곡 작품을 한 편씩 모아 작품집을 엮은 적이 있었다.

시집이나 소설집이 나오면 화제가 되고 이슈가 되어 문예지에 평도 실리고 신문기사로도 처리되지만 희곡집은 늘 찬밥신세가 되는 현실을 타개해 보려는 취지였고 그러한 방법을 통해 사그라져 가는 희곡문학의 불씨를 되살려 보자는 좋은 의도였다. 나 역시 선배의 부탁으로 한 월간 문예지에 그 희곡집에 대한 리뷰를 쓰기도 했지만 결국 그러한 취지와 의도는 목표한 만큼 뚜렷한 성과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안타깝게도 이미 희곡은 시와 소설에 비해 주류 문단에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는 소외된 장르였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희곡이라는 장르에 유난히 큰 애정을 품고 있던 그 선배가 그렇게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정작 극작가로 연극 현장에서 희곡을 쓰고 있었던 나는 아주 소극적인 자세로 그저 관망하고만 있었다. 연극계 데뷔 10년의 세월을 통해 희곡이 처한 위치를 뼈저리게 실감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문학의 큰 틀 안에서 희곡은 연극대본의 역할을 겨우 수행하고 있을 뿐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문학의 적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올 초에 일어난 최고은 사건을 통해 그동안 일반인들이 갖고 있던 시나리오 작가는 다들 고액의 작가료를 받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어리석은 편견이었음이 드러났다. 방송드라마 작가도 마찬가지겠지만 시나리오 역시 큰 액수의 작품료를 받는 작가는 투자사로부터 상업성을 인정받은 몇몇 인기작가로 한정돼 있다. 그 나머지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고 싶은 작가들은 아마도 대부분 비슷한 처지에서 부업을 통해 근근이 생활을 이어 가고 있을 것이다.

희곡은 그런 면에서 보면 시나리오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 아예 그 이름이나 명성만으로 일정 정도의 고정관객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작가는 먼 미래에는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대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의 특성상 극단의 힘이나 연출가와 배우의 파워를 통해 어느 정도의 일반관객들을 극장으로 유도해 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판에서 극작가의 위치가 더 더욱 힘이 없고 애매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고 방송드라마가 작가의 예술인 데 비해 연극은 당연하게도 배우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나 소설을 쓰는 친한 친구들을 만나면 그래도 극작가보다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낫다고 자주 토로한다. 시나 소설은 그나마 발표할 지면이 많고 정부나 기업, 재단으로부터 지원도 웬만큼 받을 뿐만 아니라 작가들을 격려하기 위한 상도 많다. 그에 비해 희곡은 공연을 올릴 기회도 많지 않을뿐더러 한 번 공연할 때 받는 고료도 터무니없이 적다. 희곡에 주어지는 문학상은 눈을 씻고 찾아보기도 어렵고 공연을 올리고 나서 희곡집을 묶을 수 있는 출판사도 한정돼 있으며 그것도 자비 출판이 대부분이다. 나 또한 우여곡절 끝에 데뷔 10년 만에야 겨우 첫 희곡집을 묶게 되어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그 사정은 희곡을 쓰고 있는 다른 작가들도 비슷할 터인데 그러니 그야말로 한국의 극작가들은 사각의 지대에 몰려 있는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흔히 말하는 세계적인 극작가가 나올 수 있을까. 대부분의 작가들이 생활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타 장르인 방송드라마나 시나리오 같은 이웃 장르를 기웃거려 보지만 뚜렷한 한계가 있다. 그것도 안 되면 일찍 학교에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극작과도 많지 않다. 그러니까 극작가들은 학생들을 가르칠 때조차 문예창작학과나 연극영화학과 혹은 그 많은 어문학과에 더부살이로 기생하고 있는 셈이다.

 

 

3

 

요즘은 예전보다 희곡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희곡을 한 번이라도 써본 작가들은 좋은 시와 좋은 소설을 쓰는 것보다 좋은 희곡 한 편 써내기가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걸 직접 몸으로 겪어 봐서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많은 작가들이 젊은 시절 시와 소설에 매진하다가 인생의 단맛 쓴맛 다 맛 본 말년에서야 희곡 창작에 손대는 것도 희곡이 재능만으로 쉽게 쓰여질 수 있는 쉬운 장르의 문학이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오는 생생한 체험과 인물에 대한 진정성 있는 통찰력이 필요한 문학임을 우회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단언해서 말한다면 희곡 쪽에도 시와 소설에 견줄 만한 뛰어난 작가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작가들은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대부분 숨어 있다. 현재 한국 연극계에서 활발하게 작업하고 있는 극작가들이 모두 실력 있는 작가들이라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상을 많이 받은 작가들이 훌륭한 작가라고는 더 더욱 말하기 곤란하다.

