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비인칭 주어의 겨울 한 컷

  • 작성일 2008-07-31
  • 조회수 3,121

 

비인칭 주어의 겨울 한 컷




     이신조




‘얼다’와 ‘녹다’라는 동사를 물이나 얼음뿐만 아니라, 마음이나 감정을 주어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다. 따뜻하다, 시원하다, 눅눅하다, 건조하다, 뜨겁다, 시리다 등도 마찬가지. 마음에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구름이 흘러가고 햇살이 내리쬔다. 기상현상은 언제나 친근하고 매력적인 메타포다.

‘비인칭 주어’를 처음으로 배웠던 중학교 영어시간을 기억한다. It is raining. - ‘It’은 누구인가, 무엇인가, 과연 비인칭. It은 딱히 규정하기 어렵고 모호한 ‘그것’. 비가 온다. - 누가 비를 내리게 하나, 무엇으로 말미암아 비가 내리나. 감히 비인칭이 아니고서야. 안개가 걷힌다, 파도가 출렁인다, 천둥이 친다, 하늘이 맑다, 이슬이 맺힌다······ 이 문장들의 진짜 주어는 각각 안개가, 파도가, 천둥이, 하늘이, 이슬이 아니다. 나는 오래도록 비인칭주어를 생각했다. 그러나 집요하거나 치열하지는 않게, 말하자면 비인칭스럽게. 

 

 

이과(理科)적 사고체계를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갖추지 못한 처지지만, 중고교 시절 ‘지구과학’ 시간을 제법 좋아했던 것 같다. 예의 비인칭 주어의 정체에 접근할 수 있었기에. 그렇다고 지구과학 시험점수가 월등히 높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친근하고 매력적인 메타포의 몽상에 잠겨 지구‘과학’ 시간을 누구보다 ‘문학’적으로 보냈기에.

지구과학 시험점수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 둥근 지구는 적도 지방이 가장 많은 태양 에너지를 받는다. 당연히 적도 지방은 지구에서 가장 덥고 습하다. 일 년 내내 여름이다. 하여 적도 지방의 과도한 열에너지는 열에너지가 부족한 극지방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다양한 요인들이 결합되어 특정한 방식으로 바람이 불고 구름이 만들어지고 눈비가 내리거나 가물어진다. ‘대류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요는 균형을 잡고자 하는 에너지의 속성이다. 지구는 에너지의 균형을 원한다. 가로수를 뿌리째 뽑는 태풍도, 아프리카 난민들을 괴롭히는 가뭄도, 해안 휴양지를 집어삼키는 해일도, 산간 마을을 고립시키는 폭설도, 그 모든 과잉과 결핍이 지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결국 에너지의 균형을 잡고자 하는 무엇이란 얘기다. 그렇다면 비인칭주어 It의 정체는 지구일까, 에너지일까, 균형일까.

지난해, 1년 넘게 냉장고 구석에 필름 한 통이 들어 있었다. 지지난 해 겨울, 강원도 어딘가에서 니콘FM2로 촬영한 흑백필름이었다. 필름은 작고 둥근 검정 플라스틱 통에 담겨 장기 냉장보관 중이었다. 아니 보관 중이었다기보다는 방치 중이었다. 나는 1년이 넘도록 그 필름을 현상하지 않았다. 인화하지 않았다. 종종 새벽에 물병을 꺼내다 혹은 누렇게 곪은 사과를 집어 들다 필름과 눈이 마주쳤다. 필름은 달걀 옆에 혹은 치즈 뒤에 숨어, 실은 여기 좀 봐주십사 자신을 드러냈다. 나는 짐짓 시선을 돌리거나 부러 노려보았다. 슬며시 혹은 힘주어 예의 서늘한 감옥 문을 닫아 버렸다. 현상해서 뭘 어쩔 건데. 인화하지 않아도 필름 안에는 눈 덮인 벤치와 정원, 눈보라치는 산등성, 겨울 개울가의 마른 풀들, 나란한 돌다리 따위가 찍혀 있음을, 그 누구의 얼굴도 찍혀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해 겨울이 가고, 봄이 가고, 나는 불행해졌다. 1년이 넘도록 필름은 냉장고 안에 있었다. 굳이 버리진 않았지만 애써 찾지도 않았다. 

이사를 가며 냉장고를 바꾸게 되었다. 나는 오랜만에 충무로 현상소 골목으로 갔다. 한때 단골이던 곳에 필름을 맡겼다. 행복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흑백사진들 속엔 과연 눈 덮인 벤치와 정원, 눈보라치는 산등성, 겨울 개울가의 마른 풀들, 나란한 돌다리 따위가 찍혀 있었다. 그러나 사진 속 인화된 시간과 공간과 풍경은 전생처럼 낯설었다. 냉장고에서의 1년 몇 개월, 탁하고 뿌옇게 바랜 듯 거칠어진 입자 때문일 수만은 없었다. 벤치와 정원과 산과 풀과 돌다리가 주어일 수 없는 사진이었다. 내가 주어일 수 없는 사진이었다.

<우리말갈래사전>에서 ‘감은바닥’이란 낱말을 발견했다. ‘땅에 덮인 눈이 녹아서 땅바닥이 드러나 보이는 곳’이라 풀이되어 있다. 과잉과 결핍뿐 아니라, 모처럼의 무지개도, 강변도로에서 맞는 저녁놀도, 숲 속 상쾌한 바람도, 제각기 아름다운 눈의 결정들도 결국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무엇인 것이다. 비인칭 주어가 필요한. 지금 열대야를 잠재우려 장마의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밤, 그해 겨울의 감은바닥이 찍힌 사진을 바라보며 나와, 나의 에너지와, 나의 에너지의 균형을 생각해 본다. 짐짓 비인칭스럽게.《문장 웹진/2008년 8월호》


추천 콘텐츠

육지에서 쓴 일기

[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