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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한국문학, 첫 10년을 정리한다 (2부)

  • 작성일 2010-12-10
  • 조회수 3,451


[기획특집]


[좌담] 2000년대 한국문학, 첫 10년을 정리한다

- 2부 -



일시_ 2010. 11. 17(수)
장소_ 예술위원회 본관 대회의실
진행_ 복도훈(문학평론가)
좌담_ 서희원, 양윤의, 이선우, 장성규(이상 문학평론가)





환상의 복권


 복도훈___ 이어지는 문제는 타자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자기 동일성에 대한 의문을 수반하는 것과 관련이 있겠는데요.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최근에 현실과 환상, 이른바 또 다른 경계의 다른 모습일 텐데요. 환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그 때까지 생각하고 있는 현실이 어떤 범주였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데, 거기서 중요한 게 주체 문제겠죠. 그것은 소설에서 인물이나 화자의 특징, 그들의 목소리와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육식성과 식물성 인간형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인물이라기보다는 캐릭터라고 부르는 게 나을 법한 포스트모던 동화의 주인공에서 유령, 시체와 최근의 좀비에 이르기까지 몰(沒)인간적이라고 부를 법한 존재들이 대거 출현한 것은 확실히 2000년대적이죠. 90년대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주체보다는 자아나 자기, 진정성이라는 말이 어울렸던 것과는 대비되는 측면입니다. 그리고 아마 2000년대산 소설에 등장한 신종 변이 캐릭터들은 ‘세계의 끝’이라고 생각될 법한 종말론적인 엔트로피적 시공간을 자신들의 서식처로 삼고 있고요. 
 
 서희원___ 좀비 소설을 보면서 좀비가 흥미로운 것은 알레고리적으로 해석이 돼서 그런데요. 최근에 좀비가 대단히 많이 등장하죠. 정치에서도 그렇고. (웃음) 문학이든 만화든 영화든 다방면에서 좀비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라진 군중이나 사라진 주체에 대한 회고·그리움 같은 걸 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좀비가 우르르 가고 거기서 피해 있는 모습이 있을 때, 마치 그 모습들은 90년대 소설에 등장하는 80년대적인 경향성 속에 숨어 버린 개인들 혹은 80년대 압도적인 폭력성 속에서 거기에 대항하는 학생들을 고스란히 가져온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말하긴 싫지만 뒤집어서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구요. 소설을 창작하는 데 필요한 어떤 거대한 군중성, 주체성, 집합성 이런 부분들을 작가들이 최근 좀비라는 부분에서 상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요. 
 
 양윤의___ 좀비들이 보여주는 군중성이라, 재미있는 말씀이네요. 


 복도훈___ 어떤 소설을 염두에 두면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서희원___ 백민석은 『목화밭 엽기전』에서 하나의 괴물이었잖아요. 이젠 정반대로 전체가 괴물인 거잖아요. 하나의 이념을 외치던 모습이나 하나의 이념으로 통제받던 모습을 장르화하는 몇 가지 법칙이 있잖아요. 물론 클리셰적인 측면이 많이 있는 거죠. 좀비의 문제는 그것과 구분되는 개인의 문제를 제시할 수도 있구요. 그 이전 문학에서 대단히 많은 성과를 낸 부분을 좀비 문학을 통해서 다시금 끄집어낼 수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복도훈___ 좀비를 시대상황 알레고리로 읽으시는 거 같은데 그게 어떤 뜻인지 선뜻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양윤의___ 가능할 거라고 봐요. 그런데 저는 여기에 일종의 착시현상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최근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소설적 장치들을 사회적 알레고리로 해석하게 될 때, 그 속에서 제기되는 문제들 그러니까 일종의 타자성이나 자기동일성 자체를 해체하는 목소리들을 희석시키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귀신이나 좀비, 유령, 괴물이 집합적인 덩어리처럼 등장한다고 해도 이들의 존재는 각 작가와 작품에 따라서 좀 다르게 설명되어야 할 것 같고요. 결국 그 문제는 자기동일성을 끝장내는 지점, 한계상황을 넘어서려고 하는 임계점에 닿는 것일 텐데 그러한 의미가 곧바로 시대적인 맥락으로 읽히는 것은 약간 위험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타자성 문제가 환상 문제와 닿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환상성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 역시 중요한 문제지만, 현실과 떨어져 있는 가장 극단적인 비현실성 문제라고 본다거나 비정치적인 속성을 가진 협소한 장르라고 생각하는 방식, 혹은 소설 기법의 일부라고 여기는 방식에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요. 많은 방식으로 환상성 문제가 논의되어 왔지만 환상성 자체를 가치론적으로 폄하하거나 열등한 방식으로 보는 시각은 남아 있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환상은 단순히 현실의 뒤집어진 그림자가 아닐 테니 말이죠. 
2000년대 문학이 보여준 문제의식 안에서 타자를 사유한다거나 타자성 문제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환상성 문제와 닿아 있다는 점에서 좀비나 유령, 괴물의 문제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자기를 넘어서서 타자성을 경험하는 방식은 하나로 규정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들이 복수적인 양태를 띨 수밖에 없겠고요. 윤이형 작가를 언급한 선생님도 계셨는데 저는 편혜영의 ‘좀비’와 천운영의 ‘환상’이, 황정은의 ‘귀신’과 이장욱의 ‘유령’이, 또 박민규가 보여주는 공포증적 환상의 작동방식이 각기 다르다고 생각해요.  



 복도훈___ 양윤의 선생님께서 잘 정리해 주셨네요. 환상의 복권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그것이 최근 한국소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물론 그것을 리얼리즘 담론으로 포섭하려고 하는, 예를 들어 박민규의 『핑퐁』등을 ‘한국문학의 보람’이라고 일컫는 백낙청 선생의 방식이 있겠죠. 한국문학의 보람이라고 완곡하게 말씀하셨지만, 기실은 민족문학의 보람이라고 말하고 싶으셨을 겁니다. 한편으로 환상성 도입이 환상의 우위로 절대화될 수 없는 부분은 분명히 지적되어야 할 겁니다. ‘세계의 끝’에 대한 얘기를 이선우 선생님께서 해 주셨는데, 그것은 최근에 붐인 종말론적 상상력과도 관련될 수 있을 겁니다. 『핑퐁』에서는 나중에 탁구계를 제외하곤 모두가 한순간에 사라지는데, 이 소설의 결말은 두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얌전하게 학교 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세계의 끝’은 현실에 대한 엄밀한 탐색의 결론에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쉽게 환상에 기대어 빨리 결론에 도달해 버리는 것에 대한 이름일 때가 간혹 있어요. 
 
