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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과 영향, 2000년대 소설의 현재와 미래

  • 작성일 2010-04-08
  • 조회수 5,228

특집
 

지속과 영향, 2000년대 소설의 현재와 미래
 

 

사회 / 정영훈(평론)
패널 / 이수형(평론), 백가흠(소설가), 백지은(평론)

 

 

 

 

2000년, 그리고 10년

정영훈 : 2010년이 되니 왠지 지난 10년을 한번 정리해 보아야 하지 않나 하는 부담이 생깁니다. 매 10년이 지날 때마다 실제로 그렇게 해 오기도 했고요. 문장웹진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죠. 저로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발표된 소설들과 새롭게 등장한 작가들이 그 전과는 다른 몇 가지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느끼는데, 길게는 10년, 짧게는 최근 4~5년 정도를 대상으로 잡아 뭔가 특기할 만한 사실들을 정리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소설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것인지, 혹은 전개되기를 바라는지 이야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고요.

 

이수형 : 사회를 맡은 정영훈 선생님이 먼저 화제를 정리해 주시면 얘기를 풀어가는 게 좀 더 수월할 것 같습니다.

 

정영훈 : 글쎄요, 그렇게 되물으시니 좀 당황스럽기는 하네요.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몇 가지만 이야기해 볼게요. 언젠가 어느 잡지사의 요청으로 2000년대 소설에 대한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물론 특수한 목적을 띤 글이었기 때문에 2000년대 소설의 전반적인 양상이라든지 2000년대에만 한한 특징을 서술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요, 아무튼 그때 저는 2000년대 소설이 이전과는 달리(1980년대 소설과 1990년대 소설은 어떻든 현재적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삶의 현실성 자체로부터 이륙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이런 점들에 주목을 했습니다.

첫째, 2000년대 작가들은 예전 세대들에 비해서 직접 체험보다는 간접적인 문화 체험에 의존하는 성격이 강하다. 둘째, 이주 노동자와 외국인, 혼혈 등 이전에 없던 여러 타자들이 등장함에 따라 이들을 어떻게 우리 속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셋째, 전통적으로 인간이라 불러오고 인간에게 부여한 자질들이 부정되고 있으며, 최근 들어서는 유령 같은 화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넷째, 전통적인 소설 형식이 파괴되고 다양한 실험들이 모색되고 있다. 본문의 글자 크기를 자유롭게 바꾼다든지, 한 페이지를 같은 글자로 채운다든지, 한유주의 어떤 소설에서처럼 부재하거나 현실화되지 않은 어떤 사태를 서사화한다든지……. 다섯째, 장르적 상상력이 도입되고 있다. SF라든지 판타지라든지 칙릿 같은 장르들 말이죠.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장르, 본격문학이라고 불리는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SF가 아닐까 생각하고요. 그 외에 비현실적인 요소, 환상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현실 속으로 들어오거나 현실과 공존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등등.

이 몇 가지는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2000년대 소설 전반을 아우르거나 2000년대만의 특질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논의할 주제들을 여기에 한정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좀 다양하게 주제를 잡아 논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겪어 온 문학사적 현실을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요. 백가흠 선생님은 작가의 입장에서, 이수형 선생님과 백지은 선생님은 비평가 입장에서 각각 2000년대 문학을 통과해 왔는데, 저마다 개인적인 체험이 있고 느끼는 바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먼저 이야기해 보죠.

 

백가흠 : 정영훈 선생님이 정리해 온 것은 2000년대 한국소설의 경향을 파악하는 통상적인 정리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자리에서는 소설이 절대 떨쳐버릴 수 없는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인 시간의 관점에서 작품들이 파생된 근거를 찾아보는 방향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작가 입장에서 10년 단위로 뭔가를 정리하고 그 다음에 올 트렌드를 예상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2000년대 10년 동안의 성과를 돌아보는 것이라면 이런 작품들이 탄생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즉 작가들이 문학적인 수업을 거쳐 온 90년대와 연관시키는 작업들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실제로 10년을 되돌아보면 많은 작가들이 등장해서 새로운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성과를 얻은 것도 사실이지만, 냉정하게 돌아보면, 2000년대 문학의 뚜렷한 성과는 90년대 등장한 작가들의 활발한 소설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끊임없이 자기 세계에 탐닉한 소중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2000년대 중반 이후, 여기서 언급된 신인 작가들의 문학적 성과보다 더 의의가 있지 않나 싶어요. 예를 들면 구효서, 은희경, 윤대녕 등의 단편, 신경숙, 김연수, 김경욱 등의 장편이 2000년대의 값진 문학적 성과 같습니다. 이들을 90년대 작가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을 것 같아요. 이들이야 말로 오히려 2000년대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대 신인들이 근거하고 있는 문학적 경향들을 밝히고 그 다음 것들을 예측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수형 : 백가흠 선생님과 비슷한 입장에서 얘기를 이어 보겠습니다. 오늘의 좌담이 구체적인 작가나 작품이 아니라 ‘2000년대 소설’이라는 다소 막연한 대상을 두고 진행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2000년대 소설’이라는 대상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좌담의 출발점이겠는데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 출발점 자체가 끝내 해결이 안 날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좌담을 하는 이유도 2000년대 문학이 과연 무엇일까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 번 더듬어 보자는 뜻에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영훈 선생님이 잘 정리해 주신 여러 양상들, 가령 문화 체험 세대의 상상력이나 다문화적 상황, 비인간화 경향, 전통적인 소설형식의 파괴, 장르적 상상력의 도입, 2?30대 여성들의 욕망의 문제, 현실에 개입하는 비현실성 등은, 백가흠 선생님의 말씀대로 2000년대 소설을 설명하기 위한 통상적인 관점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양상들이 2000년대에 전혀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도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겠죠(웃음). 예컨대, 대중문화 체험이라는 것도 90년대 들어 김경욱은 물론 백민석이나 배수아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소설에 반영되어 왔고, 비인간적 태도나 형식 파괴 역시 이전부터 있어 왔다는 점에서 2000년대 소설만의 특징은 아닐 텐데요. 이런 것이 통상적으로 2000년대 소설의 특징으로 말해진다면, 이전 시기와 공유되면서 미묘한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을 분절해 낼 필요가 있겠고요.

두 번째는 백가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본 것인데, 시의 경우는 최근 들어 새로움 혹은 단절이 훨씬 강하게 느껴지는 데 비해 소설은 좀 상황이 다른 것 같습니다. ‘기성작가 : 신인작가’의 대립구도가 확실치 않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기성작가들이 새로움을 통해 갱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의 담론 공간이 그런 식의 구도로 분할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특히나 90년대 등단한 작가들은 지금 전성기를 맞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2000년대 문학의 특징을 분절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어디까지 얼마만큼 의미 있을지는 계속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백지은 : 10년 단위 시기 구분의 작위성에 대해 지적해주신 것은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게는 최근 10년 간, 짧게는 최근 5년 간, 이런 식으로 돌이켜볼 때, 특정 시기에 소설에서 유난히 강세를 보이는 스토리와 스타일이 분명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볼 만한 것이기에, 오늘 우리도 이런 자리를 갖게 되었고 그동안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간 것 같아요. 어떤 작가가 90년대에 등단했는가, 2000년대에 등단했는가, 그의 대표작이 몇 년 대에 발표되었는가, 어느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는가 하는 것들을 가지고 ‘몇 년대 작가’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만, 가령, 지금으로부터 한 10여 년 이전, 그럼 90년대겠죠, 그 당시 소설에 만연했던 스토리와 스타일에 대한 키워드를 뽑아 보고, 그 키워드들이, 지금으로부터 한 5년 내지 7-8년 이내에 발표된 소설들에도 어울릴까를 생각해 본다면, 그렇지 않다고 느낄 변화의 지점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을 살펴보고 싶은데요. 좀 범박한 내용이 되겠지만, 가령 90년대 소설에서 개인, 일상, 욕망, 내면 등을 (80년대 소설에 대비시켜) 자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면, 최근의 한국 소설들에 대해 그 키워드들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의 ‘개인’은 요즘 들어 훨씬 더 고독한 주체가 되어 있고요, 90년대의 ‘일상’은 지금 보면 인터넷 공간이나 각종 디지털 문명으로 가능해진 문화 체험 같은 것으로 인해 그때와는 사뭇 다른 라이프스타일로 변화됐습니다. 또 90년대 소설에서 개인의 ‘욕망’을 발견했다고 얘기했었다면, 요즘 소설에서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차라리 고독한 주인으로 죽겠다.’는 태도가 더 우세한 것 같아요. 욕망하는 주체라기보다 고독을 주재하는 주체랄까요, 저는 최근의 소설들에서 전체적으로 ‘고립’에 대한 감각이 두드러지는 게 느껴져서, 2000년대 소설의 어떤 부분을 그런 것에 착안해서 다시 살펴보는 것, 이것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 뭐 그런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80년대와 90년대 소설이 남긴 것

 

정영훈 : 세 분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까 ‘2000년대 소설’이라고 한정짓는 방식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 문학사는 고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10년 단위로 시대를 구분하는 데 익숙해 있죠. 사실 거기에 전혀 이유가 없지는 않았던 것이, 매 10년 단위마다 꼭 한 번씩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있어 왔고 그게 하나의 시대를 구분 짓는 요인으로 역할을 해 왔거든요. 물론 역사적인 사건을 시대를 구분하는 계기로 삼고 문학적 현실을 거기에 맞춰 재단해 왔다는 점에서, 우리의 문학사 기술이 여전히 문학사회학적인 방식에 크게 의존해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문학이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둘의 영향관계를 중요하게 보기 때문에 이런 식의 서술이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2000년대 문학을 특징짓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무엇으로 잡을 것이냐, IMF로 할 것이냐, 6.15선언으로 할 것이냐 하는 최근의 논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죠.

