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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 작성일 2005-09-22
  • 조회수 5,664

 

‘자연과학적’ 인식과 시적 인식

 

사회 : 시인으로서 자연을 보는 시각에서부터 최근 비평의 문제점까지 날카롭게 비판해주셨는데요. 자연을 시의 주된 자산으로 삼고 계신 손택수 시인께서는 김언 시인의 자연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손택수 : 제가 체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싶었고, 내 안의 많은 타자성을 경험하고 있으므로 나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세계에 대해 잘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자기를 둘러싼 공간으로 축소해서 자기 화자를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하늘이나 땅, 혹은 우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생태시만 하더라도 그렇지요. 시가 자신에 대해서만 잘 얘기하면 생태성은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 시인들이 이야기하는 자연이란 문명화된 자연 혹은 인위적인 손길이 닿은 자연에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자연 그 자체는 차라리 공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 시인이 자연이나 생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소재 선택을 지나치게 확장해서 무조건 자연친화적인 시인으로 낙인찍는 것은 다시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엄경희 : 생태시만 놓고 보면, 시 창작 이전에 생태적인 생각을 깊이 있게 가지고 살아가는 시인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생태시는 실천과 맞물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인으로서 생태적인 마인드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분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김언 : 엄경희 선생님 말씀에 충분히 동감합니다. 그리고 기왕의 자연시나 생태시 담론에 한 가지를 덧붙여서 얘기하자면,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도 있듯, 자연은 인자하기만 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따뜻한 면, 둥근 면, 포용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라 태풍이나 지진처럼 때로는 무자비하고 때로는 폭압적인 자연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시에서는 자연의 일면만을 너무 강조하는 듯합니다. 어머니 같은 자연만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죽음까지 챙겨가는 무자비한 자연도 얼마든지 있는데도 말이지요. 그만큼 자연 하나에 대해서도 시각이 다양하지 못하다는 판단이 듭니다. 가령, 왜 우리 시에는 자연에 기댄 시는 많아도 자연과학적인 감수성을 지닌 시는 드문가 하는 생각도 같이 따라붙습니다.

현대 문명을 말하면서 과학을 빼놓고 얘기하기가 힘든 것이 엄연한 사실인데도, 애써 그 사실은 무시해버리는 태도가 많이 보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시의 경우에는 철 지난 과학적인 사실을, 그래서 거의 상식이나 다름없는 사실을 마치 시적인 발견인 양 버젓이 끌어와 쓰기도 합니다. ‘저 별빛이 내 눈으로 들어오는 데도 몇 억 광년이 걸렸다’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과학도 아니고 시도 아니고 그저 상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과학과 시가 결합된 첨단의 자연시인 것처럼 포장되어 나오기도 합니다. 이제는 과학에서조차 뒤집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과학 상식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시에 끌어다 쓴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과학을 무시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과학의 뒤꽁무니만 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중간하게 과학 상식에 기대지 말고 완벽하게 맨눈으로 보든가, 아니면 좀더 많은 공부가 누적되어 나오든가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시든 과학이든 언제든지 상식을 뒤집어엎는 데서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완벽하게 맨눈으로 보는 연습과 치밀하게 공부하는 자세가 같이 따라주어야겠지요. 그럴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자연시, 혹은 자연과학적인 감수성을 지닌 시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엄경희 : 재미있는 발상이지만, 과학은 근대인들의 불안을 견디게 했던 대일밴드와도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과학적인 발상과 시가 만나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시인들이 과학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가 객관적인 영역을 벗어나는 것에서 그 가치를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발상이 어우러져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면 좋겠지만, 근본적으로 과학적 상상력과 시적 상상력, 이 두 가지의 목표는 서로 다릅니다. 하나는 객관적 진실을 밝혀내는 것에 있고, 하나는 그것을 뛰어넘는 주관적인 것에 있습니다. 출발은 같을지라도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언 : 자연과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적 감수성, 혹은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때문에 시와 전혀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과학도 하나의 문화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관적인 개입이 많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시각이 바뀌면, 그래서 패러다임이 바뀌면 객관적인 사실도 변합니다. 시든 과학이든 둘 다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과학적인 감수성도 지금 우리 시에서는 한데 묶어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과학자가 곧 시인이고 정치인이었던 이유도 거기서 멀지 않을 것입니다.


김행숙 : 문학에서 과학적 상상력은 새로운 의미에서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S.F.적인 상상력은 근대적인 과학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의문에 붙이고 해체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시에서도 S.F.적인 상상력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고 상대화하면서, 현실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다양하고 새롭게 환기할 수 있는 지점들을 개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미래라는 시간과 우주라는 공간이 설정되면 현재와 지구는 상대적인 것이 되는데, 이 지평에서 우리는 ‘외계인’의 시선과 같은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독법이 필요한 시대


사회 : 그 작업은 최근 소설 쪽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지구’와 ‘외계’를 상상력의 동력으로 삼는 박민규가 그 대표적인 예지요. 손택수 시인의 말씀처럼 인간에게 백퍼센트의 자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도 언제나 자연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문화?문명 속에서 바라본 자연을 노래해 왔는데요. 그런 자연을 노래하는 일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는 시인과 평론가 모두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김언 시인의 문제적인 제안, 즉 우리 시대 문명의 성과인 자연과학의 견지에서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적 방법에 대해 엄경희 선생님은 시적 상상력과 과학적 상상력을 분리해야 한다고 지적해주셨고, 김행숙 시인은 이것이 세계를 바라보는 상대주의적인 시선, 탈인간적인 시선과 연결되어 상당히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지지해주셨습니다.

