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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치유와 전복의 언어

  • 작성일 2011-05-02
  • 조회수 2,359

 

[기획·특집] 동화를 읽자!

                    ─ 여는 글_1

 

동화, 치유와 전복의 언어

 

김지은

 

 

 

 

 

꿈은 언제 꾸는가. 긴 골목길을 내달리다가도 꿈을 꾼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린이에 가깝다. 꿈은 어떻게 꾸는가. 놀면서 울면서 꾼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린이에 가깝다. 당신의 꿈은 누구에게서 꾸어 오는가. 어린이는 가끔 헌 이야기에게서 꿈을 꾸어 온다. 종종 자신의 꿈을 새 이야기에게 빌려준다. 동화는 꿈과 친하고 꿈은 어린이와 친하다. 우리가 동화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옛 꿈과 새 꿈 안으로 한 발 더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화가 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이야기의 절벽을 오르는 길은 수없이 많다. 어떤 날은 메마른 현실로부터 또 어떤 날은 축축한 환상으로부터. 몽골어에서 꿈을 의미하는 노이르묵(noyirmug)은 ‘반수면 상태’라는 뜻을 지닌 형용사이기도 하다. 잠과 깸의 경계에 꿈이 있다는 것이다. 잠이 비현실이고 깸이 현실이라면 꿈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셈이다.

고대 그리스에는 ‘사원  수면(寺院 垂面. Incubatio)’이라는 독특한 치료법이 있었다. 사람들은 사원의 일정한 장소에서 잠을 자면서 꿈에 ‘치료의 신’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들에게 꿈은 일종의 ‘다독여주기(soothing)’였다. 잠시라도 아픔을 달래고자 곤히 잠든 그들의 꿈속에 어쩌면 선명한 신의 계시가 내려올 수도 있었겠지만 내려오지 않더라도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원에서 편안히 눈 감고 꿈을 꾼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치유를 맛보았다. 심리적 치유 효과는 신체적 증세의 호전으로 이어졌다. 사원 수면이 어느 정도 실제적인 치료 기능을 담당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꿈은, 혹은 동화는 일상을 표현하는 겉말과 일상 아닌 것을 담고 있는 속말의 경계에 서서 미처 겉말이 되지 못한 속말들을 건져 올려준다. 때로는 일상을 ‘뒤집어 보라고’ 권유하여 그 일상 자체를 전폭적으로 ‘뒤집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꿈에서, 동화에서 나는 카드의 여왕을 만날 수 있는 시공간으로 훌쩍 이동하기도 하고 최고 권력자나 감옥의 죄수가 되어 발성하기도 하며 가끔 다른 눈알 색깔과 다른 신체 기관을 가진 인물이 되어 관속에 누워 있기도 한다.

동화는 ‘알 수 없는 색깔의 본 적 없는 모양의 방에서 사원에서 꾸는 꿈처럼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치밀하고 단단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다 자란 자들의 눈에 동화의 말들이 아득하게만 여겨지는 이유다. 그러나 동화가 품 안에 잔뜩 숨기고 있는 돌멩이는 모두 현실의 바다에서 굴러온 것이다. 당신이 어른이지만 동화를 읽어 볼까 한다면 망설이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초대 목록에는 이미 당신의 이름이 올라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고대 사원의 잠자는 방을 두드린 자가 어린이들만은 아니었듯이 동화의 방문자가 어린이여야만 할 이유는 없다. 동화책을 훑어보기도 전에 ‘나에게는 동화를 읽어 줄 만한 아이가 없다’는 말이 입에 맴돈다면 내 마음에 흩어져 있는 어린 시절의 픽셀들을 이참에 모아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조각모음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혹시라도 당신이 약자라면 아동문학의 정중한 초대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아동문학은 약자의 고통을 치유하는 힘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독자인 어린이는 아직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율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자신을 둘러싼 존재들로부터 상처 입으며 성장한다. 몸은 쉽게 다치고 이동의 거리는 제한되어 있으며 밤의 세상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돈은 엄마 지갑 속에 있고 자연스러운 욕망은 보호의 이름으로 통제받는다. 정치적 권리는? 없다. 사회적 소수자 가운데 가장 취약한 상황에 놓인 존재들은 모두 ‘어린이’라는 공통함수를 지니고 있다. ‘장애를 가진 어린이’, ‘빈곤한 어린이’, ‘유색 인종인 어린이’,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어린이’, ‘성매매의 위협에 노출된 어린이’ 등 소수자 집단 안에서도 늘 어린이가 더 어려운 처지다.