‘2000년대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가 과연 있는지 정색하고 묻는다면 조금 난감하기도 합니다. 2000년대 문학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좌담들을 보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10년 단위로 구획하는 것이 마뜩치는 않지만’ 같은 말들을 허언처럼 꺼내 놓더라고요. 문학사적 사실들을 10년 단위로 구획하는 방식의 인위성이라든지, 이렇게 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놓칠 수밖에 없는 부분들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죠. 아무려나 2000년대 소설을 어떤 형태로든 규정해 보자는 욕심은 버리더라도, 특기할 만한 문학적인 사실들을 이야기해 볼 수는 있을 텐데요. 2000년대 소설을 바라보는 기존의 입장들을 대타적인 위치에 놓고 논의를 해 봐도 좋을 것 같고요. 백가흠 선생님은 2000년대 문학에서 특기할 만한 중요한 성과들이 90년대 혹은 그 이전에 등단한 작가들이 전성기에 이르러 발표하는 작품들이라는 말씀들을 하셨는데요, 적어도 2000년대 소설을 맥락화하는 이제까지의 논의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별로 언급되지 않았거든요.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어떨까요.

 

백가흠 :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어떻게 보면 그게 전략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그런 전략을 세우고 작품을 쓰는 작가들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요. 쉽게 말을 바꾸면 쓰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죠. ‘쓰다 보니’의 필연적인 이유가 모두에게 없냐. 그건 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적인 태동을 일으킨 울림도 있고 혹은 역사적인 사건도 있을 테고요. 이런 것들을 좀 돌아본다면 2000년대 이후에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이 느끼는 문학적 부채의식은 다분히 90년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스타일을 규정짓거나 간략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90년대로 부터 20년이 지나가고 있는데. ‘쓰다 보니’의 필연적인 이유를 거기에 두고 있는 작가들이 많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90년대 있었던 세 경향 정도로 단순화해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리얼리즘에 대한 확신이고, 또 하나는 활발하게 논의된 소설의 새로운 형식 시도에 대한 논쟁이겠죠. 또 하나는 적절한 말을 찾기가 힘든데, 문학적 대중화에 헌신한 여성작가들의 1인칭 내면문학? 이런 정도로 규정지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2000년대 출현한 신인들이 완전한 새로움이나 새로운 형식으로 이 세 가지 버전에서 벗어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선배작가들에 대한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까요. 그럼 문학적으로 또는 인문학적으로 심화되었냐 하는 것은 후대에 평가해야 할 것 같고요. 스타일적인 부분, 형식적인 측면, 혹은 큰 주제에 있어서는 그 정도로 간단히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2000년대를 살피려면 90년대 후반을 잘 살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금 새롭다고 느껴지는 소설들보다 먼저 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작품들에 있어 오히려 새로운 시도들이 많았지 않나 생각 합니다. 2000년대의 키워드 중에 하나인 새로운 소설에 대한 시각에서 보자면 말입니다. 좀 전에 이수형 선생님이 말했지만 백민석과 김영하도 빼놓을 수 없고, 더한다면 전성태도 의의 있는 작업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마치 세 작가가 2000년대 신인들의 맏형처럼 느껴집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업그레이드는 민망한 것 같고요. 누구 하나가 건드려 놓았던 것에 대한 탐닉들이 2000년대에 주로 많이 나타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이라는 형식에 대한 강박증을 떨쳐버리지 못한 작가들도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그게 많이 읽히고 잘 읽히는 시대이기도 하고요. 시대를 그렇게 구분할 것 없이 큰 경향으로 놓고 본다면 그다지 새로운 작가들이 출현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견해에서 예외적인 작가가 있다면 저는 한유주와 황정은 정도를 꼽고 싶어요. 정말 이것은 우리가 익히 보지 못한 방식의 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보면 인물을 형상화하는 것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고 한다면 인물이 갖고 있는 주제적인 측면에서 많은 것이 변화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정영훈 : 좀 에둘러서 표현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혹 작가들이 들으면 뼈아픈 부분이 될 수 있어 그런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요.

 

백가흠 : 어떻게 보면 이제는 백민석이라는 작가가 사라져 버렸잖아요. 만약에 다른 작가와 비슷하게 활발하게 활동하고 10년 동안의 성과를 계속 이어왔다면 소설이 지나온 지난 10년간의 판도도 어느 정도 변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솔직히 대놓고 백민석의 후예를 자처하는 작가들이 많이 있죠. 또, 전성태 작가가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매향』에서 시작해서 『국경을 넘는 일』, 그 다음에 『늑대』에 이른 세 권의 소설집과 한 편의 장편이죠. 과작의 작품 수가 얘기하듯이 2000년대 시작이나 90년대까지만 해도 암울하게 비쳤던 사실적인 경향들이 수위나 수준 자체를 적절하게 이룩해 놓은 것이 아닌가. 이런 선배 작가들의 영향을 떨칠 수 없다는 얘기지요. 2000년대에 등장한 작가들은 다음 세대, 10년쯤 뒤에 이런 성과들이 선배들과 맞물려서 자리도 잡고 문학사적인 평가도 내리는 게 수월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결과론적인 것을 놓고 본다면 가장 큰 이슈가 됐던 김영하 선배의 작품들이 표면적으로 엄청난 환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문학적으로는 위축되지 않았나 싶어요.

 

백지은 : 백민석 이야기를 하시니까 이런 생각도 드는데요. 백민석이 왜 사라졌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드는 생각이요. 백민석이 우리한테 들려줬던 그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그 당시 우리가 좀 더 잘 듣고, 잘 읽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그랬다면 어땠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발표된 백민석의 작품만큼 그 이전의 소설들과 다르면서 당대의 새로운 분위기를 독특하게 처리한 작가는 거의 없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귀한 작가였는데 그때 그를 더 잘 알아보고, 적절하게 불러주고 그랬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그리고 백가흠 선생님께서 정리해주신 (2000년대로 이어지는) 90년대 소설의 판도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본다면요, 즉 리얼리즘에 대한 확신, 활발하게 논의된 모더니즘 계열, 그리고 대략 여성작가들의 1인칭 내면 문학이라고 하셨던 그 판도가, 선생님께서는 90년대 소설에 문학적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의 경향을 이야기하기에 여전히 유력하다고 보셨는데, 제 생각에는 어떤 의미에서 지금 현재의 작가들에게는 그 판도가 꽤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닐까 합니다.

1999년인가 2000년인가 그때쯤, 90년대 작가들을 리얼리즘 계열, 모더니즘 계열, 그리고 모더니즘에서 실험이 센 편, 약한 편, 이런 식으로 소박하게 나누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지금 2000년대 소설들을 이야기하려고 보니, 아무리 편의상의 어법이라도 더 이상 리얼리즘, 모더니즘이란 말이 안 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정영훈 선생님이 한국소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사실주의적인 경향이 탈색하면서 현실에서 이륙해버렸다고 하셨던 그 느낌이 저는 맞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리얼리티’라는 것에 대한 감각 자체가 어느 면에서 완전히 바뀌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현실을 이륙해버렸다는 것이 과연 어떤 뜻일지, 이른바 “탈현실적 (소설)문법”이라 불리는 허구 장치의 등장 같은 것에 대해 조금 면밀히 짚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 이야기했던 백민석 작가의 소설에서도, 다르게 보였던 그만의 특징적인 면모가 그 이전의 ‘리얼리티에 대한 감각’과 어떻게 대비되고 조화되는가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폈더라면 백민석 작가의 활동이 더 이어질 수도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혼자만의 억측도 되구요.

 

백가흠 : 그것은 평론가들의 몫은 아니죠. 작가들의 몫이기도 하고 독자들의 몫이기도 하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있겠죠.

