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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허물고 세우는 소설 건축술

  • 작성일 2006-12-01
  • 조회수 2,966

 

공동체를 허물고 세우는 소설 건축술



이정석




1. 정보화시대, 소설의 운명은?


이야기는 정보와 어떻게 다른가. 시시각각 조여 들어오는 전체주의의 폭력에 내쫓기다 공동체와 공동체의 경계선 상에서 스스로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던 불운한 지식인은 말한다. “정보는 그것이 새로운 것일 때에만 가치가 있다. 정보는 오로지 그 순간만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한시도 지체 없이 그 자신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며 또 그 순간에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얘기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스스로를 완전히 소모하지 않는다. 얘기는 자신이 지닌 힘을 집중된 상태에서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다시 펼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벤야민, 『얘기꾼과 소설가』) 그렇다면, 이야기로서의 근대소설은 어떤가. 근대소설은 자신을 남으로부터 고립시킨 고독한 개인의 글쓰기라는 점에서 전래의 이야기와 구분된다.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개인의 경험이 공동체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설은 근대를 대표하는 이야기 장르로 내세우기에 손색이 없다.

공동체의 자취를 간직한 근대의 이야기 장르를 소설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종말을 알리는 목소리는 공동체에 토대를 둔 글쓰기의 소멸 내지 쇠락을 선포하는 공식적 타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의식과 현실의 질감이 현저히 수그러든 근자의 소설을 보노라면, 또 문학장(場)이라는 한정된 영역에 머무는 글쓰기를 해야만 하는 작가를 보노라면, 근대문학의 종언이 허언만은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정보가 일회적 소비의 대상이 되기를 그치고 아예 주변부로 내몰린 근대소설을 대신해 우리의 기억과 체험을 지배하는 보편적 이야기의 지위를 차지하려는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기도 하다. 공동체의 전위로서 다방면에 걸쳐 강력한 파급력을 미치는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점점 소소화(小小化) 내지 사사화(私私化)의 길을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동체의 기억과 삶의 지혜를 펼쳐 보이며 존재의 성찰과 타자 사이의 소통을 매개하는 것은 소설 고유의 몫이라고 외치듯이. 그리고 그 와중에 더 이상 이야기의 테두리에만 머물지 않으려는 이야기, 공동체의 바깥을 사유하는 글쓰기가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2. 성찰, 공동체 내?외부의 경계에 서서


우리의 공동체는 결백한가? 혹은 국가나 민족은? 민중은? 우리의 공동체 내부에는 떨칠 수 없는 악덕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은 물음들은 근대소설에서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회피되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이 근대의 민족공동체와 국민국가 형성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지적을 떠올려 보면, 그 회피의 불가피성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지난 시절의 문학이 민족이나 국가 혹은 민중이라는 초월적 중심을 호위하며 공동체의 체험과 열망을 총체적으로 담아내는 데에 온 힘을 집중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시대의 문학은 집단의 열망과 변혁 의지를 표출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그 와중에 묻힐 수밖에 없었던 단독적 개인의 사소한 목소리에 주목하려 한다. 적대적 모순에 분노하기보다 비적대적 모순을 차분하게 고민하고 섬세하게 그려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 같은 변모가 우리 시대의 문학이 난감한 질문들과 마주하며 공동체의 문제를 반성적으로 숙고할 수 있게 한다.

전성태는 『매향』(1999)과 『국경을 넘는 일』(2005)에서 전통적 농촌공동체를 우리 삶의 원형으로 아름답게 묘파해 낸 적이 있다. 이들 작품집에서 전통적 농촌공동체는 모든 구성원이 버성김 없이 상생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지극히 평화로운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그의 작품들이 근대소설의 풍모에 앞서 전근대적 이야기의 향취를 물씬 풍기는 이유도 바로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아름다운 그 농촌공동체는 역사와 자본을 배제한 상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대적 개인의 실존을 탐색하는 데 있어서는 다소 한계를 노출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농촌공동체의 테두리를 벗어나 좀더 넓은 국면에서 공동체와 개인의 문제를 탐색해 나아가도록 충동질하는 것도 그 문제성에 대한 자각일 터다.