어떤 작가의 필력과 세계관이나 사상의 깊이를 제대로 짚어 보기 위해서는 연극을 관람하는 데에서 그칠 게 아니라 그가 쓴 희곡을 직접 읽어봐야 한다. 흔히들 좋은 희곡에서 나쁜 연극이 나올 순 있어도 안 좋은 희곡에서 명작이 탄생하긴 어렵다고 말하지만 적어도 한국 연극판 안에서는 그 말이 정답은 아니다. 여러 모로 부족하고 서투른 희곡도 능력 있는 연출가의 손과 배우들의 연기를 거쳐서 수작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실력 있는 작가도 연출과 배우를 잘못 만나면 빛을 보지 못하고 아예 사장되기 쉽다.

어쩌면 한국 연극계 안에서 자신이 지닌 실력 이상으로 지나치게 부풀려져 평가받고 있는 극작가들은 그러한 한국연극의 생리를 영리하게 몸으로 습득한 이들인지도 모른다. 창작과 비평 양쪽에 묘하게 걸쳐 있는 작가들 혹은 장사꾼처럼 권력의 지형을 영악하게 이용할 줄 아는 작가들. 그 작가들의 희곡은 연극판에서만 통할 뿐 연극계 밖으로 벗어나면 동시대의 시나 소설과 비교해서 일반 독자들에게 제대로 회자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면을 빌려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시나 소설처럼 희곡 역시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작품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런 희곡을 ‘레제드라마’로 폄하했지만 돌이켜서 곰곰이 생각해 보라. 우리가 셰익스피어나 체호프, 몰리에르와 베케트의 희곡을 연극을 통해서 먼저 접했는지 아니면 책으로 먼저 읽게 됐는가를.

예술적인 격조가 있는 시나 소설처럼 작품성이 높은 희곡들이 진정한 문학으로 대접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희곡 역시 낭독공연을 통해 문학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마련돼야 한다. 희곡이 연극대본의 일회성 기능과 역할에서 벗어날 때만이 희곡은 잃어버린 문학 본연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노벨문학상이 문학의 가치를 대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건 아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삼분의 일 이상이 극작가다. 세계문학에서 극작가의 위치는 그만큼 확고하다. 단지 한국만이 극작가의 수도 많지 않고 수가 많지 않으니 희곡을 쓰는 작가들의 역량도 그에 비례해 여러 모로 떨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희곡의 양질전화를 위해서라도 문학전문출판사에서 외국 극작가들의 희곡만 출판할 게 아니라 우리나라 극작가들의 수준 높은 희곡들에도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문학평론가들도 시나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에 대한 평도 쓸 수 있어야 한다. 연극평론가들이 비평하는 것은 연극이지 희곡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문단 안에서 사고의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한국희곡의 발전은 아주 머나먼 나라의 일처럼 요원할 것이다.

나 역시 처음 희곡으로 데뷔한 선배 작가들이 나중엔 희곡을 계속해서 쓰지 않고 어느 순간 시나 소설로 업종을 바꾸는 게 참으로 이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작가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희곡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는 문단과 연극판의 환경과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혹은 그 환경과 여건이 왜곡돼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좋은 희곡을 발굴하고 장려하는 제도의 미비일 수도 있고 그러한 희곡을 발굴하는 연출가나 비평가 혹은 기획자의 부재일 수도 있다. 천 리를 달리는 말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어야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닌가.

 

 

4

 

나는 이번에 주어진 6회의 지면을 빌려 앞으로 동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우수한 희곡들과 극작가들을 지역별로 안배해서 골고루 소개해 보려 한다. 물론 거기엔 나와 같은 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동료 극작가들의 희곡도 포함될 것이다. 단 문학적으로 뛰어난 희곡인데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들 위주로 선별할 계획이다. 그리고 그 희곡들이 당대의 시나 소설과 같이 놓고 얘기돼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어야 할 것이다. 출판된 희곡집을 대상으로 할 예정이라 아직 희곡집이 나오지 않은 작가들은 일단 제외할 수밖에 없는 게 아쉽고 애석할 따름이다. 다음 기회가 있을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다른 연재와는 달리 처음부터 어떤 의도를 갖고 시작한 글이기 때문에 아주 자유롭게 그 어디에도 구속됨이 없이 그 어떤 사람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면서 내 눈을 통해 걸러진 작품들을 희곡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정직하게 소개해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 희곡만이 품고 있는 독특한 가치관과 말의 무늬와 결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 쓰다듬어 주고 싶은 소망을 품고.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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