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 작성일 2005-09-22
  • 조회수 6,344

 


사회자 : 김수이(문학평론가)

토론자 : 엄경희(문학평론가)

         손택수(시인)

         김행숙(시인)

         김언(시인)


좌담내용 듣기 1

좌담내용 듣기 2


김수이(이하 ‘사회’) : 웹진 <문장>에서 처음으로 갖는 좌담회입니다. 참석해주신 분들은 평론가 엄경희 선생님, 시인이신 손택수, 김행숙, 김언 선생님이십니다. 시인과 평론가가 함께 하는 자리이므로 시인은 주로 시를 쓰는 창작자의 입장에서, 평론가는 평소 시인과 직접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문제를 개진하는 차원에서 이야기하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최근 시의 전체적인 지형도를 그리는 것으로 좌담을 시작해 보기로 하지요. 최근 시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무성한데요. 정말 특별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그 변화는 전(前) 시대와는 다른 새롭고 유의미하며 생산적인 것인지 의견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엄경희 : 전 시대를 크게 보면, 1980년대를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1990년대가 2000년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때 두 가지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1980년대의 리얼리즘이 서정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면은 리얼리즘 정신의 약화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듯합니다. 서정화를 계기로 리얼리즘 시의 심미성 문제가 깊이 있게 제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리얼리즘 시가 서정화된다.’는 것 자체가 꼭 미학적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리얼리즘도 방법적 모색이 필요하다는 성찰적 의식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시영 시인이 시도하는 서술시, 백무산 시인의 자본주의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가 이런 지점과 관계가 있습니다. 한편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진 지금 시점이 서정시가 만개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변화를 생산적인 변화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두 번째는 ‘추의 미학’의 발견입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보였던 것인데, 이 경향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풍미했던 것 같습니다. ‘추의 미학’은 시의 고전적 미학, 즉 시적 우아함이라는 것에서 벗어나 고착된 시의 틀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에 대한 시각 확대, 상상력이나 사유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내용면에서 ‘추의 미학’은 물질만능적인 부르주아의 안일한 삶의 방식을 공포스럽게 되울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산적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영토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사회 : 엄경희 선생님은 최근 시를 199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보시고, 두 가지 긍정적인 점을 지적해주셨습니다. 리얼리즘 서정시의 가능성과 ‘추의 미학’의 만개가 그것인데요. 이를 편의상 리얼리즘 지향성과 모더니티 지향성이라고 부른다면, 여기 참석하신 시인들은 각각 어느 한쪽으로 분류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손택수 시인이 전통적인 리얼리즘을 옹호한다면, 김언, 김행숙 시인은 모더니티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구도에 대해 손택수 시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손택수 : 리얼리티 지향성이나 모더니티 지향성이나, 기존의 시 문법에 대한 단절의 욕망과 연속성의 의지가 전대(前代)처럼 표층에서 갈등하기보다는 안으로 스며들어서 동거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들뢰즈의 말처럼 ‘자신의 언어 속에서 말을 더듬고 있다.’고 할까요? 김선우 시인의 「돌에게는 귀가 많아」라는 작품에서도 자신이 애써 쌓은 문법을 허물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시의 혀가 갈라져 있는 것입니다. 예전의 은유가 동일성의 미학이었다면, 1990년대를 통과하면서 은유는 동일성과 차이를 모두 내장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시대만의 특징은 아닙니다. 굳이 전대와 비교를 할 때 이런 것이 담론의 층위에서 표나게 강조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판도가 변했다기보다는 기존의 변화를 끌어안으면서 누적되는 형태가 되었고, 그런 적층(積層)이 시인들의 내면에도 그대로 축적되어 있다는 말씀이신데요. 리얼리티와 모더니티를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지적으로도 들립니다.