전성태의 소설은 주체와 세계 사이에 조금의 균열조차 상정하지 않는 자연 친화적인 농촌공동체를 떠나 근대적 공동체의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예기치 않은 문제와 맞닥뜨린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니다. 나는 단지 공동체의 집단무의식의 산물일 뿐이다.’ 「국경을 넘는 일」에서도 「코리안 솔저」(《실천문학》, 2005년 겨울호)에서도, 공동체를 월경(越境)하는 자기 인식의 서사는 개인을 지배하는 공동체의 집단무의식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그리고 이들 군대는 나라를 세운 뒤 한 번도 전투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거기에 비해 우리나라 군대는 한국전, 베트남전, 걸프전, 그리고 최근에는 이라크전에까지 참전했다. 그뿐이랴. 이들도 한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싸우느라 세계적인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리라. 칭기즈 칸의 군대와 닮은 것은 오히려 한국 군대이지 너희들의 군대는 아니다.

“나는 한국의 군인이었다!”(「코리안 솔저」, 《실천문학》, 2005년 겨울호)


세계화와 개방화의 열풍으로 민족과 국가의 경계가 점점 엷어지는 시대의 외국 체류.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성태의 소설이 그로부터 발견하는 것은 ‘우리들의 대한민국’ 내부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파시즘의 망령이다. 이를테면, 무의식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군대문화의 규율과 습속은 개인적 신념이나 가치관, 심지어 일상의 습관을 압도하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군대 체험은 어쩌면 그 삼십 개월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제 인생을 통째로 삼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코리안 솔저」의 주인공은 젊은 시절 한때 사회주의 이념에 빠져 든 적이 있는 지식인이고(자신이 머물 집이 러시아 식 아파트라는 말에 금세 향수에 젖어 마음이 아늑해지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아직도 좋은 시를 쓰고 싶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시인이건만, 순간적으로 돌출한 ‘코리안 솔저’였다는 맹목적 무의식이 자신의 존재양식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임을 당당하게 자인한다. 이로써, 권위주의 국가체제의 퇴장 이후에도 우리의 일상을 배회하는 전체주의적 망령의 현실적 위력이 폭로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건 합리적 이성과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이 어우러져 성립하는 근대적 시민사회가 아직도 미완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공동체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 전성태와 이혜경의 소설은 이 물음을 공유하지만 그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전성태의 그것은 생활세계 속 개인의 존재방식으로부터 출발해 공적 영역으로 관심을 넓히는 원심적 형식을 취하며,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성을 탐문한다. 반면, 이혜경은 일상생활의 영역에 집중하는 구심적 형식으로 개인의 단독성을 억압하는 사적 공동체의 구성적 메커니즘을 성찰한다. 특히 그녀의 소설은 가족공동체를 비롯한 생활공동체 내부에 도사린 악덕에 주목한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아냐? 어른들이 가지 말라는 곳에 갔다간 단박에 늑대에게 잡혀갈 거다…(중략)…마을 안팎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어른 남자들은 아이들과 여자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곳에 말로 울타리를 쳤다.(「늑대가 나타났다」, 『틈새』, 창비, 2006)