 이선우___ 환상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측면이 다 있는 것 같아요. 저는 90년대 윤대녕 소설을 별로 안 좋아했었는데요. 다들 윤대녕, 윤대녕 하시는데……. 
 
 서희원___ 그럼 누구를 좋아했나요? 좋아했던 작가가 있을 텐데요. 
 
 이선우___ 헉, 90년대에 윤대녕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냐, 이런 분위기인가요? (웃음) 뭐, 좋아했던 작가들은 많죠. 윤대녕의 모든 게 싫었다는 건 아니고요. 가령 갑자기 뭔가 현실이 아닌 것처럼 끝내는 방식들 있잖아요, 윤대녕 특유의.
 
 서희원___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것? 
 
 이선우___ 네. 그런 게 싫었어요, 저는. (웃음) 아까 황석영 소설을 말하면서 얼핏 얘기했는데, 물론 황석영과 윤대녕을 같은 층위에서 바라볼 수는 없지만, 환상이 현실을 가리거나 현실을 손쉽게 넘어서는 방법으로 도입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현실은 그렇게 모호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윤고은이나 황정은의 경우처럼 환상이 현실을 더욱 잘 드러내면서 우리의 감각을 다르게 배분하는 데 기여하는 경우도 있죠. 그런데 장편과 단편의 미학은 다르잖아요. 오늘날 과연 총체성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다시 짚어 봐야 할 문제지만, 그래도 우리가 장편을 읽을 때는 단순히 현실 문제를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현실과 싸울 것인가, 어떻게 다른 세계를 열어젖힐 것인가, 이런 차원까지 기대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게 현실과의 고투가 필요한 지점에서 환상으로 도피해 버리면, 저는 허무해져 버리더군요.


 양윤의___ 저는 지금 논의가 조금 혼동되는데요. 이선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환상은 자기 동일성을 해체하는 혹은 한계상황을 넘어서려는 환상과 조금 다른 이야기 같은데요. 자기 동일성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바리데기』에 차용된 환상은 작가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소설적 장치라면, 좀비나 괴물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환상 문제는 장치 차원이 아니겠지요?
 
 이선우___ 복도훈 선생님께서 『핑퐁』의 결말이 환상에 기대어 빨리 도달한 결론 같다는 말씀을 하셔서, 환상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구체적인 작품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해야 할까요?


 서희원___ 최근 문학 창작에서 환상이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은 분명 한데요. 대표적으로 아까 말씀하신 윤고은이나 황정은 작가들이 있는데, 두 사람의 환상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황정은의 환상은 처음 시작은 비슷할지 몰라도, 『百의 그림자』를 볼 때, 황정은에게 환상은 그 흥미로서의 환상이라기보다는 현실의 깨어진 부분을 보여주게 하는 환상인 거죠. 오히려 환상적인 부분으로서 리얼함이 재현하지 못한 부분을 환상이 보여주는 거죠.
또 무중력이라 부르는 환상이 있는데 그런 소설의 경우 기발한 상상력과 즐거움을 준다는 거죠. 그런데 제가 최근에 윤고은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게…….  
 
 이선우___ 아! 아까 제가 안보윤을 이야기하려다가 윤고은이라고 말했네요.  
 
 서희원___ 안보윤은 환각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나요? 
 
 복도훈___ 실제로 주인공이 마약을 복용한 다음 환각상태에 의지해 살인이나 감금, 폭행을 하거든요.  
 
 이선우___ 네, 맞아요. 그런데 황정은과 윤고은도 많이 다르죠. 황정은은 오히려 박민규와 만나는 지점이 있지, 윤고은의 무중력적인 것과는 다르죠. 제가 읽기에 윤고은의 『무중력 증후군』은 환상이 아니라 그냥 ‘허구적인’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고요. 현실의 ‘허구성’, 그런데 그게 실은 현실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죠. 하지만 황정은 소설에 나오는 ‘육체를 가진 환상’들, 그걸 과연 환상이라 해야 할지 그것도 고민인데, 여러 가지 상징으로 읽을 수 있지만 너무 리얼하지 않나요. 마치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때처럼 무엇이 실재인지 점점 구분이 가지 않으면서 섬뜩해지는 지점이 있죠. 아, 여러 작가들을 마구 묶어서 이야기할 때 생기는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습니다. 조심해야겠습니다.
 
 서희원___ 저는 윤고은 소설을 즐기지는 못했어요. 제 스스로가 소설을 보면서 즐기려는 것 같지 않아요. 직업이 돼버렸고 이걸 통해서 가벼움과 기발함을 얻기 위해 읽는다는 생각이 안 들고 오히려 해석하려는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에 대한 확장을 주지 않고 이 상태를 즐겨라라고 얘기한다면, 잘 모르겠어요. 
 


 복도훈___ 환상이나 꿈은 보통 현실 원칙에 의해 억눌린 소망이나 판타지로 발현되죠. 그것은 현실에 대한 보충, 대리충족이지만, 최근 소설에 와서 환상은 환상을 억누르는 현실 원칙을 폭로하는 쪽에 가깝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그런 환상이 그렇게 즐겁지는 않아 보입니다. 우리 평론가들은 직업 특성상 (웃음) 그 환상을 분석해야 하는데, 분석을 하지 않고 보더라도 그런 환상이 그리 유쾌하거나 즐겁지만은 않을 때도 있어요. 잠시 현실을 소거하는 꿈과 몽상으로 즐겁게 비상하는 쪽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원칙을 고발하는 의미가 부각되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그러니 리얼리즘에서 여전히 환상에 대한 자신만의 특권과 우위를 주장할 명분이 있는 거겠죠. 환상도 묘사의 엄밀한 그럴듯함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그러나 리얼리즘으로…….
 
 서희원___ 리얼리즘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생각이죠.    
 
 이선우___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 환상이냐 현실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이 더 리얼리티를 잘 드러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복도훈___ 예전에는 우리가 리얼리티라고 말할 때는, 정신분석에서 얘기하는 상징계에 가까운 용어였죠. 바르트가 말한 실재의 효과이거나. 그렇지만 지금은 리얼리티를 바로 현실이 파열되는 지점인 실재, 라캉식으로 말하면 리얼한 것(the real)으로 이해하고 있죠. 그러니 그것은 항상 재현의 문제, 재현의 위기와 맞물려 있었던 거구요.  
 