이야기의 선들이 점점 팽팽해지는 느낌인데요. 이제 최근 시에 대한 비판적 진단과 우리 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공유해 보았으면 합니다. 논의를 위한 이분법적 구도, 즉 자연의 가치와 상상력에 충실한 시들과 문화?문명?환상?가상을 탐착하는 시들의 두 경향에 대한 시단의 비판이 만만치 않습니다. 전자의 시들은 섬세하고 미학적이며 공감력이 크지만 현실사회와의 연관이 부족하고, 후자의 시들은 특이하고 신선하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시인의 자의적인 기호나 암호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평론가 김진수 선생님은 전자의 시들을 비판하면서 ‘미학적인 자살’이라는 용어를 쓴 바 있고, 이장욱 시인은 “우리 시대에 서정시는 끝났다.”고 하면서 “황병승의 시를 서정시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권혁웅 선생님은 후자의 시들이 기존의 시 독법으로 포착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시라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과 진단에 대해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요?


엄경희 : 자연과 관련된 시인들에 대한 ‘현실과 유리된 미학적 자족’이라는 지적은 비판적인 이야기인데, 우리 문학에서 현실과 유리된 미학적 자족이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그러한 현상이 있었다면 오히려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근대문학사에서는, 극단적으로 말해 미적 자율성이 형성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문학사적으로 불행한 일이지요. 유미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질타, 시의 쾌락적 기능에 대한 무관심, 시 정신의 명랑성에 대한 냉소적 반응이 이런 경향과 관련이 있습니다. 현실반영적인 태도의 유무로 예술을 판단하는 것이 온당한 잣대인가에 대해 저는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학적인 자족과 현실반영적인 것이 표면적으로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술을 발전적 국면에서 보면 서로 상보적 역할을 합니다. 그간 ‘미학적 자족’이라는 말이 늘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토대가 만들어진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극심하게 미학적인 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정적 기반이 강한 시인의 경우에는 현실과의 연관성 여부가 아니라, 시의 문법이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분들의 문법이 안정을 넘어서 고착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 더 부연하자면, 서정시의 경우 내면을 위로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철학적 토대와 만날 수는 없는가, 깊이 있는 사유로 서정을 밀고 갈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 늘 문제점으로 남습니다.

두 번째의 경우, 즉 문화, 문명, 환상, 가상의 지점에 있는 시인들에 대한 ‘자의식의 극단적 과잉’이라는 지적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자의식의 극단적 과잉은 존재론적인 조건이 그런 과잉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의식의 과잉이 극대화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를 읽을 때 괴롭긴 하지만, 이런 자의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개체성에 대한 인식론적 성숙과 관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군의 시가 자의식의 과잉을 노출하고 있다면, 도시를 기반으로 한 삶이 불안하고 초조하며 ‘나’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히려 끝까지 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이 좌담이 지금 두 가지 문제의식을 암묵적으로 공유하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근대문학 전체에 대한 문학사적 문제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시에 대한 진단을 표면에 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의식입니다. 엄경희 선생님께서도 이를 바탕으로 두 경향의 시들이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현대 문명의 존재론적 조건 속에서는 서로 만난다고 판단하신 후, 각각의 시에 독자적인 치열함을 주문하신 거라고 봅니다.


손택수 : 엄경희 선생님의 말씀에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그런데 문태준 시인의 경우를 보면, 안정된 문법을 구사하고 있지만 다른 면모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발표작 「번져라 번져라 病이여」 같은 시를 보면, 이 시를 과연 미학적 자족으로서의 닫힘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싶어요. 오히려 자신의 시에 대한 반성이 끝없이 개입하고 있거든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우연에 열려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리고 현실과 유리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언뜻 수긍이 가질 않습니다. 그는 저물녘 스러진 풍경을 노래하는데 시적 현실이 압축되고 상징화되어 있으며, 구론(口論) 형식을 통해 문명적 조건으로부터 밀려난 삶의 아픔과 쓰라림을 동시에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에는 감추고 있는 것도 보아야 합니다. 미적 완결성이 높은 시들에 대한 괜한 혐의는 사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요. 


김행숙 : 이장욱 시인은 서정시의 균열과 서정이 환기되는 방식의 차이를 섬세하게 짚어내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서정/실험, 자연/문명, 동일성/타자성 등등의 용어로 계열화되는 이분법 논리 속에서 ‘서정시’의 함의가 오히려 협소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장욱 시인은 ‘서정시’를 거의 ‘시’와 같은 심급에 놓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의 표면이 아니라 심층에서,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환기되는 서정에 주목하면서 소위 ‘다른 서정시’들을 ‘서정시’의 스펙트럼 내에 배치합니다. ‘서정’의 환기가 그들 미학의 성패와 어느 정도 관계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생산적인 논제였다고 여겨집니다. 권혁웅 시인은 읽어내고자 하는 비평적 욕망이 강해 보입니다. 근래에 부쩍 비평가들이 시 읽기에 대한 괴로움과 곤혹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에게는 비평적인 도전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새로운 시를 제출한다는 것은 동시에 새로운 독법을 요구한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경희 : 최근의 ‘새로운 시’들이 저로서는 읽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쉽게 읽히는 문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김행숙 : 세대론을 넘어서 소통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식으로 그 길을 찾아서는 안 될 테지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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