무릇, 공동체는 외부와 경계를 짓고 이질적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유지하려 든다. “여자의 품안에서 허물을 벗고 싶은 마을 청년들이 스며드는 곳”, “어린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쩍 가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날간을 씹어먹는다는 문둥이들이 무리지어 사는 뒷산”이 공동체의 내/외부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더불어 “철컷철컷 쇠가위 소리를 내는 엿장수”, “고깔모자에 쩍 벌어진 입으로 웃는 삐에로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는 서커스단”, “이름을 잃고 그 대신 ‘처제하고 사는 이’라는, 늑대 꼬리처럼 기다란 별명을 얻”(「늑대가 나타났다」)은 병태 아저씨, 또는 내부의 이물로 존재하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물 한모금」)가 호시탐탐 공동체의 성원을 위협하는 ‘늑대’로 간주된다. 여기서 공동체의 위계와 규범에서 가장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거나, 아예 그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하고 부유하는 존재들이 공동체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그러니까, 공동체는 언제나 이방인이나 비천한 존재에게 이질적 타자라는 낙인을 찍고 배제해 버림으로써 자기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혜경의 소설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악이 이질적 타자이기는커녕 바로 자기 동일적 존재 내부에 들러붙어 있는 그 무엇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아기늑대의 꼼질거림 같기도 한 그 무엇”에 이끌려 마을 바깥으로 나갔던 ‘나’가 늑대의 친척쯤으로 알고 있던 병태 아저씨의 보호를 받으며 돌아올 때, “허연 이빨을 드러낸 무언가가 집에서 나를 기다릴 것만 같”이 느껴지거나, “내가 나 아닌 아기늑대인 것 같”(「늑대가 나타났다」)이 생각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또 공동체 내부에 도사린 그 악덕은 “아름다운 풍경 뒤편, 안락한 내 집 어딘가에 숨어 있을 바퀴벌레”(「망태할아버지 저기 오시네」)이자,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너그럽지만 그 테두리를 넘어선 대상에겐 언제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살점이 떨어질 때까지 물어뜯”(「그림자」)는 충견이다. 따라서 공동체에 길들여진 늑대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내부에서 ‘어머니’나 ‘아내’로서든, 아니면 ‘친구’나 ‘직장동료’로서든, 적절한 상징적 위치를 부여받고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가부장제에 강한 혐오감을 지니고 있으면서 핏줄을 잇기 위해 거짓임신 흉내를 내거나, 이혼으로 아내의 자격을 상실한 상태에서 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위치나마 필사적으로 고수하려는 인물들의 모습(「피아간」)에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통념과 인습의 공유를 강제하고, 이를 어길 시에 위반자를 냉혹하게 배제하는 공동체의 부정적 메커니즘. 그것은 이혜경의 인물로 하여금 가족의 일원이고 친구이고 “직장 동료이긴 하되 ‘우리’이고 싶지는 않은”(「그림자」) 마음의 완충지대를 설정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을 벌레처럼 밀쳐내게”(「섬」) 하는 경계지대이지만 동시에, 타인과의 내밀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소통의 매개공간이 되기도 한다. 절멸의 나락으로 추락하기 위해 “날아오르는 새”의 절망적 몸짓과 타자에로의 도약을 위해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새순”(「틈새」)의 약동이 병존하는 완충지대. 지금, 이혜경의 소설은 그 ‘틈새’에서 개인과 집단의 공존을 사색하고 있다.



3. 경쾌한 역설, 현실의 중력을 이겨내는


자본의 제국은 모든 공동체를 식민지화한다. 그것은 민족공동체와 국가공동체는 물론 직장공동체와 가족공동체, 심지어 연인이나 우정의 공동체마저도 그것의 충실한 속주로 편입시킨다. 그리고 자본이 모든 존재와 공동체를 아우르는 초월적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필연적으로 공동체 성원간의 연대가 느슨해지고 단자화된 개인이 부유하며 계층구조가 고착화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즈음의 소설은 견고한 체제의 위용을 갖추고 장기 지속의 상태에 돌입한 자본의 제국 속에서, 허물어져 가는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요즘의 소설은 자본의 제국이 이 시대를 지배하는 선험적 장임을 담담하게 인정한 상태에서 개인의 자율성과 단독적 존립의 가능성을 모색해 나간다. 공동체의 규범과 압력을 가뿐하게 넘어서며, 오직 자신의 기준과 판단에 입각해 세계를 살아가고자 한다. 따라서 계몽에의 열정과 변혁에의 의지로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잔뜩 짓눌린 채 우울한 삶을 살아가지도 않는 것이 이즘의 소설이다.