 이선우___ 그 전에도 단순한 재현은 아니었을 텐데요. 총체성을 드러내려 했으니까요. 그런데 아까 총체성이 가능한 시대인가 물었지만, 만약 총체성을 드러낼 수 있다 하더라도 재현의 방식만으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복도훈___ SF 독자이기도 한 프레더릭 제임슨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죠. 우리 시대에 총체성은 리얼리즘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음모 서사(conspiracy narrative),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편집증의 방식으로만 총체성의 음화를 거꾸로 잘 드러낸다는 거죠. 제임슨이 최근에 SF에 주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건 음모 서사를 통해서만 총체성이 재현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음모 서사가 부재하는 총체성의 어렴풋한 징후로 기능한다는 거죠. 어떻게 보면 총체성 자체가 원래 편집증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구요. 우리 시대에 총체성은 그것이 만일 가능하다면, 역설적으로 편집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서희원___ 총체성이라는 거 자체가 환상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복도훈 선생님이 총체성을 편집증적으로 상상을 해야 된다고 했는데, 그건 이어 붙여야 된다는 거잖아요. 누덕누덕 만들어 놓고, 깨어진 이것을 총체적인 이거라고 바라봐야 하는 병과 같은 상태인데, 그 총체성을 찾아가야 되는가의 부분도 문제가 있고, 또 하나는 아까 리셋 문제, 종말론 문제가 나왔는데 더 이상 ‘뒤가 없다’는 거죠. 세계와 개인이 조화하고, 타협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거죠. 소설을 끝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소설을 크게 만들어 놓았으면 마무리를 지어야 되는데 적절한 마무리가 없다고 할 때 다 싹 밀어 버리자 하는 게 근사한 대안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복도훈___ 매우 편집증적인 영화인 (웃음)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2003)에서처럼 마지막에 지구를 꽝 하고 폭발시켜 버리는 거죠. 제임슨이 날카로운 지적을 한 적이 있죠. 우리는 자본주의 종말을 상상하기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기를 훨씬 더 선호한다는 거죠. 서희원 선생님이 중요한 것을 지적했는데 내러티브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도 중요해 보입니다. 장편의 이데올로기적 핵심은 결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장편소설에 대한 요구는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감각을 회복시키겠다, 불화하든 타협하든 부서지든 세계가 있고 주인공이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일 겁니다.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어요. 세계라 할 만한 어떤 것이 없죠. 다만 세계 대신 세계를 연결 짓는 네트워크에 집착할 뿐이죠.


 서희원___ 유리 로트만이 장편소설을 가지고 두 가지 얘기를 하잖아요. 하나는 분류형 소설, 또 하나는 변형형 소설이 있다는 거죠. 하나는 플롯이 없는 소설, 하나는 플롯이 있는 소설이죠. 플롯이 없는 소설은 스토리밖에 없는 소설이죠. 플롯이 중간중간 나오지만 그 스토리로 가기 위한 결말이 딱 지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게 결혼으로 끝나는 사랑에 대한 소설 같은 거죠. 동화의 성인물 같은 거죠.
변형의 소설이란 결말이 없는 소설이죠. 작가가 인위적으로 결말을 쓰지만 독자는 ‘어?’ 하는 거죠. 이렇게 끝나는 소설이 대부분 그런 형태고, 로트만 식으로 말하면, 결혼소설에 대비되는 간통소설인 거죠. 끝없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는 소설이죠. 한 사람에게 종속되는 게 아니라 사랑 자체가 목적이 되는 거죠. 이렇게 볼 때 최근 소설들은 변형형 소설들이 훨씬 많죠.


 복도훈___ 변형으로 끝내야 할 것 같은데 분류, 또는 봉합으로 끝내는 장치를 억지로 찾는다든가 그러죠. 다른 얘기지만, 김연수의 야심작인 『밤은 노래한다』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결말을 짓는 방식은 확실히 이데올로기적입니다.  
 
 장성규___ 분명 환상성이 대두됐다는 말은 대부분 하는데, 환상이 대체 뭐냐는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소재적 차원에서 환상이 드러났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환상을 통해 무엇을 발화하고 싶은가를 징후적으로 읽어낼 필요가 있겠지요.
이 문제와 관련해서 황정은을 주목하고 싶은데, 그녀의 작품에서 주목되는 점은 환상이 단지 기발한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목소리’를 복원시키는 형식으로 사용된다는 점이에요. 단단하고 체계적인 지배적인 담화 형식과는 다른 이야기 형식을 복원시키는 기제로 환상이 사용된다는 점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어요. 『百의 그림자』 같은 경우도 재미있었는데, 줄거리만 놓고 보면 그냥 철거를 앞둔 상가에서의 사랑 얘기잖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일반적인 내러티브가 아니라 환상성을 가져오면서,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에서 읽은 얘기에 대해 과연 이것이 실제 얘기인가?, 혹은 이것이 현실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사유하고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지점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환상이 이러한 문학적 사유와 연결될 때, 아까 이선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손쉬운 봉합으로서의 환상이라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윤고은 얘기도 잠깐 나왔는데, 저는 윤고은 작품들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특히 『무중력 증후군』에서 과연 우리가 보고 있는 환상이란 누가 만든 것인가? 우리가 환상을 통해 전복적인 사유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전복적인 사유 자체도 기실 자본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지점까지 고민한다는 점에서 환상과 정치의 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탐색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문학(소설)의 윤리, 문학(소설)의 정치