 

이수형 : 얘기를 진행하다 보니 2000년대 소설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또는 찾아야 한다는 쪽과 이전 시기와의 연속성이 좀 더 중요하다는 쪽으로, 뚜렷하지는 않으나마 경계가 생겨서 좌담의 생산성을 위해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얘기를 조금 바꿔서, 제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것이긴 하지만, 90년대 문학이라고 통칭되는 소설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제가 받았던 새로움과 낯섦, 곧 “이건 뭔가 다르구나”라는 느낌의 크기와 2000년대 소설에 대해 느꼈던 새로움의 크기는 좀 다른 것 같아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90년대 소설에서 느꼈던 새로움이 제게는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백가흠 선생님과 백지은 선생님이 큰 틀에서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또 그 안에서의 의미심장한 분절들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와 관련하여 1995년쯤에 함께 등장했던 하성란, 조경란 등과 김영하, 백민석 등의 소설에 대해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자에 속하는 소설들은 소설의 문법이나 문체의 측면에서 교과서라고 할 만큼 정교하게 잘 쓰여진 작품으로 등장했던 것 같아요.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의 틀로도 설명하기 어렵고, 또 거기서 현대인의 일상이나 소외 같은 주제를 찾아내는 것도 부차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우선은 잘 쓰여진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소설 문법상의 정교성을 추구하는 소설들이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김영하나 백민석 등으로 대표되는 후자의 경우처럼 소설의 주제나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 대단히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경향이 다른 새로움으로 등장했던 것 같아요. 말하다보니 남성작가와 여성작가로 나누어졌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요.

백가흠 선생님이 가령 ‘내 소설은 백민석 소설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라고 말씀하시지만, 그건 당연히 과장된 전략적 발언일 테고요, 아무튼 백가흠 선생님이 90년대 작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면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기존의 소설과는 다른 90년대 소설의 새로움이 창출해 낸, 소설 담론의 새로운 공간으로부터의 영향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리얼리즘 : 모더니즘’으로 구획될 수 없는 공간이겠지만, 그 공간은 위와 같은 경향들(그 밖에 다른 경향들도 있을 테지만)로 출렁거리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좀 더 얘기해 보겠습니다. 정교한 구성과 문체를 추구하는 소설이 있고, 주제의 파격을 추구하는 소설이 있다면, 지금의 젊은 작가들은 정교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것 같지는 않아요. 뭔가 덜 다듬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소설도 많이 나오고, 물론 소설의 형식상의 수준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은 틀림없는 것 같은데 그런 기준에서는 거칠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것 같은 소설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고요. 두 번째, 파격적인 주제나 태도 같은 측면에서도 90년대 소설만큼 파격 자체를 드러내거나 그것을 자신의 존재이유로 삼지는 않는 것 같아요. 물론, 파격이 늘 전제되어 있고 늘 가능하다고 생각은 하겠지만, 지금의 주인공들은 그런 파격을 향해서 끝까지 가려고 하는 태도는 오히려 축소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발전이라는 과점에서 본다면 더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새로울 게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90년대 작가들은 나갔는데 2000년대 작가들은 왜 그런 것을 향해 앞서 나가지 않느냐는 점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지은 : 이수형 선생님 말씀대로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갈 때 느낀 새로움도 컸지만, 역시 선생님 말씀대로 그 때의 소설들은 한국 근대 소설의 전통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정교하게 잘 쓰인 소설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이 제게는 더 크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2000년대적 특징이랄까, 아니 그보다는 최근 몇 년 사이 발표된 소설들에 이전과 달라진 점이 꽤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소설이라는 것이 언제나 파격과 쇄신의 자리에서 씌어지는 것일 테니까, 어떤 작품의 형식을 얼마나 급진적인가 온건한가 말하기는 어렵지만요, 소설이라는 양식 자체를 무화시키는 듯한 작품들이 다수 나왔던 것도 사실이구요, 박형서나 이기호의 다양한 양식 실험 같은 것이 대표적일 텐데요.

물론 이런 것이 이전에는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제는 이런 형태 실험이 소설의 양식을 확대하는 데 일조했다고 판단해도 무리가 아닐 만큼의 경향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건 2000년대 이후라 해도 되지 않을까요. 타이포그래피가 다양해지거나 문단 구성의 방식이 바뀌는 행갈이 방식을, 편한 말로 ‘박민규 식’이라 부르면서 하나의 경향으로 인정하는 것도 최근의 현상 중 하나구요.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과연 핵심적인 파격과 쇄신을 동반하는가, 유희화 경향에 편승한 부분적/표면적인 것인가 일 것이므로 그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문학 독자의 언어 사용 장(場)의 변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출현한 것이어서 충분히 의미 있는 흐름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변화보다 더 주목되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느끼는 상황, 대상, 분위기 등이 상당히 변화했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전성태의 『늑대』에 실린 소설들도 현실적이지만 박민규의 『카스테라』에 실린 소설들도 현실적입니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도 현실적이고 정한아의 『달의 바다』도 현실적이지요. 김영하의 『빛의 제국』과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가, 김연수의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와 강영숙의 『리나』가 다 ‘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데서 2000년대 소설의 새 감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소설에서 2000년대적인 것이란 1

 

정영훈 : 최근에 몇 차례 신인상이나 신춘문예 심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응모작들을 읽는데, 지금 작가가 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는 작품 군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들이 현재 우리의 문학적 현실을 가늠하게 주는 시금석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아무튼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가장 눈에 띄는 예들은 소위 말해서 ‘센 소설’, 백가흠 선생님이나 편혜영 작가의 소설이라든지, 황정은 유의 소설이라든지, 장르적인 성격이 강한 소설들이었습니다. 적어도 등단을 준비하는 작가들이 보기에는 이런 소설이 대세라거나 눈여겨보아야 될 문학적 현실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백가흠 선생님께서 ‘쓰다 보니’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의 일부라면, 평론가 입장에서는 비평적인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그 현실을 재단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막연하게 문학적 현실이라고 했을 때는 드러나지 않는, 그래서 좀 더 예각화한다든지 잘라내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게 10년 단위가 됐든, 몇 년 단위가 됐든 특징적인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겠죠.

 

백지은 :  작가에게 소설이 ‘쓰다 보니’인 것과 마찬가지로 평론가에게 소설은 ‘보다 보니’, ‘읽다 보니’인 게 아닐까요. 소설의 어떤 부면을 특별히 예각화하겠다, 또는 이런 이야기를 담론화해야겠다, 쟁점을 만들어야겠다 하는 등의 전략을 가지고 비평을 쓰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봐요. 평론도 자발적인 글쓰기인데 작품하고 만나서 뭐가 나와야 쓰지 아무것도 만나지 못한 채 쓸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만 평론을 쓰는 사람들은 내가 유난히 즐기는 소설, 나한테 익숙한 소설 같은 것만 골라서 보지는 않으니까 취향과 관계없이 여러 작품들을 읽다 보면 문득 몇 년 전에 읽던 소설들과 달라진 면이 있다는 걸 느끼게 돼요. 그런 걸 간과해선 안 된다는 생각도 들구요. 신인상 심사에 관해 하신 말씀도 역시 여러 작품들을 읽다 보니 생겨난 느낌에 관한 말씀이 아닐까 싶은데요.

최근 소설들을 읽으면서 제가 강하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아까 살짝 언급하기도 했지만, 스토리상에 나타나는 ‘고립감’이에요. 90년대 소설의 화자들이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목소리를 많이 들려주었다고 하는데 그런 화자들도 외향적이라거나 관계 지향적이었던 건 아니었겠지만, 제 느낌에는 이렇게 ‘혼자’인 화자들이 전에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다들 지독하게 고독해 보여요, 요즘 소설 속의 인물들이요. 2000년대 비평 공간에서 ‘탈현실의 문법’이라고 명명해왔던 경향, 즉 일반적인 현실을 지우고 환상에 빠지는 경우든 현실의 틈새를 통해 상상을 뻗어가는 경우든, 한국 소설에서 그런 것이 거의 주류적인 흐름이라 할 정도로 많아진 것도 스스로를 고립시킨 화자들의 행위로 보이구요. 누군가를 직접 만나고 소통하고 갈등하면서 현실을 직접 경험하기보다 개인화된 디지털 매체를 통해 다종다기한 문화를 체험하거나 인간들 사이의 접촉이나 소통도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지는 형태의 이야기들 또한 주로 고립된 인물들이 선택한 생활양식으로 보입니다.