김애란의 소설은 근대소설의 문법에서 그리 크게 빗겨나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녀의 소설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는 그녀의 소설이 현실을 가볍게 뒤집어엎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현실 뒤집기는 자주 지적되고 있는 바처럼 상상의 전도작용에 기초해 있다. ‘나는 이렇게 상상한다.’ 아버지는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실종된 것이며(「사랑의 인사」,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도망간 것이 아니라 지구 곳곳을 달리고 있다(「달려라, 아비」). 또, 그녀는 상상적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게 사실이 아닐지라도 내가 그걸 사실로 만들어버리는 이유는 그러고 나면 내 처지가 덜 속상해지기 때문이다.”(「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나 가족의 균열을 유쾌하게 봉합하며 자기 긍정에 이르는 이 상상의 자기 치유작용으로도 어쩔 수 없는 세계가 있다.


그동안 나는 ‘수학’이나 ‘내신’ 탓이면 몰라도 내가 ‘IMF’ 때문에 대학에 떨어지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게다가 ‘IMF’는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네가 대학에 떨어진 이유는 올해 카시오페이아좌에 있는 7789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반짝거렸기 때문이란다.’라고 말해주는 것과 똑같이 들렸다.(「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


가족공동체가 주는 억압을 경쾌한 상상으로 간단하게 넘어서는 김애란의 소설이 “상상도 못”한 현실이 있으니, 그건 바로 자신이 딛고 있는 사회?경제적 현실이다. 그 거대한 현실의 자각과 함께, 유쾌한 상상력에 동반되는 김애란 식 유머가 꼬리를 감춘다. 이 갑작스런 웃음의 소멸은 그녀의 유머가 문화산업에 의해 ‘강요된 경쾌성’, 즉 “인생이란 비극적이므로 경쾌하게 위로받아야 한다는 투의 불길한 비극으로까지 빠져버린”(아도르노, 『예술은 경쾌한 것인가?』) 경쾌성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그럼에도, 부정적 현실을 뒤집는 상상의 전도전략이 그에 상응하는 물질성을 담보하지 못하거나 하부구조에 대한 인식을 게을리 하게 되면, 금방 막다른 벽에 부닥치게 되고 만다. 그런 측면에서, 김애란의 소설이 문화의 층위에 대한 관심에만 머물지 않고 점점 자신이 딛고 있는 삶의 물적 토대에까지 인식의 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점은 주목되는 현상이다.

김애란의 인물은 “스스로 조금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영원한 화자」)이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의 오차도 없이 징그럽게 똑같은”(「노크하지 않는 집」) 취향과 똑같은 생활용품을 가진 많고 많은 사람들 속의 별다른 것 없는 존재일 뿐이다. 남다른 개성과 “세련됨이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오랜 소비 경험과 안목”(「성탄특선」,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에서 나온다. 결국, 경제자본의 소유 정도에 따라 자기가 속한 계급이 결정되고, 소속된 계급이 어디냐에 따라 자신의 문화적 취향과 생활습속이 결정되는 현실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현실을 기만하는 허울일 뿐이다. 그 실상을 깨닫는 순간, 상상력에 의한 현실 뒤집기는 불가능해진다. 공동체가 주는 중압감과 상처를 훌쩍 뛰어넘는 상상력마저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것이 자본의 힘이라면, 김애란 소설 앞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삶의 지반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길만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김애란의 상상의 전도전략이 자기 연민이나 원한 없이 이 난경(難境)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공동체 속의 개인을 탈영토화하는 동시에, 다시 그들을 재영토화한다. 이때, 자본의 제국에 포섭되는 존재는 그 무엇이든 자신의 독자성을 잃고 동질적인 존재로 호명되기 마련이다. “모든 주파수를 차단해버리고 오직 하나의 주파수만을 볼 수 있게 만드는”(「펭귄뉴스」, 『펭귄뉴스』, 문학과지성사, 2006) 코드화의 전략은 획일성과 효율성의 논리로 그 안에 속한 모든 존재를 지배하려는 자본의 속성을 잘 보여 준다. 김중혁의 소설은 그 같은 상황에 대해 공통감각을 타고 넘는 역설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컴퓨터 하는 사람들은 타자기가 종이를 낭비한다고 하는데 그건 정말 웃기는 소리입니다. 종이를 버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낭비입니까, 아니면 컴퓨터처럼 종이를 아끼면서 생각을 지우는 게 낭비입니까.(「회색괴물」, 『펭귄뉴스』, 문학과지성사, 2006)