특히 현실 속에서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놓고 비교하자면 어린이에게는 가진 것이 거의 없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상처나 난관에 합리적으로 대처하고 해결하라는 말은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다. 사회는 어린이에게 그 해결책을 실행에 옮길 권력도 나누어준 바 없다. 학생 인권 조례를 통과시키기 위해 서명을 조직하는 것도 어른이고 가부를 결정하는 것도 어른의 법이다. 어린이 입장에서는 자신을 둘러싼 아픔의 구조를 인식하기도 어렵고 실천의 길도 막혀 있는 셈이다. 이는 자칫하면 주체의 절망적 자기 인식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러한 어린이에게 힘이 되어 주는 유일한 친구이자 무기가 바로 동화다. 어린이 독자들은 동화의 주인공에게 감정을 빌려주고 그들이 들려 주는 꿈을 꾸어 온다. 안타까운 삶의 경험을 뛰어넘는 폭넓은 카타르시스를 얻어 온다. 미래의 시간에서 뛰어다니는 자신을 한 발 먼저 만나 자유롭게 말을 걸어 본다. 하나의 존재가 성장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 모습을 사멸시키고 다른 모습으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동화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인공의 시공간 이동은 그러한 사멸과 생성의 과정이기도 하다.

진정성을 가진 동화라면 어린이를 현실로부터 밀어내거나 둥둥 띄우지 않는다. 좋은 문학이 사회적 약자의 선정적 마취제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동문학을 매개로 한 심리적 치유의 결과는 물리적 변화의 의지로 이어지고 어린 시절 간직한 그 파장은 오래 이어진다. 이미 괜찮은 어른이 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준 장면을 어린 시절 동화 안에서 만났다고 고백한다. 스웨덴의 동화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스웨덴 아이들을 더욱 타자의 고통에 예민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스웨덴의 사회복지 정책을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린드그렌의 동화를 읽은 사람들이 자라나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길을 선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동화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긴 기간에 걸쳐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복 많은 장르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데미안』보다 훨씬 일찍 읽는다. 아홉 살에 삐삐를 만나 경험한 자기 긍정의 에너지는 팔십 살까지도 힘들 때마다 문득 떠오르는 격려의 근원이 된다. 만약 당신이 진작 그 책을 읽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면 언제든 구해 읽으면 된다. 동화는 성인 관람불가가 아니라 어린이 관람가다. 물론 아홉 살에 처음 읽을 수 있었더라면 더 오래 든든했을 것이다.

우리 창작 동화는 초창기부터 꾸준히 약자의 삶을 비추고 지지하는 인상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최초의 창작동화로 꼽히는 마해송의 「바위나리와 아기별」은 하늘의 절대 권력에 저항하는 아기별의 용감하고 순정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자신이 어린이 문화운동가이기도 했던 방정환은 「만년샤쓰」라는 동화의 주인공 창남이를 통해서 일제 강점기 조국의 처참한 현실과 그에 맞서는 당당한 소년의 얼굴을 보여준다. 현덕은 『나비를 잡는 아버지』에서 주인집 아들을 위해 나비를 잡는 소작농의 아들, 바우의 편이었다. 권정생의 『몽실언니』는 우리네 이름 없는 언니들의 이야기였다. 젊은 작가 유은실은 「멀쩡한 이유정」에서 재건축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새 아파트의 행렬 속에서 자기 집을 찾지 못해 헤매는 유정이의 어지러운 하루를 다룬다. 유정이의 목소리는 사라진 모퉁이를 응원하고 짓밟힌 들꽃을 응원하고 부서진 구멍가게의 간판을 응원한다.