최근 3-4년 사이에 더 강해진 경향이긴 한데요, 경쟁 시스템에서 살아남아 사회에 안착하는 데 무능하거나 혹은 그러기를 거부하는 청년들, ‘루저’라고도 부르고 ‘히키코모리’라고도 부르고, 물론 다 다른 뜻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키덜트’라고도 부르는, 그런 부류의 인물들에게서도 ‘고립’의 감각은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 같아요. 가령 김미월의 『서울 동굴 가이드』에 나오는 외로운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것을 ‘최소 낙원의 동굴’이라고 명명했던 것에서도 드러나고요, 최근에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와 『앨리스의 생활방식』을 펴낸 장은진은 매번 그야말로 ‘혼자 놀기의 달인’ 같은 인물을 창조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작년에 발표된 윤고은의 단편들(「1인용 식탁」, 「인베이더 그래픽」 등)에도 늘 혼자 지내는 인물들의 일상과 상상이 직조되어 있구요. 또, 최근에 가장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한유주의 거의 모든 소설들에서 느껴지는 고립감, 단절감도 이와 관련된 느낌입니다. 90년대에 천착한 소설적 주제였던 ‘개인’, ‘내면’ 등의 영역이 더 강력해진 형태랄까요, 응축된 형태랄까요, 어쨌든 이전 시대와의 연관성을 고려한다면, 소설의 본래적 속성이면서 또 지난 시절에도 분명 있었던 경향의 강화된 형태가 이 고독한 인물들, 화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영훈 : 이수형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2000년대 소설에서 우리가 특기할 만한 것,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2000년대 이전의 소설과 차별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요, 주목해 주어야 마땅한 것, 또는 마땅히 주목해 주어야 함에도 기존의 비평담론이나 2000년대 문학을 정리하는 자리에서 호명해 주지 못한 것이랄까, 이런 것들을 혹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수형 : 2000년대 소설에 나타나는 중요한 세계관 중의 하나로 일종의 ‘필연성에 대한 강박’ 같은 것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필연성은 인간의 의지와는 상당히 먼 것인데요, ‘이게 필연이구나’라고 인지할 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느낌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아요. 운명에 대한 비장함을 느낄 수도 있고, 요즘에는 필연성을 유머러스하게 넘어가려고 하는, 다시 말해 필연성이 주는 비장함을 절감하려는 시도가 많이 보이는데요. 이런 태도는 다른 쪽으로는 ‘탈 휴먼’적인 경향과도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이 있으면 그 반대편에 야만이 있거나 목가적인 뭔가가 있었다면, 지금은 인간에 대비되는 것이 야만이나 목가같이 가치가 개입된 대상이 아니라 그냥 자연이 아닐까요? 그 자연은 동시에 필연이기도 하고, 그처럼 자연이나 필연으로 다가오는, 그냥 흘러가는 것에 대해 다소간 포기를 하면 상처를 덜 받을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와 의지를 핵심으로 삼았던 근대적 인간상에 비춰보면 일종의 ‘탈 휴먼’적인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백가흠 : 말씀하신 것에 많은 부분 동감합니다. IMF라는 큰 사건을 가운데 놓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많은 것이 변했겠지만 표면적으로 느끼는 온도차라고 할까요. 첫 번째는 경제적인 몰락이겠죠. 경제적인 것을 자본으로 획일화시켜 떼놓고 본다면 자본의 몰락이 결국에는 최소한의 인간미를 유지시켜주던 가족형태를 통째로 파괴시키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었나 싶어요. 김애란의 등장도 거기에서 연유해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새로움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형식적이거나 새로운 시도라기보다는 주제적인 측면에서 작가들의 인식이 심화된 측면도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지은 : ‘탈 휴먼’에 관한 말씀과 ‘유머’에 관한 말씀이 함께 나오면서 조금 헷갈리는데요, ‘탈 휴먼’, ‘탈 인간’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이 겨냥하는 것은 소설의 화자들이 그렇다는 말씀이 아니라 소설에서 그려지는 2000년대적 현실이 그렇다는 말씀이신가요? 저는 최근 소설에 대해 ‘탈 휴먼’, ‘탈 인간’ 등을 이야기할 때는 우선 소설의 화자가 유령이라거나 시체라거나 인물이 거의 축생에 가깝거나 기계 같은 행태를 보인다거나 하는 경우가 떠오르거든요.

 

이수형 : 그런 경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건 아니고요. 우리가 흔히 인간주체라고 할 때 전제하는 기본적인 속성이 있잖아요. 이성적이고 자유롭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고, 또 뭔가를 추구한다는 것은 세계와 싸우거나 노동하는 것이고, 그런 식의 덕목이 지금은 약화된 게 아닌가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백지은 : 2000년대 소설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인물들의 행태를 보면 소설 주체의 ‘인간적인’ 면모가 상당히 달라졌다는 뜻으로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 주체의 등장으로 천운영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이 적당할지……, 더구나 김애란이라는 작가는 ‘탈 휴먼’, ‘탈 인간’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하기에 전혀 안 어울리는 것 아닌가요?

 

백가흠 : 자연에 훨씬 가까운 인간 자체가 실은 인간 자체로 보면 ‘탈 인간’ 한 것이죠. 우리가 익히 버렸다고 생각하는 야만성이라든가. 저에게는 그게 폭력성이 될 수 있을 것이고요.

 

백지은 : 인간의 특성이 아니라고 여겼던 야만성, 폭력성 등이 인물의 특성으로 부여되는 것을 기존의 인간 개념에 비춘다면 ‘탈 인간’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을 천운영의 소설에서 볼 수 있다는 말씀이신 것 같긴 한데요……. 그 부분에 대해 제가 생각을 좀 달리 해서 선생님들 말씀을 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요, 김애란 이야기부터요. 일단 저는 ‘탈 휴먼’을 이야기하면서 김애란의 소설을 언급하는 것이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져요. 가장 일반적으로, 가장 범박하게 규정하는 개념으로서의 ‘인간적’이라는 의미에 김애란의 인물들만큼 잘 부합하는 사례가 또 있을까 싶거든요. 소설의 주제, 형식 모든 면에 있어서 이른바 가장 전통적인 소설 문법에 가까운 것도 2000년대 소설 중에서 김애란을 꼽지 않을 수 없고, 90년대 소설은 물론 한국 근대 소설 전체와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아도 김애란은 가장 ‘적자’에 가까운 작가가 아닌가 생각하거든요.

 

백가흠 : 김애란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 자체가 그런 시대가 아닌가…….

 

이수형 : 탈 휴먼(인간)이나 혹은 그 반대편의 인간성, 인간미 같은 막연한 용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은데요. 인간이라는 말을 인간의 모든 속성을 포괄하는 용어로 보지 않고 우리가 이념형으로 생각하는 근대적 인간의 이미지를 지칭하는 용어로 보면 오해가 좀 풀리지 않을까요? 그런데 용어로부터 오는 오해의 문제를 이렇게 쉽게 해결하려고 하면, 실은 근대적 인간상이라는 것 자체가 더 큰 오해의 산물 아니냐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백지은 : 2000년대 비평 담론 안에서 사용되는 용어로서의 ‘탈 휴먼’에 대해 저도 전혀 모른다는 것은 아닌데요, 김애란의 소설에 나타나는 유머, 따뜻함, 공감, 위로 같은 것들은 가장 ‘인간적인’ 덕목들이 아니냐 하는 생각에서 천운영 ― 김애란으로 계보를 그리는 것은 어색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천운영에서 계보를 잇는다면 백가흠을 거쳐 다른 쪽으로 이어져야 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에요.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가 나왔을 때, 그 소설에서 아버지를 그렇게 끌어안는 방식은 그 이전의 소설에서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다를 수밖에 없었던 2000년대적 상황의 변화를 말씀하시는 것이라 생각하면 될까요?

 

이수형 : 예컨대, 박민규 소설의 주인공을 전통적인 맥락에서의 따뜻한 인간성이나 휴머니티를 계승한 인물로 보기는 어려울 텐데요. 어떻게 보면 그 인물들은 냉정하기도 하고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박민규 소설의 세계가 웃음을 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따뜻한 것은 아니죠. 오히려 세계 자체는 갈 데까지 간 몹쓸 세계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에 대한 주인공의 반응이 몹쓸 것은 아니라는 점은 지금까지 많이 얘기되어 왔습니다만, 그 반응이란 게 우리가 전통적으로 인간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가령 질투나 복수심 같은 것들, 이런 것은 부정적인 감정이지만 인간적인 감정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텐데요,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절감할 때 가능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범주화의 과도함이 있었던 듯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세계에 맞서 노동을 통해 낙원을 이루려는 행동, 그런 행동의 정서적 동기였던 주인-노예의 변증법 등으로부터 벗어난 주인공의 등장이라는 문제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가령 가족로망스의 실패를 웃어넘길 수 있는 김애란의 주인공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인간상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웃음을 얻을 수는 있지만, 이전에는 웃어넘길 수 없던 것을 이제는 웃어넘길 수 있다면 아무튼 뭔가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백가흠 : 예를 들면 좀 전의 소설의 보면 부모의 부재나 가족 자체의 상처를 안고 있는 인물이 많이 등장했죠. 지금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윤성희도 마찬가지고 김애란도 마찬가지고, 2000년대 후반에 등장한 황정은에 와서는 상처가 상처일 수 없는 상황이죠. 그렇다고 해서 가족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하는 표면적인 것 말고 이 작가가 기본적으로 가족이라는 것 최소한의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에 대해 덧붙인 것이거든요. 좀 쉽게 이야기하면 그들의 소설이 따뜻한 소설은 아닌 것 같아요. 가족의 붕괴를 안고 시작하는 가족의 부재가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상처에 있어서 트라우마로 존재하지 않는 서설의 형태를 깔고 시작하는 것이거든요. 어떻게 보면 소설의 건조함을 파악할 때 우리에게 90년대 후반에 있었던 IMF가 가져온 어마어마한 타격의 관점에서 소설들을 봐야 하지 않을까. 우주로 간다는 얘기는 그런 것 자체도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는 것 같아요. 윤고은이라든가 김유진이라든가 이런 친구의 가족 서사의 모티브를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끈끈한 관계에 있어서 시작한 서사를 깔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관계에 대한 차가움 자체가 탈 인간화된 사회를 보여주는 징표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한 것이죠.