김언 : 최근 시의 전체 지형도가 어떠한가는 저 역시도 부담스러운 질문입니다. 눈에 띄는 외형적인 변화부터 얘기하자면, 1980년대에 비해 1990년대 중?후반부터 잡지가 많이 늘어났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매체가 늘다 보니 당연히 거기서 배출하는 시인들의 숫자도 급격하게 늘어났는데, 그런 양적인 확대를 따라잡을 만큼 시인들의 시세계가 넓어지고 다양해졌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듭니다. 시인 한명 한명이 하나의 장르가 되도록 자신의 시를 뻗어나가게 해야 하는데, 잡지도 그렇고 시인도 그렇고, 기존의 몇몇 잡지들이 일구어 놓았던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성향이나 이념의 줄을 이어나가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양적인 증가에 비해 새로운 세계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사회 : 잡지나 시인이 많이 증가했지만, 그것은 부정적이고 양적인 증가에 불과하다는 비판이신데요. 최근 시의 판도 변화를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김행숙 시인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김행숙 : 시쓰기는 개인적인 작업이므로 어떤 부류에 속한다는 것, 그것도 이분법적인 체계에 갇혀서 논의된다는 것에 기본적으로 불편함 내지 저항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제 생각에 현재형인 시의 변화에는―일단 그 유의미성과 생산성에 대해선 괄호를 쳐놓고―근본적인 데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나오게 하는 지점에 변화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점을 생각할 때, 문제는 미학적인 ‘실험’이 아니라 문학적인 감수성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데 놓여 있다고 봅니다. 그 변화가 아직 미미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문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소위 모더니즘 시를 비판적으로 논할 때 곧잘 동원되는 ‘자의식의 과잉과 실험에의 유희’라는 진단에서, 저는 ‘과잉’과 ‘유희’에서 불편함을 느끼기보다는 ‘자의식’과 ‘실험’에서 모종의 피로감과 함께 진부함을 느낍니다. 오늘날 문학적 지평의 변화를 말하면서 실험의 시대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미적 실험의 시대는 이미 지나왔고, 이제는 실험 자체가 패러디되고 있을 뿐이라는 판단조차 듭니다. 실험의식과는 무관하게 시적 주체와 세계가, 그 감수성이 변화하는 지점을 느끼는데, 그 부분이 비록 크게 보이지는 않지만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시 비평에서 ‘균열’이라는 말은 문제적인 만큼 흔하게 쓰이는 말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먼저 짚어두고 싶은 것은 균열의 유무가 아니라, 균열을 대하는 태도 혹은 균열을 사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지금까지 대체로 자아의 균열은 존재론적인 회의와 고통과 절망과 함께 지각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통합되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현재는 그렇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시인의 회의와 고통은 파편화된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통합의 기억을 가지고 사는 한 가지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경우에 통합은 균열의 기원이자 염원으로 설정됩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균열을 통합에 앞서는 것으로 감각한다면, 다시 말해 균열을 존재의 자연으로, 통합을 의지와 타협과 기만의 산물로 간주한다면, 균열은 고통스러운 자의식 없이 해방의 에너지와 함께 표출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적 실험을 추동하는 부정의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감수성의 변화에서 균열을 대하는 태도나 균열을 사는 방식의 차이도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 : 우리 문학의 근본적인 형질이 변하고 있는 것, 기존 시의 토대인 시적 주체와 동일성 미학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는 진단이신데요. 모더니티의 피로와 실험은 끝났다는 말에 대해 평론가로서 엄경희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엄경희 : 모더니티의 피로는 시를 쓰지 않고 문학의 장(場)을 떠나서도,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견뎌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의 실험은 끝났다는 말에 대해서는 유보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김행숙 : 제 말이 좀 과격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실험보다는 더 근본적인 층위에서의 변화가 현재형인 시의 변화를 짚는 데 있어서 핵심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균열은 현대시의 전제


사회 : 용어상의 차이인 듯합니다. 김행숙 시인은 수사로서의 실험은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시고, 엄경희 선생님은 새로운 감수성의 변화도 실험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 실험은 끝나지 않을 모험이라는 의견이신 거지요. 그럼, 이야기의 대상을 구체적인 작품과 시인으로 좁혀 보겠습니다. 시와 시인을 분류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지만, 논의를 진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 시에는 크게 두 경향이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선우, 나희덕, 문태준, 박형준, 손택수 시인 등으로 대표되는 서정?자연?동일성의 미학으로 수렴되는 경향과 김언, 김행숙, 이민하, 황병승, 김민정 시인 등으로 대변되는 문화?문명적 상상력, 실험, 환상, 자의식, 타자성의 미학 등으로 수식되는 경향이 그것입니다. 이런 상반적인 지향성의 공존에 대해 당사자인 시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손택수 : 『장자』의 「천지편(天地篇)」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마을 노인이 웅덩이에서 손으로 물을 퍼올려 채소밭에 힘들게 물을 주고 있었는데, 자공이 지나가며 용두레라는 기계가 있는데 왜 힘들게 손으로 물을 주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기계에는 기심(機心)이 있어 도(道)를 지키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용두레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쓰는 마음이 부끄러워서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 시대의 시인들에게서 문명적 조건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읽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나누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은 모두를 끌어안고 나아가는 존재이고, 자공 쪽도 노인 쪽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자공과 노인의 분열을 기록하는 제3의 눈에 가까운 존재가 아닌가 싶어요. 어느 한 단면만을 도려내서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드러난 현상의 이면들을 보면 섬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시적 지평을 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분법적인 분류가 무의미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엄경희 : 그렇게 많이 벌어지고, 스펙트럼이 넓어졌다면 거기에는 중요한 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개인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넘어서서 사회?문화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운동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때, 벌어진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분류한 시인들이 모두 나름대로 우리 시대의 균열을 끌어안고 있다고 해도, 그 방식은 분명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이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손택수 시인은 독자로서 김행숙 시인이나 김언 시인의 시를 읽으면 어떠신지요? 