 복도훈___ 그렇습니다. 환상이 전복적이다라는 주장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비평가들의 주장일 뿐이죠. 그렇게 보면 고딕소설은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소설 장르였죠. 굳이 말하면 어떤 환상이 어떻게 전복적일 수 있겠는가가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도 황정은 소설의 환상에 대해서 고민을 했었는데, 얼마 전 황정은 작가에게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단편집 『일곱시 삼십 이분 코끼리열차』에 실린 「곡도와 살고 있다」의 마지막 대목에 이런 얘기가 있죠. 화자가 병아리 한 마리가 죽어서 묻어 줬는데, 다시 되살아왔다고 말합니다. 분홍 빛깔의 알몸인 채로. 그래서 다시 파묻어 줬는데, 이번에는 수챗구멍에 걸려서 살아 있는 거예요. 다음 날엔 창가에 서 있고. 저는 처음에 이 장면이 어느 부분은 현실이고 어느 부분은 환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어요. 묻어 줬는데 슬퍼서 꿈과 같은 장치를 통해 병아리가 되돌아온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작가에게 물어봤더니 실제로 겪은 일이래요. 그런데 다시 읽어봤는데도 분명히 환상적이었습니다. 충격이었죠. 우리가 어떤 현실을 너무 압도적으로 겪을 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저는 환상이라고 뭉뚱그려 생각했던 거죠. 너무 충격적으로 뭔가를 겪었을 때는 현실감이 사라집니다. 물론 『百의 그림자』에서 그림자가 일어서고 속삭이는 건 분명히 환상적인 장치입니다만 그것은 무엇이 정말 리얼한 것인가라는 질문의 정곡을 찌르는 부분이 있죠.
환상과 리얼한 것에 대한 이야기는 아쉽지만 이쯤 해 두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 합니다. 2000년대 초반에 평론가 이광호 선생이 한국소설의 ‘무중력의 상상력’을 말하면서 푸코식 미시정치나 미시권력을 언급한 적이 있었죠. 사실 그 미시정치가 지금에 와서는 기묘하게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정치를 교묘히 소거시키는 층위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한 적이 있어요. 공정을 기하자면 이광호 선생의 글은 당시에는 오히려 문학의 정치라는 마지막 끈을 놓고 싶어 하지 않았던 절박한 몸짓으로 제겐 읽혔죠. 지금은 미시정치보다 더 큰 국가폭력이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실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죠. 그 국가폭력이 미시정치의 단위로 우리 일상 곳곳을 잠식한다면 또 다르지만요. 촛불시위, 용산참사, 69작가 선언이 있었고, 최근 G20 정상회담 포스터에 쥐 그래피티를 그린 대학 시간강사가 국문과 출신에 여러분도 잘 알 만한 분이라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공안부에서 현재 수사가 진행중이고 재판을 앞두고 있다던데, 제가 다른 일로 그분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 전화가 감청될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웃음) 자, 최근에 시와 정치에 관한 논의에서 출발해서 문학의 정치, 그리고 소설의 정치성에 대한 논의도 일 년 이상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소설의 사회학적 상상력의 비중도 커지고 있구요. 
 
 이선우___ 거꾸로 얘기를 해 봤으면 하는데요. 문학의 정치성을 잘 드러내는 작품으로 어떤 작품을 꼽을 수 있을까요? 바로 떠오르는 작품이 있나요? 김사과나 황정은, 혹은 주원규나 손아람 등을 떠올릴 수 있지만 저는 최근 ‘문학의 정치’ 논의는 이론이 앞서 나갔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거든요. 재미있는 건, 사르트르의 참여문학론은 시는 일정 부분 배제하고 산문문학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프랑스적 맥락에서 그랬던 거겠죠), 최근 ‘문학의 정치’ 논의는 시인에게서 촉발되었고 시 담론으로 확산되었다는 겁니다. 랑시에르를 떠올리면, 아이러니하게 이것도 프랑스적 맥락을 그대로 들여온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우리 문학사에서는 시의 참여가 언제나 두드러졌습니다. 소설에서는, 비단 2000년대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오히려 윤리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 집권 이후 문화예술계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고 용산 참사 같은 비극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지요. 아마 지금도 어디선가 계속되고 있을 겁니다. 랑시에르는 치안과 정치를 구분하지만, 치안의 수준에서 이런 문제들이 계속 생기니까 ‘문학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이런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 같고, 현실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윤리에서 바로 정치로 넘어가는 것, 혹은 윤리와 정치가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관은 있지만, 다른 것 아닌가요? 저는 이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복도훈___ 일단 저부터 반성하겠습니다. (웃음) 저도 평론집을 엮다 보니 윤리와 정치를 거의 같은 층위에서 사용한 실례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윤리와 정치를 한꺼번에 묶어 얘기할 때, 그것을 회피의 알리바이로 사용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윤리와 정치를 말할 때, 정확히 윤리와 정치라는 언급을 통해 무엇을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던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담론 층위가 윤리라는 타자성 문제에서 정치라는 집단적 삶의 층위로 자연스럽게 이동해 갔다는 생각도 더러 있는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이행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선우 평론가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최근에 문학의 정치, 또는 문학과 정치에 대한 담론에서 담론이 작품을 찾거나 작품을 통해 확인하려고 하는 담론 과잉에 대해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작품이 먼저고 담론이 그 다음이라는 이러한 순서가 정말 자명한 것인지요?   
 