 

백지은 : ‘인간’을 비롯해서 ‘가족’, ‘관계’, ‘사랑’ 같은 것들까지, 여러 가지 가치 개념이 기존에 일반적으로 생각해왔던 경계를 넘어서거나 변경시키고 있다는 생각, 어떤 의미에서는 그 경계 변화에 대한 위기의식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백가흠 : 박민규의 「절」에 보면 사부가 부산으로 문상을 가는데 제자들을 비행기에 태우면서 “빨리 가서 너희들은….”라고 하는데, 도착해 보니 사부가 술을 마시고 있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박민규 선배도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구나 생각했어요. 소설의 과정 자체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렇게 보면 그 축지법의 자연스러움이 바로 탈 인간화가 아닌가 생각하는 거죠.

 

백지은 : 그런데 그 소설에서는, 축지법을 쓰는 사람이 나온다고 해서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나요? 박민규의 「절」은 대놓고 무협소설을 표방한 것이잖아요. 날아다니는 인간이 나오니까 ‘탈 인간’이라고 한다면 앞에서 천운영의 소설을 이야기하시면서 ‘탈 인간’을 말씀하셨던 것하고는 맥락이 굉장히 다른 것 같은데요. 아무튼 박민규의 「절」에서는 이야기 중에 그 인물이 축지법으로 부산으로 가는 도중 대전인가 어딘가에서 차랑 부딪힐 뻔도 하고 뭐 그런 에피소드도 나왔던 것 같은데, 저는 그런 웃기는 상황을 만들고 일종의 ‘유머’를 생산해내는 게 대표적인 박민규식 스타일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소설에 데려와서 이야기를 만들 때, 아닌 꼭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박민규의 소설에서는 항상 웃음이 생겨나는데, 그것의 효과는 언제나 가장 ‘인간적인’ 주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거든요.

저는 늘, 박민규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이 웃음, 유머라고 생각해 왔는데요, 박민규가 이야기하는 모든 주제는 이것을 통과해서 설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유머’는 무엇인가 하면,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이렇게 살지 않고 (혹은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란 말이야 (혹은 어떻게 이야기하란 말이야)” 라고 외치는 자들의 공격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에요. 무능하거나 비상하거나 어쨌든 기성과 어울리지 않는 자들의 자조가 세상에 대한 냉소와 뒤섞인 그 웃음에는 조롱과 야유로서의 공격성이 반드시 들어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공격성과 더불어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 내가 아니라 우리인 여럿에게 건네는 카스테라 한 입 같은 위로가 동시에 느껴져요. 거기에는 우리끼리 잘 지내자는 얄팍한 연대가 아니라 공격성을 잃지 않은 자들 사이에 근본적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연대감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구요. 이런 것은 그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의미가 아닌가요.

그런 뜻에서 아까 해주신 말씀의 맥락을 완전히 모르겠다는 건 아니지만, 이수형 선생님께서 편의상 ‘근대적 인간’이라고 하신 말씀 속의 인간은 다만 이성적 주체랄까, 지식인적인 주체랄까, 혹은 성실하고 지사적인 인간상을 지칭하는 축소된 규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바람직한’ 인간형 외의 인간을 지칭하기 위해 ‘탈 인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좀 잘못된 용어 구사인 것도 같구요. 한편으로는, 웃음이란 오직 인간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웃음의 핵심에는 항상 어떤 어긋남이나 분열 같은 것이 있어서 즐거움보다는 차가움을 유발시키곤 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백가흠 : 배꼽을 잡는 유머는 아닌 것 같아요. 씁쓸함이죠. 블랙유머에 더 가까울 것 같아요. 박민규 선배도 근원적으로 깔려있는 것은 그게 아닐까. 박민규 선배 소설을 읽으면서 활짝 웃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정영훈 : 그러니까 그런 웃음은 2000년대적인 것이라고 이해해도 되겠죠?

 

 

우리 소설에서 2000년대적인 것이란 2

 

정영훈 : 웃음을 가지고 많은 이야기들을 했는데, 다른 이야기 덧붙일 것이 없을까요.

 

백지은 : 이 이야기의 출발점이었던 ‘인간’의 문제요. 어떤 면에서 제일 핵심적인 문제를 짚어주셨기 때문에 얘기가 풀려 나가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은데요. 저는 지금까지 우리가 한 이야기에서 ‘인간’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인간상’이라고 해야 하나, 아까 이수형 선생님 말씀을 빌자면 인생의 어떠어떠한 경로를 거치는 스타일에 의해 형성되는 표준적 인간형이라고 하는 게 나을지, 아무튼 그런 ‘인간적 삶의 형태’를 뜻하기 위해서였고, 그리고 그것이 2000년대에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탈 인간’이라는 용어를 동원했던 것이다, 정도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탈 인간’이라는 용어 사용에 적합한 경우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가령 예전에도 없지는 않았지만 ‘읽다 보니’ 눈에 띄는 21세기 스타일 중 하나로 ‘그로테스크’를 꼽지 않을 수 없어요. 소설의 화자나 인물이 보다 직접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벗어난 경우로서 ‘유령’ 화자나 ‘시체’ 화자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고요, 화자 자신은 유령이 아닌데 세상을 유령처럼 섬뜩하게 보는 경우도 있고요. 그로테스크 하면 물론 대표적으로 편혜영의 소설이 있겠고요, 김숨의 단편들도 대체로 기괴한 분위기를 동반함으로써 현실을 뒤집어 보게 만드는 효과를 냅니다. 유령 화자가 직접 말하는 이야기로는 최근에 발표되는 윤성희의 단편들을 들 수 있겠고, 황정은이나 박주현의 단편에서도 유령 혹은 시체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한 경우들이 있었는데요.. 이런 경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면 논의가 좀 진전되지 않을까요.

 

백가흠 :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 중의 하나인데요.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좀 그런데 아무튼 요즘의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이라고 하면 우리가 알고 있던 관습과 연관이 많은 것 같아요. 예로 어떻게 보면 유령은 굉장히 서구적인 논리죠. 서정주 선생이 오래 전 『질마재의 신화』를 통해서 샤머니즘이나 토템을 리얼리즘의 틀로 가져오려 했던 시도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그게 잘 드러난 것이 외국의 마르케스나 중남미의 소설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에 대한 본 모습을 이제야 찾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0년대의 소설들을 보면 그런 것들이 자연스러웠던 시절이 있잖아요. 우리가 관습화돼서 믿었던 것을 우리 사회에 분리해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예로 귀신이라는 것, 조상이라는 것은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던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비약시키면 이런 것이 사회와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서 작가들이 선택적인 측면이 많지 않나 생각해요. 전성태의 「존재의 숲」 같은 것을 끼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중남미가 이미 70년대에 세계화된 문학으로 발전을 시켰기 때문에 그 쪽의 예를 가져오는 것이 적절한 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쪽의 정치적인 환경, 경제적인 식민지 상태, 이런 여건들이 우리가 70, 80년대를 겪어오면서 느꼈던 상실감과 굉장히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서구적인 것을 인습화된 것에서 분리시킨 것이 관습에 대한 차용이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 이런 현상들을 바라보면 70, 80년대의 암울했던 정치적인 환경이나 산업사회를 열망하는 환경으로 피폐된 인간을 양산하는 시스템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습적인 것을 차용하면서 사실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소설의 시도가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을 확대시켜서 생각해 보면 자본이 오래도록 지배했었던 환상이라고 할까요. 이런 것들이 깨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간의 리얼리즘의 소설과 결별을 선언하는 수순이 아닐까. 그런 조짐으로 받아들이면 너무 오버하는 것인가요. 예로 우리가 갖고 있던 사실적인 측면에서도 귀신은 현실에서도 통용되는 사물이잖아요. 서구 사람들은 유령과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것만으로 그들은 굉장히 치를 떨 때가 많잖아요. 예로 그들이 만들어낸 환상적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 자체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거부감을 느끼거든요. 관습에서 비롯된 환상까지도 리얼리즘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들이 오히려 우리에겐 새로운 소설의 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볼 때 저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이해를 합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이런 시도가 있었고 지금에 와서 평이해진 것을 보면 시에서는 수준이 높았던 것 같아요.