김중혁의 소설은 “비경제적인 짓”은 “죄악”(「무용지물 박물관」)이라고 단정하는 자본의 논리를 향해 무용해 보이는 것들의 충만한 존재성과 절대적 필요성을 설파하고, 인간의 이기심을 가장 잘 활용한 자본주의 체제는 그 이기심을 극단으로 밀어 붙임으로써 교란할 수 있다(「바나나 주식회사」)는 발상을 내비친다. 그 와중에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무용지물로 간주되는 것, 다시 말해 실용성과 효율성을 상실한 사물들이 통념과 달리 체제와 삶을 풍성하게 하는 소중한 존재로 부각된다. 이를테면, “살아서 말을 거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타자기(「회색괴물」), 상상력으로 길을 찾는 지도(「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바퀴도 없고 페달도 없고 안장도 없”는 시시한 자전거(「바나나 주식회사」) 등이, 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풍부한 결을 지닌 단독적 사물로서의 위상을 확보한다. 이처럼 김중혁의 소설은 언제나 모든 것을 코드화하려는 자본의 일률적 시스템에 포섭되지 않는 단독적 존재의 가능 영역을 찾아 나선다. 기존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려 하지 않고 체제의 내부에서 독자적인 취향의 공동체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또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진기한 정보를 “발굴”(「매뉴얼 제너레이션」, 《문장 웹진》 2006년 6월호)해서 그 위에 서사의 옷을 덧입히는 듯한 소설 건축술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김중혁의 소설은 자본의 시대에 걸맞은 문학의 한 양상을 구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 무위의 공동체, 서사를 지워가는 기표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배수아와 한유주의 소설은 개인을 동질적 집단에 옭아매는 최소한의 규범과 상징의 그물망조차도 버거워한다. 가령, 배수아의 소설은 국적과 가족과 이름의 족쇄를 훌쩍 집어던지며 심지어 한국어의 문법마저 거리낌없이 위반한다. 그렇게, 배수아의 인물은 기꺼이 “패밀리 네임을 버리고 이름을 바꾸고 가진 것을 버”(「집돼지 사냥」, 『훌』, 문학동네, 2006)린 채 기약 없는 방랑길에 오른다. 고만고만한 공통감각의 공동체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한유주의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감지된다. “한 가지 전파만을 송신하고, 그마저도 뒷면을 갖고 있지 않”(「그리고 음악」, 『달로』, 문학과지성사, 2006)은 상징의 네트워크, “실물보다 선명한 오백만 화소의 화면, 케이블을 타고 전송되는 0과 1의 이미지”(「죽음의 푸가」)와 정보의 스펙터클 사회는 “고통을 느끼기 위한 순간의 여유도 만들어 내지 못”(「그리고 음악」)한 채, 개인을 죄의식과 수치의 구렁텅이에 파묻는다. 그래서, 한유주는 자신의 소설이 이 시대의 야만으로부터 탈주하며 “고통이 표현되는”(「그리고 음악」)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배수아와 한유주의 소설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탐색담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목적지향적인 근대적 서사의 여정인 것도 아니다. 그건 “먼 곳에 있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떠나려”(배수아, 「양곤에서 온 편지」)는 정처 없는 유랑길이고, 이야기란 “이야기는 모두 증발”(한유주, 「세이렌 99」)되는 기표의 더듬거림이며, 단일한 정체성을 와해시키는 끝없는 분열 속에서 수많은 ‘나’ 혹은 타자와 조우하는 생성의 운동이다. 그러므로, 배수아와 한유주에게 소설은 글을 쓰기 위한 하나의 알리바이일 뿐이다.

