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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3)

  • 작성일 2023-12-01
  • 조회수 971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는가 (3)


송종원


   1. 문제는 나르시시즘이 아니다. 


   1회 차로 다시 시선을 돌려보자. 그때 말해두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이근화시의 기묘한 나르시시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나인 듯

   어느 맑게 개인 날에

   시금치를 삶고

   북어를 찢는다


   골목마다 장미가 피어나고

   오후에는 차를 마신다

   어느 맑은 날에는,


   낮잠을 자고

   어김없이 목욕을 하고

   나는 또 나인 듯이

   외출을 한다


   나는 나에게 다 이른 것처럼

   클랙슨을 울리고

   정말 나인 것처럼

   상스럽게 중얼거린다


   국부적으로 내리는 비,

   어느 날엔가 나는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빗방울은 말없이 떨어진다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손등을 어깨를 훔쳐본다


   -「지붕 위의 식사」 전문1)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른하게 쓰인 인상이다. 낮잠을 자고 목욕을 하고 외출을 하고, 그러다 간혹 욕설도 하고, 어딘가 스스로에게도 조금은 낯선 나의 모습에 집중 내지 도취되어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설명하기에 꽤 그럴듯한 ‘나’처럼 보인다. 만끽까지는 아니지만 나에 심취된 정황이 꽤나 선명하다. 그런데 이를 나르시시즘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성별이 누구의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정 성별에 대한 세계의 압박을 몰라 볼 때 자아의 빈곤 상태를 자아의 도취로 읽는 일이 벌어진다. 약간 우회하자면, ‘내’가 아니라 이 시에 쓰인 ‘날’에 대해 우선 주목해보자. 이 날은 어떤 날일까. 시에는 그에 대한 구체적 정황이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반복되는 ‘어느 맑은 날’이라는 표현은 어딘가 특별한 날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 날은 내가 나에게 이를 수 있는 일이 특별히 허용된 날인 듯하며, 나의 생의 국부적인 날이고, 남의 몸이 되어가는 듯한 나의 몸을 감각하면서 나를 돌볼 수 있는 날이다. 거꾸로 다시 풀자. 평소 대부분의 나날은 내가 나에게 이를 수 없으며, 나를 돌보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자아를 버리기를 요구받는 환경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시의 화자를 한국사회의 20-30대 여성 정도로 간주해보면 우리는 의외의 진실을 마주한다. 한국에서 여성의 노동 생애를 비추어볼 때 젊은 여성들에게 일터는 점점 커지는 자기 소멸의 느낌을 맛보는 장소이다. 


   일터라는 공적 영역은 오랜 기간 남성이 정의 내리고, 남성이 지배하고, 남성의 권익을 유지해온 장소였다. 근대 자본주의가 확장해낸 수많은 일터에서 여성은 불청객 취급을 받았고 자신의 ‘여성성’을 쩔쩔매며 관리해야 할 무엇으로 인식하게 된다.2)


   같은 글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주류 남성성을 상상할 때 15세 소년을 기준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성에 부착된 고정적 이미지는 한참 미성숙한 여성성을 그 본질로 설정하고 있다”3). 이제 우리는 비로소 저 시에 쓰인, ‘내가 나인 듯’이라거나 ‘내가 나에 이른 듯’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휴식을 취하는 특별한 날에만 나에게 이르는 듯한 느낌을 회복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나에 대한 소멸감에 당연한 것으로 내면화하지 않고 그로부터 이탈해 자신에 이르는 길을 재차 확인하는 이 시의 화자에게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자기도취적 느낌이 아니라, 자기 발견적이거나 자기 구제적인 시도이다. 어딘가 모호하게 읽히는 이근화의 시에는 젠더는 물론이거니와 노동과 계급 같은 요소들을 의식하여 서사화할 때 비로소 또렷하게 잡히는 세계가 그려져 있다.