 

정영훈 : 시와 곧바로 비교하기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시의 화자와 소설의 화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 않겠습니까. 백가흠 선생님께서 이야기한 것 자체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확인 시도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것 자체로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백지은 : 화자가 유령인 경우에 한정해서 먼저 이야기해 보자면, 본래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여기 이렇게 있다’고 드러내 보이는 역할을 할 때 유령 화자의 출현이 의의가 있을 텐데요. 간혹 어떤 작품은, 살아있는 사람들끼리의 이야기여도 되는데 여기 이 화자가 왜 굳이 유령으로서 등장해야 했는가의 의미를 찾기 힘든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의미에서 사실 1인칭 주인공 화자가 아닌 경우 소설의 화자는 다 유령이잖아요. 그런데 유령이 인물이 되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경우라면 특별한 의미가 발견되어야겠지요.

 

백가흠 : 그것은 분리해서 평가도 하고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조금 과격하게 이야기를 하면 그 유령이나 귀신마저도 이 땅 안에 발이 붙어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허무맹랑하게 우주로 달나라로 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관습, 샤면, 우리가 익히 아는 것 중에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은 빠르게 리얼리즘 안으로 작가들이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백지은 : 여담이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숲』이라는 작품에는 어떤 살인 사건에 대해 거기에 연루된 모든 인물들의 진술이 나와요. 마지막으로 진술하는 것은 죽은 자의 혼령인데, 이런 경우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으니 부득이하게 유령 화자가 출현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서사의 진행을 위한 방편일 뿐이지 유령의 출현을 이 작품의 의미와 연결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한 일 년 쯤 전에 발표된 단편 중에 황정은의 「대니 드비토」라고 있었는데, 한 여자가 애인과 같이 살다가 죽고, 그 후에도 남자는 그 집에서 계속 살고, 여자는 유령이 되어서 남자 친구를 지켜봐요. 1년쯤 지나서 이 남자가 다른 연애를 시작하던가... 아무튼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중요한 건 이 이야기에서 죽은 후의 여자인 유령-여자는 ‘잊혀져 가는 것’의 무력감, 상실감 같은 것을 아프게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라는 거예요. 빈 공간에 있는 공기처럼 빈 집에 있는 유령의 존재가 그런 감정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어요. 유령의 이야기라도 “땅에 발을 붙여야 한다”고 하신 것을, 유령의 등장이 작품 내에서 필연적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영훈 :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저 같은 경우는 유령이 화자로 등장했다면, 비인간 화자를 불러들였다면 이유나 목적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 화자가 아니면 낼 수 없는 목소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에 등장하는 유령화자의 몇몇 소설들은 이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과 관련해서 인간성 혹은 인간상에 대한 인식적인 변모가 있지 않은가, 그게 현상적으로 이러저러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데로 방향이 모이고 있는 것 같군요. 다른 양상들을 좀 이야기해 보죠.

 

백가흠 : 어쨌든 저는 리얼리즘과 연관성이 없는 환상이나 판타지는 엄격하게 분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본격문학주의자 중 하나거든요. 방법이 아니라 주제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해야 한다면 이런 것들을 재정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 않나싶어요. 예를 들면 정말 텍스트를 이해하기 어려운, 말법보다도 더 이해가 안 되는 소설들이 있거든요. 정말 우주의 이야기들이이죠. 이 세계를 떠난 귀신의 이야기, 우주의 얘기들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연관이 없다면 문학적 가치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백지은 : ‘우주’와 ‘귀신’은 사실 되게 다른 이야기인 것 같은데요...

 

백가흠 : 현실로 차용해야 할 관습적인 시도는 분리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다분히 판타지나 환상의 시도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올바르다는 생각입니다. 현실에 대한 내면의 고민이나 문제에 대한 질문, 즉 현실의 주제의식을 달리 표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말입니다.

 

백지은 : ‘땅에 발 딛고’라는 말씀은 아마도 백가흠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리얼리티의 최소 감각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죠? 그런데 저는 최근의 작가들에게는 그 부분에서도 조금 변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가령 우주로 탈출하기, 클론을 복제하기 같은 이야기들이 등장할 때 그것이 단순히 현재, 지구상의 현실을 외면한 것이다, 아니다 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판타지가 리얼한 세계로 상정됨으로써 우리가 가장 자명한 것으로 여겼던 “땅에 발 딛고” 사는 삶이 어쩌면 자명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울 때, 그 판타지의 세계가 리얼한 것으로 의미가 있어지는 것 같거든요. 다시 말해 지구 바깥으로 확대된 ‘인간의 영역’으로 우주가 편입된다거나 판타지 역시 현실의 알레고리로서 대응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타지의 세계에서 통하는 논리 또한 “다른 리얼리티”로서 작동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백가흠 : 결국에는 비슷한 것 같아요. 여기서 달로 보낼 때는 분명하게 달로 보내는 이유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게 제가 ‘말한 땅을 딛고 있는’이란 그것이거든요. 달에 한 세기를 만들고 달에 일어나는 일을 차용한다고 해서 그게 환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달에 보내려면 달에 가야되는 필연적인 이유라고 할까요? 그게 바로 리얼리티일 테니까요.

 

정영훈 : 이제까지 우리가 이야기해 온 것은 현상에 대한 서술에 가까웠던 것 같고. 지금 막 진행되고 있는 부분은 당위적인 부분들도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이 부분은 좀 더 이야기를 해야겠고요. 그 전에 현상적으로 짚어야 할 것이 있으면 몇 가지만 더 짚고 이 부분으로 논의를 옮겼으면 좋겠어요.

 

백지은 : 저는 환상을 쓰려면 이러저러하게 써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어떤 소설들을 읽으면서 제가 느낀 비현실적인 감각의 현실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데요, 아무튼 최근의 소설에서 현실 아닌 환상이 더 자주 등장한다고 진단할 때, ‘인공 서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특유의 소설 작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고,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현실을 이륙해버린 완전 허구적 이야기들이 소설 전체의 스토리를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윤고은이나 염승숙, 김중혁, 박형서, 배명훈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떠올려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서 일어나는 일인 듯이 현실에서 떠나 버린 것 같은 이야기도 사실 현실 속의 한 지점으로부터, 현실의 어떤 틈새로부터 상상력을 발동시켜서 점점 이야기를 키워가는 식으로 만들어진 서사지요. 그런 소설들에서는 현실적인 개연성으로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는 게 아니고 허구를 이어가는 상상력의 힘으로 서사가 완성돼요. 저는 그 런 자가 동력적인 인공 서사에도 현실을 비추는 힘이 물론 있다고 생각해요. 소설의 논리가 꼭 현실의 논리를 재현해야 하는 게 아닌 한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그런데 사실 어떻게 보면, 현실과의 관계란 모든 소설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박형서의 「두유전쟁」이란 작품, 아시겠지만 인간의 머릿기름이 너무 많이 나와서 그것이 석유를 대체할 수 있게 되자 그를 유치하기 위해 전 세계가 들썩인다는 기상천외한 상상으로 된 이야긴데요, 이 만화 같은 이야기, “땅에 발 딛”지 않은 공상 혹은 망상에서도, 팍팍한 현실의 인간들이 그것으로부터 재미를 얻었다면 그 역시 현실과 무관한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도 소설과 현실의 관계는 상정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땅에 발 딛고”라고 하셨던 부분에서, 그것을 따져 묻는 척도가 좀 유연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수형 : 그 말은 어떤 작품에서 현실과의 연관성을 찾는 것은 늘 가능하고, 또 가능해야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데, 가령 작가의 의도나 표면적인 서사와 상관없이 작품 안에 억압된 어떤 것을 통해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는 식의 독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런 식으로 현실이 드러나는(혹은 부재하는) 작품과 작가가 의도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작품을 현실과의 관련성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게 환원할 수 있을지, 아니면 다른 잣대가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드네요. 최근의 소설들을 ‘무중력’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반대로 ‘중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의 문제를 다른 식으로 드러낸다고 읽는 사람들도 많다는 말이죠. 이런 두 개의 시선을 비교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백지은 : 말씀하신 것 중 후자, 허황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현실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2000년대 소설을 이야기할 때 적절하지 않나 해요.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리얼리티에 대한 감각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전자에서 후자로 바뀌었다는 거죠. 실제로 많은 독자들 역시 경험 현실을 묘사하고 사건을 재연하는 방식으로부터 리얼리티를 찾던 습관을 꽤 버리기도 했구요. 독해의 방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저는 이때 좁은 의미의 리얼리티와 더 넓어진 의미의 리얼리티를 구분하고 그 차이를 말할 수는 있지만 그 둘 사이에 우열관계가 성립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에요.