배수아의 소설은 단일한 의미론적 중심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전진하는 근대소설의 형식을 탈중심적으로 해체한다. 이때, “논리적 세계의 환상을 뒤흔들면서 현실을 정당화하는 모든 공식에 대항하는 반체계적인 충동을 내재하고 있는”(Adorno, 『The Essay as Form』) 에세이의 형식적 속성은 탈중심적 해체운동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 이로써, 그녀의 소설은 규범적 정체성을 강요하는 공동체의 바깥에서 단독자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다시 말해 공통감각을 지닌 존재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일성의 공동체 바깥을 사유하는 ‘소설 아닌 소설’이 된다.

규범적 정체성과 동질적 집단의 공동체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은 탈근대적 소설문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회색 時」에는 “나는 때때로 미래의 일을 ‘기억’하곤 했다”거나, “나는 앞으로 몇 년 뒤 수미를 만나게 되었고 그것에 대해서 쓰게 되었을 터였다”처럼, 불가역적인 선조적 시간관과 시제의 기본원칙을 고의로 위반하는 문장들이 담겨 있다. 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으로 흩어지는 ‘나’의 유동적 정체성을 통해,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공리체계에 기초해 형성된 주체의 자명성의 신화를 뒤흔든다. 「훌」은 또 어떤가. ‘친구 훌’과 ‘동료 훌’, 그리고 ‘나 (훌)’가 서로 엇나가고 빗겨 가면서 “바로 나 자신이 타자”가 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배수아 소설 속의 ‘나’는 수많은 타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배회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유주의 소설은 “일직선으로 씌어진 이야기들”(「달로」)에 절망하여 급진적으로 서사를 지워 나가는 ‘이야기 아닌 이야기’다. 의미의 완결점 없이 파편적 단상들이 흩뿌려지며 생성되는 서사적 개방성으로 말미암아 텍스트들 사이의 경계조차 모호해진 이야기 아닌 이야기. 이는 일사불란하게 돌진하는 유기적 서사의 진보적 논리에 무연한 채, 야만적 문명이 남긴 폭력의 잔해 앞에서 타자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들을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살갗마다 새”(「지옥은 어디일까」)기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지 모른다.

한유주는 영민한 철학자의 당부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함구해야 하지, 완전한 이해, 완전한 묘사는 불가능하니까.”(「그리고 음악」) 그러나 이야기와 운명을 같이 해야만 하는 소설가로서의 숙명은 어쩔 것인가…… 그래서 그녀는 말없이 말하려 한다.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지옥은 어디일까」)을 드러내기 위해, 의미를 낯설어 하는 파편적 기표들의 유동적인 흐름 가운데 침묵의 골을 파놓는 말줄임표들을 곳곳에 심어 놓는다. 우리는 “그 침묵의 밑바닥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도사리고 있(「세이렌 99」)”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의미 전달의 수단이라기보다 물질성을 구현하는 감각적 기표, 침묵하는 세이렌, 그것들이 한유주의 텍스트가 고정된 정체성을 확립하는 곳이 아니라 유동적 정체성의 틈 사이로 타자를 불러들이는 장소임을 희미하게 감지할 뿐이다. 거기에서 ‘나’는 ‘너’가 되고 ‘우리’가 되며, 시제마저 원칙을 상실한다(“일주일 전 국경을 넘을 때 우리는 애써 가짜 여권을 내밀지 않는다” -「베를린?북극?곰」). 그렇게, 한유주의 텍스트는 타자의 고통에 다가서려는 감각적 기표의 미결정적인 운동에 몸을 실은 채, 고정된 의미와 닫힌 체계를 해체하며 공동체의 바깥을 향해 은밀하게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하는 감정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그런 종류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무적이라거나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만나면 따뜻한 차를 권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돕고 싶어하고 친절하려고 노력했다. 명분이나 원칙이나 가톨릭 교회와 같은 단어를 싫어하고 예술이나 스타일이나 무국적 등의 단어를 좋아했다.(배수아, 「집돼지 사냥」, 『훌』, 문학동네, 2006)