최근 작품 중에서는 특히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의 행보를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 작품의 주인공 잎싹이를 통해서 알을 낳지 못해 버려진 폐계의 새로운 모험을 신명나게 보여주었다. 이 책은 아동문학 역사를 다시 썼고 백만 부 판매를 넘어섰다. 아이들에게 읽어 주기 위해서만 그 많은 사람들이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믿겨지지 않는 억울하고 서러운 현실의 한복판에서 하늘 아래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을 동화는 다독이고 등 두드려 주었다. 잎싹이의 꿈에 기대고픈 독자가 그만큼 많았다는 뜻으로 짐작한다.

동화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앞서보다 더욱 매혹적인 것이다. 동화는 ‘전복의 문학’이라는 것이다. 어린이의 움직임을 눈여겨보면 그들은 늘 놓여 있는 것을 잡아당기고 뒤집어엎는다. 고인 물보다는 흐르는 물에 뛰어들어 그 물길을 돌려 놓고 물장구치기를 즐긴다. 어른에 비해 어린이는 주어진 시스템을 바꾸거나 새로운 관점으로 이동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적은 편이다. 어른은 분명히 마땅치 않은 것이 눈앞에 놓여 있더라도 ‘지금 여기를 벗어나면 다 잃을 수 있다’는 경고 앞에서 비겁한 셈을 세기에 바쁘다.

그러나 어린이에게는 내킨다면 얼마든지 떨칠 수 있는 망설임에 불과하다. 옳지 않은 것을 남겨 둘까 말까 고민할 시간에 그들은 더 옳은 것, 더 멋진 것을 찾아서 뛰쳐나간다. ‘한 번 해보겠다’는 기개가 있다. 어린이가 이처럼 변환에 능동적인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소유한 것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 시스템은 대개 어른의 입장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어린이에게 유리할 것이 별로 없다. 동화는 이런 그들이 겨우 꾸는 꿈이다.