 

백가흠 : 그것을 왜 우주로 보내는 것인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단순하게 도식적으로 생각하는 건데, 작가들이 뭔가 싫으니까 보내는 게 아닐까요. 여기서 고민하는 것도 싫고, 만들어내는 것도 싫고. 제가 읽어내는 것 중 그게 가장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굴레처럼 안고 있는 취업이라든가, 결혼이라든가 이런 도식적인 것들,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것 같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아, 짜증 나” 하는 것이 다 우주로 날려 보내는 것 아닐까요.

 

정영훈 : 전에 박현욱 작가의 어떤 작품을 읽는데요, 공중부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인물이 실제로 공중부양을 하지는 못해요. 가령 황정은 같으면 별 문제 없이 공중부양을 했겠다 싶은 생각이 들면서, 그게 이들의 세대적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수형 : 그런데 아주 일반적인 말이긴 하지만 문학이라는 게 성립할 수 있으려면 뭔가 억압된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현실(감각)이라는 포괄적 억압이든 구체적인 정치적 억압이든 시대에 따라 억압된 것의 내용은 변할 수 있겠고, 또 그 억압을 정면 돌파하든 아니면 부재하는 것으로 처리하든 억압된 것에 대한 반응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요. 의미 있는 비교일지는 모르지만, 가령 막장 드라마라는 게 억압 없는 세계의 모델이 아닐까 싶어요. 그 세계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동물화되어 막 저지르고 있는데, 그런 억압 없고 따라서 무의식 없는 세계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세계야말로 글자 그대로 ‘탈휴먼’의 세계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얘기하는 탈 휴먼이란 발견술로서의 탈 휴먼이고, 그것은 안 보였던 것, 숨겨져 있었던 것, 놓쳤던 것을 찾아내고자 하는 시도겠지요. 말하자면, 발견술로서의 탈 휴먼에 의해 인간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으려 한다면, 막장 드라마의 그것에 의해서는 인간 자체를 벗어버리는 것 아닐까요? 아무튼 고민하는 만큼, 억압을 생각하는 만큼 문학으로서 성립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2010년, 우리 소설을 향한 기대

 

정영훈 : 이야기 주제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올 소설에 대한 주문이랄까, 요구랄까 하는 부분으로 넘어가는 것 같거든요. 이런 연장선상에서 조금 더 얘기해 보죠. 실마리가 될지 모르겠지만, 비평이나 출판계 쪽에서 이런저런 요구를 해 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잖아요. 비평적 담론이 문학 현실에 대한 해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가령 장르문학에 관한 논의만 보더라도 이 논의를 통해 문학성을 새롭게 구성해 본다든지 본격문학의 외연을 넓혀 보자는 취지도 있었겠지만, 이게 장르문학을 본격문학의 일부로 받아들이자거나 장르문학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자는 출판계의 요구에 편승한 면도 없지 않거든요. 장편소설 논의도 마찬가지예요. 작가가 자발적으로 장편을 써야 되겠다고 느끼기도 했겠지만, 장편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는 측면도 있잖아요. 아무튼 우리 나름으로 여러 가지 주문을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백가흠 선생님께서 ‘어떤 소설을 쓰든지 일정 부분 현실에 발 붙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건 작가적인 입장에서의 주문일 수 있겠고요, 평론가들은 또 다르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가령 신춘문예 또는 신인상 심사를 해 보니 ‘아, 이 친구는 누구의 작품을 모방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작품이 많은데, 이게 반드시 좋은 현상은 아니잖아요. 이런저런 얘기를 자유롭게 좀 하고 전망도 하면 마무리를 하면 좋지 않을까요.

 

이수형 : 좌담을 시작할 때도 그랬지만, 마무리할 때도 사회자가 먼저 말씀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정영훈 : 글쎄요, 저는 아무래도 사회자인지라 가능하면 이야기를 하기보다 듣고 있겠다는 입장이었는데요……. 물론 그러면서도 중간 중간 여러 이야기들을 하기도 했고요. 현실과 관련한 부분은 일정 부분 많이 수긍을 하는데요, 저는 소설이라는 것은 가능세계에 대한 탐구가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 현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으로 비추어 보아 장차 현실화될 수도 있겠다 싶은 그런 세계를 가능세계라고 한다면, 사실 한 번도 도달해 보지 않은 세계에 인간을 던져놓고 거기서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대한 인간성 또는 인간상 자체에 대한 탐구일 수 있잖아요. 외연을 넓혀가는 것, 인간이 도달해 보지 못한 세계를 상상해 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가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실험적인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작품들이 있더라고요. 평론가 입장에서 그런 작품을 가려내고 어떤 것이 더 의미가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요구되기도 할 텐데요. 아무튼 여러 가지 소설적인 실험이 가지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어떤 경우는 실험 자체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한유주 작가 얘기도 나왔지만, 어떤 실험은 굉장히 의미가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 것 같고, 어떤 소설은 굉장히 선구적인 실험을 배 보이고 있지만 어떤 소설은 자기가 해놓은 실험을 단순히 반복재생산하는 것일 뿐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적어도 비평의 의무를 부여하자면 그러한 좀 더 의미 있는 실험과 그렇지 않은 실험을 판단 혹은 평가해 주고 좀 더 의미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도 하고요. 두서없이 이야기를 했는데요, 저는 기본적으로 소설은 가능세계에 대한 탐구이고, 가능세계를 만드는 실험에 관해서라면 SF든 판타지든 유령화자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가능적 세계가 충분히 사유적 실험을 이끌어내서 인간과 인간현실에 대해서 뭔가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과 관련해서 최근의 소설에 주문하고 싶은 것들이 있을 따름이죠.

 

백지은 : 어떤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을 때 그 발견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게 필연적인 것 같아요. 아까부터 우리가 이름은 몇 차례 언급했지만 별로 얘기해보지 못했던 황정은이라는 작가에 대해 좀 해 볼 만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오늘 우리 이야기 중에 가장 많이 나온 게 탈 인간, 유령, 환상 이런 것이었잖아요. 황정은 소설은 그런 키워드들로 설명이 될 것 같으면서 또한 그런 말들에 부합하지 않음으로써 뭔가 새로운 전망을 보여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지 않은가 해요. 일단 저는, 황정은 소설에 대해 ‘환상’을 이야기하는 것에 반대하는데요, 어떤 말이 비현실적인 현상을 진술한다고 해서 일단 환상이라고 부르는 편의적 반응은 지양되어야 할 것 같고, 그런 뜻에서 황정은 소설은 좀 다르게 분류되어야 하는 지점이 확실히 있거든요.

가령, 매우 인상적인 구절, 「모자」라는 소설의 첫 문장인 ‘아버지는 모자가 되었다’라는 진술에서, 이것이 비현실적인 사실을 드러내는 진술이라고 해서 과연 아버지 혹은 모자에 대한 환상(적인 감각)을 진술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지 문제제기를 하고 싶어요. 이런 변신 모티브가 등장하는 경우에는 “일어나보니 벌레가 되었다”라는 카프카의 「변신」을 즉각 떠올릴 수밖에 없기도 한데요, 좀 급하게 말하자면, 카프카의 벌레가 환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치환해버릴 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황정은의 모자도 환상이 아닌 것은 물론 상징이나 알레고리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길게 말하기는 조금 어려우니 간단히만 얘기하자면, ‘아버지가 모자가 되었다’는 것은 ‘모자’의 이미지, ‘모자’의 상징성 등과는 전혀 무관한 문장이라는 건데요, 왜냐하면 그것은 아버지와 모자 사이의 비상관성에 의해 생겨난 문장이기 때문에, 상관관계로 체계적인 보통의 언어 질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문장, 언어 질서를 무시한 문장, 다른 말로 하면 언어 질서를 교란하고 파괴시키는 문장이란 말이죠. 그러니 사실 ‘아버지가 사과가 되었다’, ‘아버지가 의자가 되었다’ 등 다른 선택에 의한 문장이 되어도 그 의의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모자가 되었다는 건 결코 환상이 아니란 뜻이죠. 이런 말들은, 일반 문법이 성립하는 우리의 경험 현실을, 안정되어 있다고 믿었던 현실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뒤집어보게 만들어요. 이런 효과를 내는 것, 그것이 소설로서 세계를 실험하는 힘이고, 또 앞에서 말했던 ‘달라진 리얼리티의 감각’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것들이 좀 더 강하게는 ‘전복적’인 힘을 가질 수도 있고 조금 온건하게는 현실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겠지요. 허황된 인공 서사처럼만 보이는 소설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바는 이런 게 아닐까요. 

 

이수형 : 마무리하기 전에, 작가와 좌담할 기회가 흔치는 않아서 이 자리를 빌려 백가흠 선생님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오늘 좌담을 통해 2000년대 소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고, 또 당연히 2000년대에 등단한 작가들에 대해서도 여러 얘기를 했습니다. 2000년대 소설 전반에서 어떤 흐름을 읽어낼 수도 있고 이런 과정에서 몇몇 작가들의 경향이 대표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만, 정작 작가 내부에서는 그런 경향 자체가 어느 정도 변화를 보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만?