이제, 여기서 어렴풋하게라도 배수아와 한유주의 소설이 염원하는 공동체의 면모를 밝혀 보자. 이를 위해서는 집단의 악에 연루된 젊은 날의 과오를 되씹으며 공동체의 바깥에서 평생 은둔의 삶을 살다 간 글쟁이의 물음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왜 언제나 공동체는 단독적 개인을 집단의 일체로 환원하려 하는가? 왜 항상 공동체는 동질적 이념과 공통의 목적과 보편적 원칙을 상정하는가?’(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이 물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왜 배수아와 한유주가 공동체를 유지하는 공통의 이념이나 규범, 심지어 기본적인 문법체계와 장르의 영역마저 일탈하려 하는지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다. 결국, 그녀들에게 ‘소설 아닌 소설’, ‘이야기 아닌 이야기’는 어떤 공동의 목적도 전제하지 않기에 그 무엇이든 들어설 수 있지만 그 무엇도 배제하지 않는 무정형의 공동체, 자명한 주체의 사라짐 속에서 익명의 타자와 만나는 단독자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무위(無爲)의 공동체를 향한 글쓰기의 실천이 된다.



5. 열린 공동체 혹은 무위의 공동체를 욕망하는 소설의 미래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를 쏟아내는 매스미디어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집단, 혹은 자본과 공동체의 문제를 사유하는 서사적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차별적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자본의 제국에 맞서 어떻게 공동체를 유지할 것인가? 어떻게 내부에 도사린 악을 씻어내고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는 공동체를 세울 것인가? 공동체의 바깥, 혹은 공동의 무엇을 전제하지 않는 무위의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 서사가 자신과 타자의 이해를 가능케 하는 디딤돌이자 공동체의 운명을 숙고하는 역할을 짊어지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오늘의 소설이 그와 같은 고민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오늘의 소설이 그 고민들을 어떤 식으로 풀어 나갈지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고민의 방향에서, 또 그 고민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도, 이전에 비해 훨씬 다양한 문학적 흐름이 형성되리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근대문학의 계보를 잇는 소설들은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개인과 집단이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바람직한 공동체를 모색하며, 좀더 넓은 시야에서 ‘우리’와 그 내?외부의 타자와의 관계를 설정해 나가려 하고 있다. 이는 거대담론의 초월적 거점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면서도 현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앞으로 근대소설의 문법을 잇는 서사적 흐름이 어떻게 목적론적 서사구조에 내재된 의도의 과잉문제를 처리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지 좀더 지켜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개별 공동체를 해체?복속하는 자본의 압도적인 규정력에 주눅 들지 않고 그 내부에서 외부를 사유하려는 문학적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그 모색의 도정이 자본의 논리를 경쾌하게 돌파해 나갈 수 있을지를, 또 소수자들의 산발적인 취향의 공동체가 새로운 생성의 힘을 도출할 수 있을지를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소설의 미래에 있어 주목되는 흐름 중의 또 하나가 글쓰기의 자율성을 민감하게 의식하며 언어적 실천에 몰입하는 경우다. 그것은 통사의 구조를 해체하거나 무의식의 층위에 맞닿아 있는 기표의 감각성을 강조하며, 이야기의 세계를 넘어선 이야기, 장르의 영역을 넘나드는 글쓰기로 치닫는다. 이는 그동안 한국문학이 꾸준히 천착하지 못한 길을 가려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더욱이, 그것은 이야기를 전유하는 정보화시대의 상품미학과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고, 기존의 규범과 지배적 가치체계에 균열을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문장 웹진/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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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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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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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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