   스킨헤드 族이었고 샤넬의 새로운 모델이었던 그녀가 로마 카톨릭에 귀의하여 사제의 발걸음을 배울 때, 일요일의 종소리는 열두시와 여섯시에 한 번


   나는 이 형식을 벗어나서 휴식을 취할 수 없다


   독일 식 화이버를 쓴 남자는 일 초 전이나 일 초 후의 내 자리를 지나고 휘파람을 씨익 불지만 저기 멀리 달아나는 오토바이의 시간


   오토바이는 오토바이의 형식으로 달리고

   모래는 모래의 날들 위에 반짝인다


   누군가 목격하였다고 해도 나는 같은 형식으로 잠들고 멀지 않은 곳에서 사제는 사제의 발걸음을 옮긴다 종소리는 열두시와 여섯시에 한번


   -「피의 일요일」 전문4)


   이 시에는 ‘그녀’의 삶과 ‘남자’의 삶 그리고 ‘나’의 삶이 그려져 있다. 반항적 이미지에 인접해 있다가 금욕적인 사제의 모습으로 변화하기까지 하며 무한하게 존재의 변신을 꾀하는 그녀와 이국적 화이버를 쓰고 초국적 자유의 이미지를 구사하는 남자의 삶의 형식은 어떤 장애도 거침도 없어 보인다. 그들은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경계를 넘어서 언제든 제한 없는 변신이 가능하며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듯하다. 반면에 같은 시간대와 공간 속에 사는 나의 삶은 휴식조차 특정한 형식으로 구속되어 있다. 내 삶은 어떤 눈으로 보아도(“누군가 목격하였다고 해도”) 빤히 보이고 별다른 유동성이 없는 형식에 가깝다. 가령, 일요일 열두 시와 여섯시 사이에서만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누군가의 오토바이처럼 날렵하게 그 시간을 통과하며 다른 곳으로 질주해버리는 것이 불가능한 삶. 이런 삶은 앞선 그녀나 남자의 삶과는 달리 선택적이라기보다 불가항력적으로 보이며 다양한 문화적 외피를 소비하는 자리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다양한 문화적 형식을 취하는(소비하는) 삶들은 삶의 다양한 우연을 긍정하기 쉽지만, 냉정하게 말해 그런 긍정은 특정 인종 내지 경제적으로 여건이 보장된 계층에 한해서만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시를 해석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일은 시의 실질과 좀 어긋나 보인다. 


   “이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시는 이근화의 다른 시가 그렇듯이 선형적인 서사로 재편되기 이전에 이미 매혹적이다. 이 매혹은 어디서 오는가. 그녀는 우연을 필연의 목소리로, 필연을 우연의 목소리로 말한다. 위의 시는 우선 생의 우연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 ‘그녀’의 인생이 세 번 크게 변한 것도, ‘나’의 일요일이 오토바이 사고로 얼룩진 것도 삶의 신비로운 우연이다. 그래 우리는 우연하게 산다.”5)


   생의 우연성을 인식하고 노래하기에는 저 시의 화자는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세계의 완강한 질서에 민감하다. ‘나’는 삶의 신비로운 우연을 겪고 있기보다 자신도 태어나기 이전에 결정되어 있는, 혹은 자신의 젠더적-경제적-인종적 배경에 따라 확고하게 제한된 삶의 형식들에 절망 내지 환멸을 느끼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런 진술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세대의 많은 시들에는 ‘나’가 없다. 그들은 자명한 ‘나’를 지우면서 미지의 ‘나’를 찾아간다. 자아의 나르시시즘을 넘어 점멸하듯 출현하는 주체성의 영역을 탐험한다. 더불어 타인의 타자성을 동일화하는 서정적 메커니즘을 거부하면서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위해 방법적 갈등을 격렬하게 실험하고 있다.6)