 이선우___ 이론이 앞서 나가는 것이 반드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어떤 작품이 정치적이다, 혹은 윤리적이다 평가하기 위해서도 정치성이나 윤리성에 대한 개념 정립은 필요하지요. 물론 그런 개념 정립을 이론가들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랑시에르가 너무 자주 인용되니까 일종의 알리바이 아니냐 하는 비판도 많은 것 같은데, 평론가들도 그냥 쉽게 외국 이론을 가져다 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은영 시인처럼 나름대로 진정성 있는 고민 속에서 적극적인 만남이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60년대 순수-참여 논쟁도 거쳤고, 80년대 민중문학의 성과와 한계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2010년대라는 새로운 국면에 놓여 있습니다. 당연히 과거로 그대로 회귀할 수도 현재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거지요. 그러므로 끊임없이 문학이란 무엇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랑시에르든 누구든 그 고민을 한층 성숙시킬 수 있다면, 당연히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소 소모적이었던 것은, 그 논의가 과거의 순수-참여 논쟁으로 그대로 회귀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고, 논자들에 따라 랑시에르의 한 측면만 강조해서 읽기도 했다는 겁니다. 알리바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겠죠. 물론 중요한 것은 랑시에르가 무슨 말을 했느냐보다, 그 만남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생성할 수 있느냐 하는 거겠지요. 그러나 비평에서나 작품에서나 그게 아직 제대로 생겨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담론이 항상 작품 뒤에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담론만 무성하면 공허해지기 쉽지요. 물론 저는 지금 작가들이 저마다 치열하게 내적 분투를 해 나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담론만 무성한 거 아니냐고 아마 비평가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래서 조급해하지 않으려고요.
다만 서두에 문학의 정치 관련해서 떠오르는 작가들이 있냐는 질문을 드렸고 저를 비롯해서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바로 답변을 못하셨는데, 저는 어쩌면 그게 우리가 문학의 정치성에 대해 갖고 있는 어떤 편견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요. 정치적 사건을 다룬다고 해서 그 작품이 바로 정치적인 작품은 아니겠지요. 그렇다고 그런 사건을 다룬다고 해서 다 소재주의로 전락하는 것도 아닐 테고요. 무엇이 문학의 정치성이냐는 질문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희원___ 이글턴에 따르면 정치적인 문학과 비정치적인 문학이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정치적인 문학과 또 다른 정치적인 문학이 있는 거잖아요? 정치가 아니라 순수다 그러는데 그 순수가 가지고 있는 정치성이 중요하다 모든 문학은 정치적이다 말하죠. 얘기를 하면서 느낀 점이 있어 생각했는데 과연 그렇다면 내가 바라고 고대하는 정치적 문학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지금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어요. 뭘 정치적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리고 그 이전에 다른 어떤 작품을 정치적으로 보지 않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나, 그것을  문학성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성이나 주체성이나 다른 방식으로 부르면서 거기에서 정치성을 읽어내지 않으려는 그런 경향이 대단히 많았고, 그 시절들이 한창 지나고 난 다음에, 그러고 나서 막상 무언가에 대한 정리 혹은 다른 어떤 대안이 필요하니까 우리가 정치를 호명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생각이 들어서요. 과거 내가 읽었던 소설들에 대해 다시 반추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것들이 가진 정치적 성격에 관해서 그건 정치적이지 않아, 라고 보지 않았나 하고요. 최근 소설에 무위도식자, 백수, 특별한 경향성 없이 반대하는 인물이 대단히 많이 나오잖아요. 그건 나름의 저항인 거죠. 저기 따라가지 않겠다는 판단, 그것들이 가진 정치적인 의미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에 마쓰모토 하지메의 『가난뱅이의 역습』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점인데 무언가 우리가 어떤 경향으로 가고 있을 때 그 방향을 바꾸고 또 다른 경향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만 정치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해요. 우리가 어떤 경향으로 가고 있을 때 거기에 브레이크를 걸고 그 경향에 대해 반성하고 주춤거리게 하는 것, 그것이 더 혁신적인 정치의 한 방식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그것에 이름을 붙여 주고 정치적인 의미를 밝혀 주는 게 오히려 필요한 게 아닌가 요즘 그런 생각이 듭니다.
 
 복도훈___ 이른바 루저, 백수 주인공들은 결단하지 않죠. 선택 앞에서 망설이고 유예하고 거절하는 등 현실대처법이 소극적이더라도 무관심이나 무대응이 꼭 같은 건 아닌 거죠. 반대편에 김훈 소설이 있죠. 자기는 아무 편도 아니라고 하지만, 김훈의 주인공들은 실제로는 망설임 대신에 결단하고 그에 책임을 지죠. 문학과 정치 논의에서 랑시에르를 전거로 자주 끌어오는데, 저는 오히려 카를 슈미트처럼 결단을 감행하고 『칼의 노래』의 이순신처럼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이런 방식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어요. 슈미트는 일찌감치 독일 낭만주의자들을 끝없는 대화와 토론만 일삼으면서 어떤 정치적 결단도 결국 미루는 정치적 자유주의(의회주의)를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슈미트는 사실 문학을 비판한 건데, 어떻게 보면 김훈의 소설은 그런 백수 청년, 혹은 그들의 문학에 대한 우회적 비판으로 읽힐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우리가 문학을 통해 정치적인 것에 대한 고민을 할 때, 우리가 고민하는 문학이 슈미트가 비판한 그런 문학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슈미트가 우파라면, 문학적 좌파의 결단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촛불시위가 그런 것처럼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것을 명백히 각인하는 행위가 아니어야 할까요. 문학의 정치를 이야기하려면 이런 부분까지 짚어 가면서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선우___ 서희원 선생님 말씀대로 모든 문학은 정치적이지만,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정치적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결단의 미학으로 말하면, 당연히 김훈 소설은 아주 정치적인 소설이지요. 하지만 백수들의 정치성과는 전혀 다르게 정치적이죠. 김훈 소설의 인물들은 아무도 무위도식하는 인물들이 아니죠. 항상 일하고 돈벌이하는, 그것이 가장 경건한 종교인 중년 남성들의 세계죠. 결단하는 주체의 괴로움도 그 속에서 나오는 거구요. 따라서 김훈 소설의 결단은, 곧잘 허무주의로 이어지고 인물들의 처절한 견딤은 타락한 현실에 대한 무언의 긍정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정치성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성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백수들의 정치성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실러는 인간은 유희하는 한에서만 온전한 인간이라고 말했죠. 놀이는 노동의 복종성에 반대되는, 자기자신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자유로운 활동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자유로운 놀이’는 정치성, 랑시에르의 표현대로 감각적인 것의 정치적 나눔을 건드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백수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텐데, 일테면 일하려는 의지는 있지만 일거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백수가 된 경우도 있을 테고 실업자나 취업준비생도 있겠죠. 자발적 백수도 있을 테고. 그러므로 이 백수들 중에는 백수지만 노동자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이들을 모두 뭉뚱그려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만, 이 노는 인간들은 확실히 일하는 인간들의 논리와 질서를 흔드는 지점이 있지요. 이런 것을 무위의 정치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런 비정치성의 정치성, 무위의 정치성 논의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정치적이라는, 그래서 현실에 대해 어떤 관심도 갖지 않고(무심) 어떤 실천이나 참여도 하지 않아도 된다(무위)는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 내재한 정치성에 대한 이야기가 곧잘 예술의 심미성에 대한 찬양으로만 해석되어 버리고 마는 것처럼.
 
 서희원___ 가령 이런 거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지금 FTA가 계속 협의되는 중이죠, 그 협의가 되고 있는데 그 협의를 이런 방식으로 바꿔라, 이게 더 이익이다, 라고 새로운 대안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협의의 중요성을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그게 더 강력한 정치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이선우___ 아이러니한데요. 그것도 ‘무위’로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만, ‘하지 말라’는 거니까, 그런데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은 무위가 아니고 적극적인 참여잖아요. 무위의 정치성이라는 것이 훨씬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서희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복도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전복적인 결단의 힘, 이를테면 촛불시위 같은 것과도 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은데요.
 
 복도훈___ 촛불시위를 재현한 소설을 얘기하는 층위는 아니겠죠? 
 