 

백가흠 : 그냥 본질적인 것은 바뀌기 힘든 것 같아요. 작가 데뷔를 하고 써 내는 작품들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라고 하셨지만, 소설이라는 장르는 가장 현재에 가까운 과거에 대한 재연이나 반복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익히 좋은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재연과 반복에 있어서 타당성이 얼마나 있는가를 판가름하는 것인데요. 아까 말했듯이 그것은 내면도 포함시킨 것들이겠죠. 형식적인 것들은 좀 제쳐놓고라도. 작가가 작품 완성을 하나 완성시킨다고 보았을 때 작가가 본 세계인식이라는 것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좀 주목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초반에 제가 말씀 드렸듯이, 이 과정을 10년 20년 이렇게 해서 뭔가를 정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뭔가 조짐이 좀 있는 것 정도죠. 작가가 세계에 대한 인식 자체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바뀌는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창작방법을 취하는 데 있어서 변모양상이 요 근래에는 과거보다는 너무나 급작스럽게 오는 것 같아요. 뭔가에 대한 위기의식일수도 있구요. 작가의 세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른 작가 얘기 말고 제 얘길 하자면, 주제의식에 있어서 변모한 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외부적인 요건을 어떻게 충족시키고 절충하느냐 하는 문제는 데뷔하기 전이나, 갓 데뷔했을 때는 전혀 고려한 바가 없었거든요. 바뀐 게 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도 어느 정도는 고려하게 됐다는 것이죠. 좋은 측면으로 보면 자기가 갖고 있던 세계를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비판받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면 작가가 독자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어떤 지점에서 절충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독자와 소통에 실패를 해버린다면 그 작가는 실패한 작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을 아주 비하시켜서 말한다면 작가의 전략일 수 있겠죠. 평론가들이 작가들을 볼 때 그것이 전략적으로 보여져서 드러나게 된다면 정말 더 실패한 작가가 될 가능성이 커지겠죠. 이런 것들은 미묘하게 변화를 추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두 번째에 묶은 것과 다음에 묶일 작품은 주제적인 측면에서는 별 다를 게 없는데, 소통에 있어서는 평론가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옳겠죠. 독자와의 소통에 있어서는 방법적인 것은 취해야 되고, 그게 변모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것들에 민감하지 못하다면 한때 썼던 작가, 굉장히 반복적인 것들을 생산해 내는 작가에 국한되지 않을까 생각을 하거든요. 전략적으로 형식적인 면을 너무 추구한 나머지 아이디어에 의지한 작품 경향의 급선회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언급했던 작가들은 굉장히 미묘한, 민감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해요.

마무리를 한다는 의미로 몇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가능성보다는 반복과 재연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언급한 작가들 말고 2000년대 후반에 등장한, 아직 책이 없는 작가들이 있지 않습니까.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경향을 예측을 해 본다면 외부적인 환경과 더욱더 밀접하게 관련된 소설들이 등장하지 않을까. 환상적인 측면이 강화되는 방법도 있을 테고, 우리가 익히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말하는 현실문제에 전면적인 작품도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 세대들이 아이엠에프 이후에 외부적인 환경들을 뚫고 온 세대라고 생각해요. 이런 많은 상실감들이 초반에 얘기했던 고독, 흔히 말하는 오타쿠로 표현되는 굉장히 개인적인 것이 표면화되지 않을까. 노동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고 88만원세대로 그려지는 외부적인 공격도 어떻게 방어해서 뚫고 나가는가가 제가 볼 때는 이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주제처럼 느껴졌거든요. 하나 덧붙이자면 용산참사와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이 나중에 기폭제가 되어 크게 드러나지 않을까 해요. 용산참사 같은 경우는 요즘 너무 흔한 현실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중요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변모되었다고 봐요. 예를 들면 우리가 학교를 다니던 90년대 중반이나 초반에 이러한 부조리한 것들이 너무도 많았음에도 현상 이후로 그냥 넘겨버리거나 주제의식 전면에 깔고 이런 문제들을 바라보지 않았거든요. 그런 인식들의 변모가 다음세대에서는 극화되어서 드러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해 봅니다.

 

이수형 : 작가 혹은 소설의 변화에 독자와의 소통이라는 계기가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동의할 수 있을 듯합니다. 독자와의 소통이라는 것 역시, 어떻게 생각하면 작가에게 대단한 억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불행히도 작가는 그 억압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또 다행히도 그 억압을 통해 문학적인 발전이나 변화를 도모할 수 있겠죠. 그런데 독자와의 소통이라는 문제는 이른바 문학제도라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 아닐까요? 기성 문단이라는 것도, 저널리즘이란 것도, 출판 시장이란 것도 사실 익명의 독자들을 대신해서(혹은 대표해서) 존재하고 있는 제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독자의 억압이란 작품 경향의 변화뿐 아니라, 가령 몇 년 전부터 많이 논의되는 것처럼 장편이나 단편이냐 등의 보다 큰 문제에까지 걸쳐 있는 것 같아요.

 

백가흠 : 정말 작가들이 단편을 위주로 쓰는 것은 정말 작가들이 원해서 쓰는 것은 아니죠. 외부적인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거든요. 솔직히 얘기하면 단편 쓰기 너무 힘들어요. 시스템 자체가 자리를 잡는다면 굉장히 고무적인 일일 것 같아요.  단편을 쓰지 않고서는 이 문단 안에서 자리를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거든요. 외부적인 시스템만 마련되면 굉장히 수준 높은 작품이 쏟아질 거란 확신이 있습니다. 연재를 하면 작품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전작이 작가들에게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백지은 : 또 다른 요구가 또 생겨나지 않을까요? 한국 현대 문학사가 단편 소설 중심으로 된 것이 그것을 요구했던 문학 제도의 영향이었다면, 최근 들어 장편을 요구하는 움직임에는 출판 자본의 영향이 분명히 있을 거 같은데요. 백가흠 선생님 말씀처럼, 단편 쓰기에 바빠서 장편 쓸 여유를 확보하지 못했던 많은 작가들에게 요즘은 다시 장편 연재의 압박이 훨씬 더 커졌다는 것은, 양쪽 다 자발적인 창작 의욕을 압도하는 시스템의 힘에 아주 세게 침해당한 사태로 볼 수밖에 없잖아요.

 

백가흠 : 외부적인 환경과 시스템이 작가들이 조금 편한 글쓰기를 유도하는 쪽으로 개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장편 연재의 붐에 있어서도 다분히 출판사들의 상업적인 마케팅에 작가들이 휘둘리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제는 저도 연재를 하고 있지만 이런 붐이 분명 작가들에게 불안감을 조장하기도 한다는 것이고요, 좀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단편 작업으로 뛰어난 문학적 설득력을 성취했던 작가들의 장편이 나오고 있고, 또 앞으로도 나올 텐데요. 지금까지의 현실을 보면 실상, 뛰어났던 단편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건 출판사들이 홍보수단으로서, 또 상업적 목적을 위해 벌이는 장편 유도에 있어 재미를 보지 못한다면 미련 없이 철회할 것이란 것이죠. 이는 미래에 작가와 출판사 모두에게 불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사에게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작가들의 마음도 자유롭지 않을 테고, 출판사는 금전적으로 입은 타격이 분명 존재할 테니까요. 서로의 신뢰와 문학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는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조금 얄미운 생각이긴 합니다만 인터넷 연재로 말미암은 대형 베스트셀러의 출현이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머지않아 이러한 붐이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으니까요. 원론적인 생각이지만 출판사가 작가들에게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하는 방향으로 장편의 유도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질 좋은 장편의 탄생이 결국에 출판사에도 분명 득이 될 것이란 믿음이 있고요. 방법적인 대안으로 저는 전작료를 제안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말 그대로 하면 원고료의 개념이구요. 장편을 쓰는 동안 지원되는 생활비 정도이겠지요. 누가 깰 것인가 하는 문제이지 저는 분명 가까운 미래에 이 환경이 정착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재료보다 금전적으로는 못 미치지만 훨씬 의미 있고 상업적으로도 성공률이 높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좋은 장편을 골라내는 독자들의 눈을 믿으니까요. 작가들의 입장에서는 후에 연재도 가능한 일일 테구요. 지금이 작가들의 질 좋은 장편 탄생을 위해 실현 가능한 대안들에 논의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좋은 문학을 탄생시키기 위해 들이는 열정에 있어 작가들이나 출판사들이나 다를 바 없으니 말입니다.

 

정영훈 : 더 할 이야기들이 많이 있겠지만 일단 이 정도에서 매듭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논의를 통해 2000년대 소설이 얼마나 모양새 있게 정리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게 우리 자신이 겪어 온 2000년대 소설의 한 모습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올 10년 동안 어떤 새로운 소설들이 우리를 놀라게 할지 기대가 됩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런 소설들을 만들어 가기도 해야겠죠. 장시간 동안 이야기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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