   새로운 세대의 시에도 ‘나’가 있었다. 물론 그 ‘나’는 자신의 자명함을 손에 쥐고 바로 시에 등장한 나는 아니다. 쓰는 동안 나를 다시 발견하지 않는 시는 미래파로 묶든 전통 서정으로 묶든 좋은 시가 아닐 것이다. ‘자명한 나’와 ‘미지의 나’라는 구도나, 자아와 주체의 이분법은 설명이 용이한 도식이기는 하지만 그 도식을 말하는 사이 ‘나’와 관련한 실질적 삶의 요소들이 덜 살피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비평은 ‘진짜 나’와 ‘가짜 나’의 구도를 짜는 일보다는 ‘나’가 포박되어 있는 현실적 요소와 계기들을 선명히 드러내는 일을 훨씬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면밀히 감각하기 위해서 시인의 입장에서는 나에 집중된 시간과 나의 특별한 처지를 들여다볼 시선이 충분히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문제는 ‘타자와의 만남’도 아니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내가 적극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타자의 상을 보여주며 그들과 만나라고 독촉한다. 「피의 일요일」에 등장하는 ‘그’와 ‘그녀’의 삶의 형식이야말로 타자의 상을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자들의 모습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내용은 어떤 타자와 어떤 국면 속에서 만나느냐는 분석이다. 이근화 시의 매력은 ‘점멸하듯 출연하는 주체성’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주체성과 연결된,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나의 자리에 대한 발견과 고백. 이 튼튼한 사실들의 지대 위에서만 주체는 점멸하듯 출연하는 순간을 맞이하고 또 자신의 삶과 충돌하는 타자들을 감지할 수도 있다.   



   2. 미래파 논의에서 빠져 있었던 것들


   그러고 보면 미래파 담론이 한창일 때 그 이야기 속에 잘 발견되지 않았던 화소(話素)들이 있다. 다시 상식적이고 흔한 질문을 던져본다. 미래파 논의 속에는 노동이나 계급과 관련한 이야기가 풍부하게 말해진 경우가 있었던가. 앞선 장에서 다룬 이근화의 시처럼 노동 내지 경제와 연관된 사항이 말해질 때 비로소 뚜렷하게 파악되는 시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해석의 서사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를 간접적으로 매개하며 미래파 논의의 내용이 지닌 협소함을 암시했던 글이 있다. 미래파 논의가 한창이던 시기,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에서 ‘다른 서정’이라는 말로 새로운 시들의 세계를 조망하던 이장욱은 글의 말미에 갑자기 진이정의 시를 인용하고 설명한다. 


   “이 시는 압축과 절제, 그리고 말의 정교한 활용 같은 서정시의 관습을 온전히 무시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저 파편적인 내면성(들)은 분별없이 쏟아져나와 기약없이 섞여버린다. 맥락을 무시하고 의식의 흐름에 의지해 문장들을 병치하는 것은 가장 손쉬운 시작법(詩作法)일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저 혼돈스러운 화자의 지껄임을 '새로운 서정'의 모범적 사례로 제시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7)


   “혼돈스러운 화자의 지껄임”이나 “서정시의 관습을 온전히 무시한 자리”라는 표현들에서 미래파로 불리던 시들과 유사성을 띤 세계의 그림자가 보인다. 그렇지만 문학사적 탐색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2000년대의 새로운 시를 말하는 과정에서 10년 전인 90년대 초의 시점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생각하면 좀 의아한 부분이다. 아마도 부득이하게 진이정을 호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다. 


   "내 서정의 목은 늘 쉬어 있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징적이다. '목쉰 서정'이야말로, 일상어와 시어의 사이, 관례와 새로움의 사이, 개인과 사회의 사이, 현실과 희망의 사이에 개입하여, 그 만상의 곡절 들을 가장 시적으로 반영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8)