 이선우___ 네. 그런데 그렇게 현실이 전복된다고 해서 이 세계가 바뀔까, 그 와중에 우리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냥 지배 주체만 바뀌는 것은 아닐까 저는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복도훈___ 그건 너무 앞서 나간 거 아닌가요? 우리가 볼셰비키와 미래파, 레닌과 마야코프스키의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이선우___ 그런가요? 그런데 계속 그런 혼란이 오는 것 같아요. 문학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면 현실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참여가 아쉽고, 현실 정치에 대한 참여를 부르짖으면 그건 문학의 정치가 아닌 것 같고. 이 둘이 같이 가야 하는데, 자꾸 한쪽만 이야기하니까 부족한 것이 느껴져서 원점으로 회귀하게 되는 거죠. 그럼에도 제가 랑시에르의 논의에서 주목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방금 말씀드린 그 논리 때문입니다. 감각적인 것을 다시 나누지 않는 한, 그러니까 단순히 지배 주체의 변화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은 그 자체로 예술의 본질과 맞닿아 있지만, 메타 정치뿐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정치나 삶에서도 계속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삶과 예술, 정치와 미학은 그러므로 그렇게 양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요.


 서희원___ 문학이 가진 정치성의 최대치가 뭘까요? 문학이 만약 지금 같은 상황에서 현실 정치를 대신할 수는 없잖아요? 문학이 할 수 있는 최대치라는 것은, 현실 정치에 더 관심을 많이 기울이게 하고 조금 더 대안을 생각하게 하고 거기에 시선을 두게 하는 것, 이러한 사유를 행동으로 이끄는 것이 아닐까요? 그게 현재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문학적인 방식이 아닐까요? 
  
 복도훈___ 저는 그 사회에 속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에서 안 보이는 존재들, 그들을 불러내고 새롭게 감각하는 방식을 문학이 정확히 포착하는 것이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논의의 최대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평등주의로 사고하고 실천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저도 물론 ‘모든 문학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지 않은 문학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남들 따라 랑시에르를 읽었지만, 정치적인 것이나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무지한 스승』에서 말한 아무나의 정치, 급진적 평등주의가 제겐 인상적이었습니다. 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모두 좋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고 고민하는 것만큼이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려고 하는 과잉을 포착해야 한다는 거죠. 아무나의 정치가 있다면, 아무나의 문학도 있다고 봅니다. 저는 랑시에르를 그렇게 읽었습니다. 한편 다른 의미에서 우리가 이른바 문학적으로 망설이고 유예하고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힘이 센 누군가는 결단을 내리고 결정을 해 버리는 식으로 우리 삶 자체를 바꿔 버리는 국가나 기업의 힘이 어느 때보다 강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거든요. 그것이 기업의 권력이든 그들과 결탁하는 국가의 권력으로든 간에요. 사실 그런 논의들이 문학에서는 너무 없는 건 아닌가요. 이건 무슨 촛불시위를 소설로 쓰거나 정경유착의 모순을 소설로 쓰거나 그런 문제만은 아닐 겁니다.
 


 장성규___ 복도훈 선생님 말씀대로 정치적이지 않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은 정치성을 읽어내는 독법의 문제일 것 같아요. 분명 소재적인 층위에서 백수나 루저 등을 다루는 작품은 많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단지 소재에 국한된다면 큰 의미를 지니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백수나 루저의 시선에서 포착되는 저항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예컨대 김사과 소설에서 나오는 루저들은 단순한 루저가 아닌 게, 그들 스스로가 자신이 루저나 백수인 것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자학을 한다거나 신분 상승을 해야겠다는 욕망을 발현하는 게 아니라 역으로 일반적으로 스펙을 쌓고 욕망을 쌓는 것에 대해 그것을 왜 욕망해야 하는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질문을 해요. 이런 것이 2000년대 문학이 보여주는 새로운 정치성의 한 사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칙릿으로 대표되는 풍속소설 역시 단순하게 풍속소설로 단일화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풍속을 가지고 오면서 이 풍속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고 유통되는가, 혹은 풍속이 어떻게 일종의 상징 자본을 형성하면서 구별짓기의 정치를 진행시키는가라는 독법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재영의 『스캔들』에서 코드의 생산과 유통의 메커니즘을 읽어내거나, 김사과의 『미나』에서 상징 자본의 구별 짓기 문제 등과 같은 정치적인 질문을 읽어내는 게 중요한 거 같고. 지금 우리가 정치와 문학에 대해 얘기하면서 먼저 드는 생각은, 선험적으로  정치적인 것을 추상적인 프레임으로 재단하기보다는, 역으로 구체적인 텍스트로부터 새로운 정치성을 읽어내는 식으로 귀납적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나 싶네요.
 
 이선우___ 젊은 작가들의 절망적이고 종말론적인 작품을 읽으면서 제가 고민한 것은, 우리가 너무 거대한 구조를 가지고 사유를 하고 지구적 차원에서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거예요. 물론 그런 것이 필요하지만 그 경우 구조는 너무 크고 개인은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고 그래서 결국 절망밖에는 답이 없었던 것 아닐까요. 어쩌면 그 작가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저의 문제일 수 있는데요. 제가 절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요즘 하고 있는 생각은,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싸움을 시작해야겠다는 거예요. 이 거대한 체제를 이루는 것도 실은 구체적인 우리 삶의 부분들이니까요.


 복도훈___ 너무 고립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네요. 구체적인 것으로부터의 싸움이 될 만한 그런 작품이 있을 텐데, 하나만 말씀해 주세요. 
 
 이선우___ 저는 최근에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인상적으로 읽었는데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주인공이 벌이는 싸움은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개인적인 믿음에서 시작한 개인적인 싸움입니다. 이정희의 반대항에 놓여 있는 강석원은 권력과 언어를 가진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긴 합니다만, 그 사람만 보면 그도 실은 연약한 한 개인에 불과하죠. 하지만 사실 이정희가 싸우는 대상은 강석원이 아니라 강석원이 대변하는 지식 체계, 근대적인 담론 체계입니다. 그 지식 체계 안에서 진실은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죠. 개인, 그것도 그 구조 속에 들어 있는 개인과 구조의 싸움이니, 만만한 싸움이 아닙니다. 당연히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결코 그 싸움을 포기하지 않지요. 결말이 낙관적인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까지 분투는 계속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모습에서 진실은 드러나지요. 그래서 때로는 소소하고 개인적인 싸움일지라도 그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주체들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비단 정치권력과 싸우는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 자체에 이른바 근대적 사유를 구축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저항이 들어 있다면, 거기서 일종의 정치성을 찾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장성규___ 최근 작가들의 직접적인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 같은 것들이 4대강 문제나 69작가 선언 등의 계기를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난 건 분명한 사실이고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아직까지 이러한 정치적 행동을 작품에 어떤 식으로 투영할 것인가 미학적 논의는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고, 이 점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찬찬히 살펴보아야 할 지점이겠죠. 
  