현실에서 대대적인 전복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어린이 자신의 미래가 그 질서 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어린이들 스스로 감지하고 있다. 어린 나이부터 경쟁의 이름으로 물장구는 제지당하고 그들이 고사리발로 개척하려던 잔풀 흔들리는 유장한 물길은 겹겹의 시멘트 옹벽으로 둘러싸인다. 우리 동화도 어린이를 둘러싼 이런 현실의 격렬함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야기의 결이 마냥 곱고 고운 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동화 속 주인공들은 깔깔 웃지 않는다. 고민이 깊고 빨리 어른이 된다. 어른의 하루보다 어쩌면 더 심산하고 표정은 강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는 그들이 왁자지껄 전복적인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아동문학 텍스트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와 시공간에 대한 부분적 변환이나 전복적 시도는 어린이들의 잠재적 소망을 대행하는 역할을 한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내가 교장 선생님이 되고, 내가 남자가 되고, 내가 거인이 되는 것, 과거가 현재가 되고 현재가 과거가 되는 것,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고 산 사람이 모두 죽음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 이 모든 뒤바뀜이 어린이에게 해방의 꿈을 제공한다. 로지 잭슨(Rosie Jackson)은 “환상의 가장 큰 특징은 ‘실재적인 것’ 또는 ‘가능한 것’의 일반적 규정에 대한 완강한 거부, 때로는 격렬한 대립에까지 이르는 거부”라고 규정하고 있다. 동화 그 자체로서는 사회적인 전복 행위가 아니지만 예술적 재현행위의 규칙들을 교란시켜 ‘사실적인’ 것의 문학적 재생산을 방해한다. 이러한 전복적인 카타르시스는 동화의 가장 매혹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는 전복된 텍스트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치의 움직임에 대해 상대적으로 너그럽다.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선뜻 알아차린다. 어린이가 처음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권선징악과 같은 윤리적 이분법의 도움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이라는 조건 명제를 가장 명민하게 수용하는 것도 어린이다. 그들은 어른 같으면 ‘말도 안 돼’라는 말로 일축한 각종 뒤바뀜의 설정을 빠르게 받아들여 그 안에 감정을 이입할 줄 안다. 동화 작가는 대단히 적응이 빠른 독자를 두었다. 위치 이동부터 관점 이동, 시간의 이동까지 각종 실험을 자유롭게 시도해 보아도 어김없이 손뼉을 마주친다. 어린이 독자의 예민한 호응은 더욱더 뒤집힌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픈 작가의 창작 의욕을 자극한다. 동화가 그 어떤 장르보다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일에 거침이 없는 이유다. 최근에 출간된 우리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그런 흐름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지난봄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에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던 우리 작가 백희나의 『달샤베트』는 달이 녹아버린 어느 날 밤, 동물들의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무더위에 지친 나머지 집집마다 에어컨을 틀어대고 결국 뜨거워진 밤하늘에서 달이 뚝뚝 녹아내린다. 혼자 사는 늑대 할머니는 대야를 들고 뛰어나가 노란 달물을 받는다. 집에 가져와 샤베트 틀에 넣어 꽁꽁 얼린다. 과열로 정전이 된 그날 밤 동물들은 늑대 할머니로부터 받은 환하고 차가운 달샤베트 덕분에 선풍기 에어컨 없이도 곤히 잠에 든다. 늑대 할머니는 남은 달물로 초승달을 만들어 졸지에 집을 잃어버린 옥토끼네 새 거처를 마련해 주고서야 비로소 잠이 든다. 이 이야기는 ‘달이 몽땅 녹아버릴 거야’라는 전면적인 부정의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 부정의 힘은 다시 생산의 힘으로 전화된다. 이 중간에 동화적 상상력이 있다. 한윤섭의 동화 『봉주르 뚜르』는 어느 달밤 프랑스 시골마을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소년 토시와 ‘대한민국’의 봉주가 환상적인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를 그렸다. 천안함과 연평도의 날카로운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에도 우리 아이들은 이 책을 읽었다. 토시와 봉주가 현실의 장벽을 가볍게 뛰어넘은 것은 동화의 힘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임태희의 동화 「내 꿈은 토끼」에서 주인공 영빈이는 성적 서열에 대한 억압에 시달린 나머지 장래 희망을 ‘토끼’라고 발표하고는 우유 투입구를 통해 통통 튀어 빠져 나가 버린다. 이민혜의 『가오리가 된 민희』에 등장하는 싱글맘인 엄마와 사는 민희의 상상은 더욱 파격적이다. 가오리가 되면서 사람이던 시절의 기억을 잃어버린 민희가 펼쳐내는 입담에는 자신의 삶을 얽어매던 사슬을 또박또박 말하는 예리함이 깃들어 있다. 이경혜의 「그녀석 덕분에」는 아예 수험생 주인공 양호와 바퀴벌레의 처지를 바꾸어버린다. 바퀴벌레만도 못한 양호의 삶은 바퀴벌레 변신체의 도움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내가 나를 버리도록 강요하는 삶, 이왕 버리자면 속 시원하게 내동댕이쳐 보자는 작가의 통렬한 결정은 특유의 상상력과 맞물려 빛을 발한다. 전복적 상상력이 현실에 칼을 겨누었을 때 얼마나 뜨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미 어른이 된 당신이 왜 동화를 읽느냐고 물을 때 ‘어린이에게 주어야 할 것을 나도 읽는다’는 대답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달을 녹이듯 대책도 없이 세계의 바탕을 녹이면서 ‘어떻든 너희는 내일을 살아야 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수만 명의 어른들보다는 ‘한 권의 동화’가 더 믿음직스럽다. 내가 읽기 전에 더욱 아름다운 동화를 어린이의 두 손에 건네주어야 할 의무가 우리들에게는 있다.

하지만 그 어린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묻고 의지할 ‘어른인 나의 삶’을 한 뼘이라도 제대로 지탱하기 위해서, 아직 스스로 보듬지 못한 나의 얼굴을 더욱 다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는 어린이와 나란히 동화를 읽는다. 온화한 치유의 권고를 내내 거절해 온 것은, 전복의 계기를 마다한 것은 언제나 아이들보다는 내가 아니었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면서.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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