손택수 : 저는 문청 초창기에는 시 잡지를 뒤에서부터 읽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앞에서부터 읽었습니다. 그때는 고전에 대한 믿음이 강했습니다. 요즘은 중간부터 읽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생각한 것은 시 읽기의 피로감을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권의 시 잡지를 읽고 좋은 시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에 대한 피로감은 어느 쪽이든 공동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사회 : 우회적으로 대답해주셨는데요. 손택수 선생님이 시 읽기에서 피로감을 느끼신다면, 조금 전에 김행숙 선생님은 자의식이나 실험에 대해 심리적인 저항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평자나 독자들은 김행숙 시인의 시에 그런 수식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어떠신지요?


김행숙 : 시를 쓰면서 심각하게 부딪혔던 첫 번째 문제가 1인칭 ‘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1인칭의 세계가 대변하는 고백의 감수성과 진정성에 대한 회의가 있었고, 또 지겨움 같은 것이 있었던 거죠. 그것은 인칭이나 화법에 대한 실험의식 이전의 문제였습니다. 말하자면 몸에서, 감각의 차원에서 어떤 거부 반응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단순히 1인칭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고백의 욕망과 연루되어 있는 1인칭 화자를 통해 발언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인칭의 문제가 제 고민의 표면에 떠올랐지만, 이제는 1인칭 ‘나’ 바로 그 자체가 제가 부딪혔던 문제의 본질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문학 초창기의 잡지들을 꼼꼼하게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1920년대 초기의 동인지들인데요, 그것들은 제게 미학적인 흥미가 아니라 자료더미에 가까운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이것들을 가지고 근대적인 의미의 문학 자체가 만들어지던 현장을 재구(再構)하여 논문을 썼습니다. 책으로 꾸리면서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문학이란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 다시 말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는 그 기원의 역사성을 표시하고, 내가 있는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거리감을 표시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문학적인 것’의 역사적인 기원을 들여다보면서, 문학의 죽음이라는 풍문을 문학의 이동과 탄생이라는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었습니다. 1800년대의 문학 개념과 1920년대의 문학 개념의 차이를 놓고 본다면, 문학에 대한 새로운 관념은 아직은 주어지지 않은 역사 속에나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 역사를 살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회 : 공부하면서 획득한 근대문학의 근본 조건에 대한 생각, 역사적인 변화에 대한 성찰과 자각이 김행숙 시인의 시세계에 원동력이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자의식의 과잉을 싫어한다는 말에서 자의식은 ‘자기’를 의미하는 것일 텐데요, 자기를 탈각시키는 형태로 자기를 드러내는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김행숙 시인의 시적 방법인 듯합니다.


김언 : 저 역시도 공원이 좋고 나무가 좋고 초록이 좋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멀어 보이는 쪽은 인터넷 게임에 열중하는 프로게이머나 그 게임을 열광적으로 중계하는 프로그램 진행자들인데, 그들의 표정을 보면 이상하게 저하고는 다른 인간들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인간의 본질적인 태생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마음의 위안은 자연에서 더 많이 받는 게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좋다고 생각한 자연을 어떻게 말하느냐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인들 개개인이 그 말하는 방식을 저마다 다르게 갖는 것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토를 달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자연시 혹은 생태시라고 부르는 시들을 앞세워서 논리를 펴나가는 담론이 전적으로 온당한가 하는 점입니다. 뭔고 하니, 가령 ‘저 나무가 이렇게 더운 날에도 땡볕에 서 있는 이유는 제 자식과도 같은 열매를 익히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꾹 참고 견디는 거다’와 같은 문구를 생태담론에 기댄 평자들은 어김없이 생태시의 전범처럼 내세워서 자기들의 논리를 펴나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용이 아니고 말하는 방식에 있다고 저는 봅니다.

이 문구가 말하는 것이 어떤 둥근 세계관, 자연이 가지는 모성본능이나 희생본능 같은 것을 일깨우는 내용이라면, 그 내용만으로 하나의 생태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내용이 아무리 좋더라도 말하는 방식이 폭력적이라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어느 누구도 남에게 규정되려고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예로 든 문구는 분명히 어느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기 식으로 규정해버리는 말입니다. 그것처럼 심한 폭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입장을 바꿔놓고 자기를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규정해버린다면 어떨까요? 때문에 과연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자연의 의미를 되새기는 유일한 방식인가, 생태시의 전범인가 하는 점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습니다.

자연시든 생태시든 자신이 보는 시각이나 느낌 등을 한 번쯤 의심해보는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이나 균열의식은 이미 현대시에서 기본적으로 장착되어야 하는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즉, 자기 안에 여러 시선을 두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막연히 ‘나와 같다면’ 식으로 목소리만 높여 동일성의 미학을 내세우는 시는 한 번쯤 재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를 쓰는 시인들을 거부하거나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저와 다른 입장에서 자신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존중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못마땅한 점은 좀더 섬세하게 논리를 펼쳐 나가야 할 평자들이 어떤 지점에선 너무 거칠게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말하는 방식에 상관없이 따뜻한 자연을 이야기하면 무조건 생태시거나 자연시고, 그걸 한 걸음 물러서서 의심해보는 것은 과도한 자의식이라고 매도해버리는 태도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쪽과 저쪽을 나누더라도 좀더 섬세한 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계속〉


추천 콘텐츠

육지에서 쓴 일기

[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