 양윤의___ 저도 소설과 정치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들이 제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정치 논의를 현실적인 정치상황이라는 외적 조건이 압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요. 저는 문학이 정치적 상황을 단순히 상기하도록 하는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문학의 정치성은 현실과의 부정적인 ‘관계’를 통해서 유동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학이 부정하는 현실은 ‘구성적’ 현실이지요. 합의된 리얼리티나 사회적 통념이 위장하는 것을 의문시하고 심문하는 게 문학이 현실을, 혹은 정치를 사유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소설들에서 어떤 정치적 사건이 일어났다는 문제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사건>으로 구조화되는 방식들을 확인할 수 있어요. 도래해야 할 혁명이 도래하지 않는 방식으로 환기된다는 점, 그런 것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남겨진 것들



 복도훈___ 소설이나 시를 통해 정치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 저는 거기서 일종의 속화된 메시아주의를 종종 엿볼 때가 많아요. 오지 않는데, 도래하지 않는데 오라오라오라고 호명하는 겁니다. 이런 메시아주의 반대쪽에 있는 게 아마 결단주의겠죠. 최근에 주원규의 장편소설 『망루』를 읽었습니다. 소설은 르포르타주 성격이 강한데, 알레고리도 있어요. 기원 후 1세기에 로마에 대항했던 열심당원의 이야기와 정치 권력과 결탁한 교회 권력하고 싸우는 현대판 열심당원의 이야기가 오버랩됩니다. 그 안에 용산참사도 다뤄지구요. 그런데 제가 특이하게 본 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었습니다. 80년대 소설에서나 봤을 법한 이념적인 투사형 인물 같은데, 이 소설에서는 거의 광신도로 취급됩니다. 오히려 이런 설정이 참신했어요. 주인공은 오지 않는 메시아에 절망하고 재림예수로 불리는 자를 단도로 찌르고 자신도 자결하고 마는데, 이런 극단주의적 행동은 오히려 생각해 볼 만한 여지를 많이 제공해 줍니다. 문학의 정치, 소설의 정치 논의는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서 많이 얘기하는데, 왜 그 이전에는 이런 논의가 없었을까요. 용산 참사는 천재지변이 아니었어요. 그 전부터 있었던 도심재개발 문제들의 연속에 있었죠. 69작가들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에 만났죠. 얼마 전에 문화예술인들이 봉은사에서 예술인 선언을 했을 때,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이 왜 지금에서야 작가들이 모였느냐, 이리도 늦게 왔느냐 하고 타박을 하시더라고요. 늦게라도 와서 다행이라는 뉘앙스도 있었지만, 좀 많이 부끄러웠죠. 그분은 문학을 떠났고, 우리들은 문학을 하고……. 그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자, 얘기가 많이 진행된 것 같습니다. 2000년대 소설의 특기할 만한 경향으로 이른바 전통적인 역사소설의 퇴조, 그리고 뉴웨이브 역사소설의 등장 또한 장르 혼효 현상이 부상하는 것과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있을 겁니다. 역사 이후의 역사는 세계의 끝, 시간의 종말, 묵시록적 서사와도 상관성이 있을 텐데 이 부분은 아쉽지만 여기서 잠시 접고, 계속 속화된 메시아주의를 질러 보겠습니다. 전망은 하기엔 당장은 어렵지만, 그럼에도 지속과 변화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어떤 소설의 경향이 예상되는지, 계속 지속될 만한 것과 변화할 만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지 한 마디씩 듣는 것으로 오늘 대담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서희원___ 장편에 대한 유행이 상당 부분 변화를 가져올 것 같아요. 최근 몇 년 동안 장편을 써야 된다는 압박감을 작가들이 많이 느끼고 그것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장편을 쓰지 못하는 작가가 쑥스러워진 상황이 온 거죠. 어찌 됐든 장편을 써야 하고,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장편들을 연습하고 있는 거죠. 문창과에서는 단편을 중심으로 소설을 가르치는데, 지금은 장편소설을 쓰는 시대가 오고 있는 거예요. 
 
 복도훈___ 아마 커리큘럼 개편이 실행될 겁니다. (웃음) 
 
 서희원___ 장편이 등장하면 다른 작법이 등장할 테니까요. 그 이전에 장면 묘사, 미문으로도 충분했던 단편소설과는 다른 장편이 나올 거고 그것이 작가들에게 많은 스트레스가 되겠지요. 그게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 결과물의 등장이 기대해 볼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러한 변화가 문학 내적인 힘이 아니라 문학 외적인 부분에서 많은 작용을 받았다는 것에서 문학하는 사람들이 반성을 해야 되는 부분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2010년대가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 같아요.    


 장성규___ 아까 좌담 시작할 때 했던 얘기인데 특히 2000년대 중반 이후 발랄한 방식으로 현실에 대해서 형상화하려는 새로운 시도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작가들이 2000년대에는 주로 90년대적인 문학과는 다르고 새롭다는 평가에 집중된 감이 있어요. 이들이 2010년도에는 단지 기존의 것과 다른 미학적 특성을 지녔다라는 평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문제의식을 좀 더 진전시켜서 현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의 다양한 경로들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우선 들어요.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이런 류의 좌담이나 특집 등이 있을 때마다 조망된 작가들만 계속 조망되는 거 같아요. 예컨대 소설에서 정지아, 이시백, 백정희, 시에서 송경동, 황규관, 김사이 등의 작가들은 아예 언급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이런 작가들이 지닌 한계도 많지만 오히려 그런 작가들에 대한 평가도 포함되어야 우리 문학이 보다 풍성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도훈___ 늘 호명되는 작가들 말고, 가령 주원규의 작품처럼 거칠지만  문제의식만큼은 투철한 것도 있거든요. 우리는 작품의 작품성과 형상화를 유기체적 결합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나아가 정치와 미적 형상화 문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정치적으로 훌륭한 시(소설)가 좋은 시(소설)는 아니지만, 좋은 시(소설)는 정치적으로도 훌륭할 수 있다.’ 뭐 이런.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그 미적 판단과 평가라는 게 도대체 뭔가, 작품은 달라지는데 그에 대한 평가 기준은 완강하게 보수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 
 