   목쉰 서정의 기능을 ‘미래파’의 언어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3회 차에 걸쳐 다룬 시인을 떠올려보더라도 일상어와 시어의 사이는 김민정을 통해 이야기할 만하고, 관례와 새로움 사이는 김행숙이나 황병승을 거론할 수도 있다. 개인과 사회의 사이를 이근화를 매개로 이야기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물론 이근화의 자리를 김민정으로 바꾸어도, 김민정과 김행숙의 자리를 교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거론한 시인들의 시는 그들이 지닌 탄성과 유연함 때문에 저 사이에 개입하여 의미를 만드는 화소로 쓰이는 데 자연스럽다. 그런데 연쇄된 표현의 말미에 쓰인 ‘현실과 희망의 사이’는 어떤가. 말하기 주저하게 되는 면이 없지 않다. 당연히 이 말은 거론한 시인들의 시가 현실이나 희망을 가지고 말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뜻과는 무관하다. ‘현실’과 ‘희망’이라는 말이 너무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또 문학이란 거대한 이야기들과는 차별되는 것이라는 판단으로 인해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저 말을 문학과 더불어 말하는 자리를 회피하는 감각 속에 살지 않던가. 현실과 희망과 문학을 인접해두고 말하는 일에 겸연쩍은 느낌은 겪는 일은 예민한 일부 사람들의 문제일까. 


   미안해, 나는 성욕을 딱 잃고 말았다

   왜 사람들은 날 걱정할까

   순두부처럼 살고 싶었다

   말도 안돼

   지금부턴 너를 독점하리라

   랍비가 있는 풍경이 날 웃게 했다

   공동번역 성서를 읽고 있는 평양의 인민들,

   나는 수령이란 낱말을 찾아 레위기를 헤맨다

   누가 내 몸 안에서 섹스를 하나봐

   헐떡이는 소리, 세 살 이후부터 끊이지 않고 있다

   나를 사랑하는 헬리콥터 조종사가 머리 위에서 붕붕거린다

   그는 흑인이다

   편견이 곧 나다; 나를 버리기란······

   그를 쫒아주세요 외국 군대에 언제까지 의지해야 하나

   미국이 잘되는 이유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다 들어 있다

   나는 불타고 있는데, 아무데도 맞불은 보이지 않아

   미끼라도 물고 싶어

   결혼식장은 어물전 같아

   비리지 않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

   기고 싶다, 비비고 싶다, 까고 싶다

   내 인생은 재즈라기보다 헤비메탈이다

   내 서정의 목은 늘 쉬어 있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2」 부분9)


   이장욱은 이 시를 인용하면서 다양한 계열의 언어가 충돌하고 갈등을 빚으며 다른 반성, 다른 잠언, 다른 정치학을 그려내고 있다고 적었다. 동의한다.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다양한 계열의 언어들의 지평이다. 아는 이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진이정은 미군 부대 근처에서 유년을 보낸 시인이다. 그의 「엘 살롱 드 멕시코」란 작품이 이를 잘 보여준다. 세 살 이후부터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헐떡이는 소리, 편견을 반성하게도 하는 그 흑인 병사의 소리는 이 유년의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한국의 영토이지만 치외 법권 지역이기에 그곳의 폭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종류의 것이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미군 부대가 상주하는 지방의 모습은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역사 속 용산 인근의 모습보다 더 충격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나의 편견일까). 