 양윤의___ 제가 2000년대 문학을 돌아보면서 재미있게 생각되는 부분은 평론가의 명명법을 보란 듯이 빠져나가는 텍스트들이 있다는 점이에요. 그것들은 우리 문학이 보여주는 가능성의 영역이 아닌가 싶고요. 물론 무조건적으로 낙관할 문제는 아니지만, 지금 이 곳에서 논의되었던 우려와 기대들이 2010년 이후에 또 다른 방식으로 좌절되고 그를 통해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또 다른 새로움을 기다리기보다는 작가들이 지금껏 보여준 환상의 영역과 정념의 방식을 끝까지 밀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극단의 동력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 그러니까 통념적인 공통감각을 의문시하고 관성적인 인과성을 파열하는 지점이 정치적인 것의 발생지점이 된다고 믿고요.  
 
 이선우___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경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회 변화 폭이 너무 빠르고 폭력적이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되고 혼란스러운 측면도 있고 작품에서도 그런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혼란을 드러내는 작가들이, 어쩌면 지금 가장 절실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비평이 작품의 도래를 요청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러려면 더욱 작품을 잘 보는 눈을 키워야겠죠. 제가 작가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절망적인 현실의 단면뿐 아니라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줬으면 하는 것입니다. 문학은 언제나 위기 담론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젠 그 위기 담론이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이제는 우리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그 가능성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몸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문학이 바로 그렇게 몸을 바꾸는 작업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면 해요. 말을 하다 보니 약간 순환논법에 빠지는 것 같은데, 그건 사실 선후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함께 가야 하는 거겠죠.
 
 복도훈___ 일종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인가요? 
 
 이선우___ 네, 이런 생각은 랑시에르를 읽고 나서 한 생각은 아니지만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요. 감각의 분배라고 하면 좀 추상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복도훈___ 감각적인 것의 분배는 실은 구체적인 문제 아닙니까? 
 
 이선우___ 맞아요. 미학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미학화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되는 방식이었으면 합니다. 
 
 복도훈___ 저희가 열심히 대담하는 동안 고봉준 선생님께서 한가롭게 지그문트 바우만의 신작 『모두스 비벤디』를 읽고 계시더군요. 아, 방금 다 읽으셨다구요? (웃음) 바우만에게 모더니티는 근본적으로 유동적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모더니티엔 고체적인 특성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리퀴드(liquid)와 솔리드(solid). 빠르게 변하는 것과 변화가 더딘 것. 이를 응용해 보면 현장비평은 유행이나 전망, 흐름에 민감할 수밖에 없지만, 이선우 장성규 선생님께서 잠깐 얘기하신 것처럼, 늙어 감이나 명예, 육체 등등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고민하는 한강이나 정지아 같은 작가들, 『한겨레21』에 호명되었고 저희들도 호명한 작가군에 포함되지 않지만 여전히 중요한 작가와 작품도 엄연히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경향이나 흐름에 많이 치중한 얘기였기 때문에, 다른 기회가 된다면 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요. 자, 이 정도로 대담을 마무리지으려 합니다.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많이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좌담후기


한국소설의 지난 10년을 이야기한다고 모였습니다. 많은 논의가 2005년 이후로 상대적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는 듯도 합니다. 그 책임의 절반은 사회자인 제게 있어 보입니다. 대담, 더욱이 사회는 제 체질이 아닌 듯합니다. 그래도 대담에 임해 주신 선생님들이 유연하고 능숙하게 한국소설의 지난 10년간을 왔다갔다하면서 잘 톺아 보셨습니다. 좋은 이야기들, 다시 숙고할 만한 것에 대해 좋은 생각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문학평론가 복도훈)

 


10년을 단위로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 봐야 되지 않을까. 꼭 10년 단위를 사용해야 한다면, 87년 민주화, 97년 IMF, 07년 이명박정부의 등장, 이런 식으로 끊는 것이 유효하기 않을까. 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학평론가 서희원)


2000년대 첫 10년을 결산한다는 거창한 제명 아래, 다섯 명의 서로 다른 색깔들을 가진 평론가가 모였다. 이미 몇 차례 얼굴을 익힌 사람들이고, 나름대로 서로의 글들도 읽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만나서 이야기를 하니, 생각보다 중구난방 재미있었다. 좌담에서는 2000년대 중반이 또 다른 분기점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 다섯 명이 모두 2000년대 중반 이후에 등단을 한 지라 논의가 2000년대 초반보다는 중후반에 집중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3시간 넘게 이야기를 했지만, 하는 동안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논의를 맺지 못했다고 혹은 이미 나왔던 이야기만 반복하고 말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별로 정리할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글로 옮겨놓고 보니 방대했다. 물론, 역시나 중구난방이긴 했지만. 음, 그래서 방대했던 걸까?
녹음시설이 되어 있는 곳이 그곳뿐이어서 그랬겠지만 겨우 다섯 명을 불러놓고 그 넓은 대회의실에 들어가서 좌담을 하라니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던 기억도 난다. 사회를 맡은 복도훈 선생님의 그 뻣뻣한 첫마디라니. 마치 모두들 청문회에 불려나온 것 같았다. 그래도 역시 대화의 힘이란 게 있어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차 편안해졌고, 좌충우돌도 줄어든 것 같았는데, 그래서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하자 이미 세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아쉬움이 없지 않았으나 심신이 지쳐서 더 이상 좌담을 진행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비슷한 고민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한자리에 모여서 이야기하는 일의 즐거움은 만끽했던 것 같다. 나중에 녹취파일을 보니 경악할 정도로 문장이 엉망이고 중언부언도 심했지만, 그래서 깊이깊이 반성했지만, 이번 좌담을 통해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많이 정리되었다.
곧 2011년이다. 숫자의 미혹에 속아 넘어갈 필요는 없겠지만, 쇄신하는 기회로 삼는 것은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국문학의 또 다른 내일을 기대한다.
(문학평론가 이선우)

이제 막 과거가 되고 있는 중인 10년을 돌아보는 게 가능할까? 우리 문단의 2010년 지형도를 그리는 일은 조금 망설여지는 작업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아직 나는 그 ‘와중에’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생각 거리를 남긴 좌담이었다.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서 기쁘다.  (문학평론가 양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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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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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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