   분단이 불러온 폭력적 현실의 깊은 경험 속에서 시의 화자는 다양한 질문과 상상을 이어나간다. 외군 부대의 상주 이유에 대한 질문이 제국주의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고, 그 제국주의가 제공한 대중문화에 사로잡혔던 자신의 정신에 대한 반성을 불러오는 듯하더니(“미국이 잘되는 이유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다 들어 있다/ 나는 불타고 있는데, 아무데도 맞불은 보이지 않아”), 동시에 제국적 힘에 억눌리고 남성중심적인 현실세계에서 이중의 피해자가 된 여성의 자리에 대한 생각을 은연중에 풀어놓는다(결혼식을 어물전으로 비유하는 과정 속에는 미군부대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미군을 상대로 한 성노동 여성의 삶에 대한 연상이 작용했을 것이다). 상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북한의 질서에 대한 의구심과 그것의 파탄에 대한 이미지까지도 같은 시의 자리에 회집시킨다(“공동번역 성서를 읽고 있는 평양의 인민들,/ 나는 수령이란 낱말을 찾아 레위기를 헤맨다”). 제국주의적인 자본주의 세계 질서와 그것에 연동되어 있는 분단 현실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문화적 종속과 젠더 폭력, 그리고 비합리적 정치체제의 문제에 대한 질문까지, 이 시가 다루는 스케일은 꽤 큰 편이다. 그러다보니 ‘현실’이란 말을 동반해서 이 시의 서사를 푸는 일은 크게 어색하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스케일의 크고 작음을 가지고 작품의 우위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어로 만들어진 시의 공공영역이 협소한 것은 분명 문제로 삼을 만하다. 구체적으로 말하기와 더불어 막힌 말문을 여는 역할을 하는 일이 문학의 소임임을 우리는 안다. 그러니 더 드넓은 시의 나라를 만드는 데 있어 장애가 되는 관습적 사고와 문제들을 고민해야한다. ‘미래파’ 담론의 가치는 우리의 시가 드디어 어떤 말문을 열었는가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이때 ‘어떤’이란 표현에는 형식과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을 텐데, 지난 논의들을 다시 읽어보니 형식에 대한 집중 속에서 내용의 측면이 다소 덜 치밀하고 약간은 협소하게 논의된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미래파로 분류되던 시들이 형상화한 세계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세계에 미쳐 포착되지 않은 현실의 지형과 목소리가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전망을 얼마나 품고 있었는지를 충분히 말했는가. 마지막으로 시의 언어가 더 큰 정신의 원(願)을 그려내길 기원했던 한 시인이 60여 년 전에 쓴 산문 일부 대목을 옮기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려 한다. 


   두치 앞의 모이만을 보고 일평생 쪼아 다니는 닭의 정신을 가리켜 소원(小圓)이라 한다. 눈과 모이와의 두 치 간격을 직격으로 하여 한 바퀴 돌려 그린 원이 즉 그 닭의 정신의 크기이다. 문명에 관습되어 온 소위 현대식 지성인이라고 불리워지는 소시민들의 정신적 둥근 원은 고층건물과 고층건물 사이의 거리를, 숙소와 직장과 오락장과의 사이를 또는 서명(書名)과 인명(人名)과 개념과 개념과의 정신적 거리를 직경으로 하여 돌려 그린 원의 크기와 동일하다.10)


   시는 당연히 작은 원의 바깥으로 나아가야 한다. 눈앞에 포획하기 쉬운 문제와 더불어 아직 특정한 지식에 사로잡힌 의식의 눈에 선명히 잡히지 않는 문제까지도 언어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현대식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주체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서구 중심의 서명과 인명과 가치의 맥락으로부터도 벗어난 길을 살필 필요도 있다. 그리고 이 문제의식은 지난번 2회 차 글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과도 무관하지 않다.〈끝〉


1) 이근화, 『칸트의 동물원』, 민음사, 2007, 30-31쪽.
2) 김현미,「내가 될 수 없는 나의 일터에서」, 『흠결없는 파편들의 사회』, 봄알람, 2023, 63쪽.
3) 김현미, 위의 책, 67-68쪽.
4) 이근화, 앞의 책, 13쪽.
5) 신형철, 「시적인 것들의 분광(分光), 코스모스에서 카오스까지」,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9, 267쪽.
6) 신형철,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 위의 책, 202쪽. 인용한 부분은 이근화의 시를 분석하면서 쓴 표현은 아니다(황병승과 김민정을 분석하는 과정에 나온 언급이다). 하지만 소위 ‘미래파’로 불리는 시들의 특징을 설명하며 쓰인 이 문장은 이근화를 매개로 보더라도 재고할 부분이 많아 보인다. 물론 황병승과 김민정에게 해당하는 내용으로 한정하더라도 역시 재고가 필요한 대목이다. 이 연재의 2회 차글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7) 이장욱,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나의 우울한 모던보이』, 창비, 2005, 36쪽.
8) 이장욱, 위의 책, 38쪽.
9)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1994
10) 신동엽, 「시인정신론」, 『신동엽 산문전집』, 창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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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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